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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문턱에서
이 덕 희
싹트고 꽃피던 계절
어제 같건만
먼 산에 뭉게구름
들판엔 벼 이삭이 익어가고
산새소리 물소리
고요를 더하는데
산에는 머루, 다래
들엔 벼, 콩
새록새록 넉넉해지는
농부의 마음
비
이 덕 희
창 밖에 비 내리네
소록소록 말없이 내리네
마음과 대지를
목마름에 애태우더니
초가을 코스모스 꽃 향기타고
끝없이 내리네
답답하던 내 마음
말없이 적시는구나
가 을 하 늘
이 덕 희
저 높은 가을하는
하나 둘
뭉게구름
산마루 산허리엔
낙엽지는
떡갈나무
창 밖에 들리는 소리
바람소리
새소리
운산서원
德庵 李 德 熙
영덕군 병곡면 원황길 110-14(원황리 944)에 있는 운산서원은 원황마을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으며 고려 공민왕(1351-1374)때 충신이자 성리학자, 문장가, 신진개혁파로 이름난 단암 백문보와 8대 손인 성헌 백현룡을 배향하고 있다.
원황마을은 고려 말 14세기경부터 주민들이 이주하기 시작하였고, 마을 이름은 마을이 대나무 숲으로 이루어져 있어 영해부에서 보면 누렇게 보인다는 뜻의 원황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하며, 이 곳에 자리한 서원의 운산은 승운산 혹은 등운산이라 불리는 칠보산이 있어 여기에서 유래된 것으로 여겨진다.
서원은 1812년(순조12년) 영덕. 영해 지방의 유림들이 논의 주창하여 옛 람정승 터에 건축하였는데 그 당시 규모는 경덕묘 3칸, 입도문 3칸, 동재 직방재 3칸, 서재 박약제 3칸, 문루 6칸, 장경각 2칸, 행랑주사 12칸 등 규모가 큰 서원이었으나 현재는 강당만이 남아있다.
서원 사주문을 지나 들어가면 제일 먼저 운산서당 현판이 시야에 들어온다. 서원에 사당 현판도 있는 이유는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5)에 훼철되었다가 1899년(광무 3)에 백순지 등이 재건하여 1950년대까지 근대교육장소로 활용된 건물로 가치를 인정받아 2005년 6월에 운산서원 강당이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85호로 지정되었다.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로 2통 칸의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방이 배치되어 있는 중당협실형이고 전면에 퇴칸을 두고 헌함을 설치하였다. 또한 강당 전면 대청 전면에 원기둥 3본, 배면 가운데 기둥 1본원기둥을 세워 격을 높였으며, 상부가구는 5랑가이고, 제형판대공을 놓고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지붕은 홑처마, 팔작지붕에 골기와를 이었다.
백문보(1303-1374)는 고려 말 명신, 자는 화보, 호는 담암 또는 동재, 당호는 보인당, 시호는 충간이다.
선생은 충숙왕 때 과거에 급제하였고, 춘추관 검열을 거쳐 중서문하성 우상시에 이르렀으며, 공민왕 때는 인재를 뽑아쓰는 전리판서가 되어 무신 집권 이후 인재 동용제도가 무너졌으며, 몽고의 내정간섭으로 인재 등용의 길이 더욱 문란해져 이를 바로 잡고자 과거를 십과로 분리해 실시하여 전문적인 식견을 갖춘 인물을 뽑고, 또한 중요 정책의 결정에 참여하는 관원은 반드시 과거를 통해 뽑은 인재를 기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주장은 모두 채택되지는 않았지만, 전리판서로 있는 동안 고려 조정의 인사는 상당히 혁신될 수 있었다.
또한 공민왕은 그와 의견이 다르지만 그의 인품이 공명정대하고 충신이었기 때문에 정사를 맡겼으며 홍건적의 난을 수습하고 개경으로 돌아온 뒤 고려를 재건하기 위해환안도감이라는 관청을 신설하고 그 중책을 선생에게 맡겼다. 이를 계기로 그는 전쟁으로 소실된 전적들을 복구하면서 불교식으로 된 의식과 제도를 유교식으로 바꾸는 작업을 시도하였는데 이는 그가 과감한 개혁을 통해 고려를 새롭게 하고자 하는 인물로 후대에 평가를 받았다.
1363년(공민왕 12) 사직소를 올렸으나 윤허되지 않았고, 8월 경연에 나아가 종일토록 공민왕을 모시고 이재현, 이능간, 허백 등 15인이 강론을 하였는데 특진으로 관료직의 가장 정직인 관정대부, 정당문학에 임명되었다.
이제현과 이곡, 이색이 불교에 대하여 관대한 반면 백문보는 인사의 불이익을 감수하면서도 최해의 척불론을 강력히 주장하여, 이로 인해 정당문학이상의 관료로 승진을 못한 이유를 볼 수 있다.
