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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스크랩 박정희(3) 배신과 생존
베스 추천 0 조회 14 14.05.19 13:5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1946년 5월 박정희는 미군이 제공한 LST(landing ship for tanks,상륙작전용의 수송함)를 타고 천진을 출발, 며칠 후 부산에 도착했고, 그때 그의 나이는 29세였다. 1939년 가을 맨손으로 만주로 향했던 그는 만주와 일본의 사관학교와 만주군에서 집념어린 노력을 경주했지만, 일제의 패망으로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고 다시 맨손으로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20대의 한창 시절을 다 바쳤던 그의 첫 야심은 좌절되었다.

 

고향에 돌아온 그는 한동안 실의에 빠져 지냈다. 그러나 그는 그해 9월 서울로 올라가 후에 육군사관학교가 된 조선경비사관학교에 제2기로 입학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게 된 것이다. 대부분의 입학생들은 20대 초반이었으나 박정희는 29세로서 나이가 많은 축에 들었다. 이들 2기생 중에는 10 · 26 때 박정희와 악연을 맺게 된 김재규(金載圭)도 끼여 있었다.

 

1946년 12월, 3등으로 경비사관학교를 졸업한 그는 졸업과 동시에 소위로 임관되어 춘천 제8연대에 배치되었다. 그곳에서 박정희는 얼마 동안 근무하다 1947년 9월 조선경비사관학교 중대장으로 옮겼다. 이때 그는 중위를 거치지 않고 곧장 대위로 승진했고, 이후 여기에서 소령까지 진급했다. 제1중대장을 맡고 있었던 경비사관학교 시절 박정희는 나중에 그와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는 다수의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우선 그는 장도영(張都暎)을 여기에서 만났다. 장도영은 당시 경비사관학교의 행정처장을 맡고 있었다. 또한 박정희는 1중대 2구대장 황택림(黃澤林), 2중대장 강창선(姜昌善), 2중대 2구대장 김학림(金鶴林) 등과 같이 근무하게 되었다. 이들은 1년 뒤 숙군 과정에서 남로당의 조직원으로 기소되어 사형당했다. 이들 중 강창선은 박정희의 남로당 연계와 관련이 있었다 한다. 다른 한편, 박정희는 교관으로서 당시 5기생들의 교육을 맡고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박치옥(朴致玉), 문재준(文在駿) 등 나중에 5.16군부 쿠데타에 가담했던 다수의 인물들을 만나게 된다. 5 · 16군부 쿠데타 때 5기생들은 주로 군대를 동원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경비사관학교 근무 중 여수· 순천 사건으로 광주의 토벌사령부에 잠시 내려갔다 온 박정희는 1948년 11월 11일 여수,순천 사건 이후 숙군 작업을 벌이던 군 수사당국에 의해 체포되었다. 남로당의 비밀 당원이라는 죄목이었다. 그가 남로당과 관계를 맺게 된 것은 1946년 대구 10월항쟁 당시 죽은 그의 형 박상희와 관련이 있었다.

 

1946년 9월 총파업에 뒤이은 10월 초, 대구와 경북 지역은 인민항쟁의 불길 속에 휩싸였다. 일제 때부터 항일 운동을 해왔고 당시 선산군 민전사무국장 겸 인민위원회 내정부장을 역임하고 있던 박상희 역시 군중들과 더불어 구미경찰서를 공격했고 서장 이하 서원 16명을 유치장에 감금했다. 그러나 대구, 왜관 방면이 경찰에 의해 질양되자 그들은 서장과 서원들을 풀어 주고 그들의 협력을 요청했다.

 

그러나 10월 6일 진압군이 들이닥치자 도주하던 박상희는 경찰의 총을 맞게 되었다. 박상희의 죽음을 목격한 누이 박재희(朴在熙)에 의하면, "남편이 이불에 둘둘 말린 피투성이의 박상희를 업고 왔고...총 세 발을 맞은 박상희는 곧 숨을 거두었다" 한다.

