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위에 쌓인 눈들이 바람에 날려 산산이 흩어져 별빛에 부스러지는 모습은 마치 은빛 가루가 날리는 듯했고, 온 세상을 몽환적 분위기로 몰아넣었다.
"자,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어요. 적어도 하루에 한 번씩은 수정 구슬 닦아주기..."
무슨 노래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언젠가 내 입에서 흘러나온 적 있던 노래를 흥얼거리며 베란다 밖을 바라보았다.
아래 공터엔 새하얀 눈밭이 펼쳐져 있었다. 그 위엔 누구의 발자국도 없었다. 단지 달빛에 비친 은백색의 눈만이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어떻게 아무도 저 곳에 발을 들이지 않았을 까 하는 생각보다는 저 은백색의 눈밭에 구르고 싶은 충동이 더 컸다.
"그 어떤 마법 보다 더 신비롭던 우리의 맨 처음 그 밤 빛나던 약속..."
갑자기 그 다음 가사가 생각나지 않자, 난 괜히 머쓱한 기분에 서둘러 아래의 눈밭에 나갈 채비를 차리기 시작했다.
먼저, 한 동안 옷장 안에서 묵혀 두었던 검은 원피스를 꺼내 보았다. 지난번에 입은 후 깨끗이 빨아서 다림질까지 해 둔덕에 여전히 새 것 같았다. 물론, 치마 아래쪽에 묻어있는 하얀 먼지들은 조금 털어 내야 했지만.
난 마치 수도사가 된 기분으로 검은 원피스를 챙겨 입었다. 그리고 그 위에 다시 모자가 달린 검은 코트를 걸침으로써 온통 검게 무장을 하고는 순백의 벌판에 나갈 채비를 마쳤다.
잠시 거울을 보던 나는 내 모습이 어디선가 본 듯 한 모습이라는 것에 놀랐다. 그리고 그 것이 내가 그리도 꿈꿔왔던 마녀의 모습이라는 것에 또 한번 놀랐다.
"뭔가 멋진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밤이야."
난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현관으로 나갔다. 현관엔 몇 켤레의 신발들이 그야말로 이리저리 나뒹굴고 있었다. 하지만 난 그들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다만 한 쪽 구석에 자리하고는 저 혼자 도도한 양 꼿꼿이 서 있는 검은 구두 속으로 내 발을 집어넣었다. 내 발을 죄어오는 구두의 압박감이 왠지 나도 이 구두처럼 도도해져 볼까 하는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막 문 밖을 나서려는 내 눈에 현관 구석에 기대어 세워져 있는 빗자루가 보였다. 그것은 공장에서 찍어낸 수천 수 만개의 똑같은 빗자루 중의 하나가 아닌, 마녀들이 들고 다니는 그것과 같은 모양의 것으로 손수 만든 것이었다.
"까만 고양이 삐삐 그리고 새로 다려 논 까만 원피스 혹시 잊은 건 없나요 살펴보아요..."
난 왠지 좋아진 기분에 잊어버린 가사 따위는 생략하고, 2절부터 부르기 시작했다.
현관문을 잠그던 중 문득 이 문을 내 손으로 다시 열 일은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자, 피식 웃어 버렸다. 어차피 이 집엔 나 혼자 산다. 내가 안 열면 누가 연단 말인가. 말도 안돼는 소리다.
엘리베이터를 타려던 나는 생각을 바꿔 계단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파트 높이는 25층이나 되었지만, 우리 집은 겨우 4층이었고, 사방이 꽉 막힌 좁은 엘리베이터보다는 계단 쪽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떠나는 그대를 위해 새로운 바람이 부네요 이제 그대 작은 빗자루를 들어..."
텅 빈 복도를 가득 채우는 내 구두 소리가 너무도 낯설었지만 오히려 우리 집이 25층이었다면 이 소릴 더 오래 들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기분 좋은 소리였다.
이윽고 1층에 도착한 난 두 가지 생각과 감정이 동시에 엇갈려 우뚝 멈추어 섰다. 하나는 더 이상 또각거리는 내 구두 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데 대한 아쉬움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제 곧 순백의 눈밭에 도착하리라는 기대감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난 어느 새 눈밭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마침내 난 그리도 -몇 분되지 않지만- 갈망하던 눈밭에 도착했다. 그 곳엔 여전히 작은 새들의 발자국조차 없었고, 그러한 사실이 나에겐 신기하다 못해 신비롭게까지 느껴졌다.
"하아...하아..."
