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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서안·계림으로의 은혼 여행기
“청송의 품안에 해원이 안기고 해원의 정성으로 뻗어나는 청송
믿음과 사랑과 행복을 심는 우리는 영원한 송원 교육 가족”
(靑松:푸른 소나무-필자의 호, 海園:바다동산-필자가 지어준 아내의 호)
우리가 작사 작곡한 위의 송원가를 들으며, 가족 친지 제자들의 축복 속에 결혼식을 올린 지 벌써 25주년이 지났다.
어느새 50대에 접어든 우리 부부는 지난 겨울방학에 얻은 모처럼의 휴가를 결혼 25주년 은혼식(銀婚式)을 기념하면서 처음으로 함께 하는 해외여행을 중국으로 다녀오기로 하였다. 이제야 아내와 함께 단둘이 떠나는 해외여행이라고 생각하니 참으로 아내에게 미안하였다. 아내는 종손이며 외아들인 나에게 시집와서 그 동안 시부모 봉양과 가족 대소사의 뒷바라지에다가 1년에 여섯 번씩의 제사 준비에 늘 고달픔이 많았다. 손자 둘을 바라는 시부모님의 뜻에
따라 그 좋은 음악교사의 자리를 사직하고 평범한 가정주부로 돌아와 아들-딸-딸의 3남매를 연달아 출산해야 했다.
이제는 부모님께서 모두 돌아가시고 장남과 장녀는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의젓한 직장인이 되었다. 막내마저 장학생으로 대학을 다니게 되니 부모의 역할을 어느 정도 다한
것 같아 여행을 준비하는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그 동안
부모님 장례, 3남매의 대학입학시험, 군대입대, 취직시험
모두 얼마나 우리 부부의 가슴을 걱정스럽게 하였던가.
이제 자식들 셋 모두 성년이 되어 집을 떠나 객지에 가있으니 늘 우리 부부는 둘이서 호젓한 아파트 생활을 해야만
했다.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적인 현모양처가 되어 부족한
나에게 항상 사랑과 용기를 심어준 아내의 사랑에 조금이나마 보답하는 마음으로 나는 이번 은혼여행을 철저하게
준비하였다. 5일 내외로 1인 100만원 이내에 관광과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을 찾아보니 서울 하나투어 여행사에서 패키지로 하는 중국 서안 계림행(4박 5일간 1인 약 80만원)이 적당하게 생각되어 그곳으로 행선지를 결정하였다.
우리 부부는 모처럼의 홀가분한 해외여행을 앞두고 설레는 마음으로 차근차근 준비를 하였다. 나는 직장에서 네 번이나 해외 여행의 경험이 있었지만 아내는 처음이기에 모든 준비를 사랑하는 아내에 대한 보은의 마음으로 내가 직접 주선하였다. 아내에게 충실한 관광안내를 위해서 역사
교사인 나지만 중국의 역사와 서안 계림의 명소를 지도와
인터넷자료를 보고 충분히 익혀두었다. 정성스럽게 아내가 마련한 김밥으로 조촐한 아침식사 후 여행가방 속에는
4박 5일간 필요한 물건을 넣고 마치 신혼여행을 떠나는 기분으로 1월 20일 아침 8시 김천발 서울행 새마을호에 몸을
실었다. 10시 20분 영등포역에 도착 후 다시 인천공항 행
리무진 버스에 탑승하여 1시간 10분 이동하여 12시 경 인천국제공항 3층 출국장 하나투어 여행사 안내판 앞에서 집결하였다.
제1일(1월 20일/월요일)
우리 일행은 김해순 하나투어 중국전문인솔자를 포함하여 전부 23명이었는데 방학 이어서인지 대부분 가족단위의 중년 교원들이었다. 오후 2시 10분 경 중국민항기
WH284편으로 인천공항을 이륙하였다. 아내는 처음으로
타보는 중국비행기 속에서 창 틈으로 보이는 새털 같은 구름의 모습과 풍성한 기내식사, 친절한 승무원에 감동하였는지 연신 내 손을 꼭 잡아주었다. 4시 10분 서안에 도착하여 김송철 조선족 출신 현지 가이드의 안내로 우리 일행은
다시 40인승 관광버스를 타고 이동하여 서안의 야경을 구경하였다.
