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이즈모 신화의 줄거리
이즈모(出雲) 지방의 신화라고 하는 이 신화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일본의 개벽 신화에 들어 있는 것이 있고 또 『풍토기』에는 이와는 다른 것이 실려 있다. 이 이야기들에서는 야요이 시대에 해당된다고 보이는 오랜 옛날에 한국 세력이 일본 열도에 진출한 사실을 찾아낼 수 있다.
우선 『일본서기』에서 개벽신화에 넣고 있는 이즈모 신화로부터 보자. 이 신화의 주인공 <스사노―오노―미꼬도(素盞嗚尊 須佐之男命)>는 음양 두 신이 일본의 여덟 개 큰 섬들과 바다와 산천 초목을 낳고 그 지배자로서 일신(日神), 즉 <아마―데라스―오―미가미>를 낳은 다음 월신(月神)을 낳고 다음에는 거머리 새끼(蛭兒)를 낳고 그 다음에 막내로 낳은 신이었다 <스사노―오노―미꼬도>는 막내이며 또 망나니이기도 하였다. 그의 형 거머리 새끼는 3년이 지나도 제 발로 서지도 못하므로 배에 실어다가 내버렸으며 <스사노―오노―미꼬도>는 사잡기만 한 것이 울기만 하여 국내 백성들이 그 때문에 일찍 죽는 사람이 많았고 푸른 산도 말라버리므로 부모되는 음양 두신은 <네노구니(根國)>로 멀리 귀양을 보내었다. 귀양을 보내어 쫓을 때에 음양 두 신은 <스사노―오노―미꼬도>가 나라를 다스리지는 못하리라(不可以君臨宇宙)도 했다고 한다.
쫓겨난 <스사노―오노―미꼬도>는 <다까―마가―하라>에서 그 지배자인 누이 <아마―데라스―오―미가미>를 노엽게 하는 폭행을 많이 하였다. 그의 누이는 이를 보기 싫다 하여 굴 속에 들어가 숨어버리니 천지가 어두워지고 밤낮도 없어지게 되었다. 이리하여 여러신(八十諸神)들은 그 굴앞에 모여 큰 굿을 벌여 <아마―데라스―오―미가미>가 나오도록 하고 <스사노―오노―미꼬도>에게는 형벌을 가하여 쫓아 버렸다.
이리하여 <스사너―오노―미꼬도>는 하늘로부터 이즈모 국 히노가와( 之川)강변에 내리였다. 때에 강변에서 우는 소리가 들리므로 그 소리를 따라 찾아가니 어떤 늙은 아비와 늙은 어미가 한 어린 딸을 앞에 놓고 그를 쓰다듭으면서 울고 있었다.
《<스사노―오노―미꼬도>는 “너희들은 누구며 무엇 때문에 이렇게 우는가?”라고 물었다. 대답하길 “우리는 지방신(國神)들이다. 이금은 <아시―나쯔시(脚摩●)>요 나의 처 이름은 <데―나쯔시(手摩●)>다. 이 계집아이는 우리 자식인데 이름은 <구시―이나다―히메(奇 稻田●)>다. 우는 까닭은 지난날 우리에게 여덟 명의 계집하이 자식이 있었는데 해마다 <야마다노―오로찌(八岐大蛇)>에게 먹혔고 이제 이 계집아이도 먹힐 때가 되었는데 화를 면할 도리가 없어 이를 슬퍼함이라”고 하였다.
<스사노―오노―미꼬도>는 말하기를 “그렇다면 너희들은 그 계집아이를 나에게 바치겠는가?”라고 하니 “명령대로 하겠다”고 대답하였다.》
이리하여 <스사노―오노―미꼬도>는 그 자리에서 <구시―이나다―히메>를 <유쯔쯔마(湯津爪)>의 빗(櫛)으로 변하게 해서 상투에 꽂고 <아시―나쯔지>와 <데―나쯔지>를 시켜서 여덟 번 고은 술과 여덟 간의 평상을 만들게 하여 한 간에 한 통씩 술을 가득 담아 기다리게 하였다.
때가 되니 과연 오로찌가 나타났는데 대가리와 꽁지가 각각 여덟 가닥이요, 눈알은 붉은 <가가찌(酸醬)>와 같았고 등에는 소나무 잣나무가 났으며 길이는 여덟 언덕과 여덟 골짜기에 뻗히였다. 와서 술이 있음을 보자 대가리 하나씩 한 통에 박고 마신 후에 취하여 잠이 들었다. 이 때<스사노―오노―미꼬도>는 차고 있던 열 줌의 칼을 뽑아 그 오로찌를 동강동강 잘랐더니 그 꼬리에 이르러 칼날이 뾰죽이 나왔다. 때문에 그 꼬리를 쪼개어 보니 그 속에 한 칼이 있었으니 이것이 소위 <구사나기노―쯔루기(草 劍)>라는 것이다.
《<스사노―오노―미꼬도>는 “이것은 신검(神劍)이다. 내가 어찌 이를 마음대로 제 것으로 만들겠는가”라고 하고 이어 천신(天神)에게 바쳤다.
그런 후에 혼례를 지잴 장소를 구하여 드디어 이즈모의 스가(淸地:선선한 곳이라는 뜻)에 이르렀다. 여기서 소리치기를 “이 내 마음이 선선하도다.”그런즉 “여기에 대궐을 짓자.”라고 하고 서로 혼인하여 아들 <오―나무찌>신을 낳았다. 이어 선포하기를 “내 아들의 궁전에 주관자는 아시―나쯔지와 데―나쯔지다”라고 하고 두 신에게 이름을 주어 <이나다노―미야―누시(稻田宮主)>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스사노―오노―미꼬도>는 드디어 <네노구니>로 갔다.
이상이 『일본서기』본문에 나타난 이즈모 신화의 줄거리이며, <히노가와>강변으로 내려왔다는 데서부터 그 이하는 본문 기사를 글자그대로 번역한 것이다. 『고사기』에 실린 이즈모 신화의 줄거리도 이상 『일본서기』본문 서술과 거의 다른 것이 없다. 『일본서기』본문에서는 여기서 이즈모 신화는 알단 끝났다가 제 1절에서는 본 <천강>신화로 넘어가 그 안에서 <스사노―오노―미꼬도>의 자손이 <천손>을 위하여 자리를 피하는 이야기로 연결된다. <오―나무찌>신 이야기가 그것이다.
