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재를 시작하며 >
- 글 쓰기는 문장을 짓는 기술이 아니라 마음이라는 어느 작가의 말만 굳게 믿고 감히 나의 인생 이야기 일부를 서술하려고 한다. 문장이 매끄럽지 못 함은 필자가 글로 밥을 먹고사는 전문 글쟁이가 아님을 모두가 알기에 이해해 주시리라 믿는다.
- 나의 인생 견문록은 모두 26개의 독립적인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으나 이를 순서대로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읽기를 권한다. 필자의 과거 시간여행이 한층 더 흥미롭게 다가올 것이다.
청운의 꿈
- “ 청운의 꿈을 대한항공과 함께 “ 였는지 “ 대한항공과 함께 청운의 꿈을 “ 이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하여튼 당시 다수 유수 일간지 1/3면을 할애한 직원채용공고가 그랬다. 광고 카피가 먹혀들었는지 전국에서 인재 (?) 들이 구름 같이 몰려들어 놀란 회사가 부랴부랴 마련한 서대문 근처 모 중고등학교에서 수천명이 입사시험을 치뤘다.
- 지금처럼 이.태.백.이니 청년실업이니 하는 말은 없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대기업 선호사상은 변한게 없어 대기업 입사는 바늘 구멍이었다.필자의 경우 전공, 소질, 취미를 따질 겨를이 없었고 닥치는대로 시험을 보아 그 중 합격하는 곳이 있다면 어느 곳이건 들어 가서 밥벌이를 시작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있었다.
- 그리고 대한항공이 그 첫번째 도전이었다. 다행히 그곳에 합격하는 바람에 두번, 세번 머리를 싸매고 끙끙거리며 시험을 치루고 또 치뤄야하는 수고를 면하게 되었다.
- 청운의 꿈을 품고 대한항공에 입사하였으나 곧 꿈이 밥을 먹여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출근시간은 있으나 퇴근시간은 없었다. 당시 북한에서 실시하던 별보기 운동이 그대로 남한땅에 재현 되었던 것이다. 겨울에는 거의 매일 새벽에 별을 보며 출근하고 한밤에 별을 보며 퇴근하곤 했다. 토요일도 근무헸고 일요일도 신입직원의 당직이 예사였다.
- 기안문을 작성하는 것도 그랬지만 특히 해외로 나가는 영문편지와 관련해서는 엄청 수모를 겪기도 했다. 어떤 때는 이따위를 편지라고 써왔냐고 하며 면전에서 그 편지를 박박 찢어 던지는 상사를 보며 제발 큰소리를 치지 말았으면 하고 바랬다. 훤히 트인, 100여명의 직원이 근무하는 사무실에서 옆 부서의 입사동기들 보기가 정말 창피했던 것이었다.
- 그런 일이 있던 날은 우리 동기생끼리 모여 술잔을 나누며 울분을 토하기도 했고 때로는 우리의 성장과정 중 하나라고 꾹 참아 나가자고 하기도 했다. 거의 대부분 군대를 필한 우리 동기들은 인내심 하나는 알아줄만 했다. 그러나 몇몇은 이런 고압적인 분위기를 못견디고 입사 1년도 안되어 퇴사 하게 된다.
- 대한항공은 국내에서 버스사업으로 기반을 다진 한진상사 ( 이하 한진 ) 가 월남특수로 당시 한국에서 현금이 제일 많은 기업으로 떠오르고 급기야는 만년적자로 허덕이던 대한항공공사 ( 이하 공사 ) 를 인수하게 됨으로써 탄생하였다. 따라서 기존의 한진멤버는 점령군(?) 의 위치로 공사에 진주 하였으나 항공 업무는 처음이어서 주요 포스트에서 공사출신들의 입김은 여전히 셌다.
- 한진멤버와 공사직원들 간의 헤게모니 쟁탈전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그 와중에 입사 하게된 우리들은 비록 신입이었지만 “ 공채 “ 라는 자부심 만은 아주 강했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에서 3년을 보내다 보니 제법 업무도 익숙해졌을 뿐만 아니라 우린 이미 눈치 9단에 도달해 있었다.
- 우리 상사중 누구는 윗 사람에게 아부하느라 하도 양손으로 손바닥을 너무 비벼 손금이 다 닳아 없어졌고 누구 누구는 술을 워낙 좋아해서 회식날 술을 한번 마셨다 하면 통금시간까지 마시고 파출소에 찾아가 그곳에서 하루밤 신세를 지곤해서 그곳 순경까지도 그들을 잘 알고 있었는데 우리는 그런 상사를 사육신 ( 죽음을 무릎쓰고 아니 그 무서운 통금도 무릅쓰고 술을 마시는 기개를 높이 사서 ) 으로 불렀다. 반면에 술은 좋아하지만 술을 마시다 통금시간이 가까워지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진다는 상사들은 생육신 ( 통금에 걸리지 않고 살아서 귀가 하기에 ) 으로 부르곤 했다.
