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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사와 청동뱀/불뱀과 놋뱀/민21:4~9, 말씀:안광복 목사님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름 길인 에돔 땅을 통과하지 못하고, 북쪽길로 돌아서 갑니다.
그들은 가까운 왕의 대로를 포기하고, 척박하고 힘든 길로 변경하니까, 또 다시 리더와 하나님에 대해 불만이 쌓여서 불평과 원망을 합니다.
민수기 21장 4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호르 산에서 출발해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돌아서 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의 마음이 그 길 때문에 조바심이 났습니다 (민21:4)
이들의 불평은 지름 길로 가지않고, <우회하여 간다>고 불평을 합니다.
우리들도 소망했던 일들이 잘 이루어지지 않을 때에는 불평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전체적인 의도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기 때문에 더 원망을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서 "조바심이 났다" 는 것은 <마음이 상했다>는 말입니다.
또 그동안 잘 먹던 음식에 대해서도 불평을 많이 했어요.
하나님은 처음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먹여 주었고, 그들이 [만나]를 처음 먹을 때에는 <꿀섞은 과자>라고 좋아했는데, 오래먹다 보니까 <기름섞은 과자>라고 말하다가, 이제는 <형편없는 음식>이라고 평가절하 했어요.
[만나]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이고 축복의 음식인데, 40년간 먹다보니까 감사하기는 커녕, 그 음식을 <쓰레기 같은 음식>이라고 불평을 하고 있어요.
여러분!
이렇게 40년을 한결같이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서 하나님도 서운했을 거예요.
우리는 이 말씀속에서 어떤 교훈을 얻습니까?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물론 속이 상하고 답답하지만, 우리의 감정을 그대로 솔직히 표현하면, 안 됩니다.
우리의 감정을 그대로 표출하면, 분명히 나중에 후회하게 됩니다.
우리는 냉정히 사태를 분석하고, 넓은 마음으로 크게 보아야 합니다.
지금이 어떤 상황인가? 언제쯤 도착할까? 왜 하나님이 지름길을 막았을까?
그런 원인을 이성적으로 판단하여 파악하고, 정확하게 생각하고 말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겉으로만 훑어보고, 하나님에 대해 오해하면 곤란해요.
하나님에 대해 오해를 하다보면, "하나님은 정말 능력있는 분일까?
하나님은 정말 살아계신 분일까?" 라는 의구심까지 하게 되므로, 그렇게 접근하면 절대로 안 됩니다. 하나님을 오해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언제나 나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내 모든 상황을 이미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선한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이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좋으신 하나님을 언제나 신뢰하십시오.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감정적으로 해결하지 말고, 지혜롭게 처신하세요.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어떻게 행동하셨을까요?
6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그들가운데 독사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독사에 물려 죽었습니다."(민21:6)
개역 성경에는 <독사>를 [불뱀]이라고 표현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화가 나서 <독사>를 보냈어요.
여기에서 <독사>를 [불뱀]이라고 하는 것은 독사의 등에 불타는 반점이 있어서 그렇게 불렀고, 그 독사에게 물리면 고열에 시달리다가 죽는 치명적인 [독]을 갖고 있어요.
여기 본문에 나타나는 [독사]는 어떤 의미일까요?
여기서 얘기하는 [독사]는 <사회에 끼치는 악한 영향>을 말합니다.
다시말해서 <술취함>과 <포악한 것>, 그리고 <위선적인 나쁜 것>들을 가리킵니다.
우리의 인생에도 여러가지 [독사]와 같은 것이 많이 있어요.
그것은 우리들을 지속적으로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지요.
그것이 때로는 <건강>일수도 있고, 그것이 때로는 <사람과의 관계>일수도 있어요.
물론, <나의 혈기>와 <나의 나쁜 성품> 일 경우도 있구요.
누군가 나를 시기하고, 미워하고, 질투하고, 음해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럴 때 우리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7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을 살펴 봅시다.
"그러자 백성들이 모세에게 와서 말했습니다. 우리가 여호와 당신께 대항 함으로써 죄를 지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저 뱀들을 우리에게 없애 달라>고 기도해 주십시오. 그러자 모세가 그 백성들을 위해 기도해 주었습니다.(민21:7)
그들의 반응은 정확하고,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어요. 그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첫째, 그들은 <회개> 했어요.... "하나님과 당신께 죄를 지었어요"라고 인정했어요.
두번째, 그들은 <간구> 했어요.... 하나님께 <뱀들을 없애달라>고 간절히 기도 했어요.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예요.
[신앙 생활]이라고 우리의 삶과 동떨어진 생활이 아니예요.
[신앙 생활]을 또 다른 말로 표현하면, [믿음 생활]이라고 말해요.
[신앙 생활]은 <뭘 믿는 것>인가요? ---> <하나님>을 믿는 거예요.
하나님의 <어떤 것>을 믿나요? ---> 그 분의 <성품>을 믿는 거예요.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거예요.---> 그 분의 <행하신 일>을 믿는 거예요.
그 하나님이 지금도 <나와 함께 하심>을 믿고, 내가 신뢰하는 거예요.
앞으로 <나와 동행하시고>, <나에게 은혜와 복을 줄 것이라>는 사실을 믿는 거예요.
그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며, 그 분의 약속을 믿는 거예요.
우리의 <신앙이 성숙되어 간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신앙의 성숙도>를 측정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첫째로, 신앙의 성숙은 하기 싫어 하는 것을 <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신앙]은 무엇일까요?
과거에는 하기 싫었지만, 이제는 해야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게 신앙이예요.
과거에는 알면서도 안했지만, 이제는 해야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게 신앙이예요.
과거에는 안 했지만, 이제는 그것을 포용하고, 기쁜마음으로 섬기고, 반응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기 싫은 것을 비로소 하려고 할 때, <신앙이 성숙했다>고 하는 거예요.
둘째로, 신앙의 성숙은 <더 넓은 영역에서 하나님을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아는 영역을 넓혀서 생각해야 해요.
내가 하나님을 늘 의식하며 그 영역을 더 넓히도록 나의 생각을 키워야 해요.
하나님을 의식하고, 헌신하는 생각을 더 넓혀서 생각해야 해요.
<거룩한 습관>일 경우, 그런 마음과 그런 의식을 더 키워야 성숙해 지는 거예요.
그렇게 하나님에게 순종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성숙해져 가는 과정이예요.
셋째로, 신앙의 성숙은 <작은 싸움을 작게 끝낼수 있도록> 만드는 능력이예요.
사람은 두 부류의 사람이 있어요.
한 사람은, 별것 아닌 문제를 정말로 별게 아닌 것으로 끝내는 사람과,
또 다른 사람은 별것 아닌 문제를 큰 문제로 확대시키는 사람이 있어요.
우리의 삶 속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사소한 일들이 많아요.
사소한 문제는 그냥 지나가는 것이 오히려 현명해요.
넷째, 신앙의 성숙은 <문제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정확하게 판단할수 있는 능력이예요.
문제가 발생하면 "문제가 어디에서 왔는가?" 라는 원인을 규명하고, 파악해야 해요.
우리는 문제를 만나서 허둥대다가 제대로 대처하지도 못하고, 더 크게 만드는 경우가 있어요.
우리가 기도를 할 때, "하나님! 제게 벌어지는 모든 문제를 완전하게 모두 다 해결해 주세요" 라고 기도하는 것은 바람직한 기도가 아니예요.
그런 것은 <무당>에게나 요구하세요. 그것은 <미신>이예요.
무당은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 준다>고 얘기하며 현혹하지요.
점집이나 무당들은 <모든 문제를 모두 다 해결해 준다>고 큰 소리를 쳐요.
그러나 하나님은 여러가지 문제를 싸잡아서 해결해 주지 않아요.
그저 <넉넉하게 이길 수 있는 능력을 달라>고 기도해야 돼요.
점집이나 무당에게 바라는 우리들의 <심보>를 하나님에게 적용하면 안 됩니다.
모든 것을 완전히 <모두 다 해결해 달라>는 식으로 기도하면 안 되요.
우리는 자녀에게 <문제가 없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성숙함을 주세요>라고 기도하세요.
문제를 만났을 때, <그 원인과 그 핵심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정확하게 반응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불평하고 원망했지만, 그러나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았고,
그 해결책을 찾았던 것입니다.
8~9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뱀을 만들어 막대 위에 달아라, 누구든 뱀에게 물린 사람은 그 뱀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 모세가 청동으로 뱀을 만들어 막대위에 달았습니다. 그리고 뱀에 물린 사람들이 그 청동으로 만든 뱀을 보고 살아났습니다."(민21:8~9)
여기에서 하나님의 처방은 뭐예요?
1. 뱀을 만들어라.
2. 막대에 매달아라.
3. 물린 자가 보면, 살 것이다.
하나님의 이 처방은 아주 특이한 처방입니다.
어떻게 보면 너무나 쉬운 처방인데, <정말로 내가 바라볼 때 낫겠느냐?>는 [믿음]이 중요한 거예요.
<그런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보느냐?> 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믿음 테스트]를 하고 있어요.
결과는 <청동 뱀을 바라본 사람은 살았다>는 거예요.
여기에서 청동뱀은 무엇을 상징합니까?
개역 성경에는 <놋뱀>이라고 했어요. 그러나 <놋뱀>인지, <청동뱀>인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뱀]을 <은>으로 만들든지, <나무>로 만들든, 재료는 중요하지 않아요.
또 여기에서 [뱀]자체는 능력이 있는게 아닙니다. 사람이 만들은 [뱀]은 능력이 없어요.
여기서 <놋뱀>은 무얼 의미해요.
<놋뱀>은 죄를 말하고, 그 [죄] 때문에 <나를 다시 한번 깨닫게 해 주는 것>을 말합니다.
첫째, 뱀을 보면서 자기 [죄]를 자각하게 만들었어요.
둘째, 하나님의 치유의 능력을 깨닫고, <하나님에게 온전히 맡기라>고 한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그런 특별한 <상징물>을 내 걸은 거예요.
그들은 죄로 인해 죽어 가기 때문에 그들을 살리고자 [구원의 소식]으로 <장대에 [뱀]을 만들어 걸라>고 하신 것이고, 그 [뱀]을 보면 <백성들이 살아났다>는 거예요.
막대기 위에 매달은 <청동뱀을 보면 살아난다>는 말은 효과도 없고,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보는 것을 거부하고, 포기한 사람은 그냥 죽었어요.
그러나 청동 뱀을 쳐다 본 사람은 <독사에 물린 사람도 살아났다>고 했어요.
이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정한 법을 지키면 살고, 지키지 않으면 죽었어요.
청동 뱀은 <구원>을 상징해요.
본래 죽음을 가져온 것이, 이제는 생명을 가져올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청동 뱀을 바라본 사람은 <독사에 물린 사람도 살릴수 있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않는 말이지만,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은 살수 있다>는 얘기예요.
왜 그런지 아세요.?
그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정했기 때문이예요.
여기에서 놋뱀과 청동 뱀은 <예수그리스도>를 상징해요.
예수님과 니고데모와 대화하는 가운데,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했어요.
요한복음 3장 14절에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는 것입니다.(요3:14~15)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쳐든 것 같이, 나도 높이 들려야 합니다.
이것을 믿는 사람마다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것이 가능합니까? 예, 그것은 가능해요.
죄인들이 그것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천국에 간다면, 그것은 너무 값싼 은혜가 아니냐?"는 물음에 <복음은 바로 그런 것이예요>라고 대답해야 해요.
<복음>은 그렇게 해서 믿음 을 갖고 바라 본다면, <구원>을 얻을수 있어요.
<복음>은 어려워서 못 믿는게 아니예요.
그러나 <복음>은 믿지 못해서 못 믿는 사람들이 많아요.
오히려 너무 쉬워서 믿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아요.
그러나 <복음>은 너무나 신비롭기 때문에 납득이 잘 가지 않는 거예요.
복음은 너무 [씸플]하고, 너무나 [신비]해요.
우리는 그것을 믿으면 살고, 믿지 못하면 죽는 거예요.
교우 여러분!
광야의 길에서 시달리다 죽는 인생처럼, 우리도 언젠가는 [죄]로 인해 죽게 됩니다.
또 한가지 죽는 원인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서 죽게 되지요.
이것은 우리의 실제 모습입니다.
우리들은 <불뱀에 물린자>들 입니다.
우리들은 그들과 같이 언젠가는 죽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실체를 잘 모르고 있어요.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를 똑바로 알고, 그런 고백을 하시기 바랍니다.
결국에는 그런 인간들이 불쌍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놋뱀을 만들어 매달으라>고 말씀했던 거예요.
오늘의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놋뱀을 보기만 하면, 살수 있다>는 것이예요.
그런 [확실한 믿음]을 갖고 쳐다보면, <살수있다는 확신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하지 않고 쳐다보지 않았기 때문에 <죽은 사람들>도 있어요.
여기서 그분은 누구예요?
그 분은 <예수님>이예요.
예수님을 바라보면, 우리는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그분을 믿고 나가세요.
그 분을 믿고 의지할 때, 우리의 모든 문제가 풀리고, 해결될 것입니다.
요단 동편 정복기/민 21:21~35/말씀:안광복 목사님
오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치도 못한 전쟁을 일으킵니다.
그 전투가 "왜 일어났으며, 어떻게 승리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가나안 땅으로 향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 서편을 건너기 직전에, 두 족속들(아모리족과 바산족)과 전투가 벌어 집니다.