개벽 신화 중에 포함된 이즈모 신화를 본문 서술에서는 이상과 같은 줄거리로 서술하고 있으나 동시에 『일본서기』는 6개의 「일서」기사를 들었다. 그것들은 다 조금씩 다르게 되어 있다. 그 중 제 3의 「일서」에서는 <스사노―오노―미꼬도>가 <오로찌>칼로 쳐서 자를 때에 나타난 칼을 <오로찌>의 <가라사비노―쯔루기(韓鋤之劍)>라고 했고 이 칼은 “지금 기비의 가무베가 가지고 있으며(今在吉備神部許也)”“그 곳은 이즈모의 히노―가와가미 산이다.(出雲 之川上山是也)”라고 하였다.
제 4의 「일서」에서는 <스사노―오노―미꼬도>가 여러 신들에게 쫓기여 그 아들 <이소―다께루(五十猛神)>를 데리고 신라국으로 내려가서 <소시모리>라는 곳에 살다가 이 곳에 살고 싶지 않다고 선포하고 진흙으로 배를 빚어 만들어 그것을 타고 동쪽으로 건너와서 이즈모의 <히노―가와가미>에 있는 <도리가미>봉우리에 내렸다고 하였다.
다음에 오로찌 이야기가 있고 마지막에 <이소―다께루>가 <천강>할 때에 씨앗을 많이 가지고 왔었는데그는 그것들을 <가라구니>에는 심지 않고 큐슈섬으로부터 <오―야시마(大八洲:나중의 일본)>에 심어서 푸른산이 되게 하였으므로 그는 공로가 있는 신으로서ㅓ <기이(紀伊:와까야마 현)>에 앉아 있는 신으로 되었다는 이야기를 붙였다.
제 5의 「일서」에서는 <스사노―오노―미꼬도>와 <가라구니>와의 연계를 말하고 있다. 그는 “가라구니라는 곳은 금은이 있는 곳이다. 만약 나의 자손이 다스리는 나라에 배가 없으면 좋지 못할 것이다.(韓鄕之嶋是有金銀 若使吾兒所御之國不有浮寶者 未是佳也)”라 하고 그의 몸 여러 곳의 털을 뽑아 좋은 재목이 되게 하였고, 그의 자손은 그 나무 씨를 가지고 <기이국(와까야마 현)>으로 가서 퍼뜨렸고 그 자신은 <네노구니>로 들어갔다고 하였다.
제 6의 「일서」의 서술은 제 1절에서 본 이즈모 신들에 대하여 비교적 자세한 설명을 주고 있다. 원문대로 보는 것이 당시의 일본 땅의 형편과 그 곳과 한국과의 관계를 알아보는 데는 오히려 좋다.
《<오―구니―누시노―가미(大國主神))>는 일명 <오―모노―누시노―가미(大物主神)> <구니쯔구리―오―나무찌노―미꼬도(國作大己貴命)> <아시하라노―시꼬오(葦原醜男)> <야찌호꼬노―가미(八千戈神)> <오―구니―다마노―가미(大國玉神)> <우쯔시―구니―다마노―가미(顯國玉神)>라고도 한다. 그 아들은 무릇 181(개) 신이다.
이 <오―나무찌>신은 <스꾸나―히꼬나노―미꼬도(少彦名命)>와 같이 힘을 합하여 한 마음으로 천하를 경영하였다. 만백성과 가축을 위하여 병 치료 방법을 정하였고, 짐승과 곤충의 재난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금압(禁壓)의 방법을 정하였다. 이로써 백성들은 오늘에 이르도록 모두 그 은혜를 입고 있다. 옛날에 <오―나무찌고―미꼬도>는 <스꾸나―히꼬나노―미꼬도>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만든 나라가 잘 되었다고 하겠는가?”라고 하니 <스꾸나―히꼬나노―미꼬도> 는 대답하기를 “잘된 데도 있고 잘못된 데도 있다.”이 말에는 깊은 뜻이 있다. 그 후 <스꾸나―이꼬나노―미꼬도>는 길을 떠나 구마노(熊野:이즈모 지방―필자)의 미사끼에 이르렀고 드디어는 <도꼬요노―구니(常世鄕)>로도 갔다. 일설에는 아와시마로 갔다가 이와가라()를 따라 건너서 <도꼬요노―구니>에 이르렀다고 한다.(亦曰至淡島而綠粟莖者則彈●而至世鄕矣).
이 때부터 나라 안에 아직 잘 되지 않은 곳은 <오―나무찌> 신이 혼자서 돌아다니면서 만들었고, 드디어 이즈모 국에 이르러서 선포하기를 “저 <아시하라노―나가쯔―구니>는 본래 황망(荒芒)한 곳으로 돌과 초목까지도 모두 거칠었으나(强暴) 내가 이미 꺾어 눕혔기에 순종하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이제 이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나의 한 몸뿐이다. 나와 함께 천하를 같이 다스릴 자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 때에 거룩한 빛이 바다를 비치더니 홀현히 떠오는 자가 있었다. “만약 내가 아니면 네가 어찌 능히 이 나라를 다스려 스려 `T는가? 내가 있기에 네가 큰 사업을 할 수가 있었다.”라고 그 자는 말하였다.
<오―나무찌>신이 “그러면 너는 누구냐”라고 물었다. 그는 대답하였다.
“나는 너의 사끼다마, 구시다마(辛魂奇魂)다.”
