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17일 [연중 제15주간 월요일]
마태오 10,34-11,1
두려운 양 떼가 되느니 외로운 늑대가 되련다
강형욱 훈련사는 TV와 유튜브 방송을 하며 개통령이라 불릴 정도로 반려견을 키우는 이들에게
인기가 많습니다.
그래서 마냥 행복할까요? 요즘 그의 모습은 조금은 슬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는 훈련이 안 된 강아지들을 좋은 반려견이 될 수 있도록 훈련하고 많은 조언을 해 줍니다.
이 과정에서 견주들에게 화를 낼 때도 있고 호통을 칠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반려견을 떠나보낸 가족들에게는 위로도 해 줍니다.
한 번은 성탄절 선물로 반려견을 잃은 가족들에게 그 반려견과 똑같이 생긴 인형을 만들어 선물로 위로를 해 주는 방송을 진행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가족들의 사연을 들으며 자신이 눈물을 흘립니다.
자신도 얼마 전 반려견이 하늘의 별이 되었는데, 자신은 정작 삶에 치여 누구에게도 위로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도 위로받고 싶었나 봐요….”
‘고독한 훈련사’에서 훈련사 24년 차에 찾아온 슬럼프에 대해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뭐라고 잘 키우고 있다 못 키우고 있다를 말할 수 있나…. 모르겠어요.
그냥. 아직도 개에 대해 더 알고 싶고 배우고 싶고 세상의 모든 개를 만나고 싶어요.
나도 좀 위로를 받아보고 싶어요. 잘하고 있다고.”
최고가 되면 다 좋을까요? 이렇게 외롭고 고독합니다.
누구도 위로해주지 않습니다.
모두가 나의 위로가 있어야 하는 사람들뿐입니다.
그런데도 그 사람은 계속 사람들에게 칼을 주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혹은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라고 하십니다.
최고에 있는 사람이 결국 주게 되는 것이 이러한 것들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세상에서 사랑받을 수 없습니다. 안식이 없습니다.
다 안식을 요구하는 사람들만 만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인 우리도 이 세상에 칼을 주어 집안 식구가 원수가 되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맞추기 위해, 세상에서 인정받기 위해 목표를 낮추겠습니까?
최고가 세상에서 안식을 누릴 수 없는 이유는 세상의 생태 교란종처럼 되기 때문입니다.
잘살고 있는 세상 사람들을 교란하는 이들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박해받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에게 모든 이들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도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무리에 속하는 것보다 옳은 방향으로 고독하게 나아가는 편이 낫습니다.
백종원 씨가 나폴리에서 음식 장사를 하는 프로그램에서 사람들이 줄을 많이 섰는데 다 감당할 수 없을 때 생각해 낸 것이 ‘도시락’이었습니다.
굳이 그런 것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데 도전해보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스태프들이 10유로에 먹는 도시락이 너무 허접하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태리는 식사를 매우 오래하기 때문에 도시락으로 빨리 먹고 끝내는 것은 생리에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도시락을 팔아도 그 상태가 매우 열악합니다.
실력이 있는 사람으로서 도전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는 비주얼이 좋은 도시락을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나폴리의 10유로 도시락을 전멸을 내고 가는 거야. 내 특기거덩, 시장 교란시키는 거.”
백종원 씨는 요식업의 전문가이기 때문에 어떤 틈으로 들어가면 성공할 수 있는지가 보입니다.
그것이 보이면 그 시장은 교란 상황이 일어납니다.
최고는 어쨌거나 세상을 교란합니다.
그러면 그 세상에서 사랑받을 수 있을까요? 당연히 제거 대상이 됩니다.
말씀을 전하는 이들도 이와 같습니다.
돈과 맛있는 것, 명예욕과 싸워 이겨야 한다고 하면 이 세상에 누가 좋아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더라도 방법을 찾으려고 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백종원 씨는 예산 국밥 거리에 분열이 일어나서 결국엔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또 골목상권에 독점이 심하다고 국회에 불려 가서 “의원님, 너무하십니다”라고 말해야 했습니다.
그러면 이런 것 때문에 포기해야 할까요? 절대 그래 보이지 않습니다.
약한 양 떼에 속하느니 고독한 늑대가 되는 것을 선택할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나아가야 할 방향입니다.
차갑게 있느니 불을 지르는 사람이 되고 비겁한 평화 속에 머무느니 칼을 주는 사람이 됩시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7월17일 [연중 제15주간 월요일]
마태오 10,34-11,1
결국 다 떠나가고 사라집니다. 오직 한 분 영원불멸의 하느님, 그분만이 남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식별력과 함께 정확히 이해해야 할 구절입니다.
착한 사람들을 괴롭히고 죽음으로 몰고 가는 이단이나 사이비 교주들이 악용하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신천지를 비롯한 몇몇 이단에 빠진 자녀를 구해내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계시는 부모님들을
참으로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들딸들은 사이비 교주에게 얼마나 세뇌되었는지, 더 이상 아버지를 아버지로 보지 않습니다.
가족을 가족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마태 10,35-36)라는 말씀은 절대로 아들이 아버지와 불목하고,
딸이 어머니와 소식을 끊고,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등을 돌리라는 말씀이 절대 아닙니다.
그보다는 이 세상 모든 대상이나 가치 그 위에 하느님을 두라는 강조 말씀입니다.
오늘날 안타깝게도 하느님의 위치가 급격히 추락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예 하느님께서 아니 계신 듯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오늘 우리의 모습을 보시는 하느님께서 얼마나 마음이 아프실까, 걱정됩니다.
