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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매헌공 비석
공(公)의 자(字)는 자부(子裒), 호(號)는 매헌(梅軒), 상서원(尙瑞院) 직장(直長) 우춘(遇春)의 다섯째 아들로 양산시 웅상읍 주남리에서 태어나서 양산 덕계에서 거주하였다. 公의 형제 함자는 상서(尙書)의 한 구절인 만초손겸수익(滿招損謙受益)을 인용하여 지었다고 하는데, 어려서부터 글을 배워 경서(經書)에 달통하였으며, 그릇이 크고 효성(孝誠)이 깊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중환(重患)의 모친 흥려박씨(興麗朴氏, 1534~ 1593)를 등에 업고 원적산(圓寂山) 미타굴(彌陀窟)로 피신(避身)시킨 후 평소처럼 병간호를 지극정성(至極精誠)으로 하니 사람들은 그곳을 가르켜 효자곡(孝子谷)이라 불렸다. 장례를 마친 후 백형(伯兄) 겸수(謙受)를 따라 의병(義兵)에 참전하여 여러 전투에서 많은 공을 세워 임란창의(壬亂倡義)로 공훈3등공신(功勳三等功臣)이 되어 군자감 참봉(軍資監參奉)에 이어 승임랑(承任郞) 행(行) 군자감 봉사(軍資監奉事, 종8품)에 제수(除授)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임란이 끝난 후, 18세에 겸복 형과 함께 경북 예천의 임관해(任觀海) 문하에서 3년간 수학하면서 9경(經)을 독파(讀破)하였고, 관해가 사망하자 관해부인(觀海婦人)으로부터 많은 서적(書籍)을 기부받아 지금까지 대대로 보전하여 가보(家寶)로 전해지고 있다. 만년에는 매헌정사(梅軒精舍)를 지어 꽃과 대나무를 심고 독서를 즐기며 자식과 조카들을 교육하다 여생을 마쳤다.
현종 때 증직(贈職)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 (지방 관리명으로 종2품에 해당하며, 현재는 시장)의 증직(贈膱)이 내려졌다.
묘소는 울주군 웅촌면 고연리 연답산 신좌(申坐)에 자리 잡고 있는데 묘소에서 앞산 쌍 봉우리를 바라보면 풍수에 문외한이라 하더라도 가히 길지임을 한눈에 알 수가 있다.
묘갈명(墓碣銘)은 참판(參判) 유태좌(柳台佐)가 찬(撰)하고, 나중에 후손 동환(東煥)이 보완(補完) 찬(撰)하였다. 배(配)는 정부인 강성문씨 천일의 딸로 선조 5년 1572년 임신 2월 23일 탄생하시어 1605년 을사(乙巳) 5월 8일 34세에 졸하셨다. 산소는 고연리 산 4번지에 있다
자(子)에 창발(昌發), 손(孫) 필성(苾晟), 증손(曾孫) 시태(時泰), 현손(玄孫) 몽상(夢祥), 내손(來孫) 경도(敬衜), 곤손(晜孫) 효강(孝綱), 제강(梯剛), 의강(義剛)의 3형제가 있고, 잉손(仍孫) 광억(光億), 운손(雲孫)에 종주(宗周)가 있다.
