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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1. 들어가는 말 2. 불은상기게와 팔상성도 3. 부처님은 역사적으로 실존하셨던 분이다. 4. 부처님의 출가 – 버리고 떠나기 5. 부처님의 수행과정 – 길 찾기 6. 부처님의 성도과정 - 깨닫기 7. 부처님의 전법과정 – 함께 나누기 8. 부처님은 법(法, dhamma)을 가르치셨다. 9. 법으로 부처님을 봐야한다. 10. 법은 개념(paññatti)을 해체했을 때 드러난다. 11. 불교의 목적, 행복의 실현 12. 후배들께 드리는 당부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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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는 말
여기 모인 행자님들은 출가를 결심하고 입문과정에 있는 분들이다. 그러면 무엇을 출가라 하는가? 한마디로 출가는 버리고 길을 찾아 떠나기이다. 초기불전의 수백 군데에서 출가는 “집에서 나와 출가하다.”(D1 §2.6 등)라는 정형구로 나타난다. 그래서 주석서는 “출가자란 재가의 족쇄를 자른 뒤에 출가를 결행한 자”(SA.iii.297)라고 설명하기도 하고, “출가자란 재가에 머무는 것을 버리고 교법에 출가를 결행한 자를 말한다.”(AA.v.38)라고 출가자를 정의하기도 하며, “출가는 다시 태어난 것과 같다.”(MA.iii.154)라고 풀이한다. 그러므로 ‘출가(pabbajjā)’는 세속적인 소유물이나 의무나 규범을 버리고 불교교단에 들어와서 수계를 하고 독신으로 교학과 수행과 전법에 전념하는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출가는 그냥 떠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길을 찾아 떠나기이다. 우리는 부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세속을 버리고 길을 찾아 떠난 출가를 결행한 자들이다. 이러한 출가는 우리의 스승이신 부처님의 출가에서도 여실하게 볼 수 있다. 출가자의 삶은 우리의 스승이신 석가모니 부처님을 배우고 닮아가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생애는 우리 출가자들에게 각별할 수밖에 없다.
부처님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출가와 수행과 성도와 전법의 네 가지일 것이다. 이 넷은 각각 버리기, 길 찾기, 깨닫기, 함께 나누기로 표현할 수 있다. 이미 행자님들은 6개월 남짓한 생자생활을 하면서 부처님의 생애에 대해서는 충분히 배우고 음미하였을 것이기 때문에 오늘 강의는 먼저 부처님의 일대기를 부처님의 탄생과 이 넷에 초점을 맞추어서 간략하게 설명한 뒤 우리 출가자가 생명으로 삼고 살아야하는 법(法, dhamma, dharma)을 강조하는데 초점을 맞추어서 진행하고자 한다.
2. 불은상기게와 팔상성도
전통적으로 부처님의 생애는 우리가 발우공양을 할 때 외우는 불은상기게(佛恩想起偈, 부처님 은혜를 생각하는 게송)와 팔상성도(八相成道)로 설명된다. 불은상기게는 다음과 같다.
佛生迦毘羅(불생가비라) - 부처님은 가비라에서 태어나셨고
成道摩竭陀(성도마갈타) - 마갈타에서 깨달으셨으며
說法婆羅奈(설법바라나) - 바라나에서 설법을 하셨고
入滅拘尸羅(입멸구시라) - 구시라에서 열반에 드셨다.
여기서 가비라(迦毘羅)는 까삘라왓투(Kapilavatthu)의 음역이고 마갈타(摩竭陀)는 마가다(Magadha)를 바라나(婆羅奈)는 바라나시(Bārāṇasi/Vārāṇasi)를 구시라(拘尸羅)는 꾸시나라(Kusinārā)를 음역한 것이다. 이 불은상기게는 부처님의 마지막 발자취를 담고 있는「대반열반경」(D16)의 세존의 말씀과 일치한다.
“아난다여, 믿음을 가진 선남자가 친견해야 하고 절박함을 일으켜야 하는 네 가지 장소가 있다.
‘여기서 여래가 태어나셨다.’ … ‘여기서 여래가 위없는 정등각을 깨달으셨다.’ … ‘여기서 여래가 위없는 법의 바퀴를 굴리셨다.’ … ‘여기서 여래가 무여열반의 요소로 반열반하셨다.’ ― 이곳이 믿음을 가진 선남자가 친견해야 하고 절박함을 일으켜야 하는 장소이다. 아난다여, 이것이 믿음을 가진 선남자가 친견해야 하고 절박함을 일으켜야 하는 네 가지 장소이다.”(D16 §5.8)
이 네 가지 장소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부처님의 탄생지 룸비니(Lumbinī)와 성도지 보드가야(Bodhgaya)와 초전법륜지 바라나시의 녹야원(Migadāya)과 입멸지 꾸시나라이다. 지금도 이 네 곳은 세계의 불자들이 성지순례를 위해서 모여드는 곳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이렇게 역사적인 삶을 사셨던 분이시다.
그리고 석가모니 부처님의 생애를 여덟 기간으로 나누어 보는 전통적인 방식을 팔상성도(八相成道)라 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도솔래의상(兜率來儀相) - 도솔천에서 인간으로 태어나신 모습
비람강생상(毘藍降生相) - 룸비니에서 태어나신 모습
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 - 사대문을 통해서 각각 노인/병자/시체/출가자를 보신 모습
유성출가상(踰城出家相) - 성을 나와 출가하신 모습
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 - 설산에서 수행을 하신 모습
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 - 보드가야의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실현하신 모습
녹원전법상(鹿苑轉法相) - 바라나시의 녹야원에서 최초설법을 하신 모습
쌍림열반상(雙林涅槃相) - 쿠시나가라의 사라쌍수 아래서 반열반에 드신 모습
불교 2600년사의 흐름은 모두 이처럼 역사적으로 실존하셨던 석가모니 부처님 즉 고따마 싯닷타(Gotama Siddhatta, Sk. Gautama Siddhartha) 그분으로부터 출발한다. 후대의 모든 불교는 그분이 깨달으시고 45년간 설법하셨던 그 가르침을 뿌리로 해서 전개된다.
