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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에는 지루한면이 약간 있습니다.
그러나 읽어 보시면 680쪽 분량의 책 한권을 다 읽으신 효과가 있습니다.
■ 책 소개
이 책은 트라팔가 해전 200주년을 기념해 전 세계 해전사의 영웅으로 불리는 영국의 넬슨 제독의 평전이다. 200년 전 섬나라 영국은 나폴레옹이 지배한 유럽에서 고립되어 있었다. 1805년 트라팔가르 전투에서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에 비해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영국해군은 넬슨이 계획한대로 큰 승리를 거둔다. 그러나 함대의 제독이었던 넬슨은 프랑스의 1급 저격수가 쏜 총알에 맞아 치명상을 입고 사망하고 만다. 넬슨의 죽음은 마치 1598년 노량해전에서 유탄에 맞아 숨진 충무공 이순신의 죽음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다.
트라팔가르 전투 중 죽어가면서 넬슨은 "살아 있는 한 갑판을 떠나지 말았어야 했다"고 말했다. "나의 죽음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는 충무공 이순신의 유언을 기억하는 한국인에게 넬슨의 삶과 죽음은 깊은 감동과 함께 자신의 임무에 최선을 다한 한 인간에게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을 얻게 될 것이다.
대륙에서 고립된 영국의 제독들은 패전시 처벌이 두려워 승리보다는 패배하지 않기만을 바라는 소극적인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넬슨은 작전 단계부터 철저히 준비하여 적극적으로 적을 전멸시킬 수 있는 방법을 준비했다.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솔선수범으로 부하 장병들을 이끈 그의 삶은 영국이 나폴레옹의 프랑스를 무찌르고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세계를 제패하는데 기여한다.
영국 해전사 최고의 전문가인 앤드루 램버트가 넬슨에 관련돼 모든 출판물을 철저히 고증하고, 객관적으로 정리한 『넬슨』은 사후의 평가와 21세기까지의 역사적 의의를 분석한 넬슨 전기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 저자 앤드루 램버트
런던 킹스칼리지(King's College)의 해전사학과 교수이며, 왕립해군협회의 명예 간사이자 왕립역사학회의 회원이다. 저서로 『트린코마리: 넬슨의 마지막 프리깃(Trincomalee: The Last of Nelson's Frigates)』, 『해전사(The Foundations of Naval History)』『윌리엄 콘월리스 함장(Admiral Sir William Cornwallis)』『제국의 방패(The Shield of Empire: 1815~1895)』『크림 전쟁(The Crimean War)』등이 있으며, 탁월한 영국 해전사 저술로 평가받는 『해상전(War at Sea)』은 BBC에서 방송으로 제작되기도 했다. 브리스틀 과학기술대학교, 그리니치 왕립해군사관학교, 샌드허스트 왕립육군사관학교 등에서 강의를 하였다.
■ 책 내용
서론 - 현대의 넬슨, 시대적 평가
넬슨은 더 이상 1940년 처칠에 의해 숭배되던 영국만의 영웅이 아니다.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이 그렇게 격렬하게 논쟁을 벌여야 했던 비도덕적인 인물도 아니다. 21세기 영국인에게 넬슨이 어떤 의미이든, 넬슨은 영국 국민적 여론의 구심점이며 그 사실은 1798년 그의 첫 번째 위대한 승리 후 언제나 변함이 없었다. 넬슨은 고난에 처했을 때 영원불변의 국가적 신성이자 전쟁의 신이며, 동시에 거의 모든 희망이 사라졌을 때 기댈 수 있는 마지막 안식처 겸 독재에 항거해 영국을 보호하는 수호자의 위치를 변함 없이 지키고 있다. 그는 조국의 존망과 성쇠를 결정하는 커다란 위기를 맞아 이를 극복하면서 천재적 전략과 도덕적, 정치적 용기는 물론 기꺼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희생정신을 발휘했다.
아마 넬슨의 가장 큰 성과는 능력이 뒤떨어지는 사람이라면 복잡하고 상상도 할 수 없는 모든 문제를 단순하고 직접적인 문제로 전환시켰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는 부하들에게 불확실성과 의심, 공포를 제거했다. 넬슨과 동시대를 살았던 프로이센의 칼 폰 클라우제비츠에 따르면, 전쟁에서 천재성은 대체로 타고난 것이다. 천재성을 가진 사람은 기존 규칙에 대항해 승리를 거두거나 간단하게 그것을 무시해 버릴 수 있다.
넬슨 시대에 함대를 지휘하기 위해서는, 전략 수행을 위한 관리와 전술적 지휘, 고위 외교관으로서 동맹국 간 협조, 서로 다른 정부 기관들 사이의 협조를 모두 자신의 행정 업무에 통합시켜 처리할 수 있는 역량이 필요했다. 오직 몇 사람의 인물만이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했으며, 그런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한 사람들 중에도 이 책이 다루는 인물과 견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넬슨은 당시 정치 지도자 역할도 수행하였으며 조국과 그 체제를 수호하고 신에 대한 믿음으로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 그는 자신의 부하를 인간적으로 대하며 항상 그들을 보살피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또한 승리만을 위한 전쟁이 아니라 평화를 위한 전쟁을 수행했다. 넬슨은 자신의 조국을 위기에서 구했을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영국의 전신(戰神)'이 된 것이다.