그 때에 하나님은 동쪽의 <아모리 족속을 멸망시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준비도 없이 <어떻게 그들을 멸망시키는가?>를 살펴 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이 먼저 아모리 왕에게 사신을 보냅니다.
민수기 21~23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의 사자들이 아모리족의 왕, 시혼에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당신의 나라를 통과하게 해주십시오. 우리는 밭이나 포도원으로 들어가지 않고, 우물물도 마시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당신의 영토를 다 통과할 때까지 왕의 대로를 따라 가기만 할것입니다. 그러나 시혼은 이스라엘이 자기 영토를 통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오히려 군대를 소집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러 나섰습니다. 그리고 야리스에 이르러 이스라엘과 대대적인 전투를 벌였습니다. (민 21:21~23)
얼마 전에 에돔 지역을 통과하려는 것과 비슷한 상황입니다.
그 당시에 에돔 왕이 거절하였듯이, 아모리 왕도 역시 거절을 합니다.
그 때에 에돔 지역에서는 싸우지 않고 피해서 북쪽으로 돌아서 왔는데, 이번에 아모리 지역에서는 그들과 싸우고, 그 전투에서는 승리를 이끕니다.
이 대목에서 에돔 지역과 아모리 지역은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그것은 지역이 다른 게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두가지로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에돔 족속과의 만날 때에는 <싸우지 말라>고 하셨고,
아모리 족속과의 만남에서는 <싸워서 이기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럼, 왜 하나님은 <싸워서 이기라>고 했을까요?
민수기 21장 24~25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를 칼로 쳤고, 아르논에서 얍복에 이르는 그의 땅을 차지해 온 암몬 자손에게까지 이르렀는데 그들의 경계선은 강력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성을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헤스본과 그 주변의 지역에 있는 아모리 사람들의 모든 성읍들에 거주했습니다. (민 21: 24~25)
여기에서 "칼로 쳤다"는 말은 <싸워서 이기라>는 말입니다.
자 보세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하나님은 에돔 족속과는 <싸우지 말라>고 해서 먼길로 돌아서 갔으나,
그러나 아모리 족속과는 <싸워서 이기라>고 명령을 했어요.
하나님이 왜 그랬을까요?
이부분이 신명기 2장 24~25절 에도 나와 있어요. "이제 일어나 아르곤 골짜기를 건너라. 보라. 내가 너희 손에 헤스본 왕인 아실리 사람과 시혼과 그 나라를 주었으니, 이제 그와 더불어 싸워 그땅을 차지하라. 바로 이날부터 내가 하늘 아래의 모든 민족들이 너희를 두려워하고, 무서워하게 할 것이다. 그들이 너희에 대해 듣고, 벌벌떨며 너희로 인해 괴로워 할 것이다.(신 2:24~25)
신명기의 말씀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여기를 떠나 아르곤 강을 건너 가라. 내가 아모리 사람과 그 땅을 너희에게 넘겨 주겠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 땅을 점령하라. 오늘부터 내가 온 세상 사람들이 너희를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도록 해주겠다. 그들이 너희 소식을 들으면 떨고 불안해 할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신있게 말했어요.
하나님의 계획은 아모리 족속과 싸우고, 또 바산 족속을 쳐서 <승리하게 만들어 주겠다>는 생각입니다.
특히 바산 족속은 가나안으로 가는 경로와는 관계가 없는 요단강의 동쪽 지역인데, 하나님은 갑자기 <그곳으로 가서 싸우라>고 명령하십니다.
왜 하나님은 <두 족속과 싸우라>고 명령을 했을까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곧바로 가나안 땅으로 가게 하지 않고, 그들과 싸우게 하셨을까요?
첫째, 그들로 하여금 거룩한 백성과 거룩한 나라를 만드시길 원했어요.
하나님은 그들이 <예배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원하셨어요.
둘째,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서 원래 살던 부패한 가나안 족속들을 심판하기를 원하셨어요.
사실로 아모리 족속들은 아브라함 때부터 그 지역에 400년이 넘도록 패권을 잡은 민족이므로, 그 곳에 죄악이 가득했으므로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기를 원하셨어요.
그 곳에는 우상을 숭배하고, 온갖 음행과 도박이 성행하여 [죄악]이 만연했기 때문에, 두 민족을 심판하기를 바랬어요.
그들이 섬기는 신은 <바알 신>이고, 성전마다 제사는 드렸지만, 성전에서 창기들의 음난한 행동을 서슴없이 저질렀고, 음행을 일삼는 족속입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자란 아이들은 남자 아이를 무당으로, 여자 아이는 창녀로 살았습니다.
신명기 18장 9~11절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호와 께서 주시는 그 땅에 들어가거든 그곳 민족들의 더러운 습관을 본받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자녀를 산 제물로 바쳐 불에 태우거나, 점을 치거나, 좋은 일과 나쁜 징조를 말하거나, 마술을 하거나, 무당이되거나, 주문을 외우거나, 죽은 사람의 혼을 불러오는 짓을 해서는 안 됩니다(신 18:9~11)
그들은 우상 숭배와 음란한 짓을 계속하면서 하늘에 있는 <바알 신>과 아내의 <아세라 신>을 섬겼어요
그들은 [풍요의 신]으로 <비의 신>이고, <농사의 신>입니다.
그들도 나름대로 바알 신전에서 제사를 드렸고, 신전 안에서 음란한 짓을 했어요.
왜 그들은 성스러운 성전에서 음란한 짓을 했을까요?
그들은 경제적으로 풍성하여 윤택한 삶을 살았고, 그러다 보니까 음란한 행위가 있었고, 하늘의 바알 신과 아세라 신이 <음난하게 지내면 서로 다시 사랑을 하게 된다>고 믿었고,
<그 축복으로 비를 내린다>고 잘못된 생각을 했던 것이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아모리 족속과 바산 족속을 멸망시키려고 했던 거예요.
하나님은 그런 모습을 그냥 방치하고, 내버려 두지 않았어요.
그들의 우상숭배가 극에 달했고, 엄청난 음란한 짓을 계속하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 싸우도록 명령을 했던 것이예요.
하나님은 가난한 땅이 요단강 서쪽에 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곳으로 가기 전에 동쪽으로 가서, 그들을 멸망시키고 심판하려 했던 것입니다.
오늘 제가 말씀드리는 두 민족과의 싸움은 그냥 싸우는 <전투>가 아니예요.
이 싸움은 하나님이 시킨 [영적전쟁]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이런 전쟁은 [영토전쟁]이 아니고, 영적으로 불량한 원주민을 심판하는 하나님의 [영적전쟁]이예요.
원래 그 땅의 주인은 하나님이예요.
그런데 그 족속들은 그 땅을 <패역한 땅>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땅의 주인을 바꾸고자> 하신 거예요.
하나님은 이 전쟁을 [거룩한 전쟁]으로 불렀어요.
그래서 이것을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룩한다>는뜻에서 성전(聖戰)이라고 했어요.
남자나 노인이나 어른이나 심지어는 가축까지 다 죽였어요.
그런데 원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인데, "이건 너무 잔혹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것을 생명윤리 차원으로 바라보면, 접근이 잘못된 거예요.
하나님은 그들을 이미 심판하기로 마음 먹은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 때에도 하나님은 심판하기로 작정하셨듯이,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했던 때에도 하나님이 새롭게 시작하려고 싹쓸이를 결심한 거예요.
그랬기에 하나님이 바라는 것은 [순종]과 [성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필요로 한 것은 [절대 순종]과 [절대 성결]이였어요.
그래서 가난한 땅에 들어 가자마자 하나님이 요구했던것은 <절대 성결>을 요구했어요.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의 말씀가운데 중요한 것은 여기에 나오는 전쟁 얘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이 [달라진 태도]를 유심히 관찰하세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직이 노예출신이므로, 그들에게는 전쟁에서 이길수 있는 힘이 없었어요.
그들은 능력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예요.
40 년간 광야생활에서 제대로 제식훈련도 받지 못한 사람들이지만,
아모리 족은 기름진 평야와 곡창지대를 <400 년간 차지했다>는 것은 <힘이 강했다>는 증거예요.
또 바산 족의 [바산]이란 이름도 기름지고, 비옥하며, <돌이없는 평지>란 뜻이예요.
그런 어마 어마한 장대한 체구와 힘이 강한 민족이기에 정탐꾼들이 볼 때에는 <자신이 메뚜기와 같았다>고 솔직히 표현한 거예요.
그러나 그들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있었어요.
그들은 상대가 되지않지만,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에 자신감이 있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태도>가 달라 졌어요.
과거의 이스라엘 백성같으면 불평과 불만이 가득차 있었을텐데....
그들은 <하나님이 싸우라>는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였고, 그 결과 그들과 싸워서 승리했어요.
그런 <믿음>이 중요해요.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숙해졌어요.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오늘 날 우리의 현실을 비쳐 보았어요.
우리가 사는 요즘 세상을 보면 내 자신이 너무나 나약하고 눈 앞이 캄캄해요.
지난 주에 제가 어떤 사장님을 만났더니, "요즘 공장 가동율이 30%도 안 된다"고 하네요.
직원도 줄여야 하고, 자금도 말랐으므로, 이제는 모든 희망이 없어 졌어요.
그러나 지난 주 큐티 본문에 나오는 이사야서 41장 10절의 말씀을 보면서 은혜를 받았어요.
“그러니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걱정마라. 나는 네 하나님이다. 내가 너를 강하게하고, 너응를 도와주겠다. 내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어 주겠다.”(사 41:10)
여러분이 이 말씀을 묵상해 보면, 단순히 <우리를 위로해 주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 속에는 분명한 <하나님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 하나님이 말씀해 주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분명히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대답은 For I am with you (네가 나와 함께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For I am your God (내가 너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려워 말라>고 하고, <놀라지 말라>고 말씀하는 거예요.
이 말씀은 막연히 <잘 될꺼야!>라는 말이 아니고, <나는 너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고, <너를 굳게 붙잡아서 너를 변화시켜 주겠다>고 말씀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은 고통스러웠으나 그들을 변화시켜 주었고, 힘과 용기를 주었으니까 <나가서 싸우라>고 했어요.
교우 여러분,
온전히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그리고 순종하십시오.
그 분은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자녀로 삼아 주셨으니까 이제는 그 분을 믿고 나가세요.
그러면 어떤 어려움도 극복하고, 승리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실 것입니다.
발락이 발람을 부름/민22:1~20, 말씀:이재훈 목사님
광야를 방황하던 유랑 민족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의 동편에 있는 강력한 도시국가들을 무너뜨리고, 승리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동안 불평과 원망만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승리하는 원인은 무엇일까요?
그 전환점은 민수기 21장의 사건입니다. 그 주체는 <독사와 청동뱀>사건 입니다.
하나님이 보낸 독사에 물려 죽어갈 때에도 <장대에 매달인 청동뱀을 보면> 살아 남았습니다.
이것은 말도 안되는 얘기같지만, <그런 믿음을 가지면 살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시련이 오면 시련을 극복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용광로에 들어간 철은 녹아 버려 없어지거나, 아니면 <순금과 같이 정제되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고난을 통과하지 못한 사람은 교만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은 고난을 통과했기 때문에 <그들 나름대로 살아 날수 있다>는 확실한 [믿음]을 가진 것입니다.
이렇게 승리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두렵게 생각한 사람이 모압 왕의 <발락>입니다.
모압 왕 <발락>이 두려워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아모리 족속과 바산 족속이라는 도시국가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리쳤으니까, <발락>은 두려워하는 것이지요.
평소에 죄를 진 사람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을 피해 다닙니다.
대낮은 절대로 피하고, 모자를 쓰고, 마스크를 하고, 자신을 위장하여 사람이 없는 곳만 찾아 다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뻐하는 삶>을 사는 사람은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모압 왕인 <발락>이 두려워서 불필요한 두가지 행동을 합니다.
첫 번째 행동은 두려워서 도움을 요청합니다.
"발락은 미디안 장로들에게 이스라엘 무리들이 마치 소가 초원의 풀을 뜯어 먹듯이 우리 주변의 모든것을 먹어 치우려고 합니다.(민22:4)
두 번째 행동은 오늘의 핵심부분인 주술가의 저주를 이용하여 전쟁을 이기려고 노력합니다.
"발락 왕은 근처 자기 고향에 살고 있는 <발람을 불러 오라>고 합니다.(민22:5)
<발락>은 주술가의 저주를 이용하여 전쟁에서 승리 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사단의 힘>을 이용하여, 상대방을 저주하고 매수하여 전쟁에서 승리하려는 작전입니다.
<발락>은 발람을 믿고, 그 뒤에 있는 [악의 영]을 믿고, 그 저주의 효과로 전쟁에서 승리 하려고 해요.
이것은 <무속적인 믿음>입니다. 그 당시에는 <흔히 있는 일>입니다.
<발락>이 왜 발람을 불렀을까요?
그것은 저주를 통해서 <저주의 영>이 오기를 기다린 것입니다.
6절을 보십시오 "한 민족이 이집트에서 나와 온 땅을 휩쓸며, 우리 곁에 까지 와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보다 훨씬 강하여, 제발 와서 나를 위해 저주를 해 주시오. 그러면 내가 그들을 무찔러 내 땅에서 몰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의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당신이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 줄을 내가 알고 있습니다. (민22:6)
발람에게 저주를 요청하는 발락은 대단한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도 대단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 많아요.
그러니까 <믿지 않는다> 것도,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계시다>고 믿는 것이 어렵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믿는게 어렵습니까?
그 대답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고 믿는게, 더 강한 <믿음>입니다.
