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419
11월26일 [연중 제34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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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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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RSbvUrG_YDo
[프란치스코 전교 봉사 수도회 유재선 안드레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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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종말과 관련된 호의적이고 낙관적인 예수님의 가르침!>
겨울이 오기 전에 여기저기 낡고 노후된 곳을 찾아 열심히 손을 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는 식당 바닥이 너무 지저분해 페인트를 칠해야 하나, 어쩌나 하다가, 좋은 자재를 찾았습니다. 데코 타일이라고, 시공 방법이 너무 간단해 직접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먼저 바닥을 깨끗이 청소한 후, 직사각형 모양의 데코 타일 뒷면의 종이를 벗겨내어, 차례대로 바닥 위에 덧붙여나가면 되니, 누구나 할 수 있는 작업입니다. 그런데 마흔평 정도 되니, 양이 만만치 않습니다.
쪼그리고 앉아 하나하나 붙여나가는데, 처음에는 재미있더니, 나중에는 여기저기 쑤시고 아프고 결코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습니다. 그런데 한번씩 일어나 허리를 펴고 전체를 보니...주문한 데코 타일이 점점 줄어들면서, 식당 바닥이 깔끔해져 갔습니다.
타일을 하나하나 붙이며, 우리의 삶도 이렇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록 오늘 하루 보잘 것 없어 보이는 하루, 영양가 없어 보이는 하루라 할지라도, 지속적으로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며, 하루 매순간을 충실히 살아갈 때, 그런 하루가 모이고 모여 우리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 이루어지는구나, 하는 생각. 결정적이고 궁극적 구원은 단칼에 이루어질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우리가 차곡차곡 쌓아나가는 그 무엇이 아닐까 하는 생각.
이런저런 고통과 시련 속에 하루하루 허덕이며 살아가지만, 가끔, 허리를 펴고 고개를 쳐들어 하늘도 바라보고, 내 인생도 한 걸음 크게 뒤로 물러나 큰 시선으로 바라봐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기 전 반드시 통과해야 할 관문이 있으니, 고통과 시련, 박해와 투옥입니다. 예수의 재림과 더불어 시작될 새로운 세상의 재건을 위해서는 지상 장막이 허물어져야 합니다. 그때 새집을 짓기 위해서는 낡고 허황된 옛집, 교만과 이기심으로 가득한 세상의 파괴는 필수적입니다.
다행인 것은 종말에 대한 예수님 가르침의 결론은 항상 우리에게 호의적이고 낙관적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 18-19)
오늘 첫 번째 독서 다니엘 예언서는 교만으로 가득한 안하무인 벨사차르 임금 케이스를 소개하며, 그처럼 주님의 진노 끝에 멸망하지 않기 위한 비결을 가르칩니다.
그것은 만군의 주님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흙이요 먼지요 티끌인, 자신의 근본, 신원을 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더불어 우리 목숨은 주님 손에 달려있으니, 그분께 겸손되이 무릎꿇는 것, 그분을 충실히 섬기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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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Asu7A_BHJS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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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습니다 : 배교자의 비참함>
서기 320년, 로마 제국의 리키니우스 황제 치하의 춥고 어두운 밤이었습니다. 튀르키예의 세바스테(Sebaste)라는 곳에 주둔하던 로마의 최정예 부대, '제12군단' 병사들 중 마흔 명이 얼어붙은 호수 한가운데로 내몰렸습니다. 그들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발가벗겨진 채 살을 에는 혹한 속에 서 있어야 했습니다.
호수의 얼음은 칼날처럼 날카로웠고, 살을 파고드는 추위는 뼈 속까지 사무쳤습니다. 그들의 입술은 파랗게 질려갔고, 몸은 제어할 수 없이 떨렸습니다. 그들은 서로의 체온에 의지하며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희 마흔 명이 경기장에 들어왔으니, 마흔 명 모두가 승리의 월계관을 쓰게 해주소서."
그런데, 그들을 고문하던 총독 아그리콜라는 아주 잔인한 유혹을 준비했습니다. 꽁꽁 얼어붙은 호수 바로 옆, 눈에 빤히 보이는 곳에 ‘뜨거운 물이 펄펄 끓는 목욕탕’을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오직 그 목욕탕 문틈으로만 따뜻하고 붉은 불빛과 하얀 김이 새어 나왔습니다. "누구든지 신앙을 버리겠다고 말만 하면, 지금 당장 저 따뜻한 물에 들어갈 수 있다!"
