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BM 변화에 민감한 기업으로 탈바꿈 IBM은 과거에는 ‘PC 시대의 표준’으로, 현재는 ‘e-비즈니스’라는 새로운 영역의 개척자로 전 세계에 이름을 남기고 있다. 하지만 IBM이 그렇게 승자의 위치에만 머물러 있었던 것은 아니다. 1984년 역사상 최대 순익인 66억 달러를 기록했지만, 반면 세계 역사상 최대 적자인 88억 달러를 기록하기도 했다. 엄청난 성공 뒤에 실패를, 그리고 실패를 딛고 일어섬으로써 다시 승자가 되기까지, IBM에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살펴보자.
컴퓨터 업계의 신화창조 1925년 IBM(International Business Machine)이 탄생했다. IBM은 미국의 모든 사무실에 사무자동화 기기를 도입하며 컴퓨터의 절대 강자로 떠올랐다. 창립자였던 토머스 왓슨과 그의 2세들은 IBM의 성공신화를 만들어갔다.
 하지만 아무도 따라오지 못할 것 같은 IBM의 성공 신화가 조금씩 주춤거리기 시작했다. 경쟁사들이 등장했고 IBM은 극심한 경쟁을 거치며 독보적인 지위를 잃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1980년대 말부터 시작된 PC의 사용은 컴퓨터 환경을 바꿔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IBM은 변화에 부응하기보다 자사의 메인 프레임에 모든 것을 걸며 오직 ‘자신만의 길’을 갔다. 이렇게 IBM이 고객과 멀어지게 된 것은 조직이 거대해지면서 관료화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IBM이 가진 본연의 가치를 지키기보다는 세부방침과 세부절차, 조직체계와 관행을 중시 여겼다. 그렇게 거대한 공룡이 돼버린 IBM은 1990년대 초반, 3년간 1백50억 달러의 누적 손실과 기업가치 7백억 달러 손실이라는 오명을 남기며 역사 속으로 사라져갈 위기에 처했다.
실낱 같던 희망을 붙들다 1994년 IBM은 기업회생을 위해 80년 기업 역사상 처음으로 외부 경영자를 영입했다. 마지막 희망이라는 기대를 한 몸에 안으며 CEO로 등극한 사람은 바로 ‘루 거스너’다. 그는 공룡 IBM을 살리기 위해 과감한 구조조정, 고객 중심의 핵심역량 변화, 기업문화 혁신을 실시했다. 과감한 구조조정 실시: 핵심사업을 빼고는 사업과 자산을 정리했고 명예퇴직제도를 시행해 인력을 감축했으며 관리자의 수와 단계를 줄이고 핵심인력을 외부에서 영입함으로써 효율성을 높였다. 자기 살을 깎아야만 하는 힘든 구조조정은 많은 적자를 벗어나기 위한 생존의 발판이었다. 핵심역량 변화: IBM은 변화한 시장에 핵심역량을 맞춰가기 시작했다. 하드웨어 중심의 회사에서 ‘서비스 회사’로 변신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인터넷이 주도하는 새로운 시장을 미리 예측함으로써 업계 최초로 ‘e-비즈니스’를 주창하며 회사의 모든 핵심역량 및 인프라를 개방형 표준에 맞게 구축했다. 기업문화 혁신: 직원 스스로가 ‘생각하기’ 조직을 만들기 위해 애썼다. 처음부터 경직돼 있던 조직에 익숙해진 직원들을 기업혁신의 주인공으로 이끄는 일은 쉽지 않았다. 직원들은 이미 암울한 기업의 미래에 낙담했으며 의욕을 잃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들의 신념을 따라 과거 수십 년간 지속해온 IBM의 독특한 문화와 교육제도는 그들을 되돌리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도록 했다. 또한 전 세계 30만 명의 직원에게 신속 정확한 의사소통과 지식경영이 가능한 사내 커뮤니케이션 환경을 구현하고, 성과에 따른 변동 급여, 종업원 지주제도, 스톡옵션 등을 통해 의욕을 고취시킴으로써 역동적인 기업문화를 만들어갔다. 현재 IBM의 최대 강점은 세계 최고의 기술과 인력을 보유한 기업이라는 데 있다. 그들은 고객중심 경영혁신에 최우선으로 변화하는 환경 가운데 끊임없는 혁신을 가능하도록 하고 있다. 계속되는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고객을 최우선으로 변화의 몸부림이 멈추지 않는 한 IBM은 성공의 대열에 계속 머무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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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만손 역경은 변화의 기회를 선물한다 1988년 4월, 자본금 5천만 원과 직원 6명으로 로만손 시계가 설립됐다. 당시 국내 시계시장은 4대 대기업이 90%를 점유하고 나머지 10%의 시장만 놓고 중소기업들간에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후발 기업이었던 로만손은 치열한 국내 시장보다 해외로 눈을 돌리며 일본 업체에 납품하는 주문자상표부착(OEM) 방식으로 수익을 냈다. 까다로운 일본업체의 주문을 맞추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그럭저럭 회사를 꾸려가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1년 후 단가가 낮은 홍콩 업체로 거래를 바꾸며 일방적으로 주문이 끊어졌다. 아무런 준비 없이 맞게 된 위기 앞에 로만손은 ‘고유 브랜드’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며 이때 ‘로만손’이라는 자체 브랜드를 개발했다. 로만손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어 보이는 국내 시장보다 브랜드 개념이 없는 세계 시장만이 살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시계산업의 본산인 스위스의 이미지가 풍기도록 스위스 북동부에 위치한 휴양도시이자 시계공업 도시인 ‘ROMANSHION’에서 ‘로만손(ROMANSON)’이란 이름을 만들며 자체 브랜드로 시계를 팔기 시작했다.
