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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여사의 백만 불짜리 미소 - 조앙
일요일 오후. 그날은 특별히 외출할 약속이 없기에 나는 헝클어진 머리를 그저 손으로 쓸어 넘기고 있는데 박 선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며칠 전 부탁한 노래 악보도 받을 겸 저녁 식사에 초대한다고 했다. 그러니 부랴부랴 악보를 챙겨 들고 약속 장소에 갔더니 이게 웬걸, 박 선생의 부인 홍 여사가 일어서며 반갑게 맞는 게 아닌가. 나는 순간 기분이 언짢았다. 내게 한마디 양해도 없이 부부가 와있으니까 내심 불편해서였다. 하지만 홍 여사는 그런 내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언제나처럼 상냥한 미소를 띠고 내 앞으로 메뉴판을 내밀며 말했다. "맛있는 것으로 주문해요." "사모님이 아무거나 주문하세요." 나는 다소 퉁명스럽게 대꾸했지만 홍 여사는 개의치 않고 담담히 음식을 주문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음식이 나오자 홍 여사는 팔을 뻗쳐 손수 내 앞 접시에 국물을 떠 주고 이어 옆자리에 앉는 남편 앞 접시에도 떠줬다. 그런데 그 일련의 행동이 문득 정겹게 느껴졌다. 마치 어릴 적 엄마의 모습을 보는 것과도 같이 한국 여성 본연의 인자함이 풍겼다. 박 선생과는 오래전 ‘평생학습관’에서 취미로 성악강좌를 같이 수강한 것이 인연이 되어 가끔 만나곤 한다. 그런데 그때마다 홍 여사도 꼭 같이 나와서 못마땅하던 참이었다. 부부가 같이 만나는 거야 탓할 일이 아니지만, 용무가 있어 잠깐 만나고 바로 헤어질 일도 부부가 함께 만나면 괜스레 부인의 안부도 물어야 하니 이야기가 길어져서였다. 아무튼 그래서 특별한 일이 아니라면 약속을 하지 않는 편인데 그날은 저녁 한 끼 때우려다 그만 덫에 걸린 듯 불편했지만 뜻밖에도 홍 여사의 숨은 매력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다. 보문산 자락에 위치한 음식점. 식사가 끝나고 디저트를 할 때였다. 김 서린 창밖으로 듬성듬성 흰 눈 쌓인 산등성이가 분위기를 돋우는 듯 홍 여사는 만면에 미소를 띠며 처음 박 선생과 맞선볼 때 이야기를 꺼냈다. 그 옛날 동네 아주머니의 중매로 두 분이 처음 만났을 때에도 어색하기는커녕 서로 음악을 좋아해서 음악 이야기로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결혼한 후에는 이른 아침 남편이 피아노를 연주했는데 홍 여사는 그 음악을 상기하며 시집살이를 즐겁게 할 수 있었다고 하니 정말 천생연분이 따로 없었다. 더욱 홍 여사는 부잣집 딸로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살다가 결혼 후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 조부모와 시부모님을 모두 모시고 살았다고 하는데 나는 그만 깜짝 놀랐다. 홍 여사의 얼굴에는 도무지 고생한 흔적이 없어서였다. 무엇보다도 친 시어머니는 남편이 어릴 때 돌아가셔서 친 시어머님이 아님에도, 시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정성을 다해 모셨다고 하는데 나는 또 한 번 놀랐다. 박 선생한테 물었다. "아니,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어떻게 양어머니를 모셨어요?" "주위에서 양로원에 보내시라고 했지만, 저는 차마 그럴 수가 없었어요. 양어머니이지만 저한테 참 잘해주셨거든요. 그 대신 집사람이 좀 힘들었지요." 그때 문득 나는 작년에 돌아가신 엄마 생각이 났다. 엄마가 노환으로 노인병원에 4년여 입원해 계시는 동안, 친엄마임에도 주위에서는 "뭘 그렇게 문병을 매일 가느냐"고 성화 아닌 성화를 했던 기억이 아직 생생해서다. 그런데 이 부부는 참 별났다. 효심도 남달랐지만, 부부애도 남달랐다. 홍 여사는 직장에 근무하는 남편이 혹시라도 걱정할까 봐서 집에서의 일은 남편에게는 전혀 내색을 안 했다고 한다. 연로하신 부모님을 모시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라고 말했더니 홍 여사는 예의 백만 불짜리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 미소 속에 고된 시집살이를 감내하던 애씀이 다 삭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박 선생이 말했다. “아내한테 고마움은 이루다 말할 수 없다면서 평생을 갚아도 다 못갚는다”고. 큰아들과 딸은 결혼해서 서울과 세종에 살고, 아직 결혼 전인 작은 아들도 분가해서 지금은 둘이 사는데 아주 행복하다고 한다. 홍 여사는 남편이 공무원으로 재직 시 남편의 권유로 탁구를 했지만, 남편이 퇴직한 후는 음악을 좋아하는 남편과 같이 주중에는 악기를 배운다고 한다. 전국 탁구대회마다 출전하여 1등을 석권하다시피 했는데 탁구를 그만두면 아쉽지 않으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남편과 같이 매주 2~3일은 자신들의 텃밭인 금산 농장에서 밭매고, 나머지 2~3일은 대전에서 생활하며 남편은 ‘플루트 동호회’, 자신은 ‘색소폰 동호회’에서 연주를 하는 것이 가장 즐겁다고. 그날 집으로 오는데 인자무우(仁者無憂), 어진 사람은 근심이 없다는 옛말이 떠올랐다. 진정한 가족애의 표상처럼 홍 여사의 미소 짓던 인자한 모습은 우리의 어머니를 보는 듯 시린 내 마음을 훈훈하게 했음은 더 말할 나위가 없어서였다.
* 대전 출생. 2010 계간『시에』로 수필 신인상 당선. 수필집 『내 마음의 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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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인자무우 반성이되네요 감사합니다^^
어진 사람은 근심이 없다는 말 정말 좋지요?
댓글 감사드립니다
두분의 모습이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나온 정다운 부부가 떠오르게 하네요
인자무우라..
참 좋은말입니다
그날 정말 좋았어요. 요리도 맛있고, 경치도 좋고요..
게다가 두분 모두 인자한 모습으로 담소를 나누듯 말하는데 정말 good 이었어요
네 넘멋지분들입니다
감사합니다
소소한 일상일지라도 감동은 오래가는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