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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피가 된 재앙(1)
출 7:14-25
1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바로의 마음이 완강하여 백성 보내기를 거절하는도다
15 아침에 너는 바로에게로 가라 보라 그가 물 있는 곳으로 나오리니 너는 나일 강 가에 서서 그를 맞으며 그 뱀 되었던 지팡이를 손에 잡고
16 그에게 이르기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왕에게 보내어 이르시되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나를 섬길 것이니라 하였으나 이제까지 네가 듣지 아니하도다
17 여호와가 이같이 이르노니 네가 이로 말미암아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볼지어다 내가 내 손의 지팡이로 나일 강을 치면 그것이 피로 변하고
18 나일 강의 고기가 죽고 그 물에서는 악취가 나리니 애굽 사람들이 그 강 물 마시기를 싫어하리라 하라
19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에게 명령하기를 네 지팡이를 잡고 네 팔을 애굽의 물들과 강들과 운하와 못과 모든 호수 위에 내밀라 하라 그것들이 피가 되리니 애굽 온 땅과 나무 그릇과 돌 그릇 안에 모두 피가 있으리라
20 모세와 아론이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행하여 바로와 그의 신하의 목전에서 지팡이를 들어 나일 강을 치니 그 물이 다 피로 변하고
21 나일 강의 고기가 죽고 그 물에서는 악취가 나니 애굽 사람들이 나일 강 물을 마시지 못하며 애굽 온 땅에는 피가 있으나
22 애굽 요술사들도 자기들의 요술로 그와 같이 행하므로 바로의 마음이 완악하여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
23 바로가 돌이켜 궁으로 들어가고 그 일에 관심을 가지지도 아니하였고
24 애굽 사람들은 나일 강 물을 마실 수 없으므로 나일 강 가를 두루 파서 마실 물을 구하였더라
25 여호와께서 나일 강을 치신 후 이레가 지나니라
출 7:14-25 / [첫번째 재앙]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바로가 저렇게 고집을 꺾지 않고 여전히 내 백성을 내보내지 않는구나 15) 아침에 너는 바로가 있는 데로 가거라 그가 물가로 나올 것이다. 그때 너는 강가에 서서 그를 만나거라. 그리고는 뱀이 되었던 지팡이를 손에 잡고 16) 바로에게 이렇게 일러라. `히브리 사람들이 섬기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임금에게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내 백성을 데리고 나와 그들이 빈들에서 나 여호와에게 제사 드릴 수 있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임금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십니다. 17) 여호와께서 바로가 그토록 고집을 부리니 그 때문에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게 될 것이라고 이르셨습니다. 보십시오. 내가 이 지팡이로 강물을 내리치면 강물이 모두 피가 될 것입니다. 18) 강에 사는 물고기가 모조리 죽고 강물에서는 악취가 코를 찌를 것입니다. 그러면 애굽 사람들은 그 물을 마시지 못할 것입니다.' 19)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셨다. `아론에게 지팡이를 잡고 애굽 땅에 있는 모든 물을 향하여 손을 펴라고 일러라. 곧 강이나 운하나 못이나 물이 고여 있는 곳이면 어느 곳이나 손을 펴라고 일러라. 그러면 그 모든 물이 피로 변할 것이다.' 심지어 나무그릇이나 돌 항아리에 있는 물 뿐만 아니라 애굽의 모든 물이 모조리 피로 변할 것이다.' 20) 모세와 아론은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그대로 다 실천하였다. 곧 바로와 그 신하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 지팡이를 들어 강물을 내리치니 그 물이 모두 피로 변하였다. 21) 강에 사는 물고기가 죽어 썩는 냄새가 코를 찔렀으며 애굽 사람들은 강물을 먹을 수 없었다. 이렇듯 애굽 땅은 온통 피바다가 되었다. 22) 그러나 애굽 마술사들도 마술을 써서 모세와 아론이 베푸는 일들을 그대로 행하자 바로의 마음이 굳어져서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 그대로였다. 23) 바로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발길을 돌려 왕궁으로 돌아갔다. 24) 강물을 마실 수 없게 된 애굽 사람들은 물을 얻기 위해 강가 여기 저기에 샘을 팠다. 25) [두번째 재앙] 여호와께서 나일강을 치신 지 이레가 지났다.
마음이 완악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내어 보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바로에게 하나님의 권세를 나타내는 나일 강이 피로 변하는 첫 번째 재앙이 시작됩니다.
그 뱀 되었던 지팡이를 손에 잡고(14-18)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지팡이를 던지니 뱀이 된 것을 보며 모세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확신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들고 있는 지팡이는 자신의 정체성을 알게 하는 물건이며 모세가 지팡이를 잡는 순간 자기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행위가 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바로의 마음이 완강하여 백성 보내기를 거절하니 아침에 너는 나일 강가에 서서 그를 맞으며 그 뱀 되었던 지팡이를 손에 잡고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나를 섬길 것이니라’ 하였으나 ‘이제까지 네가 듣지 아니하도다’ 그러므로 내 명령에 따라 그 지팡이로 강을 치면 피로 변할 것이며 강의 모든 고기가 죽어 악취가 진동하여 먹을 물이 되지 못하리라 하셨습니다. 더욱 두렵게 한 것은 나일 강을 시작으로 애굽의 모든 물, 강, 운하, 호수가 피로 변할 것이고 심지어 온 땅과 집 안의 나무 그릇, 돌 그릇에 담긴 물까지 저주를 피하지 못하리라 했습니다.
첫 번째 재앙 / 나일 강을 치니 그 물이 다 피로 변하고(19-25)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한 바로에 대하여 자신만이 하나님 되심을 나타내신 첫 번째 재앙은 애굽의 근간이며 생명줄인 나일 강물을 피로 변하게 하신 재앙입니다. 모세와 아론이 여호와께서 명하신 대로 바로와 신하들 앞에서 지팡이를 들어 나일 강을 치니 피가 되었고 강에서 죽은 고기의 악취가 온 땅을 뒤덮었습니다. 물을 먹지 못했습니다. 애굽의 요술사들이 나서서 자기들도 같은 이적을 보이자 바로의 마음이 다시 완악해져 궁에 돌아가 이 일을 무시했습니다. 고대 문명의 발생지가 모두 강으로부터입니다. 특히 고대 사회에서의 강의 존재는 그 나라의 발전과 생존에 매우 중요했습니다. 애굽은 나일 강을 중심으로 발전한 나라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알리고자 역사하신 첫 번째 재앙을 나일 강으로 선택하셨습니다. 바로는 자신들이 믿는 신과 그 능력으로 나라가 시작되었고 지금의 번영과 발전도 유지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나일 강은 이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로와 애굽 사람들은 모든 피조물을 만드시고 주관하시는 참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교만의 근원인 나일 강을 피로 변하게 하시는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만이 주권자 되심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적용: 자기의 근원을 하나님께로 두며 사는 자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며 우리의 삶 전체와 그 모든 환경과 여건, 그리고 앞으로 되어질 우리의 미래의 역사까지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믿는 믿음은 어떤 것일까? 자기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행위가 되었다는 말의 의미를 나눠봅니다.
미국의 어느 법관이 취임석상에서 ‘나는 한 때 무신론자였지만 내가 그리스도를 부인할 수 없었던 것은 내 아버지의 성경 말씀과의 일관된 생활로 인해서입니다. 그 후로 차츰 그리스도를 신뢰하게 되었으며, 성경이 내 삶의 나침반이 되었습니다.’라고 신조를 말하였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말씀과 일관된 삶이 가장 큰 전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 설 교 >
피 재앙
출 7:14-25 / 김영수 목사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歎息)하며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지키시기 위하여(출2:23-24,창15:13,출6:6-8) 모세와 아론을 지도자로 세웠습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을 애굽의 바로 왕에게 보내어 "만 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그 땅에서 내어 보내라 하셨으니 바로 왕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내어보내라"(출6:11)는 명령을 전달하게 하였습니다.
드디어 모세는 용기를 내어 애굽의 바로 왕 앞에 섰습니다. 그러나 바로 왕은 완악하고 광포하였기에 모세와 아론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바로 왕은 하나님보다 나일 강을 통하여 애굽 땅에 풍요를 가져다 주는 나일강의 신 '크놈'과 '하피'라는 신을 더 위대하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나일강은 수량이 풍부하였고 그 넓이와 길이가 장대하였습니다. (전체 길이 약 5,300㎞) 더욱이 나일강에는 매일 강렬한 태양이 비치기 때문에 반사열에 의해 수많은 수증기가 발생하여 하늘로 올라갔다가 이것이 모여 비구름을 만들고 뒤 이어 수많은 비를 뿌리기 때문에 강 주위에는 넓은 농경지가 육천년 동안이나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애굽 사람들은 나일 강을 "애굽의 아버지와 구원자"로 부르며, 또 나일 강에 사는 물고기와 생물들, 그리고 여기서 자라는 갈대와 꽃까지도 성스럽게 여겼습니다. 아울러 애굽 사람들은 한 여름에 나일강을 위해 전국에서 커다란 축제를 벌이는데 이때 행해지는 종교 예식은 축제와 춤과 일반적인 오락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처럼 나일강은 성스럽고 아름다웠으며, 모든 번영의 근원이고, 우상 숭배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나일 강물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고 강물이 변하여 피가 되었고, 물에서 악취가 났습니다. 이 같은 현상은 강물 뿐 아니라 모든 물과 하수, 운하와 못과 호수와 심지어 나무 그릇과 돌그릇에 있는 물까지 피로 붉게 물들었습니다.