 |
세계 최초가 살아남는다 로만손은 세계 어디든 시계 전시회만 열리면 달려가서 샘플을 전시했다. 그러다 어느 날 사우디아라비아 세관이 큰 트렁크 백에 무수한 시계를 넣고 다니던 로만손 직원을 밀수꾼 취급했다. 세일즈를 상담하러 온 것이라며 거래내역서와 초청장을 보여주고서야 간신히 풀려났다. 그러나 시계는 전부 압수당했다. 이름 없는 가난한 시계업자가 감당해야 할 차별이었다.
 이렇게 힘들게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시계를 팔려고 애써도 시계는 잘 팔리지 않았다. 고가 시장은 스위스와 일본 제품이 휩쓸었고 중저가 제품은 홍콩과 대만에 밀렸다. 로만손은 고민 끝에 화려함을 좋아하는 중동 사람들을 떠올리며 액세서리와 보석 같은 시계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평평한 시계 유리면을 보석처럼 입체적으로 만들어 장식적인 측면을 강화한 것이다. 이 유리면을 만들기까지 6개월이란 연구기간이 필요했지만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1990년 세계 최초의 커팅 글라스 제품을 두바이에 내놓자 매출은 1년 만에 세 배로 껑충 뛰었다. 여기저기서 선수금을 낼 만큼 주문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로만손 김기문 사장은 이렇게 말한다. “한동안 로만손의 성공비결을 묻는 사람이 많았어요. 하지만 대답은 간단합니다.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정말 밤잠 안 자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남들보다 앞서려면 잠을 덜 자든지, 머리가 좋든지 둘 중 하나는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남들과 똑같이 놀고 먹고 자면서 뭘 기대합니까?”
더 넓은 곳에서, 더 많은 제품을 하지만 로만손에 위기는 또 찾아왔다. 홍콩에서 날아온 로만손 짝퉁이 3분의 1 가격으로 중동에 넘쳐나기 시작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수출액의 70%를 차지하던 중동에서 걸프전이 터졌다. 든든했던 수출시장이 막막해지는 것은 물론, 받아야 할 돈이 전쟁으로 묶이면서 회사는 다시 어려워졌다. 하나의 시장, 하나의 제품은 리스크가 크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 사건이었다. 로만손은 걸프전과 홍콩의 짝퉁 사건을 계기로 시장의 다변화와 다양한 모델을 개발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중동 시장이 막힌 후, 유럽의 관문인 터키를 타깃으로 터키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디자인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디자이너들을 직접 터키에 보내 현지 바이어들을 통한 철저한 사전조사를 하여 리스크를 낮췄다. 터키의 성공을 발판으로 인도, 동남아 등지로 시장을 확대하며 각 나라에 맞는 디자인을 개발하기 위해 디자인에 대대적인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이제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유명한 로만손 시계. 로만손 시계의 힘은 항상 위기에서 나왔다. 절박함과 간절한 마음은 성공을 향해 더 높이, 더 멀리 뛰게 만들었고, 그러한 노력이 결국 ‘위기’를 ‘성공’으로 바꾸는 힘이 됐다. 지금도 더 높은 곳을 바라보며 열심히 달려가고 있는 로만손 시계. 또 어떤 새로운 역사를 쓰게 될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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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베라 꾸준한 연구개발로 알로에 시장 평정 유니베라(구 남양알로에)는 전 세계 알로에 원료의 40%를 공급하고 있는 세계 1위의 알로에 공급업체다. 미국 텍사스주를 비롯해 멕시코 탐피코, 중국 하이난 등 여의도 면적의 4.1배 되는 넓은 알로에 농장을 갖고 있으며, 이곳에서 재배되는 알로에 원료를 30여 개국, 1천여 기업에 공급하고 있다. 세계 굴지의 다국적기업인 에스티로더, 존슨앤존슨, 바디샵, 3M 등이 주요 고객사다.