<오―나무찌>신은 “그런가, 이제야 네가 나의 ‘사끼다마, 구시다인’인 줄을 알았다. 이제 어데 살고자 하는가?”라고 물으니 “나는 <야마도 구니(日本國)>의 미모로(三諸) 산에 살고 싶다.”고 대답하였다. 때문에 즉시로 그 곳에 궁실을 지어 거기 살게 하였다.…
처음에 <오―나무찌>신이 나라를 다스릴 때에 이즈모 국 이사사(五十狹狹)의 갯가에 이르러 음식을 먹으려 했을 때 해상으로부터 홀연히 사람 소리가 나므로 놀래어 찾아보아도 아무 것도 없었다. 좀 있다가 한 작은 사나이가 백렴피(白 皮)로 배를 만들어 까치 날개로 옷을 해입고 조수(潮水)를 따라 떠왔다. <오―나무찌>신은 곧 잡아다가 손바닥에 놓고 가지고 놀았더니 뛰어들어 그 뺌을 물었다. 그 꼴이 이상하므로 사신을 보내어 천신(天神)에게 아뢰었더니 이 때에 <다까―미무스비노―미꼬도>는 이를 듣고 “내가 낳은 아이가 모두 1천 5백 좌(座:신을 계산하는 단위, 일본말로 하시라―필자)인데 그 중에 한 아이가 가장 나쁘고 교양에 순종치 않더니 손가락 사이로 빠져 떨어졌는데 반드시 그것일 것이다. 사랑하고 잘 길러라”라고 하였다. 이것이 즉 <스꾸나―이꼬노―미꼬도>다.>
이즈모 신화는 이상 『일본서기』본문만 가지고서는 『고사기』에 실린 것과 함께 한국 관계기사라고 찍어 말하기는 힘들게 되어 있으나 「일서」들의 기사와 연결시켜 종합적으로 볼 때에는 한국 관계 내용을 많이 포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앞서 지적한 바도 있었지마는 이즈모 신화의 첫머리는 제 1절의 <천손 강림>보다도 앞선 일로서 서술되어 있는 만큼 한국 관계 기사로서는 일본 고문헌에서도 첫 기사라고 할 수 있닸다.그리고 본문과 「일서」의 내용을 대비할 때에 <천손강림>신화에서 볼 수 있었던 바와 같이 『일본서기』편찬자의 버릇을 여기서도 발견한다. 그것은 이즈모 신화도 어떻게 하던지 한국과는 관계없는 것으로 만들려는, 한국으로부터 그 어떤 힘의 작용에 대하여 이를 부정해 보려는 시도이다.
이즈모 신화에는 한국 관계 기사로서 「일서」들에가도 빠뜨려 놓은 것이 있으니 그것은 『이즈모 국 풍토기』 오우(意宇)군(고호리) 조에 실린 다음과 같은 기사다.
《오우라고 하는 까닭은 나라를 끌어당긴(國引) <야쯔까―미즈오미노―쯔노노―미꼬도(八束 水臣津野命)>가 말하기를 “이즈모라는 나라는 좁고도 어린 나라로구나. 당초에 나라가 작게 만들어졌도다. 때문에 기워 보태보자.”라고 말하고 “다까후스마(회다는 뜻의<형용구>―필자) 시라기에는 미사끼라는 땅(나라)의 남음(餘:여분)이 있는가 보니 (과연)남음이 있도다”라고 말하고 동녀(童女)의 앞가슴처럼 날이 넒은 호미(鋤:스끼)로 쫙 찍어서 뚝 잡아 때어 석 줄로 꼬은 튼튼한 밧줄을 걸어 감아 당기는데 슬슬 “땅이 온다, 땅이 온다”고 하면서 끌어다가 기워 붙인 나라가 고즈(去豆)의 우묵 들어간 데로부터 기즈끼(支豆支), 미사끼(御崎)(까지)다. 이렇듯 단단히 박아둔 말뚝은 이와미(石見) 국과 이즈모 국의 경계에 있는 사히메(在比賣) 산이 그것이다. 》
이 밖에도 같은 식으로 사끼(在岐), 누나미(農波), 고시(高志)라고 하는 ‘구니’로부터부터조 땅을 떼다가 붙였기에 이즈모가 큰 <나라>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하였다. 신라(시라기)로부터 떼다 붙인 이야기가 첫 자리에 놓여 있음은 주목할 만하고, 이 이야기가 『일본서기』의 여섯 개「일서」들에도 없다는 것은 「일서」들도 한국관계 사실에 대하여 본문과 다름없이 되도록 부인하는 입장에서 서술되었음을 간취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여기의 주인공 <야쯔까―이즈오미노―쯔노도―미꼬도>는 『고사기』에는 이즈모 신화의 주인공인 <스사노―오노―미꼬도>의 4세 손으로, 제 1절의 <오―구니―누시노―미꼬도(大國主命)>의 조부로 되어 있는 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고의로 수록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나) 이즈모 신화에 반영된 신라세력
이즈모 신화는 이상에서 본 『일본서기』본문의 줄거리에 다시「일서」들의 기사를 종합해서 고찰해야 올은 해석을 내릴 수 있다.
이 신화의 주인동인 <스사노―오노―미꼬도>를 음양 두 신의 막내아들로 꾸며놓고 있으나 이는 또한 「일서」들과 결부해 보면 억지로 꾸며진 것이 곧 드러난다.
본문 기사에서는 <스시노―오노―미꼬도>가 활동하던 장소들도 매우 모호하게 되어 있다. 처음에 그는 <다까―마가―하라>에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다른데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것은 음양 두 신이 <다까―마가―하라>를 <아마―데라스―오―미가미>가 다스리는 곳으로 정해 주었다고 했기 때문에 그를 다른 데다 갖다 놓을 수가 없다고 해서 『일본서기』편찬자들의 솜씨로서는 처리해내지 못한 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그가 <다까―마가―하라>로 새삼스러이 다시 가서 그 누이를 만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 말에는 그리 구애될 필요가 없다고 본다 그 누이와 충돌해서 벌어진 사건의 장면은 한 마디로 말해서 이 신과 나중에 야마도 지방의 비재자로 된 신들과는 대립적 관계에 있었다는 사실을 어렴풋하게나마 표현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신화의 이런 기본 정신의 한 측면은 나중에도 계속 다른 사건들로 발로된다.
중요한 문제는 우선 <스사노―오노―미꼬도>가 <다까―마가―하라>에서 오디로 갔느냐에 있다. 그는 <네노구리>라고 하는 곳을 목표로 하고 갔는데 먼저 이즈모 지방에 내리었다.
<다까―마가―하라>에서 <니니기노―미꼬도>가 <휴가>라고 하는 큐슈 섬 동부로 간 데 대하여 그는 이즈모 지방으로 직행했다. 한국으로부터 일본 열도에로의 항로 중에서 가장 동쪽에 있는 길을 택해 갔던 것이다. 이 신이 제 4의「일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신라와 연결되어 있는 것도 결코 우연치 않다. 여기서 그는 <다까―마가―하라>에서 이즈모 지방으로 직행하지 않고 신라에 들렸다가 그 곳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이즈모로 간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 <다까―마가―하라>→이즈모 직행이나 <다까―마가―하라>→신라→이즈모 행이나 결국 같은 말이다. 이즈모 신화의 경우에는 신라가 <다까―마가―하라>로 되어 있는 것이다.