1부 영웅의 성장 과정
성장과 출세 1758~82
넬슨의 정부와 아내, 형의 진술은 정직과 용기, 충성, 겸손 등 주로 선의 전형이 되는 요소들로 어린 영웅의 이미지를 만들려 애쓴다. 그는 학창시절 과수원에 몰래 침입했던 적도 있는데, 심지어 이처럼 작은 도둑질까지 독실한 신앙심 때문인 것으로 미화되기도 했다. 사실 넬슨은 몹시 짧고도 지루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호레이쇼 넬슨(Horatio Nelson)은 1758년 9월 29일 노퍽(Norfolk) 북부의 버넘소프에서 11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아버지 에드먼드 넬슨(Edmund Nelson)은 영국 국교회의 교구 목사였으며, 전형적인 중산층으로 교육 수준이 높고 총명했지만 이렇다 할 야망이 없는, 그저 버넘 교구 목사로 조용히 사는 데 만족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해군 경력에 가장 강한 영향을 미친 사람은 두 외삼촌 모리스(Maurice) 서클링과 윌리엄(William) 서클링이었다. 모리스 서클링은 넬슨에게 18세기의 전형적인 해군의 길을 마련해 주었다. 당시에는 주로 연고를 통해 해군에 들어갔으며 이렇게 들어간 어린 장교 지망생들은 연줄이 좋을수록 더 나은 출발을 할 수 있었다. 서클링 대령은 어린 조카에게 교육비와 용돈을 대주는 것은 물론, 적절한 선박과 장교 근무지까지 찾아주었다. 넬슨은 소위로 임관하여 윌리엄 로커 함장(Captain William Locker)이 지휘하는 32문 프리깃함 'HMS 로웨스토프'에 승선한다. 그는 탁월한 항해가이자 인정 있는 지휘관으로 서클링은 로커를 넬슨의 다음 단계 교육을 지도할 가장 이상적인 인물로 선택한 셈이었다. 로커는 건강이 악화되어 상이군인으로 송환되는 상황에 처하는 와중에도 1778년 7월 넬슨을 위해 피터 파커 제독의 기함 'HMS 브리스톨'에 자리를 마련해 주었고, 넬슨은 12월에 쌍돛대 범선 'HMS 배저'의 함장이 되었다.
넬슨, 미대륙, 그리고 결혼 1783~92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무한한 가능성을 입증해 보인 젊은 함장은 머지않아 자신이 위인이 되리라는 환상을 품고 있었다. 넬슨은 동인도제도로 가기를 바랐으나, 곧 리워드제도(Leeward Islands) 경비 구역으로 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의 임부는 북부 도서군을 보호하고 불법 무역을 막는 것을 포함해서 영국의 교역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자기주장이 강하고 명성을 얻길 갈망하는 젊은 함장에게는 지극히 평범한 임무였지만 넬슨은 그곳에서 복무를 마칠 때까지 수많은 논쟁을 야기한다. 넬슨은 그곳에서 프랜시스 니즈벳(Frances Nisbet)을 만난다. 넬슨과 동갑이었던 그녀는 5살짜리 아들을 둔 미망인이었지만, 적어도 넬슨만큼이나 그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패니(프랜시스의 애칭)는 남편이 필요했고, 넬슨은 무일푼에 친구도 거의 없는 해군 장교였으니 말이다. 패니는 넬슨에게 많은 역할을 해주었지만 그들의 결혼생활은 무미건조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패니는 사교 생활을 할 욕망도, 그렇다고 넬슨의 세계에 편입하고픈 욕망도 없었다. 그저 조용하고 편안한 삶을 추구할 뿐이었다.
명예의 기회 1793
1792년 후반 유럽 상황이 악화되고 프랑스와의 전쟁이 다가오자 해군이 동원되기 시작했다. 넬슨은 다시 한 번 해군성에 자신이 복무하기를 갈망한다는 의사를 분명히 해두었다. 그는 해군성의 채텀 경을 만나 64문 군함이 준비되는 대로 할당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1793년 2월 11일, 마침내 전쟁이 선포되었다. 영국은 북해 연안의 저지대 국가(지금의 베네룩스 3국)에서 프랑스를 저지할 수 있을 정도로 병력이 충분하지 못했고, 영국의 동맹국이었던 네덜란드도 더 이상 강대국이 아니었다. 다른 국가들도 상황이 나을 건 없었다. 영국이 자국의 전략적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자산이라곤 자국의 함대와 명성뿐이었다.
지중해의 총사령관이었던 후드는 전시에 영국 장교에게 부여될 수 있는 가장 복합적인 임무를 맡고 있었다. 그의 주요 임무는 프랑스 함대를 감시하고 이들이 바다로 나올 경우 전투를 벌이는 일이었지만, 이밖에도 전역 전략 및 연합군 구축, 연합전투 등의 책임을 맡고 있었다. 그는 3월 넬슨에게 순양 준비를 하고 지브롤터 함대에 합류하라는 뜻을 내비쳤다. 넬슨은 노르망디 해안 앞바다에서 순양 중이던 프랑스의 프리깃함 두 척과 코르벳함 한 척을 라우그(La Hougue)로 쫓아버리기도 했는데, 당시 그가 보여준 엄청난 활력은 자신의 능력을 입증해 보이려는 열망의 정도를 말해준다.