세상 만물의 창조주께서 우리를 당신 모상대로 만드셔서, 이 아름다운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구세주 하느님께서 우리를 너무나 극진히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 외아들조차 우리에게 선물로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과분하게도 그분을 통해 우리를 부활과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너무나도 당연히 매일 아침 눈만 뜨면 백번 천번이고 감사드리며, 세상 모든 것 위에 그분을 모시고,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흠숭해야 마땅하겠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분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그분을 투명인간 취급하며, 그분 존재를 부정합니다.
그분과 너무 멀리 떨어져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큰 배은망덕이며, 얼마나 하느님께서 슬퍼하실 일이겠습니까?
오늘 과연 우리의 마음은 어디를 향해 있습니까?
그토록 우리가 애지중지하고 큰 가치를 부여하는 재물이나 부동산, 은행 잔고! 영원할 것 같지요?
어쩔 수 없이 세월이 흐르면서 그것들은 어느새 남의 손에 넘어가게 될 것입니다.
영원히 꼭 붙들 수 없는 것입니다.
그토록 우리가 사랑했던 인간 존재도 마찬가지입니다.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저만해도 그토록 든든한 보루였던 부모님, 형님, 존경했던 스승님, 은사님, 절친들, 정말이지 영원할 것 같았는데, 언제나 제 곁에서 든든히 저를 지켜줄 것 같았는데, 하나 둘씩 결국 다들 먼저 떠나셨습니다.
따지고 보니 결국 다 떠나가고 사라집니다.
사랑도 지나가고, 청춘도 지나갑니다.
젊음도 사라지고, 생명도 저물어갑니다.
결국 우리에게 최종적으로 남는 것은 없습니다.
오직 한 분 영원불멸의 하느님, 그분만이 남습니다.
이토록 고마우신 하느님에게 가장 큰 사랑과 존경, 흠숭과 찬미를 드리라는 교훈의 말씀이 바로 오늘 복음의 요지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15주간 월요일>
(2023. 7. 17. 월)(마태 10,34-11,1)
<가족은 끝까지 함께 가야 할 영적 동반자>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0,34-39).”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라는 말씀은, 두 가지 뜻으로 해석됩니다.
1) 예수님은 세상에 ‘참 평화’를(구원을)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기를 거부하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도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 분열과 갈등과
싸움이 생기고 박해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마치 예수님이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오신 것처럼 되어버립니다.
분열과 갈등의 책임은 예수님이 아니라 ‘안 믿는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이렇게 해석하는 경우에, ‘칼’은 분열, 갈등, 전쟁을 뜻합니다.>
따라서 예수님 말씀은, “나는 평화를(구원을) 주려고 왔는데, 사람들은 칼을(멸망을) 선택한다.” 라고 안타까워하시는 말씀이 됩니다.
2) 말씀의 표현에 초점을 맞춰서, “나는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의 거짓 평화와는 다른 ‘참 평화’이다(요한 14,27).
내가 주는 ‘참 평화’를 얻으려면, 세상의 거짓 평화를 단호하게 끊어버려야 한다.”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해석하는 경우에 ‘칼’은 거짓 평화를 잘라내고 끊어버리는 단호함을 뜻하는 말이 됩니다.>
“(식구들이)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라는 말씀은,
종교와 신앙 때문에 식구들이 분열되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그런 일이 항상 생긴다는 뜻도 아니고,
“식구들과 갈라서라.” 라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라는 말씀은,
“식구들을 원수로 삼아라.” 라는 뜻이 절대로 아니고, “신앙을 위해서라면 식구들을 버려라.” 라는 뜻도 아닙니다.
이 말씀은, 종교박해가 가정 안에서 일어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종교와 신앙 문제로 식구들이 분열되고, 식구들로부터 박해를 받는 상황이 되면, 신앙인은 어떻게 해야 할까?
앞의 16절에 있는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라는 말씀은, 가정 안에서 생기는 박해에도 적용되는 지침입니다.
가족은 ‘끝까지 함께 가야 할’ 인생의 영적 동반자입니다.
<우리는 가족이 ‘인생의 동반자’이면서 동시에 ‘신앙의 동반자’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어떤 이유로든지 간에 가족을 버리는 것은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내들도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여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남편들도 아내인 여러분의 말 없는 처신으로 감화를 받게 하십시오.
그들은 여러분이 경건하고 순결하게 처신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그리될 것입니다(1베드 3,1-2).”
‘말 없는 처신으로 감화를 받게 하는 것’, 그것이 곧
‘슬기롭고 순박하게’ 가정의 ‘참 평화’를 지키는 일입니다.
즉 식구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이 말씀은 식구들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37절의 “가족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라는 말씀은, 가족을 버리라는 뜻도 아니고, 가족을 사랑하지 말라는 뜻도 아닙니다.
이 말씀은, 구원을 방해하는 ‘현세적이고 육적인 집착’을 버리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가족’은 실제 가족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현세적인 것들에 대한 애착심과 집착을 상징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우리는 ‘식구들과 함께’ 구원받아야 합니다.
신앙인으로서 실천해야 하는 ‘사랑 실천’은 가정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이웃 사랑 실천의 첫 번째 대상은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사도들의 경우에, 그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따라나섰을 때, 가정을 떠났을 뿐이고, 가족을 버리지는 않았습니다.
코린토 1서를 보면, 베드로 사도를 비롯해서, 결혼해서 아내가 있는 사도들은 선교활동을 할 때 아내와 함께 다녔다는 말이 나옵니다(1코린 9,5).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라는 말씀은,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만나는 온갖 어려움들을 기꺼이 감수하라는 가르침입니다.
<내가 혼자 지기에는 너무 무거운 십자가라도, 가족이 함께 진다면 가벼워질 것입니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신앙생활의 궁극 목표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가족 없이 혼자서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면,
그 나라에서 무슨 행복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가족 없이 혼자서만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는 일이 ‘참 평화’가 될 수 있겠습니까?>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