<네노구니>는 또 무엇인가? 일본 학자들은 여러 가지로 해석한다. 『고사기』에는 <네노―가다스노―구니(根堅洲國)>라고 했고 <황천(黃泉)>의 나라, 땅 밑에 있는 나라, 또는 서북방 <유암(幽暗)>한 땅인 이즈모 국을 가리킨다고도 하며. 또는 이즈모 <국>의 오―네시마(大根島)라기도 하며 또는 <원방 외이(遠方 外夷)>의 땅으로 해설하는 사람도 있다. 아무튼 어두운 곳이요, 죽음의 나라요, 거치른 땅이라는 것이다. 이는 물론 야마도 지방에서 보아 그렇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이 경우에는 <다까』마가』하라>인 신라에서 보고 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아시하라>라는 황무지라는 말과 같은 말이며, 우리 동남 지역의 이부민들이 그들이 개척할 땅을 이렇게 불렀던 것으로 볼 것이다.
말을 가지고 시비를 걸 수도 있다. ‘네’라는 것은 일본말에 뿌리(根)또는 잠(寢)이라는 뜻으로 오늘도 쓰고 있다. 그리고 보면 동남 지방 사람들도 일본말과 같은 ‘네’라는 말을 썼을 것으로 되며 <아시하라>의 경우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당시의 우리 이주민들 뿐 아니라 한국의 주민들이 ‘네’나 <아시하라>등의 말을 반드시 그대로 썼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이런 말들이 옛날에는 한국말과 일본말과의 공통어일 수도 있고 일본말만일 수도 있다. 후자의 경우라도 이상과 같이 우리 이주민들이 신개척지를 그렇게 보았다고 해서 아무 모순될 것이 없다. 이주민들의 말로서는 ‘네’나 <아시하라>와는 다른 말로, 즉 한국말로 했더라도 이 신화가 후세에 일본 사람들의 것으로 되어 오는 동안에 일본말로 고쳐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서기』나 『고사기』같은 책에서는 한국말만 고친 것이 아니라 일본말도 고쳐졌으며, 지명만 고쳐진 것이 아니라 인명도 고쳐졌다. 천황이란 것도 예외로는 될 수 없었다. 그 이름만이 고쳐졌던 것이 아니라 순전히 조작된 것도 허다하다는 것을 상기하면 이상과 같은 약간한 개찬은 별로 이상할 것도 없다.
다음으로 주목할 것은 <스사노―오노―미꼬도>가 이즈모 지방에 당도하였을 때 거기에는 <야마다노―오로찌>와 그 압박을 받는 <데―나쯔지> <아시―나쯔지>가 이미 살고 있었다고 한 서술이다. 후자들은 이 지방의 이른바 국신(구니쯔―가미)이라고 하였다. 일본 고문헌들에서는 일반적으로 <아마>에서 내려온 신들을 <아마쯔―가미(天神)>라고 하고 그들 이전에 일본 땅에 살고 있었다는 신을 <구니쯔―가미(國神)>라고 하는데 신화시대 이야기이기 때문에 온통 신으로 되어 있으나 그것들을 모주 사람으로 고쳐 놓고 보면 원주민과 바다 건너서 온 이주민으로 된다. 많은 경우에 대체로 그렇게 보아 잘못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물론 모든 개별적인 경우를 다 그렇게 밀어서 말하지는 말아야 한다. <아시―나쯔지>나 <데―나쯔지>를 <구니쯔―가미>라고 했은 즉 이는 원주민이요, <스사노―오노―미꼬도>를 이주민이라고 치면 <야마다노―오로찌>는 또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아마쯔―가미>라고는 하지 않았으나 이주민으로 볼 근거가 있다.
이에 대하여 필자는 앞서 언급한 논문에서 어떤 일본 학자(中田熏)의 의견을 소개한 일이 있었다.
그에 의하면 <야마다노―오로찌> 즉 여덟마리, 여덟꼬리, 여덟가닥이 나고 여덟 개 산에 몸뚱이가 걸쳐 있다고 한 것은 그러한 넓은 산곡을 차지하고 있었던 한국식 산성을 말한 것이라고 하였다. <오로찌>는 일본말에 큰 뱀을 의미하였으니, 산의 능선을 타고 오르내리는 산성 벽의 모습이 멀리서 바라보면 뱀과 같아서 <오로찌>이야기로 되었다는 것이다. 동시에 <오로찌>라는 말은 한국말의 <어런치>즉 어른(大人)에서 유래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고 그는 입론하고 있다. 그 산성에서 여덟사람이거나 또는 여덟은 아니라도 몇 사람의 어른이 있어 그 곳을 다스렸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 착상은 타당하다고 본다. 앞의 장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산성 유지로서 오늘날 이즈모 지방에 남아 있다고 하는 것은 없다. 그러나 이즈모 신화는 한국 이주민들의 유력한 집단이 이 지방의 히노―가와 유역에 자리잡고 살았으며, 그들은 자신을 보위하는 수단으로서 산성을 구축했으며, 원주민들에 군림하여 그들을 억압하고 착취하였음을 시사하고 있다. 유적은 없다고 하더라도 일본 고문헌들을 통하여 기내 지방에도 있었겠다는 것을 앞서 말하였다. 그 가운데 앞서 쓴 『일본서기』에 있는 이부끼 산 산성의 <오로찌>는 『고사기』해당 조에 <시라이(白猪)>, 즉 <큰 뱀>이 <흰 돼지>으로 되어 있다. 이 <힌 돼지>을 일본 학자들은 ‘시라이’로 읽지 않고 굳이 ‘시라이’로 읽기도 하는데 그 까닭은 ‘시라’라는 말을 되도록 피하자는 데 있는 것 같다. ‘시라이’로 읽어서 <신라>의 ‘시라’와 통하게 하는 것이 원 뜻에 가까울 것이다. 우리 신라를 희다는 뜻의 ‘시라’에 갖다 붙여 읽는 실례는 일본 고문헌에서는 드물지 않다. ‘白’의 뜻의 ’시라’가 동시에 우리 신라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보면 <오로찌(뱀)>를 제멋대로 한자를 맞추어 <시라이(흰 돼지)>로 함부로 고쳤다고 했지만 거기에는 신라와 관련된 뜻이 담겨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현재 유지가 없으나 이곳에 있었던 옛 성이 신라 계통 이주민과 결부되어 있었음을 전하는 흥미있는 자료인 것이다.
