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미스 맨디블 - 도널드 바셀미

[꿈꾸는 호두]

△ 9월13일

미스 맨디블은 나와 사랑을 하고 싶지만 공식적으로 내가 어린아이이기 때문에 주저하고 있다. 생활기록부나, 그녀의 책상 위에 놓여 있는 교무수첩이나, 교장실에 있는 서류에 의하면 나는 이제 열한 살 먹은 아이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나에게도 그 이유가 확실치 않은 분명한 착오이다. 사실 나는 서른다섯 살이고, 군대에도 갔다왔으며, 굵직한 음성에 키가 6피트, 그리고 있어야 될 곳에 털이 다 난 성인으로서, 미스 맨디블이 결정만 내린다면 어떻게 그녀를 다루어야 하는지도 이미 알고 있으니 말이다.

어쨋든 지금 우리는 분수에 대해 배우고 있다. 물론 나는 그까짓 것들을 이미 다 알고 있으며, 적어도 거의 다 정답을 맞출 수 있다.(기억이 잘 나지 않는 것도 있으니까). 나는 내 허벅다리 높이 밖에 올라오지 않는 이 조그만 책상에 앉아 잠시 주위를 살피기로 한다. 이 교실에는 매일 아침 국기에 대한 경례와 충성의 맹세로 일과를 시작하는 32명의 학생이 있다. 나 자신의 충성으로 말할 것 같으면, 국기가 아니고 미스앤디블과 늘 내 옆 분단에 나란히 앉아 있는, 미스 앤디블만큼이나 사랑에 약한 수 앤 브라운리에게 나누어져 바쳐진다. 오늘 나는 그 두 여자 중에 수 앤에게 더 끌린다. 비록 열한살에서 열한 살반쯤( 수 앤은 나이를 감추고 있지만) 되었지만, 여성 특유의 위장된 적극성과 모순을 갖춘 것으로 미루어보아 그애도 분명 한 사람의 여성임에 틀림없다. 다만 이상한 것은 그애나 다른 학생들이 내가 그들의 급우라는 사실이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 것인지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다는 점이다.

△ 9월15일

다행히도, 세계의 모든 주요 땅덩이들의 지도가 달려 있는 지리교과서가 크기 때문에 나는 검은 표지의 작문 공책에 쓴 내 비밀 일기를 그 속에 감출 수 있다. 매일 나는 급우들이나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해 아침에 느꼈던 생각들을 글로 쓰기 위해서 지리 시간을 기다린다. 다른 시간에 쓰려고도 해보았지만 뜻대로 잘되지 않는다. 왜냐면 선생이 분단 사이를 오가거나 (그럴때면 다행히도, 그녀는 교실 정면에 걸려 있는 벽 지도걸이 옆으로 오간다) 아니면 내 뒷자리의 바비 밴더빌트가 내 등을 쿡쿡 찌르며 무엇을 하는가 알아내려고 하기 때문이다. 운동장에서 이것저것 얘기하면서 알아낸 바에 의하면 밴더빌트는 스포츠카 광이며 로드 앤드 트렉지의 원로급 정기 구독자이다. 그이 책상으로부터는 늘 지속적인 엔진소리가 난다. <스브링의 소리>라고 불리는 레코드 앨범을 그가 흉내내고 있기 때문이다.

△ 9월19일

다만 나 혼자만이 가끔(언제나 그런 건 아니고) 뭔가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 그래서 내가 원래 속해 있지 않은 곳에 와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미스 맨디블은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어찌 된셈인지 그녀는 그것을 즐기고 있는 것 같다. 처음 이 교실에 끌려왔을 때 나는 항의하려고 했었다. 이건 너무나 잘못된 것이어서 멍청하기 짝이 없는 교장도 한눈에 알아차릴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함정이라는 것을, 그리고 내가 다시 한 번 배반당했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이젠 그것도 별 상관없는 일이 되었다. 이곳의 생활도 '그레이트 노던 보험회사' 보험금 신청 조정인으로서의 이전 인생만큼은 재미있으니까. 그 직업 덕택으로 나는 우리 문명의 폐허- 찌그러진 자동차의 범퍼들, 지붕이 날아간 오두막들, 약탈당한 창고들, 그리고 부서진 팔과 다리들- 속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10년 동안 그 짓을 하다보면 누구나 세상이 거대한 폐물장으로만 보이고, 인간은 사지로 분리되어 보이며, 집에 들어갈 때면 언젠가는 나고야 말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 된다. 그래서 나는 처음 이곳에 끌려왔을 때에도 분명히 잘못된 것인 줄 알면서도 한편으로 좋아했다. 그것은 또 영리한 것이기도 했다. 나는 재난처럼 보이는 것에서도 뭔가 이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보험회사 조정인의 역할이 내게 그 교훈을 가르쳐주었으니까.