살을 찢는 고통이 극에 달했을 때였습니다. 결국 한 병사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동료들의 기도를 뒤로한 채, "나는 예수를 모른다! 살려달라!"고 비명을 지르며 호수를 뛰쳐나갔습니다. 그는 비틀거리며 그토록 원하던 따뜻한 목욕탕으로 뛰어들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그 병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행복을 찾았을까요? 놀랍게도 그는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자마자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극한의 추위에 얼어있던 혈관이 급격한 온도 변화를 견디지 못하고 터져버려 심장마비가 온 것입니다.
그는 육체의 고통을 피하려다 육신의 생명도 잃었고, 잠시의 안락을 탐하다가 영원한 영혼의 생명마저 잃어버렸습니다. 그가 목욕탕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그를 기다린 건 따뜻한 위로가 아니라, 가장 비참하고 허무한 죽음이었습니다.
반면, 끝까지 호수에 남아 추위를 견딘 39명에게는 하늘에서 찬란한 빛과 함께 천사들이 내려와 면류관을 씌워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배교자가 죽는 모습을 지켜보던 경비병 하나가 그 광경에 감화되어, "나도 그리스도인이다!"라고 외치며 옷을 벗고 그 빈자리를 채우러 호수로 뛰어들었습니다. 결국 하느님께서는 기어이 40명의 숫자를 채워 순교의 월계관을 완성하셨습니다.
하느님을 믿다가 배교하면 처음부터 안 믿던 이들보다 훨씬 큰 고통을 겪어야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추운 곳에 있다가 뜨거운 물에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따듯한 곳에 있다가 뜨거운 물에 들어가면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레이엄 그린의 소설 『권력과 영광』에는 박해가 두려워 신앙을 타협한 '호세 신부'가 등장합니다. 그는 사제로서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멕시코 정부가 사제들을 처형하자, 신부는 살기 위해 정부가 시키는 대로 결혼을 하고 사제직을 버립니다. 그는 연금을 받으며 안전한 집에서 배불리 먹고 삽니다. 불신자의 눈에는 '운 좋은 생존자'입니다.
하지만 신앙을 알았던 그에게 그 삶은 지옥이었습니다. 동네 아이들은 그를 "호세 신부님!" 하고 부르며
조롱했고, 아내는 그를 경멸했습니다. 어느 날 밤, 숨어 지내던 동료 사제가 잡혀가며 고해성사를 청했을 때, 호세는 아내의 "가지 마요!"라는 호통에 겁을 먹고 나가지 못합니다. 그는 안전한 방구석에서 홀로 울며 기도합니다. "하느님, 차라리 저를 죽여주시지 그러셨습니까." 하느님을 알고 난 뒤에 그분을 배신하고 사는 것은 죽음보다 더 큰 고통입니다. 왜냐하면 그 전에 참된 행복과 자유를 누려보았기 때문에 그것을 잃는 고통까지 겪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베드로의 둘째 서간에는 무서운 말씀이 있습니다. "의로움의 길을 알고서도...등지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 길을 알지 못했던 편이 나았을 것입니다."(2베드 2,21)
아예 하느님을 몰랐다면 세상의 쾌락을 즐기며 잠시나마 행복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하늘의 맛'을 본 사람들입니다. 빛을 본 사람에게 어둠은 더 이상 안식처가 아니라 감옥입니다. 신앙인이 박해나 고통이 힘들다고 해서 세상으로 도망치면, 거기서 기다리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영혼의 질식'입니다.
가리옷 유다를 보십시오. 그는 스승이 체포될 위기에 처하자, 가장 먼저 배에서 뛰어내려 '은돈 30냥'이라는 구명조끼를 챙겼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그는 3년 동안의 허송세월을 보상받은 현명한 처세술가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했던 유다는 그 돈을 쓸 수 없었습니다. 그의 양심은 불에 덴 듯 괴로웠고, 결국 그 돈을 성전에 내동댕이치고 목을 매어 죽었습니다. 신앙인이 뒤로 물러서면 갈 곳은 지옥뿐입니다. 되돌아갈 다리는 이미 끊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남은 길은 단 하나, '앞으로 나아가는 인내'뿐입니다. 고통과 박해를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할 때, 비로소 하느님의 기적은 시작됩니다.
