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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선기신(獨善其身)
홀로 자기 한 몸의 선만을 꾀한다는 뜻으로, 남을 돌보지 아니하고 자기 한 몸의 처신만을 온전하게 함을 말한다.
獨 : 홀로 독(犭/13)
善 : 착할 선(口/9)
其 : 그 기(八/6)
身 : 몸 신(身/0)
(유의어)
독선(獨善)
출전 : 맹자(孟子) 진심 상(盡心上)
원래는 곤궁할 때 홀로 선을 행하면서 자신을 수양한다는 긍정적인 의미였으나, 앞 글자 궁즉(窮則)을 빼고서 완전히 다른 뜻으로 쓰이게 됐다. 남이야 형편이 궁하든 말든 돌보지 않고 자기 한 몸의 편안함만을 꾀한다는 부정적인 의미로 변했다.
이 성어는 맹자(孟子) 진심(盡心) 上 제9장에 나오는 말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孟子謂宋句踐曰; 子好游乎? 吾語子游. 人知之亦囂囂, 人不知亦囂囂。
맹자가 송구천에게 일러 말했다. “그대는 유세하러 다니기를 좋아하시는가? 내 그대에게 유세에 대해 말하리라. 남들이 (유세하는 것) 알아주어도 또한 의연(毅然)하며(囂囂),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또한 의연해야(囂囂)할 것이오.”
囂囂 : ①시끄러운 모양 ②자득(自得)하여 욕심이 없는 모양 ③빈 모양, 공허한 모양 ④세상일을 근심하는 뜻이 있는데, 趙岐는 ②의 뜻으로 ‘마음에 만족하게 여겨 욕심이 없는 모양(自得無欲之貌)’이라 했다.
宋句踐曰; 何如斯可以囂囂矣?
송구천왈, “어찌하면 가히 효효(囂囂)할 수 있겠습니까?”
孟子曰; 尊德樂義, 則可以囂囂矣。
맹자왈, “덕(德)을 존중하고 의(義)를 즐거워하면 자연히 의연할 수(囂囂) 있소.
故士窮不失義, 達不離道。
그런 까닭에 선비는 어려워도(窮) 의를 잃지 않으며, 영달(榮達)하여도 도(道)를 떠나지 않는 것이오.
窮不失義, 故士得己焉;
達不離道, 故民不失望焉。
궁해도 의를 잃지 않으므로 선비는 자기 자신을 유지할 수 있고, 잘되어도 도를 떠나지 아니하므로 백성이 실망하지 않는 것이오.
古之人, 得志, 澤加於民;
不得志, 修身見於世;
窮則獨善其身, 達則兼善天下。
옛 사람이 뜻을 얻으면 은택이 백성에게 더해지고, 뜻을 얻지 못하면 몸을 닦아 세상에 드러내니, 궁하면 홀로 자신의 몸을 선하게 하고, 영달하면 아울러 천하를 선하게 하였소.”
(孟子/盡心上)
사람이 홀로 처지가 딱하고 외롭게 되었을 때 어떤 행동을 하게 될까. '군자는 혼자 있을 때 삼가고, 소인배는 한가할 때 착하지 못한 일을 저지른다고 했다(小人閒居爲不善)'. 대학(大學)에 나오는 글귀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삼가고 들리지 않는 곳에서 두려워 해야 군자라고 중용(中庸)에서도 가르친다.
홀로 있을 때 도리에 어그러짐이 없도록 몸가짐을 바로 하고 언행을 삼간다는 신독(愼獨)이란 말도 있다.
완전한 인격체라 자부할 수 있는 사람이 드문 오늘날 일반 사람들은 그저 마음을 닦는 좋은 말로 받아들이면 될 일이다.
맹자(孟子)는 같은 맥락으로 홀로 어렵게 되었을 때 의를 지켜야 한다는 이 성어를 남겼다. 진심상(盡心上)에 나오는 내용을 간단히 보자.
송구천(宋句踐)이란 사람에게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남이 자신을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자족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어떻게 만족할 수 있느냐는 물음에 맹자가 답한다. 덕을 존중하고 의리를 즐겁게 여기면 초연할 수 있다며 선비는 곤궁한 상황에 처해도 의를 잃지 않고, 출세해서도 도에서 떠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면 홀로 자신의 몸을 선하게 하고, 영달하게 되면 함께 천하 사람들을 이롭게 했다’고 덧붙인다.
窮則獨善其身(궁즉독선기신)
達則兼善天下(달즉겸선천하)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원래는 곤궁할 때 홀로 자신을 수양한다는 긍정적인 의미를 지녔다.
그런데 살아가는데 좌절과 실패, 일이 잘 안 풀릴 때와 맞닥치면 성인처럼 몸을 닦기가 어려워서인지 이 말의 앞 글자 궁즉(窮則)을 빼고서 완전히 다른 뜻으로 쓰이게 됐다.
남이야 형편이 궁하든 말든 돌보지 않고 자기 한 몸의 편안함만을 꾀한다는 부정적인 의미로 변했다.
⏹ 독서차의(讀書箚義)
대학(大學) 전(傳) 6장(章)
所謂誠其意者 毋自欺也 如惡惡臭 如好好色 此之謂自慊 故君子必愼其獨也.
이른바 ‘그 뜻을 성실히 한다’는 것은 스스로 속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나쁜 냄새를 싫어하듯 하고, 호색을 좋아하듯 해야 하니, 이를 두고 ‘스스로 만족스럽다(自慊)’고 이른다. 그러므로 군자는 반드시 혼자 있을 때를 삼가는 것이다.
