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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학을 정치이념으로 삼은 조선왕조는 한양의 동·서·남·북·중부에 5부학당과 전국 330여 군·현에 향교를 설치하고, 최고 교육기관으로 성균관을 세웠다.
그런데, 성리학이 점차 널리 보급되자 이러한 관학(官學) 이외에 저명한 선비나 은퇴한 관리들이 가르치는 사립학교인 서원(書院)도 생겨났다.
서원은 조선 건국 후 약150년이 지난 중종 38년(1543) 풍기군수 주세붕이 경상도 영주군 순흥면이 고려 말 중국에서 성리학을 수입한 안향의 고향인 것을 알고 안향을 모신 사당 회헌사(晦軒祠)를 세운 것이 최초다.
이듬해에는 사당에 유생들 교육기관으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세웠는데, 불과 4~5년 만에 백운동서원 출신 과거급제자가 속출했다.
그 후 명종 3년(1548) 퇴계 이황(李滉; 1501~1570)이 풍기군수로 부임한 뒤, 조정에 건의하여 명종으로부터 ‘소수서원’이라는 친필 사액을 받은 것이 최초의 사액서원이다. 조정에서는 성리학을 장려하는 뜻에서 유명한 서원에 임금이 현판을 하사할 때 책과 노비 몇 명, 약간의 전·답까지 주어서 공인된 교육기관이 된 사액서원과 일반서원인 향현사(鄕賢祠)와는 위상과 품격에 큰 차이가 있었다(2013.11.13. 영주 소수서원 참조).
성리학은 충청도·전라도를 중심으로 한 기호학파와 경상도를 중심으로 한 영남학파의 양대 산맥이 형성되었는데, 퇴계를 기리는 도산서원(陶山書院; 사적 제170호)은 영남학파의 선구자인 이언적(1491~1553)을 모신 경주 옥산서원과 함께 영남의 양대 서원으로 꼽힌다.
도산서원은 퇴계가 생전에 제자들을 가르쳤던 도산서당과 퇴계 사후에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도산서당 뒤에 지은 서원과 사당 일대를 말하는데, 도산은 퇴계가 이름붙인 예안 고을의 9곡(曲) 중 제4곡과 제5곡사이에 있는 산으로서 예부터 옹기 굽는 가마터가 있다고 해서 불린 이름이다. 도산서원은 퇴계 사후 5년 뒤인 1575년(선조 8) 선조로부터 사액을 받았다.
서원은 학문의 대중화와 함께 저명한 선비들의 위패와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등 충효사상 보급에 긍정적인 면이 많았지만, 점차 성리학을 통한 이념갈등을 형성하여 수많은 사화를 거치면서 학연과 지연으로 뭉쳐 중앙에서는 붕당정치, 지방에서는 백성을 토색질하는 소굴이 되는 등 폐단이 많았다. 그러자 고종 5년(1868) 대원군은 전국 650여 서원 중 47개소를 남기고 모두 폐쇄했는데, 도산서원은 이때에 존치된 서원중 하나였다.
서광명실(도서실) -편액은 퇴계의 친필이다. |
도산서원에서 내려다 본 서원 전경 |
지난해 가을 청송을 다녀오는 길에 들렸던 도산서원에 대한 아쉬움에 다시 도산서원을 찾아 나섰다. 도산서원은 대전에서는 청원~상주고속도로와 중부내륙고속도로를 갈아타고 함창이나 문경나들목을 빠져서 안동까지 국도를 달려간 뒤, 안동 시내에서 봉화 방면으로 35번 국도를 약25㎞쯤 가야 한다. 도로 오른쪽에 서원 입구를 알리는 안내판이 보이는데, 대중교통으로는 안동까지 가서 도산서원 행 68번 시내버스를 타고 약40분정도 가면 된다.
사실 도산서원은 안내판이 세워진 곳에서도 산길로 약2㎞쯤 들어가면 매표소가 있고, 매표소에서도 완만한 산기슭을 약500m쯤 돌아가야 한다. 승용차라면 매표소입구의 주차장에 주차비 2천원을 내고, 어른 1500원, 어린이 700원의 입장료를 내야 한다. 안동시민은 어른 800원, 청소년 400원을 받는다.
도산 기슭의 남향에 자리 잡은 도산서원 앞에는 안동호가 펼쳐지는데, 안동호 한 가운데에는 정조 16년(1792) 영남 유생들을 위하여 특별 과거를 치렀던 시사단(詩士壇)이 있다. 시사단은 1976년 안동댐 건설로 물에 잠기게 되자 축대를 높이 쌓아올렸다.