음악의 어머니 헨델(Georg Friedrich Händel)의 이야기를 아십니까? 그는 독실한 루터교 신자였지만, 56세에 인생 최대의 시련을 맞았습니다. 오페라 사업은 파산했고, 빚쟁이들은 감옥에 넣겠다고 위협했으며, 뇌졸중으로 반신마비까지 왔습니다. 그는 도망치거나 신을 저주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절망의 구덩이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식음을 전폐하며 오직 성경 말씀과 기도에 매달렸습니다. 그는 자신의 모든 고통을 음표 하나하나에 쏟아부었습니다. 24일 후, 그가 작곡을 마쳤을 때 하녀는 그가 눈물 범벅이 되어 소리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내 앞에 하늘이 열리고 위대하신 하느님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렇게 탄생한 곡이 바로 인류 역사상 최고의 찬양인 『메시아』 중 '할렐루야'입니다. 헨델이 파산과 질병이라는 박해를 피했다면, 그는 그저 빚쟁이에 쫓기는 노인으로 죽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신앙으로 그 자리를 지켰기에(인내), 그는 천상의 문을 열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9)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억울한 오해를 받거나, 손해를 보거나, 견디기 힘든 고통이 찾아옵니다. 그때 마귀는 속삭입니다. "그만두면 편해져. 적당히 타협해. 저 따뜻한 목욕물(세상)로 돌아가."
하지만 속지 마십시오. 신앙을 버리고 얻은 평화는 호세 신부의 비참함이요, 유다의 밧줄일 뿐입니다. 이미 빛을 본 여러분에게 세상은 더 이상 안식처가 될 수 없습니다. 뒤로 물러서면 죽습니다. 앞으로 나아가, 지금 겪는 이 시련을 뚫고 나가십시오. 헨델처럼 고통 속에서 하느님을 찬양하고, 스테파노처럼 박해 속에서 하늘을 바라보십시오.
우리가 도망치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킬 때, 그곳은 우리를 죽이는 무덤이 아니라 하느님을 만나는 지성소가 될 것입니다. 인내하십시오. 그것만이 우리가 살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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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미국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한국의 문화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걸려 있는 ‘현수막’입니다. 현수막의 종류도 다양합니다. 시골에서는 자랑스러운 일이 있으면 현수막을 걸어 놓습니다. 명문대학교에 합격을 축하하는 현수막, 사법 고시에 합격했다는 현수막, 전국체전에서 메달을 땄다는 현수막 같은 것이 있습니다. 좋은 소식을 알리는 현수막도 있습니다. 음악회를 알리는 현수막, 공연을 알리는 현수막, 축제를 알리는 현수막이 있습니다. 저도 마을에 현수막을 걸어 놓은 적이 있습니다. 2000년 대림 때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의 대림 특강이 있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의 방문을 환영하는 현수막을 만들었습니다. 정치적인 입장을 알리는 현수막도 있습니다. 여당은 정부의 업적을 홍보하는 현수막을 만들고, 야당은 정부의 잘못을 알리는 현수막을 만들곤 합니다. 이번에도 몇 개의 현수막을 보았습니다. 미국의 부당한 요구에 단호하게 대응하라는 현수막이 있었습니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관세 협상의 과정에서 3,500억 불을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한미 동맹을 흔드는 전시작전권 환수를 반대한다는 현수막도 있었습니다. 현수막을 통해서 뜻을 드러내는 것은 한국의 독특한 문화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새로운 현수막을 보았습니다. 왕궁의 벽에 큰 손가락이 나타나서 ‘므네 므네 트켈 파르신’이라고 적었습니다. 그 뜻을 알 수 없던 왕은 지혜로운 다니엘에게 글씨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려달라고 했습니다. 그 뜻을 알려주면 커다란 선물을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다니엘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하느님께 봉헌하는 제물을 함부로 했던 왕에게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한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생각해 보니 하느님께서는 다양한 곳에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현수막을 마련하였습니다. 하느님을 닮은 사람의 마음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운 자연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보내 주신 예언자가 있습니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가을에 낙엽들이 바람에 흩어지는 것을 봅니다. 나무에 붙어 있을 때는 파란 색의 잎으로 생명을 지녔습니다. 햇빛을 받아 나무를 자라게 하고, 나무는 땅속 깊은 곳에서 양분을 끌어 올려 나뭇잎을 더욱 파랗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제 떨어진 낙엽은 햇빛을 받아 광합성을 할 수도 없습니다. 나무로부터 양분을 받을 수도 없습니다. 그저 부는 바람에 흩어져 쓸쓸함을 보여 줄 뿐입니다. 동물의 세계에서도 그렇습니다. 무리에서 빠져나온 어린 들소는 배고픈 사자의 표적이 되곤 합니다. 무리와 함께 있을 때는 사자들도 쉽게 공격을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무리에서 떨어진 들소는 혼자의 힘이 강하다 할지라도 사자의 억센 이빨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들소들은 함께 무리를 지어서 이동하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는 묵시문학의 이야기를 묵상하고 있습니다. 