△ 9월22일

아이들이 내게 배구팀에 들어와 달라고 조른다. 하지만 내 큰 키로 인해 부당한 이익을 얻는 것이 싫어 거절한다.

△ 9월23일

매일 아침 출석을 부른다- 베스트비나. 보켄포르, 브로운, 브라운리, 콘, 코일, 크리셀리우스, 대린, 더빈, 가이거, 가이스와이트, 헤클러, 제이콥스, 클라인슈미트, 래이, 로간, 매세이, 미트강, 파일스티커. 그건 마치 훈련소의 주번 하사가 텍사스의 어둡고 처량한 새벽에 부르는 일조 점호와도 같다.

군대에서도 나는 언제나 약간은 좀 모자라는 소위 고문관이었다. 다른 병사들이 금방 알아차리는 것도 나는 한참이나 걸려 겨우 깨닫곤 했다. 예를 들면, 군대에서 우리가 하는 것들이 사실은 아무런 의미도 없고 쓸모도 없다는 것 같은 것 말이다. 나는 늘 왜 그럴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한 번은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는데, 그것이 다시 새로운 의문을 내게 가져다 주었다. 하루는 우리 병영 근처의 모든 나무를 밑둥에서부터 나뭇잎까지 모두 흰 페인트로 칠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 명령을 전달한 하사는 몹시도 멋쩍어했고 미안해했다. 나중에 비번 대위가 산책을 하다가 흰 페인트를 뒤집어 쓴 이상한 모습의 나무들 사이에서 역시 흰 페인트로 범벅이 되어 녹초가 된 우리를 발견하고는 욕을 하며 지나갔다. 나는 그 원칙('명령은 명령이다')은 이해한다. 그러나 나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도대체 누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가?

△ 9월29일

수 앤은 불가사의한 아이다. 어제 역사시간에 그애는 자기가 쪽지를 건네줄 때 내가 한눈을 팔고 있었다고 사정없이 내 복사뼈를 걷어찼다. 지금도 거기가 부어 있다. 그러나 미스 맨디블이 보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잠자코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상하게도 수 앤은 내 전 인생의 아내를 상기시킨다. 그리고 미스 맨디블은 어린아이 같고. 미스 맨디블은 교태를 부리며 계속 나를 바라보고 있다. 다른 아이들이 눈치챘을까 걱정이다. 나는 벌써 교실 여기저기에서 아이들이 내게 손가락질 며 '선생의 애완용 동물'이라고 속삭이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 10월2일

때로 나는, 나를 이곳으로 데려온 음모의 정체에 대해 명상해본다. 때로 그것이 내 전 아내- 이름이 뭐더라- 내가 이름을 잊은 척하는 내 아내에 의해서 꾸며진 음모라고 믿는다. 물론 나는 그녀의 이름을 잘 알고 있다. 마치 내가 쓰던 자동차 오일이 '퀘이커 스테이트' 이고, 내 군번이 'US 54109268'인 것을 잘 알고 있듯이. 그 여자의 이름은 브렌다였지. 지금 생각하면 아주 수상쩍은 대화를 우리는 서로 헤어지는 날 나누었다.

"너는 화냥기가 있는 여자야."

나는 그때 꾸밈없는, 문자 그대로의 사실을 진술했다.

"너는......." 하고 그여자는 대답했다.