이즈모 이야기로 돌아가자. 이 곳에 정착하여 산성을 구축한 이주민은 우리 나라의 동남지역, 즉 신라가 기원 3∼4세기 경에 이르러서 패권을 수립하게 되는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즉 진한(辰韓) 지역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처음에는 신라와 무관했었더라 하더라도 그 고국들이 신라에 의하여 통합됨에 따라 신라와도 일정한 연계를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이즈모 신화의 주인공이 제 4의 「일서」에서 신라의 <소시모리>로부터 이즈모 지방으로 갔다는 이야기도 마찬가지이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신라가 <소시모리>라는 지방까지도 통합한 큰 나라로 되었던 때의 이야기라기보다 그 전의 이야기였던 것이 이즈모 지방 이주민들이 신라가 큰 나라로 됨에 따라, 즉 그 고국들이 신라에 포함됨에 따라 이번에는 신라와 관련을 맺게 되었겠고 이로 인하여 종전에 신라가 아니었던 고국과의 관계도 처음부터 신라와의 관계로 서술되게 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일본서기』본문에 실린 이야기에서 <스사노―오노―미꼬도>가 여덟 마리의 <오로찌>를 ‘퇴치’했다는 것을 여덟사람의 어른들을 복종시민 것이라고 일본 학자는 입론하였다. 이즈모 지방에 있었던 8개<무리(마을)>를 통합한 한 개 <고호리>정도의 <소국>이 형성된 사실을 반영한 것이 아니면 이 이야기는 그러한 <소국>들을 여덟 개 정도나 통합 내지 연합시킨 상당히 큰 <소국>의 출현을 반영한 것으로 보는 편이 좋겠다고 본다.
이즈모 <국>의 ‘세력’이 비단 오늘의 이즈모 지방에 국한되지 않고 서부 일본의 동족부분의 넓은 지역을 차지하였다는 또 한 사람의 일본 학자의 주장을 들어보자, 즉 「조선 반도로부터 이즈모 민족의 도래(渡來)」라는 제목의 아래 그가 쓴 글은 다음과 같다.
《우리 야마도 민족이 이세(伊勢:미에 현) 지방에 세력을 부식하고 이 곳을 근거로 해서 차차 세력 범위를 확대하여고 했을 때를 당하여 이보다 앞서 이미 조선 지방으로부터 이즈모 민족이 건너와 있었던 것이다. 이 민족은 이즈모 지방을 근거로 해서 그 세력은 자못 성하였다. 『고사기』를 보아도 <스사노―오노―미꼬도>의 아들 <오―도시(大年)>신 또는 그의 자손인 신들의 이름이 적혀있고 그 수는 아주 많은 것이다. 또 같은 <오―구니―누시노―미꼬도>와 그 일족의 번창한 모급도 왕성했던 것이며 이즈모 민족의 세력이 위대했던 것은 『고사기』,『일본서기』를 비롯하여 『풍토기』 같은 것에서 역력히 알아낼 수있다. 그 세력은 산음(山陰:이즈모 지방에 위치한 쥬꼬꾸 산맥의 북쪽), 즉 북륙(北陸)지방에 미쳤고 남쪽은 산양도(山陽道: 산음의 남쪽, 세도 내해 연안)로부터 하리마(효고 현)를 복종시키고 다시 더 나아가서는 이세, 야마도 지방에서까지 그 세력을 뻗고 있었다.
여기에 이즈모 민족이 산음, 산양 지방에 걸쳐 있었다는 것은 『고사기』,『일본서기』에 의하여 명백한 것이지마는 더 나아가 그것이 이세 지방까지 미치고 있었다는 데 대하여는 다소 설명을 요하는 것이 있다.》
계속해서 그는 이즈모 <민족>의 세력이 이세 지방까지 벋혔던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이세국 풍토기(逸文)』에서 이가(伊賀:이세 북쪽의 지방국명)의 <고도시(事志)>라는 신사의 귀신(座神)이 “이즈모 신의 아들인 <이즈모―다께고노―미꼬도>, 일명은 <이세쯔―히꼬노―미꼬도>”라고 한 것과, 또 같은 『풍토기』에 “이세 국이란…<아메노―히와께노―미꼬도(天一別命)>가 칙(勅)을 받들고 동쪽으로 수백 리를 들어오니 그 마을에 신이 있었는데, 이름을 <이세쯔―히꼬(伊勢津彦)>라고 했다”고 하였는데 <이세쯔―히꼬>는 『하리마 국 풍토기』에 의하면 <이와노―오―가미(伊和大神)>의 아들이며 <이와노―오―가미>가 곧 <오―구니―누시노―미꼬도>라는 전거를 들었다.
이 학자의 주장에는 수긍할 점이 많다.
이즈모 지방으로부터의 세력이 어느 때이건 이만한 영역에 결쳐 있었다는 것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한국으로부터 간 이주민 계통이라는 것도 재론할 여지가 없다. 그리고 그 이주민들의 집단이 대체로 우리 동남 지역으로부터, 즉 나중에 신라 영역으로 되는 지역으로부터 간 것임은 앞서 말한 데서 명백해졌다고 생각한다.
다시 여기서 우리는 야요이 문화 유물의 하나인 동탁의 분포와 이 일본 학자가 주장한 이즈모 <민족>의 세력범위가 대체로 부합되는 사실에 대하여 주목을 돌려야 한다. 다만 시꼬꾸의 동쪽부분에서 발견되는 동탁 유적들의 분포지역이 그 ‘세력’범위에서 빠졌을 뿐이다. 이런 차이는 무시되어도 좋을 것이다.