1369년 고려의 국운을 예견한 듯 충청도직산의 토지를 정리하고 경상도 영해부(현 영덕군 영해면)으로 낙향하였으며 여러 자식에게 관직에 나가지 말 것을 유훈으로 남겼다.
1373년(공민왕 22) 세자 우의 스승으로 전녹생, 정추와 함께 임명되었으며, 1374년 12월 향년 72세로 졸하니 우왕이 부음을 듣고 심히 슬퍼하여 예관을 보내 조문하고 시호를 충간이라 내렸다.
충간공 담암 백문보 상향 축문에는 ‘사도를 멀리하고 정도를 보호하며, 군주를 바르게 인도하고, 주초를 확고히 세워, 후세 사람을 일깨우라’ 기록돼 있다.
백현룡(1543-1622)은 조선 중기 학자, 자는 문서, 호는 성헌이다. 진사를 지낸 백미량의 아들이다. 1609년(광해 1)식년시에 합격하였고, 일찍이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퇴계학의 정맥을 계승하였다. 그는 해마다 도산서원의 농운정사와 청량산사에 와서 묵으면서 대학, 근사록, 심경 등을 읽으며 퇴계의 가르침을 되새겼다.
1592년(선조 25)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킨 곽재우 휘하에서 화왕산성 방어에 온 전력을 다하였으며, 1609년(광해 1)에 식년시에 합격하여 성균관 생원에 올랐으나, 더 이상 과거와 벼슬에 대한 뜻을 갖지 않았다. 이때부터 그는 자연을 벗하여 오직 학문에만 마음을 기울였다.
운산서원은 1812년 건립된 후 지금까지 후학을 양성하는 교육기능과 백문보, 백현룡을 제향하는 유교공간으로 그 기능을 충실히 수행되었으며 하였으며 현재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己亥年 梅花之節 德庵精舍 閑筆
근암서원
德庵 李 德 熙
기해년 2월 21일 경삼회에서 문경을 찾아 첫 코스로 근암서원을 들렸다.
근암서원은 현재 문경시 산북면 서중리에 건립했다. 서원의 배향인물이 대부분 한 두 분을 모신데 비해 이곳에는 무려 일곱분을 배향하고 있다. 그 만큼 우리지역에 인물이 많았다는 간접적인 증거가 되고 다시 말하면 본받을 만한 성현이 많았다는 뜻도 될 것이다.
근암서원은 2011년 새롭게 복설이 되기 전까지 서원 본래의 건축물을 온전히 보전하고 있지는 않았다.
전국에 남아있는 700여개의 서원이 대부분 제향기능과 강학기능 중 제향기능만 힘겹게 지켜내고 있으며 그나마 여력이 있는 서원조차도 강학기능의 전통을 지켜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근암서원도 이와 마찬가지로 배향인물들의 후손들을 중심으로 제향기능으로서만 간신히 지켜왔으며 강학기능을 할 수 있는 모든 기능을 상실해 버린 것이다.
다가올 미래에 수없이 많은 서원들이 어떠한 모습으로 보존되고 남겨질 수 있는지는 아무도장담할 수는 없지만 서원들이 가지고 있었던 본래의 의미를 잘 새긴다면 오늘날에도 많은 부분을 긍정적으로 받아 들일 수 있는 부분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근암서원은 처음에 근암서당으로 창건되었는데 가정 갑진년(1544)영천 신잠 선생이 이 고을의 수령으로 왔을 때 각 면에 서당을 세웠는데 그 당시 비로소 창건이 되었다 한다.
이후 퇴계의 문인인 백담 구본령(1526-1586) 선생이 1574년 갑술년 전라감사로 제수 받아 가던 중 산양의 근암서당에 도착하여 나흘을 머물렀다 한다.
이때 백담 선생이 근암서당을 노래한 내용 중 “산양 존성당에 느낌을 읊다.”라는 시가 전해져 내려온다.
임진란 다음해인 만력 계사년(1593)에 왜군이 산양을 노략질할 때 서당도 함께 불이 탔고 이후 22년이 지난 1615년에 옛 모습을 다시 찾았다고 한다.
서당이 재건되고 40여년이 다되어가던 1653년(계사년) 사월에 활재 이구 선생이 통본주문을 상주목사에게 올렸다.
이후에 제출된 도내 통문의 내용에서 우암선생을 사당에 모시자는 건의가 계속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근암서당에 향현사를 건립하고 우암 홍언충 선생을 모시게 되어 그 기쁨을 상량문으로 표현하였다. 이때가 현종 6년(1665)이다.
우암 선생을 모신 후 4년뒤인 1669년 기유년에 유림들은 한음 선생을 모시기 위해 도내 통문을 만들었다.
우암과 한음선생 두 분을 모신 근암서원은 지역 향림의 우뚝선 유림의 강학장소로서 자랑스러움을 더하고 있을 때 목재 선생이 돌아가신 후 첫 신사년인 1701년에 목재선생을 배향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1982년 훼철된 서원을 후손들과 유림들이 힘을 합쳐 사당과 강당을 준공하고 봉안 고유제를 지냈다.
