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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천선생 박소는 슬하에 5명의 아들과 16명의 손자를 두었는데, 이 시기를 기점으로 선생의 후손들은 17세기를 대표하는 명가로 부상하며 한 시대의 정치, 문화, 사상계를 주도하게 된다. 특히 선생의 2남인 박응순 (朴應順) 은 의인왕후 (懿仁王后) 의 아버지로 선조 (宣祖) 의 장인이 되었다. 또한 야천 박소의 장자 박응천 (朴應川) 은 응천-동선 (東善) –정 (炡)-세당 (世堂)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경기도의 대표적인 소론 명문가 서계가문 (西溪家門) 의 시초가 되었다. 이들은 박소 야천선생의 자손 가운데 관직, 훈공, 학문에 있어서 가장 혁혁한 가계 가운데 하나로 성장하였다.
1690년 경 경기일대의 소론들이 친목계를 결성한 적이 있었다.
이 계는 박세당, 서문중 (徐文重) , 이만상 (李萬相) 을 정점으로 하여 ‘소론 13가문’의 자제들이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만든 세강계 (世講契) 였다.
당시의 구성원은 반남박씨 박세당가문, 달성서씨 (達城徐氏) 서문중 가문, 전주이씨 (全州李氏) 이경석 (李景奭) , 이경직 (李景稷) 가문, 경주김씨 (慶州金氏) 김주신 (金柱臣) 가문, 한산이씨 휘 현영 (顯英) 창곡공 (蒼谷公) 가문, 덕수이씨 (德水李氏) 이경증 (李景曾) 가문, 능성구씨 (綾城具氏) 구봉서 (具鳳瑞) 가문, 나주임씨 (羅州林氏) 임서 (林㥠) 가문, 해평윤씨 (海平尹氏) 윤훤 (尹暄) 가문, 덕수장씨 (德水張氏) 장신 (張紳) 가문 등 소론의 핵심가문들이 거의 모두 참여하고 있었다.
세강계 친목회가 단적으로 보여주듯 반남선생 박상충과 평도공 박은의 후예인 서계 박세당 가문은 고려말부터 시작된 인연을 조선조에 이르러까지 이어 지속시키며 가정-목은의 후예인 한산이씨 창곡공 가문과 어우려 깊은 유대관계 (紐帶關係) 를 유지하고 정치적, 사회적, 학문적, 문화적, 사상적인 면에서 그 운명을 같이 하려 하였던 것이다.
자신이 사랑하고 측은하게 여겨서 어렸을때 거두어 교육시키고 성장케한 생질 평도공의 후손이 자신의 맏아들 문양공 (文襄公) 후손인 창곡공 가문과 이렇게 화목하게 지내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 것을 목은 선조가 만약에 지하에서 지켜 보았다면 아마도 몹시 기뻐하고 흡족해 하셨을 것이다. 지금 현대에도 위의 소론 13가문의 후손들은 친목회를 조직하여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지고 문중들간의 결속력을 다지며, 그 수백년 전수되어 내려오는 끈끈한 정을 쉬지 않고 이어가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을 필자는 예전에 접한바 있다.
증 정부인의 외가 남양홍씨
증 정부인의 외할아버지는 부사 (府使) 직을 지낸 남양인 (南陽人) 홍사부 (洪士俯) 였으며 외할머니는 판사 (判事) 한절 (韓岊)의 따님 청주한씨 (淸州韓氏) 이다. 외증조부는 형조참의, 대사헌 (大司憲) 을 지낸 홍흥 (洪興, 1434~1501 ) 이며 외증조모는 광주이씨 (廣州李氏) 이다. 홍흥은1453년(단종 원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음보 (蔭補) 로 세마 (洗馬) 에 등용되었다. 감찰 (監察) 을 거쳐 평택현감 (平澤縣監) 으로 나가 크게 선정을 베풀었다. 1479년(성종 10) 지평으로 내직에 들어왔고, 이어서 형조정랑·호조정랑·장령이 되었다가 형조참의로 초배 (超拜) 되었다.