누구나 <믿음>없이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믿던, 하나님을 믿던,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믿던,
돈을 믿던, 어떤 우상을 믿던지, <사람은 무엇인가?를 믿어야> 삽니다.
그것이 어떤 신이든지, 그것을 의지하고, 살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나는 아무 것도 믿지 않는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믿지 않는다"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발락은 <악한 영>의 세계를 믿는 거예요.
<악한 영>, 즉 사단에게도 어떤 능력이 있나요? 예, <악한 영>도 능력이 있어요.
그래서 주술하는 사람에게도 어떤 초월적인 능력이 있는 거예요.
대전에 있는 사단이 서울에 올라가서도 역사하고, 미국에 가서도 역사해요.
사단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므로 우리보다는 능력이 더 있는 거예요.
사단도 이런 능력을 가졌으므로 우리는 어떻게 해야 이길 수 있나요?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사단을 이길 수 없고, 하나님의 <능력의 힘>을 더해야 이길수 있어요.
우리가 사단과 준비없이 그냥 싸우면, 우리는 집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능력>을 더해야 (= 하나님의 힘을 입을 때만)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영어로 [악]이라는 단어을 꺼꾸로 말해 보세요.
악(Evil)을 꺼꾸로 읽으면 삶(live=살다)가 됩니다.
<악의 영>은 무엇입니까?
<악의 영>은 사람과의 관계를 파괴시키고, 가정을 깨뜨리고, 저주를 통해서 악을 저주로 바꾸어요.
미국에 가면 <사탄교회>라는 교회가 있어요.
훌로리다 주에 사단을 찬양하는 교회가 있어요.
이들은 저주를 통해서 세상이 악하게 변하도록 기도를 해요.
역사적으로 그런 사람이 있었지요. 예를 들어 <히틀러>라든가, 캄보디아의 대 학살의 주역인 <킬링필드>가 이런 부류에 속하지요.
이들이 사용하는 무기는 <돈>이예요.
돈을 사랑하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했는데, <악한 영>은 금과 은을 사랑해요.
그렇다고 돈이 악한 것이 아니고, 돈을 사랑하는 것이 <악의 근원>이 됩니다.
발락이 발람을 저주하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이 주제의 촛점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운명인데, 여기를 보면 이방 사람들만 등장해요.
이것은 <악의 영>에 사로잡힌 계획과 음모를 하나님은 모두 다 알고 있어요.
하나님이 알기 때문에 그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싶은 거예요.
<악한 영>의 음모는 지금도 계속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어요.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꿰뚫어 보고 계시며, 모두 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단의 음성이 들리지 않게 우리의 안테나를 미리 차단시켜 주는 거예요.
이런 악한 세력은 우리의 삶에 나타나 호시탐탐 무너뜨리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해 주십니다.
7~8절을 보세요.
"모압 지도자를과 미디안 지도자들은 돈을 가지고 발람에게 가서, 발락이 한 말을 그대로 전했습니다. 그러자 발람이 <오늘밤은 여기서 지내시오. 여호와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대로 당신들에게 대답하겠소. 그래서 모압 지도자들은 거기서 발람과 함께 그날 밤을 보냈습니다" (민22:7~8)
이런 발락의 악한 요청에 발람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발락>이 발람을 불러 우리의 눈을 흐리게 합니다.
그래서 발람은 일행을 하루 밤 묵게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응답을 기다리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루 밤을 묵는다>는 것은 <마음에 있다>는 말입니다.
언뜩 들으면, 하나님의 백성의 말과 같아서 거기까지는 우리와 같습니다.
발람의 이런 행동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과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유혹>을 하루종일 묵상하지 마세요.
<유혹>을 생각하는 것은 일단 반은 넘어간 것이고, 받아드린 것과 같아요.
<유혹>을 하루종일 생각하면, 유혹에 넘어가게 됩니다.
<유혹>은 단호하게 끊어야 하지, 묵상하는게 아닙니다.
9절을 보십시오. "그날 밤 하나님께서 발람에게 오셔서 물으셨습니다. 너와 함께 있는 저 사람들이 누구냐? "(민22:9)
이 말은 하나님이 누구인지 몰라서 물은 말일까요? 이런 질문이 성경에는 여러 곳에 나옵니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직후에, 하나님이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묻습니다.
아담이 나무 뒤에 숨어 있는 것을 몰라서 물었을까요? 이게 하나님이 <숨박꼭질 하자>는 것입니까?
이 말은 "네가 왜 숨는 자가 되었느냐?"
"왜 너는 나를 피하느냐?" 고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12절을 보십시오.
"그때 하나님이 발람에게 <너는 이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아라. 그들은 복을 받는 자들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민22:12)
하나님은 발람에게 <가지도 말라>고 얘기하고, <저주 하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13~14절에서 발람은 "당신들은 돌아 가시오. 여호와께서는 내가 당신들과 함께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반쪽만 얘기 합니다. 그 말은 틀린 말이 아니지만, 뭔가 숨기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축소시켜서 반은 빼 버리고, 반만 말을 합니다.
발락에게 가서 <거절했다>고 얘기 하는 것을 보면, 내용이 점점 축소되고 왜곡시킵니다.
그래서 발락은 돈이 적어서 안오는 것으로 오해를 합니다.
어쩌면 거기에 발람의 의도가 숨어 있는지도 모르지요.
15~17절의 말씀을 보면, 발락은 포기하지 않고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해주겠다"고 합니다.
사단도 열심히 일합니다.
사단도 교회를 무너뜨리기 위해 교회를 열심히 다닙니다.
사단은 교회에 안 다니는 줄 아셨지요? 그러나 사단도 교회에 다닙니다.
사단도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해서 <우리 보다 더 열심히> 교회에 다닙니다.
사단이 무너뜨리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그 대답은 <교회를 열심히 나오는 사람>입니다.
교회를 허무는 사람은 스님이 와서 허뭅니까? 아닙니다.
교회를 열심히 다니던 사람이 그 기반을 이용해서 교회를 허무는데 앞장 섭니다.
우리가 예배 끝날 때가 되면, 사단은 먼저 주차장에가서 기다립니다.
그러니까 우리 보다 한 발 앞서서 우리보다 <먼저> 반응합니다.
사도행전 5장에 나오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헌금을 안한 사람이 아니예요.
그들은 헌신적으로 교회에 다닌 <임직자>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왜 시험에 들었을까요?
그 배경은 <바라바>라는 사람이 전 재산을 모두 팔고, 전부를 헌금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질투가 생겨서 아나니아도 재산을 팔았으나 일부를 감추고 일부만 헌금했어요.
<아나니아>의 헌금은 성령의 감동으로 이루어 진 것이 아니고,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은 <바나바>의 자발적이고, 헌신적인 연보와 대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이들이 <헌금을 안한 것>이 아니예요.
그들은 헌금을 많이 했지만, <하나님의 뜻>을 몰랐기 때문에 시험에 든 것입니다.
그러나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결국에 천국에 갔을 까요? 아니면 지옥에 갔을까요?
그들은 천국에 갔어요. 그들은 하나님의 순간적인 징벌을 받은 사람이지, 지옥에 간 것은 아닙니다.
18~19절을 보십시오.
"발락왕이 금은 보화가 가득한 궁전을 나에게 준다고 해도, 나는 내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어기는 일은 그 어떤 것도 할수 없소. 그러나 당신들도 오늘 밤은 여기서 보내시오. 혹시 여호와께서 나에게 일러 줄 다른 말씀이 있는지 알아 보겠소" (민22:18~19)
앞 부분만 보면, 아주 훌륭한 신앙의 모습입니다. 또, 첫 번째 말씀과 아주 비슷한 말을 합니다.
<하룻 밤을 묵으라>고 말하며, 이중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아니다>라고 말한 것에 대해서는 기도할 필요가 없어요.
어떤 여성이 기혼 남자를 사랑하면서 "하나님, 어찌 할까요?"라고 기도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이 분명하게 아니다>라고 하는 것은 기도하는게 아니예요.
그런 것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물을 필요가 없고, 그런 때는 기도를 안하는게 [믿음]이예요.
그냥[순종]하고, 그렇게 하는게 [믿음]입니다.
발람의 이런 <이중적인 모습>이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이게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한편으로는 신실하게 생활하는 것 같지만, 날마다 마음 한 쪽에는 세상의 유혹에 젖어서 <하룻 밤만 묵고 가라>고 하나님을 시험하고 있어요.
마음속에 한 구석에는 어떤 여지(공간)를 남겨놓고, 있는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20절 마지막절을 보십시오.
"그날 밤 하나님이 발람에게 <그 사람들이 너를 데리러 왔거든, 그들과 함께 가거라> 그러나 너는 내가 말하는 대로만 하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민22:20)
발람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입으로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같지만, <행함으로 믿음이 완성된다>고 했어요.
그런 믿음이 살아있는 [믿음]입니다.
발람은 하나님을 알수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그것을 놓치고 말았어요.
하나님이 직접 말씀해 주시는 특권을 받았으나, 이방 주술사를 통해서라도 말씀을 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변하지 않는 발람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20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그날 밤 하나님이 발람에게 <그 사람들이 너를 데리러 왔거든, 그들과 함께 가거라>
그러나 너는 내가 말하는 대로만 하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민22:20)
하나님은 갑자기 <가라>고 하십니다.
발람의 마음속에 유혹이 가득차 있는 것을 보고, <가고 싶으면 가라> 고 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말한대로 가라. 너가 내가 말하는것 이외의 말을하면******
그 다음에 무슨 말을 했을까요?
그것은 <너는 죽는다>는 거예요.
다음 날, 발람은 떠납니다.
하나님은 발람의 마음을 다 알고 있었지만, 결국에는 축복의 말씀을 해 줍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은 <저주의 화살>을 <축복의 화살>로 바꾸어 주십니다.
우리의 대적자들은 우리을 언제나 공격하지만, 하나님과 함께하면 승리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발람의 나귀 사건/ 민22:21~38, 말씀: 안광복 목사님
지난주에 이어 오늘은 <발람과 함께 길을 떠나는 나귀 사건>이야기입니다.
<발락>은 모압의 왕이고, <발람>은 이방인 주술사입니다.
발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승리하는 모습을 보고 <두려움>이 생겼고, 그 <두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발람을 찾아 갔어요. 그러나 찾아가는 도중에 아주 특이한 일이 벌어집니다.
하나님의 천사가 칼을 빼들고 발람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보고, 나귀는 무서워서 길을 벗어나 옆으로 피했는데, 나귀를 끌고 있는 주인인 발람은 그것을 모르고 나귀를 때립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귀는 보았는데, 정작 보아야 할 <발람은 그것을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나귀는 여호와의 천사가 칼을 손에 빼든채 길에 서있는 것을 보고는 길에서 벗어나 밭으로 들어갔습니다. 발람이 원래의 길로 돌아가게 하려고 나귀를 때렸습니다. 그러자 여호와의 천사가 두 포도원 벽사이의 좁은 길에 섰습니다. 나귀는 여호와의 천사를 보고 벽쪽으로 몸을 바싹붙이고, 발람의 발은 벽에 짓눌리게 됐습니다. 그러자 그가 다시 나귀를 때렸습니다."(민22:23~25)
오늘 설교의 중요한 단어는 [길]입니다.
여기에 [길]이라는 단어가 3번이나 나옵니다.
② [길]에서 벗어나 밭으로 들어 갔다.
③ 발람은 [길]로 돌아가게 하려고 나귀를 때렸다.
왜 그랬을까요?
나귀는 재앙을 피하기 위해서 옆으로 피했는데, 발람은 "나귀가 자기 말을 듣지 않는다"고 때렸습니다.
26~30절을 보더라도 나귀는 천사를 보고 겁이나서 피했으나 주인이 세 번씩나 때리니까, 드디어 나귀가 화가나서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동물도 경우에 따라서 훈련을 시키면, 동물도 말을 할 수 있어요.
그러나 오늘의 주제는 나귀가 말을 했느냐? 않했느냐(?)는 것은 중요한 포인트가 아닙니다.
오늘 중요한 것은 <나귀의 주인이 이상 징후가 있는데도 그것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30절의 대화를 들어보면, 항상 타고 다니던 나귀가 3번씩이나 말을 들지 않으면,
주인은 분명히 그 이유를 파악해 보아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거칠게 나귀를 때렸다>는 거예요.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발람의 마음이 조급하고, 욕심이 가득찼기 때문에,
눈앞에 천사가 가로막고 있는 장면을 보지 못한 거예요.
그러나 오히려 나귀는 그 상황을 다 보고 피했는데, 주인인 발람은 그 상황을 모른 거예요.
발람은 유명한 주술사인데도 발락 왕을 빨리 만나고 싶어서 <조급>했고,
빨리 무엇인가를 이룩하고 싶은 <욕심>이 앞선 거예요.
심지어는 나귀가 입을 열어서 말을 하고 있는데, 발람은 그것을 모르고 나귀탓만 해요.
이런 상황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어요.
우리도 이럴 경우에 어떤 특별한 징후가 나타날 때가 있어요.
그때에는 빨리 그것을 감지해야 하는데, 우리가 그것을 모르고 그냥 지나가면 <큰일>이 벌어 집니다.
작년에 중국의 쓰촨성 지진 때에도 그랬고,
동남아의 쓰나미가 몰려올 때에도 동물들이 먼저 감지하고 피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그 뒤에 늦게 알게 됩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예기치 않았던 일들이 반복이 된다면, 그 일을 잠시 멈추세요.