小人閒居 爲不善 無所不至 見君子而后 厭然揜其不善 而著其善 人之視己 如見其肺肝然 則何益矣 此謂誠於中 形於外 故君子必愼其獨也.
소인은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 있을 때는 불선한 짓을 하되 하지 못하는 게 없을 정도로 하다가, 군자를 본 뒤에 시치미를 떼고 불선을 감추고 선만을 드러낸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폐와 간을 들여다보듯 보고 있으니 그렇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를 두고 ‘마음이 성실하면 밖으로 모습이 드러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반드시 혼자 있을 때를 삼가는 것이다.
曾子曰 十目所視 十手所指 其嚴乎.
증자가 말하기를 “열 눈이 보고 있고, 열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으니, 참으로 무섭구나!”라고 했다.
富潤屋 德潤身 心廣體胖 故君子必誠其意.
○부는 집을 윤택하게 하고, 덕은 몸을 윤택하게 하니, 마음이 여유롭고 몸이 펴진다. 그러므로 군자는 반드시 그 뜻을 성실히 하는 것이다.
맹씨(孟氏; 맹자孟子)가 세상을 뜬 뒤부터 유학(儒學)의 도(道)가 세상에 밝혀지지 않았으니, 단지 성의(誠意)의 공부가 전수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영웅이라고 불리는 사람들도 모두 천하를 차지하는 것을 이익으로 생각할 뿐 어찌 천하를 평안하게 하려는 마음이 있었던가.
그래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천하를 얻는 근본임을 알지 못했고, 이미 치국(治國)이 천하를 얻는 근본임을 알지 못했으니 어찌 조금이나마 집안을 가지런히 하는 데 마음을 썼겠는가.
제가(齊家)가 근본임을 알지 못했으니, 어찌 내 몸이 나라와 집안의 근본임을 알고 내 마음이 내 몸의 근본임을 알 수 있겠는가.
순경(荀卿; 순자荀子)이나 동자(董子; 동중서董仲舒) 같은 사람들은 대유(大儒)라고 제일 자처했고 정심(正心)이나 수신(修身)에 대해 의론이 있었지만, 언제 일찍이 ‘성의’ 두 글자가 우리 인간의 명문(命門; 명치)이고 탯줄이라는 것에 대해서 눈길이나 주었는가.
오직 증자가 공자의 종지(宗旨)를 이해하고, 천하의 만물을 한몸으로 여기며 천하를 평안하게 하고 나라를 다스려서 만물이 각각 자신의 자리를 찾도록 할 원리를 생각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나라의 근본이 되고, 집안의 근본이 되는 것을 미루어 몸에 이르렀다. 몸의 근본은 또 마음이기에 끝까지 미루어 정심에 이르렀으니, 지극하고도 극진하다. 또다시 마음의 전체(全體)와 대용(大用)을 꼼꼼히 관찰했다.
고요함을 주로 하고 움직임을 제어하는 지극히 미묘한 경지에 ‘성의’ 두 글자를 더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의(意)’ 자는 뱃속에 감추어져 몇 겹의 피부와 뼈로 덮여 있으므로 자신도 눈과 귀로 보거나 들을 수 없고 아내나 남편, 아버지와 자식 간에도 미처 알지 못하는 것이니, 다른 사람은 말할 것도 없다.
그 움직임은 지극히 미묘하여 발현되어도 현상이 없지만, 천지가 뒤집어지고 나라와 몸이 망하거나 죽는 기미는 단지 여기에 있다.
비유하자면 천 길 절벽 끝에 위태롭게 서 있는 것과 같으니, 비록 즉시 추락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조금만 기울어도 죽고 조금만 돌아서면 살 것이다. 이야말로 천지가 전율하고 귀신이 지켜보는 상황이다.
오직 진심을 가진 대장부만이 한쪽은 밑바닥 없는 구렁텅이를 보고 한쪽은 평온한 땅임을 실제로 보고 판단하여, 이를 악물고 눈을 부릅뜨고는 맹렬히 발꿈치에 힘주고 척추를 꼿꼿이 세울 것이다.
죽느냐 사느냐 절체절명의 순간에 몸을 돌려 실제 땅을 밟게 되면 충분히 백 년을 장수할 사람이니, 맹자 이상 몇몇 성현이 모두 이런 사람이다.
이럴 때에 더러 조금이라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마음이 들어 추락하지 않으면 그것으로 좋다고 생각하고, 또 어떻게 되나 보자 하는 마음에 한 번의 시도조차 구차하게 미루고 머뭇거린다.
그러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다리 힘이 빠져 점차 피로해지고 눈이 저절로 어지러워 홀연히 비껴 부는 바람에 부모가 애지중지 길러 준 8척 몸뚱이가 만 길 낭떠러지에 거꾸로 추락할 것이다.
뼈가 부서지고 살이 뭉개지며 혼백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 것이니, 예로부터 군자답지 못했던 사람들은 모두 이러했다.
공자 문하 70제자 중 누군들 정심(正心)을 말하지 않았는가. 오직 증자만이 여기(意)에 성실하지 않으면 정심에 나아갈 수 없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성의(誠意) 공부가 정밀하고도 더욱 정밀해지면 내 마음의 온전한 본체에 나아가 마음이 처음 발동되는 곳을 살펴 그 선(善)과 불선(不善)을 알게 된다.