"펨프고, 멍청이고, 어린얘야. 나는 너를 떠날 테고 그렇게 되면 너는 자신의 부적합성 때문에 파멸하고 말 거야. 꼴좋겠다."

그 대화를 생각하며 나는 자리에서 꿈틀거렸다. 그러자 수 앤이 악의에 찬 관심을 가지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애는 분명 내 책상과 내 체격이 서로 맞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다만 내 우람한 체격, 나의 남성다움의 표시라고만 생각하는 것 같다.

△ 10월7일

한 번은 살그머니 미스맨디블의 책상에 가서 (교실에 아무도 없을 때) 무엇이 있나 살펴보았다. 거기엔 교무수첩(거기엔 내가 6학년으로 기록되어 있는)과 '학습목표'라고 씌어진 페이지가 펼쳐진 교과서밖에 없었다. 나는 미스맨디블이 늘 책상을 깔끔히 정리해 놓는 그런 타입이라는 것을 알았다. 거기엔 이렇게 씌어져 있었다.

'많은 학생들이 분수 학습의 원리를 터득하기만 한다면, 분수를 셈하는 것을 대단히 좋아할 것이다. 분수를 통해서 그들은 자신들이 올바른 길을 걷고 있고 올바른 답을 얻을 수 있다는 스스로의 능력에 자신감을 가지게 된다. 거기에 사회적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면, 실제 인생의 문제들도 분수와 같이 풀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이다. 많은 흥미 있는 실제 문제들이 분수를 푸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히 해결될 수있다.......'

△ 10월8일

나는 옛날에 다 겪었던 것들을 다시 한 번 겪는다는 것에 대해서 아무런 저항감을 느끼지 않는다. 지금 겪는 것은 예전에 겪었던 것과는 또다르다. 지금 내 주위의 아이들은 어쩐지 옛날 내 국민학교시절 처녀 항해를 같이 했던 아이들과는 사뭇 다른 것 같다.

' 그들은 자신들이 올바른 길을 걷고 있고, 올바른 답을 얻을 수 있다는 스스로의 능력에 대해 자신감을 갖는다.' 요새 아이들을 보면 그게 정말인 것 같다. 내 커다란 몸집 뒤에 숨으면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십분 이용할 줄 아는 내 뒷자리의 바비 밴더빌트가 급우의 아구창을 돌리고 싶을 때면, 언제나 미스 맨디블에게 햇빛 때문에 눈이 아프니 창문의 블라인드를 내려달라고 부탁한다. 그녀가 블라인드를 내리는 순간, 딱! 하고 치는 것이다. 우리 세대였다면 당국을 그리 쉽게 속여먹지는 않았을 것이다.

△ 10월13일

내가 전에 처음 학교에 다녔을 때에는 '당국'(도대체 누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가!)이 하라고 하는 것은 무조건 옳고 정당하다고 믿었다. 그래서 내 인생의 진로는 내가 선택해 결정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내 경력이라는 것도 사실은 마치 '페이퍼 체이스' 처럼 내 앞에 깔려 있을 뿐이고, 내가 하는 일이라고는 고작 그 종이의 실마리들을 줍는 것뿐이었다. 내가 막 학교를 졸업했을 때, 처음에는 그 추정이 과연 옳다고 생각했으며 열심히 그 종이 줍는 경쟁에 끼여들었다. 실마리들은 수없이 많았다. -학위증, 회원증, 캠페인 배지 등, 결혼허가증. 보험서류 등, 지출서류, 세금반환서류, 표창장 등. 그것들은 적어도 내가 경주에 참가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앤턴 비첵 부인의 보험 청구건에 대한 나의 비극적 실수 이전의 일이었다.

나는 그때 실마리를 잘못 이해했다. 내 말을 오해하지는 말라. 그것은 다만 '당국' 의 견해로 볼 때만 비극이었을 뿐이다. 나는 이 부상당한 할머니를 위해 만족할 만한 보상금을 받게 해주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 이 할머니는 우리 보험회사 가입자도 아니었고, 다만 빅벤 운송 및 저장회사를 상대로 보험료를 청구한 피해자였다.)

