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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을 들어서면 정전으로 이어지는 3단 돌길이 있다. 왕 세자 제관의 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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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를 지내기 위해 행차한 임금이 머무는 건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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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에 참석하는 임금의 복장, 머리에는 면류관을 쓰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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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의 각 한칸마다 왕들의 신위가 모셔져있고, 그 앞에는 판문으로 굳게 닫혀있다. 정전의 장식은 전혀 느낄 수 없으며, 붉은 석간주칠로 단순하게 단청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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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익랑으로 오르는 계단에는 구름문양이 새겨져있다. 구름은 곧 하늘로 오른다는 의미를 뜻하며, 바로 신들의 영역임을 암시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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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의 3칸으로 된 남문. 옛날 같으면 감히 얼신도 못할 곳이지만, 이제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구경하고 쉬어가는 곳이 되었다. |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조선500년의 임금이 한곳에 모여 있는 곳이 종묘다.
왕조시대에 종묘는 왕조의 뿌리를 상징하는 것으로,
나라의 기강이 해이해지면 종묘사직이 무너진다고 하여
나라를 지탱하는 근본으로 여겼기에 그만큼 중요하게 여겼고,
그에 따라 그 예를 다하기 위하여 임금의 승하일에 맞추어 제사지내고,
사계절 계절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한편 사직은 나라의 토지와 곡식을 주관하는 신령을 모신 곳으로
궁궐의 오른쪽에 단을 쌓아두고 사직신을 모셨다. '
한국과 중국의 왕조시대에는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주"나라 이후 어느 왕조에나 다 있었던 종묘와 사직이었다.
이 종묘에는 왕조시대 그 왕조를 창업하고
대를 이어온 왕들의 신위가 깃들어있는 위패를 모시고
왕조를 창업하고 이끌어온 지나온 시대의 선대왕들의 혼을 모시는
신주(神柱)를 만들어 한 칸에 한 분씩 모셔두고 제사를 지냈다. '
제사의 의미는 임금이 승하하신 날에 혼령의 안부를 살피고,
그동안 잘 보살펴준 은혜에 감사드리며
현재와 미래의 왕조를 더욱 잘 보살펴 달라는 기원의 의미가 있었고,
이를 시행하는 모든 임금 이하 대신 그리고 모든 백성들에게
감히 넘볼 수 없는 왕조의 위엄과 권위를 느낄 수 있게 함으로
과거에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변함없이
이 왕조의 영원한 번창을 위해 충성을 다할 것을 스스로 다짐하게 하는 의미도 있었다.
하지만 지나버린 왕조의 종묘는 보존되지 못했다.
따라서 아무리 위대했던 왕조라도,
왕조가 바뀌면 새로 들어선 왕들은 자신들의 선대왕들과 자신들의 후대왕들은 잘 지켜져야 했지만,
지난날의 왕조의 종묘는 돌볼 가치가 별로 없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지난 왕조의 종묘는 하나도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한국에도 오직 조선시대의 종묘만이 남아있고,
그 이전 왕조인 고려의 종묘는 현재의 개성(개경, 開京)에 고려 종묘가 있었지만,
이미 사라지고 없는 것이다.
조선시대 그렇게 귀하게 여기던 임금의 혼을 모신 종묘였지만,
조선 창업 후 200년 만에 닥친 임진왜란은 피하지 못했다. 그
래서 당시 임금이었던 선조도 어쩔 수 없이 의주로 몽진하면서
종묘를 그대로 둔 채 선대왕들의 위패만을 모시고 의주까지 피난하였다가
다시 환국한 후에 불타버린 궁궐과 함께 종묘를 재건하려 했지만,
피폐해진 살림살이로 선조는 종묘재건을 못하고 죽고,
그의 아들 광해군이 종묘를 재건했으며,
피난했던 선왕들의 신주를 그대로 다시 이곳에 모셨다.
그래서 건물은 그때 다시 지은 새건물이었지만
신주만은 태조 이성계부터 조선 마지막 황제인 순종까지 그대로 간직되어온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종묘는 일본군의 군사주둔지로도 활용되었다가,
밤마다 귀신들이 출몰하여 일본군들이 기겁한 일도 있었다 하며, 퇴각하면서 불태워 버렸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종묘를 재건했던 선조의 아들인 광해군은
왕좌에서 쫓겨나 자신이 세운 종묘에 들지 못하고 말았다.
이후 조선의 임금들은 차례차례 종묘의 정전에 모셔졌고,
다시 조선말 나라가 망하는 처지에 다시 위기가 찾아왔지만,
다행히도 종묘는 일제를 넘기고,
한국전쟁도 무사히 넘기게 되어 현재의 모습으로 의연하게 서있게 되었다.
지난 시대 같으면, 과거의 왕조이기에 사라졌을 지도 모르는 종묘는
우리의 선조들의 왕조라는 가치가 부여되어,
이제 세계 어디에서도 그 유래가 없는 긴 왕조기간인 500년을 유지해온
한 왕조의 모든 임금의 신위가 봉안되었고,
그와 더불어 중국에서도 사라지고 없는 제사 때 행해지던 종묘제례악까지도
그대로 전수되어 의미와 품격을 그대로 간직한 것이 무형유산으로 인정받아
종묘건축물과 함께 종묘제례악이 세계문화유산이 되었다.
서울 한 복판에 있으면서, 궁궐에 비해 찾는 이가 드물지만,
한국 건물 가운데서는 단일 건물로 가장 넓이가 큰 건축물이 바로 종묘 정전이다.
정전 앞에는 넓은 마당이 있고 넓은 마당에서는 제례 때 일무를 비롯하여
신들 앞에서 춤을 추어 선왕들의 영령들께 예를 다했다.
정전의 건물과 마당 주변에는 높은 담장이 설치되었다.
종묘의 정전 건물은 크고 길지만
궁궐건물과는 달리 팔작집이 아닌 단순한 구조에 맞배집으로 지어져 있어,
오히려 절제미와 근엄함이 느껴지는 건물이다.
세계의 건축가들이 한국에 와서 보고 가장 감명을 받는 건축물은
궁궐의 화려한 건축물들이 아니라, 바로 이곳 종묘의 정전에서라고 하니,
한국인이라면 당연히 한 번쯤은 꼭 봐야할 것이다.
특히 겨울 하얀 눈이 쌓인 정전의 분위기는 엄격함과 숙연함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왕조시대에는 종묘와 사직으로 국가의 근본을 삼았다지만,
민주공화국 시대에는 무엇을 근본으로 삼고 이를 형식화 하여 다스릴 것인지
고민해 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왕조시대에 종묘와 사직을 설치하고 또 선대 조상을 모신 국사당을 지어,
각종 중요한 날이면 종묘사직 국사당에 지극한 예를 함으로써
만조백관과 백성들이 국론통합의 계기가 된데 견주어,
현대 민주공화국 시대에는 어느 것으로도 통합은 못하고 분열된 현상만 보이는 상황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라도 반드시 동참해야할 국론통일의 장이 없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