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말 2014년 초에 천만관객 영화 <변호인>으로 한국사회를 뜨겁게 달군 초짜감독 양우석. 그가 4년 만에 <강철비>를 가지고 영화판으로 돌아왔다. 1137만 관객을 불러 모은 <변호인>은 12월 18일 개봉됐고, 지난 12월 14일 개봉된 <강철비>는 440만 관객을 돌파했다. 신출내기 감독으로 스타덤에 오른 양우석이지만, 그에게는 깊은 울림과 역사의식이 느껴진다.
수구세력의 집요한 모욕주기로 삶의 마지막 줄을 놓아버린 열렬한 인간 노무현의 신산한 청춘과 변호사 시절을 회고하면서 당대를 성찰하도록 인도한 영화 <변호인>. 2012년에는 <광해, 왕이 된 남자>가 개봉되어 1232만의 관객을 동원한다. 이 두 편의 영화는 우리시대에 진정으로 필요한 최고 권력자는 어떠해야 하는가, 라는 공통의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임진왜란 직후의 조선군왕 광해의 권력과 21세기 대한민국의 대통령 노무현의 권력을 수평으로 상정할 수는 없다. 그러하되 최고 권력자와 지배집단의 통치이념과 역사의식, 대외관계 설정 같은 대목은 비교해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2012년-14년의 집권자들과 여당인 새누리당의 부패, 무능, 타락, 패거리주의를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여기까지만 말하자.
영화로 제작된 것은 <변호인>이 앞서지만 기획은 <강철비>가 먼저였다. 양우석은 포털사이트 ‘다음’에서 2011년부터 <스틸 레인>이라는 웹툰을 연재하여 천만 뷰를 기록한다. 만화가 ‘제피가루’ 김태건이 그림을 그리고, 양우석이 글을 담당한 웹툰 <스틸 레인>. 따라서 영화 <강철비>는 양우석 감독의 관점과 내면세계가 다각도로 담긴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스틸 레인 (Steel Rain) 혹은 강철비
‘스틸 레인’은 미국의 다연장 로켓포에서 발사하는 로켓포탄을 가리킨다. 집속탄(集束彈)이 폭발하면서 수만 발의 강철탄환이 흩뿌려지는 까닭에 '강철비'라 불린다. 1991년 미국과 이라크의 걸프전 당시 이것을 본 이라크군이 붙여준 별명이라고 전한다. ‘스틸 레인’은 살상반경이 너무 커서 세계 140개국 이상이 사용 금지협약을 맺은 대량살상 무기이기도 하다.
양우석은 ‘스틸 레인’의 한국어 번역인 <강철비>를 제목으로 삼았다. 왜 그런가?! 감독의 말을 들어보자.
“남과 북을 둘러싼 현재의 전체적인 정황이 어쩌면 우리가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다면, 언제든 무서운 상황으로 돌변할 수 있다는 것을 중의적(重意的)으로 이야기하고 싶었다.”
남과 북의 분단과 관계악화, 그로 인한 4대강국의 이해관계 충돌, 북한내부의 심각한 분열과 정변 (政變) 같은 상황을 미리 대비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하는 감독의 문제의식.
그는 기자 간담회에서 이보다 진척된 관점을 내비친다.
“<강철비> 프로젝트는 지난 2006년 1차 핵실험 이후에 시작했다. 1953년 휴전이후 남북전쟁의 위기가 몇 차례 있었지만 핵전쟁은 아니었다. 2006년 이후 한반도에서 전쟁이 난다면 핵전쟁일 가능성이 높아 그런 문제에 천착(穿鑿)하게 됐다. 북한과 북핵에 대한 우리사회의 인식은 정면으로 바라보기보다는 회피하는 것 같다. 영화를 통해 북한과 북핵, 우리 동포들과 남북 정치구조, 남북을 보는 주변국의 입장에 대해 공유하고 싶었다.”
상상의 전쟁과 남북 권력자
2017년 연말 북한 국무위원회 위원장 김정은과 트럼프의 가시 돋친 설전이 이어지면서 한반도에는 전운(戰雲)이 짙게 감돌았다. 2018년 1월 초하루 김정은이 신년사에서 ‘평창 올림픽’ 참가를 밝히면서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이 화해와 상생 분위기로 급변한다. 그럼에도 화천 산천어 축제에 수만의 인파가 몰리는 현상이 미국인들에게는 낯설게 보이는 모양이다.
지난 1월 7일 미국 ABC 방송사는 “북한 국경에서 몇 마일 떨어지지 않은 화천에서 수만의 한국인들이 얼음낚시를 즐긴다”고 보도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대중가요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는 축제 현장에서 북핵위기를 느끼지 못한 채 즐거워하는 한국인들의 행태가 미국인들에게는 기이한 듯하다. 그렇게 우리는 오랜 세월 ‘양치기 소년’처럼 길들여져 살아왔다.