성(性)이 발동되어 정(情)이 되고, 정의 실마리가 되는 것이 의(意)이다. 정은 형기(形氣)에 속한 것으로 성인도 없을 수는 없다.
다만 성인의 정은 형기에 속하는 것이라도 모두 이치에 마땅한 것이며 사사로움이 없는 까닭에 정도 순선(純善)하다.
보통 사람의 경우는 정에 선, 불선이 있다. 선은 해야 하고 불선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정이 처음 발동될 때는 몸속에 숨겨져 있어서 자기 혼자만 안다.
그 때문에 스스로 너그러워져 “불선한 일을 하지 않으면 좋은 것이지,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데 무슨 상관이랴.”라고 하면서 다시는 경계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으면, 사물이 형기에 하루에도 수만 번 접촉하므로 점점 선한 것은 적어지고 불선한 것은 많아지게 된다.
물(物)은 물과 만나면서 야기하고 의(意)가 의 때문에 자라나면 필경 마음에 하나의 진실한 선(善)도 없으면서 겉으로만 긍지를 내세우니 모두 헛된 과장일 뿐이다.
결국 끌어다 덮고 재빠르게 가리며 사람들에게 자신의 선을 과시하지만, 실제로는 구차하고 가로막혀 마음은 위축되고 몸은 오그라들 것이니, 어떻게 마음을 바르게 할 수 있겠으며, 어떻게 몸을 수양할 수 있겠는가.
증씨(曾氏; 증자曾子)는 병통의 뿌리를 끝까지 연구하여 ‘스스로 속임(自欺)’이라고 이름 붙였다. 기(欺)라는 글자는 좋지 않은 일로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다른 사람은 그래도 속일 수 있지만 ‘스스로 속임’이라는 말은 보통 생각으로 따져 보면 사리에 맞지 않는 것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스스로(自)’란 ‘나(我)’이고, 나에게 가려지게 되어 마침내 스스로 속이니, 이는 스스로 자기 몸을 버리는 짓이다. 스스로 자기를 버린다면 누군들 그 사람을 버리지 않겠는가. 천하 사람들이 버리는 존재가 될 뿐이다.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이 두려워할 줄 모르는 것은 왜일까. 대개 그것은 하늘에서 부여한 밝음이 가려지고 어두워지며 사사로운 뜻이 막아 버려 막힌 귀에는 금방울 소리도 들리지 않고 시장에서 벌건 대낮에 약탈하면서도 사람들을 아랑곳하지 않아서이다.
장교(莊蹻)나 도척(盜蹠) 같은 자는 밭에서 금을 주웠다가 버리는 데에서 잘못되어 생기고, 왕망(王莾)이나 동탁(董卓) 같은 자는 한밤중 궁궐 앞을 지나갈 때 수레에서 예법을 차리는 데에서 잘못되어 만들어진다.
생각 하나하나가 이렇듯 두렵고, 스스로 속이는 것이 이토록 극심한 재앙이 되리라는 것을 누가 알겠는가.
재아(宰我)가 비단옷을 입고 쌀밥을 먹는 것에 대해 편안하다고 했던 말은 모르고 한 말이기는 해도 속이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가르쳐서 깨닫게 해 줄 수는 있었다.
양광(楊廣)이 겉으로는 죽에 쌀 두 줌을 먹으면서 몰래 삶은 돼지고기를 먹었는데 이는 알고도 스스로를 속인 것이니, 결국 시역(弑逆)으로 끝났다.
관녕(管寧)이 밭을 매다가 금을 보고도 돌아보지 않은 것은 성실한 의(意) 때문이었으니, 이는 청렴의 성인이다.
거백옥(蘧伯玉)이 한밤중에 궁궐 문 앞에서 수레에서 내렸던 것은 스스로 속이지 않은 것이니, 이는 공경의 성인이다.
화흠(華歆)은 황후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헌제(獻帝)의 옥새 끈을 풀었는데, 밭을 매다가 금을 주웠을 당시 한번 성실하지 못했던 마음이 가져온 불행이었다.
거백옥은 60세에도 변화했으니, 이는 한밤중에 수레에서 내렸던 공부이다.
또한 사람들이 ‘스스로 속임’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할까 걱정하여, 호색(好色) 및 나쁜 냄새를 싫어하는 것을 예로 들어 설명했다.
호색은 실제 마음으로 좋아하는 것이고, 냄새를 싫어하는 것도 실제 마음으로 싫어하는 것이지, 터럭만큼도 다른 사람을 의식한 것이 아니다. 그 때문에 한사코 하려고 하고 한사코 없애려고 하는 것이니, 이것이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선(善)을 바라고 불선(不善)을 제거하기를 이렇게 할 수만 있다면, 의(意)가 저절로 진실해질 것이다. 가령 옳지 못한 재화나 여색 같은 것이 눈앞에 있더라도 내 마음이 잔잔한 물처럼 고요하고 생각의 실마리가 명쾌하며 맑게 갠 하늘의 빛처럼 환하게 내다보일 것이니, 이것이 바로 의가 성실한 상태이다.
만일 조금이라도 하고자 하는 의도가 싹트면 바로 그 잘못됨을 알아채고 끊어 내야 한다. 이는 아직도 금지하는 단계에 있는 것이니 아직 의가 성실한 경지에 이르지 못한 경우이다.
그렇지만 금지 단계에서부터 익숙히 하여 한 번, 두 번 금지하다가 오래되면 없어지기에 이를 것이다.
대순(大舜)의 “마치 평생토록 그럴 것 같았다가, 본래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았다.”라는 말은 성의(誠意)의 가장 지극한 효과였다.
