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적 사실 외면하는 선동 비용은 결국 국민이 치른다
미국 할리우드가 2004년 내놓은 ‘투모로우’는 제법 과학적 근거를 기반으로 한 재난영화다. 지구온난화로 남북극 빙하가 녹으면 주변 바다의 염도가 떨어진다. 찬물이 깊은 바다로 내려가지 않고 표면에 머물면 적도의 따뜻한 물을 고위도로 옮기는 멕시코 만류 등 해류가 막히게 된다. 결국 열을 전달받지 못한 북반구 지역이 온통 빙하로 뒤덮인다. 실제 빙하기 끝 무렵인 1만2000년 전쯤의 ‘영거 드라이아스 기’가 모티브가 됐다고 알려져 있다.
다만 영화적 상상이 더해졌다. 수십 년에 걸쳤을 것으로 추정되는 일련의 과정을 단 6주 만에 일어난 것으로 묘사한 것이다. 덕분에 스토리는 긴박했고 영화는 흥행에 성공했다. 관객들의 뇌리에도 기후변화의 ‘악몽’이 선명하게 각인됐다. 재미없는 과학적 사실에만 충실했다면 얻을 수 없었던 결과다. 관객들도 이를 진실로 받아들이진 않았다. 영화야 태생부터 픽션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지 않나.
문제는 사람들이 먹고사는 현실에서도 과학적 사실을 비과학적으로 활용하는 일이 빈번하게 목격된다는 점이다. 판단의 잣대로 삼은 과학을 믿지 못하면 결국 사회적 혼란만 커질 뿐이라는 걸 여러 차례 실감했다.
2008년 ‘광우병 사태’는 의학적 사실에 과장과 거짓이 보태져 온 나라를 혼돈에 빠트렸다. 다리가 풀려 쓰러지는 미국 소 영상은 수많은 과학자들의 말을 삼켜 버릴 만큼 충격적이었다. 공포심이 극대화됐을 때 과학은 설 자리가 없었다. 2017년 표출된 원자력발전소에 대한 적대감은 국가 에너지정책을 후퇴시킨 것은 물론이고 세계적 원전 기술을 가진 한 기업을 통째로 날릴 뻔했다.
최근 일본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논쟁도 마찬가지다. 정치의 영역이고 사회적 영향이 큰 이슈지만 판단의 기준은 과학이다. 그런데도 과학계 목소리, 특히 정치적으로 불리한 설명에 대해서는 철저히 귀를 닫는다. 이덕환 서강대 화학과 명예교수는 “이번 논란과 관련해 단언컨대 과학계는 분열된 적이 없다”고 말한다. 그는 “신뢰도가 곧 생명인 과학자들이 과학적 팩트를 놓고 거짓을 말하진 않는다”며 “일부 학자가 비전문 영역에 대해 무책임하게 발언한 것이 확산되고 부풀려지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세계적 환경운동가 마이클 셸런버거의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2021년)에서도 그런 사례가 다수 언급된다. 방대한 양의 과학 논문 등을 근거로 한 책이다. 참고문헌 리스트만 80쪽에 달한다. 셸런버거는 서문에서 “환경 문제를 과장하고, 잘못된 경고를 남발하고, 극단적인 생각과 행동을 조장하는 이들은 긍정적이고, 휴머니즘적이며, 이상적인 환경주의의 적이다”라고 썼다. 그러곤 아프리카의 콩고민주공화국이나 브라질 아마존 등에서의 사례를 들며 극단적 환경주의자들의 선동이 어떤 부작용을 낳는지 조목조목 비판한다. ‘환경’이 아닌 ‘환경운동’을 목적으로 삼았기에 과학적 진실을 외면하거나 악용하는 이들에 대한 고발이다.
지금 일부 한국 정치인들의 목적은 ‘국민건강’일까, ‘국민건강을 담보로 한 정치’일까. 정치인이 정치활동을 하는 걸 말릴 수 있겠냐마는 결국 사회적 비용을 치러야 하는 건 그들이 아닌 국민이다.
김창덕 산업1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