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李御寧)교수가 해설하는 이상(李箱)의 詩 ‘오감도(烏瞰圖)
「오감도」- 詩제1호
이상(李箱)
서울生, 1910-1937
十三人의兒孩(아해)가道路(도로)로
疾走(질주)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適當하오.)
第一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四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五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六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七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八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九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一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十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十三人의兒孩는무서운兒孩와무서워하는
兒孩와그러케뿐이모였소.
(다른事情(사정)은업는것이차라리나앗소)
그中의一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좃소.
그中의二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좃소.
그中의二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좃소.
그中의一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좃소.
(길은뚤닌골목이라도適當하오.)
十三人의兒孩가道路로疾走하지아니하야도좃소.
「조선중앙일보」 (1934년 7월 24일)
「장미 병들다」라는 블레이크의 유명한 시를 60명의 대학생들에
게 읽히고 그 시가 무엇을 의미한 것인지를 물었다.어느 학생은 뱀
에 유혹된 이브를 그린 것이라고 했고,또 어느 학생은 처녀성의 상
실을 나타낸 것이라고 답했다. 종교적 의미에서 에로티시즘에 이르
기까지 실로 그 해답들은 백인백색이었지만,단지 원예과 학생 하나
만이 「벌레먹은 장미를 읊은 시」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이것은
캐나다의 문예평론가 노드롭 프라이의 방송강연을 통해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이야기이다.
시를 寓喩(우유)로 착각하는 오류는 李箱(이상)과 같이 이른바 난해한
시를 읽으려고 하는 경우에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烏瞰圖」 詩
第一號 (오감도 시 제일호)를 놓고 지금까지 많은 평자들이 소모전을
계속해 온 것도 바로 13의 숫자가 무엇을 의미하려고 한 것인가에
집착하였기 때문이다.그래서 13인의 아이를 예수의 최후만찬과 결부
시키기도 하고,혹은 조선 13도의 숫자와 관련지어 풀이하기도 한다.
그리고 예외없이 그러한 논자들은 13이란 숫자의 우유적 의미만 알면
오감도 제1호의 시는 단숨에 풀릴 수 있다고믿고있는 것이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상의 시는 시가 아니라 난수표로,그리고 비평가는
비평가가 아니라 암호해독의 판단관으로 대우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누구든지 오감도의 詩 제1호를 읽었을 때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은 13
이라는 숫자보다는 시의 통념을 뒤엎는 여러가지 양식 의 일탈성,그리고
시적언어의 코드위반같은 것들이다. *寓喩;우화적비유
제목부터가 오감도이다.鳥瞰圖(조감도)를 오감도라고 한 것은 그만
두더라도 어째서 시의 제목에 건축용어가 등장하고,또 어째서 第一
號 第二號와 같은 비정적 숫자 번호판이 달려있는가」하는 점이다.
그래서 13이라는 숫자도 그같은 일련의 낯선 시적 조사법의 하나
로 인식된다. 조사법만이 아니라 시 전체가 건축설계도처럼 직선이
나 사각도형을 이루고 있다.띄어쓰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도
형성은 더욱 강조되고,모든 문자들은 매스게임을 하듯 기하학적으
로 정렬되어있다.숫자적이며 기하학적이고,획일적이며 반복적인 그
도형을 볼 때,우리는 어떤 느낌을 받게 되는가. 그것은 자연보다는
인공적인 것, 그리고 근대성(모더니티)이나 도시성 같은 인상일 것
이다.
「여러아이가 길을 달린다」와 「13인의 아해가 도로를 질주하
오」사이에는 또 어떤 의미,어떤 느낌. 그리고 어떤 인식의 차이가
있는가 하는 의문도 대두할 것이다.전자가 언어적이고 일상적인 것
이라면 ,후자는 숫자적이고 개념적이다.「길/도로」「달리다/질주
하다」의 차이는 토착어 대 한자어,구어 대 문어만의 차이가 아니
라 그 내포적인 뜻에서도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그냥 길이라고 하
면 시골 오솔길을 연상할 수 있다.그러나 도로라고 하면 최소한 직
선으로 뻗친 근대적이고 인공적인 도시의 길을 생각하게 된다.
「인생은 나그네 길」이라는 전통적 비유에 익숙해 왔던 사람들은
「13인의 아해가 도로를 질주하오」라는 진술에서 그와는 색다른
길의 은유적 감각을 느낄 수 있게 될 것이다.어쩌면 그것은 저 감
동적인 영화「포레스트 검프」와 같은 끝없는 질주와 맞먹는 것일
지도 모른다.