"과연 내가 이 길을 가야하는지?"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를 잠시 멈추고 생각해 보세요?
그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보고 가야 합니다.
그럴 때에 그 원인을 catch하는 [영적 민감성]이 있어야 합니다.
평생을 함께 타고 다니는 나귀가 갑자기 멈춰서서 주인의 말을 듣지 않았을 때에는 <뭔가가 있는> 거예요.
그러나 발람은 그것을 모르고 있었어요.
그것은 <욕심>에 눈이 멀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사가 가르쳐 줘요. 30~33절에서 발람의 눈을 밝혀 주어요.
그때 여호와께서 발람의 눈을 뜨게 하시자, 그는 여호와의 천사가 칼을 빼고, 길에 서 있는 것을 보고, 머리를 숙여 땅에 대고 엎드려 절했습니다. 여호와의 천사가 그에게 말했습니다. "너는 왜 나귀를 이와같이 세 번씩이나 때렸느냐? 네가 가서는 안 될 길을 가기 때문에 내가 너를 막으려고 내가 왔다. 나귀는 나를 보고 세 번씩이나 내 앞에서 비켜서 피했다. 만약 나귀가 비켜서지 않았더라면 내가 벌써 너를 죽이고, 나귀는 살려 두었을 것이다“(민22:31~33)
천사는 발람에게 <가서는 안 될 길을 가고 있다>고 알려 줍니다.
개역성경에는 <패역한 길을 갔다>고 했어요.
그 [길]은 하나님의 뜻과는 상반된 <잘못된 길을 간다>는 뜻입니다.
발람이 가는 [길]은 부와 권세를 얻을수 있지만, <하나님의 뜻>과는 다르다는 거예요.
지금 여기에서 아주 희귀한 [일]이 벌어지고 있어요.
천사와 나귀와 사람이 서로 말을 하고, 주고 받은 장면이 연출되고 있어요.
천사와 동물과 사람이 서로 3자 대화하는 해괴 망칙한 [일]입니다.
어찌 되었던 천사는 <그 길은 잘못된 [길]이다>라고 발람에게 알려 줍니다.
<너는 그길을 가면 죽어!>라고 강하게 메세지를 주니까, 34절에서 발람이 대답을 합니다.
“발람이 여호와의 천사에게 말했습니다.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당신이 저를 맞서서 길에 서 있는줄 몰랐습니다. 지금이라도 이제 잘못 된 것이라면 돌아 가겠습니다“(민22:34)
발람은 뭐라고 대답합니까? 이런 대답을 했다고 발람이 회개한 것입니까?
발람은 <잘못 되었다>고 고백을 하지만, 그것은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언뜻보면 발람은 회개하는 것 같지만, 이것은 진정한 회계가 아닙니다.
발람은 후회하는것 같지만, 결국 회계는 하지 않았어요.
잘못은 뉘우 치는것을 끝나면 안 되고, 그 후에 분명한 결과가 따라야 합니다.
[참된 회개]란 먼저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잘못을 느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렇게 잘못된 길에서 벗어나, [의 의길]로 나가야 합니다.
먼저 죄를 고백하고, 그 죄의 고리를 끊고, 반드시 [의의 길]로 가야합니다.
발람은 당장 잘못을 시인했지만, 방향을 바꿔서 당장 돌아 가겠다(stop)고 말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천사에게 물으면서 눈치를 보고 있어요.
“혹시 원치 않으시면 제가 돌아가겠습니다.” 라는 말은 “원하신다면 계속 이 길을 가겠다”는 뜻이 숨어 있는 거예요.
이런 태도로 발람은 천사에게 되물으며 확인하고 있는 거예요.
그 속셈은 <허락하시면 가고 싶다>는 속뜻을 갖고 있는 거예요.
이것은 진정한 회계가 아닙니다.
오늘 말씀드리는 <발람의 나귀 사건>은 여러 가지 면으로 시사해 주는 부분이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어요.
발람은 가고 싶은 의지가 있기 때문에 확실히 대답하지 않고 은근슬쩍 넘어가려고 하는데, 하나님은 그 의지를 꺽지 않으셨어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고, 그것을 존중했어요.
아담과 하와 때에도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했는데, 그들은 따 먹었어요.
그것은 그들의 [자유의지]를 존중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이 타락했을 때에도 2번씩이나 경고를 했어요.
그러나 솔로몬은 이방 여인과 죄를 짓고, 계속 타락했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 때에도 싸인은 계속해서 보냈지만, 죄를 막지는 안했어요.
그것은 우리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지으면, 안타깝게 생각해요.
그래서 <죄를 짓지 말라>고 싸인은 계속해서 주지만, 그 죄를 막지는 않아요.
그 [자유 의지]라는 선택권은 우리가 갖고 있어요.
드디어, 발락은 발람에게 괴롭히는 묘책을 생각하고 실행에 옮겨요.
그것이 민수기 31장 16절에 나와요.
“그 여자들을 브올사건에서 발람의 말을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를 기억하게 해 여호와의 회중에게 재앙을 내리게 한 바로 그 사람들이다“(민31:16)
이스라엘 남자들이 모압 여인들과 음탕한 짓을 하게 만들었어요.
이것은 발람의 아이디어인데, 그들이 육체적으로 타락하게 만들어 죄를 짓게 만들어요.
물론, 거기에 따른 보상도 받았을 것이고, 그외의 이득도 챙겼을 거예요.
하나님이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으면, 포기할만도 한데, 기어코 이스라엘이 멸망하도록 만들어요.
결국, 발람도 후에는 칼에 맞아 죽게 되지요.
그것 보다도 성경에서 [발람의 평가]를 찾아보면, 베드로후서 2장 15~16절에 그의 최후가 나와요.
“그들은 유혹을 받아, 바른 길을 떠나서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라 가는 사람들입니다. 발람은 [악한 방법]으로 얻은 재물을 사랑하다가 자신의 잘못에 대하여 책망을 받았습니다. 말못하는 당나귀가 사람의 음성으로 말하여 이 예언자의 [미친 행동]을 저지했습니다“(벧후2:15~16)
성경은 발람을 <이 예언자의 미친행동이다>고 평가하고 기록하고 있어요.
발람은 욕심이 지나치고, 돈에 미쳐서, 권력에 미쳐서, 잘못된 결과를 낳고, 결국 <비참한 인생을 살았다>고 했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발람의 길을 가지 말라>는 말을 하게 되었고, 그 말이 대명사가 되었어요.
[발람의 길] = <그런 길을 가지 말라>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여기서 무슨 교훈을 배웁니까?
사실 발람에게 다가 왔던 모압 왕 발락의 제안은 쉽게 뿌리칠수 없었습니다.
“무엇이든 다 해결해 주겠다”고 제안하는 것은 우리에게 백지수표를 주는 것과 같지만, 한번 생각해 보세요.
만약에 나에게 재능이 있는데, 이런 유혹이 다가오면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런 제안이 옳은 일이 아닐 때에 하나님의 교훈은 <유혹이 오더라도 뿌리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욕심]이 있으면, 우리의 시야를 가리게 만듭니다.
우리들도 발람과 같이 돈이든, 권력이든, 무엇이든지, 얻는 순간에 내 [양심]을 버릴수 있어요.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욕심을 부리면 득과 실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욕심을 따라가면 얻는 것은 무엇입니까?
첫째, <돈>을 얻을 수도 있구요.
둘째, <명예과 권력>을 얻을수 있구요.
셋째, 지금 보다 <더 낳은 삶>을 살수 있겠지요.
넷째, 사람들이 칭송하며 <성공했다>고 얘기 하겠지요.
그러나 우리의 삶속에 잃는 것은 무엇입니까?
첫째, 우리의 <양심>을 잃을 수도 있구요.
둘째, 가족과의 <사랑>을 잃을 수도 있구요.
셋째, 내 마음 속에 <평안>이 무너지게 되구요.
넷째, 무엇보다 중요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는 거예요.
여러분! 성공이 무엇일까요?
성공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런 성공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진다면, 그것은 [성공]이라고 말할 수 없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행복해 지지 않아요.
여러분 우리의 삶속에 어떤 욕심이 있습니까?
이게 아닌데..... 이래서는 안되는데.....라고 고민해 보지는 않으셨나요?
최근에 발람처럼 큰 뜻하지 않은 큰 제안을 받고 고민하시나요?
여러분, 욕심따라 살지 마시고, [진리의 길]을 따르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길이 아닌,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리의 길을 따르시기 바랍니다.
교우 여러분, 비행기가 야간 비행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① 첫째로, 관제탑의 지시에 철저하게 따라야 합니다.
② 둘째로, 활주로의 유도등을 보고 정확하게 착륙해야 합니다.
그러나 기장에게 보이는 것은 그 유도등 보다 훨씬 더 찬란하고 <유혹적인 불빛이 있다>고 하더라도, 다른 [빛]은 보지 말고, 유도등만 바라보아야 안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주님은 우리의 <빛>입니다.
어둠속에서, 흔들리는 이 세상속에서, 때로는 한치 앞이 안보이는 불안한 요즘에,
당신을 향해서 <빛>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 빛을 바라보고, 그 빛을 안전하게 따라 가십시오.
오직 하나님이 기뻐 하시는 가장 아름다운 인생의 그길을 안전하게 따라 가세요.
[발람의 길]이 아니고, 하나님의 [바른 길]을 안전하게 따라가세요
두 번째 인구조사/민26:1~4, 52~53/말씀:안광복 목사님
지난 주까지 발락과 발람에 대해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결국, 발람은 자기의 욕심을 좇아서 자기가 가려는 길을 가게 됩니다.
주술사는 하나님이 저주를 해야 돈을 벌수 있는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지 않자 발람은 겉으로 형식적으로 축복하고 안타깝게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발람은 발락 왕을 이용하여 사악한 계략을 또 벌립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남성들을 꾀여서 모압 여인을 유혹하고, 성적으로 음행을 저지르도록 만들어서 결국 24,000명이 하나님의 진로를 받아 죽게 만듭니다.
민수기 26장 1절을 보십시오.
“재앙이 있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와 제사장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에게 말씀하셨다”(민26:1)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막 들어가려고 하는데, <재앙이 끝난 후에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재앙이 있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진로를 받아 수 많은 사람들이 죽은 후를 말하는 것이고,
그렇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려울 때인데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사건]입니다.
이것이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이예요.
하나님은 심판으로 벌벌떨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먼저 말을 꺼낸 거예요.
이것은 마치 회초리를 들고 자식을 때린 후에, 빨갛게 부어오른 자식의 다리를 만져주는 <부모님의 마음>과 같은 심정일 꺼예요.
이처럼 하나님은 죄를 범한 인간들에게 [죄]는 미워하지만, 먼저 찾아 오십니다.
죄를 짓고 하나님을 피하여 숨어있는 아담에게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라고 부르십니다.
또 죄를 짓고 집나간 둘째 아들을 멀리 동구밖에 나가서 늘 기다리고 계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그런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지어 실망했을 텐데, 그래도 먼저 찾아가서 <자기의 계획과 소망을 말씀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혹시 힘들고 어려울 때에, 하나님과 관계가 서먹해 질 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여전히 지켜주시고, 찾아 오신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하나님은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 항상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항상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드디어 하나님이 [새로운 명령]을 내리십니다.
그 명령은 <2차 인구 조사>를 시키는 것입니다.
민수기 1장이 시작하면서 [첫 번째 인구조사]를 실시했던 적이 있었어요.
정확히 38년의 시간을 보내면서, 이제 다시 실시 하는 [두 번째 인구조사]를 시키는데,
그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2절을 보십시오. 20세 이상으로서 군대에 갈 수 있는 사람의 수를 가문별로 몇 명이나 되는지, 그 숫자를 조사하여라“(민26:2)
[인구조사]에서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1. 하나님은 <그들을 향한 비젼이 있다>는 것을 알수 있어요.
[인구조사]의 목적은 20세이상 군대 갈 수 있는 사람의 숫자를 파악하고, 그 땅을 정복하는 계획에 필요한 사람을 미리 파악해야 합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그 땅을 정복하는 일이고,
둘째는, 그 땅을 분배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열이 정비되지 않은 사람들이고, 그들의 신분은 40년간 노예였기 때문에,
그들은 스스로 땀을 흘리고, 열심히 일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던 것이예요.
그러나 이제는 <공동체 생활이 무엇인가?>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들은 조금씩 변해가고 있는 거예요.
그렇게 그들은 40년간 보냈고, 이제는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두고 있어요.
물론 거기에 들어 가면, 할 일이 아주 많아요.
가나안 땅에 들어가도 이제부터 그들은 31번의 전투를 치루어야 하므로, 먼저 자기네 진영을 재정비 해야하므로 2차 인구조사를 실시한 것입니다.
이렇게 인구조사하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비전>을 알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은 곧, <하나님의 군대이기 때문에> 주님의 교회는 사탄과 싸우는 전투적인 교회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그들은 단순한 백성들이 아니고, 광야에 존재하는 교회이고, 하나님의 군대로 활용되어야 하기 때문이죠.
그런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요?
그렇게 되기위해 우선 성결해야 하고, 딴 사람과 구별되어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영적으로 무장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내가 어떤 존재인가?>라는 얘기는 아주 중요한 거예요.
내 자신의 <영적 정체성>을 정확하게 알고 움직일 때에 [정확한 삶]을 사는 거예요.
나는 누구입니까?
나는 <성도>입니다. 나는 <크리스찬>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의 <군사>입니다.