우리가 소속된 대한불교 조계종 종헌 제1장 종명 및 종지 제2조도 “본종은 석가세존의 자각각타 각행원만한 근본교리를 봉체하며 직지인심 견성성불 전법도생함을 그 종지로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종헌 제2장 본종, 기원 및 사법 제4조에 “본종은 석가모니불을 본존불로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처럼 대한불교 조계종의 종헌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체득하여(교학) 이를 바탕으로 수행과 전법에 전념하는 것을 종지로 밝히고 있다.
3. 부처님은 역사적으로 실존하셨던 분이다.
① 부처님은 석가모니 부처님이다.
부처님은 석가모니 부처님(釋迦牟尼佛)으로 불리는데 석가모니(釋迦牟尼)는 사꺄무니(Sakyamuni)를 음역한 것이며 ‘사꺄족(Sakya)의 성자(muni)’로 직역된다. 사꺄(Sakya)는 히말라야산 기슭에 살던 종족의 이름이고 까삘라왓투(Kapilavatthu)가 수도였다.(D14)
『숫따니빠따』에서 부처님께서는 스스로를 “족성으로는 태양의 후예라 하며 태생으로는 사꺄라 부릅니다. 나는 그 가문으로부터 출가했습니다. 대왕이여, 감각적 욕망을 동경해서가 아닙니다.”(Sn {423})라고 읊고 계신다.『디가 니까야』「암밧타 경」(D3)에 의하면 사꺄족(석가족, 釋迦族)은 사까(sāka) 나무에서 유래하였다. 사까(sāka)는 학명으로는 Tectona grandis인데 요즘 최고의 목재로 인기 있는 티크(Teak) 나무를 말한다.
출가이전의 부처님(주해1)의 성함은 고따마 싯닷타(Gotama Siddhattha, Sk. Gotama Siddhārtha)인데 고따마는 성(族姓)이고 싯닷타(싯다르타)는 이름이다. 초기불전에서 부처님의 제자들은 부처님을 주로 세존(Bhagavan)으로 칭하고 있으며 외도들이나 일반인들은 부처님을 주로 사문 고따마(samaṇa Gotama, D3 등)나 고따마 존자(bhavanta Gotama, M4 등)라는 족성으로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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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해1)
부처님[佛]으로 옮겨지는 붓다(Buddha)라는 술어는 문법적으로는 √budh(깨닫다, to be enlightened)의 과거분사에 해당하는데, 이것이 남성명사로 쓰여서 ‘깨달은 분[覺者]’이라는 뜻이 된다. 중국에서 붓다(Buddha)는 佛陀, 勃陀, 勃馱, 步他, 沒度, 沒馱, 浮圖, 浮屠(불타, 발타, 발타, 보타, 몰도, 몰타, 부도, 부도) 등으로 다양하게 음역되다가 불(佛)이나 불타(佛陀)로 정착이 되었으며, 한국에서는 부처님으로 정착이 되었다.
엄밀하게 말하면 성도(成道) 이전의 부처님은 아직 깨달은 분이 아니기 때문에 부처님이라 부를 수 없다. 그래서 초기불전은 이런 상태의 부처님을 보디삿따(bodhisatta)라 칭하고 있다. 보디삿따(bodhisatta) 혹은 산스끄리뜨 보디삿뜨와(bodhisattva)는 중국에서 보리살타(菩提薩埵)로 음역되고 각유정(覺有情)으로 옮겨졌으며 줄여서 보살(菩薩)이라고 통용된다. 보리살타(보디삿따)는 깨달음(보리, bodhi)을 추구하는 중생(살타, satta)이란 뜻이다.
초기불전에서는 깨달음을 실현하시기 이전의 부처님을 보살이라 부르고 있으며 이것이 더 확장되어 대승불교에서는 위로 보리를 구하고(上求菩提) 아래로 중생을 제도하는(下化衆生) 대승불교의 이상적 수행자상이 되었다. 그러므로 엄격히 말하면 세존께서 깨달음을 성취하시기 이전의 삶은 보살이라 불러야하고 깨달은 뒤의 삶은 부처님이라 불러야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런 구분 없이 모두 부처님으로 표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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싯닷타(싯다르타, Siddhattha, 근본(attha)을 성취함(siddha))이라는 세속의 함자는 니까야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세속의 함자인 싯닷타는 주석서 문헌에서 나타나는데(MA.ii.333; AA.i.239) 그것도 드물게 언급되고 있다. 세속의 함자로 부처님을 칭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기 때문에 싯닷타라는 이름은 초기불전에는 나타나지 않고 주석서 문헌에서도 아주 드물게 나타나는 것으로 여겨진다.
② 부처님은 어디서 태어나셨는가?
부처님은 까삘라왓투(Kapilavatthu)를 수도로 하는 히말라야산 기슭에 살던 사꺄(Sakya) 족의 왕이었던 숫도다나 왕(Suddhodana rājā)을 부친으로 마야 왕비(Māyā devī)를 모친으로 하여(D14) 현재 네팔에 속하는 룸비니(Lumbinī)에서 태어나셨다.
