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흔적.

본당 사도회(회장 정재민 스태파노)는 10월 13(토)일 부부동반 40명이
수립해 놓은 연간 계획에 의거 07시 성지순례를 위해 대구를 출발한다.
이른 시간이라 조금 쌀쌀하지만 성지순례 하기엔 더 없이 좋은 날이다.
중앙고속도로를 따라 영주 IC를 나오며 우곡성지를 가기 전 09시 15분
수덕자 홍유한 고택지를 들러본다. 입구를 들어서니 기와지붕의 초라한
고택이 자리하고 있으며 언제인진 모르지만 옛터에 다시 지은 것 같다.
그 옛날 힘들었을 삶을 보듬은 듯 초라한 모습이지만 앞 마당에 세워진
유적비가 그나마 아쉬움을 달래 주는 것 같다. 모두 유적비 앞에 모여
수덕자 홍유한의 고귀한 정신을 기리며 성모송을 바치고 10분간 고택을
둘러본 다음 09시 25분 우곡성지로 발길을 돌린다. 50여분 36번 도로를
달려 10시 20분께 우곡성지 주차장에 도착하니 우측 작은 계곡 건너로
13위 가묘와 현양비가 있다. 그 길을 지나치면 주님께서 굽어 보시며
두팔을 벌려 반겨 맞아주신다. 미사 시작까지는 아직 시간 여유가 있어
칠극의 길을 하나하나 둘러보고 나니 계곡 작은 도랑 건너로 고즈넉한
모습의 성당이 모습을 드러낸다. 성당 옆에는 큰 바위 아래에 성모자상
동산이 꾸며져 있어 돌아가며 멋진 모습들을 남기고 미사시간이 되어서
성당으로 들어가니 서울, 부산, 대구, 안동에서 200여명의 교우가 모여
성당은 발 디딜 틈도 없다. 주님을 가까이 하기 위해선 나쁜 모든 것을
버리고 마음을 깨끗이 하여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여야 한다는 신부님의
강론을 들으며 12시쯤 미사를 마치고 아래 식당으로 들어가니 1식 8찬의
맛깔난 뷔페 음식이 입맛을 사로잡는다. 식사 후 성당을 배경하여 인증 샷
남기고 13위 가묘와 현양비로 이동, 주모경 바치며 공식 일정을 마친다.
* 홍유한 고택.

한국 천주교회가 창립된 것이 1784년, 이보다 30여년 전에 이미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심신을 연마한 이가 바로 농은 홍유한이다. 비록 그가
물로 세례를 받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천주교를 단순히 신학문으로서가
아니라 천지만물의 이치를 밝히는 종교적 요소를 가지고 대했다는 점에서
스스로 신앙생활을 시작한 첫 인물로 꼽힌다. 경북 영주군 단산면 구구리
(옛지명:구고리)는 바로 그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이다. 그는 실학자 성호
이익의 문하에서 천주학을 처음 접한 뒤 바로 이곳에서 1775년부터 10년
간 학문을 통해 깨닫은 신앙 진리를 실천했다. 그는 유교와 불교에서 발견
하지 못한 천주교 진리를 깨달은 후부터 스스로 신앙생활을 시작해 '칠극'
에서 터득한 덕행을 쌓기 위해 7일마다 하루를 주일로 정해 세속의 일을
전폐하고 기도와 묵상에 전념했다. 나아가 욕정을 금하여 30세 이후에는
정절의 덕을 실천했으며, 금육일을 몰랐으므로 언제나 좋은 음식은 먹지
않는 것을 규칙으로 삼았다. 1785년 1월 30일(음) 60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10년 동안 철저하게 천주교 수덕 생활과 기도 생활에 전념하였다.
[출처] 안동교구_홍유한 고택지 [12-89]
유적비는 1995년 5월 교구 설정 25주년과 홍유한 선생 선종 210주년을
맞아 건립하였다.


성모송을 바치고 주변을 둘러본 뒤 성지순례 도장도 찍어본다.
* 우곡성지.