서안(西安)은 중국 섬서성(陝西省)의 성도로 중국의 대표적인 관광 도시 중 하나로 인구는 약 600만 명이며, 관중
분지의 중앙부에 위치해 있다. 과거 동양과 서양의 문화 교류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실크로드의 시발점이었다 고하는데 우리에게는 서안보다는 오히려 장안(長安)이라는
이름으로 익숙한 고도(古都)이다. 성내뿐 아니라 성외곽에는 병마용과 화청지 등 유명한 문화재가 많았다. 서안시내는 성곽이 잘 보존되어 있었고 종루(鐘樓)와 고루(敲樓)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종루와 고루는 예전에 성내에서 시간을 알려주던 역할을 했다던데 화려한 조명과 잘 어울렸다.
7시경 열 다섯 가지 다양한 만두로 된 교자연 이라는 특식으로 저녁을 먹고 인근 동신가 야시장을 구경하였다. 그
뒤 약 한 시간동안 화려한 섬서가무단 쇼를 관람하고 숙박지인 당화호텔로 이동하여 중국에서의 첫 밤을 아내와 함께 즐겁게 보낼 수 있었다.
제2일(1월 21일/화요일)
호텔에서 뷔페 식으로 풍성한 조식 후 9시경 우리는 어제
타고 온 버스를 타고 먼저 비림(碑林)으로 향했다.
비림의 역사는 당조시기의 "石台孝經"과 "開成石經"으로부터 시작하였는데 1090년에 이르러 건물을 건축하여 비석을 진열하고 보호하였다. 비림에는 지금 한조로부터 청조까지의 2,300여 개의 비석을 보관하고 있는데 그 중
1,000여 개의 비석을 전시하고 있었다. 글씨가 써진 비석들이 많아서 말 그대로 비림이었다. 중국 고대 서예예술의
보고이자 고대문헌서적과 비석의 조각 도안 등이 집대성되어 있는 곳으로 대외문화교류의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 유적지였다.
다음 코스는 영화 진용(秦俑)으로 잘 알려졌을 뿐 아니라
세계 8대 기적이라 불리는 진시황 병마용(兵馬俑)이었다.
서안 시내에서 동북쪽으로 약 30km 거리에 있으며, 진시황릉에서 북동쪽으로 1.5㎞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정문은 해체하여 다시 대규모로 신축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병마용이란 흙으로 빚어 구운 병사와 말을 가리키는데, 진시황이 사후에 그의 무덤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졌는데 세계
어느 곳에서도 상상하지 못할 정도의 규모를 갖추고 있었다. 이 곳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974년 중국의 한 농부가 우물을 파다가 우연히 발견한 이후 세상에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으며 현재에도 발굴이 진행중이란다. 첨단 기계로 된 병마용에 관한 역사를 담은 영화를 15분 정도 시청하고 1호갱과 2, 3호갱으로 입실하였다. 갱내에는 6000여 개의 실물 크기의 도용(陶俑)이 묻혀 있었으며, 현재에는 1000개 정도가 진열되어 있었다. 더욱 놀랄만한 점은 모두 제각기 다른 자세와
표정, 복장, 헤어스타일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1호갱은 당시 농민이 발견한 것이고, 후에 2, 3호갱이 발견되었다. 세
곳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며, 동서 길이가 230m, 넓이는
612m로 총 면적이 12㎢인 1호갱은 동서 쪽을 향한 긴 모양으로 장군과 병사가 배열되어있고, 2호갱은 면적이 약
6000㎡이며, 보병과 기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현재 2호갱은 발굴이 되고 있는 상태에서 전시되어 있었고, 3호갱은 면적이 520㎡으로 凹모양이며, 병마용들은 양쪽으로 늘어서 있었다.
오후 1시경 중국 현지식으로 된 점심식사를 나와 아내는
준비해간 멸치조림과 김을 곁들여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우리는 다시 중국을 통일한 최초의 황제 진시황이 묻혀
있는(아직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거대한 야산 진시황릉(秦始皇陵)으로 이동하였다. 능묘는 37년간이 걸려 완공되었는데, 무덤의 둘레가 6㎞, 높이는 40m에 달한다. 무덤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야산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하지만 아직 내부는 개발이 되지 않아 있어서 입장료를 내고 들어간다고 해도 내부는 볼 수가 없었다. 그 이유는 진시황이 무덤을 설계할 때 훗날의 도굴을 방지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함정들을 설치해 두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1987년 유네스코는 진시황릉을 <세계유산목록>에 넣었다.