부처님은 정말 실존하셨던 분인가를 두고 19세기 말에 서구 학자들 사이에는 의견이 분분했다고 한다. 그러나 부처님의 탄생지로 알려진 룸비니(Lumbinī)에서 아쇼카 대왕(Asoka-mahārājā, DAṬ.ii.245, 서기전 268년 즉위, 233년 몰)의 석주가 발견되고 여기에 적힌 문장을 읽으면서 이런 논란은 사라져버렸다.
이곳에 아쇼카 대왕은 부처님이 태어나신 성지임을 표시하는 거대한 석주를 세웠다. 석주에는 아쇼카 문자 93자로 된 다섯줄의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는데 그 가운데는 “석가족의 성자, 부처님, 여기서 탄생하셨도다.(hida budhe jāte Sākyamuni)”라는 문장이 있다. 이 석주는 지금도 네팔의 룸비니에서 그대로 볼 수 있다. 인터넷에서 ‘룸비니 아쇼카 석주’로 검색해보면 생생한 사진들을 볼 수 있다. 서기 7세기 중엽 중국의 구법승 현장 스님이 여기에 왔을 때는 석주는 이미 벼락으로 부러져 있었지만 ‘어제 깎은 듯 생생하다.’고 했다. 그 후 오랫동안 잊혀 져 오던 룸비니 동산은 1896년 발굴, 확인됨으로써 룸비니의 전설이 역사적 사실로 입증되었다.
BC 3세기에 각인된 아쇼카 석주에 새겨진 이 명문이야말로 부처님이 실존인물이었음을 밝혀주는 가장 명백한 사료가 될 뿐만 아니라 역사의식과 역사에 관계된 자료가 희박한 인도에서 모든 역사적 판단을 하는 기본 자료가 된다. 뿐만 아니라 부처님의 입멸시기를 결정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③ 부처님은 언제 태어나셨는가?
아쇼카 대왕의 즉위년도는 서기전(BC) 268년으로 보는 것이 정설이다. 세계불교도우의회(WFB)에서는 부처님의 입멸을 서기전(BC) 543년으로 보는 것을 정설로 삼고 있다. 세존의 마지막 행적을 담고 있는「대반열반경」(D16)에서 부처님께서는 임종하시기 직전에 부처님을 뵙고 당신의 마지막 출가 제자가 된 수밧다 유행승에게 “수밧다여, 29세가 되어 나는 무엇이 유익함인지를 구하여 출가하였노라. 수밧다여, 이제 51년 동안 출가 생활을 하면서 바른 방법과 법을 위해서 [여러] 지방에 머물렀나니 이밖에는 사문이 없다.”(D16 §5.27)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이처럼 부처님께서는 29세에 출가하셨고, 6년간의 고행과 깨달음을 증득하신 뒤 45년간의 전법을 포함한 51년간 출가생활을 하셨으며, 그래서 80세에 반열반하셨다. 이렇게 본다면 세존께서는 서기전(BC) 623년에 룸비니에서 탄생하신 것이 된다.
조계종 종헌 제1장 제5조는 “본종은 석가모니불의 기원을 단기 1789년(서기 기원전 544년)으로써 기산한다.”라고 명시하고 있는데 이것은 세계불교도우의회(WFB)가 공인하는 기원전 543년 설과도 같다.
4. 부처님의 출가 – 버리고 떠나기
부처님의 출가는 늙고 병들어 죽는 괴로운 현실의 자각에 토대하고 있다. 이러한 자각은 팔상성도에서 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으로 표현되고 있는데 이것은 부처님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는『디가 니까야』의「대전기경」(D14)에 그 원형이 잘 나타나고 있다. 세존께서는 사대문을 통해서 늙은 자와 병든 자와 죽은 자와 출가자를 보고 출가를 결심하셨다.
부처님이 왕자로서 누렸던 영화로운 삶은『앙굿따라 니까야』「편안함 경」(A3:38)에 묘사되어 나타난다. 부처님은 이러한 영화로운 삶을 사시면서도 늙음과 병듦과 죽음의 불가피성을 통찰하셨고 그래서 젊음과 건강과 장수에 대한 자부심이 다 사라져버렸다고 토로하고 계신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은 영화를 누렸고 이와 같이 지극히 편안했던 나에게 이와 같은 생각이 들었다.
‘배우지 못한 범부는 자기 스스로도 늙기 마련이고 … 병들기 마련이고 … 죽기 마련이고 죽음을 극복하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다른 죽은 사람을 보고는 자신도 죽기 마련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죽음을 싫어하고 혐오스러워한다. 나도 또한 늙기 마련이고 … 병들기 마련이고 … 죽기 마련이고 죽음을 극복하지 못했다. 만약 내가 죽기 마련이고 죽음을 극복하지 못한 채 다른 죽은 사람을 보고는 싫어하고 부끄러워하고 혐오스러워한다면 그것은 나에게 적절치 않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내가 숙고했을 때 젊음에 대한 … 건강에 대한 … 장수에 대한 나의 자부심이 완전히 사라져버렸다.”(A3:38)
생노병사는 괴로움의 대표적인 모습이다. 괴로움을 자각하고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는 저 해탈열반과 그에 도달하는 길을 찾는 것이 출가이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왓차여, 재가자의 삶의 족쇄를 버리지 않고도 몸이 무너진 뒤에 괴로움을 끝낸 재가자는 아무도 없다.”라고 단언하신다.(M71)
그리고 부처님은 사유하신다.