우리 머릿속에 제2의 한국전쟁은 존재하지 않는다. 남과 북에 어떤 긴장과 위기상황이 발생한다 해도 전쟁은 결코 없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자 소망이다. 영화 <강철비>의 상상이 낯설고도 새로운 까닭이 거기 있다. 상상의 남북전쟁을 추동하는 것은 북한의 군부실세인 정찰총국장 리태한이다. 그는 최고 권력자 김정일의 직무유기를 묵인(黙認)할 수 없다.
리태한은 1995년부터 1998년까지 북한을 강타한 ‘고난의 행군’ 시기에도 핵개발을 멈추지 않은 권력자가 핵을 권력유지에만 사용해온 사실에 주목하고 군부 쿠데타를 도모한다. 그는 대를 이은 충성에 반대하고 스스로 권력을 장악하고자 한다. 감독의 상상력은 ‘북한에 정변이 발생한다면 누가 주역이고,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하는 지점까지 도달한다.
북한의 정전협정 폐기와 선전포고로 남한권부는 두 갈래로 갈라선다. 임기만료를 목전에 둔 현직 대통령은 일전불사(一戰不辭)를 외치고, 차기 대통령은 전쟁불가(戰爭不可)를 주장한다. 호전적이고 야만적인 북한을 궤멸시켜 민족사에 빛나는 이름을 새기려는 보수 대통령. 다수국민의 안위를 먼저 걱정하며 전쟁은 절대 없어야 한다는 역사의식으로 무장된 진보 당선자.
전쟁을 바라보는 미국과 중국
골칫거리이자 이중적인 행태를 보여 온 북한을 지도상에서 지워버리려는 한국의 대통령을 고무(鼓舞)하는 것은 미국 국무부다. 미국은 한국정부의 요청을 방패삼아 핵으로 북한을 선제공격함으로써 자국의 위상을 높이고 아시아의 맹주자리를 다질 요량이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미국은 자국민을 보호하고, 안전지대 일본으로 그들을 이송하는 계획을 촘촘히 실행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작계5027’은 낯설지 않다. 북한의 선제공격 같은 전시상황을 대비하려고 만들었다는 한미연합군의 ‘작계5027’. 그러나 작전권은 오직 미태평양사령부에게 귀속돼 있다. <강철비>에서 선제 핵공격을 미국에게 요청한 남한 대통령이 그것을 철회해달라고 하자 미 국무장관은 당신들이 요구했던 것이 ‘작계5027’ 아니냐고 반박한다. 대한민국의 전시작전통제권이 환수되고 한미연합사령부가 사라지면 ‘작전계획5027’ 역시 폐기될 것이다.
중국을 대표하는 외교부 고위인사로 등장하는 리선생은 본디 조선족이다. 곽철우가 그것을 말하자 리선생은 정색하며 자신은 어디까지나 중국인이라고 단언한다. 중국의 55개 소수민족 가운데 하나인 조선족 출신이기는 하지만, 자신은 오직 중국의 이익을 위해서 복무하는 사람임을 명확히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말한다. “막을 수만 있다면 이 전쟁, 막으시라요!”
영화 <남한산성>에서 정명수가 영의정 김류에게 일갈하는 대목과 사뭇 다르다. 조선의 노비 출신으로 청나라에 귀화하여 용골대의 하수이자 통역으로 일하는 정명수. “조선에서 노비가 사람 축에라도 낀답디까?! 난 더 이상 조선 사람이 아니오. 대 청국 사람이니 앞으로 그런 얘기는 일체 꺼내지도 마시오.”
청나라가 됐든 현대 중국이 됐든 그들의 제1차적인 목표는 자국의 방위와 안전이다. 남과 북의 화해와 통일에 관심 없다는 얘기다. 하지만 북에 군사정변 같은 특수상황이 발생하게 되면 그들은 원산만 이북지역의 통제권을 요구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668년부터 676년까지 신라가 감당해야 했던 대당전쟁의 결과로 획정된 당대 양국의 국경선을 연상해보시라.
남과 북의 사람들
<강철비>의 두 주인공 엄철우와 곽철우는 북의 최정예요원과 남의 외교안보수석이다. 두 사람은 닮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 한글이름은 같지만 한자로는 서로 다르다. 둘 다 40대 초반 나이로 국가 중대사에 연루되어 있다. 엄철우는 아내와 딸을 지극히 아끼고 사랑하는 가장(家長)이다. 곽철우는 ‘돌싱’으로 아이들을 좋아하지만 전처(前妻)와는 서먹한 사이다.
엄철우의 딸은 아버지 몰래 남한의 가수 ‘지드래곤’ 노래를 듣는다. 그가 대화중에 ‘지디’를 묻자 곽철우는 “알지. 걔 모르면 간첩이야.” 하고 답한다. 객석에 웃음이 퍼진다. 북한 최정예요원에게 ‘간첩’ 운운하는 남한 외교안보수석의 너스레가 영화의 팽팽한 긴장을 이완한다. 곽철우는 운전하면서 지드래곤의 노래 <삐딱하게>를 열창하면서 몸까지 흔들어댄다.