이즈모 신화의 낱말들에는 고분 시대에 해당시킬 만한 것도 있고 앞서 쓴 <아메노―히와께노―미꼬도(『이세 국 풍토기 일문』의 이야기)>에 관한 서술은 초대 천황이라고 하는 <신무>와 관련된 것이다. 그리고 전기 일본학자가 그 ‘세력’범위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는 연대도 이 <신무>의 시기를 염두해 둔 것도 사실이다. 『일본서기』의 편년 체계에서는 <스사노―오노―미꼬도>와 그 자손인 <오―구니―누시노―미꼬도> 그리고 이 <신무>와의 사이에는 연대상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는 취할것이 못 된다. 그러므로 이즈모 신화의 첫 주인공인 <스사노―오노―미꼬도>에 관현된 이야기는 초기의 것이요, 그 후 이즈모 <국>의 세력 범위가 그렇게 넒어진 것은 그 후기에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고, 따라서 여덟 개 <오로찌>의 정복에서 보는 8개 <소국>을 통합내지 연합한 것은 <스사노―오노―미꼬도>의 사업으로 되어 있는 만큼 초기의 일로서 그것은 역시 이즈모 지방을 아직 벗어나지는 못하는 시기의 있었던 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큰 <소국>은 그 후, 즉 후기에 이르러 더욱 확대 발전하여 저와 같은 이즈모 지방의 점위를 벗어난 큰 국가 세력으로 장성하였던 것이다.
이 초기라는 것이 어느 때에 해당하며 후기는 어느 때까지겠는가? 후기의 ‘세력’범위가 동탁의 분포와 대체로 부합되는 만큼 적어도 후기가 야요이 시대의 동탁의 존재 시기에 먹어 들어가 있고 그 이후 고분 시대에 까지 걸쳐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보면 초기는 동탁이 존재하던 시기를 일정하게 포함하면서 그 상대는 소급될 수 있을 것이다.
요는 이즈모 신화의 연대는 추론컨대 야요이 시대의 처음부터 시작하여 고분시대츼 초기까지를 포괄하는 기간일 것이며, 그간에 일어났던 한국 동남 지역으로부터의 계통적인 이주민의 내착과 그들 세력의 확대 발전에 대하여 전하여 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음으로 『일본서기』본문 기사에서는 전하지 않는 한국과 이 지방과의 관계, 그리고 이즈모 국의 확대 발전에 관한 사실들은 「일서」들과 그 곳 『풍토기』가 전하는 것이다.
제 3의 「일서」에서 <스사노―오노―미꼬도>가 <오로찌>를 죽일때에 쓴 칼을 <오로찌노―가라사비노―쯔루기>라고 한 것부터 한국과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以蛇韓鋤之劍斬頭斬腹…”으로 표기하였다. 우리말로 고쳐보면 <오로찌>의 <가라사비>의 칼을 가지고 머리를 베고 배를 가르고 했다는 것이다. <오로찌>의 <가라사비>에 대하여 『일본서기』의 주석자는 칼의 모양이 <가라스끼(韓鋤)>와 같았기 때문이라고 한 옛 사람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鋤’는 우리말로는 호미‘서’자요, 우리 호미와는 달리 오늘 일본의 <스끼>는 자루가 길어 거거 김을 맬 수 있는 것이다. 현대 일본말에서는 <사비>라고 하지 않는다. <가라>는 후세 일본말로서, 한국전체 또는 외국일반을 가리키는 말이나 원래는 우리 가락국을 가리키던 말이다. 가라는 『고사기』나 『일본서기』에서는 신라나 백제 같은 나라와 혼동하기도 하고 한국전체를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한다. 여기의 <가라사비>의 <가라>는 신라와 혼동한 경우에 속할 것이다. <사비>는 오늘 우리말의 <삽>과 오히려 통하나 우연적인 합치로 볼 수 있고, 또 삽 같이 생긴 칼이라고 해서는 잘 맞지 않는다. 아무튼 신라제 또는 한국제의 이기(利器)로 후려쳐서 대가리도 자르고 배도 갈랐다고 말하고 있다. <오로찌>가 <가라사비> 위에 붙어 있는 것은 오로찌=어른=<大人>으로 해석하면 통한다. 대체로 우두머리들이 차고 다니는 한국 칼 또는 우두머리들이 가지고 다니는 한국의 이기라는 정도의 뜻을 나타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칼이 지금 기비 지방 가무제(神部)에 있다고 한 데 대하여 주석자는 비젠 <국> 아까사까(赤坂)군 이소가미(石上)에 있는 후쯔노―다마(布都之魂]) 신사라고 하였다. 이즈모 지방에서 쥬고꾸 산맥을 넘어서면 그 곳이 바로 비젠 국이다. 이즈모 국의 세력이 그 곳까지 확대되었던 것을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제 4의 「일서」에 기이 국(와까야마 현)에서 제사하는 신의 이야기도 마침내는 그 곳까지 세력이 미쳤다는 것을 암시한다.
제 4의 「일서」에서 <소사노―오노―미꼬도>가 <다까―마가―하라>에서 신라국의 <소시모리>에 살다가 이즈모로 건너갔다는 소시모리에 대하여 일본학자들은 <소시모리>=소 머리=<牛頭>로 해석하여 우리 강원도 춘천의 옛 이름인 우두주(牛頭州)와 많이 연결시킨다.
『동국여지승람』에 <우두>가 들어 있는 지명은 춘천의 <우두주>만이 아니라 경남 거창(居昌)에도 <우두산(山)>이 있고 경북 예천(禮泉)에도 <우두산>이 있다. 여기 실리지 않은 작은 지명으로서 <우두:소머리, 쇠머리>따위는 오늘날에도 적지 않게 이 지대에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소시모리>또는 <쇠머리>라고 불렀을 그런 고장에서 이즈모 지방으로 이주민이 건너갔던 것일 것이다.
제 4의 「일서」에 진흙(埴土)으로 빚은 배를 몰고 갔다는 것은 배에 칠한 도료를 말할 것이다. <도리가마>봉우리라는 것은 얼핏생각해도 우리 경주의 토함산(吐含山)의 ‘토함’과 음이 비슷하다. 양자간의 천연관계를 생각할 수 있다. 나무 씨를 <가라구니>에 심지 않고 일본 땅에만 심었다는 이야기는 우리 땅보다 더 덥고 습기가 많아 나무가 더 많았다는 사실을 전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제 5의 「일서」에서 좋은 나무로 배를 만들었다는 것은 이즈모에서도 배를 만들어 한국으로 왕래하였다는 사실을 전한다.