“재가의 삶이란 번잡하고 때가 낀 길이지만 출가의 삶은 열린 허공과 같다. 재가에 살면서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고 지극히 청정한 소라고둥처럼 빛나는 청정범행을 실천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니 나는 이제 머리와 수염을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 집을 떠나 출가하리라.”(D2; M27 등)
대승불교에서는 부처님의 탄생과 출가는 중생에 대한 대비원력(大悲願力)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죽음으로 대표되는 괴로움은 나 하나에게만 닥쳐오는 것이 아니다. 모든 중생이 대면해야만 하는 현상이다. 그러므로 죽음으로 대표되는 괴로움은 죽어야만 하는 나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일체 중생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죽어야만 하는 괴로움을 안고 살아가는 중생에 대한 연민의 마음(大悲心)이 출가의 근본이다. 초기불전의 도처에서도 중생에 대한 자애․연민․같이 기뻐함․평온의 사무량심은 강조되고 있다.
5. 부처님의 수행과정 – 길 찾기
니까야 가운데 부처님이 깨달으신 과정 즉 성도과정을 담은 경으로는「성스러운 구함 경」(M26)과「삿짜까 긴 경」(M36)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보디 왕자 경」(M85)과「상가라와 경」(M100)과「두려움과 공포 경」(M4)과「두 가지 사유 경」(M19) 등에도 나타난다. 이 가운데서도「성스러운 구함 경」(M26)과「삿짜까 긴 경」(M36)은 반복되는 정형구의 생략(peyyala) 없이 전문을 잘 담고 있어서 많이 인용되고 있다.
이러한 경들을 토대로 깨달으시기 전 부처님의 수행과정을 한 마디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아니면 버려라.’라고 말하고 싶다. 부처님은 순차적으로 크게 세 가지를 버리셨다.
첫째, 부처님께서는 세속의 삶이 궁극적 행복을 위한 길이 아니라고 생각하셔서 왕자의 삶을 버리고 떠나셨다. 감각적 욕망을 버리신 것이다.(A3:38)
둘째, 출가를 하신 뒤 부처님께서는 알라라 깔라마와 웃다까 라마뿟따를 만나서 각각 무소유처 삼매와 비상비비상처 삼매를 체득했지만 그것이 깨달음을 위한 길이 아니라고 판단하셔서 버리고 떠나셨다. 수정주의(修定主義 = 선정 제일주의)를 버리신 것이다.(M26, M36)
셋째, 그 후 우루웰라의 장군촌(Senānigama)에서 6년에 걸친 혹독한 고행을 하셨지만 이 고행도 깨달음을 위한 길이 아니라고 판단하셔서 그것도 버리고 떠나셨다. 고행주의를 버리신 것이다.(M36)
그러면 부처님께서는 이 셋을 버리고 나서 무엇을 ‘깨달음의 길’로 받아들이셨는가? ‘감각적 욕망들과도 상관없고 해로운 법들과도 상관없는 행복’이요, 어릴 때 체험한 초선으로 표현되는 행복이 그것이다.
부처님이 이러한 행복에 토대한 새로운 길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고행을 포기하는 위대한 결단을 하시자 경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쌀밥과 보리죽 같은 덩어리진 음식을 먹자 그 다섯 비구들은 ‘사문 고따마는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고 용맹정진을 포기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에 젖어있다.’라고 생각하면서 나를 혐오하여 떠나 가버렸다.”(M36)
6. 부처님의 성도과정 - 깨닫기
① 깨달음의 새로운 길: 네 가지 禪(初禪/2禪/3禪/4禪)
아마 오비구(五比丘)뿐만 아니라 당대의 모든 고행자들도 고행을 포기하고 세나니의 딸 수자따(Sujātā Senānidhītā)가 올린 우유죽을 드신(AA.i.401) 세존을 타락자라고 엄청나게 비난했을 것이다. 세존께서는 그러한 수행자들의 비난을 뒤로하고 어릴 때 체험하신 초선의 경지에 들기 위해서 수행에 들어가신다. 이때 세존께서는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을 통해서 초선에 드신 것으로 주석서는 설명하고 있다. (MA.ii.291) 그래서 부처님께는 초선에 드시고 거기에 머물지 않고 더욱더 깊은 경지의 삼매인 제2선, 제3선, 제4선을 차례대로 증득하셨다.
이 네 가지 禪은 부처님이 새로 터득하신 禪이요 ‘감각적 욕망들과도 상관없고 해로운 법들과도 상관없는 행복’이요, ‘깨달음의 길’이다. 초선부터 제4선까지는 불교의 경전에만 나타나는 불교의 삼매이다. 이 새로운 삼매를 바탕으로 하여 부처님께서는제4선의 경지에 드셔서는 평온을 통해서 마음챙김을 완성하시고(upekkhā-sati-pāri suddhi) 이를 토대로 밤의 초경에 숙명통을 증득하시고, 밤의 이경에는 천안통을 증득하신 뒤, 마침내 밤의 삼경에는 누진통을 체득하셔서 사성제를 꿰뚫으시고 모든 번뇌를 소멸하여 위없는 깨달음을 실현하셨다. 경에서 부처님은 이렇게 누진통을 정형화하여 말씀하신다.
“그런 나는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았고,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았고,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았고,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았다. ‘이것이 번뇌다.’라고 … ‘이것이 번뇌의 일어남이다.’라고 … ‘이것이 번뇌의 소멸이다.’라고 … ‘이것이 번뇌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았다.