그 뒤 우승지·좌승지를 거쳐 1490년 충청도관찰사로 나갔다가 1494년 개성부유수로 전임하였다. 이듬해 대사헌이 되었다가 한성부좌윤을 거쳐, 호조참판·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성품이 강직하였고, 인물과 풍채가 준수하여 성종이 자주 명나라에 사신으로 보내어 우리나라의 인물로 자랑할 정도였다고 한다. 글씨에도 능하였다. 친형되신 분이 좌의정 홍응 (洪應) 이다.
증 정부인의 외고조부는 경기도관찰사 (京畿道觀察使 ), 한성부윤 (漢城府尹) 을 지낸 홍심 (洪深, 1398~1456) 이며, 외고조모는 경승부윤 (敬承府尹) 윤규 (尹珪; 태종의 과거급제동기) 의 따님 파평윤씨이다. 1431년 (세종 13) 에 홍심은 장흥고직장 (長興庫直長), 사온직장(司醞直長), 사헌부남부령 (司憲府南部領) 등을 지냈다. 이 때 딸이 동궁 (東宮) 에 간택되어 쌀과 콩 등 30석을 하사 받은 적이 있고, 1433년 경기도사 (京畿都事) 로 있을 때는 의복을 하사 받았다. 1436년에 사헌부지평 (司憲府持平) 으로 있었고, 1439년에 장령 (掌令) 등을 거쳐 세종 대에 지사간원사 (知司諫院事) 겸 지병조사 (知兵曹事 )를 역임했다. 1450년(문종 1)에는 병조참의 (兵曹參議) 를 거쳐 동지돈령부사 (同知敦寧府事), 한성부윤(漢城府尹), 경기도관찰사 (京畿道觀察使) 등을 지냈다.
단종이 즉위한 1452년에는 경기도관찰사 (京畿道觀察使) 로, 1454년에 인순부윤 (仁順府尹), 한성부윤(漢城府尹) 으로 있을 때 세조 즉위와 관련하여 원종공신 (原從功臣) 에 채록되었다. 1456년(세조 2) 에 평양선위사 (平壤宣慰使) 로 재임 중에 타계했다. 묘는 남양주 와부읍 덕소리에 있다.
부사공과 증 정부인의 자녀들
부사공과 정부인은 다복한 가정을 이루고 슬하에 5남3녀를 두셨으니, 첫째 1녀는 함양인 (咸陽人) 사용원직장 (司饔院直長) 박여헌 (朴黎獻) 에게 출가, 둘째 1남은 휘 대추 (大秋) 강령현감 (康寧縣監) 이요, 셋째 2남은 휘 대화 (大禾) 통정대부 충주목사 (通政大夫 忠州牧使) 요, 넷째 3남 휘 대수 (大秀) 는 통훈대부 삭령군수 (通訓大夫官 朔寧郡守) 증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 ( 贈 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 이요, 다섯째 4남 휘 대형 (大馨) 은 찰방 (察訪) 증 사복정 (贈 寺僕正) 이요, 여섯째는 5남 휘 대년 (大䄵) 이요, 일곱째 2녀는 안동인 (安東人) 현감 (縣監) 권인 (權靭) 에게 출가, 여덟째 3녀는 전주인 (全州人) 최덕준 (崔德峻) 에게 출가 하였다. 이중 3남 휘 대수 삭령군수의 후손이 창곡공파 (蒼谷公派), 4남 휘 대형 찰방의 후손이 해산공파 (海山公派) 를 이뤄 훗날 가문을 크게 빛내었다.
