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서 ‘킴스비디오’는 지난 20여년간 이미 문화적 산실로 자리잡았다. 다양한 자선활동과 홍보지원 등으로 독립 영화인들의 튼튼한 버팀목이 되었던 ‘킴스비디오’ 김용만 대표가 최근 영화 <1/3>(One Third)을 뉴욕에서 개봉하며 장편 감독으로 데뷔했다.
뉴요커들에게 김 감독은 ‘킴스비디오’ 사장, 독립영화의 후원자 등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김 감독이 킴스비디오를 시작한 것도, 영화인들과 영화학도를 도와주는 것도 모두 영화에 대한 열정 때문이었다고. 50살이 넘은 나이에 장편영화 감독으로 데뷔했지만, 이미 김 감독은 7편의 단편을 만들며, 박철수 감독의 <학생부군신위>와 <301·302> 등 여러 작품을 제작 또는 배급하며, 킴스비디오를 통해 영화 관계자들과 인맥을 구축하며, 어쩌면 자신에게 가장 적절한 시기를 차분히 기다렸는지 모른다.
최근 인터뷰에서 ‘데뷔’라는 말에 어색함을 감추지 못하던 김 감독은 “감독 데뷔에 나이가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지 않냐”며 “내 안에 잠재된 감수성에 대한 욕구를 더이상 억제하기 힘들어” 데뷔를 결심했다고 했다. 여기에 한 가지 이유를 덧붙인다면 “이제 아이들을 다 키웠기 때문”이라고. 실제 90년대 중반 영화제작에 나섰고, 그동안 독립영화감독이나 제작자들을 지켜봐온 김 감독으로서 “가정적으로 무책임”할 수 있는 영화계에 뛰어들기가 그리 쉽지 않았던 것. “아이들 교육이나 감수성이 예민한 나이 때라 망설였다”는 김 감독은 “이제 자유로워졌고”, 내 자신의 욕구를 억제하기 힘든 나이와 시기를 맞았다고 했다.
이런 김 감독에게 자극을 준 것은 영화과 학생들. 킴스비디오의 이름으로 10여년간 컬럼비아대와 뉴욕대 대학원 영화제에서 작품을 선정, 장학금을 주고 있는 김 감독은 영화제에 참여한 학생 중 자신과 나이 차이가 크지 않은 40대 중반 이상의 학생들을 많이 접할 수 있었다. 또 다른 자극제는 한국의 이창동, 박광수, 박철수 등의 중견 감독들이라고. 단테의 <신곡>에서 영향을 받아 3부작으로 기획된 <1/3>은 <신곡>의 지옥편, 연옥편, 천국편 중 지옥편에 해당한다. 주인공 스님(이보 벨론)과 소녀 로투지아(다이애나 기텔맨)는 이스트 빌리지의 한 아파트에 사는 이웃이지만 전혀 다른 세상에 산다. 스님은 워싱턴스퀘어에서 사람들의 얼굴을 그려준다. 가톨릭 교복을 입고 다니는 로투지아는 손님들이 원하는 가학적인 행동을 모두 들어주는 매춘부다. 이 작품은 과거의 상처로 고뇌하며 타락해가는 로투지아와 이를 (관객처럼) 지켜보는 스님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이 캐릭터들의 상반된 모습을 “선과 악, 희망과 절망, 동양과 서양”으로 비유했고, “이제 시작일 뿐이다”며 캐릭터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 기대를 표현했다.
주인공 사이는 물론 영화 전반에 걸쳐 <1/3>에는 거의 대사가 없다. 실험영화적인 요소가 다분한 이 작품은 대사 대신 부드러운 선율에서부터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여러 악기들의 음이 섞인 기괴한 소리까지 다양한 음악과 배우들의 표정, 몸짓으로 채워졌다. 대사를 거의 없애고, 주인공간의 커뮤니케이션을 단절시킨 이유에 대해 김 감독은 “사람이 사람으로부터 멀어지고, 무관심해지는 것을 이처럼 답답함으로 표현, 지옥 같은 느낌을 주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10월6일 맨해튼 시티시네마스 빌리지이스트에서 개봉된 이 작품은 정식 배급사없이 ‘부킹 에이전트’와 시티시네마그룹 등을 통해 뉴욕에서 단독 개봉됐다. 그러나 대부분의 독립영화처럼 <1/3>은 박스오피스 기록을 깨는(?) 신기록을 세우진 못했다. 하지만 관객은 물론 <뉴욕타임스>와 <빌리지 보이스> 등의 평론가에게 호평을 받고 있으며, 라이온스게이트나 엔커베이 등 배급사로부터 러브콜을 받고 있다. “기대처럼 흥행이 잘되지는 않았지만 좋은 반응을 얻었고, 배급사와 케이블TV 등에서도 연락이 오고 있다”는 김 감독은 확대상영 여부를 타진하고 있다. “한국 관객에게도 (내 작품을) 꼭 보여주고 싶다”는 김 감독은 “한국 배급사도 찾고 있다”고 덧붙였다.
최근 3부작 중 두 번째 작품(천국편)의 초고를 마친 김 감독은 3개월 내 시나리오 작업을 마친 뒤 “독립영화에서는 변수가 많지만” 가능한 내년 가을쯤 촬영에 들어갈 예정이다. 한편 <1/3>의 오디션 당시 알려진 배우들도 에이전트를 통해 연락했지만 무명배우들로 캐스팅을 한 김 감독은 “모든 분야를 내 의도대로 만들 수 있는 순수 독립영화를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이 때문에 감독 외에도 1인7, 8역을 담당해야 했던 그는 킴스비디오를 통한 네트워크 덕에 작품을 완성할 수 있었다고 한다. 배우조합(SAG)의 협조로 게런티를 줄일 수 있었고, 스탭의 인건비와 특수효과, 음악 등에서도 그동안 맺은 친분으로 큰 도움을 받았다.
<1/3>으로 본격적인 작품 활동에 나선 김 감독에게 올해 21주년을 맞은 킴스비디오의 미래에 대해 물어봤다. “킴스비디오는 어떤 형식으로든 남아 있을 것”이라는 그는 “현재 킴스비디오의 멤버는 20만명이다. 킴스비디오는 이들은 물론 길게는 15∼20여년을 함께한 스탭(150여명)들의 소유”라고 말했다. “마지막 결정은 이들의 의견을 존중할 것”이라는 김 감독은 희귀한 작품들이 많은 킴스비디오의 라이브러리를 모두가 이용하고, 즐길 수 있는 곳에 기증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 김 감독은 5년 전 서울영상위원회에, 3년여 전 동국대에 각각 1400여개의 DVD와 비디오테이프를 기증했다. 4, 5개월 전에는 뉴욕대 (NYU Tisch)쪽에서 새로운 ‘미디어 라이브러리’ 건립 지원을 요청했다고. “킴스비디오가 소장했던 작품들이 학생과 교수, 관련 분야 종사자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어 기뻤다”는 김 감독은 “킴스비디오라는 이름이 이런 방법을 통해 영구히 갈 수 있으면 보람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