 

형이 죽을 당시 경비사관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있었던 박정희는 형의 장례식에 내려가 보지도 못했고 아무에게도 그런 내색을 비추지 않았다 한다. 그러나 어렸을 때부터 그가 가장 따랐던 형의 죽음이 그에게 심대한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박정희는 그의 자술서에서 남로당에 입당하게 된 동기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나중에 집에 내려가 보니 그 유족을 남로당 군사부 책임자인 이재복(李在福)이 잘 보살펴 주고 있었고 박정희에게도 <공산당 선언> 등의 책자를 주면서 형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며 남로당 가입을 권했다는 것이다.

 

김창룡(金昌龍)이 활약했던 당시의 대대적인 숙군 작업은 말썽도 많았지만 여하튼 결과적으로 군의 좌익 계열을 근절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숙군을 통해 전군의 5% 정도인 4천 7백여 명의 장병들이 처벌을 받았고, 그 중 수백 명이 총살 또는 징역에 처해졌다. 그러나 그러한 숙군 과정에서 유독 박정희만은 살아 남았다. 죄상대로 하자면 거의 총살이나 무기징역이 분명한 그가 어떻게 살아 남을 수 있었을까?

 

우선 그가 살아 남을 수 있었던 것은 모든 것을 순순히 자백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자백을 통해 그는 이념적인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형 박상희의 죽음 때문에 생긴 복수심으로 남로당에 가입한 감상적 공산주의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살아 남을 수있었던 보다 중요한 원인은 그가 군부 내 남로당 조직 명단을 순순히 털어놓았고, 이를 통해 군부 내 조직원들, 특히 육사 내부의 남로당 세포들이 다수 적발되었다는 점 때문이었다. 즉 그는 그의 동료들을 배신함으로써 자신의 생존을 도모했던 것이다.

 

그가 군부 內 좌익 색출에 협조적인 태도를 보이자, 다수의 사람들이 그의 구명에 나섰다. 우선 숙군을 직접 담당했던 김창룡과 김안일(金安一)이 당시 육본 정보국장이었던 백선엽(白善嬅)에게 숙군에 협조적인 박정희의 구명을 요청했고, 이에 따라 박정희를 만나본 백선엽은 박정희가 구명을 부탁하면서도 '시종 의연한 자세를 잃지 않아' 그를 구원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백선엽은 하우스만(J. Hausman) 대위와 미 군사고문 단장인 로버츠(W. Roberts 준장에게 박정희의 구명을 요청했고, 하우스만은 박정희의 형 집행 면제를 이승만(李承晩)대통령에게 건의했다 한다. 또한 백선엽은 육본에 재심사를 요청했다. 그 밖에도 박정희의 구명에는 정일권(丁一權), 원용덕(元容德) 등도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군 내 만주 인맥들이 박정희의 구명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것이다.

 

이러한 구명 노력의 결과, 박정희는 12월 말경 서대문 형무소에서 나을 수 있게 되었다. 불구속 상태로 진행된 군사재판은 이듬해 2월 8일 그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지만 형 집행정지 처분이 취해졌다. 그러나 형 집행은 면했지만 파면은 면할 수 없었다. 이로써 육본 정보국의 전투정보과장으로 근무하고 있던 그는 군복을 벗게 되었다. 게다가 업친 데 덥친 격으로 불행이 연이어 그에게 닥쳐왔다. 동거하고 있던 여인이 그 일로 인해 그를 떠났고, 또한 박정희의 어머니가 죽은 것이다. 일제의 패망 이후 다시 쌓아올린 노력이 이 사건으로 또 다시 무너져 내렸고 개인적인 비극까지 점쳤던 이때가 박정희로서는 가장 고통스러웠던 시기였을 것이다.

 

이후 박정희는 백선엽의 선처로 문관 신분으로 정보국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그러나 문관으로 근무할 당시 박정희는 나중에 5 · 16군부 쿠데타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육사 8기생들을 여기에서 만나게 되었다. 즉 1천 명이 넘는 졸업생 중에서 성적 25등 내에서 선발된 김종필(金鍾泌), 이영근(李永根), 석정선(石正善), 이병희(李秉禧) 등 15명의 8기생들이 박정희가 문관으로 근무하고 있던 정보국 전투정보과에 배치되었던 것이다. 박정희는 이들에게 가정교사처럼 대해 주었고, 동시에 8기생들은 정확한 상황 판단력 등을 지닌 그를 믿고 따르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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