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배 기간도 지배 이전 상황도 달라
대만은 1895년부터 1945년까지 50년, 한국은 1910년부터 1945년까지 35년(1906년부터의 통감부 시기까지 합치면 근 40년) 동안 일제의 지배를 받았다. 식민지 기간도 같지 않지만, 더 큰 차이는 식민지 이전의 상태이다. 한국은 조선, 대한제국으로 이어지는 독립국가였던 반면, 대만은 청나라의 변방 지역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식민지 이전 대만인들은 중앙정부의 부당한 간섭과 억압에 저항하는 의식이 한국인들보다 훨씬 강했다. 그에 따라 일본이 대만을 청나라의 지배로부터 해방시켰다고 여기는 대만인들도 적지 않(았)다. (나는 일본이 대한제국 황실과 정부로부터 자신의 고향인 평안도를 해방시켜 주었다는 사람을 본 적이 있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한국인은 극소수일 것이다.)
무엇보다 대만과 한국의 뚜렷하고 중요한 차이점은 식민지 이전의 근대화 경험이다. 대만은 식민지 이전 스스로 근대화를 위해 노력한 역사가 별로 없는 반면, 한국은 1870년대부터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자주적인 근대국가를 세우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가운데 보건의료와 관련해서 몇 가지만 살펴보자.
19세기 후반 서유럽 선진국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나라에서 가장 큰 보건의료 문제 가운데 한 가지는 두창(천연두)이었다. 두창은 이환율과 치명률이 높을 뿐만 아니라 살아나더라도 마비와 곰보 등 심한 후유증이 남는 무서운 병이었다. 그런 한편 18세기 말 영국인 의사 에드워드 제너가 개발한 우두술로 당시로는 거의 완벽하게 예방할 수 있는 유일한 질병이기도 했다. 이에 따라 서유럽 이외의 나라들에 근대서양 의료가 전파되는 데에 선봉 구실을 한 것이 우두술이다. 이러한 우두술이 대만에 체계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일제의 식민지가 되고 나서부터였다. 반면 한국(조선)은 1870년대부터 이재하, 이현유, 지석영, 최창진 등 민간인들이 보급을 시작했고, 1885년에는 국가사업으로 채택되었다.
빚내서 세운 ‘대한의원’, 운영자도 이용자도 일본인
1899년 3월 한국과 대만에 각각 최초의 근대식 정규 의학교육기관이 설립되었다. 대한제국 정부가 세운 ‘의학교’와 대만총독부가 세운 ‘대만총독부 의학교’가 그것이다. 똑같은 때에 설립되었고 언뜻 비슷해 보이지만 학교의 성격과 설립‧운영 주체는 전혀 달랐다.
1905년 강제적인 을사늑약 체결 후 한국 통감으로 부임한 이토 히로부미는 다른 분야들과 마찬가지로 보건의료를 장악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그에 따라 대한제국 정부가 설립한 의학교와 광제원(양한방 병용 병원) 그리고 황실이 세운 적십자병원을 통폐합하여 ‘대한의원’을 만들었다. 이름이 ‘대한’이라 자주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허울뿐이었다. 일제가 금융 분야를 장악하기 위해 만든 은행이 ‘한국은행'인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대한제국 정부는 1년 총예산의 2퍼센트라는 거금을 일본에게 빌려서 최신식 병원 건물을 짓고 설비를 마련했다. 바로 그때 망국의 덫이 될 일본 빚을 갚으려고 민중들이 벌인 국채보상운동에서 모금한 금액의 두 배에 이르는 큰돈을 들인 것이었다.
이렇게 세운 대한의원을 운영한 주체는 물론 일제의 지휘를 받는 일본인들이었다. 대신 의학교와 광제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환자들을 진료했던 한국인 의사들은 대부분 축출되었다. 대한의원을 이용한 환자도 일본인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요컨대 일제를 위한 고가의 병원을 짓기 위해 일제에 더 많은 빚을 짐으로써 망국의 과정을 재촉한 셈이다. 대한의원은 1910년 조선총독부의원으로 개칭되었고 경성제국대학 의학부가 세워진 뒤에는 그 부속병원이 되었지만, 성격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일제가 한국 강점과 통치의 명분으로 내세운 것이 한국의 근대적 발전이었고, 그 가운데에서도 근대식 의료와 교육의 도입을 첫손가락에 꼽았지만 실상은 이런 것이었다. 대한의원-조선총독부의원은 많은 사례 가운데 한 가지일 따름이다.
일제식민지 대만과 조선을 비교 연구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하지만 식민지시기뿐만 아니라 그 이전 시기와 식민지화 과정도 함께 살펴야 제대로 된 비교와 연구가 가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