드디어 보상금은 16만5천불로 낙착이 되었다. 나는 지금도 그 액수가 정당한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나의 권유와 격려가 없었다면 비첵 부인은 자신의 부상을 그렇게 비싼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으리라. 회사는 그 돈을 지불했다. 하지만 내게 대한, 그리고 나의 직무수행 능력에 대한 회사의 신뢰도는 끝장이 났다. 지점 매니저인 핸리 구디카인드는 약간은 동정적인 어조로 내게 그것을 알린 다음, 동시에 내게 새 역할이 주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 다음 내가 기억하는 것은, 내가 여기 호레이스 그릴리 국민학교에서 미스 맨디블의 번쩍거리는 눈의 감시하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었다.

△ 10월17일

오늘은 소방훈련을 하는 날이다. 나는 우리 교실뿐만 아니라 이층 오른편 전체를 책임 맡고 있는 소방 대장이기 때문에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다. 내가 이 학교에 온 지 얼마 안되어 그 중책에 임명된 것도 사실은 나와 우리 선생님의 수상쩍은 관계 덕분이라고 수군대는 애들도 있다. 빨간 바탕에 흰 글자로 '불'이라고 씌어진 내 완장은, 내가 매일 손수 만드는 점심 도시락을 담은 갈색 종이봉투 옆, 내 책상 아래 작은 선반 위에 놓여져 있다. 손수 도시락을 싸는데 따르는 이점은 (하긴 내 도시락을 싸줄 사람도 없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만을 싸올 수 있다는 것이다. 예전에 내가 어렸을 적 엄마가 싸주시던 피넛버터 샌드위치는 이제 사라지고 대신 햄과 치즈가 내 점심이 되었다. 나는 식사기호조차 새로운 환경에 맞게 신기하게도 변해버린 것을 깨달았다. 예를 들면, 나는 더 이상술을 마시지 않으며, 담배를 피울 때도 다른 아이들처럼 변소에 가서 피운다. 방과 후에는 거의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내게 있어서 변치 않은 것이라고는 성욕뿐인데, 이건 원래가 한 번 배우고 나면 결코 잊을 수 없는 것인 것 같다. 나는 언젠가는 미스 맨디블이 방과 후 나를 남게 한 다음, 단둘이만 있게 될 때 적당한 분위기를 만들 것이라는 두려움 속에 살고 있다. 그걸 피하기 위해 나는 모범생이 되었다. 그런데 그게 또 같은 반 녀석들이 공공연히 나를 싫어하는 이유가 되었다. 그러나 칠판 근처에서 보내져오는 미스 맨디블의 그 그윽한 시선이 어쩐지 기분 좋다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녀는 여러 면에서 매력적인 존재이다.

△ 10월24일

때로 학교에서 걸리버적인 내 위치 때문에, 나의 커다란 체구에 도전해오는 아이들이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급우들은 그 점에 있어서만큼은 신중을 기한다. 마치 내가 외눈박이나 낡아서 금속을 입힌 인조 다리를 가진 괴물인 것처럼. 나는 일종의 돌연변이로 취급받고 있지만, 그래도 궁극적으로는 동급생 대접을 받고 있다. 하지만, 제 아버지가 '브로온 화장품 통풍기'를 고안해내어 부자가 된 해리 브로온(해리는 그것 때문에 늘 놀림을 받는다. "어이, 통풍 마을의 요즘 재미는 어떤가!" 하고) 이 오늘 내가 자기와 싸울 의향이 있느냐고 물어왔다. 그를 따르는 조무래기들이 잔뜩 흥미를 갖고 이 자살행위를 관전하려고 모여들었다. 나는 싸울 생각이 별로 없다고 대답했는데, 해리는 그것을 대단히 고마워했다. 이제 우리는 영원한 친구가 되었다. 그는 자기네 공장 특허 통풍기를 최저 염가로 얼마든지 내게 제공하겠노라고 은밀히 약속해주었다.

△ 10월25일

'많은 흥미 있는 실제 인생의 문제들이 분수를 푸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히 해결될 수 있다.'

