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의 산
거창 호음산(930m)
수승대 곁에 솟은 호랑이산
정상의 파노라마 조망이 압권
백두대간이 북에서 뻗어내려 빼재를 넘어 덕유산 줄기로 접어든다. 1,000m가 넘는 갈미봉(1,213m), 대봉(1,263m), 지봉(1,343m), 귀봉(1,455m) 등은 전북과 경남을 가르며 이어져 결국 백암봉(1,503m)에서 덕유산 주능선과 조우하게 된다. 이 대간길의 갈미봉에서 분기해 동남쪽 칡목재를 거쳐 남쪽으로 뻗어내린 짧은 산릉이 있다. 이 능선은 호음산을 올려 세우고 결국 수승대가 자리한 위천천에 그 맥을 빠트린다.
옛 안의읍지 <화림지>에는 '대봉으로부터 남쪽을 달려 이 산이 된다. 현의 북쪽 40리에 있다'고 기록돼 있다. 대봉은 갈미봉 옆의 봉우리다. 또 <위천면지>에는 '면의 최북단에 위치하여 북상, 고제, 주상면 등 4개 면의 경계점이자 분수령이다. 산의 형세가 마치 호랑이가 달리는 것 같고 옛날에는 호랑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하여 호음산이라 하였다'고 적고 있다. 아직도 산자락에는 '호랑이 울음소리가 들렸다'는 호음동이란 지명이 남아 있을 정도다. 산자락의 황산마을은 거창 신씨들의 씨족마을이다. 이 마을은 호음산이 감싸고 있다. 호음산은 포효하는 호랑이가 개를 쫓는 형국으로, 마을 앞 개밥말산은 호랑이한테 쫓긴 개가 달아나지 못하고 웅크리고 누워 있는 형국이란다.
수승대는 삼국시대 때 백제와 신라가 대립할 무렵 백제에서 신라로 가는 사신을 전별하던 곳이다. 처음에는 돌아오지 못할 것을 근심하였다 해서 근심 수(愁), 보낼 송(送) 자를 써서 수송대라 했다. 지금의 이름은 1543년 퇴계) 이황 선생이 안의현 삼동(원학동, 심진동, 화림동)을 유람차 왔다가 마리면에 머물던 중 그 내력을 듣고, 이름이 아름답지 못하다며 음이 같은 수승대(搜勝臺)로 고칠 것을 권하면서 바뀌었다. 2008년 문화재청에 의해 명승 제53호로 지정된 국민관광지로 해마다 여름이면 거창 국제영화제가 열린다.
산행은 수승대 버스정류장에서 황산마을~황산저수지~계곡길~호음산 정상~시루봉~881m봉~칡목골~갈항마을~소정리 버스정류장으로 잇는다. 산행들머리의 황산마을은 담장이 아름답게 둘러쳐진 고풍스런 한옥의 고가가 많다. 그중 '원학고가' 라는 편액이 솟을대문 아래에 걸린 한옥은 민속자료 제7호로, 요수 신권 선생의 12대손인 전 통일원장관 신도성씨가 주인이다. 솟을대문 사랑채 중문채 안채 곳간채 방앗간 후문 등으로 이뤄진 검소한 양식의 이 민가는 서민적인 전통 한옥의 특징을 잘 갖추고 있다.
마을 오른편으로 흐르는 개울을 끼고 콘크리트 포장도로를 따라 황산저수지까지는 20분 정도 걸어야 한다. 저수지를 오르며 바라보이는 호음산의 모습은 그저 펑퍼짐한 뒷산처럼 느껴질 뿐이다. 때마침 내린 폭설로 마을과 온 산야는 하얀 눈으로 뒤덮인 설국을 보는 기분이다. 이곳 마을 사람들도 몇 년 만에 만난 폭설이라며 산행을 서두르는 일행을 걱정스런 눈초리로 쳐다본다.
'호음산 등산 안내도'가 서있는 옆의 황산저수지는 한파에 꽁꽁 얼어붙었다. 등산로는 저수지 왼편의 제법 널찍한 산판도로로 이어진다. 온통 눈에 파묻힌 산길은 등산로를 정비한 것인지, 아니면 산불방지용 임도인지는 가늠하기가 어렵지만 제법 훤하게 손질된 느낌이다. 깊어지는 계곡 옆에는 간간이 집터로 추정되는 돌담의 흔적도 볼 수 있다. 산속의 조그만 개울을 서너 개 건너, 잎은 떨어지고 가지만 앙상한 낙엽송 조림지를 지난다. 오를수록 발목까지 빠지는 눈은 러셀이 되지 않아 다소 조심스럽다. 낙엽송 조림지를 벗어나면서 계곡을 뒤로하고 산길은 왼편으로 틀면서 지능선으로 이어간다.