나. 梅軒鶴城李公 墓碣銘 幷序
退溪之門有林公亨秀 亨秀從子 有觀海公之賢 鶴城梅軒 李公 實往師之 以成其學 公開學之誠 渕源之正 是令人起敬也 公之後孫 持憲覲吾甫 ,袖正言南公景羲氏所撰狀 來請表群之文 台佐何敢當是役。其於孝孫之託 有不敢終辭 謹按狀公之諱謙益 字子夏 鹤城之李 皆祖中樞院使藝 國初對馬島有事 中樞公涉海者 十三刷還六百 大捷而歸 專對折衝之才 名振華夷 生諱 宗實 官至嶺南水軍節度使 亦三討島夷 遇風不還 朝廷遣官招魂以葬 生諱直剛 是為公高祖 曾租諱植 祖考諱變林訓練院正 考諱遇春直長 妣朴氏 禦侮將軍自恭女 以萬曆乙亥正月二十九日戌時 生公 幼有器局性至孝 五歲丁外艱 奉母夫人定者溫清 靡不用極 壬辰亂 公年十八 避兵入 圓寂山 母夫人 觸風露疾劇 公竭力供養 如居家時樵探路 遇賊數人 挺刃趁追 見公超過大溪隔水投刀 公取刀斫賊 刀傳于家 明年秋 母夫人 卒阬葬途 伯兄 判官公謙受 赴戰 多斬獲事聞 除軍資監參奉 陞奉事 公 讓功不居 亂未定 公 慨然謂季兄謙福曰 生為男子 武不能封侯 文不為聞道 恥也 雖干戈中 豈無閒靜地可學 兄弟以童 非徒步千里 往登于林觀海 之門 觀海公愛而留之 三年學成歸 奉母夫人柩 合葬直長公墓 以亂中未遑持服 追服居臚 至今過其墟者 指點李孝子 所居云 林公 以廣州牧 立殣于 仁祖甲子之亂 公聞卽 趨哭 心喪如禮 林公夫人 感其誠 贈書籍傳守寶 晚築精舍 號梅軒 蒔花種竹 日讀書其中 尤好中庸大學 教子侄有法 割田民給 兄子以奉祀 乙酉十二月二十五日卒 享年七十一葬于府西蓮田 辛坐之原 配一直孫氏 格齋諱肇瑞六代孫 諱諟復女 生六男 廷元早沒 廷憲 廷義 廷禮 廷智 廷信 皆以孝友文學稱 孫曾以下凡幾人 嗚呼 公雖生長巔海之陬 忠與孝 自是家傳之物 天賦之性 而方其干戈搶攘之際,不憚遠而負岌從師 琢玉以成其器 又何韙也 其桑榆之收 必有卓然樹立者 以文獻散佚不傳 殊若可限然 垂裕之慶 式至于今 蔚然門戶之昌大 天所以報善人者 其在斯歎銘曰 竭力而事親 終始以禮 孝也 隨兄而舉義 以赴國難 忠也 千里而從師·事之如一學之所由成 而垂啓佑之功也
通政大夫 承政院 同副承旨兼 經筵參贊官 春秋館修撰官 豊山 柳台佐 撰
崇禎紀元後四 乙酉十月 日
六代孫 種驊 謹書 六代孫 種德 立
檀紀四仟參百參拾六年 癸未 十月 日
梅軒公門會 謹竪(세움)
퇴도(退陶)의 門下에 林公 금호형수(錦湖亨秀)가 있었다. 형수(亨秀)의 종질(從姪) 관해공(觀海公) 회(檜)라는 현사(賢士)는 鶴城 梅軒李公의 學問을 성취(成就)시킨 스승이시다. 公은 글을 배울 때 성심껏 묻고 익혀서 논리적인 근원을 바르게 깨닫게 되면 일어나 존경의 절을 하니, 이를 지켜본 사람들로 하여금 만족감을 느끼게 하였다.
公의 후손(後孫)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근오(覲吾)가 정언(正言) 남공(南公) 경희(景羲)께서 찬(撰)한 梅軒公 행장(行狀)을 소매에서 표정(表證)과 함께 내밀면서 매헌공의 묘갈문(墓碣文)을 청(請)하므로 대좌(台佐)는 어찌 감히 이 벅찬 일을 감당하리오. 그러나 그 孝孫의 부탁(付託)을 끝내 사양(辭讓)할 수가 없었다
삼가 公의 行狀을 살펴보니 諱는 겸익(謙益)이요. 字는 자애(삼가 公의 行狀을 살펴보니 諱는 겸익(謙益)이요. 字는 자애(子袞)이며, 本은 鶴城李氏이다. 비조(鼻祖) 중추원사(中樞院使) 예(藝)는 鮮初 대마도이(對馬島夷)의 침탈(侵奪)사건이 있어 중추공께서 四十餘回나 해도(海濤)를 누비면서 피로인(被擄人) 육백여명을 쇄환(刷還)하는 등 대첩(大捷)을 거두어 돌아옴에 공(公)은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써의 재능(才能)을 대마도이(對馬島夷)에게 발휘(發揮)하였으니 그 명성(名聲)이 중화(中華)에까지 떨쳤다. 아들 諱宗實은 벼슬이 嶺南水軍節度使로서 또한, 대마도이(對馬島夷)를 三次나 정복(征服)하으나 불행히도 풍랑(風浪)을 만나 생환(生還)하지 못하니 조정(朝廷)에서는 관원(官員)을 파유(波遺)하여 초혼장(招魂葬)을 치렀다. 孫子의 휘(諱)는 직강(直剛)이니 公의 高祖이며, 曾祖의 휘(諱)는 植이요 祖考는 변림(變林)인데 훈련원정(訓鍊院正)을 지냈고, 先考는 휘(諱)는 우춘(遇春)으로 벼슬은 直長이었다.