고국과의 왕래에 관한 사실은 <스사노―오노―미꼬도>가 이즈모로 갔을때에 벌써 그 곳에는 산성을 쌓고 사는 이주민들이 있었다는 데서도 엿볼수 있다. 제4, 제5「일서」들의 배 이야기들도 그것이며 제 6의 <스꾸나―히꼬나노―미꼬도>가 작은 배를 타고 이즈모로 왔다는 것도 같은 이야기다. 그가 <도요꼬(常世)>의 <구니(나라)>로 다녔다는 것도 결국 한국으로 다녔다는 것이다. <도요꼬>의 나라를 어떤 『일본서기』의 주석자는 왜국을 말한다고 했고, 어떤 『고사기』의 주석자는 <스사노―오노―미꼬도>가 신라에 건너간 전설등(사실은 신라에서 일본으로 건너갔는데 일본사람들은 과거에 많이 이를 거꾸로 말함으로써 진실을 왜곡했다.―필자)을 생각하면 이 도꼬요의 나라는 한국을 가리킨 것 같기도 하다 라고 말한 것도 있다. <스꾸나―히꼬나노―미꼬도>의 아들 <오―구니―누시>신과 대조적으로 그 보좌역으로 묘사하려는 소박한 수법에서 나온 것이다. <대(大)>에 대한 <소(小)>를 그렇게 묘사한 것에 불과하다.
이즈모 국은 한국으로부터 건너간 사람이 국주, 즉 왕자(王者)로 군림하였으며, 한국으로부터 건너갔다고 또 다시 건너오기도 하는 사람이 그 나라를 만드는 데 보좌역을 맡아 한 것으로 『일본서기』제 6의 「일서」는 서술하고 있다. 여기서 <사끼다마> <구시다마>는 <스꾸나―히꼬나>에 대한 보좌역으로 되어 있으며 그들도 빛을 뿌리면서 바다를 건너온 사람들이라 하였다.
이즈모 지방에서 바다 건너편에는 우리나라의 동남각(角) 밖에는 없다. 그들이 살고자 했다는 <미무로> 산을 『일본서기』주석자는 야마도 지방의 <미와(三輪)>산이라고 하였다. 이 말이 옳다면 이 지방도 후기에 이르러 이즈모의 세력 범위에 한 때 포함되었다면 야마도는 당연히 그 안에 포함된다.
『풍토기』의 전설은 이즈모 국이 바로 우리 나라의 동남 지역 이주민들이 세운 나라이며 동시에 그 곳이 일정한 시기에는 신라의 한 작은 나라로서 존재했다는 사실을 잘 말하여 준다. 전설에서 이즈모는 신라에서 남는 땅을 떼다가 붙여서 만든 나라라는 것이요, 이 전설에서 나타난 훌륭한 문학적 표현들(일본 고문장의 체제로는 상당히 재미나고 아름답게 되어있다)은 이 이야기가 오랫동안 민간에서 전승되어 왔음을 말하는 것이다. 일본 열도의 다른 곳으로부터 떼 왔다는 이야기가 생긴 후에 붙은 것으로 해석된다. 문장의 다른 표현들은 거의 꼭 같고, 같은 말을 되풀이하면서 지명만 다른 것으로 바꾸어 놓고 있는 것으로도 곧 그렇게 짐작할 수 있다.
이즈모 <국>의 세력 범위가 넓었던 것은 이상에서 보았지마는 제 6의 「일서」첫머리에 <오―구니―누시> 신의 아들이 181명이 있다고 한 데서와 <오―구니―누시>라고 하는 그의 이름 자체에서 이 나라의 세력이 강대했다는 것도 짐작할 수 있다. 이 <오―구니―누시>신은 『일본서기』이 제1 「일서」에는 <스사노―오노―미꼬도>의 5대 손으로 되어 있고 『고사기』에는 6대 손으로 되어있다. 몇 대 손이건 큰 문제는 아니며 앞서 쓴바 제 6의 「일서」에 실려 있는 그의 많은 별명과 함께 <오―구니―누시>라는 이름도 구체적인 실제 인물의 이름이 아니라 후세 사람들이 이 나라의 왕자에 대하여 <큰 나랏님>으로 불러 왔다는 사실을 전할 뿐이다.
이 나라는 문자로 기록된 역사를 남기지 못하고 민간에 전승되는 전설만을 남겼고, 그 전설은 후세에 문헌작성자들에 의하여 많은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많은 것이 오히려 전체가 안개속에 싸여서 걷잡기가 힘들게 되어 있는 형편이다. 그러나 <스사노―오노―미꼬도>이야기에 반영된 초기의 이주민 정착 시기로부터 일정한 시기가 지난 <오―구니―누시노―미꼬도>이야기가 나오는 사실들이 있었던 시기에 이르러서는 상당히 커진 이 나라는 과학적 의미에서도 국가로 바아도 괜찮으리만큼 발전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즈모로부터 기이, 이세에 이르는 영역에 결쳐 강대한 정치 세력이 존재했던 것이 사실인 이상 이 력을 과학적 의미에서 국가로 보아도 잘못은 없을 것이다. 고고학적 편년 체계에 따른다면 이 시기는 야요이 시대 후기 내지는 고분 시대 초기일 것이다. 이 나라가 얼마동안 존속되었는지는 아직 오리무중이다. 그러나 많은 전변을 겪으면서도 이즈모 중심으로 형성된 이 나라, 정확하게 말하면 그 국가 세력으로서의 밑뿌리는 오랫동안 존재했을 것만도 사실이다. 큐슈에는 비미호여왕국이 존립했었고, 그의 왕조는 망했다 하더라도 그 후 그 곳에 국가 세력은 오랫동안 계속 존속하였다. 사정은 어디서나 비슷했을 것이다. 일본 학자들의 글발에서는 야마도 지방에 국가 세력이 생겨나면 다른 지방의 이런 세력들은 안개처럼 사라지는 듯이 말하지마는 그럴 수 없는 것이다. 이즈모 지방 일대의 이런 세력은 오히려 야마도 지방에 국가가 성립하기 전부터 존재했으며 그 후에도 계속 이와 대립하는 세력으로서 존재했다고 보아야 한다.