배우는 사람은 이런 것을 안 뒤에야 이런 단계의 공부를 논의할 수 있다. 성탕(成湯)이 새와 짐승조차도 편안하게 했던 일이나, 주공(周公) 때 거센 비바람이 없던 일은 모두 이 성의의 효과이니, 의가 성실하면 하늘과 하나가 된다.
또한 배우는 사람들이 효과를 얻었을 때의 증후를 스스로 깨닫게 하고자 자겸(自慊) 두 글자를 언급했다. 여기의 겸(慊) 자가 나타내는 모습은 터득하여 살핀 사람이 아니면 이렇게 표현할 수 없다.
옛사람의 시에,
瑩淨雲間月
分明雨後山
中心無所愧
對此敢開顔
밝고 깨끗한 구름 사이 달
또렷한 비 온 뒤 저 산이여
마음속 스스로 부끄러움 없어야
이를 대하고 얼굴 펼 수 있으리라
라고 했는데, 이 시가 ‘자겸’의 모습을 비슷하게 표현했다. 만족하는(慊) 까닭에 마음이 절로 넓어지고 몸에 절로 살이 오를 것이니, 그 얼마나 쾌활한 남아인가!
호연지기가 여기에서 나오니, 주역에 “후회와 인색을 근심하는 것은 나뉘는 데 있다(憂悔吝 存乎介)”라는 말, 서경에 “기미마다 삼가라(惟幾)”라는 말, 시경에 “생각에 거짓이 없다(思無邪)”라는 말은 성의(誠意) 공부이다.
하늘의 명이여 아, 화목하고 그침 없어라(維天之命 於穆不已)라고 했고, 요(堯)가 천명을 받은 일, 순(舜)의 참되고 독실함, 탕(湯)의 능히 한결같음, 문왕(文王)의 순수함, 무왕(武王)이 두 마음을 갖지 않은 일은 성의의 지극한 공력이다.
스스로 속이는 것보다 심한 화근은 없고 스스로 속이는 것보다 혹독한 재앙은 없다. 하늘이 노하고 사람이 원망하는 일은 전적으로 스스로 속이는 한 가지 마음에 달려 있다.
다만 사람이 사사로운 의도에 가려 스스로 속이는 짓을 두려워하지 않고 몸을 망치고 집안에 화를 입히며 종묘가 엎어지는데 그저 이르러도 깨닫지 못할 뿐이다.
왕척직심(枉尺直尋) 네 글자는 스스로를 속이게 되는 독한 빌미이다. 스스로 속인 대표적인 사례는, 왕망(王莾)이 하늘에 기도하며 자신이 대신 죽겠다고 청했던 일과 조조(曹操)가 동작대(銅雀臺)를 만들고 궁녀들에게 향을 나누어 주라고 했던 일이다.
사람마다 이 일을 언급하지만, 그 근본은 어두운 방에서 지녔던 일념으로 부귀해지고자 하는 욕심을 막을 수가 없어서 점차 왕척직심과 같은 꾀가 생겼다는 것을 전혀 모른다.
이 점이 성인이 “한 가지라도 불의한 일을 저질러 천하를 얻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行一不義而得天下 不爲)”라고 말했던 이유이다.
정자와 주자 선생은 남월왕(南越王)이 황옥(黃屋)과 좌독(左纛)을 한 일을 자기(自欺)의 비유로 들었는데, 이는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창을 밖에서 바르는 것(窓從外糊)’이 곧 자기(自欺)임을 이해하는 것이 공부에 가깝고 절실한데 사람들은 바로 이해하지 못한다. 창을 밖에서 바르려고 하는 하나의 생각이 하늘을 뒤집고 땅을 뒤엎는 근원이 된다.
주자가 창에 바른 종이가 가지런하지 않은 것이 보기 싫어서 고치라고 했더니 문인이 “좋아 보이려면 밖에서 바르면 됩니다.”라고 했다. 선생이 정색을 하고 “어찌 스스로 속이는가”라고 했다.
마시고 먹는 일은 인정상 자기에게 절실한 것이니, 어찌 스스로 속이는 일이 있겠는가.
그렇지만 보리 겨로 만든 떡을 먹는 사람은 거기에 모래가 들어 있는 것이 싫어서 씹을 때도 이로 씹지 않고 우물우물하다가 덩어리째 삼킨다.
소나무 껍질을 벗겨 먹는 사람은 그 거친 신맛이 싫어서 씹지 않고 한꺼번에 삼킨다. 이는 모래나 신맛을 ‘한 자를 굽힌다(枉尺)’라고 생각하며, 배를 채우는 일을 ‘한 길을 편다(直尋)’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심한 경우 굶주린 사람은 콩잎으로 모래를 싸서 삼킨다. 모래가 뱃속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는다는 걸 누구나 다 알 터인데도, 아주 짧은 순간에 한 길을 펴려는 나머지 필시 죽음에 이르는 것에도 생각이 미칠 겨를이 없다.
만일 맹자(孟子)가 한 자를 굽혔다가 결국 세상의 화란에 말려들었다면, 그는 모래를 삼킨 사람들과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세상에는 깊은 밤중에 애걸복걸해서 겨우 관직 하나를 얻고 나서 다른 사람에게는 나라의 은혜가 망극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고, 자기 어버이가 살아 있을 때는 조그마한 성의도 없다가 부모가 돌아가신 뒤에 산소 자리를 찾아다니면서 입만 열면 “백골이나마 편하셨으면 좋겠다.”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바로 그런 사람은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 못하는 악행이 없을 것이다.