교회는 어떤 곳입니까?
군사를 파송하고, 군사를 훈련시키는 <영적인 훈련 장소>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영적 전쟁터에서 싸워야 하는 <그리스도의 군사>예요.
여러분의 일주일의 삶을 뒤돌아 보며 생각해 보세요?
우리의 믿음과 신앙을 흔드는 유혹이 얼마나 많습니까?
직장에서, 회식 자리에서, 거래처에서, 거짓과 분노와 수 많은 유혹을 받습니다.
그런 어려운 상황에서 내 자신을 제어하고, 싸워서 이기려면, 내가 영적으로 무장이 되어있어야 합니다.
나의 영적상태가 흐트러져 있으면, 우리는 백전 백패하고 사탄에 당할 것입니다.
이러한 치열한 전쟁 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우리는 [예배]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런 [예배]를 통해서 <영의 양식>을 공급받고, 영적인 무기(=하나님의 말씀)을 정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무기는 무엇입니까?
첫째로,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영적인 <양식>이지만, 때로는 <무기>입니다.
둘째로, 군사들의 무기는 차별화된 [사랑]이고, [겸손]이고, [참을성]입니다.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과 다른 <그 무엇>이 있어야 하고, 세상에 평화를 심는 <역할>이 있어야 해요.
그래서 말씀앞에 순종하고, 영적인 군사로서 사명을 다하여, 날마다 주님에게 쓰임받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2. 인구 조사의 목적은 <하나님의 공의>를 알수 있어요.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땅을 분배하는 일>을 해야 해요.
그 땅을 나누어 주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52절~5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등록된 사람의 수에 따라 땅을 유산으로 나누어 주어라. 수가 많으면 유산을 많이주고, 수가 적으면 유산을 적게 주어라. 각기 그 등록된 수에 따라 유산을 받을 것이다. 땅은 반드시 제비를 뽑아서 나눠 주어야 한다. 또한 각자 그 조상의 지파의 이름을 따라서 유산을 받아야 한다”(민26:52~56)
땅을 나눌 때에 땅의 <분배원칙>은 3가지입니다.
1. 각 지파의 인구 비례로 땅을 나누어 준다.
2. 제비를 뽑아서 나누어 주겠다.
3. 주는 땅은 조상의 유산이다.
여기에서 “제비로 뽑는다”는 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맡긴다>는 뜻입니다.
물론 사람이 제비를 뽑지만, <그 일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 땅은 하나님의 유산이다> 라고 생각하라는 뜻입니다.
그 땅을 당신이 소유물로 여기지 말고,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거예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가나안 땅에 가기도 전에, <모압 평원에서 땅을 분배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강을 건너기도 전에 <땅이 분배되었다>는 것은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주인이기 때문에> 그렇게 한 거예요.
우리가 가진 소유와 재능도 주인은 내가 아니고, 그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이와같이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면, 하나님이 또 다른 것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여러분 시간과 공간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믿고,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그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3. 인구조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알 수 있습니다.
본래, 가데스 바니아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손종합니다.
그것은 정탐꾼의 말에 의하여 “그곳에 가면 다 죽는다”고 말 했어요.
하나님은 “여호수와와 갈렙을 제외하고 모두 다 죽는다”고 말씀했어요.
그 하나님의 말씀이 정확하게 이루어 졌고, 그 말씀 그대로 38년 동안 모두 다 죽었어요.
시내 광장에서 조사된 첫 번째 인구조사에서 등록된 사람, 603,550명의 숫자 모두 다 죽었어요.
왜 죽었을까요? 그것은 [죄] 때문에 죽었어요.
고라 일당의 반역때도 죽었고, 금 송아지 사건 때에도 죽었어요.
그러나 모압평지에서 실시된 두 번째 인구조사에서 파악된 인원은 601,730명이 조사되었어요.
그 차이가 뭘까요? 그 차이는 1,802명의 숫자가 감소 되었어요.
언뜻 쉽게 생각하면, 60만명이 40년간 죽었고, 또 <새롭게 60만명이 새로 채워졌다>고 했어요.
이런 차이는 <40년 만에 다시 채워졌다>는 것이고,
이것은 하나님이 보살피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거예요.
그들은 하나님이 지켜주셨기에 가능했던 거예요.
고대 사회는 평균 수명이 아주 낮아요. 그것은 <영아 사망률>이 높기 때문에 오래 살지 못해요.
그래서 하나님이 보호해 주지 안았으면 그런 결과가 나오지 못했을 꺼예요.
결과적으로, 첫 번째 인구조사의 장부는 <사망자 명부>가 되었으니까 의미가 없어졌고,
그에 반해 두 번째 인구조사의 장부는 <생존자 명부>가 되었어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그 곳에 적힌 사람들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서 땅을 분배받았고, 거기에 살수있는 자격이 주어졌어요.
그러니까 “어떤 명단에 자기 이름이 기록 되었는가?"라는 것이 아주 의미가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의 이름이 반드시 들어 있어야 할 <생명의 명부가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러나 거기에 “내 이름이 없다”는 것은 충격입니다.
하늘 나라의 [생명책]에 "나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는가?"를 미리 짐작해 보시기 바랍니다.
요한 계시록 20장 11~15절을 보십시오.
“나는 희고 큰 보좌에 앉으신 분을 보았습니다. 땅과 하늘도 그 분 앞에서 사라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죽은 사람들이 모두 그 보좌앞에 서 있고, 책들이 펴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거기에는 또 다른 책이 한권 있었는데 그것은 <생명책> 이었습니다. 죽은 사람들은 그 책들에게 기록된 자기들의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습니다. 누구든지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사람은 이 불못에 던져 졌습니다”(계20:11~15)
이 말씀은 <사도 요한>이 장차 일어날 [예언에 대한 계시]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믿습니까?
만약에 내 이름이 그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면, 그것은 너무나 다행한 일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 사실에 너무나 감사하여 하나님에게 찬양드리고,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렇지 않으신 분들이 계시다면,
“주님! 나의 마음속에 들어와서 나의 구원자가 되어 주세요”라고 얼른 기도 하세요.
이제, 말씀을 정리합시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 인생의 길은 <광야>와 같아요. 그 광야의 길을 언제나 <초행 길>이예요.
그래서 나는 누군가 나와 같이 <동행해야 할 분>이 필요해요.
그것은 그 곳이 아무도 모르는 길이므로 그런 길을 걸을 때에는 가이드(안내자)가 필요해요.
그 안내자가 바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가장 안전하게 인도해 주시는 분이예요.
그런 분을 믿고 의지하고 가세요.
과거에 애굽에서 살던 노예와 같은 것은 모두 다 벗어 버리고, 날마다 승리하며 살기위해,
<생명책>에 기록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시고, 당당하게 나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민수기 말씀이 거의 끝나가고 있습니다.
첫 번째 인구조사는 출애굽하고 1년 후에 시내 광야에서 군사훈련에 필요한 인원을 점검하기 위해서 실시했고, 지난 주에는 두 번째 인구조사에 관한 얘기를 드렸습니다.
그 목적은 가나안 땅에 입성하기 직전에 20세 이상의 남자들을 상대로 <땅을 분배하는 내용>에 관해 인구조사를 실시했어요.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겼어요.
오늘의 말씀 1절을 보면, 슬로브핫이 어떤 사람인지 저는 잘 모르겠으나, 딸이 5명이 있었고,
이들은 <땅을 분배해 달라>고 문제를 제기했어요.
땅을 유산으로 나누어 주다 보니까 딸들만 있는 경우가 문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너무나 당당하고, 하나님의 뜻과 의도를 정확하게 알고, <분배의 원칙>을 제공하게 됩니다.
2절의 말씀을 보면서 그들의 태도를 살펴 봅시다.
“그들이 회막 입구에서 모세와 제사장 엘르아살과 지도자들과 온 회중앞에 서서 말했습니다.” (민 27:2)
여기에서 슬로브핫 여인들의 태도를 보세요.
첫째, 슬로브핫의 딸들은 <용기있게> 문제를 제기했어요.
그것은 ① 땅의 분배가 다 끝난 시점이고 ② 원로 지도자들이 모두 다 모여 지켜 보고 있는 가운데에서 ③ 군중 속에 있는 여인들을 모두 침묵하고 있는데도 ④ 또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부족사회에서 <유독 슬로브핫 여인이 문제를 제기 했다>는 것은 굉장히 용기 있는 행동입니다.
우리의 삶속에서 이렇게 용기가 필요한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정당한 용기인지(?), 아니면 내 욕심에서 비롯된 헛된 만용인가(?)하는 것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용기 있는 자들을 사랑한다”고 했어요.
하나님은 분명한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좋아해요.
여러분들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면, 용기를 내십시오.
두 번째, 이들은 <영적 통찰력과 합리성>을 갖고 얘기합니다.
3절을 보면, “저희 아버지는 아들없이 딸만 5명을 두었고, 광야에서 죽었는데, 고라 일당의 반역에는 가담하지 않았고, 다만 아버지는 죄로 죽었습니다.”(민27:3)
이 여인들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는 <영적 통찰력>을 갖고 있었어요.
①고라의 죄가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을 알았고, ②그냥 불평하는 사람과는 달리 왜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고, ③하나님의 진노가 무엇이고, ④왜 광야생활을 40년간 해야만 했는가?에 관해, 합리적으로 하나님에게 접근하는 여인들입니다.
여러분? <합리적이다>라는 말은 <영적이다>라는 말과 반대되는 개념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영적인 것이 가장 합리적일 수도 있어요.
로마서 12장 1절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라.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여기서 <영적 예배>라는 말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이고,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가 <합리적인 예배>라는 말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은 혼돈 가운데서 세상을 창조하셨어요.
그것은 무엇을 뜻하는 말입니까?
그 말은 <무질서한 세상에 질서를 부여 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늘 우리의 [상식]을 존중하십니다.
이 말은 우리에게 <이성>을 주셨고, <합리성>과 <이해력>을 주셨어요.
하나님은 초능력을 가진 분이지만, 그러나 자연 질서나 생태의 질서를 존중하십니다.
오히려 인간이 하나님에게 <초자연적인 능력을 보여 달라>고 조르십니다.
세 번째, 이들은 <영적인 거룩한 욕심>이 있었어요.
4절을 보십시오. “아버지에게 아들이 없다고 해서 왜 저희 아버지의 이름이 그 가족에서 빠져야 합니까? 저희 아버지의 형제들 가운에서 저희에게 재산을 주십시오”(민 27:4)
왜 우리 아버지 이름이 빠져야 합니까?
그것으로 인해서(아버지가 죽었다고 해서) “하나님의 유산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안타까워요.
그러나 이 여인들의 요구가 <땅을 차지 하겠다>는 욕심이 아니에요.
이들은 명단에 누락되는 것이 안타까웠고, 가나안에 담겨진 <영적인 의미>를 이미 알고 있었어요.
가나안의 <영적인 의미>는 무엇입니까?
첫째, 유산분배와 같은 <영적인 명단>에 누락되는 것이 안타까웠고,
둘째, 땅은 하나님이 오래 전부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고 싶었던 축복이고, 기업이고, 선물인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셋째,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후손에게 영원히 물려 주어야 할 하나님의 선물을 받고 싶었던 거예요.
슬로브핫 여인들은 우리에게 자격이 없을지언정, <그 유업을 받도록 해 달라>고 요구하는 이런 이들의 태도와 요구에 하나님은 기뻐했어요.
여러분?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좋아할까요?
1. 긍정적인 태도나 적극적인 사람을 좋아해요.
반대로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거나 부정적인 말들을 하는 사람들을 싫어해요.
성경에 나오는 부정적인 말들을 하나 찾아 볼까요?
아브라함도 “100세에 아들을 낳을꺼야”라고 얘기하니까, 속으로 피식 웃으며,
“하나님! 이제 저는 됐구요! 제 집에 다메섹 엘리에셀이란 하인이 있는데, 그 친구나 건강하게 잘 살게 해 주세요”라고 대답했어요.
아브라함은 속으로 “하나님! 지금 내 나이가 몇인데, 해 줄려면 진작에 아들을 주시지....“
2. 할 수 있는 대로 <격려의 말>을 해 주고, <칭찬>하고, <축복>해 주세요.
특히 자녀들에게 “너는 잘 할 수 있어!....” “너는 반드시 성공할 꺼야”라고 칭찬해 주세요.
최근에 김연아 선수의 "<안티 카페>가 열 개도 더 된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랬어요.
김연아 선수가 국가 브렌드의 가치를 얼마나 올려 주었는데, 안티 카페라니.....
혹시 김연아 선수가 그들에게 무엇을 잘못한 게 있나요?
김 선수가 잘되니까, <시기와 질투를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다>는 것을 보면서, 세상이 안타깝게 느껴져요.
교우 여러분, <말에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믿으세요.
사람들은 가능성 있는 말을 듣기를 좋아 해요.
그러므로 슬로브핫의 여인들처럼, <용기 있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 질문 앞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세요.
7절을 보십시오. “슬로브핫의 딸들이 말하는 것이 옳다. 너는 그들 아버지의 형제들 가운데서 그들에게 유산(재산)을 반드시 주어라. 그들 아버지의 유산를 그들에게 넘겨 주어라”(민 27:7)
이 말씀에 하나님은 합리적인 사고로 말을 하는 <슬로브핫의 딸들의 말이 옳다>고 편을 들어 줍니다.
