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께서 중학교 2학년 때 돌아가셨습니다. 편두통이 왔고, 만성장염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창문 밖 감나무 이파리 사이로 햇빛이 들고, 햇빛이 얼굴을 핥으면 또 아침이 됐다는 생각에 끔찍했습니다. 아침이 싫었습니다. 제가 보낸 십대 시절입니다.
노예들에게 아침은, 제가 보낸 십대와 비교할 수 없을만큼 끔찍한 시간의 시작이겠지요. 노예는 아침에 굿모닝이라고 인사하지 않을 겁니다. 심지어 살아오라는 말도 하지 못할 겁니다. 약속한다고 지킬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B.C.587년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됐고 유다는 망했습니다. 유다의 왕족과 귀족, 유력한 종교지도자들은 바빌로니아로 끌려와 노예가 되었습니다. 유다가 완전히 망하기 전에 끌려왔던 다니엘같은 귀족 청년들은 바빌로니아 궁의 내시가 되기도 했습니다. 또 다른 징용 노예들은 운하 공사장에서 일했습니다.
위험하기 짝이 없는 현장을 떠날 수 없는 노예들에게 오늘은,
누군가는 다치고 누군가는 죽는 날입니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공사와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바빌로니아 제국은, 날마다 좌절하는 이유입니다.
오늘도 나는 노예이고,
내일도 나는 제국을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제국의 아침은 노예였던 어제와 똑같은 오늘이 시작되는 시간입니다. 차라리 깨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일 때도 있습니다. 악몽에 시달리던 지난밤이 차라리 계속되었으면 싶습니다. 현실은 악몽보다 더 악몽같기 때문입니다. 운하 공사가 계속되는 한, 오늘도 누군가 다치거나 죽을 것입니다. 그래서 창문을 통해 얼굴에 떨어지는 햇빛이 따귀처럼 따갑습니다.
다시 또 반복되는 고통과 위험이 가득한 일상이 시작되는 아침에, 노예 시인은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시5:3)
B.C.587년, 나라가 망하고 바빌로니아로 끌려오거나, 이집트로 시리아로, 아시아로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이렇게 흩어진 사람들이 ‘디아스포라’의 시조입니다. ‘디아스포라’라는 말은 로마 제국 전역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을 가리키는 말인데, 그 시작은 B.C.587년부터겠습니다.
‘디아스포라(διασπορά)는 씨 뿌리다라는 뜻의 그리스어(dia sperien)에서 유래’합니다. 디아스포라는 그래서, 흩어 뿌려진 씨앗 같은 사람들입니다. 여기저기에 뿌려진 사람들은, 어떤 이는 길가에 떨어진듯,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떨어진듯, 어떤 이는 돌밭에 떨어진 것 같아 결실을 맺기 어려웠습니다. 노예가 아무리 열심히 일한다 해도 자기를 위한 성과를 내긴 어렵지요.
다행스러운 것은 디아스포라가 떨어진 자리에 말씀도 뿌려졌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었기 때문에, 성경을 듣고 읽어야 했습니다. 성경을 듣고 읽으며 사람들은 바퀴달려 움직이는 생물같은 성전이 됐습니다.(겔1:15)
돌로 세워진 성전은 무너졌지만, 생기를 호흡하는 사람이 세워졌습니다. 비록 바빌로니아에 끌려온 징용 노예지만, 솔로몬이 세웠던 성전 같은 아름다운 존재로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이전에는 성전을 숭배했지만, 이제는 성전이 되었습니다.(고전3:16) 성전이 높을 때는 법궤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모셨지만, 성전이 무너지고 난 후엔 법궤를 마음 속에 품게 됐습니다. 말씀을 경배하는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말씀을 살아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전이 무너졌지만, 무너진 터를 위해 기도하는 진짜 성전이 된 것입니다.(시5:7) 이것이 징용노예에게 닥친 변화였습니다.
징용 노예는 이렇게 시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거룩한 곳 성전 같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도 가시떨기 속에 떨어진 듯, 아침 햇살마저 아프지만 노예가 된 시인은 아침에 기도합니다. 주위에 득시글대는 ‘오만한 자들’, ‘행악자들’ ‘거짓말하는 자들’,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와 ‘속이는 자’들로부터 호위해달라고 기도합니다.(시5:5~12) 일상은 무너진 성전같이 파괴되었지만, 내가 성전으로 꼿꼿하게 세워져 주의 길을 가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바퀴달린 움직이는 성전이 될 것입니다.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로 말미암아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시5:8)
이것이 창조된 인간입니다. 노예가 시인으로 거듭난 것입니다. 먼지 뭉치같이 불면 사라져버릴 한낱 노예가 하나님의 생기를 호흡하는 단단한 성전 같은 시인으로 창조된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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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던 1938년, 이제 더 이상 일본제국에 저항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을 것 같던 그 막막한 때에 식민지 하늘 아래서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라던 스무 살짜리 청년이 이렇게 선언합니다.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건너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오늘도 여전히 어제처럼 식민지를 살지만, 오늘 가는 나의 길이 새로운 길이라고 합니다.
바빌로니아라는 공간은 여전하지만, 오늘은 어제와 다른 시간이지요. 상황이 바뀌지 않아 똑같은 일상이 반복된다 해도, 내일의 나는 오늘과 다른 존재입니다.
여상한 공간에 새로운 시대 같은 시간이 스며들고 있습니다. 그냥 늙어가나 싶지만, 내일은 나도 모르는 새로운 나를 맞이하는 시간입니다. 바빌로니아에서 기도하는 시인처럼, 제국 치하에서 날마다 새로운 길을 모색했던 ‘동주’처럼 길을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도 굿모닝입니다. 주께서는 노예의 기도를 들으시니, 노예 같은 우리는 주의 뜻을 기대합니다.
오월에 시민들에게 총을 쏜 자들에게 훈장을 수여하며 ‘피 흘리기를 즐’겼던 자에게 그럼에도 자신은 ‘사태’와 관련 없다고 ‘속이는 자’에게도 굿모닝 아침 인사를 전합니다.(시5:6) 그리고 ‘아침에’ 시인처럼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그들을 정죄하사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고 그 많은 허물로 말미암아 그들을 쫓아내소서”(시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