- 통금뿐 이나라 김포공항에서 부산/제주 등등 국내선을 탑승하는데도 주민등록증을 보여주고 국내선탑승신청서를 작성했어야만 했던 시절이었다. 국내선 탑승신청서는 내외국인 공용으로 항목별로 윗부분은 한글, 아래는 영어로 된 가로 10센티 세로 20센티 정도의 크기였으며 성명/주민등록번호/성별/생년월일/주소 등등을 적게 되어 있었는데 임석 경찰이 주민등록증과 이 탑승신청서를 대조한 후 주민증은 돌려주고 신청서는 공항직원이 회수하도록 되어있었다.
- 이 탑승신청서의 성별란 바로 밑에는 영어로 SEX 라고 프린트 되어있었다. 그런데 기끔 성미 급한 승객들이 영어의 SEX만을 읽고 이를 곡해 ( ? ) 해서 “ 가끔 “, 또는 아주 구체적으로 “ 주 2회 “, “ 월 1회 ” 등으로 자신의 성생활의 일부를 노출 시키는 일이 있어 우리 직원들의 폭소를 자아내게 했다.
- 세월은 흐르고 흘러 우리 신입들이 4년차가 되고부터 해외발령이 나기 시작했다. 회사가 무섭게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국내선 몇군데 그리고 국제선 이라고 해 봐야 도쿄/오사카/타이페이/홍콩이 전부 였는데 수년사이에 호노룰루/ LA/ 방콕/ 싱가폴/ 마닐라노선이 개설되고 그리고 중동노선/구주노선 취항을 앞두고 있을 때 였다.
- 필자는 마음속으로 제1지망 미주, 제2지망 일본을 꼽곤 열심히 영어 공부를 했으며 일본어도 남들 모르게 학원까지 다녔지만 그 높은 곳은 언감생심이었다.필자보다 학벌/인연/지연이 좋고 지략과 언변이 뛰어난 선배/동기/후배가 너무 많았다. 그러나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 그놈,일 참 열심히 하던데….” 라는 전무님 말씀 한마디에 드디어 홍콩으로 발령이 났다. 입사 5년만의 일이었다.
첫댓글 정회원님의 '인생 견문록'을
저는 소설처럼 재미있게 모두 읽었답니다.
특히 모텔에서의 이야기 ...
흥미진진, 계속 기대합니다.
지난번 고시조 낭송,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고시조 낭송, 그리고 점심까지 정말 재미있는 시간이었습니다.
- 소교님을 비롯, 준비하시는 분들에게는 미안하지만 한 달에 한번씩은 어떠신지?
- 당시 맨 땅에 헤딩하듯 시작한 모텔업은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그동안, 신년 초와 방학기간인 8월 빼고는 몇 년 전까지는 매달 대면모임을 했답니다.
그러다 팬데믹으로 서리(?)를 맞았고, 어쩔 수 없이 온라인으로 하다가, 요즘은 병행하고 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렇게 진행했는지 아~~ 득 하네요. ㅎ
관심 주셔서 고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이 곳에 발을 들인 후 몇 분 글을 읽느라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님의 글은 자유분망하면서도 쉽게 쓰셔서 재미있게 읽고 있는데
대한 항공이야기라 댓글을 답니다.
저는 한진(제가 입사 치를 때는 그룹으로 했습니다)그룹에 시험을 치렀는데
필기는 합격하고 면접에서 떨어져서 낙방을 했죠.
낙방 이야기는 저도 어딘가에 쓰긴 썼는데 약간은 기가 막힌 이유 때문에..
ㅎㅎㅎ anyway.
붙었다면 아마 유화 증권인가 (이제는 이름마저 가물가물)에 다녔을 지도...
그 기억으로 댓글을 달게 되는군요.
다음 에피소드가 매우 기대됩니다.
- 낙방 사유가 궁금합니다.
- 증권사 같으면 당시는 한진증권 (?)이 아닌가 합니다.
- 나중에 메리츠증권으로 이름이 바뀌었지요.
- 재미있게 읽으셨다니 감사합니다.
데모했다고 답한 것이 이유였습니다.
면접관 얼굴이 이그러지더군요. ㅎㅎㅎ
여의도의 증권사 건물 꼭대기에서 시험 치룬 기억 밖에는...
이름이 한진은 아닌걸로 기억하는데
워낙 오래 전 일이라...
다음 에피소드 기다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