성의(誠意)에 관한 전(傳)이 치지(致知)나 정심(正心)과 섞이지 않고 단독으로 하나의 전이 된 의미에 대해서, 배우는 사람은 깊이 생각해야 한다.
가령 주상(主上)을 뵈려는 사람은 반드시 숭례문(崇禮門)으로 들어가야 하고, 숭례문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은 반드시 이정표를 살펴야 한다.
이는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닦는 사람이 반드시 먼저 뜻을 성실하게 하며, 뜻을 성실하게 하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먼저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여 지식을 지극히 하는 것과 같다.
숭례문은 주상을 뵙는 정문이다. 그러므로 바른길을 가리켜 주는 사람은 길 가는 사람에게 반드시 먼저 이정표를 살피게 하고 한강(漢江)을 건너면 한양이라는 것을 알려 준다. 바로 격물치지 공부이다.
그런 뒤 또 반드시 정신을 차려 눈동자를 크게 뜨고 보면, 많은 널찍한 길머리에 허다한 기와집과 담장 속에 높은 이층 건물이 있고 백척의 높은 성곽으로 경계를 짓고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여기를 들어가면 한양이고 아직 들어가지 않으면 지방인데, 힘을 다해 용맹정진하면 이 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 뒤에야 숫돌처럼 평탄하고 넓은 길이 펼쳐지며 아홉 대문이 훤히 열린다.
어깨를 펴고 두 손을 모은 뒤 천천히 나아가되 다리 힘을 가볍고 굳건히 하여야만 곧 성인(聖人)이 붉은 구름에 앉아 차분하게 나에게 명령하시는 모습을 직접 보게 된다.이 시에서 말하는 제(帝)는 문왕(文王)이다.
그래서 이 문이 한양으로 바로 들어가는 제일 중요한 입구이다. 만약, 여행을 기록하는 사람이 관례에 따라 쓰기를 “이른바 숭례문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은 먼저 이정표를 살펴야 한다.”라고 하는 것은 무슨 말인지 “주상께 인사를 드리려고 하는 사람은 먼저 숭례문으로 들어가야 한다.”라고 하는 것은 무슨 말인지 묻는다면, 어찌 헐후어(歇後語)가 아니겠는가.
장(章) 아래 주(註)에 “실제로 그 힘을 쓰지 못하고, 구차하게 스스로 속인다.”라는 말은, 바로 숭례문 밖에서 미루고 머뭇거리며 방황하다가 곧장 석문(石門 남대문)을 알아보고 달려 들어가지 못하는 것과 같다.
때때로 장(醬) 파는 가게를 잘못 엿보기도 하고 건어물 가게로 향하기도 하면서, 구차하게 자신을 안심시키며 “내가 이미 한양에 도착했으니, 옆 사람이 어찌 나에게 건어물 가게나 장 파는 가게를 잘못 들어왔다고 여기겠는가.”라고 생각한다.
그러고 나서 한양 말씨와 복식으로 산뜻하게 바꾸고, 사람들에게 주상은 옥련(玉輦)을 타고 고관은 금관(金冠)을 쓴다고 떠벌일 뿐이다.
그렇지만 용루(龍樓)나 봉궐(鳳闕), 종묘(宗廟)나 백관(百官)의 아름다운 모습은 끝내 보지도 못하고 결국 여관방에 기숙하는 꼴을 면치 못한다.
죽기에 이르러 자신을 위로하기를 “내가 본디 한양에 갔었다.”라고 할 것이니, 이 어찌 자신을 속이는 짓이 아니겠는가.
아무리 스스로 한양에 갔었다고 말해도 어느 누가 믿겠는가. 그가 자신을 속이고 남도 속이는 속마음을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다.
또 주자는 “혹시 이미 밝아졌다고 하더라도 이를 삼가지 않으면 밝아졌던 것도 자신의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이 한 구절은 몸으로 실천하고 마음으로 터득하여 이러한 실제를 정말 보지 않았다면 이렇게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를테면 한양에 간 사람이 이미 남대문 가는 길을 분명히 알았더라도, 마음이 느슨해지고 의지가 산만해져서 떡집을 기웃거리고 잡화상을 훔쳐보면서도 마음속으로는 무방하다고 스스로 여기며 청파(靑坡) 거리를(남대문 밖 지명) 배회한다면, 이는 앞서 살피고 물어서 분명히 알았던 많은 노정(路程)이 모두 자기 것이 아닌 것과 같다. 배우는 사람이 여기에 마음을 다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여기에서의 의(意) 자가 갖는 위상은 매우 은미하고, 성(誠) 자의 공부는 지극히 정밀하다. 지극히 은미하되 온갖 사물에 수응하는 근본이 되고, 지극히 정밀하되 천지가 제자리를 찾고 만물을 기르는 본체가 된다.
정밀하고 은미한 데 소홀한 사람은 끝내 성인의 도에 들어갈 수 없다. 성(誠) 자의 의미가 가장 이해하기 어려우니, 진정 진(眞)이며 실(實)이다.
의에 불선(不善)한 것이 있으면서 밖에서 그것을 가리는 것이니, 과일의 씨앗에 비유하자면 그 씨앗이 이미 썩었는데 밖의 껍질은 그대로 완연한 것과 같으니, 이는 부실이지 진실이 아니다.