이론가들은 흥미 있는 실제 인생의 문제들이 사실은 자기들이 '인간관계'라고 부르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내 복사뼈를 걷어찬 수 앤 브라운리. 나를 걷어찬 후, 그녀가 보여준 보드라운 고독은 얼마나 여성답고 얼마나 사실적인가. 내가 절름거릴 때마다 그녀의 자존심은 적이 만족한다. 그애가 나를 그렇게 찍었다는 것, 그리고 나의 커다랗고 이미 쇠잔해버린 하트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에서 그애가 미스 맨디블을 누르고 이겼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심지어 미스 맨디블까지도 그걸 알고 있으며, 그래서 아마도 자기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빈정대면서 그녀는 이렇게 묻는다. -"조셉, 너 어디 다쳤니?" 그녀의 눈자위 너머로 소방대장이 꺼주기 바라는 커다란 불꽃이 이글거리고 있다. 나는 그저 다리를 좀 부딪쳤노라고 더듬거리며 말한다.

△ 10월30일

나는 내 장래에 대해 거듭거듭 생각한다.

△ 11월 4일

학급 내 비밀 이동도서관에서 드디어 내게도. '데비의 애인이 리즈를 모욕하다' 라는 제목이 총천연색 표지에 번쩍거리는 <영화-TV의 비밀>이라는 잡지를 보냈다. 그것은 오늘까지 내게 한 마디 말도 건네 오지 않았던 평범한 계집아이인 프랭키 랜돌프가 바비 밴더빌트를 통해 내게 보내온 것이다. 나는 고맙다는 표시로 어깨너머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프랭키는 책상 밑에 얼굴을 감추고 있었다. 나는 이 잡지가 여자애들 사이에 자주 오가는 것을 보았다. (간혹 사내아이들이 그 번쩍거리는 표지를 보기 위해 기웃거리기도 했지만......) 미스 맨디블은 그 잡지를 볼 때마다 압수한다. 나는 그 <영화- TV의 비밀>을 대충 뒤적거리며 눈요기를 한다.

이 잡지에 실린 특종 사진들은 독자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것들이다. 우리는 그 사진이 어떻게 보일 것이며, 사람들이 어떻게 입방아들을 찧을 것인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이 멋진 사내를 위해 우리는 사실을 우선적으로 공개하는 것이다. 자, 여기에 사실이 있다.

그 사진은 이제 막 인기가 오르고 있는 젊은 인기 배우가 파자마바람인 채 몽롱한 눈으로 침대에 누워 있고, 그 옆에는 똑같이 단정치 못한 젊은 여인이 놀란 얼굴로 서 있는 것이었다. 나는 그 사진이 겉보기와는 전혀 다른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기쁘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혼 증거자료 외에 아무것도 아니니까.

그 잡지에 나오는 모리스 드 파리 제품을 위한 전면 광고, 즉 히프 헬퍼스 기구나 혹은 패드를 채워 넣어 크게 보이는 히프 같은 것을 선정적으로 찍어 놓은 사진을 보며, 아직 히프도 없는 이 열한 살짜리 아이들은 무엇을 생각하는 걸까? 영어의 히프 hips 와 불어의 히프derriere, 모두의 신비를 파헤치는 탐정 같은 이 잡지! 만일 아이들이 이 잡지의 내용을 제대로 해독하지 못한다면, 그 사진들은 더 이상 상상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적나라할 뿐이다.

'그를 미치게 만드는 .......' 하고 잡지의 기사는 계속된다. 아마 그래서 바비 밴더빌트가 '랜시어'와 '매서라티스'라면 죽고 못 사는가 보다. 그것은 미치지 않기 위한 방어일 뿐이다.

수 앤은 프랭키 랜돌프의 수작을 내내 지켜보고 있더거 나와 눈이 마주치자, 즉시 가방에서 17권이 넘는 잡지를 꺼내, 마치 자기의 라이벌이 내게 줄 수 있는 거라면 자기는 그보다 몇 배 더 줄 수 있는 것을 증명하듯 내 앞에 불쑥 내민다. 나는 그 잡지들을 주욱 훑어보며 광범위한 편집 방침을 살펴본다.

