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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차 야전사령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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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무반 스크랩 새 <오만원권>의 대나무 - 탄은 이정의 <풍죽도>
야전사령관 추천 0 조회 199 10.08.19 12:2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바람이 분다

 

세월의 모진 바람이, 세파의 험한 바람이 분다.

 

네가 버티면 얼마나 버티겠냐고. 인간의 의지는 한줌밖에 되지 않는다고 비웃으며.

 

하지만 여기서 꺾일 수는 없다.

 

그냥 힘없이 꺾어지기에는 스스로 쌓아온 자존심이 용납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조선 선비로써 이정도 바람에 굴복한다면

 

무능한 나라 때문에 고통 받는 그 여리디 여린, 힘없는 백성은 어찌하란 말인가?

 

그래서 나는 꺾일 수 없다. 비록 전란으로 초토화된, 더 이상 붙잡을 힘도 없는

 

힘없는 왕조이고, 무너진 나라라 할지라도 누가 백성을 책임져 나갈 것인가?

 

바람이 분다. 내 마음에도 분노의 바람이 분다...

 

 사군자는 매. . . 죽을 일컸는 말인데 옛 선비들은 자신의 인격도야와 학문을 닦기 위한 방편의 하나로 사군자를 많이 그렸습니다. 그래서 사군자는 단순한 감상용 그림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그렸으며 학문하는 선비로써는 시, , 화를 구분하지 않을 만큼 중요시 했습니다. 이런 사군자 선호 경향은 선비들뿐 아니라 도화서 화원들의 실기 과목으로도 매우 높은 배점으로 책정될 만큼 많은 화원들이 그리고 또 그렸습니다.

 

사군자라 하면 지금과는 상관없는 먼 옛날의 그림이라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실지 모르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도 문화센터에서 많은 분들이 배우고 있고 동양화나 문인화를 배울 때는 가장 기본적으로 배우는 그림이 사군자입니다. 그 이유는 사군자가 동양화에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기초가 되는 필법과 묵법을 바로 사군자를 배우는 과정에서 익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군자 중에서도 우리나라에서는 난과 대나무를 가장 많이 그렸습니다. 아마도 그 이유는 때묻지 않는 고결한 선비의 이상을 표현하기에 난초만한 대상이 없을 것이고 또한 세파에 꺾이지 않고 강인한 생명력으로 자신의 운명을 소중하게 개척해 나가는 의지의 표현에 대나무가 알맞는 대상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세속에 찌들지 않고 때가 될 때까지 은둔하며 학문을 닦는 군자의 모습도 대나무를 통해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사군자는 우리에게 오랫동안 사랑 받았으며 매우 친숙하고 가까운 그림입니다. 그래서인지 이번 새로 발행되는 5만원 권 지폐 뒷면에 어몽룡의 월매도와 더불어 탄은 이정의 풍죽도가 삽입되었나 봅니다. 그러고 보니 앞면에 묵포도 도까지 합치면 수묵화 그림이 세 점이나 삽입되었군요.

 

대나무 그림은 사실 굉장히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익산 미륵사지 중원 금당지 외부 벽체를 시작으로 고려불화에서도 간혹 볼 수 있지만 대부분의 묵죽도는 유교가 사회적 중심 이념으로 자리잡은 조선시대에 가장 많이 그려졌습니다. 하지만 왜란과 호란으로 인해 많은 전적이 사라졌고 지금 대부분의 묵죽도는 중기 이후에 그려진 것입니다.

 

중기부터 대부분의 선비화가나 화원들은 많은 묵죽도를 남겼는데 그 중 조선시대 3대 묵주화가(墨竹畵家)를 굳이 손꼽자면 탄은 이정(李霆 1541~1626), 수운 유덕장(柳德章 1675~1756,) 자하 신위(申緯 17691847)를 말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 분들 외에 훌륭한 작품을 남긴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묵죽화가 중에서 왜 이 세 분을 꼽는 이유는 이 세분 모두 그 시대를 대표하는, 시대의 양식을 대변하는 묵죽을 그려낸 대표화가이기 때문입니다.