하나님은 나일강의 기적을 '피바다'로 만들어 놓으므로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이 세상의 참 신(神)이요 축복과 능력의 신(神)임을 온 세상에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우리는 애굽 땅에 행하여진 열 가지 재앙을 먼저 살펴보고 그 중 첫 재앙인 '피의 재앙'에 대하여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열 가지 재앙
첫째 재앙 : 나일 강의 물이 피로 변하는 재앙 (출7:14∼25)
둘째 재앙 : 개구리들이 땅을 덮었고 애굽사람들의 집에까지 들어와 침상은 물론 밥상에
까지 뛰노는 재앙 (출8:1∼5)
셋째 재앙 : 이의 재앙 (출8:16∼19)
넷째 재앙 : 파리 떼가 애굽사람들의 사람들의 땅을 덮는 재앙 (출8:20-24)
다섯째 재앙 : 심한 악질로 가축들이 쓰러지는 재앙 (출9:1-7)
여섯째 재앙 : 독종이 사람과 짐승에게 붙어 허는 재앙 (출9:8-12)
일곱째 재앙 : 뇌성과 우박의 재앙 (출9:8-35)
여덟째 재앙 : 메뚜기 떼가 모든 식물을 먹어치우는 재앙 (출10:1-20)
아홉째 재앙 : 분간 할 수 없는 캄캄한 흑암(黑暗)이 삼일동안 땅을 덮는 재앙(출10:21-29)
열 번째 재앙: 사람과 짐승의 처음 난 것이 죽음을 당하는 장자의 재앙 (출11:4-8)
이러한 점진적인 진노의 재앙은 마지막 심판 때에도 비슷하게 나타난다고 요한계시록은 증거하고 있습니다.「나팔의 재앙」「 대접의 재앙」이 바로 그것입니다.(계21장) 언뜻 볼 때 모든 재앙이 급격하게 미치는 것 같지만 실상은 경고와 예고가 앞서 충분하게 주어졌기에 「지혜」있는 자는 분별하여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며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충분히 주어집니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불순종하며 주님을 받아드리지 아니하는 자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유황 불 못에서 고통하며 신음하게 될 것입니다.(계19:20,21:10,21:8)
Ⅱ. 재앙의 목적
그렇다면 사랑이 많으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왜 이 같은 재앙을 인간들에게 내리시는 것일까요? 그 목적이 무엇일까요?
그 첫 번째 목적은 거짓 신(神)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요, 여호와 하나님만이 이 세상의 참 신이심을 증거하기 위함입니다.
잠시 전에 '크놈'이라는 나일 강의 수호신과 '하피'라는 나일 강의 여신에 대해서 말씀드렸는데 애굽 땅에는 이러한 신(神)말고도 '오시리스' '불칸'이라는 신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더욱이 나일 강은 언제나 풍부한 수량의 물을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가 오든지 안 오든지 그들에게는 상관이 없다고 자만해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나일 강을 숭배하였고 이 강가에서 우상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애굽 백성들과 400년 동안이나 하나님을 잊고 종살이를 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 하나님만이 유일신 참 하나님임을 알게 하는데 큰 목적이 있었습니다. "나를 여호와인줄 알게 하리라"하나님을 진정으로 아는 것, 그래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출애굽을 행하신 하나님의 진정한 목적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한 민족만을 다스리시고, 그 민족에게만 복을 주시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세상을 창조하셨고, 모든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의 주권자이십니다.
출 18:10-11 "이제 내가 알았도다. 여호와는 모든 신보다 크시므로 이스라엘에게 교만히 행하는 그들을 이기셨도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 작은 것 같지만 실상은 큰 것입니다.
모든 지혜의 근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것! 작은 것 같지만 실상은 큽니다.
이것 때문에 그의 삶과 영원은 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할 수 만 있다면 쳐서, 고쳐서 하나님을 알게 하려 하십니다만 마귀는 할 수 만 있다면 이 모든 일을 대적하여 영벌(永罰)에 망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실을 깨닫게 하시려고 모세를 택하셨습니다. 모세는 위대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모세는 오히려 자신이 연약하다고 좌절하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바로와 모세의 모습을 보십시오. 이 두 사람의 모습이 너무나 대조적이지 않습니까?
애굽의 바로 왕 그는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지팡이 외에는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거기다가 모세가 이 일을 행할 때 그의 나이가 팔십이라고 했습니다. 기력이 쇠할 나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런 연약한 사람을 택하셨겠습니까? 그것은 이런 연약한 모세를 통하여서도 하나님께서 역사 하신다면, 세상의 그 아무리 강한 자라 할지라도 그 앞에서 꺾어질 수밖에 없는, 참 주권을 가지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연약한 사람을 통해서 역사 하실 때에,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의지하던 그 모든 우상들 역시 얼마나 헛되고 거짓된 것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재앙을 내리신 두 번째 목적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셨던 신실한 언약을 지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출6:8)
출애굽기 6장 4∼5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가나안 땅, 곧 그들의 우거하는 땅을 주기로 그들과 언약하였더니 이제 애굽 사람이 종을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呻吟)을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
이 약속은 아브라함과 했던 약속입니다. 창세기17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기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하나님은 그 언약을 기억하시고 성취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미 잊었을 것입니다. 그런 기대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기억하시고 언약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은 언약의 말씀을 꼭 이루십니다. 비록 그 언약이 약 4백년 후에 이루어졌지만 말입니다. 그러면 어떤 분은 무슨 약속을 400년 간이나 기다리게 하셨다가 이루시냐고? 따질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동안 가나안에 살고 있던 가나안 족속들은 죄악이 관영 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애굽이라는 곳에서 큰 민족으로 성장하여 가나안 땅을 인수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했습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시간이 걸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길던 짧던 그의 언약을 이루시는 능력의 하나님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할렐루야!
Ⅲ. 피의 재앙
여호와의 명령을 받은 모세는 아침 일찍 일어나 바로 궁의 근처 하숫가로 갔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바로 왕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하숫가에 나타났습니다. 바로 왕은 여느 때처럼 나일 강의 신(神)들에게 아침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나온 것입니다.
모세는 바로 왕 앞에 서서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왕에게 보내어 이르시되 <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나를 섬길 것이니라> 하였으나 이제까지 네가 듣지 아니하도다 여호와가 이같이 이르노니 < 네가 이로 인하여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느니라 볼지어다 내가 내 손의 지팡이로 하수를 치면 그것이 피로 변하고 하수의 고기가 죽고 그 물에서는 악취가 나리니 애굽 사람들이 그 물 마시기를 싫어하리라"(출7:16-18)고 담대하게 말한 후 지팡이를 들어 하수를 쳤습니다.
그랬더니 '짙푸른 강'의 뜻을 가진 녹색 나일 강이 피 빛으로 붉게 물들었습니다.
나일 강 만이 피로 붉게 물든 것이 아니고 하수와 운하와 못과 호수의 물들이 심지어 나무 그릇과 돌그릇에 담기운 물까지 모두다 피로 변했습니다.
이 같은 재앙은 하나님의 기적과 심판이 분명하고 확실하게 이루어진다는 사실과 하숫가에 물감에 탄 것이라는 거짓증언을 잠재우기에 충분한 사실입니다. 아울러 피의 재앙은 하루 이틀로 끝난 것이 아니라 일주일 동안이나 계속되었습니다. 그 결과 하수의 고기가 다 죽고 그 물에서는 악취(惡臭)가 심하게 났습니다. 사람들은 그 악취와 핏빛으로 물을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심한 갈증과 악취로 인하여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피의 재앙 앞에서 애굽 백성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와 위대함에 대하여 알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마음이 강퍅한 바로 왕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놓지 않았을 뿐 아니라 지하수를 파서 목마름의 갈증을 해결했습니다.(출7:25) 이렇듯 바로 왕은 자신의 권력과 힘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그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였으며 이 같은 완악함과 강퍅함은 물질적 풍요와 권력과 정치의 맛을 아는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주님 앞에 겸손하기를 원합니다.
바로 왕처럼 강퍅해서는 안 됩니다.
나의 완악함과 강퍅함으로 인해서 하나님이 내 삶 속에서 떠나서는 안 됩니다.
주께서 나를 떠나신다고 하는 것은 마치 물고기가 물을 떠난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사망이요, 죽음이요, 절망인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도자 모세의 모습입니다. 모세가 바로의 궁궐에서 생활하였을 때 얼마나 교만했습니까? 그리고 그 교만함과 완악함이 부끄러운 살인극을 불러냈습니다. 하지만 그가 미디안 광야에서 낮아지고 겸손해지니까? 하나님께서는 다시금 모세를 불러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는 영적 지도자로 세워주셨습니다. 이렇듯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하심을 믿고 겸손하게 행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위대한 일군으로 다시금 사용해 주실 것입니다. 아울러 부끄러움 없는 교회로 세워 주실 것입니다.
결론으로 말씀드립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능력이 모자라서 10번씩이나 나누어 애굽에 재앙을 내리신 것이 아닙니다.
더욱이 능력이 없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400년 동안이나 애굽의 포로로 묶어놓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서 우리와 우리교회에 IMF의 고통을 허락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10번의 재앙을 통해서 애굽사람이나 이스라엘 사람들이 믿고 있던 우상들을 한가지씩 깨뜨리신 것입니다. 다시말해 잊어버린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깨닫고 주님앞에 엎드려 그분의 도우심과 회복하심의 은혜를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 앞에 거듭난 백성으로 돌아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임한 고난과 어려움을 원망하거나 불평만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부족해서 우리를 어려운 시련과 곤경 속에 빠뜨리신 것이 아니라 고난을 통해 겸손을 알게 하시고 그분의 능력과 사랑을 깨달아 순종함 속에 감사함으로 주님께 나오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결단코 하나님의 자녀들을 세상에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합력 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어려움과 고난과 시련을 통해 겸손함을 깨닫고 주님 품에 돌아와 하나님이 예비해놓으신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맛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롬8:28)
이 귀한 사실을 믿고 오늘도 믿음 안에서 주님만 바라보며 담대하게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의 모습이 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열가지 재앙의 의미
출 7:14-19 / 서윤발 목사
Ⅰ. 서 론
필립 얀시라고 하는 사람이 책 한 권을 내었는데 제목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로' 하는 제목입니다. 그런데 국내에서 번역하는 사람이 그 책을 읽으면서 책 제목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제목이 '아, 내 안에 하나님이 없다'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제목이 더 낳다고 칭찬을 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는 하지만 하나님이 없이 살아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기도도 하고, 성경도 보고, 예배도 드리지만 사실은 우리가 늘 다른 것들에 정신이 팔려있다 보니까, 하나님을 알아가지 못하고, 또 모시고 살아가지 못하는 삶이 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가 가진 것 때문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우리가 의지하고 있는 그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래서 사실은 하나님 없는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무엇보다도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읽은 본문의 내용을 보면 애굽의 왕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내보내 달라고 하는 모세의 요청을 거절하고 나서 하나님께로부터 열 가지의 재앙을 받게 되었는데 그 열 가지 재앙중 첫 번째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출애굽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시고, 열가지 재앙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시면서 하나님이 가장 원하시는 한 가지 사실이 무엇인가를 알려 주고 계십니다.