부는 집을 윤택하게 한다(富潤屋)라는 저 평범한 구절을 빌려서 ‘덕성이 몸을 윤택하게 한다(德潤身)’라는 말을 불러 일으켰으니, 시경에 나오는 흥체(興體)와 같다.
대개 마음이 넓어지고 몸에 살이 오르는 것이니, 이것이 군자의 무한한 쾌락이다. 그러므로 형용을 찬탄하면서도 문체가 자연스럽게 시경의 흥체가 되었으니 사람들로 하여금 읊으며 감흥하게 한다.
재화가 집안에 채워지므로 집이 저절로 윤택해지고, 덕(德)과 의(義)가 마음에 채워지므로 몸이 저절로 윤택해진다. 조금이라도 마음에 부족하면 부실해져서 집이든 마음이든 윤택해지지 않는다.
겸(慊)은 쾌(快)이며 족(足)이니, 충분하면 채워져서 저절로 윤택해진다. 마음이 넓어지고 몸에 살이 오른다는 말은, 기상이 위축되고 시치미 떼는 모습의 반대이다. 이상은 전(傳) 6장(章)이다.
▶️ 獨(홀로 독)은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개사슴록변(犭=犬; 개)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蜀(촉, 독)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蜀(촉, 독)과 개(犬)는 모이면 싸우므로 한 마리씩 떼어 놓은 데서 홀로를 뜻한다. ❷형성문자로 獨자는 ‘홀로’나 ‘혼자’, ‘외로운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獨자는 犬(개 견)자와 蜀(애벌레 촉)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蜀자는 나비의 애벌레를 그린 것으로 ‘애벌레’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런데 애벌레와 개의 조합이 왜 ‘홀로’나 ‘혼자’라는 뜻을 갖게 된 것일까? 이에 대해 개는 혼자 있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있지만, 의미가 명확히 전달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獨자에 쓰인 蜀자는 단순히 ‘촉→독’으로의 발음역할만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獨(독)은 (1)다른 말 위에 붙어서 혼자, 홀로의 뜻을 나타내는 말 (2)성(姓)의 하나 (3)독일(獨逸) 등의 뜻으로 ①홀로, 혼자 ②어찌 ③다만, 오직 ④장차(將次) ⑤어느 ⑥그 ⑦홀몸, 홀어미 ⑧외로운 사람 ⑨외발 사람, 월형(刖刑: 발꿈치를 베는 형벌)을 받은 사람 ⑩외롭다 ⑪전단(專斷)하다(혼자 마음대로 결정하고 단행하다), 독재(獨裁)하다 ⑫개가 싸우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홑 단(單), 외로울 고(孤)이다. 용례로는 남의 힘을 입지 않고 홀로 섬을 독립(獨立), 다른 것과 견줄 것이 없을 만큼 특별하게 다름을 독특(獨特), 혼자서 중얼거림을 독백(獨白), 혼자서 모두 가지거나 누리는 것을 독점(獨占), 남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자기 혼자의 의견대로 결단함을 독단(獨斷), 모방하지 아니하고 자기 혼자 힘으로 처음으로 생각해 내거나 만들어 냄을 독창(獨創), 자기 혼자만이 옳다고 믿고 객관성을 생각지 아니하고 행동하는 일을 독선(獨善), 저 혼자 또는 자기의 한 몸을 독자(獨自), 혼자서 먹음 또는 이익을 독차지 함을 독식(獨食), 제 마음대로 쥐고 흔듦을 독천(獨擅), 외짝 다리나 하나 뿐인 다리를 독각(獨脚), 혼자서 거처하는 방을 독방(獨房), 혼자서 거처하는 방을 독실(獨室), 혼자서 노래함을 독창(獨唱), 혼자서 삶 또는 홀로 지냄을 독거(獨居), 형제 자매가 없는 사람 흔히 독자를 이름 또는 배우자가 없는 사람을 독신(獨身), 스승이 없이 또는 학교에 다니지 아니하고 혼자서 배움을 독학(獨學), 혼자서 추는 춤을 독무(獨舞), 단 하나 또는 단 한 사람을 단독(單獨), 오직 홀로를 유독(唯獨), 주위에 마음을 함께 할 사람이 없어 혼자 동떨어져 있음을 느끼는 상태를 고독(孤獨), 홀로 있을 때에도 도리에 어그러짐이 없도록 삼감을 독(愼獨),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혼자 하는 것을 독자적(獨自的),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따로 자립하려고 하는 성향이나 성질을 독립성(獨立性), 자기 혼자의 힘만으로 생각해 내거나 처음으로 만들어 내는 모양을 독창적(獨創的), 남에게 의존하지 아니하고 따로 제 힘으로 해 나가는 모양을 독립적(獨立的), 절대 권력을 가지고 독재 정치를 하는 사람을 독재자(獨裁者), 혼자서 찍은 사진을 독사진(獨寫眞), 남이 따를 수 없을 만큼 홀로 뛰는 모양을 독보적(獨步的), 남을 배척하고 혼자 독차지하고 있는 모양을 독점적(獨占的), 독자적으로 창조하거나 창안할 수 있는 재주나 능력을 독창력(獨創力), 혼자서는 장군을 못한다는 뜻으로 남의 의견을 무시하고 혼자 모든 일을 처리하는 사람을 독불장군(獨不將軍), 빈방에서 혼자 잠이란 뜻으로 부부가 서로 별거하여 여자가 남편없이 혼자 지냄을 독수공방(獨守空房), 홀로 푸르다는 뜻으로 홀로 높은 절개를 지켜 늘 변함이 없음을 독야청청(獨也靑靑),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남이 깨닫지 못하는 것을 깨닫는 총명을 독견지명(獨見之明), 외손뼉이 올랴라는 속담의 한역으로 맞서는 이가 없으면 싸움이 되지 않음을 이르는 말을 독장불명(獨掌不鳴) 등에 쓰인다.