난 천천히 숨을 고르며 그 새하얀 모습을 감상했다. 그 곳은 그리 넓지 않은 공터였다. 주변엔 나무들이 울타리를 치고 있었고, 가끔 불어오는 바람결에 나무 위에 얹혀 있던 눈들이 흩날리는 모습은 이 곳이 마치 동화 속 한 장면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난 갓 걸음마를 배운 아기처럼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눈밭을 향해 다가갔다. 발목이 시리고, 너무나도 추웠지만 멈추어 서지는 않았다.
"아!"
무언가 말을 해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이 들었지만 난 단지 외마디 감탄사를 내뱉을 뿐이었다. 그 외에 달리 할 말이 또 있으랴.
느릿한 걸음으로나마 공터의 가운데에 도착한 나는 그대로 눈 위에 드러누워 버렸다. 아무런 기댈 것도 없고, 받쳐줄 사람도 없는 곳에 쓰러진다는 생각에 아찔해 진 난 살짝 눈을 감았다.
눈 위는 그리 푹신하지도, 딱딱하지도 않았다. 다만 내 몸 하나 쓰러져도 다치지 않을 정도는 될 정도였다.
차가운 느낌이 온몸에 전달되는 순간 난 살며시 눈을 떴다. 그런 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검푸른 비단 위에 뿌려진 작은 보석들이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아름답던지 난 한참이나 멍하니 빛나는 별들을 바라보았다.
한참을 멍하니 별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문득 사랑하던 모든 이들을 잃던 그 날이 떠오른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애써 떠오르는 생각들을 떨쳐버리려 하늘을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벌써 수 만년 전부터 이 땅에 발 디디기 위해 달려온 별빛들 틈으로 붉게 물든 달이 보였다.
"붉은 달. 붉은 달. 붉은 달. 붉은... ...!"
무언가 떠오를 것 같은 생각에 난 붉은 달이라는 단어를 조용히 되뇌어 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기억의 저편에서 어떤 영상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비록 내 상상으로 만들어 낸 영상이었지만, 나에게 있어선 영화 속의 한 장면인 마냥 생생했다.
온통 붉은 빛을 뿜어대는 달과 그 앞을 유유히 날아가는 어떤 마녀.
난 무언가 날 이끄는 것 같은 느낌으로 눈밭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는 최대한 빨리 달려 아파트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는 23층에 있었고, 난 그 조차 기다릴 수 없어 계단을 올랐다.
"헉...헉..."
이제 겨우 10층을 올라왔을 뿐인데도 너무나 숨이 찼다. 하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난 옥상으로 올라가야 한다. 옥상으로.
19층쯤 왔을까? 난 더 이상 뛸 수 없어 손에 든 빗자루를 지팡이 삼아 기다시피 올라갔다. 이쯤이면 엘리베이터를 타도 될 법하지만 그러고 싶진 않았다. 아니, 이대로 쓰러지더라도 계단으로 가고 싶었다.
이젠 내려올 때와는 다른 구두 소리가 복도를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띄엄띄엄 이어지는 구두 소리는 옥상으로 향하는 문 앞에 서면서 멈추었다.
"하아... 하아..."
-삐이걱
문이 열리자 쏟아져 들어오는 찬바람이 내 땀을 식혀 주었다. 난 쉴 겨를 없이 옥상 끝을 향해 걸었다. 이제, 하늘을 나는 거다. 나의 달을 향해 이 빗자루를 타고 날아가는 거다.
"후우우...후우우..."
난 잠시 서서 숨을 골랐다. 토할 것 같은 기분을 애써 참으며 어느 정도 숨을 골랐다고 생각한 순간 난 조심스레 옥상 난간 위로 한 발 또 한 발을 내딛었다.
그 위에 서서 바라본 세상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새하얀 눈은 모든 추악함을 그 특유의 백색으로 모두 덮어 주었고, 나의 달은 그러한 눈을 더욱 빛나게 했다.
"이제, 날아가는 거야. 나의 달 까지."
난 조심스럽게 빗자루에 걸터앉으며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난간 아래로 뛰어 내렸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엔 잊혀졌던 노래가사가 떠올랐고, 난 기쁨에 젖어 그 노래의 후렴 구를 흥얼거리며 나의 달을 향해 한없이 날아갔다.
"난 믿고 기다릴게요. 그대 내게 돌아오는 그 날, 그 때 다시 시작해 봐요. 멋진 세상 새로운 날들을..."
<에필로그>
16세 여아 투신자살.
지난 밤, 모 아파트에서 16살 이 모씨가 투신자살했습니다. 경찰은 가족들의 비참한 죽음의 현장을 목격한 충격으로 인해 비관 자살한 것으로 보고 정확한 원인규명에 나섰습니다. 경찰은 유언장도 없는 점이나, 그 밖의 주변 정황으로 보아 타살의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다음 소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