Ⅱ. 거절하는 바로
모세가 애굽의 왕에게 찾아가서 자기 민족 이스라엘을 풀어달라고 부탁을 했을 때 애굽의 왕은 모세를 비웃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비웃으면서 모세의 요청을 거절했습니다. 바로는 모세가 와서 이스라엘을 풀어달라고 했을 때, 그 요청이 너무나 턱없는 부탁이고, 현실을 모르는 요청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이 당시 애굽은 비돔성이라고 하는 거대한 성을 짖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바로 그런 일에 동원되어서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는데 이 이스라엘 민족의 수가 이 당시 장정만 60만명이라고 했습니다. 엄청난 숫자입니다. 그러니 이런 거대한 공사에서 이스라엘민족이 빠져버린다면 일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노예처럼 전락되어서 무료로 일을 하고 있는데 이런 사람들을 지금 내보낸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또, 모세가 애굽의 왕을 찾아왔을 때 모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그 일을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바로가 생각할 때에는 사실 우스운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바로가 생각할 때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 보다는 애굽의 신들이 더 강한 능력을 가졌다고 여겼습니다. 애굽의 신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보다 강하기 때문에 애굽은 이스라엘 민족들을 노예로 만들 수 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만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애굽의 다른 신들보다 강하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수 백년 동안 애굽의 노예로 있을 리가 있겠는가 그런 생각입니다. 그러니 바로가 볼 때 이 모세라는 사람이 허름한 옷을 입고 와 가지고는, 자기들의 그 약한 신의 이름을 대면서 자기 민족을 풀어달라고 요청하니까 비웃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오히려 더 많은 일을 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비난하고 저주했습니다. 모세는 상처를 받고 힘이 빠져 버렸습니다.
Ⅲ. 하나님께서 세워 두신 계획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실망하고 힘이 빠진 모세에게 다시 나타나셔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또 다시 애굽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바로에게 다시 말씀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번에도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절했습니다. '나는 입이 둔한 자입니다. 바로가 어찌 내 말을 듣겠습니까?' 모세는 낙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 낙심한 모세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7장 1절을 보니까 "볼찌어다 내가 너로 바로에게 신이 되게 하였은즉" 그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모세로 하여금 신이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바로가 볼 때 모세가 한심한 사람으로 보이겠지만 결국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역사하셔서 나중에 바로가 볼 때는 모세가 신처럼 여겨지도록 만드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앞으로 되어질 일들에 대하여 몇 가지 말씀을 주셨습니다.
1) 첫째는 3절을 보니까 하나님께서 많은 표징과 이적들을 이 애굽 땅에 행하시겠다는 것입니다.
2) 둘째는 4절을 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의 마음은 강퍅하여 져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리라는 것입니다.
3) 그리고 셋째는 하나님께서 그 손을 애굽에게 더하여 여러 가지 큰 재앙들을 더 내리시고 그래서 마침내 하나님의 백성을 애굽에서부터 이끌어 내실 그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애굽의 사람이 하나님을 여호와로 알게 되리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이 위대한 출애굽의 사건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신 한 가지 사실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출애굽의 사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부터 벗어났다고 하는 그 사실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하였다는 그 사실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신 바로 그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뿐 아니라, 애굽의 사람들까지 이 출애굽의 전 역사를 보면서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진정으로 아는 것, 그래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출애굽을 행하신 하나님의 진정한 목적이라고 밝히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한 민족만을 다스리시고, 그 민족에게만 복을 주시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세상을 창조하셨고, 모든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의 주권자라는 그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실을 깨닫게 하시려고 모세를 택하셨습니다. 모세는 위대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모세는 오히려 자신이 연약하다고 좌절하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바로와 모세의 모습을 보십시오. 이 두 사람의 모습이 너무나 대조적이지 않습니까?
애굽의 왕인 바로는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일을 행할 때 그 나이가 팔십이라고 했습니다. 기력이 쇠할 나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런 연약한 사람을 택하셨겠습니까? 그것은 이런 연약한 모세를 통하여서도 하나님께서 역사 하신다면, 세상의 그 아무리 강한 자라 할지라도 그 앞에서 꺽어질 수 밖에 없는, 참 주권을 가지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연약한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실 때에,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의지하던 그 모든 우상들 역시 얼마나 헛되고 거짓된 것으로 드러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Ⅳ. 첫 번째 재앙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모세가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서 애굽에 열가지 재앙을 일으키게 되는데, 그 열 가지 재앙중 첫 번째 재앙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열가지 재앙이라는 것은 단지 엄청난 힘을 가지고 애굽과 바로를 누르는 그런 의미만은 아닙니다. 이 열가지 재앙의 하나 하나는 사실은 모두가 다 애굽이 믿고 의지하던 그 모든 우상들이 얼마나 거짓된 것들인가를 드러내신 일들입니다.
본문을 보면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아침에 일어나서 나일 강가에 나가 있으니까 마침 바로도 그 강가로 나와서 모세를 만나게 됐습니다. 모세는 바로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다고 책망을 하고 나서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자신이 가지고 있던 지팡이를 나일강에 내리 쳤습니다. 그랬더니 나일 강물은 피로 변하여 버리고, 그 속에 있던 고기들이 죽고, 물에서는 악취가 나서 그 물을 마실 수가 없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강물 뿐 아니라 애굽에 있는 모든 물들도 다 피로 변하여 버렸다고 했습니다. 이건 정말 엄청난 재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이라는 것은 우리에게도 그렇지만 농사를 주업으로 하던 애굽에 있어서는 너무나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특별히 이 나일강은 애굽에게 있어서 생명줄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해마다 이 나일강은 정해진 시기가 되면 물이 불어나서 나일강 주변의 땅을 적셔 주는데, 그렇게 물이 불어나서 범람하고 나면 땅들이 비옥해지고 풍년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일강 주변의 땅들은 언제나 나일강 때문에 황금의 땅들이 되고, 풍요의 땅들로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 애굽의 사람들은 바로 이 나일강이 자기들에게 풍요를 가져다 준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이 강을 거룩한 강이라 부르면서, 이 강에다가 종교적인 의미를 붙이고 섬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게 바로 애굽에게 있어서 나일강의 신이라고 하는 '오시리스' 인 것입니다. 오시리스 신이 나일강을 다스리고, 오시리스 신이 자기들에게 풍요를 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께서는 이 오시리스라고 하는 신이 다스린다고 하는 그 나일강을 피로 만들어 버리셨습니다. 죽은 강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을 행하신 시기가 언제입니까? 바로 나일강이 범람해서 온 땅을 적셔줄 바로 그 시기였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지금 나일강이 범람해서 풍요를 가져다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런데 그런 시기에 자기들이 믿고 의지하던 이 신이 더 이상 역사하지를 못하고 오히려 애굽 전역에 풍요 대신 피와 죽음만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 첫 번째 재앙은 마지막 열 번째 재앙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애굽사람들에게 이런 재앙을 주시면서 그저 단순한 이적을 보이신 것이 아닙니다. 이 재앙을 주실 때 하나님께서는 이들이 섬기는 그 나일강의 신이라는 것이 사실은 얼마나 헛되고, 존재하지도 않는 우상에 불과한 것인지를 알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사실 이 나일강의 풍요를 주신 이가 누구이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믿는 사람에게나 믿지 않는 사람에게나 동일한 은혜를 주셔서 비를 내리게 하시고 물을 공급하시고, 풍요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는 하나님의 일반은총이라 한다. 바로에게 이런 왕의 지위를 허락하신 분은 또, 누구입니까? 애굽을 다스리도록 그 주권을 주신 이가 누구겠습니까?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바로는 이 사실을 인정하지 못했습니다.
바로는 생각할 때, 내가 능력이 있어서 왕이 된 것이고, 우리 가문이 힘이 있어서 왕이 된 것이고 지금도 나의 말 한 마디로 애굽을 움직이며 다스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애굽의 신들이 그런 나의 신분을 지켜줄 것이고, 애굽의 풍요를 지켜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니 이런 이스라엘의 하나님 정도야 애굽이라는 대 제국의 왕인 나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신은 이스라엘 민족만의 신이라는 것. 이것이 애굽의 왕인 바로가 버리지 못하는 신념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강퍅해지고 교만해질 수 밖에 없다가 멸망하는 것이지요.
여러분,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면 바로 그 사실에 대하여 가장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세계 대 제국의 왕이 되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모르니까 얼마나 답답합니까? 그 인생이 얼마나 헛된 것입니까? 하나님은 온 세상의 주권을 가지신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나의 인생에 주인 되신다는 그 사실을 아시고 고백할 수 있기 바랍니다.
EX) 다니엘 시대 때 바벨론제국의 왕이 되어서 세계를 다스리던 사람이었던 느부갓네살 왕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느부갓네살은 모든 나라를 다스리는 위대한 왕이 되고 나서 마음이 교만하여졌습니다. 그래서 어느날 자기 왕궁의 지붕위를 거닐면서 말하기를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을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그런 교만한 말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에 그 말이 아직 입에서 채 끝나기도 전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는데 "느부갓네살왕아 네게 말하노니 나라의 위가 네게서 떠났느니라 네가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거하며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내서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리라" 말씀하셨습니다.
바벨론이라고 하는 세상의 나라도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게 되기 까지 하나님은 느부갓네살 왕을 치시고 7년동안 짐승처럼 살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징계하신 것은 이 느부갓네살왕을 사랑하셨기 때문이지요. 나중에 느부갓네살왕, 바벨론 제국의 왕이 무엇이라고 고백합니까?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의 왕을 찬양하며 칭송하며 존경하노니 그의 일이 다 진실하고 그의 행하심이 의로우시므로 무릇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심이니라" 고백했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자기 능력과 권력을 인하여서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런 사람, 그냥 두면 어떻게 하나님을 알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모든 능력과 건강까지 빼앗아서라도 하나님을 알게 하셨습니다. 이 느부갓네살 왕이야 말로 하나님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사람입니다.
EX) 예수님께서 한 날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렇게 물으시니까 예수님의 제자였던 베드로가 제일 먼저 나와서 대답하기를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고백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이 베드로에게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특별히 사랑하셔서,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질병을 고쳐 주시기 위해서입니까? 아닙니다. 풍요를 주시기 위해서입니까? 마음의 안정을 주시기 위해서입니까? 아닙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가장 중요한 이유는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게 하시고, 나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신 그 주님을 알게 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주님을 아는 자, 주님을 믿는 자만이 영원한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세상의 주권자요 내 인생의 주인으로, 주님을 나의 구세주로 알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더욱 더 깊이 알아 가시기 바랍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진정으로 풍성하게 하시리라 믿습니다.