여기에 나오는 [CAN]은 <정당하다>, <의롭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은 슬로브핫의 딸들은 얼마나 위로를 받았을까요.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형편을 알고 계시며, 그런 사람들의 편을 들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아들이 없는 가정>이라도 그들에게 “유산으로 땅을 분배해 주라”고 하십니다.
8-11절을 보십시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하여라. 만약 어떤 사람이 아들이 없이 죽으면, 그 유산을 그 딸들에게 넘겨 주어라. 만약 딸도 없다면 그의 유산을 그 형제들에게 주어라. 만약 형제도 없다면 그의 유산을 그 아버지의 형제들에게 주어라. 만약 그 아버지에게도 형제가 없다면 그에게 남아 있는 가운데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주어서 그가 그것을 갖게 하여라. 이것은 여호와가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판결의 율례가 되게 하여라” (민 27:8-11)
자! 여기에서 굉장히 중요한 원칙이 정해졌습니다.
이것은 슬로브핫의 여인들 때문에 땅을 분배하는 <유산 분배의 원칙>이 세워졌어요.
그럼, 슬로브핫의 여인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들의 작은 용기 있는 행동으로 자기들에게도 은혜가 되었으나, 모든 사람들에게 골고루 배분되도록 하는 원칙을 세우는 사람이 되었어요.
다들 잘아는 얘기지만, <윌리엄 윌버포스>를 아십니까?
18세기 영국 사회에서 노예산업을 폐지한 사람입니다.
그 당시 정치인들은 노예를 취급하는 상인들과 연계되어서 나쁜 행동인줄 알면서도, 묵인해 오고 있었어요.
아프리카 노예들은 상품 취급을 받으며 짐승처럼 매매되고, 노예시장이 번성하던 때에 <윌리엄 윌버포스>는 노예 해방을 위해 끝까지 싸웠어요.
“노예도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는데 이건 너무나 부당하다”고 <하나님의 법을 지키라> 역설하며,
영국이 진정한 위대한 나라가 되려면 <노예제도는 폐지되어야 한다>고 기도하는 모임을 만들었고,
기독교 국가를 자처하는 영국이 “황금에 눈이 멀어 노예제도를 인정한다“는 것은 <역사에 존재할 가치가 없다>고 역설합니다.
2번의 암살 위협을 받으면서도 뜻을 굽히지 않았고, 마침내 1833년 7월 27일 윌버포스가 노예폐지를 주장한지 56년 만에 영국 국회는 <노예제도 폐지 법안>을 통과 시켰고, 3일 후에 윌버포스는 죽습니다.
그럼, 윌버포스는 누구입니까?
그는 하나님의 [뜻]과 [원칙]을 영국 사회에 심어 놓은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마지막으로 중요한 게 있어요.
그것은 딸들이 이방 민족에게 시집을 갈 경우입니다.
이방인에게 시집간 딸의 유산은 이방 민족에게 흘러가므로 <유산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사랑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물질을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유산을 받겠는가(?) 아니면, 내 뜻대로 불순종해서 유산을 안 받겠느냐(?)는 것입니다.
민수기에서 끊임없이 사건과 재앙과 심판이 나오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들려주고 싶은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 <얻게 된다>는 거예요.
슬로브핫 딸들은 <영적인 유산>에 대한 관심이 있었고, 믿음을 갖고, 용기 있게 행동했고, 그들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영적으로 받는 유산의 의미를 알았고, 하나님이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를 아는 여인들입니다.
교우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면서 무엇을 얻느냐?”는 것은 우리의 <노력>과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선택했다”는 것은 그 선택을 위해서 “또 다른 어떤 것을 포기했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포기하지 않고는 무엇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 욕망을 위해서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여 영적인 유산을 포기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러나 때로는 그 반대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영적인 유산을 당당하게 받는 사람도 있어요.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우리에게도 능력이 있고 똑똑한 것이 중요하지만, 그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비전에 순종하고, 영적인 의미를 아는 슬로브핫 여인처럼 행동하시기 바랍니다.
금주는 고난 주간이므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생각하며 지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이 있는 사람, 여호수아/ 민 27:12-23, 말씀: 안광복 목사님
지난 주까지 하용조 목사님의 <믿음 시리즈>에 대한 말씀을 들었고, 이번 주부터는 그동안 공부하던 민수기의 말씀을 마저 드리겠습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크게 3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모세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씀을 하셨고,
둘째, 모세의 후임자인 새로운 지도자는 누구인가?
셋째, 새로운 후임자 리더를 어떻게 임명할 것인가?
오늘의 첫 번째 이야기는, 하나님이 모세에게 하신 말씀은 무엇입니까?
민수기 27장 12절~14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아바림 산으로 올라가서, 내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준 땅을 바라보라. 그 땅을 바라본 후에는 너도 네 형 아론처럼, 네 조상에게 돌아갈 것이다. 이는 신 광야에서 회중이 다투었을 때 너희가 그들의 눈 앞에 물을 내어 <내 거룩함을 나타내라>는 내 명령을 거역했기 때문이다. 이곳은 신 광야의 가데스의 므리바 물가였습니다.” (민 27:12-14)
하나님은 모세가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을 가르쳐 줍니다.
너는 아바림 산으로 올라가서, 내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준 가나안 땅을 바라 보아라.
그 땅을 바라 본 후에 너도 네 형 아론처럼 죽게 될 것이고, 그리고 너는 그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 이유는 광야에서 <백성들이 물이 없다>고 불평할 때에 너는 나를 <거룩한 자로 높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모세는 므리바 물가에서 하나님이 시킨대로 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혈기를 들어 낸 적이 있었습니다.
모세가 어떻게 행동을 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렇게 화를 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의도를 모르고, 지팡이로 바위를 두 번 내려침으로, <하나님의 의도를 올바르게 전달하지 않고 거역했다>는 것입니다.
모세의 입장에서는 “한 번의 실수를 저질렀다”고 생각하며 <너무 심하다>고 말할 수 있으나, 하나님은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았다>고 지적했습니다.
왜 모세와 하나님 사이에 이런 차이가 벌어 졌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보는 관점과 하나님이 보시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생각하는 것과 하나님의 의도가 다르기 때문에 나타난 [문제점]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성숙되었다>는 것도 우리의 관점에서 보지 말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든 상황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의견이 다를 때에는 무조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이 필요하고, 그런 순종이 우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너는 내 명령을 거역했다”고 말씀했어요.
여기서 <명령>은 무엇입니까?
<명령>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 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해가 되면 명령을 이행하고, 이해가 안 되어도 이행해야 하는 것이 <명령>입니다.
그러니까 <명령>은 이해가 되든, 안 되든 <명령하는 자>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명령을 받은 자>는 좋든 싫든 무조건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필요하기 때문에 그렇게 시키는 거예요.
하나님이 까칠해서 그런 것을 시키는 것이 아니예요.
또는 하나님이 불친절해서 자세히 설명해 주지 않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렇게 한 거예요.
모세의 마지막 부분을 생각하면 인간적으로 불쌍하게 보이지만,어쩔 수 없는 거예요.
그래도 하나님은 모세에게는 그동안 죽음을 준비하도록 배려했고, 지금까지 눈이 흐리지 않게 기력이 쇠하지 않도록 건강을 지켜 주셨고, 또 마지막으로 후계자까지 마련해 주고 있어요.
또 성경을 통해서 모세가 가장 위대한 지도자가 될 수 있도록 자리 매김까지 배려해 주었어요.
비록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가나안 땅을 내려다 보았고, 그 땅을 보고나서 죽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네 조상들에게 돌아갈 것이다>라는 말은 <죽게 될 것이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어느 날 누군가 나에게 다가와서, <당신은 곧 죽게 될 것이다>라고 말해 준다면, 우리는 얼마나 두려울까요? 그러나 모세는 그의 형 아론이 죽은 것처럼 하나님 앞에 편안히 간 것을 이미 알고 있어요.
여기서 모세의 죽음을 <네 조상에게로 돌아갈 것이다>라고 표현했어요.
죽음을 <돌아 간다>고 표현을 했는데, 그 말을 영어 성경에는 <추수 된다>고 생각합니다.
또는 <수확을 얻는다>라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그러니까 그의 인생 전체가 하나님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다가 <열매를 맺는다>는 의미로
<수확되어 졌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거예요.
우리도 우리 인생을 잘 살다가 (의미있게, 가치있게, 성실하게, 하나님의 뜻을 이행하다가) 마지막 죽음을 맞이할 때에는 농익은 열매가 똑 떨어지는 수확물과 같이, 하나님께 바쳐지면 얼마나 좋겠어요.
우리는 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죽는 것도 중요합니다.
요샛 말로 <웰 빙>도 중요하지만, <웰 다잉>도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교우여러분?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말씀의 뜻을 알고, 그 말씀 속에서 순종하며 살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언제나 선한 의도가 담겨 있어요. 그러므로 말씀대로 사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두 번째 이야기는, 모세의 뒤를 이어 누가 새로운 지도자가 될 것인가?
15-18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그때 모세가 여호와께 말씀했습니다. 모든 생명의 근원이신 여호와 하나님, 이 백성을 인도할 지도자를 세워서 이 백성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않게 하소서. 그러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영이 그 안에 있는 눈의 아들 여호수아를 데려다가 그에게 안수하여라” (민 27:15-18)
모세는 자신의 후계자를 기다리고 있어요.
이것을 보더라도 역시 모세는 훌륭한 지도자입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내가 그렇게 고생했는데, 나는 정작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도 못하는 것에 무척 서운한 감정을 가졌을 꺼예요.
나 같으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도 못하므로 “누가 들어가든 상관없다”고 수수방관하면서 처신하겠지만, 모세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백성이 <목자없는 양과 같이 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거예요. 이것이 모세의 진심이예요.
17절에서
“<여호와의 회중이 목자 없는 양떼처럼 되지 않게 해 주십시요>라고 모세는 염려를 하고 있어요. 우리는 이 대목을 보면서 ”왜 모세를 위대한 지도자라고 하는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모세의 바램은 <하나님이 민족을 이끌 새로운 지도자를 선택해 달라>고 요구하며 기다리십니다.
이것은 모세가 위대한 지도자이기 때문에 그런 걱정을 하는 거예요.
여기서 주목할 만한 단어는 <목자 없는 양과 같다>는 말입니다.
목자는 양들을 늘 보호해 주어야 합니다.
목자는 양들을 생명처럼 귀중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비참한 운명에 빠지지 않도록 후임자에 대한 걱정을 하는 거예요.
이런 모습에서 하나님이 모세를 사랑하는 이유가 되는 거예요.
드디어 하나님이 한사람을 지목했어요. 그 이름은 <여호수아>입니다.
18절에 보면 “<영이 그 안에 들어 있는 사람, 눈의 아들 여호수아>라는 이름을 부르면서 “그를 데려다가 그에게 후계자로 삼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그 안에 들어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성령이 그 안에 머무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 할 줄 아는 사람, 순종하는 사람, 믿음이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 사람은 순전하고, 막힘이 없고, 겸손하고, 정직한 사람이고, 깨끗한 사람이고, 투명한 사람입니다. 이런 조건은 가진 영적 지도자가 <여호수아>입니다.
그러나 그 반대로, 하나님의 영이 없는 사람은 인간적인 욕심으로 가득한 사람이고, 인간적인 영이 가득 찬 사람을 말하고, 교만하고, 허탈하고, 망령된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가득 찬 사람은 믿음 있고, <영적으로 충만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런 사람은 어떤 [영]을 가졌을까요?
지혜의 영이 있고, 예언의 영이 있고, 분별력이 있는 사람으로 여호수아와 같은 사람은 성경을 통해서 알아보면 부정적인 말을 찾아 볼 수 없어요.
오늘의 세 번째 이야기는, 리더십이 계승되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모세 이후의 새로운 지도자를 어떻게 뽑히는가? 를 살펴 보겠습니다.
19-20절을 보십시오.
“그를 제사장 엘르아살과 온 회중 앞에 서게 하고, 그들이 보는 가운데 그를 후계자로 임명하라. 그리고 권한을 주어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그에게 복종하게 하라” (민 27:19-20)
여호수아를 <온 회중 앞에 서게 하라>라는 말은 ”차기 리더로 세웠다“는 것을 전체 백성들에게 알려주기 위한 방법입니다. 그리고 <권한을 이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특이한 것은 <영적 제사장인 엘르아살의 앞에 세우라>고 말했어요.
이것은 차기 지도자는 모세가 개인적으로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는 일이므로
<분명하게 공표하라>는 것입니다.
21절을 읽어 보십시오.
“여호수아는 무슨 일이 있으면 제사장 엘르아살에게 가서 묻고, 엘르아살은 우림과 둠밈으로 내 뜻을 물을 것이며,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은 모든 일에 엘르아살의 지시를 받아야 한다” (민 27:21)
모세는 영적 대사장과 협의하지 않고, 하나님하고 직접 대화했어요.
그러나 신임 지도자인 여호수아는 대 제사장인 엘르아살과 협의하여 <엘르아살의 지시를 받으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어려운 부분은 엘르아살에게 말해 줄테니 <그의 말에 순종하라>는 뜻도 담겨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우림과 둠밈>은 무엇입니까?
우림과 둠밈은 <흰 돌과 검은 돌>을 의미하고, 대제사장의 의복(흉패)안에 있는데, 어려운 일을 결정할 때 <제비뽑기>하는 것과 같이 [긍정과 부정]을 결정하는 도구입니다.
그래서 어려울 때에는 이것을 꺼내 의사를 결정하므로 새로운 지도자인 젊은 여호수아는 <대제사장 엘르아살과 같이 협의하여 결정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어요.