영화에서 흥미로운 장면은 산부인과 의사 권숙정이 112에 전화하는 대목이다. 그녀는 ‘북한1호’를 북한의 ‘대통령’이라고 부른다. 남한의 대표 지식인인 의사가 북한 최고 권력자의 공식호칭을 알지 못하는 남한사회. <강철비>에서 엄철우가 개성공단에서 동반한 여공 두 사람이 김정일을 ‘위원장 동지’나 ‘장군님‘으로 부를 때 권숙정은 얼마나 당혹스러웠을까?!
서울 왕십리에서 개성공단 입구까지 버스로 50분 남짓 걸린다. 그렇다면 경기도 파주에 위치한 산부인과와 휴전선까지는 얼마나 걸릴까. 그럼에도 절대다수 한국인들은 그걸 잊고 살아간다. 마치 휴전선이 없거나, 있다 해도 남의 일인 것처럼 생각한다. 분단의 엄혹한 현실도, 북한의 실정도, 분단상황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 것인지도 별로 염두에 두지 않는다.
분단으로 장사해먹고 사는 인간들
<강철비>에서 우리는 곽철우의 시각으로 양우석의 관점을 이해한다. 영화 초반에 외교안보수석 곽철우가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연하는 장면이 나온다. 2차 대전이후 분단된 도이칠란트와 한반도가 명징하게 대비된다. 전쟁을 일으킨 도이칠란트가 분단됐으면, 아시아에서는 당연히 일본이 분단되어야 했는데, 왜 우리가 분단된 거죠?! 억울하단 표정으로 그가 묻는다.
영화 중간에 곽철우는 엄철우에게 분단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명확하게 밝힌다.
“분단국가 국민들은 분단 자체보다 분단을 정치적 이득을 위해 이용하는 자들에 의하여 더 고통 받는다.”
엄철우는 곽철우의 이런 생각을 영화 말미에 고스란히 반복한다. 그것은 분단을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리저리 재단(裁斷)하고 이득을 취하는 남과 북 모두의 정치적 승냥이 무리를 겨냥한다. 양우석이 영화 <강철비>에서 진정 하고 싶었던 말은 그것일 것이다. “분단을 이용해 교묘하게 자신들의 이득을 취하는 무리가 남에도 북에도 모두 존재한다!”
국정농단으로 정권이 교체되고 503호가 수감돼 있지만,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는 ‘안보장사’로 목청을 돋우고 정치권력을 연장(延長)하고 유지하는 세력이 엄존한다. 그들은 지난 70년 동안 안보, 안보, 안보를 떠들어왔다. 정치적 위기가 닥치면 간첩을 양산(量産)하고 각종악법을 만들어 국민을 겁박했다. 장구한 세월 그런 협박은 국민을 ‘양치기 소년’으로 만들었다.
안보 불감증을 걱정하는 자들이야말로 안보를 가지고 크게 한밑천 잡은 장사치거나 그 후예다. 제4차 산업혁명이 아침저녁으로 회자되는 광속의 시간대를 살면서도 우리는 ‘안보’라는 지난시대의 유령에 시달리고 있다. 20세기 광포한 냉전시대 이데올로기에 익숙한 정치집단과 우두머리들의 퇴행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안보장사 행악질은 이제는 종식(終熄)돼야 한다.
글을 마치면서
<강철비>의 장르는 복잡하다. 상당한 CG 작업으로 가상(假想)의 전쟁을 다루는 에스에프 영화이자, 엄철우와 최명록의 대결이 백미인 액션 스릴러이며, 곽철우와 엄철우의 가족을 그리는 드라마이자, 남과 북의 정치적 갈등과 충돌을 그린 정치 드라마라고 볼 수도 있다.
어디 그뿐인가. 북한의 쿠데타와 선전포고 및 대북 핵 선제공격에 대한 미국과 중국의 대응을 다룬 첩보영화이기도 하다. 온갖 장르가 혼합돼 있다. 그만큼 한반도 문제가 복잡다기하단 증거다. <강철비>에서 관객은 북핵과 관련한 일본의 제한적인 역할과 러시아의 배제를 목도한다. 시간제약 탓이지만, 러시아와 일본도 한반도 명운과 결부돼 있음을 우리는 기억한다.
뜻밖에 <강철비>의 관객은 많지 않다. 잘 만들어진 역사영화 <남한산성>에 385만 관객이 들었다며 위로하기엔 다소 실망스런 수치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기류가 심상치 않은 시점에 개봉된 영화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어쩌랴?! 관객을 강제할 수는 없는 노릇. 그럼에도 우리는 <강철비>의 문제제기와 양우석의 주장에 귀 기울여야 할 것이다.
“한반도에서 전쟁은 절대 불가다! 더욱이 핵전쟁은 말할 나위도 없다! 우리가 처한 현실을 냉정하게 살피고 어떤 정세 변화에도 대응할 준비태세를 갖추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휴전선 이북에 엄존(儼存)하는 북한의 실체적 진실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