Ⅴ. 결 론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이 가끔가다가 신앙이 있느냐 없느냐를 평가할 때, 이 현실에서 얼마나 성공했느냐 그것을 보고 판단하려고 합니다. 물론 우리가 현실에 있어서 성공하기를 위하여 기도하지만 그러나 현실에 있어서의 성공이 우리의 신앙을 평가하는 잣대가 되지는 못합니다. 아무리 현실속에서 성공한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사실은 하나님을 모르고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현실속에서 실패한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깊이 아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애굽의 바로가 자신이 가진 권력 때문에, 자신이 의지하는 우상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서도 하나님을 알 수 없었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가 가진 무엇 때문에, 우리가 의지하고 있는 또 다른 무엇 때문에 사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현실의 성공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 출애굽의 사건을 겪기 이전에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을 몰랐고, 애굽 사람들도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출애굽의 사건을 겪으면서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애굽의 사람들도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참 많은 것을 얻어가면서 하나님을 알게 되었지만, 애굽의 사람들은 많은 것을 잃어가면서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하나님께로부터 많은 것을 얻어가면서 하나님을 알아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아가는 그것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며, 또 주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그 삶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내 속에 함께 계시는 동행하시는 이 하나님을 자랑할 수 있는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손을 드시면
출 7:14-25 / 임덕순 목사
요즘 들어 상수원이 오염되어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공장들에선 산업폐수들을 여과 없이 흘려보내고, 가정에서는 세제를 남용하여 하수로 보내고 있으며, 농촌에서는 가축 분뇨들이 여과 없이 버려지는 상황이 전국적인 현상이고, 농사를 위해 지하수를 뽑아 올리느라고 여기저기에 파이프우물을 뚫고는, 나중에 비가 오면 그 관정을 덮지 아니하고 그대로 방치하기 때문에 땅위의 오염된 물이 맑은 지하수 속으로 흘러들어서 지하수마저 오염되어 버렸습니다. 이제는 깨끗한 물을 먹을 수 없게 되는 것 같습니다.
폐비닐이나 깡통, 은박지 알미늄 캔 등이 여기저기에 버려져 쌓이고 농약병들이 아무렇게나 버려지며 무서운 수은과 납 등이 든 건전지가 아무데나 버리는 바람에 이것들이 땅과 물과 하늘의 공기까지 무차별 오염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에서는 산성비와 그보다 더 무서운 산성 눈이 내리고, 쇠가 삭아들고 나무들이 고사하며 물고기가 기형이 되거나 떼죽음을 하고, 삼림이 훼손되며, 강물과 지하수가 죽은 물이 되어 모든 사람들은 서서히 병들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수자원 오염은 우리의 미래를 망치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어디서든지 자연환경을 지키기 위해서 앞장서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보다 훨씬 더 심각한 수질오염사건이 지금으로부터 3500년 전 애굽에서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을 보내라 하셨지만 그들이 듣지 아니하자 하나님은 모세의 지팡이 끝으로 강물을 건드리게 하셨고, 애굽의 모든 강물과 샘물은 피가 되고 말았습니다.
앞에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그들에게 내 손을 들어 친 후에야 그들이 너희를 내보내리라.” 고 하셨는데, 그 말씀처럼 하나님이 드디어 당신의 손을 애굽 사람들 위에 높이 드셨습니다. 그것은 재앙이 시작된다는 의미였습니다.
모세가 아론에게 지팡이를 주면서 "이 지팡이를 잡고 네 팔을 애굽의 물들과 하수들과 운하와 못과 모든 호수위에 펴라"고 명령 하였습니다.
아론이 그렇게 하자 애굽의 온 강물들이 피가 되어 비린내가 나고 먹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애굽 땅에 내린 첫 번째 재앙이었습니다. 그들이 물을 먹으려고 떠 입에 대면 시뻘건 피가 되어있었고, 손을 씻으려고 물을 뜨면 시뻘건 피였으며, 세탁을 하려고 빨래를 담가놓으면 핏물에 담근 것이 되었으니 애굽 사람들이 얼마나 겁에 질렸겠습니까?
하나님이 진노하시면 사람이 자랑했던 것이 재앙거리가 됩니다.
애굽의 나일 강물은 애굽 사람이 자랑하며 신성시 하는 물입니다. 그 나일 강은 풍요의 상징이었고, 애굽 사람들의 생명의 젖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나일 강에 제사를 드리며 그 강에 풍요를 달라고 빌었고 강을 신처럼 섬겼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신성시했던 강인데, 하나님이 애굽의 사람들을 싫어하시고 진노하시자 그들이 섬기던 강이 그들을 괴롭히는 물건이 되고 말았습니다. 날마다 마시던 물이 마실 수 없게 되었고, 그들이 자랑하던 물이 그들을 두렵게 하였으며, 보기조차도 무서운 물건이 되고 만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 사람을 찾아와서 화목하게 만들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을 순종하지 않고 모독함으로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싫어하시면, 그래서 하나님이 그에게 재앙을 내리려 하시면, 그 사람이 자랑하던 그것이 그 사람을 해치게 만드시는 분입니다. 그 사람이 자랑하던 건강이 그를 실망시키고, 그 사람이 자랑하던 돈이 그 사람을 고통에 빠뜨리고 그 사람이 자랑하던 사람과의 관계 때문에 패망하게 만드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가 자랑하던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것인데, 받은 것을 좋아하느라고 주신 하나님을 등지니, 하나님께서 그로 정신을 차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무엇이 과연 중요하고 무엇을 의지해야 하는 것인지를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하나님을 거역하면 그가 자랑하던 것이 그 사람에게 고통의 원인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랑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귀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에게 자존심을 갖게 해 주고, 누구에게도 기죽지 않게 만들어 주는 그것이 무엇입니까? 돈입니까? 지금 돈이 남보다 넉넉해서 자랑스럽고 교만할 근거가 되고 있습니까?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보다 돈을 좋아하고 사랑하여 하나님을 노엽게 한다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싫어하실 것이고, 그럴 경우 그동안 내게 자랑거리였던 돈이 나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재앙이 되게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건강이 자랑거리입니까? 남보다 빨리 회전하는 머리가 자랑거리요 자만의 원인입니까? 당신의 직장과 가문이 자랑거리입니까? 그것 때문에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수 없거나, 더디 순종하게 되었습니까? 그렇다면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것을 의지하느라고 하나님을 덜 의지했다면, 그것을 자랑하느라고 하나님을 자랑하지 못했다면, 우리는 크게 잘못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시간과 생명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자세가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의 피로 구원받은 성도의 자세는 더욱 아닙니다.
자신의 미모나 인기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중단시켰고, 하나님앞에서 멀리 떠나게 했습니까? 하나님은, 내가 의지하고 내가 자랑하는 그것,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등지게 만드는 그것을 치시는 분이고, 하나님이 치시면 그것은 더 이상 나의 자랑이나 힘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나를 고통스럽게 하고 진절 머리가 나도록 나를 괴롭히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얕잡아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오늘 평안하고 자랑할 것 있을 때, 그것을 주신 하나님 앞으로 다가서시기 바랍니다.
오늘 너무 평안하고 풍요해서 하나님이 필요 없는 것처럼 생각될 지라도, 내 생각이 아무리 옳고 정확해서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이 필요 없는 것 같을 지라도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시간과 역사와 환경의 주관자이십니다. 하나님이 교만해진 나를 더 이상 사랑하시지 않고, 용서하지 않기로 작정하신다면, 하나님이 내게 대하여 분노하신다면 그렇게 자랑스럽고 좋았던 것들이 나에게 무서운 재앙이 되며 진절머리의 원인이 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실 수 있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 백성과 바로 왕에게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그토록 자랑하고 섬겼던 나일 강물이 그들에게 절망과 두려움의 대상이 되게 만드셨습니다. 이것이 본문에 나타난 재앙입니다.
그때 바로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바로는 즉시 자기의 생각이 악했고 하나님앞에서 교만했다는 것을 깨닫고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기로 결심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마음이 강퍅해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살했습니다. 바로는 자기의 마술사들을 불렀고, 그들도 한 컵의 물을 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자 바로는 무릎을 쳤을 것입니다. “아하, 물이 피가 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가 아니라, 모세의 술법에 불과하구나.” 바로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바로는 모세의 말과 하나님의 진노의 재앙을 아주 시시하게 생각하고는 모세를 더 이상 거들떠보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재앙과 인간의 술법을 분간 못한 바로는, 더욱 큰 재앙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금년가을에는 미국 동남부에 강력한 태풍이 불어와 뉴올리온즈라는 도시를 폐허로 만들었습니다. 지난달에는 인도와 파키스탄에서는 진도 7.8의 강진이 발생해서 근 8만 명이 숨지는 대형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지난해 말에는 태국과 인도네시아에 쓰나미라는 지진해일이 일어나 15만 명이 넘는 사람이 죽었습니다. 남아시아 전역을 초토화시킨 이 참사는 이미 잘 알려진 대로, 지각판중에서 인도ㆍ호주판이 유라시아판의 아래쪽을 파고들면서 규모 9.0의 강력한 해저 지진을 일으켜 거대한 해일을 만들어냈기 때문이었습니다.
공교롭게도 그날이 주일이었습니다. 주일날 교회가지 않고 휴양지로 휴가 갔다가 참변을 당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서울의 유명한 목사님이 이번 쓰나미는 하나님의 재앙이었다고 말했다가 네티즌들의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볼 일입니다. 쓰나미의 피해를 본 지역은 인도네시아, 태국, 스리랑카, 인도 등인데, ‘세계 종교의 자유 보고서 2004’를 보면 최대 피해지역인 인도네시아 아체 지역은 인도네시아에서 유일하게 이슬람법인 샤리아에 의해 통치되고 있어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죽임을 당하는 곳이고, 스리랑카도 목사를 구타하거나 교회를 방화할 정도로 기독교인에 대한 핍박이 드센 곳이며, 인도의 상당수 주에서는 아예 법적으로 기독교 개종이 금지되어 있고, 태국 푸켓의 경우 이슬람교뿐 아니라 중국계 무속 등 미신이 팽배하여 기독교 선교가 어려운 것으로 보고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개입하실 여지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올바른 판단입니다. 암3:2하에 “그런즉 내가 너희의 모든 불법으로 인하여 너희를 벌하리라, 하셨느니라.”고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요즘 여기저기서 지진과 자연재해가 너무나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일들을 그냥 자연의 활동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경고요 심판이라는 말을 하면, 비난을 면치 못하는 시대입니다. 사람들은 모세 시대 바로처럼 하나님의 심판을 보면서도 우연발생이거나 환경을 잘 못 다스린 결과라는 식으로 생각해 버립니다. 하나님을 일부러 잊으려는 태도입니다.