그래서 그런지 성경에는 이 두사람 사이에 <갈등이 벌어졌다>는 말은 없고, 서로 멋진 팀웍을 이루며 지냈어요.
두 사람이 비교하거나 경쟁의식이 존재한다면, 누군가는 서운하게 느낄 수도 있으니까 오해의 소지도 생길 수 있어요.
그러나 이들은 서로 욕심이 없었기 때문에 기가막힌 협조 정신으로 자기의 역할을 정확하게 알고, 상대방의 역할을 존중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과의 뜻을 이루기 위해 서로 협력하며 질서를 지켰습니다.
저는 이 부분을 보면서 “하나님의 교회는 이와 같아야 한다” 생각했어요.
1. 첫째, 하나님의 교회는 <막힘이 없어야> 합니다.
의사소통 과정에 막힘이 없이 서로 할 말을 하고, 따라야 할 규칙을 따르고, 서로를 존중해 주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2. 둘째, 자기 맡은 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하고, 자기의 역할을 정확히 알고, 상대의 역할을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질서가 서게 되는 것입니다.
3. 셋째, 사람과의 관계는 투명하고, 욕심이 없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함께 생활하는 동역자들은 서로 투명하고, 욕심이 없고, <하나님의 영>이 충만해 있어야 합니다.
서로 같은 믿음을 공유하고, 서로 같은 비전을 품고 나가는 모습이 너무도 아름답고,
행복한 교회의 모습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갈 때 까지, 언제나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게 지내다가
모세가 그랬듯이 또 아론이 그랬듯이, 우리의 몸을 <수확의 제물>로 드리고 돌아가는 것과 같이 아름답게 세상을 마감하시기 바랍니다.
요단동편 지파들/ 민 32:1-8, 말씀 : 안광복 목사님
지난 주에는 모세의 마지막 장면과 새로운 지도자가 되는 <하나님의 영이 충만한> 여호수아가 리더십을 승계하는 장면을 공부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의 광야생활을 거의 마감하는 단계에 있습니다.
지금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단 강 동편에 서 있으며, 아직 요단 강을 건너지 않은 상황입니다.
여기서 두 지파의 지도자가 모세에게 찾아와서 자기네 지파가 가축을 제일 많이 키우는데, "요단강을 건너지 않고, 여기서 그냥 머물겠다”는 뜻밖의 제안을 합니다.
이들의 제안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해서 1~2절을 보시겠습니다.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은 가축이 아주 많았습니다. 그들이 보니 야셀 땅과 길르앗 땅이 가축을 키우기에 좋은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이 모세와 제사장 엘르아살과 회중의 지도자들에게 가서 말했습니다.”(민32:1-2)
우리의 삶 속에서도 무엇이 없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고, 무언가 풍족할 때에 문제가 생깁니다.
이 두 지파에게는 가축이 너무 많기 때문에 “그냥 여기서 살겠다”고 모세에게 제의했던 것입니다.
이런 제안에 모세는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까요?
가끔 우리들이 사는 현대에도 재벌가의 상속 문제라든가, 능력과 재주가 너무 많아서 문제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지금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이므로 전체의 힘을 모아서 싸워야 전쟁에서 승리할까 말까하는 싯점에서, “가축이 많다는 이유로 더 이상 싸우지 않겠다”고 < 여기서 그냥 살겠다>고 하는 것은 잘 못된 판단입니다.
여러분,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 오히려 <능력>이 더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많은 물질을 달라>고 기도할 때에 반드시 “그것을 관리할 수 있는 [능력]도 함께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리더십에 있는 사람은 시야를 <넓게> 가지고 있어야 하고, 더 <많은> 생각을 해야 하고, 더 <멀리> 내다 볼 수 있는 [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모두가 힘을 합쳐서 가나안 땅을 진격하여 싸워야 할 시점인데, “자기네 입장만을 생각하고, 여기서 머물겠다”고 말하는 것은 상황에 맞지 않는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리더는 [넓은 안목]을 가지고, 시야를 넓게 둘러보고, 더 많은 생각을 하고, 더 멀리 볼 수 있는 <경영능력>을 함께 갖고 있어야 합니다.
자기가 가진 물질을 가지고, 사람들을 돕고, 그 물질이 주변에 흘러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더 많은 축복과 더 많은 사역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가 있을 줄 믿습니다.
이것이 하늘나라의 <경제원칙>입니다.
나는 내 삶을 담아 놓는 <저수지>가 아니고, 물이 흘러가는 <통로가 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무엇인가 붙잡고 소유하려고만 하지 말고, 나누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면, 더 많은 축복과 은혜가 당신에게 흘러들어 올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경제원리]를 깨닫고,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은혜>를 누리시고, 받은 은혜를 잘 경영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곳에 4개의 강이 흐르고 있어서 가축을 기르기에 <좋은 땅>입니다. 그래서 양을 키우기 좋은 목초지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두 지파의 리더는 모세에게 “여기서 머물겠다”고 제안을 했던 것입니다.
모세가 이 제안을 들었을 때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그들은 그 땅이 좋아 보이니까, “그 땅을 먼저 차지하겠다”는 욕심이 작용한 것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만약 저희가 당신께 은혜를 입었다면, 그 땅을 우리들에게 주어 차지하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저희를 요단강 너머로 데리고 가지 마십시오.”(민 32:5)
이것은 예의를 갖추어서 하는 말 같지만, 실제로는 <폭탄선언>입니다.
40년을 광야에서 같이 고생하고, 여기까지 와서 함께 가나안 땅을 정복해야 하는 시점인데,
자기들만 여기에 남아서 <그냥 여기서 살겠다>고 말한다면, 지도자인 모세는 그것을 허락해야 합니까?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가나안 땅을 정복하지 않고, 자기들만 여기에 남아서 편안하게 “좋은 땅을 선점하겠다”고 떼를 쓰는 것과 같아요.
우리도 살다보면, 이런 욕심 때문에 <내 생각만> 앞세우는 경우가 많이 있어요.
아무리 요단강 동편의 이 땅이 좋아도, 그 땅은 하나님이 약속하고 지시한 땅이 아니예요.
욕심을 버리고 정확한 판단을 해야 하는데, 그들은 자기네 생각만 하고 있어요.
이 말을 들은 모세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6-7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갓자손과 르우벤 자손들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형제들은 싸우러 가야하는데, 너희는 여기에 남고자 하느냐? 너희는 왜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주신 땅에 들어가려고 마음 먹은 것을 왜 낙심하게 만드느냐?” (민 32:6-7)
모세의 생각에는 각 지파를 형제로 생각하면서, "형제들은 싸우러 나가려고 하는데, <왜 너희들은 여기 남아서 안가겠다>고 하느냐?“ 고 질책 할 수도 있어요.
그리고 40년을 같이 움직이던 공동체인데, 이제 너희끼리만 분리하려고 하니, 모세의 입장에서는 바람직한 제의가 아닙니다.
가나안 정복은 온 이스라엘 민족의 염원이고, 전체 힘을 합쳐서 싸워야 하는 일인데, <그동안 두 번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벌써 자만심에 빠져 있는 형제들에게 서운한 감정이 들었을 꺼예요.
우리들도 이렇게 잘못된 판단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경우가 있어요.
아무리 요단강 동편의 땅이 좋아도, 그곳은 하나님이 원하는 땅이 아니예요.
그러나 모세의 걱정과 염려는 8절을 보면 더 큰 문제가 내재되어 있었어요.
8절을 보십시오. “이것은 내가 가데스바네아에서 <그 땅을 살펴보라>고 보냈을 때, 너희 조상들이 <한 짓>과 똑같구나” (민 32:8)
모세는 과거에도 “땅을 정탐하고 오라”고 했을 때, <너희 조상들이 한 짓과 똑같다>고 말했어요.
그럼, 과거에 <너희 조상들이 한 짓>은 무엇입니까?
정탐꾼 10명이 갔다 와서 하는 말이 “그 곳은 좋은 땅이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지만, 그 백성들은 너무 커서 우리들은 메뚜기와 같아서 싸우면 모두 다 죽을 것이다”는 부정적인 얘기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술렁이고, 모세를 어렵게 만들었던 기억이 다시 생각 났던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실 노예출신으로 별 볼일 없이 살았지만, 하나님이 보호해 주심으로 40년을 고생하고, 지금 여기까지 와서 가나안 땅이 코 앞에 왔는데, 이 싯점에서 과거 어려웠던 생각이 다시 떠오르니까 걱정이 앞선 거예요.
모세는 "이제 곧 죽어야 할 운명인데......", 이런 이스라엘 민족을 두고 죽으려니 걱정이 생기는 거예요. "그들이 하자는데로 하면 싸움에서는 질 것이 분명하고, 그러면 또 하나님의 진노가 있을 텐데...." 모세는 혼자서 그런 걱정이 생각났던 거예요.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은 노예생활을 하였지만, 모세가 하나님의 공동체로 이끌면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조금씩 의식이 바뀌기 시작하여 왔으나, 그런 가운데서도 <나만 생각하는 이기주의가 싹트므로> 이런 걱정을 하는 거예요.
사람은 혼자 살 수 없어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고, 같이 공동체 생활을 해야 해요.
특히, 한국 사람들은 동창회나, 학연이나, 지연으로 얽혀 있어서 함께 어울려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누가 성숙한 사람입니까?
살아가면서 <나와 다르다>는 것을 서로 인정하고, 함께 협력해 가는 사람이예요.
상대방이 <나와 다르게 행동 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해요.
사람은 지극히 주관적인 행동을 하므로, 그것을 인정하고, <그는 나와 다르다>는 것을 이해해야 해요.
<나도 틀릴 수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남이 틀리는 것>을 지적하면 안 돼요.
내 입장만 고수하지 말고, 유연한 생각을 하면서, 더 넓게 생각을 해야 해요.
16~19절을 정리해 보면, “우리는 이곳에 우리 가축을 기르고, 우리 아이들을 위해, 우리의 성을 건축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요단 동편에서 땅을 얻게 되면, 요단강 건너의 가나안 땅을 분배받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말을 들어보면, 그들은 이미 <그렇게 하겠다>는 의사 결정을 하였고, <단호한 의지>를 표명하는 것입니다.
뒤집어 말을 하면, 어떤 수고와 댓가를 치루더라도 그들은 <이 땅을 차지 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들의 말을 자세히 살펴 보면, 계속해서 반복되는 단어가 <우리>라는 단어입니다.
여러분은 눈치 채셨을 것이지만, 이들이 그렇게 표현한 것은 공동체 생활은 관심도 없고, <우리>만 강조합니다.
그들은 "<우리는>, <우리 가축>, <우리 가족>, <우리의 성>을 짓겠다" 고 <우리>만 내 세웁니다.
특히 <하나님>이라는 말은 한마디도 없고, 다른 공동체는 전혀 생각하지 않으니, 이들의 영적 상태가 얼마나 좁은지를 알 수 있는 거예요.
그에 대해 모세가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20-22절을 보십시오.
“만약 너희가 여호와 앞에서 전쟁을 위해 무장을 하고, 무장한 너희가 여호와 앞에서 요단강을 건너서 모든 적들은 다 내쫓고, 그 땅을 여호와 앞에서 진압을 하게 되면, 너희는 여호와 이스라엘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땅은 여호와 앞에서 너희의 소유가 될 것이다”(민 32:20-22)
모세가 한 말중에서 계속 반복되는 단어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여호와 앞에서> 입니다.
모세는 <여호와 앞에서>라는 말을 반복해서 사용하며, <여호와 앞에서> "떳떳하게 행동하라"고 설득합니다.
너희가 전쟁을 하는 이유도 <여호와 때문이고>,
그 땅을 건너가는 이유도 <여호와 때문이고>,
그 땅을 정복하는 이유도 <여호와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만약에 너희가 죄를 짓는다면, 그것도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는 것이므로,
오직 모세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생각만 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종]모세에게는 <하나님 앞에서> 모든 것을 생각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서> 행동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자기들 지파의 생각만 하고, 자신들의 욕심을 챙기는 두 지파의 모습을 보면서,
모세는 한심한 생각이 들었을 거예요.
오늘의 설교의 중요한 말씀은 <여호와 앞에서>입니다.
이것은 우리들도 개인적인 생각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서> 행동해야 한다"는 거예요.
모세가 이러한 어려운 문제를 푸는 결정적인 [열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모세가 <여호와 앞에서>라는 말을 강조함으로 두 지파에게 감동을 받도록 만들었던 것입니다.
지극히 자기네만 생각만 하고 항의하는 두 지파의 리더에게 <여호와 앞에서>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모든 일은 <여호와 앞에서> 당당하게 해야 하는 일이다?" 는 것을 강조하니까, 이해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시야가 좁았고, 자기들의 행동이 잘 못된 것을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해야 일]을 찾았고, 모세의 말씀에 감동을 받고, 모세에게 설득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두 지파는 <여호와 앞에서> 무장을 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 <여호와를 위해 싸우겠다>고 다짐했습니다.
32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여호와 앞에서 무장하고, 가나안 땅으로 건너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유산으로 얻는 땅은 요단강 이쪽 편이 될 것입니다.”(민 32:32)
그들은 가나안 정복의 선봉대가 되어 싸웠고, 정작 자기네 가족과 종족만 내세우던 두 지파가 자기네 가족들과 떨어져 싸움터로 나갔습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 사람 눈치 보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의식하고, 당당하게 행동하십시오.