전쟁의 진행은 대륙의 정치 상황에 달려 있었다. 영국이 빠른 시일 내에 코르시카에서 승리를 거둔다면 툴롱에서 철수하면서 빚어진 불리하다는 인상을 상당 부분 중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1794년 7월 11일, 칼비에서 해군 부대를 지휘하던 넬슨은 프랑스군이 발사한 둥근 쇳덩어리 포탄에 부상을 당한다. 포탄이 흉벽에 충돌해 모래와 작은 돌맹이들이 떨어져 내리면서 넬슨의 얼굴을 내리친 것이다. 그는 자신이 '약간의 부상'을 입었다고 보고했으나, 부상을 당한 한쪽 눈은 끝내 시력을 회복하지 못했다.
넬슨과 저비스, 전쟁 파트너 1796
1796년 초 제독 저비스 경이 지중해 함대의 총사령관이 된다. 그는 경험 많고 완고한 사람일뿐 아니라 날카로운 판단력과 꼼꼼함, 건전한 조직을 만들려고 하는 열정을 지닌 인물로도 유명했다. 이 시기 넬슨은 계속 그의 찬사를 받으면서 1798년 파견 전대를 지휘할 만한 경력을 쌓아갔다. 후드와 저비스 두 사람이 넬슨의 경력과 사고력에 영향을 미친 정도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 두 제독들 가운데 더 명확한 영감의 원천으로 넬슨의 해군 경력에 지배적인 지적 영향을 미친 사람은 새뮤얼 후드 자작이었다. 후드의 후원은 그의 대망에 자양분을 공급했으며 미국 독립 전쟁에서 프랑스 혁명에 이르는 기간까지 그가 해상에서 근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1796년 보나파르트의 이탈리아 전투는 모든 이탈리아 국가를 전쟁에서 제외시키고, 영국 함대의 군수 기지를 무너뜨리며, 이미 카디스에 있는 프랑스 전대 때문에 골치를 썩고 있는 툴롱 봉쇄를 무력화시킬 터였다. 적대 세력의 목록에 마드리드가 추가되면서 해군력의 계산은 몹시 복잡해졌다. 지금까지는 리비에라에 배치된 해군력만으로 프랑스에서 이탈리아로 향하는 육군의 진격을 막거나 이탈리아에서 프랑스로 진격하는 일이 가능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이 1796년에는 완전히 달라졌다. 프랑스가 해군력을 배제시키는 방식을 채택하면서 전략과 사령관을 모두 배제한 것이다. 런던에서는 위기가 점점 심각해지고 있었다. 해군은 유례 없는 수준의 위협을 받고 있었고 영국의 동맹국들도 붕괴됐으며 프랑스군은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져 있었다. 이처럼 끊임없이 숨통을 죄어오는 상황을 돌파할 수 있는 길을 해상에서 승리를 거두는 일뿐이었다.
2부 위대함을 향해
승리와 참패 1797
1797년 넬슨은 포르토페라이오에 정박한 채 심각한 문제에 봉착한다. 그의 상관은 너무 멀리 있었고 아무런 지원도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군수 물자를 실어놓고 심하게 손상된 미네르브의 수리가 끝나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연락을 취하기에는 함대보다 런던이 좀더 가까웠다. 그는 이 섬에서 임시로 고위직 첩보원 겸 외교관 역할을 하고 있는 윌리엄 윈덤(William Wyndham)을 통해 계속 자신의 진행 상황을 통지했다. 이후 넬슨은 프리맨틀의 책임 하에 주둔 부대 전원이 승선할 수 있는 충분한 수송선을 대기시켰고, 1월 말 엘바를 떠났다. 이번 작전에 관한 한 저비스가 넬슨에게 모든 것을 전임한 상태였으므로, 넬슨은 돌아가는 길에 툴롱과 카르타헤나를 거쳐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를 찾아보기로 결정했다.
적 함대들은 브레스트로 집결하고 있을 것이다. 피에르 빌뇌브 소장이 이끄는 프랑스 전대는 브레스트로 도피한 상태였지만 스페인 전대는 함정들이 많이 손상된 상태였고 6주 동안 사령관이 두 번이나 바뀐 터라 도피가 지연되고 있었다. 코르도바 제독이 엄청난 정치적 압력 때문에 결국 함대를 이끌고 해상으로 나왔을 때, 그는 지브롤터의 포위 공격을 지원하고 중요한 수은 운반선 네 척을 카디스로 호위해야 하는 임무까지 떠 안고 있었다. 더군다나 스페인 함대는 해상에서 복무한 기간도 짧았고, 수병들도 부족했으며 전투 경험도 미약했다. 반면 영국 함대는 경험이 풍부했고 전투로 잘 다져져 있었으며, 해협 함대에 속하는 다섯 개 전대 역시 베테랑만큼이나 실행력이 뛰어났다.