벧후 3:5에 보면, 사람이 하나님의 역사를 일부러 잊으려 한다고 기록하였고, 마 24:38-39에는 “홍수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마지막 때에는 하나님의 진노에 대하여 둔감하리라는 예고입니다.
바로의 생각에는 나일강물이 피가 된 재앙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모세가 마술을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혹시, 이것이 모세가 믿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할지라도, 그 능력이란 자기나라의 술객들도 모방할 수 있는 정도의 시시한 능력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을 대항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모세의 마술이나 모세가 믿는 신의 능력이 과연 어느 정도나 되겠느냐고 생각하면서 한번 버텨보자고 모세의 말을 묵살 했던 것입니다.
이 시대에 배웠다는 사람들 중에는 세상만사를 이런 식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우연으로 돌려서 묵살하는 사람도 많고, 사람들이 꾸민 일로 간주해버리고 매도하기까지 하는 경우도 많이 있으며, 혹은 신에게서 온 것이라고 할지라도 나는 신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도대체 신이 나를 어쩌겠느냐 하는 태도입니다. 그러나 그래도 되는 것일까요?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을 두려움으로 순종하거나, 거역하거나 묵살하는 것은 그 사람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모든 행위에 대하여 선 악간에 그대로 심판하십니다. 전 12:14에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 악간에 심판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왜 하나님을 향하여 대항할 생각을 할까요? 무식하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과학은 알고 사회는 알지만, 과학과 사회의 바탕인 이 세상의 자연법칙과 도덕률을 만들어 주신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손바닥위에서 살면서 그분의 손이 너무 크기 때문에 제 눈에 하나님의 전체가 보이지 않는다고 하나님이 없다고 합니다. 또 하나는 어리석은 자존심 때문입니다. 내가 대 제국의 황제인데 누가 나더러 이래라 저래라 하느냐는 바로처럼 이 시대의 사람들도 내가 대학을 나왔는데, 내가 학위를 받았는데, 내가 내 힘으로 세상을 오십년 살아왔는데, 나도 주관이 있고 생각이 있는데 누가 나더러 이래라 저래라 하느냐, 하는 어리석은 자존심 때문에 하나님을 거역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가장 심각한 무식이요, 최악의 자존심입니다. 사람이 자기의 존엄성을 지키는 길은 그런 교만이 아니라, 생명과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바로가 순종하지 아니한 또 하나의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그동안 애굽에서 수백년 동안 온갖 궂은일을 다 해주었는데, 만약 하나님의 명령대로 이스라엘을 모두 석방시키면 앞으로 누가 그들의 궂은일을 담당해 주겠습니까? 바로는 자기나라의 이익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을 지킬 수가 없기도 했을 것입니다.
오늘 한국의 3D업종은 거의 외국 근로자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엊그제는 그들을 단속하여 강제출국 시키자 그들이 일하던 회사가 모두 가동이 중단되고 사장들이 데모를 하였습니다. 어느 날, 그들이 어떤 이유 때문에 한꺼번에 한국을 떠나게 된다면, 우리나라의 공장들이 마비되지 않겠습니까?
단 몇 년 동안 외국인들이 궂은일을 해준 한국도 그러한데, 수 백년 애굽의 모든 궂은일을 도맡았던 이스라엘이 다 떠나면, 애굽의 궂은일은 누가 해내겠습니까? 그러니 아무리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할지라도 나라의 통치자인 바로의 입장에서는 이스라엘을 내 보낼 수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할지라도 내게 물질이나 어떤 것에 손해가 올 것이라고 예상되면 우리는 순종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바로의 모습은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23절에, 바로가 돌이켜 궁으로 들어가고 그 일에 관념하지 아니하였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바로는 하나님의 뜻을 일부러 모르는 척 해보려고 하는 태도가 보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고, 나를 향하여 다가오는 하나님의 섭리가 보일지라도, 그것이 나에게 당장 유익하지 않은 명령이면 우리는 일부러 외면하려고 해봅니다. 뻔히 알면서도 고개를 돌립니다. 전도와 선교의 명령을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인 것을 알만큼 알지만 그것이 내게는 힘만 들고 유익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고개를 돌립니다. 주일을 성수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알지만 그것을 실행하면 경제적인 손해가 올 것이라고 예상하고 순종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바로의 모습은 오늘 우리의 모습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고, 그의 명령은 언제나 선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이 분명하다면, 사람은 자기에게 싫고 좋고 간에 그 섭리와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생명과 환경의 주인이십니다. 그것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바로는 하나님의 명령과 재앙을 외면했습니다. 자존심을 앞세우고 고집을 부리며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견뎌 냈습니까? 온통 피가 된 강에서 먹을 물을 구해보려고 아무리 고생을 했지만 노력은 허사였습니다. 어디서도 맑은 물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면 사람은 물 한모금도 만들어 마실 수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공기 한 모금도, 물 한 모금도, 양식 한 톨도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마실 수가 없고 먹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으면 누구나 살아남지 못합니다. 인간끼리는 자존심 싸움도 가능하고, 버티기도 가능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자존심을 세우는 것이 불가능하고, 버티고 외면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다만 순종만 가능합니다.
바로가 정말로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려면, 술객들을 시켜서 모세가 만든 피가 된 강을 다시 정화시키는 일을 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바로의 술객들은 모세의 기적을 무효화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한 컵의 물을 피처럼 되게 하기는 했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행하는 모세처럼 강물 전체를 피가 되게 하지는 못했고, 모세가 만든 핏물을 정화시키지도 못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항하려고 하지만 할 수 있는 범위는 제한되어 있습니다.
말로는 저항할 수 있습니다. 마음속으로는 하나님을 대항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입을 막으시고 몸을 마비시키고 생명을 거두시는 창조주 이십니다. 하나님을 대항하는 것은 세상에 가장 어리석은 일입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제지당하실 분입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이 아니지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그 누구라도 저지하지 못하고, 그분의 계획은 선하시기 때문에 중단되어서도 안 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저항하고 외면 할 것이 아니라 감사함으로 받아야 하며, 우리의 생각을 돌이켜 하나님 편으로 돌아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는 끝내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로와 애굽 사람들은 다음 재앙을 자초하였습니다. 바로의 어리석은 외면과 반항 때문에 그들이 만나지 않았어도 되는 개구리 재앙, 이 재앙, 파리재앙, 온역재앙, 피부병재앙, 우박재앙, 메뚜기 재앙, 흑암재앙, 그리고 애굽의 모든 장자가 다 죽는 돌이킬 수 없는 재앙까지 열 번의 재앙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지도자의 불신앙과 교만이 자기 백성들을 그렇게 망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미련퉁이가 어디 또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의 명령과 징계는 저항하고 외면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떤 뜻을 가지고 일을 시작하시면, 사람이 외면하고 저항한다고 해서 중단하는 분이 아닙니다.
둑을 아무리 높이 막아도 강물은 흘러갑니다. 물은 잠시는 막히지만 제방을 넘고 둑을 무너뜨리고 댐을 헐면서 흐르고 흘러서 바다로 가고야 맙니다. 강물도 사람의 힘으로 막지 못하는데 하나님을 막을 수 있을까요? 바로는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향하여 함부로 대항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역사를 통해서,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상의 경고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 만큼 알면서도 우리는 지금도 하나님을 거역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살아오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즉시 순종하지 못하고 미적거리거나 거부해 보려고 하다가 손해보고 채찍 맞고 후회 한 일이 어디 한 두 번입니까? 그런데도 아직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 당장에 움직이지 않습니다. 미적거리고 회피하고 못들은 척 하고, 거부해 봅니다. 이 시대의 바로들이 동네마다 교회마다 가득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합시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눈에 보이면, 즉시 순종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움직입시다. 우리를 부르시고 권유하시는 이유는 우리를 복된 길로 인도하려는 사랑입니다.
베드로는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 한마디에 배와 그물을 그냥 버려두고 즉시 주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세관에서 업무를 보고 있던 마태도 주님이 나를 따르라 하시자 일하던 책상을 박차고 즉시 주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바나바는 교회에 구제할 것이 많아지자 자기의 밭을 다 팔아서 바쳐버렸습니다. 그들은 손해 같았지만 역사에 길이 남는 위대한 생애를 살았습니다. 나는 주님이 명령하실 때 하던 일 즉시 멈추고, 일어서서 따라나설 수 있습니까? 주님이 필요하다 하시면 그 무엇이라도 즉시 주님을 위해서 내어놓을 수 있습니까? 주님을 거역하다가 징계와 재앙의 손길을 만나지 말고, 주님께 순종하고 헌신하다가 인도하고 하나님의 축복의 손길만 만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열 가지 재앙과 하나님의 의도
출 7:14-25 / 조재진 목사
누가 주도권을 잡느냐? 라는 파워게임은 삶의 많은 부분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특히 남자들 세계에서 이 파워게임은 삶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 주도권의 싸움이 가장 치열한 곳이 정치현장이지요. 정치문제는 바로 이 주도권 싸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인 이회창씨의 아들 이정현씨의 병역문제를 두고 주도권 싸움이 치열합니다. 어떻게 보면 목숨을 건 싸움을 싸우고 있는 것 같습니다. 검찰 수사의 결과에 따라 아마 정치권은 지각변동이 일어날 가능성이 큽니다. 가정에서도 누가 주도권을 잡느냐는 문제로 부부싸움을 합니다. 아주 사소한 문제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대부분 주도권싸움입니다. 그러다가 40대쯤 되면 더 이상 싸움을 하지 않습니다. 대부분 일방적으로 한쪽에서 이 싸움을 포기합니다. 아마 남자들이 포기하는 것 같지요?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이 주도권싸움은 그대로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반면에 자기 자신이 주도권을 잡고 오히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불신앙입니다. 어떤 사람이 믿음이 좋은 사람입니까? 오래 교회 다녔다, 혹은 성경의 지식이 많다라는 것이 믿음의 척도는 아닙니다. 진정한 믿음의 사람이란 하나님의 주권을 전적으로 인정하고 하나님에게 순종하기로 결단한 사람입니다. 반면 어떤 사람이 믿음이 없습니까? 여전히 자기 고집과 자기 생각에 붙잡혀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열 가지 재앙의 원인
우리가 출애굽의 사건을 보면서 이 부분을 잘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이 일에 전적인 주도권을 행사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는 일은 사실 모세의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일입니다. 이 일에는 모세의 지혜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아론이 아무리 말을 잘해도 그 말 잘하는 것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이들은 단지 하나님께 쓰임 받은 도구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이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내시는 일에 주도권을 행사하신다는 것은 참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왜 바로왕에게 진노하셨습니까? 열 가지 재앙을 애굽 땅에 내리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왕이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게 막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왕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 속한 백성, 자기의 통치 안에 있는 백성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누군데 내 백성을 내보내라고 말하느냐? 라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내 백성을 내보라고 말한 것입니다.
