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중, 사하라 사막에 추락한 비행기의 잔해 속에서 한 남자가 발견됩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숨은 붙어 있었지만 온 몸에 끔찍한 화상을 입어 목숨이 위태롭습니다. 다행히 그를 발견한 사막의 베두인족이 그를 보살펴 목숨을 건지고 연합군 야전병원으로 이송됩니다. 하지만 환자는 기억상실증으로 자신의 이름도, 국적(전쟁 중에는 정말 중요한 것인데!)도 모릅니다. 병원에서는 몇 가지 단서에 근거해 그를 ‘영국인 환자(English patient)’로 부릅니다(스포일러 있습니다).
남자는 이탈리아 전선의 야전병원에서 캐나다 간호사 출신의 한나의 따뜻한 보살핌을 받습니다. 한나는 전쟁터에서 애인도, 친구도 잃은 불행한 여인으로 남자의 고통스러운 말년을 지켜보다가 마지막 가는 길을 고통 없이 편히 지내도록 보살피기로 결심합니다. 수도원의 잔해 속에 그의 쉼터를 만들고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모르핀도 아끼지 않습니다. 일종의 야전 호스피스 병동이네요. 남자는 죽어가면서 잃어버린 기억을 조금씩 되찾습니다. 한나는 한 남녀의 기구한 사랑과 잔인한 이별 이야기를 듣습니다.
전쟁은 언제나 의사들에게 큰 도전거리를 안겨줍니다. 역사를 살펴보면, 과학과 기술의 발전에 비례해 무기의 살상력도 커지는 것을 알게 됩니다. 총칼의 시대와 총포의 시대에 전상자들의 부상은 특성이나 강도는 비교할 나위 없이 달라집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터졌을 때, 의사들은 종전에 겪어보지 못한 특이한 부상자들을 만납니다. 다른 곳은 멀쩡한 채 얼굴만 심하게 다친 병사들입니다. 원인은 참호전 때문이었지요. 참호 속에 웅크리고 있다가 고개를 잠깐 내미는 순간, 적진에서 날아온 총알이 머리를 강타해 머리와 얼굴, 턱을 심하게 다치게 하니까요. 또한 교전 중에도 참호 박으로 내놓은 머리와 팔, 역시 적의 총포 공격에 노출됩니다. 이런 이유로 얼굴 손상이 전쟁의 특징적인 손상으로 떠오릅니다.
의사들은 파편 맞은 얼굴을, 날아간 턱을 부상병들의 얼굴과 턱을 최대한 원상 회복시키기 위한 ‘재건’ 성형 수술을 시작합니다. 가장 활약이 컸던 의사는 뉴질랜드 출신으로 영국에서 활약한 이비인후과 의사 해럴드 길리스(Sir Harold Gillies; 1882~1960)입니다.
길리스는 앨더샷의 캠브리지 군병원(the Cambridge Military Hospital, Aldershot)에 얼굴과 턱 수술을 전문으로 하는 병동을 세웁니다. 전선에서 얼굴을 다친 부상병들 ‘앨더샷, 캠브리지 병원’이란 꼬리표를 달고 모두 여기로 후송됩니다. 이곳에서 얼굴 수술만 전문으로 하는 의료진의 수술과 치료를 받지요. 길리스의 얼굴 재건 수술 덕분에, 부상병들은 어느 정도는 복원된 얼굴로 고향에 돌아갈 수 있었고, 사회에 적응하는데도 큰 힘을 얻습니다.
또한 길리스 덕분에 시시한(?) 미용 성형 수술에 불과했던 성형 수술이 전문적인(!) 재건 성형 수술의 지위를 얻습니다. 그런 이유로 지금도 길리스는 ‘성형 외과의 아버지’로 추앙 받습니다. 병사들의 망가진 얼굴을 섬세하게 고치던 그 수술 기술이 지금의 미용 성형 수술의 기반이 되었으니까요.
길리스가 1917년에 수술한 환자. ⓒ 위키백과
이렇게 시작한 재건 성형 수술은 다음 전쟁을 통해 비약적인 발전을 합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얼굴 수술이 발전하는 토대를 마련했다면, 제2차 세계대전은 재건 성형 외과 수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합니다. 전쟁이 터지자 이번에는 길리스의 사촌인 아치볼드 매킨도(Archibald McIndoe; 1900~1960)가 ‘화상’ 환자들의 재건 성형 수술을 시작합니다.
길리스처럼 역시 뉴질랜드 출신인 매킨도는 미국 메이요 클리닉을 거쳐 영국의 세인트 바르톨로뮤 병원에서 성형 외과 의사로 일합니다. 전쟁이 터지자 그는 영국 땅에 있는, 성형 수술 경험이 있는 성형 외과 세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매킨도는 즉시 영국 공군을 돕기 위한 전문 치료센터를 세웁니다.