차츰 경사가 가팔라지면서 적설량도 많아 힘든 구간의 연속이다. 그렇지만 1,000m가 못 되는 이 산은 아무래도 눈이 녹거나 러셀만 되었다면 산행에 큰 어려움은 없어 보인다. 특히 거창지역에서 높은 산이 즐비한 것에 비하면 이 산은 아무래도 낮은 편에 속한다. 그런 관계로 평소에는 이만큼 많은 눈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위천면지>에도 호음산을 일러 '앞이 정남을 향해 있어서 양지 바른 곳으로 겨울철에 눈이 많이 와도 곧 녹아버리는 따뜻한 산이다. 또한 산 주령들이 높고 골짜기들이 깊어서 항상 풍부한 물을 공급해 준다'고 적고 있을 정도다.
어쨌든 소나무가 울창한 지능선을 올라 주변 조망이 다소 트이면서 이정표가 서있는 갈림길(황산 5.1km, 원농산 3.7km, 넘터 3.4km, 호음산 0.4km)에 이른다. 8부 능선으로 원농산마을이나 넘터고개에서 이어지는 주능선과 합류하는 지점이다. 다소 짧고 완만해지는 능선은 쌓인 눈으로 길을 가늠하기가 어렵다. 정상이 가까워지면서 왼편으로 바라보이는 황산저수지와 산행 시작지점의 황산마을이 눈에 갇힌 듯 펼쳐진다. 경사가 심한 짧은 능선을 올라서면 정상은 코앞이다. 모진 바람을 견디며 서있는 한 그루의 소나무가 이채롭고, 용도를 알 수 없는 높다란 안테나도 서있다. 수승대 군내버스정류장에서 1시간40분쯤 소요된 산정에는 산불감시초소가 덩그러니 차지하고 주변에는 정상석과 삼각점(무풍 310. 1988 재설), 이정표 등이 보인다.
무엇보다도 호음산은 정상에 서면 사방팔방이 훤하게 뚫려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조망이 압권이다. 이즈음이면 하얀 눈을 뒤집어쓰고 솟은 거창 일대의 산을 숨 가쁘게 훒어볼 수 있어서 좋다. 북쪽에서부터 시계 반대방향으로 백두대간을 따라 대덕산, 초점산을 비롯해 왼편으로 대봉, 향적봉, 삿갓봉, 남덕유산을 잇는 장쾌한 산릉은 파도처럼 출렁인다. 워천면 너머에는 월봉산, 금원산, 현성산, 기백산, 오두산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함양의 백운산, 멀리 지리산도 아련하다. 계속해서 눈을 돌리면 감악산, 숙성산, 미녀봉, 오도산, 두무산, 비계산, 의상봉, 별유산 그 너머에는 합천의 매화산, 가야산 등이 능선을 숨긴 채 겹겹이 포개지면서 실루엣으로 다가온다. 앞쪽에는 건흥산, 월여산, 취우령, 금귀산, 보해산, 흰데미산, 양각산, 수도산 등이 백설에 묻혀 제각각 그 모습을 뽐내기에 경쟁하는 듯하다. 땀 흘려 산을 오르는, 말 그대로 수고를 아끼지 않음은 그만큼 자연을 관망하는 이런 즐거움 때문이 아닌가 싶다.
아쉽지만 정신을 가다듬고 하산길을 서둘러야 할 차례다. 이정표 옆으로 내려서면 경사가 무척 가파르고 이어가야 할 북쪽 능선은 눈앞에 훤하다. 하얀 설릉은 백호의 등줄기처럼 북으로 뻗어 있다. 곧장 내달으면 안부에 이르게 되는데, 오른편으로 농산리 온곡동으로 빠지는 샛길이 있지만 눈에 묻혀 찾을 수 없다. 안부에서 올려치는 능선길은 927m봉을 왼편에 두고, 오른편 산사면을 에둘러 다시 산등성이로 붙는다. 경사가 밋밋한 능선을 따라 시루봉까지는 30분 정도 더 나아가야 한다. 만만치 않은 적설량에 길을 찾는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어 그저 능선만 따라 산행할 뿐이다. 더구나 바람에 휩쓸려온 눈까지 쌓여 커니스를 이룬 산등성이는 허벅지까지 빠지는 곳도 있어 눈밭에서 헤엄을 치는 격이다.