이에 저비스는 점차 속도를 높여 전투에 뛰어들었고, 그의 함대는 신속하게 전투 진영을 형성함으로써 탁월한 조함술을 입증해 보였다. 영국 전열의 선두에 있던 컬로든의 트로우브리지는 분리되어 있던 적의 진형 사이에 끼어 들었고 좌우 양현을 전부 사용해 두 번의 현측 일제 사격을 퍼부었다. 스페인 진형의 선두함은 침로를 변경할 수밖에 없었고, 스페인 함대는 완전 분리되었다. 저비스는 함대를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선회하게 해 적의 본대를 공격했다. 넬슨은 이 교전에서 배 두 척을 나포하는 사살 유례 없는 일을 단행했다. 넬슨은 국가의 영웅이 되었고, 자신이 요구했던 대로 칭호 이외에는 어떤 장식도 달리지 않은 준남작 지위 대신 별 하나와 리본이 달린 바스 훈위를 받았다. 동시에 해군 소장으로 진급이 확정되었으며 산조세프의 함미에 달려 있던 문장을 수여받았다. 이처럼 한꺼번에 많은 특전이 주어진 것은 이번 승리가 수년간 우울한 소식들만 들어온 국민들의 사기를 크게 높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6월 한달 동안, 넬슨과 저비스는 공성용 사닥다리와 대포, 군수 물자를 모으고 스페인군을 제압하기 위해 추가 병력을 좀더 소집하는 등, 테네리페를 공격할 준비를 갖추었다. 이번 작전은 돈이 목적이었으며, 조국의 상황을 감안할 때 그것은 특히 중요한 임무가 될 터였다. 전쟁 때문에 영국은 유례 없는 경제난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넬슨의 테네리페 작전은 보물을 찾아 조국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의도에서 계획된 것이었다. 성공해서 영화(英貨)로 600~700 파운드를 영국에 통용시키면 영광스러운 평화를 확보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스페인도 전쟁에서 패퇴시킬 수 있었다. 넬슨과 그의 부대원들은 이러한 대가를 위해 목숨을 건 투쟁을 시작한다.
선원들과 수병들의 손실을 막기 위해 저비스와 넬슨은 포함 '선더(Thunder)' 한 척만으로 카디스를 포격하기로 한다. 7월 3일 밤 보트를 타고 야간 침투 공격을 개시한 이들은 적의 함대에 어느 정도 손상을 입히는 데는 성공했다. 하지만 역시 포함 한 척으로는 불충분했고 스페인군도 경계 태세를 철저히 갖추고 있었으므로, 저비스는 패배를 인정하고 7월 14일 넬슨의 전대를 철수시켰다. 7월 22일 야간 상륙 작전은 험한 날씨의 방해를 받아야 했고, 해안에서 경보가 울리자 전술 지휘를 맡았던 트로우브리지는 그대로 밀고 나가야 할 순간에 머뭇거리다 넬슨과 상의하기 위해 되돌아가는 보기 드문 실수를 범했다. 25시간의 작전회의 끝에 넬슨은 한밤중에 탄탄한 방어 시설을 갖춘 도시를 전면에 걸쳐 급습하기로 결정했다. 이를 알아챈 스페인군은 엄청난 포격을 가해서 공격을 막아냈고, 결국 영국군의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넬슨은 상륙을 준비하던 중 오른쪽 팔꿈치 바로 위에 머스킷 총알을 맞아 대동맥이 끊어지는 큰 부상을 입고 팔을 절단하는 수술을 받았다.
나일강 전투 1798
1797년 이후 넬슨은 스스로 탁월한 지도력을 지녔음을 알았다. 1793년에서 1797년까지 지중해에서 일어난 일련의 전투들은 비범하면서도 따뜻하고 인간미 넘치는 리더십과 부하들을 보호하는 마음이 같은 배를 타고 있는 선원들은 물론 함대 전체의 병사들과 동료 장교들에게까지 감동을 줬다. 동료들과 선임 장교들은 시기를 하다가도 결국엔 그의 탁월성을 인정하게 됐다. 이제 시대를 이끄는 주요 인물들은 넬슨의 부대를 필요로 했다. 넬슨은 시대의 총아가 된 것도 몹시 기뻤지만 여전히 자신의 사령관에게 다시 합류해서 복무를 재개하기를 갈망하고 있었다. 넬슨은 1798년 4월 30일 함대에 도착해서 기함에 승선했다.
한편 보나파르트는 영국의 번영에 크게 기여하고 있는 인도 기지를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랑스가 지중해를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몰타와 이집트를 확보해서 정복을 계속 진행해 나가는 것도 터무니없는 일은 아니었다. 지중해 근처에 배치된 영국 스파이들은 런던과 카디스 앞바다에 있는 함대로 정보를 보내기 시작했다. 이들은 4워 초부터 프랑스군이 대규모 이동을 준비하고 있으며 그 목적지 가운데는 나폴리와 시칠리아가 포함돼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프랑스 육군은 넬슨이 도착하기 전 이미 아부키르만 상륙을 완료했다. 8월 1일 새벽, 넬슨은 서쪽에서부터 전대를 이끌고 알렉산드리아 앞 바다에 도착했고, 오후 3시 경 영국군은 프랑스 함대의 돛대를 발견했다. 넬슨은 전대에 프랑스군을 향해 나아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이 전투에서 영국 전함들은 13개 중 11개의 프랑스 전함을 나포하거나 파괴했다. 이날 넬슨은 대인 공격용 유탄에서 튀어나온 쇠 구슬에 이마를 맞는 부상을 당했다. 그러나 넬슨은 보나파르트가 지닌 정복의 꿈을 산산이 부숴 놓고 있었다.