필자가 생각하기엔 아마도 증 정부인 박씨는 한산이씨 집안에 시집오셔서 수십년을 시집살이 하시며 사시는 동안 어질고 현명한 아내와 어머니의 도리를 다하며 집안의 자제들을 잘 교육시키고 남편을 훌룡하게 내조하신 좋으신 분처럼 여겨진다. 훌륭한 인품과 학식을 갖춘 친정 아버지 야천선생을 본받아 부인 역시 자녀들에게 크게 본이 된 현모양처의 상은 아니였는지 추측을 하여 보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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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이 글은 한산이씨 전자족보,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서계문화재단 홈페이지, 고전번역원 데이터베이스 등의 온라인 자료들을 참조하였음을 알림]
첫댓글 반남박씨의 가계도를 시대순으로 잘 정리되어져 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쉽지않은 내용인데 잙읽고 갑니다
그동안 문양공파의 주류가 되는 해산공파/창곡공파의 선대 할머님들 가계를 살펴봤는데 다음엔 인재공댁의 선조님들 배위 가계를 돌아볼까 하고 있네. 좋으신 조언으로 계속 깨우침 주시기 바람. ^^
너무 우리쪽만 하면 독자들이 관심을 잃어서 인기도가 떨어지지 않겠는가. ㅎㅎ
@이주원 (周遠) 왕성한 글솜씨는 선조님이 후손들에게 손수 주신 보배인가 봅니다 형님 열손가락 깨물어 안아픈 손가락없듯이 인재공 양경공 모두 목은 할아버지후손이며 우리는 모두 같은 가족입니다 당연히 아는 범위에서 저술활동은 대환영입니다 저도 못다한 글 게시하여야 하는데 올해는 일정이 빡빡합니다 조만간 또 하나 내지 두개 별것아니지만 맡아야 할 것이 생길것 같습니다
@대원 바쁘신 일정에 여러 문중일, 사회봉사일을 맡아서 애쓰시는 아우님께 감사드리네. 전에도 말했지만 아우님은 한산이씨카페의 베스트셀러작가이니 우리는 그저 고마운 마음으로 아우님의 글들을 대한다네. 읽을때마다 새롭게 배우고 식견이 넓어져서 기쁠따름이지. ^^
@이주원 (周遠) 형님 아닙니다 항상 걱정이 앞섭니다 보잘것 없는 글솜씨에 많은 분들이 읽어주시니 고마울따름입니다 맨손으로 시작해 맨손으로 가는 인생사에 조그마한 기록이라도 남겨둔다는 것이 쉽지않습니다 형님의 글솜씨가 아주 많이 높은 단계로 가서 배울것이 많아졌습니다 ㅎㅎ 앞으로는 대종회 큰뫼 처럼 에세이 형식의 글이 첨가되신다면 곧 대종회에 베스트 톱 저자가 되시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전망해 봅니다 대기만성 퇴계도 오십까지는 시만쓰는 바보에서 오십넘어 철학자가 되었듯이 벼는 고개를 숙여야 익어가는 것 같습니다
@대원 ㅎㅎㅎ 아우님의 과찬의 칭찬에 할 말을 잃었네 그려. ^^ 물론 어렸을때부터 각종 글짓기 대회에서 상받고 학교대표로 선발되어 나가서 또 서울시장 상받은 경험은 있지만 나의 학식과 내공이 아직 턱없이 부족하다네. 오십이 아니라 육십 칠십이 되어도 아마 모자를걸세. 아우님 말씀처럼 그저 덮어두긴 아까와서 우리 문중의 역사나 선조님들의 사적을 내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인터넷매체를 통해서 전하려고 하고 있을뿐이네. ^^
@이주원 (周遠) 아마 곧 경지에 오르지 않을까 싶습니다 형님 성경은 거의 무지하지만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것이다 이런말 있지않은가요 ㅎㅎ 이모든것은 조그만 시작에서 시작됩니다 자꾸 하다보면 분명 향상되실것입니다 반남박씨로 가서 박은의 자
반남박씨 7세조 박규의 4남 5녀중 둘째 박병균의 자 박숙이 안동입향조로 이후 후손이 안동 수은공파와 관련을 또 이어갑니다 .
박숙(朴䃞): 1444~1526. 자는 지주(支柱)이며, 병균(秉鈞)의 아들이다. 백숙부에게 양육되어 존고모부인 양성인 이중이 안동부사로 올 때 동반 낙남하여 능성구씨에 장가들어 안동 가구리에 옮겨 살았다.
잠시 언급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