데비의 자녀들이 울다

에디는 데비에게 묻다 ".....하지 않겠어?"

리즈가 에디에 관해 꾸는 악몽

데비가 에디에 관해 말할 수 있는 것들

에디와 리즈의 사생활

데비는 자기의 애인을 되찾았는가?

리즈의 새출발

사랑은 속임수

에디가 주문한 사랑의 보금자리

리즈는 어떻게 에디를 남자로 만들었나?

그들은 동거하기로 했는가?

이젠 데비를 그만 괴롭힐 때가 되었다

데비의 딜레마

에디는 또 아버지가 되다

데비는 재혼할 것인가?

리즈는 혼자 살 수 있는가?

데비는 왜 헐리우드에 싫증이 났는가?

도대체 이 데비니, 에디니, 리즈니 하는 사람들은 누구이며 어떻게 해서 그렇게 끔찍한 상황에 처해 있단 말인가? 수 앤은 틀림없이 알고 있겠지. 그애는 자기가 갑자기 이 단조롭고 무미건조한 교실에서 해방되면 지침으로 쓰기 위해 틀림없이 그들의 과거를 연구해왔으리라.

나는 화가 나서 고맙다는 인사조차 하지 않은 채 잡지들을 불쑥 내밀었다.

△ 11월5일

호레이스 그릴리 국민학교 6학년 교실은 사랑, 사랑, 사랑의 용광로이다. 오늘은 비가 온다. 하지만 교실의 공기는 정열로 포화상태이다. 수 앤은 오늘 결석이다. 나는 어제 우리가 주고받은 것 때문에 그녀가 아프다고 생각한다. 죄의식이 불쑥 인다. 그녀가 그 잡지를 읽은 것도, 값싼 출판사가 찍어낸 모델 사진들도 물론 그녀의 잘못이 아니란 걸 난 잘 안다. 내가 너무 지나쳤나보다. 아니 아마 독감에 걸렸는지도 모르지.

어느 다른 곳에서도 나는 이렇게 억눌린 욕정으로 충만한 분위기를 본 적이 없다. 미스 맨디블은 쩔쩔맨다. 오늘은 아무 것도 제대로 되는 것이 없다. 아모스 다린이 옷장에다가 춘화를 그리다가 들킨 것이다. 슬프고도 부정확한 그림이었지만 그것은 다른 것 아닌 사랑의 행위 바로 그것이었다. 그것은 그림을 보지 않은 아이들이나. 보았어도 다만 그것이 더럽다고만 생각한 아이들이거나를 막론하고 모두를 흥분시켰다. 교실은 무언지 모를 쾌감으로 시끌시끌했다. 아모스는 교실 문 옆에 서서 교장실로 끌려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잠시나마 유명해진 것에 대한 즐거움과 두려움 사이에서 망설이고 있었다.

때때로 미스 맨디블은 소요의 책임이 마치 내게 있다는 듯, 질책하는 눈으로 나를 노려보곤 하였다. 그러나 내가 이런 분위기를 만든 건 결코 아니다. 나도 모두와 마찬가지로 그 상황 속에 걸려들었을 뿐이다.

△ 11월8일

모든 것은 이미 결정되어 있다. 나의 급우들과 나, 그리고 우리 미래의 대부분이. 우리는 이 가공할 사실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받아들이고 있다.

△ 11월9일

나는 드디어 용기를 내어 큰 책상을 달라는 신청을 했다. 쉬는 시간에 도대체 나는 걸음을 걸을 수가 없다. 다리가 풀리지 않기 때문이다. 미스 맨디블은 관리인과 상의해보겠다고 한다. 그녀는 이렇게 심각한 문제를 지적해낸 나의 정확성에 대해 걱정하고 있다. 그녀는, 혹시 누군가가 나를 교사하고 있는 것은 아니냐고 묻는다. 하마터면 나는 그녀에게 내 과거를 이야기할 뻔했다. 그러나 무엇인가가 내게 그렇게 하면 안된다고 경고한다. 여기에서 나는 안전하고 적어도 있을 곳을 갖고 있다. 나는 두 번 다시 당국의 변덕을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앞으로는 너무 정확하게 문제들을 지적하지는 않으리라 결심한다.