선비(先妣) 朴氏는 어모장군(禦侮將軍) 자공(自恭)의 딸이었다. 公은 萬曆乙亥(1575)正月二十九日 술시(戌時)에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생각하는 바가 크고 깊었으며, 天性이 효성(孝誠)스러웠다. 5세(1579)때 아버지를 여의고 母夫人을 정성온정봉양(定省溫情奉養)으로 보살피고 뜻을 따르며 보양하였다. 임란(壬亂) 때 공의 나이 十八歲(1592)였으며, 원적산(圓寂山)으로 피란시(避亂時) 중풍증(中風症)으로 苦生하는 母夫人을 집에서 살 때처럼 모셨다. 어느 날 산에 땔나무를 하러 가는 길목에서 수명의 왜적을 만나 저들이 긴칼을 뽑아 휘두르며 좇아 왔다. 이를 본 공(公)은 급히 큰 개울에 뛰어 들었다. 물을 사이에 하자 공을 죽이려 칼을 던졌다. 공이 왜적의 칼과 작도칼을 잡고서 왜적을 쳤으니, 그 칼이 집안에 전해오고 있다.
이듬해 가을 어머님이 돌아가심에 언덕에 가매장을 했다. 判官이신 兄 겸수(謙受)는 전장(戰場)에 나아가 많은 적(賊)을 참수(斬首)하기도 하고 사로잡기도 했다.
公은 군자감참봉(軍資監參奉)에 제수(除授)되었으며 그 후 봉사(奉事)에 승진(陞進)하셨다. 그러나 공은 전공(戰功)을 사양하고 관원(官員)에 나아가지 않았다. 임란(亂中)인데도 공은 계형(季兄)인 겸복(謙福)에게 탄식(歎息)하며 이르기를 “남아(男兒)로서 태어나 무(武)에 능(能)하지 않으면 우후(虞侯)가 될 수 없고 문사(文士)의 길을 좇지 아니하면 부끄럽지 않겠느냐. 비록 전쟁 중이라도 어찌 바쁨이 없이 조용히 살기 만하고 이찌 배움을 멀리하랴.
형제(兄弟:겸익,겸복)는 이제 아이가 아니니 천리길의 산등(山登)을 넘어 임관해(林觀海)의 門人이 되어라”고 하셨다. 그리하여 형제는 관해공(觀海公)의 집에서 사랑을 받으며 三年간 배우고 돌아와 모부인(母夫人) 관구(棺柩)를 직장공묘(直長公墓)에 합폄(合窆)으로 봉안(奉安)했다
난중으로 급하여 의복을 가지고 오지 못하였으나 움막에서나마 상신(喪身)의 예(禮)를 다했다 지금도 그곳을 李孝子가 살았던 곳이라 이른다. 林觀海公께서는 광주목사(廣州牧使)로 계실 때 돌아가셨다 그때가 仁祖反正(1624) 때라 임공(林公)의 부음(訃音)을 들었으나 즉시 달려가 심상례(心喪禮)하지 못하고 마음으로 상인(喪人)처럼 예곡(禮哭)하였다
林公의 夫人께서 그 성심(誠心)에 감복(感服)하여 임공의 서적(書籍)을 내리심에 이를 가보(家寶)로 전(傳)해 온다.
늦게야 정사(精舍)를 짓고 號를 매헌(梅軒)이라 했으며 꽃모종과 대나무를 심고 그곳에서 독서하였다. 특히 中庸과 大學 읽기를 좋아하고 아들과 조카들에게 글과 예법을 가르쳤으며, 장질(長姪)로 하여금 봉축(奉祀)케 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는 전답(田畓)을 나누어 주었다.
公은 乙酉 1669年 12月 25日 돌아가시니 享年 71歲였다. 부서연답(府西蓮畓) 辛坐原에 예장(葬禮)했다. 配 江城文氏 天日女로 자식은 二男 昌發 隆發(無后)이고, 配 一直孫氏는 격제(格齊) 휘조서공(諱肇瑞公)의 六代孫인 諱 시복(諟復)의 딸이고 자식은 六男으로 廷元은 早卒, 廷憲 廷義 廷禮 廷智 廷信을 두었다. 모두 孝友와 선비로서 칭명(稱名)되었으며 집집마다 손자 증손자를 몇 명씩 두었으며, 손증이하(孫曾以下) 략기(略記)하다.