내가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볼 때 나는 감각적 욕망에 기인한 번뇌[欲漏]에서 마음이 해탈했다. 존재에 기인한 번뇌[有漏]에서도 마음이 해탈했다. 무명에 기인한 번뇌[無明漏]에서도 마음이 해탈했다. 해탈했을 때 해탈했다는 지혜가 생겼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꿰뚫어 알았다.”(M36 등)
부처님이 이러한 누진통으로 표현되는 깨달음을 실현하셨기 때문에 드디어 불교가 세상에 존재하게 된 것이다.
② 무엇을 깨달으셨는가?
여기서 보듯이 부처님은 사성제(四聖諦) 즉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깨달으셨다. 그리고 모든 번뇌를 다 제거하셨다. 부처님의 성도과정을 담고 있는 경들뿐만 아니라 초기불전의 도처에서 부처님께서는 사성제를 깨달으신 것으로 정리되어 나타난다.(Sn. {558}; D2; M91; S56:23; A8:11 등) 부처님이 깨달으신 진리는 네 가지로 집약이 되는데 그것이 바로 사성제(四聖諦) 즉 네 가지[四] 성스러운[聖] 진리[諦]이다. 사성제는 괴로움[苦]에 사무치고 괴로움의 원인[集]을 밝히고 괴로움이 소멸된 궁극적 행복인 열반[滅]을 천명하고 열반에 이르는 길[道]을 드러내는 가르침이다. 이처럼 깨달음은 사성제로 정의되고 바른 견해도 사성제에 대한 이해로 설명된다.(M9 등)
7. 부처님의 전법과정 – 함께 나누기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을 실현하시고 반열반에 드시기까지의 45년간을 전법의 삶을 사셨다. 부처님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전법의 과정이다. 세존께서 44년간 여름 안거를 보내신 곳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안거는 바라나시(Bārāṇasi) 이시빠따나(Isipatana)의 녹야원(Migadāya)에서 하셨다.
두 번째부터 네 번째는 라자가하(Rājagaha)의 대나무 숲(Veḷuvana), 다섯 번째는 웨살리(Vesāli)의 큰 숲[大林, Mahāvana]에 있는 중각강당(Kuuṭāgārasālā), 여섯 번째는 마꿀라 산(Makulapabbata), 일곱 번째는 삼십삼천의 거주처(Tāvatiṁsa-bhavana), 여덟 번째는 박가(Bhagga)의 숨수마라기리(Suṁsumāra- giri)에 있는 베사깔라 숲(Bhesakaḷāvana), 아홉 번째는 꼬삼비(Kosambi), 열 번째는 빠릴레야까(Pāli- leyyaka)의 밀림이다.
열한 번째는 날라(Nālā)의 바라문 마을(Brāhmaṇagāma), 열두 번째는 웨란자(Verañjā), 열세 번째는 짤리까(Cālikā)의 짤리까 산(Cālikāpabbata), 열네 번째는 사왓티(Sāvatthi)의 제따 숲(Jetavana), 열다섯 번째는 까삘라왓투(Kapilavatthu), 열여섯 번째는 알라위(Aaḷavi), 열일곱 번째는 라자가하(Rājagaha), 열여덟 번째와 열아홉 번째는 짤리까 산(Cālikāpabbata), 스무 번째는 라자가하(Rājagaha)이다.(AA.ii.124; BvA.3)
그 후 스물한 번째부터 마흔세 번째까지의 23안거는 사왓티의 제따 숲과(18안거) 동쪽 원림[東園林, Pubbārāma]에서(5안거) 하셨다.(BvA.3) 그리고 마흔네 번째인 마지막 안거는 웨살리의 벨루와가마(벨루와 마을, Beḷuva-gāma)에서 하셨다.(D16 §2.22)
『디가 니까야 주석서』에 의하면 세존께서는 웨사카 달(우리의 음력 4월)의 보름날 새벽에 반열반에 드셨다. 그러므로 두 달 뒤 아살하(Aasāḷha) 달 보름(음6월 보름)부터 시작되는 이 해의 안거는 하지 못하신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모두 44안거를 하신 것이 된다.
부처님의 전법과정을 부처님의 44안거에 초점을 맞추어 잘 설명하고 있는 책으로는 일창 스님이 지은『부처님을 만나다』(이솔, 2012)를 들 수 있다. 이 책은 부처님의 전법과정 뿐만 아니라 부처님의 생애 전반을 초기불교와 상좌부 불교의 전통에 토대하여 잘 설명하고 있다. 행자님들의 일독을 권한다.
이상으로 부처님의 일대기를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부처님의 생애는 이미 행자님들이 각 사찰에서 행자생활을 하면서 정규 교과목으로 충분히 배웠을 것이기 때문에 이상으로 줄이고 오늘 특강의 남은 시간은 출가자가 생명으로 삼고 살아야하는 법(法, dhamma, dharma)을 강조하는데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8. 부처님은 법(法, dhamma)을 가르치셨다.
깨달음을 성취하신 뒤에 80세에 반열반에 드실 때까지 45년간 부처님은 무엇을 가르치셨는가? 한마디로 표현하면 법(法, dhamma)이다. 부처님의 삶은 온통 법을 가르치신 것으로 가득하다. 그래서 초기불전의 여러 곳에서 부처님은 법을 가르치시는 분으로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그분은 법을 설합니다. 그분은 시작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 끝도 훌륭하며, 의미와 표현을 구족하여 법을 설하여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고 지극히 청정한 범행을 설합니다.”(A3:65 등)
그리고 초기불전의 도처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인 법은 이렇게 묘사된다.