문제의 원인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주도권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과 바로 왕이 이것 때문에 대결을 벌입니다. 14절을 한번 보십시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바로의 마음이 완강하여 백성 보내기를 거절하는도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바로에게 보냅니다. 하나님은 지금 바로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절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바로는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주권을 인정하려하지 않습니다. 바로 왕은 자기 힘을 믿었습니다. 군사력을 믿었고, 나라의 권력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명령을 듣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문제의 원인을 정확하게 알고 계십니다. 이스라엘의 문제는 얼마나 힘든 노동을 하는가가 아니었습니다. 벽돌을 몇 개나 구워야하는가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진정한 문제는 누구를 섬길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왕에서 모세를 보내어서 분명하게 선언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내 백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를 섬겨야 한다’ 그러나 바로왕은 ‘이스라엘은 애굽의 노예다. 여호와가 누군데 보내주겠느냐 안된다’ 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로에게 열 가지 재앙을 보내어서 하나님이 누구인지, 이스라엘이 누구의 백성인지를 애굽 땅에서 분명히 드러내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우리의 삶에서 우리 자신을 믿지 않고 하나님의 주도권을 인정하느냐 하는 것이 바로 믿음의 싸움입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요즘 세상이 그렇습니다. 과학이 좀 발달하고 의학이 발달하게 되자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을 상대화하려고 합니다. 흥미 있는 것은 하나님이 애굽 땅에 내린 첫 번째 재앙이 물이 변하여 피가 되는 것입니다. 애굽의 하수가 다 피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출7:22에 보면 애굽의 술객들도 똑같이 했습니다. 그러자 바로의 마음이 강퍅하여 집니다. 모세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 정도는 너희들이 말하는 하나님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할 수 있다고 큰 소리치고 있습니다.
요즘 우리 주위를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세우신 자연 질서의 일부를 알아내고는 마치 인간이 하나님이 된 것처럼 교만해 있습니다. 시험관아기, 복제인간 등을 말하면서 생명의 창조가 하나님께만 속한 것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과학의 힘으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처럼 교만해 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말합니다. 과학만 발달하면 모든 것이 다 잘될 것처럼 생각합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인간이 지식과 과학의 힘으로 하나님의 영역을 조금 알아냈다고 교만할 필요가 없습니다. 물이 변하여 피가 된 재앙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재앙은 그것 하나 만이 아닙니다. 열 가지 재앙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바로와 애굽 땅에 나머지 재앙들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애굽 사람들은 바로왕의 교만함 때문에 고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마실 물이 없어서 하수가를 두루 파야 했습니다. 바로의 교만 때문에 애굽 사람들의 고통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런 사건은 우리 시대에 그대로 재현되고 있습니다. 요즘 유전자 분야의 과학이 급속도로 발달하고 있습니다. 게놈지도를 만들어 유전자를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 유전자를 조작해서 굉장한 품종을 만들어낼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유전자 과학의 발달로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는 획기적인 길이 열릴 것이라고 기대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를 벗어난 것은 오히려 인간에게 재앙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파괴하고 일어난 무서운 재앙중의 하나가 바로 광우병입니다. 광우병이란 그 병에 걸린 소가 마치 미친 듯이 계속 사지를 떨다가 죽는데서 비롯된 말입니다. 이 병의 원인은 동물성 사료에 기인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소를 초식동물로 만들었습니다. 풀만 먹고 살도록 한 것이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 주권을 우습게 생각했습니다. 소를 더 빨리 더 크게 자라게 해서 돈을 벌 목적으로 동물성 사료를 먹이기 시작한 것이지요. 이것이 광우병의 원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광우병은 하나님의 주권을 거역하고 자기 힘, 자기 고집, 자기 생각대로 사는 인간들에게 주는 하나의 경고의 메시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열 가지 재앙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바로 왕과 애굽 땅을 심판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 열가지 재앙을 애굽 땅에 내리셨습니다. 출7-11장에 보면 이 열 가지 재앙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열 가지 재앙은 그냥 우연히 아무렇게나 행하여 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분명한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그리고 애굽 땅에 하나님을 드러내기 위해 열 가지 재앙을 행하신 것입니다.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만 무엇보다 이 열 가지 재앙은 애굽 사람들이 의지하고 살았던 애굽의 신들을 무너뜨린 것입니다. 온 땅의 통치하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애굽 땅에 있는 거짓 신들을 하나님은 열 가지 재앙으로 깨뜨리셨습니다.
하나 하나 살펴보십시다. 첫 번째 재앙은 피 재앙(출7:14-25)입니다. 나일 강의 하수를 피로 만드셨습니다. 이것은 나일 강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나일강은 애굽 사람들에겐 생명의 젖줄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나일 강을 보호하는 신들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중에 ‘하피’라는 남신과 ‘이시스’라는 여신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일 강을 피로 만드시면서 애굽 사람들이 그렇게 의지했던 신들이 아무 것도 아님을 드러내 버렸습니다.
두 번째 재앙은 개구리 재앙(출8:1-15)입니다. 애굽 사람들은 개구리는 생식력이 좋기 때문에 다신을 하고, 여인들의 출산을 돕는 신이라고 믿었습니다. 개구리 모양의 신을 그들은 ‘헤케드’ 라고 했는데 이 단어의 본래 의미는 ‘백만이다’ ‘무지무지하게 많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개구리 재앙은 그들이 그렇게 의지했던 신들이 오히려 자기들을 괴롭힌다는 것을 드러냈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그 일 때문에 도리어 망하게 된다는 역설적인 하나님의 심판의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재앙은 이 재앙입니다.(출8:16-19) 요즘 세대사람들은 이를 잘 모르지만 연세가 많은 분들은 알고 계시지요. 밤늦도록 손톱으로 눌러서 이를 잡은 기억이 납니다. 손톱이 새빨갛게 되지요. 그러고도 그 손으로 세수도 안하고 밥 먹고 뭐 그랬습니다. 모세가 땅을 티끌을 치니까 이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이가 온 애굽 사람과 짐승들을 괴롭혔습니다. 애굽 사람들이 섬기는 신 중에 ‘세트’라는 신이 있는데 이것은 땅의 신입니다. 사막은 그들을 보호하고 그들을 지키는 소중한 땅이지요. 그런데 그 땅의 티끌들이 이가 되어 사람들을 괴롭히게 됩니다. ‘세트’라는 신이 하나님 앞에 완전히 무력화 된 것이지요.
네 번째 재앙은 파리 재앙입니다.(출8:20-32) 애굽 사람들은 날아다니는 파리가 자신들의 운명을 좌우한다고 믿었습니다. 구약시대에 보면 사단을 “바알세불”이라고 했는데 바알세불은 ‘파리의 왕’이란 말입니다. 애굽 땅에서는 이 파리 신을 ‘우앗치트’라고 불렀습니다. 파리 모양으로 된 신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이 숭배하고 있던 파리가 그들을 공격하게 함으로 파리신이 오히려 그들에게 고통이 된다는 것을 드러내셨습니다.
다섯 번째 재앙은 악질 재앙입니다.(출9:1-7) 생축과 가축들에게 악질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생축은 애굽 사람들의 재산 중에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들이 섬기는 신중에 ‘하토르’라는 신이 있는데 암소 머리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또 ‘아피스’라고 신은 수소신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가축을 귀하게 여겼는지를 알 수 있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재앙이 가축들에게 임하였습니다. 소들이 죽어갔습니다. 생축들에게 재앙이 임했는데 그들이 섬기던 하토르신, 아피스 신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 우상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여섯 번째 재앙이 독종의 재앙입니다.(출9:8-12) 이 독종이 애굽 사람들과 짐승들에게 덮쳤습니다. 심지어 애굽의 술객들에게도 붙었습니다. 술객들도 그 독종으로 인해 죽어갔습니다. 원래 애굽의 술객들은 치료자들이었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술객들과 함께 ‘새크멘트’라는 치유의 신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자 치료자 술객들도 독종에 들어 병들게 되었습니다. 애굽 사람들이 그렇게 믿었던 신들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일곱 번째 재앙은 우박재앙입니다.(출9:13-35) 우박이 쏟아지자 두 가지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는 하늘이 어두워졌고, 다른 하나는 땅의 채소와 나무가 다 쓰러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재앙은 애굽 사람들이 섬기고 있던 ‘누트’라는 신과 ‘오리시스’라는 신을 꺾는 것이었습니다. 누트신은 하늘의 여신이고 오리시스는 수확을 지키는 신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는 이 신들이 다 무력했다는 것입니다.
여덟 번째 재앙은 메뚜기 재앙입니다.(출10:1-20) 메뚜기로 인해 우박 피해를 겨우 피한 농작물이 다 전멸해 버렸습니다. 이 메뚜기 재앙은 애굽 사람들이 농작물을 보호하는 신으로 믿었던 ‘세라피스’라는 신을 하나님이 심판하신 것입니다.
아홉 번째 재앙은 흑암의 재앙입니다.(출10:21-29) 애굽 사람들이 가장 자랑스러워했던 신이 태양신 ‘라’였습니다. 애굽의 여러 신들 중에 최고의 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늘이 어두워졌는데도 ‘라’ 신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들이 믿는 태양신을 심판해 버린 것입니다.
참 많지요! 오늘 우리들에겐 이런 우상들이 없습니까?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는 것들, 돈, 권력, 지식, 직장, 아들, 인간관계 등등. 계속해서 보십시다.
열 번 째 재앙은 죽음의 재앙이었습니다.(출11-12장) 애굽 사람들은 바로를 신으로 믿었습니다. 바로의 왕좌를 이어갈 왕자도 신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의 장자를 죽였습니다. 바로의 장자만이 아니라 온 애굽 땅의 장자들을 다 죽였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은 애굽의 문화와 바로를 심판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한 사람들, 하나님을 대신하려는 우상들을 남김없이 무너뜨림으로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주재권을 온 애굽 땅에 드러내신 것입니다. 바로는 이 하나님의 능력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게 된 것입니다.