 

  탄은 이정 신죽. 풍죽. 설죽, 1611, 견본수묵, 131.8 cm X 60.6 cm , 국립중앙박물관

 

그러나 유덕장의 묵죽은 이정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고 신위의 묵죽 또한 유덕장의 묵죽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에 우리나라 묵죽화가의 제1인자는 단연 탄은 이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화격이란 측면에서도 제가 그림을 직접 배관한 후 느낌은 이정의 작품에서 공간감과 깊이 감을 더욱 깊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탄은 이정, 통죽과 설죽,  1625, 견본수묵, 148.8 cm X 69.8 cm , 국립중앙박물관

 

아무튼 탄은 정은 묵죽화의 대가답게 아주 다양한 대나무 그림을 남겼습니다. 눈이 살며시 내려 앉은 모습인 <설죽>, 굵은 죽간을 중심으로 늙은 대나무를 그린 <통죽>, 새로 올라온 잎과 가지를 중심으로 그린 <신죽>, 마른 대나무 죽간을 중심으로 그린 <고죽>, 비에 젖은 대나무를 그린 <우죽> 등 많은 대나무 그림이 있지만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그림이자, 조선 묵죽도의 최고봉이라 꼽히는 그림은 바로 간송미술관 소장의 <풍죽도> 입니다.

 

오만원 권 새 지폐 그림의 도안을 보면 월매도에 가려 잘 보이지 않지만 이는 도안상 월매도를 앞에 배치하고 풍죽도를 깊이감있게 보여주기 위해 흐리게 도안되었지만 사실 그림의 완성도만 놓고 보면 월매도를 능가하는 그림입니다.

 

먼저 그림을 한번 보겠습니다.

 <풍죽도> 이정, 견본수묵, 127.5 cm X 71.5 cm, 간송미술관

 

그림을 처음 언듯보면 몇 그루의 대나무를 그린 것 같습니까? 아마 한 그루의 대나무만 보신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앞에 농묵으로 쳐낸 대나무 뒤로 엷은 담묵으로 쳐낸 세 그루의 대나무가 보일 겁니다.

 

그렇습니다. 풍죽도는 네 그루의 대나무를 그린 그림입니다. 이처럼 강한 농담의 대비를 한 화폭에 담아내어 깊이감을 극대화 시키는 것이 이정 묵죽도의 특징 중 하나입니다. 또한 이는 앞에 진한 대나무를 부각 시켜 소재의 특징, 즉 바람을 타는 대나무라는 <풍죽>의 특징을 부각 시켜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는 효과도 아울러 보여 줍니다.

 

맨 밑에 바위가 있고 그 위로 대나무가 보입니다. 바위는 보통 묵죽과 자주 그려지는 소재인데 바위의 모습이 곧은 성정의 대나무와 잘 어울려 매우 자연스럽게 보이기 때문 일 것입니다.

 

보통 중국 묵죽화가들은 바위의 비중을 높여 어떤 그림은 대나무에 못지 않게 크게 그리기도 하는데 이 정은 야박하리만큼 바위의 비중을 축소 시키는 것도 이정의 특징 중 하나입니다.

 

오죽했으면 탄은과 매우 가까웠고 당대 최고 감식안 이었던 오성 이항복은 이정을 최고의 묵죽화가로 인정하면서도 바위는 다른 사람에게 맡기면 어떻겠냐고 농담을 할 정도 바위에 대해서는 좀 야박한 편입니다. 하지만 이정은 아마도 세간이 이런 평에 이렇게 대답했을 것입니다. “내가 보여주고 싶은 건 대나무입니다. 굳세고 강인한 성정이 대나무에 넘쳐나는데 굳이 바위에 연연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

 

죽엽을 그리는 기법도 매우 여러 가지 기법을 보여주는데 풍죽도에서 보여주는 기법으로는 까마귀가 놀란 모습이란 뜻의 경아식(驚鴉式), 한자 낱 개(?)의 모양과 닮은 개자식(?字式), 나눌 분()의 모양과 닮은 분자식(分字式) 입니다. 

왼쪽 빨강 원 부분이 경아식, 오른쪽 파란색은 개자식, 흰색은 분자식

 

〈풍죽도〉에서는 바람을 맞이하는 쪽의 대나무 잎은 네 잎으로 그린 경아식인 사필경아식(四筆驚鴉式, 네 잎을 까마귀가 놀라 날개를 펴고 달아나는 모양으로 그리는 방식), 그 반대쪽 대나무 잎은 분자식을 여러 번 겹쳐 그린 첩분자식(疊分字式), 세 개의 잎으로 그린 삼필개자식(三筆?字式)의 형식을 보여줍니다.

 

이 정 이전이나 중국의 묵죽은 죽간의 비해 죽엽을 크게 그리고 서예적 필법과 서화동원을 강조하여 회화미는 있으나 사실성이 다소 부족해지는데 반해 이정의 죽엽의 특징은 전통적인 죽엽을 그리는 서예적 필법을 고수하면서도 그 사실감을 놓치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오랫동안 죽엽을 치밀하게 관찰하며 사생했고, 전통적 화본풍 필법을 완벽하게 몸으로 체득했기에 회화미와 사실성의 조화를 성공한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는 단계라 할 수 있습니다.