“법은 세존에 의해서 ① 잘 설해졌고 ② 스스로 보아 알 수 있고 ③ 시간이 걸리지 않고 ④ 와서 보라는 것이고 ⑤ 향상으로 인도하고 ⑥ 지자들이 각자 알아야 하는 것이다.”(A.iii.285 등)
이처럼 불교는 법(法, dhamma)을 중심으로 하는 체계이다. 그래서 불법(佛法, Buddha-dhamma)이라는 말은 우리에게도 아주 익숙하며 이러한 부처님의 가르침인 법은 불자들의 두 번째 귀의의 대상이 되어 “거룩한 가르침에 귀의 합니다.(dhammaṁ sāranaṁ gacchāmi)로 모든 불자들이 낭송하고 호지한다.
출가자의 삶은 온통 이 법을 알고 체득하고 드러내고 유통되게 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9. 법으로 부처님을 봐야한다.
이제 초기불전에서 법을 강조하시는 곳을 살펴보고자 한다.
① “아무도 존중할 사람이 없고 의지할 사람이 없이 머문다는 것은 괴로움이다. 참으로 나는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을 존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하여 머물러야 하는가? … 참으로 나는 내가 바르게 깨달은 바로 이 법을 존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하여 머물리라.”(A4:21)
이것은 세존께서 깨달음을 성취하신 뒤 아직 아무에게도 자신의 깨달음을 드러내지 않으신 다섯 번째 칠일에 우루웰라의 네란자라 강둑에 있는 염소치기의 니그로다 나무 아래에 앉아서 내리신 결론이다.(AA.iii.24) 부처님은 누진통으로 정리되는 사성제를 깨달으셨으므로 부처님이 깨달으신 법은 사성제로 요약이 된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사성제를 존경하고 의지하여 머무시리라고 결심하신 것이다. 사성제는 부처님의 최초 설법의 내용이며 그래서 사리뿟따 존자도 “도반들이여, 유익한 법[善法]은 그 어떤 것이든 모두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四聖諦]에 내포됩니다.”(M28 §2)라고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은 사성제로 귀결이 됨을 역설하고 있다.
② 부처님의 최초의 가르침을 담은 경을「초전법륜 경」(S56:11)이라 부른다. 이 경에서 세존께서는 팔정도로 중도(中道, majjhima-paṭipadā)를 천명하시고 불교의 진리인 사성제를 천명하신다. 그러므로 부처님이 깨달으셨고 존중하고 의지하여 머무시는 법은 사성제(교학)와 팔정도(수행)로 집약이 된다.
③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법을 설하라(desetha dhammaṁ).”라고 비구들에게 다음과 같이 전법을 당부하신다. “비구들이여, 나는 인간과 천상에 있는 모든 올가미에서 벗어났다. 그대들도 역시 인간과 천상에 있는 모든 올가미에서 벗어났다. 비구들이여, 많은 사람의 이익을 위하고 많은 사람의 행복을 위하고 세상을 연민하고 신과 인간의 이상과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유행을 떠나라. 둘이서 같은 길로 가지 말라. 비구들이여, 법을 설하라. 시작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 끝도 훌륭한 [법을 설하고], 의미와 표현을 구족하여 [법을 설하여],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고 지극히 청정한 범행(梵行)을 드러내어라.”(『율장』『대품』(Vin.i.20), S4:5 등)
④ 법을 존중하시는 부처님의 태도는 “법을 의지처로 삼고[法歸依] 법을 섬으로 삼아라[法燈明].”는 가르침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D16 §2.26 등)
⑤「법의 상속자 경」(M3)에서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에게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내 법의 상속자가 되어야지 재물의 상속자가 되지 마라.”(M3 §3)라고 고구정녕하게 말씀하셨는데 특히 출가자들이 가슴에 사무쳐야할 말씀이다. 그러면 어떤 것이 법의 상속자가 되는 것인가? 같은 경에서 사리뿟따 존자는 성스러운 팔정도를 실천하는 것으로 결론을 짓는다.
⑥ 임종에 다다른 왁깔리 비구에게 세존께서는 “왁깔리여, 그만 하여라. 그대가 이 썩어문드러질 이 몸을 봐서 무엇을 하겠는가? 왁깔리여,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법을 본다. 왁깔리여, 법을 볼 때 나를 보고 나를 볼 때 법을 보기 때문이다.”(S22:87)고 말씀하셨으며 그런 뒤에 오온의 무상․고․무아를 설하시고 염오-이욕-해탈-구경해탈지를 설하셨다.
⑦「왁깔리 경」(S22:87)의 이러한 말씀은 대한불교 조계종의 소의경전인『금강경』에 그대로 계승되어 다음과 같이 강조되고 있다.