엄청난 손해로 기본기 단련 유니베라의 창업주인 고 이연호 회장은 45세 때 간경변을 앓았다. 병이 위중해 사업을 접고 요양하던 중 알로에가 간에 좋다는 얘기를 듣고 이를 복용한 후 건강을 되찾았다. 이후 이 회장은 원래 하던 비철금속 사업에서 알로에 사업으로 방향을 돌렸다. 자신이 받은 혜택을 남들에게도 나눠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때마침 1980년 초반에 알로에의 효능이 매스컴을 통해 알려지면서 알로에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아열대 작물인 알로에를 우리나라에서 생산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판단한 유니베라는 해외 농장을 인수하기로 결심했다.
 농장 후보지는 미국의 텍사스. 당시 매출이 20억 원도 안 됐기 때문에 큰돈을 들여 좋은 농장을 마련하기는 어려운 처지였다. 알로에 농장을 알아보던 중, 회사 부도로 인해 은행으로 넘어간 알로에 농장을 매우 싸게 살 수 있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1년여 만에 그 동안의 노력을 모두 허사로 만들어버린 냉해가 닥쳤다. 연평균 기온이 20도가 넘는 텍사스에 기온이 5도가 되는, 100년 만의 냉해가 닥친 것이다. 전 직원과 가족이 합심해 냉해를 이겨보고자 애썼지만 허사였다. 92만 그루가 몽땅 얼어 죽었고 1백만 달러의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됐다. 하지만 이때의 위기는 냉해의 무서움을 알게 된 절호의 기회였다. 날씨를 모르고는 알로에 사업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유니베라는 기후에 대해 자문을 받으면서 냉해가 향후 10년간 계속 남하할 거라는 정보를 얻게 됐다. 또다시 찾아올 냉해를 피하기 위해 서둘러 냉해지역에서 벗어나 있는 멕시코의 탐피코 농장을 인수하고 그 지역의 반경 100km 이내의 알로에 원료를 몽땅 입도선매했다. 과연 12월 하순이 되면서 냉해가 또다시 텍사스를 엄습했다. 기후에 관심이 없던 영국계 알로에 회사는 손 놓고 있다가 냉해의 피해로 헐값에 유니베라에 인수됐다.
포기할 수 없는 연구개발 유니베라는 이제 안정적인 알로에 농장을 갖게 됨으로써 성공가도를 달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국에서 알로에 대장균 검출과 과대 광고업자가 구속되며 알로에 붐에 찬물을 끼얹었다. 당시 젤 형태로 판매되던 알로에에 가공과정에서 세균이 번식했던 것이다. 그리고 건강식품 붐으로 업체의 경쟁이 과열되면서 매출은 4분의 1로 줄어들었다. 회사 상황이 어려워졌지만 알로에 연구는 멈추지 않았다. 적자가 나든 흑자가 나든 매출의 10%를 연구개발비에 투자하며 천연물에서 유효한 성분을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추출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이러한 꾸준한 연구로 2003년 관절염개선제 ‘유니베스틴’이 미국에서 대박을 터트리며 연구개발의 결과가 처음으로 수익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17년간의 연구개발로 당장 상품화할 수 있는 천연물 소재만 15개 이상 확보했으며 전 세계 3만여 종의 약용식물 중 1만여 종에 대한 성분분석 DB도 갖추게 되면서 전 세계의 건강식품업체가 될 만반의 준비를 끝냈다. 미국은 1940년부터 알로에 사업화가 시작됐지만 상품 자체를 팔 줄만 알았지 알로에의 성분을 분석해서 상품화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이러한 기회는 유니베라가 먼저 잡아나갔다. 당장 눈에 보이는 이익을 쫓지 않은 꾸준한 연구개발로 성공 궤도에 올라선 유니베라. 이제 전 세계의 알로에 시장을 넘어 전 세계 건강산업의 선두주자가 될 날을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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