한국에 천주교회가 세워지기 전에 ‘칠극(七克)’에 의한 천주교 수계
생활을 28년간 행했던 한국 최초의 수덕자(修德者) 농은 홍유한(洪儒漢
1725~1785)의 묘가 있는 곳이다. 조선 정조 때의 인물 홍유한은 16세
부터 실학자 성호 이익(李瀷 1681~1763)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1750년경부터 이익 당시에는 기도책도 없고 축일표(祝日表)도 없었으나
7일마다 축일(주일)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어 경건하게 축일을 지켰고,
금육일을 알지 못했으므로 언제나 좋은 음식을 먹지 않았다 한다.
홍유한 후손 중에는 7명의 순교자가 있다. 1993년 10월 홍유한의 묘가
발견되었고, 1994년 3월 성지개발을 위해 안동교구 봉화성당에 성지
개발위원회가 발족되었으며, 1995년 묘 주변 임야를 매입한 후 묘지와
주변을 정비하여 성지로 조성하였다. 1998년 11월 사제관과 피정의 집,
2000년 10월 수련원이 건립되었으며 동상과 야외제대, 십자가의 길
14처 등이 조성되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우곡성지 [愚谷聖地] (두산백과)
- 칠극성당.

"칠극"은 스페인 출신 예수회 회원 판토하(1571~1618) 신부가 쓴 교리서로
1601년~1610년 사이에 북경에서 간행되었다. 한국 최초 수덕자 농은 홍유한
선생은 세례를 받지 못했지만 선종할 때까지 이 책을 하느님을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는 도구로 삼았다. 이책은 일곱가지 죄의 뿌리인 '칠죄종'을 이겨내고
하느님 나라로 향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교과서이니, 곧 '하늘에 닿아 있는
층계' (창세 28.12)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농은 홍유한 선생의 수덕생활을
기억하고 본받기 위해, 우곡성지의 이 성당을 칠극성당이라 이름한다.
2014년 11월 1일 모든 성인의 대축일에
천주교 안동교구 교구장 권혁주 요한크리소스토모 주교.
- 성지 입구 -

- 피정의 집을 지나고 -

사찰 입구처럼 누군가 정성껏 돌탑을 쌓아 놓았다.
힘든 짐을 나에게 맡기고, 나의 품에 안기라며 두 팔을 벌리고 계시는 예수님!

- 사제관 입구도 지나간다 -

- 칠극의 길 -

제1극 : 복오(교만을 억누르다)

제2극 : 평투(질투를 가라 앉히다)

제3극 : 해탐(탐욕을 품다)

제4극 : 식분(분노를 없앤다)

제5극 : 색도(탐을 내어 먹고 마시는 것을 막아내다)

제6극 : 방음(음란함을 막아내다)

제7극 : 책태(게으름을 채찍질하다)


- 성당 앞에서 -

- 성모자상 -




쪽진머리에 아기를 보듬어 안고 계시는 전형적인 한국 여인상이다.
- 미사 -

네곳에서 많은 신자가 모이다보니 아담한 성당 내부가 더 작아 보인다.
- 홍유한 동상(13위 가묘 및 현양비 입구) -

- 13위 가묘 및 현양비 -
홍유한 선생 가게 가운데 그 분의 뜻을 이어 피를 흘리며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들은 13명이나 된다. 이에 지금의 후손들은 선교 순교자들을 헌양
하고자 하나 각지에 흩어져 있는 선교 순교자들의 유적을 찾을 길 없어
고심하던 중, 선조인 홍유한 선생의 묘소가 있는 이곳에 13위 순교자를
함께 모실 것을 안동교구에 청하였고 교구는 이들의 신앙적 열성을 받아
들여 후손과 함께 교구 설정 40주년이 되는 2009년 5월 29일 13위 순교
선조들이 순교한 각 순교 터의 흙을 담아 숙교자 묘원을 조성하고, 비를
세워 현양하게 되었다.


현양비 앞에서 주모경을 바치고 가묘를 둘러본다.
* 풍력발전과 뒷풀이.




* 동해바다.


편안하고 분심 없는 성지순례를 위해 부족함 없이 철저히
준비해 주신 4간부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첫댓글 성지순례 일정을 자세히 올리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
권기창 즈카르야 기자님! 성지순례 여정 해설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