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 선 희
어둠이 바람을 깨우면 바람은 나무를 흔들고 나뭇잎은 꽃잎을 꽃잎은 사람을 그렇게 서로를 다독여 깨우는 힘이 새벽이다. 겨울 구룡포, 하나 둘 불 밝히며 일어서는 오목한 포구에 가면 바다가 세상을 깨우는 환한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병포리 비탈진 둔덕 양철지붕 아래선 아낙이 밥을 짓고, 사내들은 바닷가를 서성인다. 자그마한 배 한 척 포구로 들면 뜰채가 쏟아놓는 아귀, 도다리, 고동에서 물킁 싱그러운 냄새가 난다. 물고기를 받아 실은 활어차가 떠난 뒤, 입이 큰 아귀 한 마리를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뿐하다. 덕장마다 쫄로리 허리를 꺾은 오징어들이 말라가고 파란 대문 집에선 젖이 퉁퉁 불은 흰둥이가 새끼들을 안고 뒹군다. 방파제 너머 하늘이 발그스레하다.
- 목선을 만들던 자리, 뱃공장
조광상회에서 내려다보는 뱃공장엔 며칠 전부터 제작하기 시작한 목선 한 척이 서 있다. 한 때 “군수한테 시집갈래 배목수 한테 시집갈래?” 물으면 열에 아홉은 배목수를 선택했던 시절이 있었다. 주머니 가득 돈 찔러 넣고 읍내 극장에서 영화 한 편보고 중국집에서 요리라도 시키는 날이면 껌뻑껌뻑 넘어가던 삼정골, 세골, 고운 처자들. 배 한 척이 다 지어지면 온 동리 사람들 다 모여서 바다로 띄우고 잔치를 벌였던 곳, 한때는 밀려드는 주문량을 감당 못해 둘이서 배 한 척을 제작했던 시절도 있었다.
부산에서 수입 원목을 가져다가 한 달 가량을 말리고 물에 불린 뒤 다시 켜서 널빤지를 만들고 20cm나 되는 배못으로 박아 목선을 만들었지만 정작 갈비뼈에 해당하는 곳엔 우리나라 육송을 사용했다. 휘어지는 부분은 양잿물에 삶아 정교하게 만들었는데 가장 중요한 선미를 만들 때는 아내와의 잠자리조차 멀리했다. 공들여 만들어야 제몫을 해준다는 믿음이 컸던 탓이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에 생겨난 철선과 이어 등장한 FRP선으로 인해 1985년 경 목선은 서서히 자취를 감추고 일자리를 잃은 배목수들은 하나 둘 구룡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젠 대형 어선의 출현과 환경오염의 여파로 쓸쓸해진 뱃공장, 이젠 골 깊은 주름의 노인 몇 남아 일년에 한두 번 들어오는 주문에 목선을 만들고 있지만, 몇 날 며칠 뚝딱거리는 망치질과 초겨울 아침 피워 올리는 모닥불이 있는 동안은 등 돌린 세상에서도 부러울 것이 없는 곳이다.
뱃공장을 지나 통조림 공장 담벼락을 따라 걷는다. 오래된 철망엔 붉은 녹이 슬고 작업을 준비하는 여인들의 목청이 높은 담을 넘어 온다. 담쟁이가 발갛게 물든 벽에 기대어 나도 저들에게로 가고픈 꿈을 꾼다. 비린 생선 삶고 찌며 유쾌한 음담에 깔깔깔 넘어가기도 작업반장 흉을 보기도 하면서 어울렁 더울렁 살고 싶다. 봉급날이면 돼지고기에 신 김치 숭숭 썰어 넣고 들들 볶아 소주도 한 잔 하고, 가끔은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반장에게 달려들기도 하고 똘똘 뭉쳐 작업 거부도 모의하겠지. 즐거운 생각에 씨익 웃음이 난다.
- 포구와 어시장
수협 위판장과 트롤선이 드는 포구가 요란하다. 바닥은 이미 젖었고 트럭들이 줄지어 서 있다. 방금 도착한 선원들은 맨바닥에 펼쳐놓은 아침상에 둘러 앉아 고무바지를 입은 채 퍼뜩 허기를 채운다. 그리고는 손발 척척 맞춰가며 배 밑바닥에서 퍼올리는 오징어들, 노란 플라스틱 바구니가 철철 넘친다. 간밤 조업이 수월했을 리가 있겠냐마는 돈이 많고 적고 그것은 나중 문제이고 그저 퍼 올리고 담는 일에 신이 났다.