“형색으로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 나를 찾으면[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삿된 길을 걸을 뿐 여래 볼 수 없으리.[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법으로 부처님들을 보아야 한다.(dharmato Buddhā draṣṭavyā) (주해2)
참으로 스승들은 법을 몸으로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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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해2)
“법으로 부처님들을 보아야 한다.(dharmato Buddhā draṣṭavyā)”는 구절 이하의 게송은 한국불교에서 절대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구마라집스님 역본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산스끄리뜨 원본과 현장스님 역본 등의 5가지 이역본들에는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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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으로 부처님을 본다면 부처님에게도 죽음이 있다. 몸으로 부처님을 보는 한 우리는 결코 생사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생사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법을 보는 방법 외에는 없으며 무위법인 열반을 실현하는 것밖에는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⑧ 세존께서 반열반하시기 직전에 남기신 첫 번째 유훈도 바로 “법과 율이 그대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이다. 세존께서는 간곡하게 말씀하신다. “아난다여, 아마 그대들에게 ‘스승의 가르침은 이제 끝나버렸다. 이제 스승은 계시지 않는다.’라는 이런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아난다여, 그러나 그렇게 생각해선 안 된다. 아난다여, 내가 가고 난 후에는 내가 그대들에게 가르치고 천명한 법과 율이 그대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D16)
⑨ 그래서 아난다 존자도 세존께서 반열반하신 지 얼마 뒤에 고빠까 목갈라나 바라문과 나눈 대화에서, “바라문이여, 우리들은 귀의처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바라문이여, 우리는 법을 귀의처로 합니다.(dhamma -paṭisaraṇa)”(M108 §9)라고 바라문에게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부처님께서는 “법과 율이 그대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D16 §6.1)라고 유훈을 하셨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입멸하신 후 두 달 뒤에 열린 일차결집(一次結集, Paṭhama-mahāsaṅgīti)에 참석한 500명의 아라한들은 법을 합송하여 경장(經藏, Sutta-Pitaka)을 결집하고 율을 합송하여 율장(律藏, Vinaya- Pitaka)을 결집하였다.
이처럼 세존께서는 깨달음을 성취하신 직후에도 스스로 깨달은 법을 의지해서 머물리라고 하셨고, 45년간 제자들에게 설법하실 때에도 법을 강조하셨으며, 사바세계에서 자취를 감추시는 반열반의 마지막 자리에서도 법이 그대들의 스승이 될 것이라 유훈하셨다. 그러므로 세존께서 반열반하고 계시지 않는 지금에 사는 우리 불자들이 뼈가 시리고 가슴이 사무치게 존중하면서 배우고 궁구하고 이해하고 실천해야 할 것은 바로 이 법(dhamma)이 아니고 그 무엇이겠는가?
10. 법은 개념[施設, 假名, paññatti, 빤냣띠]을 해체했을 때 드러난다.
불교 특히 초기불교의 핵심을 한 마디로 말해보라면 주저 없이 ‘해체해서 보기’라고 정리할 수 있다. ‘해체(vibhajja)’라는 용어는 이미 초기불전 가운데서 나타나고 있으며(S8:8) 주석서는 “부분(koṭṭhāsa)으로 존재를 해체하는 것(vibhajanta)”(SA.i.279)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해체의 궁극적 지향점은 개념[施設, 假名, paññatti]의 해체이다. 예를 들면 땅에 떨어진 머리칼을 보고 아무도 아름답다 하지 않는다. 그러나 머리라는 특정한 곳에서 특정한 색깔과 특정한 형태로 여인이라는 전체상과 얼굴이라는 부분상에 묶여 있을 때 머리칼을 아름답다 하고 그것에서 애욕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머리칼을 ‘단지 머리칼’로만 보면 그것은 애욕의 대상이 아니다. 양귀비의 눈과 입술이 아무리 예쁘다할지라도 그것은 전체상을 이루고 있을 때 이야기다. 눈을 빼고 코를 분리하고 입술을 도려내어 알코올에 담가두었다면 아무도 그것에서 애욕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만일 애욕을 일으킨다면 그야말로 성도착증환자일 것이다. 그리고 머리칼, 눈, 입술 등은 땅, 물, 불, 바람이라는 네 가지 근본물질들의 조합으로 구성된 것일 뿐이다. 이들을 아름답다 여기는 것은 우리가 인습적이고 관념적으로(vohāra) 취하는 전체상과 부분상에 기인한 것이다. 이처럼 해체해서 보면 무상․고․무아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어느 대통령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라고 했다. 초기불전은 강조한다. ‘뭉쳐두면 속고 해체하면 깨닫는다.’ 법들로 해체해서 보자.
해체해서 보면 우리의 삶이란 5온․12처․18계․12연기 등으로 정리되는 법들의 일어나고 사라짐일 뿐이다. 거기에는 나도 없고 남도 없다. 거기에는 태어남도 늙음도 죽음도 없다. 거기에는 단지 유위법들의 찰나생․찰나멸의 흐름[相續, santati]이 있을 뿐이다. 이 유위법들의 상속을 그치고 무위법인 저 열반을 실현하는 것이 궁극적 행복이다.
11. 불교의 목적, 행복의 실현
인간은 행복을 추구한다. 경제행위, 정치행위, 문화행위, 철학행위, 의술행위, 종교행위 등 인간의 모든 행위는 행복해지기 위해서이다. 불교도 행복을 추구한다. 그래서 중국에서 한역된 많은 경론에서도 불교의 목적은 이고득락(離苦得樂) 즉 괴로움을 여의고 행복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나타나고 있고(『大般若波羅蜜多經』『大方廣佛華嚴經』등) 성철스님을 비롯한 한국의 많은 스님들도 불교의 목적을 이렇게 표현하여 왔다. 초기불전에서 부처님께서는 다양한 행복을 말씀하셨다. 그것을 간추려보면 ① 금생의 행복 ② 내생의 행복 ③ 궁극적 행복이 된다.(혹은 인간의 행복, 천상의 행복, 궁극적 행복, SA.i.328 등)
금생의 행복과 내생의 행복실현하기 위해서는 봉사하는 삶(보시)과 도덕적인 삶(지계)을 살아야 한다. 열반(涅槃, nibbāna)의 실현이 바로 궁극적 행복[至福, parama-sukkha]이다.(Mil.324; DhpA.iii.261 등) 초기불교의 주된 관심은 바로 이 열반으로 대표되는 궁극적 행복을 실현하는 것이다.