이후 유림 후손이 관리사에 거주하면서 사당과 강당 등 근암서원을 관리하고 보존하였으나 제대로 관리되지 못해 늘 지역 유림들의 반듯한 서원 복원에 대한 염원이 날로 커져갔다.
1990년대 중반부터는 지역 유림들의 근암서원에 대한 복원 건의가 문경시에 지속적으로 전달이 되었으며 이후 언론에서도 지역에 정신적 역할을 해 줄 서원 건립에 대한 의지를 함께 노력했다.
서원건립에 대한 물꼬는 문경시 유림단체협의회에서 문경시 전체 유림의 뜻을 시측에 전달함으로써 시작이 되었으며 곧바로 근암서원 추진위원회도 발족을 했다. 이 때 근암서원에 보관 중이던 목판과 관련 일반유물이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77호로 지정이 되었고 이를 계기로 본격적인 서원복원이 시작되었다 할 수 있다. 유물은 모두 843점으로서 서원에 배향된 인물 중 목재 홍여하, 우암 홍언충, 청대 권상일의 문집목판이 대부분을 차지하며 청대 권상일의 교지, 첩지, 영지가 70여점 있다. 이외에 청대 선생이 평생을 수집한 서책과 기록물이 많이 있으며 이 중 퇴계 선생 친필, 청대문집, 어제어필 등은 매우 귀한 자료라 할 수 있다.
배향인물로 우암 홍언충(1473-1508) 호는 우암, 본관은 부계이고 홍귀달의 아들이다.1495년(연산군 1)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그 해에 증광문과에 급제하였다.
1498년 사가독서하였으며 1503년에 홍문관 교리가 되었고 갑자사화에 연계되어 해도로 유배되고 중종반정으로 풀려났으나 이후 벼슬을 하지 않았음.
한음 이덕형(1561-1613)은 호는 한음, 쌍송이며 본관은 광주로 이민성의 아들이다. 영의정 이산해의 사위로 어린나이에 양사언과 막역한 사이였다. 1580년 별시문과급제, 승문원에 보직되고 이어 박사, 대사간, 대사성, 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의 사신과 화진을 교섭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 후 선조를 호종하고 청원사로 명나라에 건너가 원병을 요청하여 성공하였다. 이후 한성부판윤, 사도 도체찰사, 영의정을 지냈다.
사담 김흥민(1540-1594)은 본관은 상산이고 김범의 아들이다. 1570년
문과에 급제하고 이조좌랑, 사인이 되고 1590년 전한이 되었다. 임란때 의병을 규합하여 충보군을 편성하여 공을 세웠다.
목재 홍여하(1621-1678)는 본관은 부계이며 홍호의 아들이다. 1654년 진사로 식년문과에 급제 검열, 설서, 전적, 정언 등을 지냈다. 경연에서는 시와 주례 등을 강학하였으며 1658년 경성판관으로 재임시에는 부세를 줄이고 학교를 세워 교육을 일으켰다.
활재 이구(1613-1654)는 본관은 전주로 효령대군의 8세손, 칠봉 황시간의 외손으로 류직의 문인이다. 홍호, 권구 등과 교유하였으며 성리설에 있어서는 이기이원론을 따랐으며 퇴계의 병파인 류성룡을 학통으로 이이와 성혼의 문묘종사가 추진될 때 류지 등 영남유생 900여명이 반대 소를 올릴 때 반대소를 지어 올렸다.
식산 이만부(1664-1732)는 본관은 연안으로 이옥의 아들이다. 누대로 서울에 살다가 상주로 이거하였으며 일찍이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에 매진하였다.
청대 권상일(1679-1759)은 본관은 안동이고 권구의 증손이며 권심의 아들이다. 이구와 이재, 이만부의 학풍을 존중하였으며 퇴계의 사칠론에 대하여는 이와 기를 완전히 분리하여 이는 자연지성이 되고 기는 기질기성이 된다고 하였다. 1710년 증광문과에 급제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홍문관부제학, 한성좌윤, 지중추부사, 대사헌 등을 역임하고 80세에 기로소에 들었다.
아! 성현은 가고 없어도 선생께서 남긴 유업은 길이길이 보존되어 우리의 사표가 되는구나.
己亥年 梅花之節 德庵精舍 閑筆
이 덕 희
한맥문학가협회 청송지회장. 국제펜클럽경북위원회 운영위원. 표암문학 이사. 한국작가연대 이사. 한국문협청송지부장 역임. 경북문협부회장 역임. 대통령. 행정안전부장관. 법무부장관. 환경부장관. 문화재청장 표창. 자랑스러운 도민상 수상. 저서‘함양록’‘산따라 물따라’‘길따라 바람따라’‘세월의 강물’‘봄이 오는 길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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