슬프다 公은 비록 영남해읍(嶺南海邑)에서 生長하였으나 忠과 효례가(孝禮家)로서 자수(自守)하며 문물이 전해진다는 것은 하늘이 부여(賦與)한 음덕(陰德)이 아니랴.
그러나 바야호로 그처럼 전쟁의 참상속에서 멀다고 싫어하거나 부담스럽거나 흔들리지 않고 스승의 가르침을 쫓아 옥을 쪼아 그릇을 짓듯이 정직하고 바르게만 살았도다.
그것은 晚年에와서 반드시 뛰어난 자손들이 우뚝 설 것 이니라. 다만 문적(文籍)이 산실(散失)되어 전하지 아니하니 가슴을 치고 싶도록 한스럽다. 그러나 늦 바탕에 맞는 경사가 이제야 드러 났도다. 門戶가 울창(蔚昌)한 것은 하늘이 선자(善者)에게 내리는 보답일지니 이제 글을 맺음에 있어 그것을 銘하노니 힘써 어버이를 섬기고 시종의 예는 孝요. 형을 따라 국난(國難)에 의거(義擧)함이 忠이요. 천리 길의 스승을 쫓아 받들기를 하나같이 하여 배움에의 이룩한 까닭은 하늘이 도우심의 功일지니라.
통정대부 승정원 동부승지겸 경연참찬관 춘추관 수찬관 풍산유태좌 찬
通政大夫 承政院 同副承旨兼 經筵參贊官 春秋館 修撰官 豊山 柳台佐 撰
崇禎紀元後四 乙酉 十月 日
六代孫 種驊 謹書
六代孫 種德 立
西紀2003年 癸未 十月 日
梅軒公門會 謹竪(세움)
다. 매헌 이겸익 묘비(梅軒 李謙益 墓碑)
현위치 : 울주군 웅촌면 고연리 매헌정사 뒷편
건립연대 : 1825년(순조 25년)
크기: 전체높이 169cm, 비신높이: 134cm, 비신너비:55cm 두께30cm
전면 우
매헌 학성이공의 묘
순조 25년(1825) 10월 일
6대손 종화 삼가 글씨를 쓰고
6대손 종덕 세움
전면 좌
매헌 학성이공 묘갈명 병서
퇴도(退陶: 퇴계 이황의 다른 호)의 문하에 금호(錦湖) 임공(林公) 형수(亨秀)가 있는데. 형수의 종자(從子) 관해공(觀海公) 회(檜) 지현(之賢)은 학성 매헌(梅軒) 이공(李公)이 찾아가서 스승으로 섬겨
좌면
학문을 이룬 분이다. 공이 학문의 바른 연원(淵源)을 물으니 사람들이 일어나서 공경하였다. 공의 후손 사헌부 지평 근오(覲吾)가 사간원정 남경희(南景羲)가 찬술한 가장(家狀)을 소매에 넣어와 표수문(表隧文:묘비문)을 지어달라 청하니, 내가 어찌 감히 이 일을 감당하겠는가?
그러나 이 일은 효손(孝孫)의 부탁이니 끝내 사양할 수 없었다. 삼가 가장(家狀)을 살피니, 공의 휘는 겸익(謙益)이고, 자는 자부(子裒)이다. 학성이씨는 모두 중추원사 예(藝)의 후손이다. 국초에 중추공이 13회에 걸쳐 대마도에 건너가 6백명을 송환하여 크게 이기고 돌아오니 국왕이 무재(武才)가 있다고 전대(專對)하여 이름이 중국과 일본에 떨쳤다.
휘 종실(宗實)을 낳으니 관직이 영남수군절도사에 이르렀다. 역시 세 번 대마도를 토벌했지만 태풍을 만나 돌아오지 못했다. 조정에서 관원을 파견하여 초혼장(招魂葬)을 치렀다. 휘 직강(直剛)을 낳으니 이분이 공의 고조이다. 증조(曾祖)는 휘 식(植)이고, 조는 휘 변림(變林)이니 훈련원정이다. 고(考)는 휘 우춘(遇春)이니 직장(直長)이다. 비(妣: 돌아가신 어머니) 박씨는 어모장군 자공(自恭)의 딸이니, 선조 8년(1575) 정월 29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후면
어릴 때부터 기국(器局)이 있고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5세에 부친이 돌아가시니 모부인을 모시는데 정성(定省)과 온청(溫淸)을 모두 극진히 하였다.