△ 11월11일

결혼의 파탄, 조정하는 직업의 파탄, 그리곤 내가 거의 인간이 아니었던 군대에서의 음울한 막간극- 이것이 오늘날까지 내 존재의 모두이며 내 인생의 우울한 합계이다. 재교육만이 나의 유일한 희망이라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근본적인 면에서 내가 무언가를 새로 시작해야 된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말썽 많은 존재를 처리하는 사회의 방법은 얼마나 효율적인가! 쾌활하고, 경박하고, 돈 잘 버는 젊은 미국인들 중에서, 그리고 돌이켜보지 않고 살아온 인생으로부터 뽑혀나와 시간과 공간의 시발점으로 내던져진 채, 이제야 나는 비로소 어떻게 해서 내가 그리고 우리 모두가 잘못된 길을 걸어왔는지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한다. (그건 나를 여기 보낸 사람들의 의도와는 거리가 먼 것이지만. 왜냐하면 그들은 다만 내가 교정되기만 요망하니까.)

△ 11월14일

어른과 아이를 구별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유용하겠지만, 사실은 의미 없는 짓이라는 걸 느낀다. 그들은 모두 다만 사랑을 갈망하는 개개의 자아들일 뿐이다.

△ 11월15일

관리인은 미스 맨디블에게, 우리의 책상은 측정위원회에 의해 정해진 치수대로 6학년에 맞게 캘리포니아 잉글우드에 있는 뉴 아트 교육자료 공급회사에서 제조한 것이라고 알려왔다. 그래서 만일 책상 사이즈가 맞지 않는다면 그것은 학생 사이즈가 틀린 것이라고 지적했다. 미스 맨디블은, 이미 그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그 문제는 거론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그 이유를 안다. 행정부에 탄원하는 것은 교실에서의 나의 추방, 즉 '특수아동들'을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곳으로 내가 전학을 가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그건 최대의 재난이다. 천재 아이들과 (사실은 지진아들이기 쉽겠지만) 같은 교실에 앉아 있어야 된다면 나는 일주일만에 팍 늙어버릴 것이다. 이곳에서의 경험이 곧 보통 인간의 경험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신이여, 제발 내가 그저 평범한 인간이게 하옵소서.

△ 11월20일

우리는 기호(sign)를 하나의 약속으로 믿는다. 미스 맨디블은 나의 커다란 키, 굵직한 음성으로 미루어 언젠가는 내가 자기를 소유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수 앤은 같은 기호를, 내가 자기의 남자 친구들 중, 가장 독특하고 그래서 가질 만하고 그래서 '가장 갖고 싶은 것'으로서 자신의 특별 소유라고 해석한다. 만일 이런 것들이 둘 다 통하지 않는다면 인생은 신념을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나 자신을 보아도, 내 전 인생에서, '필요시에 도움을 주기 위해라는 회사의 사훈을 곧 조정관의 의무라고 생각했는데, 결과는 회사의 속셈을 전혀 오해한 것이 되어버렸다. 나는 내가 이상적인 아내의 기호, 즉 아름다움, 매력, 부드러움, 향수, 요리 솜씨로 치장된 아내를 얻었기 때문에 사랑을 찾았다고 믿었다. 브렌다도, 지금 미스 맨디블과 수 앤 브라운리를 오도하고 있는 바로 그 기호를 보고, 자기의 결혼생활은 결코 지루하지 않으리라 믿었다. 우리 모두 - 미스 맨디블, 수 앤, 나 자신, 브렌다, 미스터 구디카인드- 는 아직도 미국 국기가 일종의 일반적인 정의를 상징한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이 미래의 인큐베이터 속에서 주위를 둘러보며 나는 기호는 기호일 뿐이며, 어떤 기호는 거짓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것은 이곳에서의 위대한 발견이다.