 

또 보통 수묵화를 그릴 때 한 획을 그린 후 채 마르기 전에 다시 붓을 대면 발묵이나 파묵 현상을 피할 수 없는데 이정의 풍죽도에서는 단 한곳도 그런 흔적을 찾을 수 없습니다. 이는 한 잎을 그린 후 완전히 마를 때까지 기다려 다른 잎을 그렸다는 반증이고 이런 식으로 한 폭의 묵죽도를 그리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기다림과 정성을 기울였는지 짐작 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전체적인 대나무 모습을 보면 그리 굵지 않은 대나무 한 그루를 11 방향으로 그려 올린 후 그림 중간 정도에서 오른쪽 1 방향으로 꺾어 올려 그렸습니다. 각도와 길이를 비교해 보면 거의 상하가 비슷합니다. 각도와 길이가 비슷하기에 비록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음에도 안정감이 훼손되지 않습니다. 또한 왼쪽 끝 죽엽에 그림 끝까지의 거리와 오른쪽 죽엽에서부터 오른쪽 끝까지의 거리를 같게 하여 보다 안정감을 살리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하게 보아야 할 부분은 하단 맨 처음 대나무를 뽑아낼 때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뽑아 낸 점입니다. 이 부분이 왜 중요하냐 면 바로 바람과 맞서는 대나무의 기세를 표현 하는데 이 보다 더 좋은 구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정 이전의 조선 묵죽도나 중국의 묵죽도는 대부분 거의 수직으로 그려졌으며 바람으로 인해 바람 반대방향으로 휘청거리는 그림이 대부분 이었습니다. 이는 바람을 타는 대나무를 그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림은 대나무 그림이지만 화가가 정작 그리고 싶은 것은 대나무가 아닌 바람 입니다.

 

하지만 이정의 <풍죽도>는 단순이 바람을 맞는 대나무가 아니라 불어오는 바람에 맞서는 그래서 활처럼 휘어져도 바람에 굴하지 않는 대나무의 응축된 기세를 표현한 것입니다. 이러한 구도가 바로 이정 풍죽도의 탁월한 점이며 조선 묵죽회화사의 새로운 지평을 확장시킨 부분입니다.

 

이정이 바로 그런 목적으로 그렸다는 증거는 또 있는데 바로 상단 부분 죽엽 부분을 바람에 흩어놓지 않고 한데 뭉쳐있게 그렸는데 회화적으로는 보다 바람에 흩어지듯 그리는 것이 더욱 바람의 힘을 느낄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그랬다면 대나무의 탄력적인 느낌은 많이 반감되었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팽팽한 긴장감이 풍죽도의 핵심이고 바람에 맞서 휘어질지언정 결코 휩쓸려 쓰러지진 않겠다는 선비의 강인한 정신과 책임감을 완벽하게 회화적으로 구현했다고 인정 받는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이정은 어떻게 해서 이런 대나무를 생각해 내었을까요? 이 의문의 단서는 이정이란 분이 어떤 분인지 알아야만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탄은 이정은 명종 9(1594) 왕실의 자손으로 태어났습니다. 이정의 증조할아버지인 이 구는 세종대왕과 정비 소현왕후의 넷째인 임영대군으로 비록 본인을 비롯하여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첩의 자식이지만 서자의 구분이 없는 왕실가문이기에 어릴 적부터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임영대군 이 구가 세조의 계유정난을 도운 공신이기에 많은 재산을 하사 받았고 그 뒤 후손들도 종친으로써 왕실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화 업과 관련에서는 중기 동물화가로 이름이 높은 두성령 이 암도 임영대군의 후손이니 이정과는 사촌이기는 하나 이 암이 이정 13세 때 타계하였고 화풍이 전혀 달라 영향을 받았다고는 보기 어렵습니다.

 

아무튼 이정은 초년 시절에 대한 기록은 찾기 어려우나 관례를 치른 후 종친부에 들어갔고 그때 정6품에 해당하는 석양정이란 봉호를 받습니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왕실의 적극적 지원에 힘입어 30대 이후 여러 문헌에서 묵죽으로 이름이 높아졌음을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자신이 직접 묵죽화를 그렸고 신하들에게 직접 서화 수련을 명했던 문예군주 선조가 이정의 그림을 높이 평가하여 족자 한 폭을 그릴 때마다 많은 물품을 하사 하였다고 하니 선조와 이정과의 사이는 매우 가까운 사이였나 봅니다.

 

그렇게 남부럽지 않게 종친으로서 편안한 세월을 보내던 이정에게 돌이킬 수 없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하니 바로 임진왜란 입니다.