진시황은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한 중국 최초의 황제로 분서갱유(焚書坑儒), 만리장성, 아방궁(阿房宮)을 만든 장본인으로 절대적 왕권중심의 통치자요, 폭군으로 알려져 있지만, 중국의 첫 통일왕조를 열었다는 업적과 함께 이런 거대한 문화재를 남길 수 있었다는 점에서 불가사이한 역사적 위인이었다. 계단으로 올라 정상을 구경하고 내려와 서안여행기념으로 진시황동마차를 구입하였다.
그곳에서 나와 이동하여 보석박물관을 구경한 후 당현종과 양귀비의 로맨스로 유명한 화청지(華淸池)를 관람하였다. 역대 제왕들의 겨울 휴양지였던 화청지는 중국에서 현존하는 최대의 당대 왕실 원림으로서 수려한 풍경과 지하온천수때문에 역대 제왕의 관심을 받아왔던 장소였다. 특히 당나라의 유명한 현종과 양귀비가 함께 겨울을 지내던
곳으로, 온천이 유명해지자 현종이 양귀비를 위해 화려한
누각들을 지었다고 한다. 당시(唐詩) 중에는 화청지에 대한
묘사가 포함되어 있는 시가 비일비재할 정도로 중요한 소재가 되기도 했다. 호수를 중심으로 양귀비가 실제로 목욕을 했다는 목욕탕과 양귀비의 석상이 세워져 있었다.
양귀비는 원래 현종의 18번째 아들인 수왕의 아내로 현종과는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관계였는데, 양귀비에게 반한 현종이 수왕에게서 떼어내 비구니 생활을 하도록 했다가 궁으로 불러들어 자신의 후궁으로 삼았다. 이후 현종은
정사를 멀리하게 되고 양귀비의 친척들을 고관대작으로
임명하기에 이르렀는데 이중 양귀비의 사촌오빠인 양국충이 현종의 양아들처럼 여기던 안녹산과 대립하게 되면서
안녹산의 난이 발생한다.
안녹산은 원래 현종이나 양귀비와 절친한 사이여서 안녹산이 난을 일으킨 이후, 수차례 보고가 들어와도 현종은 믿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반란군에 쫓겨 도망가던 중 현종은
분노한 호위병들에게 종용되어 양귀비의 자살을 명하게
되었고, 양귀비는 명주천을 꼬아 만든 줄로 목이 졸려 죽는
액살(縊殺)형에 처해졌다고 한다. 안사의 난이 진압된 후에도 현종은 아침 저녁으로 양귀비의 그림을 보며 울었다고
전해진다.
1931년 당시 섬서 정부가 정식으로 "화청지"라는 공식적인 이름을 붙였다. 또한 1936년 12월 12일에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 열렸던 "서안사변(西安事變)"도 이 곳에서 발생했으며, 현재에도 여산 정상에는 "착장정(捉蔣亭)"이라는
정자가 남아 있었다.
오후 5시 30분 WH2307편으로 서안을 출발 7
시 계림에 도착하였다. 계림시 (桂林市)는 광서장족자치구
북동부에 위치하고 이강( 江)에 면하여 진귀한 형을 이루고 있는 많은 봉우리들로 둘러 쌓여 있었다. 계수나무가 많아 계수나무 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곳이라는 뜻에서 계림이라고 불리는 이곳은 빼어난 풍치로 예로부터 시인과 화가들의 글과 그림의 소재가 되어오던 곳이다. 그런 까닭으로 {계림산수갑천하(桂林山水甲天下) : 계림의 산수는 천하 제일이다} 라는 명성이 있을 정도로 계림은 중국에서도
유명한 가장 관광지중의 하나로 각광을 받아 왔다.
계림의 지형은 카르스트 지형으로서 지각변동으로 인해
해저가 지형적으로 돌출하여 지금과 같은 기암괴석이 특이하게 만들어졌다. 이런 기묘한 형태의 지형은 각종 영화의 배경장소로도 이용되었는데, 중국 배우 이연걸이 주연한『소림사(少林寺)』라는 영화에서 나오는 그 아름다운
뒷배경도 계림을 무대로 한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 여행에서 계림을 제외한다면 참다운 여행을 하지 않았다고 말할
정도로 이곳은 반드시 거쳐가야 할 곳이다.