‘덩케르크 철수’ 후 독일은 대규모 공군력을 동원해 영국을 침공합니다. 이에 맞서 영국 공군이 본토와 북해 상공에서 격전을 치릅니다. 당시에 영국이 주력 전투기들은 프로펠러가 달린 단엽기인 허리케인(Hurricane)이나 스핏파이어(Spitfire) 등입니다. 기수에 프로펠러가 있고 조종석은 프로펠러 뒤에 있는 구조이지요. 연료통은 프로펠러와 조종석 사이에 있는데 이곳이 공격을 받으면 화재가 나고, 조종석으로 금세 옮겨갑니다. 불행히도 좁은 조종석 안에 있는 조종사는 불길을 피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앉아 끔찍한 화상을 입습니다. 특히 노출된 얼굴과 손은 끔찍한 피해를 입지요. 조종사들에게 흔한 이런 화상을, 전투기의 이름을 따서 ‘허리케인 화상’이라고 불렀을 정도였습니다. <잉글리시 페이션트>의 첫 장면도 대공포가 연료통에 명중해서 불이 붙는 장면으로 시작하지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공군의 최신예 전투기 스핏파이어. 프로펠러와 조종석 사이에 연료 탱크가 있다. 시애틀 항공 우주박물관. ⓒ 박지욱
일단 화상을 입고 살아남은 연합군 공군 조종사들은 퀸 빅토리아 병원(Queen Victoria’s Hospital in East Grinstead, West Sussex)로 이송됩니다. 여기서 매킨도가 이끄는 영국 공군 야전 재건 성형외과 팀의 집중 치료를 받습니다.
영화에서 잘 보여주듯, 화상 흉터는 아주 끔찍합니다. 흉터가 옷으로 가려지면 다행이겠지만 얼굴에 남는다면 평생 큰 고역이 됩니다. 자신의 변해버린 모습 때문에 장병들은 목숨을 구했다는 위안도 잠깐, 거울을 보며 큰 충격을 받고 곧 엄청난 좌절과 우울증에 빠집니다. 사랑하는 이를 만나는 것도, 가족의 면회도 거부하고 심한 우울증에 빠집니다. 매킨도는 그 딱한 사정을 해결할 방법을 고심하던 중 피부 이식을 생각합니다. 멀쩡한 피부를 옮겨와 얼굴을 복원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얼굴 화상 재건 성형 수술이 시작됩니다. 얼굴은 한 인간의 정체성과 큰 관련이 있기에 얼굴을 재건한다는 일은 한 인간의 정체성과 자부심을 재건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649명의 환자들이 매킨도의 손을 거쳐갔고, 그들은 삶의 활력을 되찾고 원대 복귀도 했습니다. 또한 일종의 환우회를 만들어 서로를 위로하고, 후배들을 도와줍니다. 환우회의 이름은 <기니피그 클럽(Guinea Pig Club)>으로 불렸습니다. 작명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화상을 입은 그들의 얼굴이 한결같이 기니피그를 닮았었다는 의미도 있고, 한편으로는 매킨도의 실험 동물(!) 출신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틀린 말도 아닌 것이 매킨도는 장병들의 얼굴을 구하기 위해 이전에는 아무도 못했던 수술법을 개발하고 병사들에게 시험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를 탓할 사람은 없겠지요? 나치 독일 군의관들이 저지른 비인도적 생체 실험과는 분명히 차원이 달랐답니다.
퀸 빅토리아 병원에서 수술하는 매킨도. ⓒ 위키백과
남자의 정체는 헝가리인 알마시로 밝혀집니다. 전쟁 전에 사하라 사막에서 여러 나라에서 온 비행사들과 힘을 합하여 영국을 위해 지도를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터지자 그는 헝가리 국적이라 영국군에 체포되었고, 사고로 목숨이 위태로운 연인을 구하기 위해 탈출합니다. 연인을 구하러 가기 위해 지도를 독일군에 넘겼고, 독일제 연료를 채운 영국 비행기를 몰고 날아가다가 독일군의 대공포에 맞아 격추된 것이지요. 그리고 연합군 야전병원에는 영국인 환자로 입원합니다. 아마 그가 좀 더 버틸 수만 있었다면, 전쟁도 끝나고 영국으로 후송되어 매킨도의 수술을 받았을텐데…. 픽션이긴 하지만 안타깝습니다.
이 정도 되면, 참전 용사들의 정신적 육체적 재건을 위해 힘을 다한 매킨도가 활약했던 영국을 성형 강국이라 불러야 할까요? 아니면 멀쩡한 국민들의 몸에 칼을 대어 판에 박힌 듯 획일적인 성형 미인을 다량 생산하는 나라를 성형 강국이라 불러야 할까요? 어디 생각 한번 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