 

정확한 연유는 알 수 없으나 이정은 전란 중에 왜군의 칼에 팔뚝이 거의 끊어질 만큼 큰 부상을 입었습니다. 물론 전란이 끝나고 이전보다 더 좋은 그림을 그려낸 것을 보면 팔뚝이 끊어질 만큼의 큰 부상이란 표현은 다소 과장된 표현이겠지만 섬세함이 요구되는 화가에게 팔의 부상은 아주 치명적인 상처 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 그런 시련을 이겨내고 더욱 뛰어난 작품을 남기는데 그것이 자신의 묵죽양식을 거의 완성한 당대의 보물로 인정받았던 [삼청첩]이고 그 서문에 최립이 그 과정을 자세히 밝혀 놓았습니다.

 

그 지옥 같은 전란이 끝나고 이정은 충청도 공주에 정착합니다. 그리고 생을 마감할 때까지 공주를 떠나지 않습니다. 선조와 매우 친밀했던 종친이며 당대의 최고 묵죽화가로 이름을 날리던 그가 왜 모든 것의 중심지였던 한양과는 거리를 두고 공주에서 그림에 매달리며 지냈을까요? 아무리 공주가 집안의 장토가 있는 곳이라 해도 그의 행보는 조금 의아스런 부분이 있습니다.

 

그 이유를 제가 감히 짐작 해보면 앞에서 말했듯이 임진왜란은 그에게 커다란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왜란 때 큰 부상을 입었지만 정작 그를 힘들고 괴롭혔던 건 육체적 상처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군왕과 가까운 종친의 한 사람으로써 조선을 움직이고 이끌던 사대부의 한 사람으로써 임금은 도읍을 버리고 백성을 버린 채 멀리 도망을 가버리고, 일본의 흉악한 무리들에게 조선의 강토가 무참히 유린 되는 현실 속에서 여리디 여린 백성들이 그 과정에서 살인, 약탈, 방화, 강간 등으로 고통 받는 지옥의 광경을 목도하면서 느꼈을 자괴감이 더욱 컸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조선을 책임진다는 종친 사대부로써 백성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울분과 미안함이 그를 괴롭혔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결코 조선 선비로써의 책임감을 포기하진 않았던 모양입니다.

 

아무리 바람이 무섭게 몰아쳐도 결코 좌절하지 않는, 총칼에 맞서 호미와 가래를 들고 맞서 싸우며 그것도 없을 때는 맨 주먹만으로도 적과 맞서 싸운 수많은 백성과 승려, 천민들을 보면서 바로 조선의 진정한 힘이 무엇인지 느꼈던 것입니다.

 

꺾여 부러진다 해도 바람과 맞서보겠다는 불굴의 기상과 의지. 그래서 역사적으로 외부로부터 찾아온 고난에는 한번도 무릎을 꿇어본 적이 없는 조선의 모습을 바람에 항거하는 대나무의 모습으로 그려낸 것 아닐까요?

 

이정의 <풍죽도>는 비록 관지가 없어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이정의 모든 기량이 동원되었고 묵죽도에서만 느낄 수 있는 독특하면서도 때묻지 않은 고고한 아취가 듬뿍 묻어 나오는 최상의 작품이기에 70대 만년에 그려진 그림으로 추측 됩니다.

 

세상살이 녹녹하지 않음을 새삼스럽게 피부로 느껴지는 요즘입니다. 왜 먼 미국에서 미국인들이 무리하게 빚을 내 주택을 구입한 문제가 미국에 친척하나 없는 대다수 국민의 어깨를 짓누르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뉴스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경제적 실패로 스스로의 삶을 포기하는 기사가 나오고 있고 모든 경제적 지표들은 앞으로 더 힘들어 진다고 매일같이 우리에게 악을 쓰고 있습니다.

 

이렇게 힘든 시기에 새 오만원권 지폐가 나온다 합니다. 새 오만원권에 실린 굳센 대나무처럼 많은 사람들이 힘겨운 시절을 잘 참고 견뎌내어 지갑마다 대나무의 향기가 그득해지길 바래봅니다.

 

희망은 포기하지 않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풍죽도>가 새겨진 새 오만원권 발행이 그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길 바랍니다.

 

 

2009 . 2 . 27

 

  

금강안金剛眼

 

 

* 이정의 풍죽도는 2005년에 한번 글을(http://blog.daum.net/thson68/5041956) 올린적이 있는데 지금 다시 읽어보면 영 글이 마음에 들지도 않고 사진도 좋지 않아 거의 새로 글을 써 다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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