열 가지 재앙의 결과
이 열 가지 재앙이 진행되는 동안 우리는 성경에서 두 가지를 주목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애굽 온 땅에 하나님의 재앙이 임하는 동안 이 모든 재앙에서 제외된 한 지역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곳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한 고센 땅입니다. 하나님은 고센 땅에 재앙이 임하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모든 재앙에서 지켜주신 것이지요. 하나님은 애굽 사람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을 동일하게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이 어려움을 당하는 것 같습니다. 똑같이 병들고 똑같이 경제적인 어려움을 당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려움 때문에 망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불신자에겐 고통은 하나님의 심판이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서 어려움은 오히려 축복의 통로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재앙과 아무 관계없습니다. 어떤 저주도, 어떤 사술과 복술로도 하나님의 백성들을 망하게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모든 운명과 저주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입니다.(롬8:2)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릅니다.
언젠가 제가 간증한 적이 있지요. 저도 들은 이야기입니다. 한 시골교회에 아주 신실한 집사님 내외분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방앗간을 하고 있었는데, 그해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동네 뒤에 흐르는 시냇물이 불어나게 되자 그만 제방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모래와 함께 동네를 덮쳤는데, 참 그것이 이상하게도 믿음이 좋은 집사님 방앗간을 덮치고 말았습니다. 다행히 사람은 다치지 않았지만 방앗간은 온데 간데 없고 모래더미만 쌓였습니다. 반면 동네 사람들의 집은 멀쩡하게 된 것이지요. 거꾸로 되어야 참 은혜가 되는데,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동네에 시냇물과 모래가 덮치고 집사님 집은 멀쩡했더라 라고 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이 일이 일어나자 동네사람들은 큰 소리쳤습니다. “예수 믿어도 소용없다. 하나님이 어디 있냐? 하나님이 계신다면 저럴 수 있느냐?”라고 한마디씩 했습니다.
이 집사님 내외분도 시험에 빠질 뻔 했지요. 그런데 비가 그치고 수해복구를 하면서 포크레인을 동원하여 모래더미를 파내고 있었는데, 참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포크레인 기사가 깜짝 놀랐는데 알고 보니 집사님의 방앗간 밑에 금광맥이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노다지’를 발견한 것이지요, 그래서 이 분들이 방앗간을 잃었지만 오히려 금맥을 발견하고 큰 부자가 되었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마 하나님이 믿음 좋은 집사님을 축복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최대의 축복은 금맥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난리가 날 때 방앗간을 덮쳤던 것이지요. 그래야 땅밑을 파낼 것이고 금맥을 발견할 것이 아닙니까? 물 난리난 것이 축복의 기회가 된 것이지요.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떤 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고센 땅을 재앙에서 지킨 것처럼 그렇게 지키실 것입니다.
재앙이 계속되는 동안 우리가 눈여겨 볼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애굽 땅을 심판하실 때에 바로가 어떻게 반응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로의 반응은 참 흥미 있습니다. 바로의 반응은 네 가지 단계로 나타납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의 명령은 분명합니다.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도록 내 백성을 내 보내라’는 것입니다. 재앙이 계속되자 바로가 반응한 첫 번째 단계는 그러면 ‘이 땅 여기에서’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라고 한 것입니다. 가긴 가는데 멀리 가지 말고 이 땅에서 내가 통치하고 있는 이 영역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라고 한 것이지요. 그런데 이 바로의 반응은 악한 사단의 전략과 비슷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믿음의 삶을 살려고 할 때 악한 사단은 이렇게 말합니다. “믿기는 믿어 하지만 이 세상을 떠나려고는 하지마 그냥 이 안에서 믿어” “성경 어디에 술마시지 말라고 했나 술취하지 말라고 했지, 아니 성경 어디에 담배 피우지 말라고 한곳이 있어 그냥 옛날 하던 그대로 생활 습관을 바꾸려고는 하지 말고 그냥 교회만 다녀”그런데 바로 이것이 사단의 첫 번째 전략입니다.
바로의 두 번째 반응은 출8:28에 나옵니다. 여기에 보면 바로는 “너희는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라고 말합니다. 모세가 계속해서 아니다 광야로 가서 하나님께 희생을 드려야 된다라고 하자 바로는 그러면 “내 땅을 떠나도 되긴 되는데 너무 멀리는 가지마라”라고 말한 것이지요. 사단의 전략도 같습니다. 우리가 제대로 예수 믿으려고 하면 믿지 않는 가족이나 친구들이 한마디씩 합니다. “예수 믿는 것 좋지 그러나 너무 깊이는 들어가지 말라구” “깊이는 빠지지마” 이런 소리는 다 악한 사단의 소리입니다.
바로의 세 번째 반응은 출10:9-10에 나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계속되자 바로는 “멀리가도 좋다. 그런데 어린 것들, 네 자녀들은 데리고 가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참 의미심장합니다. 사단은 동일하게 우리에게 도전합니다. “믿으려면 너만 믿고 나한테 예수 믿으라고 하지 말라, 너만 열심히 믿고 애들은 데리고 갈 생각하지 말라” 바로가 누구를 데리고 나가지 말라고 하는지 잘 봐야 합니다. 이것은 사단의 전략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후대를 잃어버리면 우리 교회의 미래는 없습니다. 사단의 전략은 분명합니다.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게 하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 잘믿는데 자녀들은 믿지 않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사단을 꺾어야 합니다. 자기들 믿음이라고요 그렇게 말하지 마십시오. 부모가 자녀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해야 합니다.
바로의 네 번째 반응은 출10:24에 나옵니다. 마지막 재앙직전에 바로는 이렇게 타협합니다. 참 끈질기지요. 그냥 항복하면 되는데 바로는 마지막까지 발악을 합니다. 바로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다 가도 좋다 애들도 데리고 가라 그러나 너희 양과 소는 머물러 두고 가라” 바로가 마지막까지 붙들고 늘어졌던 것이 바로 그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재산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사단이 마지막까지 공격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됩니다. ‘시간을 바쳐라 열심히 교회다녀도 좋다 그러나 물질은 바치지 말라 살아가자면 제일 필요한 게 돈이 아니냐 늙으면 돈이 있어야 돼. 머니 머니해도 머니가 최고야’ 사단의 전략이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이 가장 집착하고 애착을 갖는 것이 물질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물질에서 자유하지 않으면 애굽을 온전히 떠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질의 헌신은 진정한 믿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물질의 양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에겐 백만원이 한달 생활비 전부일 수 있고 어떤 사람에겐 용돈 정도일 수 있습니다. 물질의 양은 개인마다 다 다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물질의 주재권도 하나님에게 있다고 고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속에 있는 삶
오늘 우리가 애굽 땅에 내리신 열 가지 재앙의 분명한 목적을 알아야 합니다. 출9:16에 보면 그 목적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세웠음은 나의 능력을 네게 보이고 내 이름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려 하였음이니라” 하나님은 열 가지 재앙을 통해 온 땅의 주인이며 유일한 하나님, 여호와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애굽 땅의 우상들을 하나 하나 무너뜨리시면서 그들이 믿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어리석은 바로 왕은 자기의 힘을 믿고 하나님의 주재권, 하나님의 주도권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다가 망했습니다. 애굽 사람들도 헛된 우상을 붙들고 살았습니다. 그들은 속은 것입니다. 우상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돈이 좀 있다고 세상의 권력이 좀 있고, 지식이 좀 있다고 하나님 앞에 교만해서는 안됩니다. 인간의 과학이 발달해서 하나님의 영역을 조금 손대기 시작했다고 큰 소리쳐서도 안됩니다. 온 세계는 하나님의 창조물입니다. 우리 인생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 주도권을 드리십시오. 오직 하나님의 다스림 속에 들어가는 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온갖 거짓 것들이 우리 주위에 있어도 하나님만을 섬기겠다고 결단해야 합니다. 온갖 거짓 구원자들이 일어나도 우리에겐 오직 예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하나님에게 삶의 주도권을 넘겨드리고 주님만 의지하는 축복의 삶이 시작되기를 바랍니다.
기적과 술법
출 7:20-25 / 이성희 목사
4세기 이집트 사막의 한 사제는 "인간은 온전하게 눈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모든 것을 보고 분별력을 가지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권고입니다. 아동발달 분야의 권위자인 아놀드 게젤 박사는 "어린이는 한 쌍의 눈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시각 세계를 가지고 태어나지는 않는다. 그 세계는 직접 만들어야 하고, 그것은 자기만의 창조이다"라고 합니다. 눈은 가장 중요한 감각입니다. 분별력을 주는 기관입니다. 우리 인간에게 들어오는 정보의 80퍼센트는 눈을 통하여 인지됩니다. 지금도 대부분이 활자화된 언어에서 우리는 정보를 얻습니다. 귀도 중요한 분별력을 주는 기관입니다.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분별력이 있고 판단력 있게 귀를 기울이고 누구의 말을 들을 것인지 주의 깊게 선택하는 것이 지혜의 본질입니다. 어느 것이 참이고 어느 것이 거짓인가를 분별하여 듣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에덴 동산의 어리석음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사단의 거짓말을 참으로 믿은 것입니다. 진리 대신 사단의 거짓말을 듣고 믿었습니다. 분별력을 상실하였습니다. 이것이 인간이 최초로 지은 죄입니다. 죄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분별력을 상실한 것이 곧 죄입니다.
손도 분별력을 주는 중요한 기관입니다. 병아리 감별사의 손은 분별력이 발달해야 합니다. 병아리 감별은 손이 발달한 한국인이 최고라고 합니다. 수박이 잘 익었는지 두드려 보는 솜씨도 세계 최고입니다. 새끼손가락은 한국 어머니의 온도계라고 불립니다. 탕약은 새끼손가락으로 온도를 측정합니다. 그 외에 체감으로 분별하는 것들이 우리에게는 많이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인간의 온 몸은 분별력을 주는 도구입니다. 우리의 몸뿐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이 참과 거짓을 분별하는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영 분별의 신앙적 기초가 있어야 합니다. 기적과 속임수를 분별해야 합니다. 기적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고 속임수는 마귀의 일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은 기적이라고 부르지만 하나님께는 기적이 아닌 것도 알아야 합니다. 모세가 바로에게 가서 지팡이로 나일강을 쳤을 때에 나일강의 물이 피로 변하였습니다. 왜 피로 변하게 하였을까요? 첫째는 우상숭배의 죄악을 경고한 것입니다. 바로가 아침에 나일강에 제사하러 갔을 때에 나일강에 대한 제사를 막으시고 경고하신 것입니다. 둘째는 애굽인들이 무고한 히브리인들의 아이들의 피로 나일강을 물들였기 때문에 이를 갚으신 것입니다. 이전에 모세가 태어날 때 수많은 아이들이 나일강에서 죽었습니다. 이 피 값을 하나님은 바로에게서 받으시는 것입니다. 로버트 몰간은 '홍해의 법칙'이란 책에서 "적은 인식하라, 그러나 두 눈은 주님을 주시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야 분별력이 확실하게 생깁니다. 모세는 지금 바로를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하나님을 보고 있습니다. 듣고 있습니다. 만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하시는 말씀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모세의 분별력의 뿌리가 있습니다. 모세의 힘의 근원이 여기에 있습니다.