다) 소위 천강신화와 이즈모 신화에 반영된 양대 한국 계통 세력
여기서 제 1절 <전손 강림>신화에 나오는 이즈모 신화 관계 서술의 검토로 넘어가자.
<천손 강림>이 있기 전 <후쯔―누시>신과 <다께―미까쯔지> 신이 이즈모로 와서 자리를 피하라고 했을 때 <오―나무찌> 즉 이즈모 신화의 <오―구니―누시>신은 아들과 상의하여 피하겠다고 하고 무대에서 사라지듯 없어졌고, 이라하여 <천손>이 <강림>할 전재 존건이 마련되었다고 하였는데 <강림>한 곳은 동부 큐슈 휴가 지방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이즈모 국가>는 아주 없어진 것으로 생각한다면 잘못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이즈모 중심이 국가 세력과 동부 큐슈 중심의 국가 세력간의 첫 충돌로 볼수 있지 않는가? 그렇다면 이는 앞으로 큐슈 세력이 소위 <신무 천황>의 <동정>이라고 하는 큐슈로부터의 본격적인 <원정(遠征)>이 있게 될 전제일 것이다. 그러나 이에 앞선 양대 세력의 첫 절충은 이즈모 <국주>의 피신에서 보는 바와 같이 평화적인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런 절충과 문제 해결이 평화적으로 되었다는 것은 조작된 이야기일 것이다. 이즈모에 자리잡았던 일정한 세력이, 그것도 강대했던 세력이 일시에 ‘평화적’으로 다른 세력에 의하여 없어질 수는 없다. 나중에 큐슈로부터 <원정>을 수행한 세력이 이세 지방으로 해서 야마도 지방으로 들어가 마침내 거기서 강대한 세력으로 되었을 때에도 이즈모 세력은 곧 없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여러 가지 사건을 통하여 보게 된다. 첫 절충이나 나중 절충이나 두 세력간의 충돌은 불가피했을 것이다. 야마도 정권이 출현했다고 해서 대번에 모든 것이 야마도를 중심 세력으로 해서 그것에 두말없이 순종하게 되었다고 보는 것은 사실 말이 안 되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즈모의 강대한 세력에 대하여 말하던, 앞서 소개한 일본학자도 여기에 이르러서는 성급하게 야마도 중심론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이와 같이 해서 이즈모 민족의 세력이 이미 뻗어 있었던 이세 지방에 새로 생긴 애마도 민족이 옮겨 들어왔다. 이에 양 민족간에 출동을 일으켰다. 양자간에 교섭은 상당히 장기간에 걸쳐 계속되고 있었다고 생각되며, 그 상태는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신화로 되어 전해지고 있가. 그 결과는 이즈모 족의 <다께―미나가다(建御名方)>신은 천손 민족(야마도 민족―필자)인 <다께―미까쯔지노―미꼬도(建御雷神)>와 싸워 패전하여 시나노)科野) 국의 주우해(州羽海)로 도망쳤다는 전설은, 즉 이 양 민족의 전투라는 사실을 설화로 전하는 것이다, 이즈모 민족은 천손 민족에게 항복하여 그 영토는 야마도 민족에게 병합되어…이른바 천손 강림으로 되는 것이다.》
야마도 민족이라고 하는 <천손 민족>에 대하여 그가 하늘에서 떨어진 것처럼 만들어 놓고 있는 서술부분만 제껴 놓는다는 그는 기본적으로 사태를 옳게 묘사해 왔었다. 일껏 잘 말해 오다가 그는 <천손 강림>에 이르러 기내 야마도 중심론에 디울어지는 바람에 엉뚱한 결론으로 떨어지고 말았다고 보여진다. <천손>이 <강림>하자 그 동안 ‘장 기간’의 <교섭>을 가졌던 양 <민족>은 이즈모 <민족>의 <일패도지(一敗塗地)>로써 천하는 야마도 <민족>의 것으로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즈모 <민족>의 역사는 <천손 강림>까지만 있고 그 후는 없다는 것이다. 일본 고문헌들에 그렇게 꾸며져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일본에는 기내 야마도의 유일 왕조 밖에는 있을 수 없다는 입장에서 역사를 위조한 자들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이런 서술 체계가 비논리적인 한 이즈모 <민족>이 <천손 강림>과 <신무 동정>후에도 자기의 독자적인 세력을, 비록 그 영역에는 변화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또한 ‘상당한 장기간’보존하였다는 것이 논리적인 진실로 된다는 것도 명백하다.
앞서 쓴 일본학자는 이즈모와 야마도의 <민족>이라는 말로써 양대 국가 세력을 종족적으로 대립시켜 놓고 있으나 이에도 동조할 수 없다. 이즈모 국이나 큐슈에 형성된 국가 세력이나 나중에 기내 야마도 국가나 다 정도의 차이는 있었다고 하더라도 상당히 장기간 비슷한 한국적 성격을 띠었던 나라로 보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즈모 국이 확대 발전되었을 때 그 광대한 영역은 다시 말할 것도 없고 처음 자리잡았던 이즈모 지방까지도 한국으로부터의 이주민으로만 뒤덮었던 것으로 보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이주민은 결국 전반적으로 보아 이즈모에서도 원주민보다 소수였을 것이다. 그리고 원주민은 이주모 지방에서는 <아시―나쯔지> <데―나쯔지>처럼 한국 <오로찌>에게 짓눌려 살기도 하였겠으나 내내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마침내 그 나라에서 <미야노―쯔까사(宮首)>로 되었고 이나다(稻田) 신궁의 주신으로도 앉았다는 (『일본서기』본문 기사에서)만큼 통치 집단 내에서도 일정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일 관계의 측면에서 볼 때 가장 중요한 사실은 종족적 구성상으로 비록 이러한 복잡한 내용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이 나라가 나중에 야마도 왕정으로부터는 신라와 연결되어 있는 나라로 저들 자체의 한국적 성격과는 많이 다른 측면, 즉 고국에의 예속적 측면을 아주 농후하게 가진 나라로 보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기비 지방을 포함하는 이즈모 국가 세력이 <신무 동정>후에도 계속 남아 있어서 야마도 왕정과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였던 시기는 야요이 시기가 아니고 앞으로 보게 될 고분 시대에 속하며, 이 사실을 고분 유적들은 잘 증명하고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