묵시문학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무리 강한 조직과 나라일지라도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면, 하느님과 함께하지 않는다면 악의 표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나약하고, 작은 나라일지라도 하느님의 뜻을 따르면 하느님과 함께한다면 주님께서 이끌어 주시니, 강가에 심어진 나무처럼 생기가 돋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신자분들을 만나면서 많은 묵상을 하게 됩니다. 자녀 문제로,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부부의 불화로 힘들고, 어렵게 지내는 가정이 많았습니다. 신앙을 갖지 않았다면, 하느님을 알지 못했다면 도저히 이겨낼 수 없는 문제들로 가슴 아파하는 분들을 보았습니다. 묵시문학은 이야기합니다. ‘이 모든 것도 다 지나가리라.’ 결국,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밝은 빛을 보리라고 말합니다. 오늘 제자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십니다. “여러분은 인내로써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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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의정부교구 김동희 모세 신부님]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루카 21,18). 오늘 복음에서 저에게 와닿은 구절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어느 날 불쑥 ‘내가 손해를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돌려받을 것입니다. 아니, 하느님께서는 넘치도록 후하게 우리에게 갚아 주실 것입니다(6,38 참조).
이러한 하느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오만방자한 사람의 모습을 우리는 오늘 독서의 벨사차르 임금에게서 봅니다. 임금은 천 명에 이르는 대신들을 거느리고 큰 잔치를 엽니다. 그러고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빼앗아 온 금은 기물들을 내오게 하여 그것으로 호기롭게 술을 마시려 합니다. 그러나 손가락 하나가 나타나 벽에 글을 씁니다. 하느님께서 그 왕국의 날수를 헤아리셨고, 그 임금을 저울로 달았더니 무게가 모자라더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자기의 힘을 자랑하지만, 그는 하느님 앞에서 그저 가벼운 한 인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녀들을 향한 세상의 박해를 예고하시면서도 “그러나 너희는 명심하여,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21,14)라고 하십니다. 영원과 부활을 확신하며 오늘을 충실히 살라고 하십니다. 구상 시인의 “오늘”이라는 시를 함께 묵상하고 싶습니다.
“오늘도 신비의 샘인 하루를 맞는다. // 이 하루는 저 강물의 한 방울이 / 어느 산골짝 옹달샘에 이어져 있고 / 아득한 푸른 바다에 이어져 있듯 /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하나다. // 이렇듯 나의 오늘은 영원 속에 이어져 / 바로 시방 나는 그 영원을 살고 있다. // 그래서 나는 죽고 나서부터가 아니라 / 오늘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하고 / 영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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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21,12-19: “너희는 나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박해와 시련이 올 것을 경고하신다. 세상 속에서 믿음을 지키는 길이 절대 쉽지 않음을 보여주시며, 그럼에도 하느님께서 끝까지 보호하시고 보살피신다는 위로와 확신을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다.”(12절) 제자들은 재판관과 임금 앞에 끌려가고, 감옥과 시련을 겪었다. 교회사 속에서도 교회는 지속적으로 박해를 받아왔고, 오늘날에도 죽음의 문화, 신앙 배척 등 다양한 형태로 박해는 계속된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을 안심시키신다.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18절) 이는 육신뿐만 아니라 영혼과 생명 전체를 보호하신다는 약속이다. 하느님께서는 세상 끝 날에 우리의 육신이 다시 살아날 것을 이미 준비해 두셨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말한다: “참된 신앙인은 시련과 박해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다. 박해는 믿음을 시험하고 연단하며, 그 믿음은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진다.”(De Civitate Dei, XX, 13)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강조한다: “하느님께서 제자들의 머리카락 수까지 세시는 것은, 그분이 우리 모든 삶과 작은 고난까지 세심하게 보살피신다는 표시이다.”(Homiliae in Lucam, 60)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교훈을 준다. 시련 속에서도 믿음을 굳건히 지켜야 한다. 세상과 세속적 가치, 죽음의 문화가 믿음을 흔들지 못하도록 하느님께 의탁해야 한다.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보호하심을 신뢰하라. 우리의 작은 고난과 노력, 머리카락 하나까지도 하느님께서 관심을 가지신다. 부활 신앙으로 살아가라. 시련과 박해를 두려워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며 오늘을 충실히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믿음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을 수도 있지만, 하느님께서는 끝까지 우리를 보호하시며 결코 홀로 두지 않으신다.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시련 속에서도 믿음을 굳건히 하고, 하느님께 의탁하며, 매 순간 부활 신앙으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시련과 박해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굳은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우리의 영혼과 삶을 당신께 맡기며,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며 충실히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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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오히려 더욱 그러할 때이니>