총면적은 2,000㎢ 정도 되며 인구는 약 60만 명 정도 된다. 기후는 아열대성 습한 계절풍의 영향으로 기후가 따뜻하고, 비가 많이 오며, 사계절이 분명하다. 연평균 기온은
19.3℃이며, 최고 추울 때인 1월의 평균기온이 7.9 ℃이고,
가장 더울 때인 7월 평균기온이 28.3℃ 이다. 연평균 강수량은 1926mm이며, 계림을 여행하기에 가장 좋은 계절이 4월에서 10월 사이이다. 그중 음력 8월15일 전후로 계수나무에서 꽃이 피는데, 그 향기가 온 계림을 감싼다.
저녁 식사후 우리 일행은 유명한 발맛사지로 피로를 풀고
계산호텔에 투숙하였다.
제3일(1월 22일/수요일)
호텔 조식후 우리는 다시 김선숙 계림 가이드의 안내로
천하제일 경승이라는 계림의 이강유람( 江遊覽)에 나섰다. 인력거-이강유람선-관암동굴탐사-모노레일로 이어지는 계림관광의 하이라이트였다. 약간의 비를 맞으며 안개
속으로 보이는 계림의 산수는 마치 조선시대 후기 정선의『인왕제색도』속으로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강유람은 배를 타자마자 신선의 세계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을 주는데, 소와 말이 모여 있는 것 같은 구우령(九牛嶺),
강을 향하여 관(冠) 같은 암동(岩洞)이 입을 벌리고 있는 관암유경(冠岩幽境), 부부의 안타까운 이야기를 안고 있는 망부석(望夫石), 선명한 색실로 자수를 놓은 것 같은 수산(繡山), 마치 용의 리 같은 형상을 하고 있는 용두산(龍頭山)
등 끊임없이 기암절벽이 시야에 들어온다. 이 기암절벽은
파란 하늘이나 안개 낀 신비로운 분위기와 어울려져 유유한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마음속 깊이 느낄 수 있게 하였다.
관암동굴은 지하궁전이라 일컬어지는 석회동굴로 계림으로부터 약 10㎞의 거리, 남쪽 초평향에 있는 멋진 종유동굴로 길이는 12㎞이며 이미 리강에 근접한 3㎞는 개발이
되어 있었다. 관암 동굴은 오랜 기간동안 폐쇄되어 있었기
때문에 보호가 잘 되어 있어 동굴 안에는 종유석, 석주, 석순 등이 모두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고 있었다. 동굴의 입구가 높으며, 리강과 맞대고 있으며, 바깥쪽의 동굴이 그중
제일 크고 높으며 이강의 물이 흘러 이강과 연결이 되어 있었다. 이 동굴은 개발 초기부터 관광을 위해 계획적으로 설계되어서 자동 조명, 사운드 조절 시스템이 갖춰져 있었고,
또한 관광객들의 편의와 즐거움을 극대화시키기 위한 모노레일, 유람선, 엘리베이터 등이 설비되어 있어 동굴 구경의 재미를 더하고 있었다.
오후 1시경 한국교포가 경영하는 한식집에서 불고기정식으로 맛있는 점심을 먹고 20$를 추가로 각자 지불하여 실내와 야외에서 두시간 동안 흥겨운 각종 동물쑈를 관람하였는데 사람과 동물이 하나되는 모습과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처참한 동물세계를 감상할 수 있었다. 다음 코스인 상비산(象鼻山)은 도화강(桃花江)과 이강이 합류하는 곳에 있어서 옆에서 보면 마치 코끼리가 코를 담그고 강물을
들이키고 있는 모습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해발
200m의 높이에 길이는 103m이며, 폭 길이는 100m이다.
전체면적은 1300㎢이고 3억 6천년 전에 바다 밑에 있던 석회암으로 이루어졌다. 산의 정상에는 명대에 세워진 높이
13.5m의 보현보살탑이 서 있었다.
다시 계림시내로 돌아오면서 한방병원을 둘러보고 돼지고기 바베큐로 기름진 저녁식사를 만끽할 수 있었다. 그 뒤
한 시간동안 계림소수민족(총 55개 족이며 중국인구의 8%
약 9000만 명)의 다양한 전통무용과 음악을 관람하고 다시
계산호텔에 투숙하였다.
제4일(1월23일/목요일)
호텔조식 후 우리 일행은 먼저 첩채산(疊彩山)을 올랐다.