질주라는 말은 그낭 뛰다 달리다 라는 말과 다르다.스피드,관성,맹
독성과 같은 근대문명의 메커니즘과 쉽게 손을 잡게되는 말이다.원
래 도로라는 말 자체에 질주라는 공시적 의미가 잠재되어 있다.모
든 도로는 고속도로와 마찬가지로 달리도록 명령지어져 있다.길위
에서 멈춰 서 있다는 것은 남자의 경우라면 부랑자요,여자의 경우
라면 창녀와 같은 것이 된다.그리고 도로의 질주라는 말에 속도를
더해주는 것이 바로 「제1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에서 시작
하여 「제13의 아해도 무섭다고 그리오」로 반복 나열되어 있는
시행들이다.무서움이라는 말 때문에 질주란 말은 도주와 도피의 뉘
앙스를 풍기게 된다. 그러나 다시 「13인의아해는 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와 그렇게 뿐이 모였소」라는 말이 등장 함으로써
아이들을 달리게하는 무서움은 외부적인 것이 아니라 내부적이라
는 사실을 알게된다.그리고 그 질주는 쫓기고 쫓는 끝없는 무한질
주라는 것도 짐작하게된다.그러나 다시 「그중에 1인의 아해가 무
서운 아해라도 좋소」는 「그중에 1인의 아해가 무서워하는 아해
라도 좋소」로 바뀌게 된다.즉 무서운 아이가 무서워하는 아이이기
도 한 것이다.결국 이상의 시 속에서는 「무서운 아이」와「무서워
하는 아이」의 차이와 대립항이 말소(抹消)되어 있다는 이야기이
다. 아이만이 아니다.「길은 막다른 골목길이 적당하오」라는 처음
진술 역시 뒤에 오면 「길은 뚫린 골목 이라도 적당하오」라고 뒤
집힌다.골목길이나 뚫린 길의 차이는 아무런 의미도 가질 수 없게
된다.그러므로 아이들이 질주하는 이 도로상황은 李箱보다 훨씬 뒤
에 유행했던 「부조리」라고 불러지는 그 세계와 같은 것이 된다.
그리고 무서워하는 아이가 곧 무서운 아이이기도 하다는 진술은
사르트르의「타자(他者)이론」과 같은 것이 된다. 내가 타자(他者)
를 바라본다는 것은 나의시선 속에서 타자를 구속하고 정복한다는
것이된다.그러나 동시에 타자(他者)가 나를 볼 때에는 나의 존재가
그의 시선 속에서 징발된다.거미가 먹이를 녹여 먹듯이 남을 본다
는 것은 곧 그 대상을 자신의 의식 속에 흡수해 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보고 동시에 보임을 당한다.즉 우리는 무서워하는 아이이며
무서운 아이의 역할을 한꺼번에 하고있는 겄이다.
실험실에서 실험관을 관찰하고 있듯 李箱은 부조리한 인간의 상황
을 모순 그대로 관찰하고 기술한다. 그 시의 전체 제목을 오감도라
고 한데서도 알 수 있다. 원래 조감도(鳥瞰圖)라는 말은 새가 높은
공중에서 아래를 내려다본 것과 같이 그려놓은 도형을 가리키는
말이다.李箱은 바로 그 새 하나를 떼어내 까마귀 烏(오)로 바꿔 오
감도라고 한 것이다.아이를 兒孩(아해)롸고 한자말로 고쳐놓은 것
처럼 굳은 살이 박혀버린 그 한자말에 새로운 비유적 이미지를 살
아나게 한 것이다.그 순간 우리 눈앞에는 겨울날 고목나무 가지에
앉아 마을전체를 굽어보고 있는 까마귀의 모습이 떠오르게 된다.그
리고 음산하고 불길하며 흉측한, 그리고 황량한 불모의 풍경이 그
까마귀 밑에 펼쳐진다. 그중의 하나가 도로를 질주하는 13인의 아
이들 모습인 것이다.「장미 병들다」의 시를 있는 뜻 그대로 「벌
레먹은 장미」라고 대답한 원예과 학생의 말이 의외로 블레이크의
시에 접근해 있었던 것처럼 李箱의「오감도」역시 마찬가지이다.
「13인의아이」를 예수의 최후의 만찬에 모인 사도나 혹은 조선
13도에 비겨 도민 대항 체육대회같이 만들 것이 아니라,있는 그대
로 읽으면 자연히 서로를 무서워하면서 무한질주를 하고있는 도시
의 우리들 모습이 보이게 될 것이다.따라서 13이라는 숫자 역시
단순한 우유(寓喩)가 아니라 복합적이고 다기능적인 시어의 하나로
인식될 것이다. 숫자가 지닌 절대적이고 비정한 이미지,기하학적
도형(문명의 조감도)을 만들어내는 숫자의 순차적 나열성 (李箱은
十의 정수에서 일단 끝나고 한 행을 비운 다음 十一인의 아이가
새로 시작한다.「도」를「가」로 바꿔놓았다.) 그리고 까마귀와 調
應(조응)관계를 이루는, 불길-불안의 의미를 지닌 13이란 숫자등
의 이미지의 복합체로서 말이다. *調應;맞게따라주는
시는 정답을 감춰놓은 퀴즈문제가 아니다.차라리 침을 놓듯이 시
전체의 신경망 그리고 상호유기적인 상관성에서 그 언어의 혈(穴)
을 찾는 작업이다.李箱에 의해서 한국시는 처음으로 표현이 아니라
관찰이 되었고,느낌의 방식이 아니라 인식의 양식(樣式)으로 바뀐
것이다.
*이글은 1996.8.20일자 조선일보에 게재 되었던 글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