루카 21,12-19 (재난의 시작)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다. 너희를 회당과 감옥에 넘기고, 내 이름 때문에 너희를 임금들과 총독들 앞으로 끌고 갈 것이다.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명심하여,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까지도 너희를 넘겨 더러는 죽이기까지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오히려 더욱 그러할 때이니>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루카 21,13)
우리 믿어요
믿을 수 없을 때에도
아니 불신할 수밖에 없을 때조차
오히려 더욱 굳세게
믿어야 할 때이니
우리 희망해요
희망할 수 없을 때에도
아니 절망할 수밖에 없을 때조차
오히려 더욱 밝게
희망해야 할 때이니
우리 사랑해요
사랑할 수 없을 때에도
아니 미워할 수밖에 없을 때조차
오히려 더욱 뜨겁게
사랑해야 할 때이니
우리 기뻐해요
기뻐할 수 없을 때에도
아니 슬퍼할 수밖에 없을 때조차
오히려 더욱 신나게
기뻐해야 할 때이니
우리 일어나요
일어날 수 없을 때에도
아니 쓰러질 수밖에 없을 때조차
오히려 더욱 힘차게
일어나야 할 때이니
우리 함께해요
함께할 수 없을 때에도
아니 갈라설 수밖에 없을 때조차
오히려 더욱 살갑게
함께해야 할 때이니
우리 살려요
살릴 수 없을 때에도
아니 죽일 수밖에 없을 때조차
오히려 더욱 정성껏
살려야 할 때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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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신앙생활은 결코 ‘헛고생’이 아닙니다.>
“이 모든 일에 앞서,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다. 너희를 회당과 감옥에 넘기고, 내 이름 때문에 너희를 임금들과 총독들 앞으로 끌고 갈 것이다.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명심하여,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까지도 너희를 넘겨 더러는 죽이기까지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2-19)
1) ‘박해’는 종말이 아닌데도 종말처럼 보이는 일들 가운데에서 가장 대표적인 일입니다. 또 종말과 재림이 하루라도 빨리 이루어지기를 갈망하게 만드는 일이기도 합니다.(루카 17,22) 예수님께서는, 박해는 종말이 아니라 ‘신앙을 증언할 기회’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박해를 받더라도 신앙을 증언하라고 명령하신 말씀입니다.>
‘신앙을 증언할 기회’ 라는 말은, 안 믿는 사람들과 박해자들을 회개시킬 기회라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안 믿는 사람들이 신앙인들을 박해하는 것은, 아버지도 예수님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요한 16,3) 그러니 그들에게 아버지와 예수님을 제대로 알려 주면, 그들 중에 믿고 회개하는 사람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그런 일은 자주 일어나는 일입니다.>
“너희는 명심하여,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라는 말씀은, “인간적인 말재주로 신앙을 증언하려고 하지 마라.”라는 뜻이기도 하고, “세속적인 처세술로 박해에 대처하려고 하지 마라.”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신앙을 증언하는 일은 학문적인 논쟁이나 토론이 아니라, ‘구원의 길’을 ‘삶으로’ 드러내는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말과 나의 복음 선포는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에 바탕을 두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성숙한 이들 가운데에서는 우리도 지혜를 말합니다. 그러나 그 지혜는 이 세상의 것도 아니고 파멸하게 되어 있는 이 세상 우두머리들의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신비롭고 또 감추어져 있던 지혜를 말합니다. 그것은 세상이 시작되기 전, 하느님께서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미리 정하신 지혜입니다."(1코린 2,4-7)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진리를 증언하는 일은, ‘이 세상의 방식’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라는 말씀은, ‘성령의 힘’으로 도와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2) 가족들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은,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많은 사람들에게서 미움과 박해를 받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뜻으로는 ‘모든 사람’이 아니라, ‘많은 사람’입니다. 또 “반드시 미움을 받게 된다.”, 또는 “미움을 받아야 한다.”가 아니라, “미움을 받더라도 참고 견뎌라.”입니다.>
산상설교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라는 계명은, 사람들에게서 미움을 받는 상황에도 적용됩니다. 신앙인을 미워하고, 박해하고, 죽이려고 하는 그 사람들도 ‘구원의 대상’이고, 복음 선포의 대상입니다.