일명 계산(桂山)이라고도 불리고 시의 약간 북쪽으로 가로놓여 있으며 산의 암층은 횡으로 겹겹이 겹쳐져 있고, 게다가 수목이 각층마다 무성하여 마치 여러 색의 비단을 접은
것 같아 첩채산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정상 부근에는 풍동(風洞)이라는 동굴이 있는데, 동굴 벽에는 불상·그림·시 등이 새겨져 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계림의 시내와 이강의 모습은 독수봉에서 바라보는 모습과 비교해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 나비박물관을 거쳐 요산 케이블카를 타고 계림시내 전경을 조망한 후 진주를 파는 상점에서
진주로 장식한 아름다운 중국여인쑈를 감상하였다. 이곳에서 진주목걸이를 최대한의 흥정 끝에 구입하여 은혼기념으로 사랑하는 아내에게 걸어주었다.
다시 이동하여 자라와 닭고기를 넣고 끓인 용봉탕으로 점심을 먹고 복파산(伏波山)에 올랐다. 이 산은 시내를 흐르는 이강의 서쪽 연안에 있는 산으로, 독수봉과 함께 시내를
내려다보기에 좋은 장소였다. 힘들게 오른 정상에서 우리는 1000원에 관광객의 모습을 즉석에서 색종이로 오려 주는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모퉁이에는 후한시대의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을 제사지내는 정총사(定悤寺)가
있고, 밑에는 지하동굴인 환주동(還珠洞)이라는 동굴이 있다. 환주동이라는 이름은 옛날 한 어부가 동굴을 밝히는 진주를 훔쳤다가 자신의 행위를 뉘우치고 진주를 다시 갖다
놓았다는 전설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다시 이동하여 시내 백화점을 구경하고 소수민족박물관과 옥집을 돌아보니 전통과 현대가 잘 조화되어 있는 중국이 앞으로 무궁한 발전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다. 늦은 시각에 한식 비빕밥과 쌀국수로 저녁을 맛있게 먹고 계림공항으로 이동하였다. 그곳에서 나의 한자성명으로 즉석에서 7언한시를 지어 계림전경의 족자에 담아주는 기념품을 구입하였는데 매우 소중한 의미가 담겨있었다. 8시 25분 WH
206 편으로 계림을 출발하여 9시 55분 서안 도착 후 당화호텔에 투숙하였다.
제5일(1월 24일 금요일)
호텔 조식 후 공항으로 이동하여 9시 30분 중국 민항
WH283편으로 서안을 출발하여 1시 10분 인천공항에 도착
후 우리 일행은 아쉬운 마음으로 각자 해산하였다. 다시 공항 리무진 버스로 영등포역에 도착, 경부선 열차를 이용하여 7시경 김천 내 집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이번 여행에서 천하제일의 명승과 역사를 가진 중국인들의 검소함과 결코 서두르지 않는 여유, 신용과 성실성, 21C
초강대국으로의 무한한 잠재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한국의 맑고 아름다운 금수강산에 감사하면서 조국과 가족의 소중함을 더욱 깊게 느낄 수 있었다. 앞으로
더욱 조국과 가족을 사랑하면서 나의 직분에 항상 최선을
다하리라.
평생의 동반자이신 당신이여!
이번 은혼여행을 계기로 우리 가족이 함께 정한 가훈‘참되고 알차게’살아온 지난 결혼 생활을 토대로 남은 여생도 더욱 성실하게 살아갑시다. 나는 국사교사로서 우리 민족의 건국이념이자 교육이념인 홍익인간의 교육애를 가지고 힘차게 살아가렵니다. 우리들 사랑의 씨앗인 자식들이
훌륭한 사회인이 될 수 있도록 아버지로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려고 합니다. 이 부족한 남편에게 더 많은 사랑을 주시며, 당신도 이제 건강에 유의하면서 여가를 선용하고 자연과 역사 속으로 취미생활을 즐겁게 하시구려.
서안가이드가 버스에서 들려준 중국인의 성공론 『3ㄸ론』처럼 우리도 큰 뜻을 세우고, 때를 기다리며, 더욱 많은
땀을 흘립시다. 넓고 깊은 해원의 사랑 속에서 청송은 튼튼하게 자라 이제 흔들림 없는 버팀목이 되었소. 그 청송 푸른 그늘 밑에서 우리 가족들이 편히 쉬어갈 수 있는 행복한
보금자리를 위해 당신과 나, 더욱 깊은 믿음과 사랑을 송원가 속에 담아봅시다.
2003.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