임진란이 일어났을 때 공은 18세였다. 왜군을 피해 원적산에 들어갔다가, 모부인이 찬바람에 병이 심하게 드니 공이 힘껏 공양하기를 집에 있을 때와 같이 하였다. 땔나무를 채취하는 길에서 왜적 여럿을 만나니 저들이 칼을 뽑아 들고 따라오다가 공이 큰 개울을 건너는 것을 보고는 칼을 던졌다. 공이 이 칼을 잡고서 왜적을 쳤으니, 그 칼이 집안에 전해오고 있다.
이듬해 봄에 모부인이 돌아가시니 장례를 지냈다. 백형(伯兄) 판관공(判官公) 겸수(謙受)를 따라 전쟁에 참여해서 왜적을 많이 참획했다. 이 사실이 알려져 군자감참봉을 제수받고 승진하여 군자감봉사가 되었으나 공은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왜란이 끝나지 않았는데, 공이 개연히 계형(季兄) 겸복(謙福)에게 말했다. "남자로 태어나서 무(武)로 제후로 봉해지지 않고, 문(文)으로 도(道)가 알려지지 않으면 부끄러운 일이다. 비록 전쟁 중이지만 어찌 공부할 한가한 시간이 없겠느냐”? 하면서 형제가 천리를 걸어서 임관해(林觀海) 문하에 들어갔다. 관해공이 사랑해서 문하에 머물게 하니 삼년만에 학문을 이루고 돌아와서 모부인을 모셔 직장공의 묘에 합장했다. 왜란 중이라 황망하여 복상을 하지 못했더니 이제 상복을 입고 여묘(廬鷄)했으니, 오늘날도 그 유허를 지나면 그곳을 이효자(李孝子)가 여묘한 곳이라 한다. 임공은 광주목사로서 인조 2년(1624) 난리( 인조 갑자년 이괄(李适)의 난)에 순절하였다. 공이 소식을 듣자 곧 곡을 하고 예법대로 심상(心喪)을 행하였다. 임공의 부인이 그 정성에 감동해서 서적을 기증하니 세상의 보배로 지키게 하였다. 만년에 정사(精舍)를 지어 매헌정사(梅軒精舍)라 하고, 꽃과 대나무를 심었다. 여기서 독서했으니, 그 중에서도 특히 좋아한 것은 「중용」과 「대학」이었다. 아들과 조카를 법도 있게 교육하고, 형의 아들에게 전답(田畓)을 나누어 주어 선조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인조 23년(1645) 12월 25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71세이다. 서쪽 연전(蓮田) 신좌(坐) 언덕에 장사했다.
부인은 일직손씨(一直孫氏)인데, 격재(齋格) 조서(肇瑞)의 6대손 복(復)의 딸이다. 6남을 낳았는데, 정원(廷元)은 조졸하고, 정헌(廷憲), 정의(廷義), 정례(廷禮), 정지(延智), 정신(廷信)은 모두 효우와 문학으로 칭송이 있다. 손, 증손 이하는 여럿이다.
오호라! 공은 비록 영남 바닷가에 태어났지만, 충효는 가문에서 전해오는 보배이며, 하늘이 내려 주신 성품이었다. 왜란의 전쟁 중에도 머나먼 거리를 꺼리지 않고 스승을 따라 옥을 갈아 그릇을 이루었으니. 이것은 또 무슨 일인가? "아침에 잃은 것을 저녁에 찾는다" 했으니 우뚝하게 세웠지만 문헌이 산일되어 전해오지 않으니 한스럽기 짝이 없다. 그러나 후손에게 복을 내리는 아름다운 규식이 오늘까지 울연(蔚然)히 이어져 문호가 크게 번창하고 있다. 하늘이 선한 사람에게 보답한다는 것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도다.
명하여 가로되, "힘을 다해 어버이 섬기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예와 효로써 다했네. 형을 따라 의를 일으켜 국난에 나가 충성을 다했네.
천리를 가서 스승을 따르니 학문을 이루고, 후생을 제도하는 공이 있네."
통정대부 승정원동부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 풍산 유태좌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