3)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들과 초대교회는 처음에는 ‘미움’이 아니라 ‘호감’을 얻었고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이 집 저 집에서 빵을 떼어 나누었으며,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 주님께서는 날마다 그들의 모임에 구원받을 이들을 보태어 주셨다."(사도 2,46-47)
“...... 백성은 그들을 존경하여, 주님을 믿는 남녀 신자들의 무리가 더욱더 늘어났다."(사도 5,13ㄴ-14) 미움과 박해를 받으면 기가 꺾여서 신앙이 흔들릴 수 있고, 반대로, 세상 사람들로부터 호감을 얻고 존경을 받으면 자만심에 빠져서 신앙생활을 소홀히 할 수 있습니다.(루카 6,26) <둘 다, 신앙을 흔들어 놓으려고 하는 사탄의 방해공작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미움을 받든지 존경을 받든지 간에, 그런 일에 대해서 일희일비 하지 말고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을 흔들림 없이 걸어가야 합니다.
4)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이, 마태오복음에는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마태 10,30)로 표현되어 있는데, 우리의 신앙생활과 노력을 하느님께서 세세하게 알고 계시고, 그대로 보상해 주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루카복음의 말씀과 마태오복음의 말씀을 합하면, 신앙생활은 절대로 ‘헛고생’이 아니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거룩한 일이라는 격려 말씀이 됩니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라는 말씀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인내하여라.”라는 가르침입니다. <잘 인내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은 희망입니다. 그리고 그 희망에 대한 믿음입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로마 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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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합니다>
사람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진면목을 알 수 있습니다. 그때야말로 그 사람의 크기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어려움을 처리하는 과정 안에서 진실한 모습을 보게 되고 하느님의 사람인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28절에서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사람에게는 선을 이룰 수 있게 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 선을 지향하는 사람은 곧 하느님의 사람이요,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의 눈에 드는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신부인 저도 일상생활 안에서 하느님의 사람이 아닌 상태로 지낼 때가 종종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아마 누군가 제 속을 알면 큰 실망을 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 때문에 박해와 비난을 받게 됩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도 주님을 따라야 하지만 연약한 인간의 모습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미리 당신의 제자들에게 위로와 힘을 주십니다. "박해를 당하고 감옥에 갇히게 되고…. 그때야말로 너희가 나의 복음을 증언할 기회이다……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12-15)
박해는 그리스도를 증언할 기회라고 했지만 어디 그것이 말같이 쉬운 일입니까? 일상 안에서도 변명과 합리화시키려고 하는 마음이 얼마나 많은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회당이나 관청이나 관아에 끌려갈 때, 어떻게 답변할까, 무엇으로 답변할까, 또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주실 것이다.”(루카 12,12)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합니다. 감옥에 갇혀서도 소신을 지킵니다. 걱정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제 믿음을 지닌 제자들은 인간적인 말재주와 인간적인 지혜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능력과 지혜로 말하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4장13절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최고 의회에서 증언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의회 의원들은“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을 보고 또 이들이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임을 알아차리고 놀라워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6장10절에도 스테파노와 논쟁을 벌이는데 “그의 말에서 드러나는 지혜와 성령에 대항할 수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최고 의회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모두 스테파노를 유심히 바라보았는데, 그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처럼 보였다.”(사도행전 6,15)고 했습니다.