초기불교뿐만 아니라 한국불교에서 조석으로 독송하는『반야심경』의 목적도 ‘구경열반을 증득하는 것([得]究竟涅槃, niṣṭhā-nirvāṇa-prāptaḥ)’이요, 통합종단인 대한불교 조계종의 소의경전인『금강경』도 보살의 근본서원을 “뭇 삶을 모두 무여열반에 들게 하는 것(일체중생 … 아개영입 무여열반 이멸도지 – 제3품)”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궁극적 행복인 열반은 문득 실현되지 않는다. 열반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나와 세상과 진리와 조건발생에 대한 교학적인 바른 이해가 있어야 하고 이를 토대로 한 바른 수행이 필요하다. 초기불전의 도처에서 교학(pariyatti)과 수행(paṭipāda, bhāvanā)은 강조되고 있다. 니까야에서 불교의 교학은 온․처․계․근․제․연의 여섯 가지 주제로 정리되고 수행은 37보리분법의 7가지 주제와 계․정․혜 삼학으로 요약된다. 여기에 대해서는 강사의 졸저『초기불교이해』를 참조하기 바란다.
12. 후배들께 드리는 당부의 말씀
① 서원을 세웁시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득한 전생에 수메다[善慧, Sumedha] 바라문이었을 때 디빵까라 부처님[燃燈佛, Dīpaṅkara Buddha] 전에서 세운 서원의 힘 때문이라고 합니다.(『불종성 경』(Bv)) 그러므로 이제 계를 받고 출가하는 행자님들도 먼저 바른 서원을 세워야 할 것입니다.
② 아닌 것은 버려야 합니다. 버리기 위해서는 선(善, kusala, 유익함)과 불선(不善, akusala, 해로움)의 판단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불선은 버리고 선은 받들어 행해야한다. 이것이 바른 정진이요 칠불통계(七佛通戒)입니다.
③ 법의 상속자가 됩시다. 출가자는 법에 사무치고 법을 체득하고 이를 세상에 오래 머물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상구보리 하화중생일 것입니다.
④ 전문가(프로)가 됩시다. 우리는 부처님 가르침 즉 담마(dhamma, dharma, 法)의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일당백만이 되어야 합니다. 만일 복지국가건설이 중생제도라면, 사회복지사업이 중생제도라면, 빈민구제가 중생제도라면, 중생의 몸과 마음이 아픈 것을 치유해주는 것이 중생제도라면 현대의 공무원들이나 사회사업가들이나 NGO 활동가들이나 의사들이나 치유사들이나 복지사들이 더 중생제도를 잘하는 것이 됩니다. 만일 정치행위․경제행위․문화행위․의료행위를 통한 사회봉사가 진정한 중생제도라면 우리는 출가생활을 버리고 그들을 따라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정치․경제․문화․의료 등은 그 분야의 전문가들께 맡겨두면 됩니다. 출가자는 법을 체득하고 진리를 체득하여 이를 통해서 세상을 이롭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앞에서 보았듯이 우리 대한불교 조계종의 종지에도 정치도생, 경제도생, 의료도생이 아니라 ‘전법도생’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⑤ 출가생활은 유장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거듭거듭 많이 공부지어야 합니다.(bahuli-kara) 처음 가본 곳에 익숙하게 되려면 거듭거듭 많이많이 반복하는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행자님들이 교육기간 동안 모두 건강하시고 한 분도 낙오 없이 부처님의 계를 받아 출격대장부가 되어 금생에 해탈열반의 튼튼한 토대를 만들고 전법도생의 기틀을 갖추게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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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여기 올리는 이 글은 지난 2월 19일에 대한불교 조계종의 제46기 행자교육에서
사미/사마니계를 받기 위해 교육을 받는 행자님들께 제가 강의했던 ‘부처님의 생애’ 강의 자료입니다.
욕심을 내어 초기불전연구원에서 출간한 여러 책들에서 자료를 모으다보니
13쪽에 달하는 적지 않은 분량이 되어버렸습니다.
여기 올리는 이 글은 논문도 아니고 발제문도 아니고 기고문도 아니고
단지 부처님의 생애에 대해 급하게 모은 ‘강의 자료’일 뿐임을 밝힙니다.
그러다 보니 글이 정교하지 못하고 문맥의 흐름이 매끄럽지 못하고
주제의 일관성이 부족한 부분도 눈에 뜨입니다.
그러나 부끄러운 부분은 부끄러운 부분대로 저희 까페의 법우님들과 공유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여기에 올렸습니다.
부처님의 생애는 이미 각 사찰의 행자교육과정에서 배운 것이기 때문에
본 강의 자료는 부처님의 80년 생애를 강조하기 보다는
부처님이 가르치신 법의 중요성을 자각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이제 출가하여 수계를 하려는 후배 행자님들에게 당부 드리기 위해서 급히 작성해본 것입니다.
저희 까페에 올릴까 말까 무척 망설이다가
그래도 법우님들의 불교 공부에 조금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여 용감하게? 올려봅니다.
법우님들의 행복을 기원합니다.^^
각묵 합장
감사합니다. _()__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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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두 사두 사두
감사합니다
유장한 마음으로 거듭거듭 공부지어야 한다는 말씀 마음에 다시 한번 새겨봅니다 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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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자들은 부처님의 생애도 모르는채 무슨 경 무슨 경을 외웁니다.
스님께서 "후배들께 드리는 당부의 말씀"이 저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가슴에 새깁니다. 감사합니다 ._()_()_()_
부처님의 생애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어요.
고맙습니다,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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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하셨습니다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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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공부에 근 공덕이 되리라 밑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두 사두 사두
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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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
감사합니다.
감사드립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