▶️ 善(착할 선)은 ❶회의문자로 양(羊)처럼 순하고 온순하며 부드럽게 말(口)하는 사람을 나타내어 착하다를 뜻한다. 옛날 재판에는 양 비슷한 신성한 짐승을 썼다. 신에게 맹세하고 한 재판이란데서 나중에 훌륭한 말이 훌륭함, 좋다의 뜻이 되었다. ❷회의문자로 善자는 ‘착하다’나 ‘사이좋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갑골문에 나온 善자를 보면 양과 눈이 함께 그려져 있었다.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답은 ‘양의 눈망울과 같은’이다. 뜻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우리식으로는 ‘사슴 같은 눈망울’로 해석될 수 있겠다. 보통 착하고 선한 사람을 일컬어 사슴 같은 눈망울을 가졌다고 말하곤 한다. 善자는 그러한 뜻을 표현한 것이다. 금문에서는 目자 대신 言(말씀 언)자가 쓰이게 되었는데, 이것은 정감 있는 대화를 나눈다는 의미였다. 이후 善자는 변화를 거듭해 지금의 모습에 이르게 되었다. 그래서 善(선)은 (1)착하고 올바르고 어질고 좋음 (2)정리(正理)를 따름. 양심이 있고 도덕을 갖춤 (3)도덕적 생활의 최고 이상(理想) (4)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착하다 ②좋다 ③훌륭하다 ④잘하다 ⑤옳게 여기다 ⑥아끼다 ⑦친하다 ⑧사이좋다 ⑨착하고 정당하여 도덕적 기준에 맞는 것 따위의 뜻이 있다.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악할 악(惡)이다. 용례로는 착한 것과 악한 것을 선악(善惡), 선량한 마음이나 착한 마음을 선의(善意), 좋은 길로 올바르게 인도함을 선도(善道), 착하고 어진 벗을 선우(善友), 깨우치고 이끌어서 착하게 되도록 만듦을 선화(善化), 친절하게 잘 대접함을 선대(善待), 착하고 바른 덕행을 선덕(善德), 착한 마음을 선심(善心), 이웃 또는 이웃 나라와 사이 좋게 지냄을 선린(善隣), 잘 막아냄을 선방(善防), 착하고 어짐을 선량(善良), 좋은 방법으로 알맞게 처리함을 선처(善處), 착하고 어진 행실을 선행(善行), 유종의 미를 거둠을 선종(善終), 잘못을 고쳐 좋게 함을 개선(改善), 가장 좋음이나 가장 적합함을 최선(最善), 자기 혼자만이 선으로 생각되는 바를 행하는 일을 독선(獨善), 본심에서가 아니라 겉으로만 하는 착한 일 또는 그것을 함을 위선(僞善), 착한 일을 여러 번 함을 적선(積善), 최선의 다음 정도를 차선(次善), 더할 수 없이 착함이나 지극히 착함을 지선(至善), 선의를 베풂을 자선(慈善), 서로 친하고 사이가 좋음을 친선(親善), 착하지 아니함을 불선(不善), 친구 사이에 옳은 일을 하도록 서로 권함을 책선(責善), 나쁜 짓을 고쳐 착하게 됨을 천선(遷善), 지난날의 잘못을 고치어 착하게 됨을 개과천선(改過遷善),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좋다는 다다익선(多多益善), 착한 남자와 착한 여자라는 선남선녀(善男善女), 착한 행실을 권장하고 악한 행실을 징계함을 권선징악(勸善懲惡), 잘한 뒤에 처리한다는 선후처치(善後處置) 등에 쓰인다.
