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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환은 이제 과거 문제를 꺼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
아마추어 시절 어떤 선수였나. 평범했다. 재능이 그리 뛰어나지는 않았다. 어지간한 선수는 다해봤다는 국가대표 경험도 없다. 야구를 즐기고 최선을 다하긴 했다. 충암고 시절에는 프로 입단에 대한 생각이 많지 않았다. 오히려 대학 진학을 더욱 신경 썼다. ‘내가 프로선수가 될 수 있을까’ 의심을 품기도 했다.
대학 시절 진로 문제로 고민이 많았을 텐데. 고교 때는 그렇지 않았는데 대학에 와서 고민이 많아졌다. 두려움이 있었다. 프로 진출을 하지 못한 선배들이 실직자가 되는 걸 많이 봐 왔다.
애써 냉정을 찾기로 했다. 어차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었다. 경기에 나서서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었다. 실력이 없으면 다른 일을 해야하겠다고도 생각했다.
1998년에 롯데에서 지명을 받았다. 무슨 생각이 들었나. 훈련량이 많은 학교 야구부에서 뛰었던 게 행운이었다. 충암고와 원광대는 강한 훈련으로 유명한 학교였다. 그때는 구체적인 목표를 세우기보다 무작정 열심히 했었다.
냉정히 말해 졸업반 때도 프로팀에 갈 만큼의 기량은 아니었던 것 같다. 실력이 많이 모자라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다행히 롯데가 나를 2차 8순위에 지명했다. 도대체 어떤 점을 보고 나를 찍었는지는 지금도 의문이다.
프로에 가보니 어땠나. 1군에 쟁쟁한 선배가 많았다. 공필성, 박정태, 마해영, 박현승, 김민재 등 국가대표급 선배들이 전부 내야에 있었다. 텔레비전에서 보던 스타들이 모두 한 팀에 있었다.
덕분에 모르고 있던 것들을 많이 배울 수 있었다. 막내였던 나는 자연스레 선배들을 돕다가 친분을 쌓았다. 선배들은 야간경기가 끝나도 개인 훈련을 1~2시간씩 했다.
처음에는 왜 경기 끝나고 힘들게 운동할까 궁금했는데 금방 답을 찾았다. 실력이 없는 나는 운동을 소홀히 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1군은 언제 처음 올라왔나. 2차 8순위 선수에 대한 구단의 기대치는 뻔하다. 1군에 올라오기가 쉽지 않다. 나는 운이 좋았다. 입단 첫해인 1999년 여름이었다.
아마도 2군에서 타격 성적이 좋아 1군에 올린 것 같았다. 그때는 이상하리만치 잘 맞았다. 하지만 1군에서는 대수비 요원이 고작이었다.
그것도 점수 차이가 많이 날 때만 기용됐다. 이내 2군에 내려갔다. 그 사이 타석에는 딱 한 번만 섰는데 볼넷으로 걸어 나갔다. 보름 정도 출장을 간 느낌이었다.
2군에서는 어떻게 지냈나.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군 선배들의 벽이 너무 높았다. 그래도 우용득 2군 감독이 “넌 빠르다는 게 굉장히 큰 장점이다”라며 내게 관심을 보였다.
이 말을 듣자마자 이 기동력을 살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마해영, 박정태, 김민재 선배는 발이 조금 느렸다. 그때부터 부지런히 뛰었다.
그 해 다시 1군에 올라갔는데. 우연찮게 다시 올라온 1군 첫 타석에서 홈런을 쳤다.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래도 기회는 자주 오지 않았다. 그러다 한번 기회가 왔다. 고(故) 김명성 감독이 1군을 맡고 계실 때였는데 연장전에 내가 대타로 나갔다.
2사 득점권에 주자가 있었다. 그전까지 이렇게 부담스러운 상황에서 타격을 한 적이 없었다. 정말 난처했다. 그래도 긴장하지 않고 타석에 들어서려 했다.
적어도 마음만은 그랬다. 결과는 스탠딩 삼진이었다. 말 그대로 공 3개만 보고 내려왔다. 나도 모르게 굳어 있었던 것 같다. 더그아웃으로 돌아가자 김감독이 “타석에 왜 나갔냐”고 물었다.