그야말로 믿음을 간직하고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로움인지를 체험하려면 주님의 말씀대로 실천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사람으로 서 있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됩니다.
혹 지금 힘들더라도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6)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위안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어려움 속에서 진정한 나의 모습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렇게 시험을 통과하면, 그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야고1,12)
우리가 지닌 삶의 십자가가 얼마나 많습니까? 주님 안에서 삶의 고통을 이겨내려는 모든 수고와 땀을 그분은 아십니다. 그러니 삶의 여정에서 오는 시련과 고통을 은총의 기회로 삼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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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몇 년 전 피정 때 산책을 하면서 선배 신부님과 나누었던 대화가 기억납니다. “신부는 참고 인내하며 살아가는 사람이지 않을까요?” 하고 제가 말하였더니, 선배 신부님이 “어쩌면 너도 나를 참아 주며 살았겠지만, 나도 너를 견디며 살았다! 니만 견딘 것이 아니여!”라고 웃으며 말씀하셨습니다.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언제나 자신이 참고 인내한다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상대가 나를 더 많이 참아 주고 견디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우리는 모두 인내합니다. 삶의 목줄을 쥐고 있는 이 앞에서 비굴하게 견뎌 내고, 곁에 있는 가족들은 늘 마주하여야 하기에 또 서로를 견뎌 냅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 아무 일 없는 듯 견뎌 내기도 하고, 모든 것을 잃을까 하는 두려움에 상대를 견뎌 내기도 합니다. 분란과 분열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참기도 하고, 나보다 내가 바라보는 이가 더 행복해지게 하려고 인내하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인내하고 참고 견뎌 내는 이유’입니다. 생명을 얻고자 하는 인내는 자신을 위한 인내가 아닐 것입니다. 자신을 위한 인내는 한계가 있지만, 사랑을 위한 인내는 한계가 없지 않을까요? 예수님께서 그러셨고 성모님께서 그러셨으며 우리의 부모님이 그러셨습니다.
순교자들은 아프지 않아서 두렵지 않아서 고통을 참아 냈던 것이 아닙니다. 그 고통보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더 크기에 인내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인내의 이유가 사랑이었으면 합니다. 그 사랑의 마음은, 우리에게 아픔과 고통이 참아 내야 하는 무엇이 아니라, 당연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행복이 되게 해 줄 것입니다. 그것이 생명을 얻는 일입니다. 더 많이, 더 자주, 더 열렬히 사랑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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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증언할 기회>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이어 계속해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신 담화, 곧 ‘종말’에 대한 말씀입니다. 먼저, 박해와 박해 가운데에 있게 될 증언에 대한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다. ~ 그러나 언변과 지혜를 내가 주겠다.”(루카 21,12-15)
‘박해’가 오히려 당신을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라고 깨우치십니다. 곧 박해를 당하게 되면 오히려 하느님의 능력과 현존을 체험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지혜를 주시고 보호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하느님께서 눌변인 모세의 입과 함께 계셨듯이,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탈출 4,11-12.15-16)
그러니 박해를 통하여 오히려 우리는 신앙이 굳세어지고 새로워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위기의 순간은 가장 좋은 기회의 순간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7-19)
이는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미움이나 배척에서 벗어나게 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미움과 배척을 통하여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곧 미움과 박해를 벗어나게 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보호해주고 지켜주실 것이니 인내하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는 미움 받거나 배척받게 되면 힘들어 합니다. 고난과 시련, 어려움이나 귀에 거슬리는 말이나 힘든 것은 피하고, 편하고 좋고 즐거운 것, 듣기 좋은 말에 더 맞들이고 쉽게 기울어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려움과 인내를 통하여 구세주와 협력하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신기하게도 어려움과 인내에는 고통을 변화시켜 하느님과의 만남이 되게 하는 묘한 이법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고난을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위하는 특권을, 곧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하여 고난까지 겪는 특권을 받았습니다.”(필리 1,29)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9)
성 베네딕도 역시 ‘인내’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통로요, 그리스도의 수난에 참여하는 한 방법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에 인내로써 한몫 끼어 그분 나라의 동거인이 되도록 하자.”(수도규칙 머리말 50)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는다면, 그리스도와 함께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려면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필립 3,10; 로마 8,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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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샘 기도>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루카 21,17)
주님!
고난과 시련이 당신을 증언할 기회가 되게 하소서.