넬슨은 남아 있는 전대의 전함 여섯 척을 두 개 분대로 나누어 상태가 가장 좋은 세 척을 남겨두고 뒤늦게 회복한 프리깃함 세 척을 후드 하에 편성했다. 그리고 그에게 이집트 해안을 봉쇄하고 터키와 교통로를 확보하며 동시에 프랑스의 통신망을 차단하라고 지시했다. 8월 19일, 그는 새로운 역사를 창조한 아부키르만을 떠나 나폴리로 향했다. 이 세 척짜리 전대들은 이제 프랑스가 바다로 내보낼 수 있는 어떤 세력보다도 우세했으며, 적의 주력 함대를 전멸시키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를 증명했다. 이들의 해군력은 지중해 각지로 퍼져 나가 프랑스군을 밀어내고 나폴리인들에게 용기를 주며 카디스 앞 바다의 함대를 보강할 수 있었다.
나폴리와 해밀턴 부부 1798~9
동시대 사람들의 견지에서 보면, 넬슨은 해전 사상 가장 완벽한 승리를 이뤄낸 동시에 인도를 구원한 인물로 불후의 명성을 떨쳤다. 하지만 고국으로 돌아가 이러한 보상을 요구하기 전에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괘씸한 행동을 저질렀다는 비난을 받아 명성을 더럽힌다. 지금까지 일부 전기 작가들은 넬슨에게 성급하게 여러 가지 죄목을 들어왔다. 하지만 그 가운데 사실로 확인된 것은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를 택했다는 죄목 한 가지 뿐이다. 넬슨이 '불명예'를 떠 안게 되는 무대는 나폴리다.
지난 60년 간 나폴리는 스페인계 부르봉 왕가의 군주들이 통치해 온 양 시칠리아 왕국의 수도였다. 부르봉 궁정의 영국 대사직은 노장의 권위자이자 열성 화산학자이기도 한 윌리엄 해밀턴 경이 맡고 있었다. 해밀턴과 넬슨은 1793년에도 만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개인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더 친밀한 관계로 발전하고 평생 동안 그 관계를 지속한다. 이들의 관계는 또한 이후 18개월 동안 정치 발전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나폴리 궁정에서 해밀턴의 지위를 더욱 강화시켜 준 것은 그의 아내 엠마와 왕비의 각별한 우정이었다. 전 부인이 죽은 뒤 수년 동안 혼자 살아온 해밀턴은 그의 조카가 자신의 정부였던 여자를 보내오자 그녀를 재워주고 교육을 시키다가 결국 결혼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관대한 나폴리에서는 이러한 결혼이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엠마의 매력과 빠른 이탈리아어의 숙달은 문을 여는 데 도움을 주었다.
넬슨이 만난 이 여인은 키가 훤칠하고 매우 아름다웠다. 지금 기준으로는 다소 뚱뚱한 편이었지만 능력 있고 말씨가 능란했으며 항상 자신에 차 있었다. 엠마는 해밀턴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넬슨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녀는 넬슨에게 지친 몸과 마음을 편히 쉴 수 있는 안식처를 제공한다. 윌리엄 경은 아내와 안락한 집을 이처럼 멋진 친구와 공유한다는 데에 전혀 불만이 없었고, 넬슨이 노골적으로 엠마에게 애정을 쏟는 것 역시 기쁘게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엠마는 사회적, 종교적 인습에 얽매이기보다는 자신의 판단에 따라 행동하는 자유분방한 여인이었다. 넬슨은 영국으로 돌아와 부인과 별거하면서 이때부터 공개적으로 엠마와 관계를 계속했다.
3부 함대 사령관
발트해 함대 1800~1
2차 대프랑스 동맹이 와해되면서 영국의 전략도 변할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가 동맹국에서 무장 중립국으로 돌아서자 유럽 대륙 내에는 동맹국이 하나도 없는 상태가 됐고, 해군력이 영국의 핵심적인 전장 자산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너무도 뻔한 사실이었다. 이는 넬슨과 그가 추구하는 전략에 유리한 상황이기도 했다. 영국의 전략 변화로 효과를 가장 절실히 느낀 대상은 전쟁의 추이를 관망하면서 그것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챙기려고 했던 주변 국가들이었다. 1800년 12월 16일 무장 중립국 협정이 조인되면서 약소국들은 러시아의 대국주의를 위한 앞잡이로 전락했고 덴마크와 프로이센, 스웨덴이 러시아의 계획에 동참해야 한다는 압력을 받았다. 러시아는 발트해를 자국의 영해로 간주하는 발트 체제를 구축하려 했으며, 이것이 바로 표트르 대제 이후 러시아의 정책이었다. 이 시기 헨리 에딩턴의 새 내각에 세인트 빈센트 백작이라는 강력한 전문가가 제1해군경으로 자리하게 된 것은 상당히 큰 의미를 지닌다. 그의 지식과 결단력으로 발트 함대가 시간에 맞춰 출항할 수 있었고 적절한 지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새해가 되고 러시아가 몰타 점령에서 배제되자 러시아 황제는 영국 상선의 입출항을 금지시켰다. 게다가 12월경 보나파르트가 파벨 황제에게 아첨을 하기 시작하면서 러시아는 프랑스와의 평화 협상을 고려하고 있었다. 러시아의 태도 변화는 덴마크와 스웨덴에도 경보를 울렸다. 외무장관 그렌빌은 해양법의 영국식 해석을 실현하기 위해 무력 사용도 불사할 생각이었고, 영국은 적극적인 대응이 필요했다. 넬슨과 함께 해군 중장 하이드 파커 경은 본래의 보직에서 풀려나 발트 함대에 합류했다. 넬슨은 전에 하이드 파커 휘하에서 근무한 적이 있었는데, 넬슨으로서는 그다지 유쾌한 경험이 아니었다. 하이드 파커도 젊었을 때는 활력 넘치고 조함 능력이 뛰어난 장교로 명성을 얻었지만 이제 61세가 된 그는 그저 까다롭고 시대에 뒤떨어지는 노인으로 전락한 것이다. 하이드 파커는 발트해 연안 국가들의 함대가 스카우(Skaw)곶 밖으로 나와 외해에서 전투하길 바란 반면 넬슨은 러시아 함대를 찾아 격파하는 문제에 집착했다.