[나] 만을 생각하는 좁은 시야가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생각하고,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생각하고, 정직하게 생활 하십시오.
그러면 가장 모범적인 <생활인>이 되실 것입니다.
약속의 땅을 향한 사명/민33:50-56, 말씀:안광복 목사님
작년 8월 3일 민수기 공부를 시작하여, 오늘이 그 마지막 시간입니다.
우리가 공부하는 민수기는 어떤 책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구원 받았으나, 그들은 순종하는 삶을 살지 못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광야에서 훈련받는 과정을 상세히 소개해 주는 책입니다.
민수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 산에서부터 가나안의 모압 평원에 이르기까지 긴 여정을 숨김없이 기록한 책입니다.
그들은 왜 [출애굽]하였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민족이기에 거룩한 백성으로, 예배하는 공동체를 만들기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계속하여 불평을 하고 원망하면서 하나님에게 불순종하였기 때문에 곧바로 가나안 땅으로 들여 보내지 않고, 하나님은 40년간 훈련시키기로 작정하셨어요.
그래서 지금의 이야기는 <가나안에 들어가기 직전의 상황>입니다.
지금, 그들에게 부여된 [사명]은 두가지입니다. 그것은 <정복과 분배>입니다.
첫째로,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일>과, 둘째는 땅을 <분배하는 일>입니다.
민수기 33장 50-52절을 보십시오
“요단강 여리고 건너편의 모압 평원에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해 주어라. 너희가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으로 들어갈 때, 그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라. 그들이 새겨 만든 우상을 파괴하고, 그들이 부어 만든 우상들을 파괴하며, 그들의 모든 산당들은 부수라.” (민 33:50-52)
여기를 보면 3가지 동사가 나옵니다.
첫째는 쫓아내라, 둘째는 파괴해라. 셋째는 부수라.
어떻게 들어보면, 굉장히 과격한 단어입니다.
저는 이것을 보면서 가나안 정복 전쟁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쫓아내라>는 말은 “몰아내라”는 말입니다.
원주민에게 <나가라>고 해서 그냥 나가지 않으니까, <전쟁을 일으켜 쫓아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잔존해 있는 우상들을 <파괴하라>는 말입니다.
금이나 은으로 부어 만든 우상들을 파괴하고, 그 땅의 모든 산당들을 <부수라>는 말입니다.
이 땅의 우상들과 원주민들의 존재를 완전히 “뿌리 뽑아 없애 버려라”는 말입니다.
그들이 섬기던 신은 <바알 신>이고, <아세라 신>인데, 그들은 성전에서 창녀들이 머물러 있고, 아주 음란하여 모든 것을 다 <부수라>고 합니다.
51절과 52절에서 부수는 방법을 설명했다면, 53절은 그렇게 하는 이유를 설명해 줍니다.
53절을 보십시오. “그 땅을 차지하고, 거기에서 살도록 하라. 이는 내가 그 땅을 너희가 갖도록 주었기 때문이다.” (민 33:53)
왜 그렇게 청소해야 합니까?
그것은 <그들이 살아야 할 땅>이기 때문입니다.
조류 독감이 유행병처럼 돌고 있으면, 그 일대의 오리와 닭을 모두 <살 처분>합니다.
한 지역에 전염병이 오면, 완벽히 격리시키고 차단시킨 후, 그 곳의 동물들을 모두 다 죽여없애 버려야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가나안 전쟁도 “이렇게 뿌리째 뽑아야 버려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단순한 영토전쟁이 아니예요.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 수 있는 땅을 차지하는 <영토 전쟁>이 아니고, <하나님의 심판>으로 일으키는 <영적 전쟁>입니다.
과거에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킬 때에도 똑같은 목적으로 몰살시켰는데, 그것도 부패한 민족을 말살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심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소유권을 찾기 위한 전쟁입니다.
두 번째는 정복한 땅을 <분배하는 방법>입니다.
54절을 보십시오. “그 땅을 제비를 뽑아, 너희 가족별로 나눠라. 큰 가족에게는 많이 주고, 작은 가족에게는 적게 주라. 각자 제비를 어떻게 뽑든 간에 그 뽑은 대로 땅을 갖게 하라. 이렇게 해서 그 땅을 너희 조상의 지파대로 나누도록 하라.”(민33:54)
여기에서 정복한 땅을 분배하는 방법을 알려 줍니다.
첫째, 인구 수에 따라 나누어 주라.
땅 분배의 첫 번째 원칙은 <인구수에 비례하여, 땅을 나누어 주라>고 했어요.
평등한 분배기준은 사람의 숫자로 <공평히 나누어 주라>는 것입니다.
둘째, 제비를 뽑아 공정하게 배당하라.
“제비를 뽑았다”는 의미는 <하나님이 주신 땅>이라는 것을 알고, <감사히 받으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적인 오해와 편견을 버리고 공정히 제비를 뽑도록 한 것입니다.
<정복>과 <분배>는 아주 중요한 내용입니다.
이 두 가지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순종하지 못하면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55절을 보십시오. “만약 너희가 그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않으면, 그 남은 사람들이 너희 눈에 가시가 되고, 너희 옆구리에 바늘이 될 것이다. 그들이 너희가 살게 될 그 땅에서 너희를 괴롭힐 것이다.” (민 33:55)
하나님은 만약에 너희가 원주민을 쫓아내지 못하면, <그들이 눈에 가시가 되고, 옆구리의 바늘이 된다>고 경고했어요.
여러분, <가시와 바늘>을 생각해 보세요. 어떤 느낌이 드세요?
<가시>는 어떻게 보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그 <가시>가 눈에 들어 갔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것은 치명적인 상처가 될 수 있어요.
바늘이 옆구리를 찌른다면 얼마나 괴롭겠어요.
<눈에 가시>라는 말이 있듯이, 쉽게 없앨 수 없는 존재가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럼, <가시와 바늘>을 우리의 삶에 적용해 보세요.
여러분의 삶 속에 이런 <가시와 바늘>이 있으십니까?
어찌보면 큰 일이 아닌 것 같지만, 가끔 우리의 신경을 거슬리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러나 그렇게 하찮은 것이 눈에 들어가면 어떨까요? <영의 눈>을 가지고 살펴 보세요.
우리의 삶속에도 그런 <죄의 가시들>, 그런 <죄의 바늘>이 있다면, 확실히 뽑아 내세요.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 <죄의 가시들>과 <죄의 바늘>은 점점 더 커지고, 더 위험하게 되므로, 확실하게 제거해야 합니다.
56절의 마무리 말씀을 보세요.
“그렇게 되면, 내가 그들에게 하리라고 생각했던 대로 너희에게 하게 될 것이다”(민 33:56)
여기에서 <그렇게 되면>이 뭐예요?
하나님 말씀하신 대로 <완전히 몰아내라>고 했는데, 그냥 살려주면 어떻게 됩니까?
그런 것들을 남겨두면, <너희는 망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알아야 될 것은 무엇입니까?
첫째는, <가나안 땅의 주인은 하나님이다>는 것입니다.
아직 그들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그 땅을 미리 분배해 준다>는 것은 그 소유주가 하나님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전쟁의 승리는 당연히 기정사실로 받아 드리고, 승리와 관계없이 그 땅의 소유권을 가졌기 때문에 그 땅을 분배해 주는 거예요.
둘째로, 하나님의 관심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순종하느냐?>에 딸려 있어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새로운 거주자로써 그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원하는 대로 따라가야 해요.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은 전쟁에서 승리하지만, 잔존 세력인 원주민들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하고, 거칠게 대항하는 원주민을 묵인하고 있어서, 그 결과는 어떻게 됩니까?
그것은 사사기 1장 28-33절에 나와 있듯이, 계속해 반복되는 표현이 “쫓아내지 않았다”고 했어요.
셋째로, 왜 그들을 쫓아내지 않고 같이 살았을까요?
그것은 자기네들이 편하게 살기 위해 그들과 같이 사는 것을 인정하고 말았어요.
그들을 노에로 이용하기 편리하니까, 그들에게 일을 시키기 위해서 쫓아내지 않았던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의 관계가 좋아졌고, 그러다가 후에는 같이 결혼까지 하게 되었고,
더군다나 더 나아가 그 땅의 종교도 같이 섬기게 되다 보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던 방법이 전혀 아니했어요.
드디어 하나님이 염려했던 바가 현실로 나타난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바벨론이란 이방인을 동원하여, 하나님은 또다시 심판을 내리고 멸망을 시킵니다.
이런 역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맡겨진 사명을 제대로 하지 못하니까,
하나님은 이방인을 시켜서 가차없이 심판을 내린 결과입니다.
교우 여러분? 오늘 설교의 교훈은 뭐예요.
오늘 말씀의 제목인 <약속의 땅을 위한 사명>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그 <사명>을 이루는 것은 그들의 능력이 아니였어요.
그들의 사명을 이루는 것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순종>을 통해서 사명은 이루어 집니다.
우리가 이루어갈 사명도 <순종>입니다.
민수기의 중요한 key word가 <순종>입니다.
왜 그들은 가나안에 못 들어 갔나요?
그것은 <순종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왜 그들은 광야에서 40년간 고생했어요.
순종하는 것을 배우기 위해서 40년간 고생시킨 거예요
이것이 민수기의 말씀뿐만 아니고, 성경의 중요한 핵심적인 key word 입니다.
잠시 열거하면, 아담은 불순종을 통해서 <죄가 생겨났고>,
그에 반해 예수님은 갈보리 언덕에서 순종했기 때문에 <구원의 길>이 열렸어요.
모세는 호렙 산의 떨기나무 아래에서 하나님 말씀에 순종했기에 이스라엘 지도자가 되었어요.
그러나 가데스 바네아에서 불순종하였기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어요.
성경의 수많은 인물들을 돌이켜 생각해 보세요.
그들이 엄청난 업적을 남긴 것은 그들의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했기 때문에> 이루어진 거예요.
순종했을 때에 그들에게 역사가 나타났던 거예요.
아브라함이나, 요셉이나, 모세나, 다윗이나, 사무엘이나, 모두가 능력이 있으면 얼마나 있었겠어요?
그들이 <순종했으니까 그들을 통해 사명을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면, 힘들어도 하세요.
그러나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면, 욕심이 나도 하지 마세요.
그럴 때는 <참아야 해요> <하지 말아야 해요> 이것이 순종이예요.
여러분의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은 여러분의 사명을 이루십니다.
교우 여러분, 여기서 우리의 삶에 적용해 보아요.
어디에서 그 [사명]을 이룰 수가 있을까요?
우리의 마음속에는 크고 작건 모두가 그런 <가나안>이 있어요.
어떤 분에게는 <믿지 않는 시댁>이 있으시다면, 그 곳이 여러분의 <가나안> 이 될 수도 있어요.
불신자 남편과 명절 때마다 제사 지내는 문제로 인해서 다투는 난처한 상황이 바로 <가나안> 이 되는 거예요.
또 어떤 분에게는 불신자와 같이 근무하는 회사가 <가나안> 이예요.
세속적인 문화에 젖은 회사가 <가나안> 이 되는 거예요.
회식 때마다 <타락한 음주문화와 퇴폐문화에 동참하라>고 강요하는 곳이 바로 <가나안> 인 거예요.
또 어떤 분에게는 연구 성과를 내 놓아야 하는 연구실이 <가나안> 일수도 있어요.
그리고 때로는 우리 자신도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늘 음란하고, 부정직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가나안> 이예요.
그 곳이 우리가 정복해야 할 [가나안] 땅 이예요.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가나안]은 모두 <하나님의 땅>이라는 사실이예요.
그 곳에 “크고 두려운 가나안 민족이 산다 ”고 해도*****
그 곳에 “내가 싫어하는 문화가 있다”고 해도*****
그 곳에 “내가 외면해야 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해도*****
그 곳이 <하나님이 소유하신 땅>이기에 우리의 고민이 있는 거예요.
하나님은 우리가 그 곳에 들어가길 바라십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것,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이예요.
세상의 모든 문화도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으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들어가서
<거룩한 땅>으로 만들기를 바라고 있어요.
그러나 이 [가나안]을 2 분법적으로 보면 안돼요.
그 곳을 배타적으로 보거나, 세속화 되어 있다>고 단정하여 버리면 안 돼요.
마치 청학동과 같이 세상을 <때 묻은 땅>으로 보면서, 멀리서 혼자 지내면 안 돼요.
또 반대로 세상에 살면서 동화되거나, 세속화 되면 더욱 안 돼요.
우리는 세상에 침투해서, 그 속에 살면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주역>이 되어야 해요
<필립 얀시>라는 기독교 저술가는 “진정한 크리스찬은 양서류와 같이 살아야 한다”고 했어요.
개구리와 두꺼비는 물에서도 살고, 뭍(땅)에서 살면서, 서로 오가면서 살아야 해요.
하나님의 사람은 그 땅에 들어가서 살면서 <변화시키는 주역>이 되어야 해요.
우리는 그 땅을 우리에게 맡겨 주신 [사명]이 따로 있어요.
그 <하나님의 뜻>은 은사에 따라서, 재능에 따라서, 관심과 직업에 따라서,
각자의 제 역할을 발휘하여, 정복하고, 통치하려면, 하나님의 말씀 따라 <순종해야> 합니다.
여러분, 말씀 따라 순종하고 사세요.
더 많은 말씀을 보고, 그 말씀을 찾으세요.
그리고 내가 느끼는 그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사세요.
주저하지 말고, 말씀을 찾으세요.
<모른다>고 외면하지 말고, 그 말씀에 따라 순종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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