그 속에서 당신의 능력과 현존을 체험하게 하소서.
오히려 굳세어지고 새로워지게 하소서.
바로 그 순간이 위기의 순간이 아니라, 기회의 순간이 되게 하소서.
그 어떤 미움도 배척도 당신과 함께 받고, 당신의 영광도 함께 누리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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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루카 21,13)
<고통은 나의 믿음을 알게 해 주는 척도!>
오늘 복음(루카 21,12-19)은 어제 복음에 이어지는 말씀으로 '재난의 시작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다. 너희를 회당과 감옥에 넘기고, 내 이름 때문에 너희를 임금들과 총독들 앞으로 끌고 갈 것이다.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루카 21,12-13)
"그러나 너희는 명심하여,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루카 21,14-15)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8-19)
예수님의 이 말씀을 믿고 그대로 따라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열두 사도들이었고, 교회 첫 순교자 스테파노와 이방인의 사도인 바오로와 그리고 수많은 순교자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순교자들은 모진 박해와 목에 칼이 들어오는 죽음의 순간에 오히려 더 큰 목소리로 주님을 찬양했고,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했습니다.
'박해와 미움이, 그런 상태를 보여주는 고통과 시련'이 오히려 예수님을 증언할 좋은 기회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끝까지 참고 견뎌내야 하고, 고통과 시련 앞에서 포기하거나 넘어지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잠깐 넘어졌다하더라도 얼른 다시 일어나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종들은 일이 뜻대로 잘 될 때는 어느 정도의 인내심과 겸손을 지니고 있는지를 본인 자신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뜻을 받들어야 할 바로 그 사람들이 자신을 반대할 때 그가 보여주는 그 정도의 인내심과 겸손을 지니고 있는 것이지 그 이상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성 프란치스코의 영적인 권고 13, '인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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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9)
영혼의 여정은
인내의
여정입니다.
인내는
우리 자신을
바로 세우고,
관계를 살리고,
생명을 지키는
신앙의 참된
길입니다.
그 인내의
깊음 속에서
우리의
참된 생명이
드러나고
성장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갚는 우리 삶의
진실한 실천이
인내입니다.
인내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때와
하느님의 길을
우리가
받아들이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구원은
삶 전체로
이어지는
믿음의
여정입니다.
인내는
우리 자신을
성장시키고
관계를
성장시킵니다.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영적 자세가
인내입니다.
인내는 신뢰에서
나오고,
그 신뢰가
영혼을 살립니다.
하늘의 뜻에
자기를 맡기는
삶의 방식이
인내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하느님을
향해 서 있는
희망의 행위가
인내입니다.
인내는 우리를
소진시키는
시간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생명을 깊게
빚어 가시는
은총의 값진
시간입니다.
인내로써
생명을 얻는
한 해의 값진
시간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인내는
하느님께
우리 자신을
맡기는 신앙의
본질입니다.
+++++++++++++++++++
(2)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 19)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지혜가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걱정하며 살아갑니다. 걱정과 불안을 주님과 나누면 걱정과 불안은 인내와 용기가 되고 지혜가 되어 있습니다. 생명을 얻게 하시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가장 좋으신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있기에 우리는 뒤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나아가야 할 생명의 방향을 아는 것이 종말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미움을 떼어내는 집착을 떼어내는 하느님 사랑에 우리는 집중할 뿐입니다. 미움과 박해 속에서도 주님께서는 꿋꿋이 주님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주님의 길이 구원의 길입니다. 인내로써 구원을 이루시는 주님을 정녕 믿습니다.
우리는 늘 우리자신 때문에 걱정을 먹고 살지만 예수님께서는 인내로써 걱정을 뛰어넘는 구원의 진리를 걱정이 많은 우리들에게 보여주십니다. 인내와 끈기가 우리를 살리는 삶의 지혜입니다. 근심과 걱정 삶의 조바심이 부질없음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걱정의 포로 미움의 노예가 아니라 사람을 낚는 구원의 협력자들입니다. 걱정은 하느님의 지혜를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말씀 하나하나를 되새기며 하느님을 향합니다. 하느님의 희망은 뒤를 돌아보는 집착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희망은 매 순간 베푸시고 지켜주시는 사랑과 자비를 되새기는 감사입니다. 인내는 감사를 향하고 생명은 구원을 향해 있습니다. 구원을 향하는 생명의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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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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