이번 공격의 목적은 덴마크가 항구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설치해 놓은 부유 방어 시설을 제거해서, 부두와 무기고, 시가지를 함대가 보유한 일곱 척 포함의 포격 속에 노출시키는 것이었다. 4월 2일 넬슨은 적의 기함을 파괴했고, 생존자들은 모두 육상으로 대피했다. 한편 파커는 먼 곳에서 전투 장면을 지켜보다 '전투를 중지하라'는 의미의 기류 신호를 게양했다. 파커는 우유부단한 성향, 자신감의 결여, 전투시에 느끼는 무거운 책임감에 용기를 잃었던 것이다. 그러나 넬슨은 파커의 신호를 복창하지 않았다. 당시 넬슨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눈이 하나밖에 없다네. 그리고 그 눈은 언제나 적을 쳐다보고 있지." 넬슨은 신호기 사건의 여세를 몰아 또 한번의 천재적 자질을 발휘했다. 영국은 254명 전사에 689명이 부상을 당했고, 덴마크는 대략 그 수치의 두 배에 달하는 사상자를 냈다. 나포된 덴마크의 선박은 모두 열두 척이었다. 4워 3일 파커는 넬슨을 육상으로 보내 협상에 임하게 했다. 정전 협정은 승인됐고, 파커는 소환되었으며, 넬슨은 함대의 지휘를 맡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지중해의 지배자 1803~5
1803년 5월 6일 넬슨은 오랫동안 꿈꿔왔던 지위를 차지했다. 지중해 함대 사령관에 취임한 것이었다. 전쟁의 원인 중 많은 것이 이러한 지중해와 관련되어 있었다. 그러다 보니 몰타가 프랑스의 모든 움직임을 저지할 수 있는 길목에 위치하게 됐고 이는 이미 넬슨이 예상했던 바였다. 아미엥 조약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 몰타를 포기하면 영국은 지중해에서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과 경제 활동, 전략적 역량에 엄청난 타격을 입는다. 평화를 얻기에 그것은 너무도 비싼 대가였다. 협상도 시도해 보고 화해의 노력도 있었지만 모두 실패했다. 이번에 영국과 프랑스간의 투쟁은 상대방을 끝장내기 위한 전쟁이었고 오직 하나의 정권만이 생존할 수 있었다.
넬슨은 나폴리와 오스만투르크 제국, 마드리드에 주재하는 영국 공사와 긴밀한 협조 체제를 유지했다. 공사들은 물론 대사관 다수의 하위 관리들이 힘을 합쳐 넬슨에게 중요한 정보들을 제공했다. 그가 지중해의 사령관이 된 것은 지중해에 대한 완벽한 지식이나 끈질기게 그 자리를 원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판단과 정치적 용기에 따라 독자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본능이 있었기 때문이다. 툴롱 함대를 전멸시키는 것이 그가 받은 명령의 핵심이었지만, 이 밖에도 그의 역할은 상당히 광범위했다. 그는 몰타로 가서 함대와 합류한 다음 빅 커튼에게서 지휘권을 인수했다. 넬슨은 다른 작전들을 수행하면서 한편으로 영국 선단을 보호하고, 스페인 함대의 준비 상태도 감시해야만 했다.
트라팔가르 1805. 10. 21.