퇴계유물전시관에 전시중인 서원의 가을풍경 그림 |
중종, 명종, 선조시대에 성균관대사성을 역임하고 사후에 영의정으로 추존되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 유학에도 큰 영향을 준 대학자 퇴계는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서 좌찬성을 역임한 이식(李埴)의 7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생후 7개월 만에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자라다가 12세 때부터 숙부 우(堣)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퇴계는 1527년(중종 22)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간 이듬해 사마시에 합격했다.
34세 되던 1534년 문과에 급제 후 승문원부정자, 세자시강원문학·충청도어사 등을 역임하고, 1543년에는 성균관사성이 되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몸이 약한 퇴계는 여러 차례 관직을 사임하고 낙향했다.
1546년에 낙향했을 때에는 낙동강 상류인 토계에 양진암을 지었으나, 1548년 다시 출사하여 단양군수와 풍기군수를 거치던 중 병을 얻어 1550년에 낙향했을 때에는 한서암을 짓고 독서를 했다.
도산서당은 퇴계가 한서암에서 머물 때 유생들이 찾아오자 한서암 동북쪽 계천(溪川) 위에 계상서당(溪上書堂)을 지은 것이 시초로서 1552년 성균관대사성이 되어 조정에 나갔다가 1560년 낙향한 후 지금의 도산서당을 지었다. 하지만, 서당은 맨 왼쪽에 부엌 한 칸과 퇴계가 거처하던 가운데의 온돌방 완락재, 그리고 대청 암서헌의 초가삼칸이었으니, 당시 규모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도산서워(편액은 한석봉 글씨다) |
서재(유생들의 기숙사) |
매표소에서 도산서원으로 가는 길 |
그래도 퇴계는 마당 한구석에 작은 연못을 파서 꽃을 심고 정우당(淨右瑭)이라 하고, 그 아래에 몽천이란 샘을 팠으며, 계곡 건너편에는 매화·대나무·소나무·국화 몇 그루를 심고 절우사(節友社)라고 불렀다. 절우사란 계절마다 선비들의 친구가 되는 꽃과 나무들을 말한다. 퇴계는 금세 늘어난 학생들의 기숙사 농운정사를 짓고, 샘도 새로 파는 등 대대적인 확장공사를 했는데, 서당을 짓고 난 이듬해인 1561년 11월 기쁜 심정을 도산잡영(陶山雜詠)에 자세히 기록했다.
1570년 퇴계가 70세로 죽자 2년 뒤인 1572년(선조 5) 제자들이 퇴계의 위패를 모신 사당 상덕사(보물 제211호)를 짓고, 전교당(보물 제210호)과 동·서재를 지어 도산서원이라고 했다. 도산서당과 농운정사 사이로 난 좁은 계단을 올라가면 서원의 정문인 진도문인데, 정면에는 전교당과 마당 양쪽으로 유생들의 기숙사인 홍의재(동재)와 박약재(서재)가 있다.
강의실과 교수실로 나뉘는 전교당의 추녀에는 1575년(선조 8) 선조로부터 사액 받은 ‘도산서원’이란 당대 최고의 명필 한석봉이 쓴 편액이 걸려있다. 동재 뒤편에는 장판각이 있고, 동·서재 앞의 경사진 지대에는 학자들의 문집을 보관하는 도서관 격인 동광명실과 서광명실이 누각처럼 있다. 두 편액은 퇴계의 친필이다. 동·서광명실에 있던 4000여권이 넘는 서적과 장판각의 목판들은 2003년 5월 한국국학진흥원으로 이관되어서 현재는 빈 건물인데, 한국국학진흥원과 유교박물관은 안동시내에서 도산서원으로 오는 길 중간에 있다.
전교당과 장판각 사이의 가파른 계단을 올라 외삼문에 들어서면 퇴계의 위패를 모신 상덕사이다. 전교당 뒤는 제사준비를 하는 진사청이 있다. 그런데, 도산서당 왼편에 퇴계가 사용했던 유품과 퇴계 관련 자료를 전시하는 유물전시관을 지어서 농운정사가 마치 도산서원의 중심건물처럼 보인다. 농운정사는 현재 보수공사 중이다.
한편, 도산서원의 뒷산 너머에는 퇴계가 살았던 퇴계종택이 있다. 주차장에서 도로를 따라 약2㎞쯤 고개를 넘어 작은 다리를 건너면 오른쪽으로 보인다. 원래의 건물은 1907년 일본군이 불태워 버린 것을 1923~1926년간에 퇴계의 13세손이 솟을 대문과 □자형 주택, 열녀문 등을 복원했다고 한다. 지금은 선비문화수련원으로 이용되고 있다.
깊숙한 산속의 매표소와 주차장 주변, 퇴계종택 주변에 기념품점뿐 변변한 음식점 하나 없는 것이 많이 아쉽다.
도산서원을 세우기 전 도산서당 우물(몽천) |
퇴계선생 종택 전경 |
퇴계선생 종택 전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