첫째, 모세와 아론이 지팡이로 하수를 치자 피로 변하였습니다.
지팡이는 그 지팡이입니다. 모세의 손에 들려졌던 지팡이입니다. 던질 때 뱀이 되었던 지팡이입니다. 모세는 바로에게 나아갈 때에 새로운 무엇인가를 가지고 간 것이 아닙니다. 똑같은 것이지만 새로운 능력으로 힘입어 가지고 갔습니다. 그 지팡이만 있어도 얼마든지 기적을 행합니다. 그 지팡이만 있어도 얼마든지 일하실 수 있습니다. 그 지팡이는 만능 지팡이입니다. 이 지팡이로 못할 일이 없습니다. 손에 있는 것만 가지고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기적은 일어납니다. 손에 없는 그 이상의 것을 원치 않습니다. 다윗은 자기 몸에 맞지 않는 갑옷이나 칼이 아니라 물 맷돌 5개만 가지고도 골리앗을 이겼습니다. 한 소년이 가지고 온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만 가지고도 5천명을 먹이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로마서 12:3에는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합니다. 지나친 생각이나 과욕을 가지지 말고 자신의 분량대로만 해도 하나님의 능력은 나타납니다. 빌립보서 2:3에는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라고 합니다. 교회의 일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할 일이 아닙니다. 특히 교회는 허영으로 해서 될 일이 없습니다. 겸손하게 하는 일에 기적은 나타납니다. "물과 은혜는 낮은 곳에 고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낮은 곳에 기적이 나타나고 낮출 때에 은혜는 풍성합니다. 하나님은 출애굽기 4:17에서 말씀하신대로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지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이적을 지팡이에 주신 것입니다. 엘리사가 수넴여인의 아들을 살리는 기적을 베풀 때에 그의 종 게하시가 지팡이를 가지고 가서 아이의 얼굴에 놓고 엘리사가 올 때까지 기다립니다. 지팡이는 아무 것도 아니지만 기적의 방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적을 지팡이를 통하여 주신 것입니다. 나일 강이 더 이상 축복의 강이 아닙니다. 우상 숭배자의 최후는 이같이 비참합니다. 바로 때문에 물이 피로 변하였습니다. 꼭 같은 강이지만 이전의 강과는 다릅니다. 완전히 죽은 강이 되었습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땅이 가시와 엉겅퀴를 냅니다. 사람 때문에 강이 저주를 받습니다. 꼭 같은 피지만 보혈의 피 곧 생명일 수도 있고 사망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너희 앞에 복과 저주를 두노니"라고 하십니다. 어떤 이는 복을 선택하고, 어떤 이는 저주를 선택합니다. 어떤 이는 생명을 선택하고, 어떤 이는 사망을 선택합니다. 꼭 같은 지팡이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이적의 지팡이입니다. 어떤 이에게는 저주의 지팡이입니다. 꼭 같은 물이지만 포도주가 되고 피가 됩니다. 꼭 같은 피지만 생명일 수도 있고 사망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 손에 있는 지팡이가 이적의 지팡이이기를 바랍니다. 이것을 들면 주님의 능력이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우리 손에 있는 지팡이에 생명이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술객들도 술법으로 그와 같이 행하였습니다.
술객들도 모세가 한 것처럼 물이 피가 되게 하였습니다. 이미 물이 다 피가 되었는데 피가 되게 할 물이 더 남아 있었을까요? 이미 자기 나라 물이 다 피가 되었는데 또 피를 만들면 업친데 덥친 격이 되지 않겠습니까? 오히려 피를 물로 만들어야지 옳지 않겠습니까? 술객들은 그냥 술법으로 모세를 대적하여 물이 피가 되게 하는데 급급했지 아무 생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지팡이가 뱀이 되게 하는 술법을 행했던 술객들은 다시 모세의 이적처럼 물이 피가 되게 하고 있습니다. 흉내내고, 유사하게 하는 것은 술객들도 얼마든지 합니다. 예로부터 기적을 흉내내고, 능력을 눈가림으로 하는 것이 유행이었습니다. 유사하게 하는 것은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요즘에 그래도 인기 있으려면 모창이나 성대묘사 하나는 확실하게 해야 한다고 합디다. 자기의 것 가지고 살기도 바쁜데 웬 남의 것을 흉내내고 살아야 인기가 있습니까? 참 이상한 세상입니다. 사도행전에는 시몬이란 사람이 나옵니다. 이 사람은 성령을 돈으로 사려고 하다 책망을 받습니다. 은사를 돈으로 사고 흉내내려고 하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흔한 일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잠언 21:30은 경고합니다. "지혜로도 명철로도 모략으로도 여호와를 당치 못하느니라". 술객들의 술법으로는 하나님의 능력을 당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방해하는 마술사들은 누구입니까? 세상 권력에 아부하는 사람들, 세상 명예로 치부하는 사람들, 진리에 무관심한 자들이 이런 마술사입니다. 실제적으로 우리의 믿음을 방해하는 속이는 것들은 어떤 것들입니까? 현대 과학과 기술이 우리를 속이고 있습니다. 미래 공학이라고 일컫는 생명공학이 우리 영혼을 속이고 있습니다. 최첨단의 가상공간이 정신을 속이고 있습니다. 이런 어리석은 것들 때문에 우리 영혼이 방해받고 있습니다. 진리와 거짓이 혼돈되고 있습니다. 진리를 오도하는 것들이 세상에 즐비합니다. 왜 사람들에게 분별력이 없습니까? 마음에 의심하기 때문에 분별력이 없어집니다. 인간의 끝없는 마음의 욕심 때문에 분별력이 없어집니다. 의심은 마음이 분리되는 것입니다. 욕심은 마음의 교만입니다. 로마서 16:20에는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너희 발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종래 사단을 우리 발아래 굴복하게 하시고 승리하십니다. 특히 미래 사회는 사특한 영을 분별하는 능력을 가져야 합니다. 미래 사회는 이단과 사이비가 횡행한다고 합니다. 우리도 그 그릇된 영의 타겟이 됩니다. 우리 모두가 예외가 없습니다. 그래서 영성으로 훈련하고 우리 스스로가 분별력을 가지고 유혹의 대상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영성훈련은 누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하여 필요한 것입니다. 요한일서 4:1에는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고 합니다. 영이 어디 속하였나 시험하여 보고 따라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릇된 영을 따르기 쉬운 시대입니다. 특히 여러분들이 영을 분별하는 능력이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 바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바로는 또 속았습니다. 자신의 술객들이 모세와 아론과 동등한 술법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로는 영을 분별하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술객들이 술법이 하나님의 기적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마음이 점점 더 강퍅케 되었습니다. 바로의 마음이 점점 더 강퍅해진 까닭은 말씀을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듣지 않으면 마음이 점점 강퍅해집니다. 말씀을 거부하면 점점 더 완고해집니다. 말씀은 마음을 부드럽게 합니다. 말씀을 들으면 부드러운 마음이 됩니다. 말씀의 씨앗이 떨어지면 열매맺는 부드러운 땅이 됩니다. 프란시스 베이컨은 "약간 아는 것보다 사람을 더 의심하도록 만드는 것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분별력 없이 어설프게 아는 것이 화근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어설픔 때문에 사람은 오히려 더 고집스러워집니다. 영성신학자 토마스 머턴은 "분별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또 무엇을 원치 않으시는지를 우리에게 말해준다"고 하였습니다. 분별력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립니다. 분별력은 하나님의 은사이기에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솔로몬은 열왕기상 3:9에서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솔로몬이 지혜롭다고 하는 것은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지혜란 분별의 은사입니다. 로마서 12:2에서 바울도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름지기 분별의 은사를 가져야 합니다. 또한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은사를 열거하면서 능력, 예언, 방언, 방언통역 등을 말합니다. 그 중에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영을 분별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그런데 이런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할 수 있습니다(고전 2:13). 신령한 은사를 가져야 영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결론
구약성경 사무엘상 25장에는 나발이란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사람은 마음이 완고하고 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아비가일이었는데 성경은 그녀를 총명하고 아름다운 여자라고 합니다. 다윗이 왕이 되기 전에 나발에게 경제적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발은 다윗의 청을 거절하였습니다.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뇨"라고 다윗을 무시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아내 아비가일은 다윗을 영접하고 용서를 구합니다. 하루는 아비가일은 나발을 위하여 왕에게 하듯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나발이 잔치에서 술을 마시고 많이 취한 다음 날 아침에 아비가일은 나발이 포도주가 깬 다음 소상히 다윗에 대한 얘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 말은 들은 후에 나발을 성경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가 낙담하여 몸이 돌과 같이 되었더니 한 열흘 후에 여호와께서 나발을 치시매 그가 죽으니라". 나발의 몸이 굳어져 돌과 같이 되어 열흘만에 죽었습니다. 나발은 다윗이 죽인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놀라 열흘 동안 혼수상태에 있다가 죽은 것입니다. 몸도 마음도 굳어지면 죽습니다. 마음이 강퍅해지고, 완고해지면 자기 풀에 자기가 죽습니다. 몸도 마음도 부드러워야 오래 삽니다. 나발은 분별력이 없이 완고한 마음으로 다윗을 몰라주고, 도와주지 않고, 자신의 재산만 축내지 않으려고 탐하다가 결국 몸이 돌같이 되어 죽었습니다. 마음이 돌 같으니 몸이 돌같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비가일은 다릅니다. 다윗 어떻게 될 것인가, 시대가 어떻게 되는가, 민심이 어디로 기울고 있는가, 분별력이 있었습니다. 상황을 간파하고 남편 몰래 다윗을 영접하여 피흘림을 면하였습니다. 이런 분별력이 유연한 마음입니다. 이런 분별력이 있는 마음이 가족을 살렸고 후에 다윗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완고하고 강퍅하고 돌 같은 마음은 결국 몸이 돌같이 됩니다. 마음이 강퍅해진 바로는 결국 자신의 무덤을 파고 있습니다. 말씀으로 부드러운 마음을 가집시다. 자신에게 엄하고 남에게 부드럽고, 자신에게 돌 같고, 남에게 물 같은 유연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또 한 주간의 삶이 말씀을 묵상하고, 강퍅하지 않는 부드러운 마음으로 사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