10월 19일 아침 일찍, 적함대가 카디스 항구를 나서기 시작했다. 연합 함대의 서른 세척에 비해 영국 함대는 스물 두 척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출항은 프랑스의 빌뇌브 소장의 생각이었고 오로지 그 혼자서 결정한 일이었다. 10월 20일 새벽 1시가 되자 함대는 지브롤터 해협 입구에 집결했다. 두 함대는 모두 변덕이 심하고 돌풍을 동반하는 바람 때문에 애를 먹었다. 10월 21일 날이 밝자, 빌뇌브는 넬슨이 예상보다 다섯 척이나 많은 전함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겁에 질렸다. 그는 단종진[單縱陣, 외줄로 종선(縱線) 을 이룬 진(陣)]을 형성해서 싸워야 했다. 두 시간에 걸쳐 영국의 전함은 두 개 분대로 갈라지면서 서서히 전열을 형성했다.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는 진형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돛만 펼친 상태였다. 그들은 도주가 아닌 전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날 바람이 약했기 때문에 영국 전함들은 불과 2에서 3노트(1노트는 한 시간에 1,852미터의 속도)의 속력밖에 내지 못했고 이는 천천히 걷는 것이나 다름없는 속력이었다. 적이 공격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에서, 궁극적인 돌파 지점은 확실히 드러나지 않았다. 풍향이 변하면서 프랑스와 스페인 함정들은 대열의 중간 부분이 약간 밀려나오면서 오목한 전열을 형성했다. 넬슨은 자신이 이끄는 전열로 적의 전위 전대의 후미를 뚫고 들어가 그들이 카디스항으로 돌아가는 길목을 차단하는 쪽으로 작전을 변경함으로써 갑자기 생긴 적 전열 사이의 틈을 최대한 이용하기로 했다. 넬슨의 빅토리가 적의 전열에 접근하자 몇 척의 적함은 빅토리를 향해 사격할 수 있게 되었다. 빅토리는 마지막 730미터를 통과할 때까지 거의 한 시간 반 동안이나 전혀 응사를 할 수 없었는데, 이 부분이 전투에서 가장 힘든 순간이었다. 12시 35분이 되자 적의 진형 가운데 오목하게 들어간 부분에 들어선 빅토리는 마침내 대포를 사격할 수 있게 되었고, 뒤이어 50문의 대포들에서 현측 일제 사격이 가해졌다. 한 차례의 일격으로 200명 이상의 장교 및 승조원들을 죽이거나 부상을 입혔다.
그러나 적의 전열을 둘로 분단하려 했던 넬슨의 시도는 연합 함대의 함정들 사이에 갇힌 채 세 방향의 적과 교전을 벌이는 결과로 이어졌다. 빌뇌브의 진형과 미약한 바람으로 질서 정연한 적의 전열을 뚫은 게 아니라 한 무리의 적함정들 속으로 뛰어든 셈이 돼버린 것이다. 넬슨은 기동력을 상실했지만, 세 척의 3층 갑판 전열함이 선도한 넬슨 전열의 충격은 빌뇌브를 아연실색하게 했고 동시에 영국 전열함에서 빗발치듯 쏟아지는 포탄들이 그가 탄 기함의 함미를 휩쓸고 지나가면서, 그는 불구가 된 배 안에 갇혀 있었다. 각각의 영국 함정들은 그 자체로, 같은 크기의 화력을 가진 연합 함대의 함정들보다 우월한 전력을 발휘했다. 근접 전투에서 영국 함정들의 규칙적이고도 신속한 사격, 프랑스와 스페인 함대는 유례 없는 이 포술로 붕괴되고 파괴됐다.
하지만 그 날 전사자들 가운데에는 다른 사람들을 모두 합친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넬슨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만든 것은 넬슨의 죽음 자체보다는 그가 죽어 가는 과정이었다. 오후 1시 15분 경 르두터블의 가운데 돛대 두 번째 층에서 발사된 탄환이 넬슨의 왼쪽 어깨에 명중했다. 직경 1.75센티미터의 납덩이는 그의 견갑골을 부수고 들어가 왼쪽 폐에 구멍을 뚫고 동맥 하나를 끊고 척추를 가른 다음 오른쪽 어깨 아래 근육에 박혔다. 넬슨이 선저 의무실로 옮겨졌을 무렵 빅토리는 가장 위험한 고비를 넘기고 있었다. 그러나 빅토리 승조원들의 함성이 들릴 때마다 그의 의식은 다시 전투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는 또 다른 적함을 공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대단히 기뻐했다. 그 모든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과 다름없는 모습을 보였다.
2시 30분 경 넬슨에게 열두 척 내지 열네 척의 적 전열함이 포획됐으며 영국 함정들은 단 한 척도 항복하지 않았다는 보고가 도착했다. 그는 자신의 시신을 해군의 관습대로 바다에 던지지는 말라고 했다. 그리고 마침내 넬슨은 선언했다. "이제 나는 여한이 없다." 그리고 그 유명한 말로 끝을 맺었다. "신에게 감사 드린다. 나는 내 의무를 다했노라."
승리의 대가는 매우 컸다. 영국은 1,600명의 사상자를 냈지만 적은 6,000명의 사상자를 냈고 거의 2,000명 정도가 포로가 됐다. 하지만 전투 뒤에 닥친 폭풍으로 많은 생명이 사라졌고 더불어 포획한 적함정들도 잃었다. 너무 많은 손상을 입어서 수리나 침수를 막을 수 없는 함정들은 포기하거나 소각했는데, 그 중에는 빌뇌브의 기함과 위력적인 산티시마 트리니다드도 포함돼 있었다.
4부 트라팔가르 이후의 넬슨
죽음과 변용 1805~85
넬슨은 죽은 지 몇 달만에 실존하는 영웅에서 국가의 신으로 탈바꿈했다. 영국이 배출해 낸 가장 위대한 전사이자 역사상 가장 뛰어난 해군 사령관 넬슨은 평소 바라던 대로 승리의 순간에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넬슨의 죽음을 한층 애처롭게 만든 것은 그가 죽어가는 내내 정신이 온전했다는 사실이다.