△ 11월23일

어린아이로서의 내 경험이 결국엔 나를 구원할지도 모른다. 만일 이교실에서 내가 조용히 지내며,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뚜벅뚜벅 걷거나 말거나, 우리 역사 책을 큰소리로 읽는 해리 브로온의 그 단조로은 저음 속에서 얌전히 필기나 하며 산다면 말이다. 그러나 어른으로서의 나를 괴롭혔던 모든 신비들의 근원이 바로 여기에 있으며, 나는 하나씩 하나씩 그것들의 뿌리를 캐며 세어나가고 있다.

△ 12월2일

미스 맨디블은 내가 성장을 중지하고 있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녀의 손은 내 어깨 위에 너무 따뜻하게, 그리고 너무 오랫동안 놓여져 있다.

△ 12월 7일

이곳에 내게 베풀어주는 것은 바로 그 약속들, 이루어 질수 없는 약속들, 나중엔 나를 혼란시키고 나로하여금 '아무 데도 갈 수 없다'라고 느끼게 하는 바로 그 약속들이다. 모든 것은 어떤 잘 알려진 과정의 결과로서 제시된다. 즉, 만일 내가 넷을 얻고 싶다면, 그것은 둘 더하기 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만일 내가 모스크바를 불태우려 한다면 내가 가야 할 길은 이미 다른 사람에 의해 표시되어져 있다. 만일 바비 밴더빌트처럼 내가 란시아 2.4리터 스포츠카를 열망한다면, 내가 해야 될 일은 적절한 과정, 즉 돈을 마련하는 일이다. 그리고 만일 내가 원하는 것이 돈 그 자체라면 그저 벌면 된다는 것이다. 이 모든 목표들은 측정위원회의 눈에는 똑같이 아름답게만 보인다. 그 증거는 어디에나 있다. 이 철근과 유리로 된 학교 교사의 추한 몰골 속에도, 별로 바람직하지 않은 우리의 전쟁들을 다루는 미스 맨디블의 당연하다는 투의 직선적 태도 속에서도, 그러나 때로는 약속들이 지켜지지 않고, 과오들이 저질러지고, 기호들이 잘못 이해된다는 것을 누가 지적할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올바른 길을 걷고 있고, 올바른 답을 얻을 수 있다는 스스로의 능력을 믿고 있다. 한때는 나도 올바른 길을 걸었고 올바른 답을 얻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내 아내는 다른 남자에게로 떠나가버리고 만 것이다.

△ 12월8일

나의 깨달음은 잘 진행되고 있다.

△ 12월 9일

다시 한 번 재난이 닥쳐왔다. 내일 나는 진찰을 받기 위해 의사에게 보내진다. 수 앤 브라운리는 나와 미스 맨디블이 탈의실에 같이 있는 것을 목격하고는 즉시 경련을 일으켰다. 잠시 나는 그애가 정말 질식사라도 하는 줄 알았다. 그 애는 울면서 교실을 뛰쳐나가, 이제는 우리 중 누가 데비이고, 누가 에디이며 누가 리즈인가를 확실히 알고 교장실로 직행했다. 그애의 환멸에 대해서는 유감스러운 바이다. 그러나 곧 나아지겠지. 미스 맨디블은 파멸한 셈이지만 동시에 소원을 성취했다. 그 여자는 미성년자 범죄조장 혐의에 따르는 비난을 받겠지만 퍽이나 조용히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녀와의 약속은 지켜졌다. 그 여자는 이제 인생에 대해서, 그리고 미국에 대해서 내가 얘기해준 모든 것들이 사실이라는 것을 안다.

나는 학교 당국에다가 내가 단지 특별한 의미에서만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모든 것은 전적으로 내 책임이라고 우겨댔으나 소용없었다. 그들은 언제나 빡빡했다. 급우들은 내가 자진해서 죄를 뒤집어 쓰는 것을 보고 경악하였다. 러시아의 혼란을 헤치며 생군하는 제정 러시아의 군대처럼, 우리 학급은, 진실은 결국 처벌당한다는 결론을 향하여 행진해갔다.

바비 밴더빌트는 <스브링의 소리> 레코드 한 개를 작별 선물로 내게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