▶️ 其(그 기)는 ❶상형문자로 벼를 까부르는 키의 모양과 그것을 놓는 臺(대)의 모양을 합(合)한 자형(字形)이다. 나중에 其(기)는 가리켜 보이는 말의 '그'의 뜻으로 쓰여지고 음(音) 빌어 어조사로 쓴다. ❷상형문자로 其자는 ‘그것’이나 ‘만약’, ‘아마도’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其자는 대나무를 엮어 만든 ‘키’를 그린 것이다. 갑골문에 나온 其자를 보면 얼기설기 대나무를 엮어 만든 바구니가 그려져 있었다. 금문에서는 여기에 받침대를 그려 넣으면서 지금의 其자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其자는 본래 ‘키’를 뜻하기 위해 만든 글자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이나 ‘만약’과 같은 여러 의미로 가차(假借)되어 있다. 그래서 후에 竹(대나무 죽)자를 더한 箕(키 기)자가 뜻을 대신하게 되었다. 그래서 其(기)는 ①그, 그것 ②만약(萬若), 만일(萬一) ③아마도, 혹은(그렇지 아니하면) ④어찌, 어째서 ⑤장차(將次), 바야흐로 ⑥이미 ⑦마땅히 ⑧이에, 그래서 ⑨기약하다 ⑩어조사(語助辭)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어떤 정해진 시기에서 다른 정해진 시기에 이르는 동안을 기간(其間), 그 나머지나 그 이외를 기여(其餘), 그것 외에 또 다른 것을 기타(其他), 그 역시를 기역(其亦), 그 세력이나 형세를 기세(其勢), 그 밖에를 기외(其外), 그 벼슬아치가 그 벼슬을 살고 있는 동안을 기등(其等), 그때를 기시(其時), 실제의 사정이나 실제에 있어서를 기실(其實), 그 전이나 그러기 전을 기전(其前), 그 가운데나 그 속을 기중(其中), 그 다음을 기차(其次), 그 곳을 기처(其處), 그 뒤를 기후(其後), 각각으로 저마다 또는 저마다의 사람이나 사물을 각기(各其), 마침내나 기어이나 드디어를 급기(及其), 어린 아이를 귀엽게 이르는 말을 아기(阿其), 한 달의 마지막이라는 뜻으로 그믐을 이르는 말을 마기(麻其), 마침내나 마지막에는 급기야(及其也), 그때에 다다라를 급기시(及其時),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아니하고 중간쯤 되어 있음을 거기중(居其中), 알맞은 자리를 얻음을 득기소(得其所), 일을 일대로 정당하게 행함을 사기사(事其事), 그 가운데에 다 있음을 재기중(在其中), 마침 그때를 적기시(適其時), 그 근본을 잃음을 실기본(失其本), 절친한 친구 사이를 기이단금(其利斷金), 또는 기취여란(其臭如蘭), 모든 것이 그 있어야 할 곳에 있게 됨을 각득기소(各得其所), 가지와 잎을 제거한다는 뜻으로 사물의 원인이 되는 것을 없앤다는 거기지엽(去其枝葉), 그 수를 알지 못한다는 뜻으로 매우 많음을 부지기수(不知其數), 어떠한 것의 근본을 잊지 아니함을 불망기본(不忘其本), 말이 실제보다 지나치다는 뜻으로 말만 꺼내 놓고 실행이 부족함을 언과기실(言過其實) 등에 쓰인다.
▶️ 身(몸 신, 나라 이름 건)은 ❶상형문자이나 형성문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 아기를 가진 여자의 모습을 본뜬 글자로 몸을 뜻한다. 형성문자로 보면 人(인)과 申(신)의 합자(合字)인데 人(인)은 뜻을 나타내며 부수가 되고 申(신)이 발음을 담당하는 글자로 본 것이다. 부수(部首)로서는 몸에 관계가 있는 뜻을 나타낸다. ❷상형문자로 身자는 ‘몸’이나 ‘신체’를 뜻하는 글자이다. 身자의 갑골문을 보면 배가 볼록한 임신한 여자가 그려져 있었다. 그래서 身자의 본래 의미는 ‘임신하다’였다. 身자에 아직도 ‘(아이를)배다’라는 뜻이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렇게 임신으로 배가 부른 여자를 그린 身자는 후에 ‘몸의 상태’나 ‘몸’이라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아이를 가진 여자는 자신의 몸 상태에 대해 신경을 쓰게 된다는 의미가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身자는 부수로 지정되어 있지만 관련된 글자는 없다. 그래서 身(신, 건)은 ①몸, 신체 ②줄기,주된 부분 ③나, 1인칭 대명사 ④자기, 자신 ⑤출신, 신분 ⑥몸소, 친히 ⑦나이 ⑧아이를 배다 ⑨체험하다 그리고 ⓐ나라의 이름(건) ⓑ건독(身毒; 인도의 옛이름)(건)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몸 기(己), 물건 물(物), 고기 육(肉),스스로 자(自), 몸 궁(躬), 몸 구(軀),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마음 심(心)이다. 용례로는 개인의 사회적인 지위 또는 계급을 신분(身分), 일신 상에 관한 일을 신상(身上), 일신 상의 처지와 형편을 신세(身世), 몸과 목숨을 신명(身命), 몸에 생긴 병을 신병(身病), 사람의 얼굴에 나타난 건강 상태의 빛을 신수(身手), 몸과 몸의 주위를 신변(身邊), 사람의 키를 신장(身長), 사람의 몸을 신체(身體), 제 몸으로 딴 말에 붙어서 딴 어떤 것도 아니고 그 스스로임을 강조할 때 쓰는 말을 자신(自身), 어떠한 행위나 현상에 상응하는 것이거나 그의 대가임을 나타내는 말을 대신(代身), 무슨 지방이나 학교나 직업 등으로부터 나온 신분을 출신(出身), 죽은 사람의 몸을 이르는 말을 시신(屍身), 신명을 바쳐 일에 진력함을 헌신(獻身), 마음과 몸을 심신(心身),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몸가짐이나 행동을 처신(處身), 악을 물리치고 선을 북돋아서 마음과 행실을 바르게 닦아 수양함을 수신(修身), 몸을 움직임을 운신(運身), 몸을 불사르는 것을 분신(焚身), 모양을 바꾼 몸 또는 몸의 모양을 바꿈을 변신(變身), 사회에 나아가서 자기의 기반을 확립하여 출세함을 입신(立身), 온몸으로 열정을 쏟거나 정신을 집중하는 상태 또는 그때의 온몸을 혼신(渾身), 체면이나 명망을 망침을 만신(亡身), 집이 가난하여 종을 두지 못하고 몸소 종의 일까지 함을 신겸노복(身兼奴僕), 홀로 있는 몸이 아니고 세 식구라는 신겸처자(身兼妻子), 몸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신외무물(身外無物),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의 몸 전체를 신체발부(身體髮膚), 남에게 맡기지 아니하고 몸소 맡아함을 신친당지(身親當之), 몸과 태어난 땅은 하나라는 신토불이(身土不二)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