넬슨의 죽음은 곧 대중의 생활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12월 5일이 승전 기념일로 정해지고, 국민들 모두 엄숙한 분위기로 그 날 하루를 보냈다. 넬슨과 가장 가까웠던 사람들에게 넬슨의 죽음이 가져온 결과는 저마다 달랐다. 넬슨의 동생였던 윌리엄 넬슨은 백작으로 신분이 상승했으며, 연금 6000파운드와 주택 매입비 10만 달러를 받았다. 하지만 엠마는 넬슨의 장례식에 참석할 기회조차 박탈당했고, 국가에서 보상을 해주도록 조처해 달라는 넬슨의 요청도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새로운 연인을 구하지 못하자 엠마의 아름다움과 매력은 점차 시들어갔고, 넬슨이 남긴 유산을 탕진하다가 결국 머턴에 있는 집까지 처분했고, 심지어 넬슨이 보낸 편지까지 돈을 받고 팔았다.
막대한 비용을 들여 해전의 영웅들과 왕족들, 국가적인 거물들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 장중한 장례식을 치르고 나자 영국의 상실감은 상당 부분 해소되었고, 영광스럽게도 장기적으로는 위험에 처한 섬나라를 돌봐주는 부적의 역할로서 넬슨의 이름을 재창조했다. 반면 넬슨 우상화의 물결에 반기를 든 한 작가가 있었는데, 바로 왕정과 제국과 전쟁을 비판한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였다. 미국 독립 혁명과 프랑스 혁명에 우호적이었고 구시대적 영국의 '자유'를 꿈꾸었던 그는 영국 해군에 노골적으로 혐오감을 드러냈고, 이 '바다괴물'이 나라를 괴롭히고 질식시킬 것이라고 생각했다. 블레이크는 평화가 다가오는 시기에 전쟁을 향한 열정을 되살렸다는 이유로, 나일강 전투 승리 후에도 그 행복을 함께 나누지 않았다. 그러나 넬슨이 죽으면서 그 인물이 지닌 의미와 속세의 신이자 국가적 우상으로서 그의 위치를 이해했다. 1813년 마침내 전쟁이 종막을 맞고 나폴레옹이 몰락할 조짐을 보이자 넬슨의 필요성도 감소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넬슨을 대신해 새로운 인물들이 속속 등장하지만, 이들은 결코 넬슨을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전쟁에 승리해서 새로이 영웅이 될 수는 있었지만 불가능을 뒤엎고 살아남는 부적의 역할을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넬슨의 부활 1885~2005
빅토리아 시대 후반의 평화로운 기간, 독일 군대 때문에 프랑스로부터의 위협이 사라지자 넬슨에 대한 관심도 희미해졌다. 총리 윌리엄 유어트 글래드스턴(William Ewart Gladstone)으로 그 특성이 상징되던 시대에 넬슨은 어울리지 않는, 심지어 필요 없는 인물로 간주되었다. 글래드스턴은 19세기의 두드러진 산업 정책 안에 도덕적 열정과 자유주의적 개혁과 위계 구조 타파를 통합시켰으니 말이다. 그는 또한 해군을 좋아하지 않았고 소득세를 폐지하기 위해 해군의 규모를 줄이고 싶어했다.
그러나 1890년 유럽 각국과 미국에서 몰아치는 경제적 도전과 전 세계적인 해군력 증강을 위한 군비 지출의 수준이 높아졌다는 점, 그리고 또 한번 전쟁이 있을 거란 전망 등이 엄습하면서 1890년대는 넬슨의 전성기가 시작되었다. 아이들 역시 '케임브리지 주니어' 역사 교과서를 통해 '넬슨이 의무를 중시했으며 매우 대담하고 용감하면서도 친절하고 따뜻한 사람'이라는 점을 배웠다. 넬슨은 미래의 시민이 될 아이들에게 애국심과 도덕적인 가치관 등을 가르치는 데 사용돼야 했기 때문에 이 교과서에서는 엠마 얘기나 나폴리 얘기 등 논쟁의 여지가 있는 화제는 다루지 않았다.
지난 200년 간 우리는 피와 살을 갖춘 넬슨과는 훨씬 거리가 먼 수많은 넬슨을 만들어왔다. 그런 넬슨은 각 시대마다 모든 요구 조건을 충족시켜 왔다. 신성시되고, 숭배 받고, 욕을 먹고, 때로는 무시되기도 하면서 그는 여전히 영국이 고난을 겪던 시기의 국가적 우상으로 남아있다. 그의 진정한 위대함은 그가 무엇이든 도전하려고 했다는 점, 해군 장교라는 전문 직업을 넘어서 전략가이자, 정치가이자, 외교가로 활동하면서 조국의 이익을 위해 애썼다는 점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다른 이들이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을 때 넬슨은 행동하는 용기를 지닌 사람이었고 거의 모든 상황에서 옳은 판단을 내렸던 천재였다. 현대인들이 만들어내는 넬슨 역시 우리의 넬슨이다. 하지만 그것은 반드시 그의 삶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에 근거를 두어야 할 것이다. 우리의 필요와 그의 진실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한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