“치러 들어가는 거 아닙니까”라고 말했다. 그러자 “알면서 왜 그러냐”며 “훈련을 실전에서 치기 위해서 한다. 공을 쳐다보지만 말고 무조건 쳐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뒤 보다 더 적극적인 선수가 됐다. 기록을 봐도 알 수 있지만 볼넷이 적은 이유가 그렇다(조성환의 한 시즌 최다 볼넷은 2003년의 37개다).
2003년에는 3할 타자(0.307)가 됐다. 운이 좋아서인지 항상 능력 있는 지도자들을 만나 발전을 했다. 배트로 공을 맞추는 건 아마추어 시절부터 자신이 있었다. 1군에서 꾸준히 출전을 하고 경험을 쌓다보니 기량이 늘었다. 적극적인 타격을 하는 것도 이유인 것 같다.
2004년 병역비리에 연루됐다. 명백한 잘못이었다. 한순간의 잘못된 판단으로 3년을 야구와 떨어져 지내야 했다. 앞으로 야구를 하지 못하게 될까 두려웠다. 병역비리가 공소시효를 얼마 안 남기고 터져서 6개월가량을 도망자 신세로 보내기도 했다. 달라진 건 없었다.
오히려 6개월을 더 낭비한 꼴이 됐다. 이후 자수를 했고 6개월 실형을 살았다. 진심으로 반성한다. 속죄한다는 마음으로 야구장에서 더 열심히 뛸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플레이는 다 하겠다.
병역 브로커를 찾은 이유는 뭔가. 잘못이라는 전제 아래서 말하겠다. 변명이 아니라 극단적인 선택을 한 이유를 말하는 것이다. 구단은 고졸 선수라면 3년, 대졸 선수라면 2년 정도를 지켜본다.
이때까지 가능성을 보여주지 못하면 전력 외로 분류한다. 내 경우는 원광대를 졸업하고 2년 정도는 프로 적응기가 필요했다. 프로 3년째인 2001년 88경기를 뛰었다. 2002~2003년에는 100경기 이상 출전했다. 이때쯤에 군 문제가 발목을 잡기 시작한다.
구단에서 인정을 받은 선수도 입대를 하게 되면 경기 감각을 잃는다고 불안해한다. 기회를 얻지 못한 선수에게 군 입대는 곧 방출이다. 병역 비리는 잘못됐다.
하지만 대체 복무를 할 수 있는 길이 생겼으면 한다. 경찰청 야구단도 몇 년 뒤 없어진다고 하는데 후배들이 걱정이다.
공익근무 시절은 어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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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환의 파이팅은 팀에 큰 힘이 된다. |
부산 동래구청에서 근무를 했는데 나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사직구장 관중석에 앉아 있을 때는 몇 분이 알아보시긴 했다. 어느 날 외야 오른쪽 폴대 근처에서 앉아있을 때 대호가 장외홈런을 쳤다.
옆에 있던 사람이 “타구 어디로 날아갔어요?”라고 물었는데 나도 놓쳐서 대답을 못 해줬다. 역시 야구 선수는 야구장에서 경기를 해야 한다.
현역으로 뛰고 있는 동료들을 보는 마음이 남달랐을 것 같은데. 같이 뛰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벤치 워머 신세라도 동료들과 함께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 일인지 절실히 느꼈다. 후배들이 야구장에서 좀 더 열심히 뛰어줬으면 하는 바람을 갖기도 했다.
1군 선수라면 누구든 경기에 나선다는 데 감사해야 한다. 2군 선수 가운데는 1군 경기에서 한 번도 뛰지 못하고 은퇴하는 경우도 많다. (마)해영이 형은 “2군 선수들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라도 1군 선수들이 잘해야 한다”고 말했다.
공익근무 중에 훈련을 열심히 했다고 들었다. 롯데 구단은 나를 기다려준다고 했다. 하지만 복귀해서 예전 기량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과감하게 포기하겠다는 각오로 준비를 했다. 근력과 지구력을 키우는 웨이트트레이닝을 주로 했다.
나이도 먹었으니 체력이 받쳐줘야 후배들과 경쟁할 수 있다고 봤다. 틈틈이 사직구장 관중석에서 경기를 지켜보면서도 많은 생각을 했다.
‘저 투수는 어떤 공이 좋고 저 팀은 어떤 식의 야구를 하는구나’라는 식으로 분석도 했다. 스윙은 그렇게 많이 하진 않았지만 항상 야구를 잊지 않으려 했다.