겨우 올라선 시루봉은 사실 호음산보다 해발고도가 30.1m 높다. 그렇지만 조망은 좋지 않고 나뭇가지 사이로 덕유산 연봉이 보일 뿐이다. 주변에는 참나무가 울창하다. 나뭇가지를 흔들며 쌩쌩 불어대는 바람소리는 호랑이 울음소리를 연상케 한다. 호랑이의 등을 타고 이어가면 잠시 후 묘지가 있는 널찍한 터를 지난다. 눈 위에 찍힌 산짐승들의 발자국은 사람을 만난 것처럼 반가울 따름이다. 서서히 고도가 낮아지면서 왼쪽 사면에 쳐진 높다란 철조망을 볼 수 있고, 뒤이어 오른편에도 가시철조망을 길게 둘렀다. 철조망 사이로 내려서면 오른편에 출입금지 팻말과 전류가 흐른다는 철선 너머로 농장인 듯한 건물도 보인다.
다시 평탄한 숲길로 15분쯤이면 881m봉을 넘는다. 뚜렷한 능선을 따라가면 네 갈래 갈림길. 이 갈림길에서 왼편으로 내려서는 길은 칡목골로 연결되는데 유심히 잘 잘 살펴야 한다. 주능선을 뒤로하고 내려서면 곧이어 도로를 만나게 되고 청정산골의 갈항마을을 지나 군내버스 정류장이 있는 소정리에 닿으면서 산행은 끝난다.
*산행길잡이
◎수승대 군내버스정류장~황산마을~황산저수지~계곡길~호음산 정상~시루봉~881m봉~칡목골~갈항마을~소정리 군내버스정류장<5시간30분 소요>
◎소정리 군내버스정류장~갈항마을~칡목골~881m봉~시루봉~호음산~헹기장~농산리 원농산마을<5시간 소요>
◎원농산마을~헬기장~황산마을 갈림길~호음산 정상~시루봉~881m봉~하수내 군내버스정류장<5시간 소요>
*교통(지역번호 055)
거창읍에서 산행들머리인 수승대(황산마을)까지는 06:20부터 20~30분 간격으로 출발하는 군내버스(서흥여객 944-3720)를 이용, 수승대 버스정류장에서 내리면 된다. 군내버스정류소는 거창시외버스터미널(942-3601)에서 걸어가거나 택시를 이용하면 된다. 택시를 타면 기본요금으로 충분하지만 걸으면 20분 거리다. 거창시외버스터미널에서 나와 시내 쪽으로 100m 정도 가다가 첫 사거리에서 신호등을 건너 도시 왼쪽 방향이다. 그뒤 처음 만나는 사거리에서 오른쪽으로 150m 정도 더 올라가면 된다.
산행 날머리인 소정리에서 거창시외버스터미널까지 가는 군내버스는 오후에 1:40, 3:10, 5:10, 6:50, 8:10으로 송계사에서 출발하는 버스다. 시간이 여의치 않으면 위천택시(943-0310) 또는 위천개인택시(943-0300)를 이용해 위천면소재지까지 나와 군내버스를 갈아타도 된다.
서울-거창 남부터미널(02-521-8550 ARS)에서 1일 14회(08:40~23:00) 운행.
부산-거창 서부터미널(051-322-8301~2)에서 50분 간격(07:00~18:40) 운행.
대구-거창 서부시외버스터미널(053-656-2824~5)에서 1일 67회(06:00~24:00) 운행.
진주-거창 시외버스터미널(055-741-6039)에서 20~30분 간격(06:50~19:47) 운행.
*숙식(지역번호 055)
호음산 산행에 있어 숙식은 거창읍내에서 해결하는 것이 좋다. 읍내에는 호텔을 비롯해 여관, 모텔 등이 많고 깨끗한 식당도 여럿 있다. 굳이 산행 들머리인 수승대에서 숙식을 하겠다면 식당의 경우 비수기에는 찾는 손님이 적어 일찍 문을 닫는다는 사실을 염두에 둬야 한다. 수승대에서 숙박할 경우, 수승대여관(943-7963), 로얄파크장여관(943-6102), 그린파크장여관(944-1237), 천오장여관(942-5541)이 있다. 음식점은 수승대관광식당(941-1120)의 메기탕, 토종닭 볶음탕, 백숙요리 등이 주종이고, 부뚜막식당(943-3865)은 주인이 농장에서 직접 재배한 채소를 재료로 한 버섯전골과 장어요리가 일품이다.
글쓴이:황계복 전 부산산악연맹 부회장
참조:호음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