소집 해제 뒤 팀 훈련에 합류했을 때 무슨 생각이 들었나. 감회가 남달랐다. 정말 야구가 하고 싶었다. 남들 못지않게 열심히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자신감도 있었다. 마침 실전 위주로 마무리 훈련이 이뤄져 경기 감각을 빨리 찾았다.
2004년 이전 롯데와 지금 롯데는 어떻게 다른가. 분위기가 정말 좋아졌다. 제리 로이스터 감독 부임 직후보다 자유로워졌다. 지금 감독이 해임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성적을 내자는 분위기가 있다.
선수들이 각자 할 몫은 성실히 하고 있다.
(이)대호, (강)민호, (박)기혁이 같은 젊은 선수들도 알아서 잘한다.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요즘은 오히려 베테랑들이 젊은 선수들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 노력한다. 이런 팀에서 뛰고 싶었다.
4년 가까운 공백을 거친 선수치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타격이 좋다. 타격 자세를 바꿨는데 예전보다 내 몸에 더 잘 맞는 것 같다. 김무관 타격코치가 편한 자세에서 타격을 하라고 주문했다. 로이스터 감독도 나를 계속 믿어줬다.
마음도 편하고 자세도 편하니 부담이 없어서 잘 치는 것 같다. 동료들도 워낙 잘치고 있다.
뒷 타자인 이대호, 카림 가르시아, 강민호에 대한 평가를 부탁한다. 대호는 한국야구를 대표하는 타자다. 부족한 내가 평가하기 어렵다. 민호는 전지훈련 때부터 올해 잘 칠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 자신감이 넘쳐 있었다. 타격 기술도 향상됐다.
가르시아는 첫 대면부터 팀 분위기에 적응하려고 애썼다. 다른 외국인선수들은 개인주의가 강한데 팀의 일원이 되려는 노력이 인상적이었다.
언젠가 가르시아는 “내가 잘 쳐서 팀이 4강에 들면 그걸로 만족”이라고 말했다. 기억에 오래 남는 말이었다. 다들 배울 점이 많은 선수들이다.
어떤 점인가. 대호는 상하체의 밸런스가 워낙 좋다. 그 감각을 익히려 노력한다. 민호는 포수라서 그런지 투수와의 수 싸움에 능하다. 가르시아는 결승타를 때려내는 능력이 인상적이다. 다들 나보다 좋은 선수들이다. 장점을 따라 배우려고 애쓰고 있다.
올해 주전 2루수로 확실한 입지를 다졌다. 타순도 3번으로 올랐다. 시즌 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다. 사실 개인적인 목표도 없었다. 지금은 팀 전체가 워낙 짜임새가 있어 내가 내야의 한 부분을 맡기 부담스러울 정도다. 전보다 좋은 후배들이 많아졌다.
그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잘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타순은 박현승 선배의 컨디션이 좋아지고 내가 처지면 언제든 다시 바뀔 수 있다. 3번이라서 딱히 어떻게 하겠다는 건 없다.
롯데가 연일 만원관중을 몰고 다닌다. 팬들에게 항상 고맙다. 선수 입장에서 관중이 많은 경기와 적은 경기의 느낌은 하늘과 땅 차이다. 팬들은 심장이 뛰는 느낌을 얻기 위해 야구장을 찾는다.
그래서 관중이 많은 경기 때는 더 집중해서 플레이하게 된다. 사직구장에서 내 응원가도 금방 생기더라. 롯데 팬들이 자랑스럽다. 부끄럽지 않은 플레이를 하겠다.
등번호가 2번인데. 뉴욕 양키스 유격수 데릭 지터를 좋아한다. 멋있지 않나. 그래서 2번을 달았다. 꾸준한 성적에 화려한 플레이가 마음에 든다. 처음에 2번을 달겠다고 하니 “내야수가 무슨 2번이냐”는 핀잔도 받았다.
보통 2번은 포수의 번호다. 내가 팀에 없을 때 2번은 황준영이 달고 있었다. 그런데 전역할 때쯤에 황준영이 야구를 그만뒀다. 그래서 주인이 없는 번호였다. 사실 주인이 있어도 빼앗아 달려고 했다. 그만큼 애착이 있다.
우여곡절이 많았다. 야구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야구는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고 좋아하는 일이다. 가장 소중한 건 가족이다. 하지만 야구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