한동안 몰려오지 않아 죽을 맛이던 포구, 된통 다녀 간 태풍이 바다 속을 뒤집고 난 뒤 오징어가 와아아 몰려오니 일대가 온통 오징어 세상이다. 물론 예전만은 못하지만 말이다. 생선 상자를 꿰매는 노인도 천막을 새로 장만하였고, 빨간 보자기를 스쿠터에 싣고 예쁘장한 레지들이 휘릭휘릭 오가니 그야말로 가슴이 한 뼘쯤 올라붙는다. 포장집에선 구수한 어묵이 끓고 벌써부터 대포 한 잔 주거니 받거니 목청 높아진 사내들도 있다.
조포네, 무명이네가 어깨를 맞대고 사는 도로변 상가도 분주하다. 지난 밤 백열등 아래서 술잔을 부딪던 사람들의 무수한 이야기가 마을로 숨고, 다시 하루의 첫 소절을 시작한다. 수족관에 방금 바다에서 실려 온 물고기들이 쏟아지면 시장 난전엔 자그마한 좌판들이 자리를 편다. 물미역이 머리칼을 풀고 해삼도 전복도 단장을 한다. 용화상회 유창상사 할 것 없이 과메기가 걸리고 언 꽁치 상자가 겹겹이 쌓여 간다. 장날이라도 될라치면 수십 년 칼을 갈아 온 간쟁이 아저씨도 숫돌을 매만지고, 일찌감치 장보러 온 강사리 할매도 대폿집 아지매 빨갛게 바른 입술도 곱다. 사는 건 저렇듯 한 템포 빠른 설레임이다.
- 용왕당 공원과 적산가옥 거리
물고기처럼 퍼덕이며 시작하는 날들과 맞물린 곳에 깊은 과거의 우물이 있다. 버스 종점에서 파출소로 가는 뒷길을 걷노라면 오래전 구룡포 종로거리라 불리웠던 그 시절 흔적들이 소복하다. 동해안 최대의 항구였던 이곳에 드나들던 숱한 사내들의 정분을 안아주고 보듬었던 술집과 여관들, 불이 꺼지지 않던 풍어기에 왁자했던 목청과 목단꽃 이불을 덮고 왕표연탄 활활 타오르는 새벽이 올 때까지 흉어기를 견디던 긴 밤들. 지금은 사라진 극장에는 총각 처녀의 연애가 수줍게 숨어있고, 맞선을 보던 중국집 용그림은 아직도 붉다. 지금은 민박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지만, 한 때는 여럿 식모를 두고 번성했던 여인숙들이 몇 년 전 태풍 매미로 인해 대부분이 형태를 잃고 쓸쓸히 낡아가지만 그래도 따스했던 추억은 남아있다.
수희미용실 부근엔 독특한 가옥들이 마주 서 있다. 일제강점기때 구룡포항을 주무르던 일본인들이 살던 거리다. 당시에 쓰던 거울과 세면대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이발소와 지금은 기둥만 남은 이불점, 그리고 화려한 발코니 문양이 그대로 남아 있는 2층 약방이 당시 화려했던 거리를 짐작케 한다. 제 나라에서 가져다 심은 소나무와 오밀조밀한 가옥의 형태, 그리고 자그마한 정원까지 그대로다. 앞마당 문화가 발달한 우리와는 달리 뒷마당에 정원을 가꾸었던 그들은 계단식으로 화단을 꾸몄다. 오래전 일본인들은 부랴부랴 새끼들을 챙겨 싣고 저 바다를 건너 떠났지만 보이지 않는 문화는 아직도 도처에 숨쉬고 있는 것이다.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집 중 하나를 드르륵 열어 본다. 그 시절 여관이었던 이 집은 쪽방과 길게 이어진 마루를 지나 삐걱 이는 나무 계단을 오르면 이불을 담아두었던 아주 커다란 장롱과 다다미방이 그대로 있다. 몇 해 전, 일본에서 칠순 노인이 기억을 더듬어 찾아 온 이곳은 그가 어렸을 적 살던 집이었다. 빛바랜 사진 한 장을 들고 와서는 바라보고 또 바라보고 눈물 그렁그렁 그랬단다.
용왕당 공원 계단을 오른다. 올라 바라보면 구룡포가 얼마나 아름다운 포구인지 알 수 있다. 가리비처럼 오목하게 바다를 끌어안은 땅에 따개비처럼 붙어사는 삶을 보노라면 마음이 뜨겁다. 이 곳에는 이 포구를 만든 일본인을 기리는 개척비가 있다. 남의 나라 귀중한 유산을 훔쳐 빼돌린 업적을 우뚝 세워 놓은 것이다. 푸르스름한 석록이 슨 돌은 일본에서 가져왔다고 하는데 그 규모가 엄청나다. 바라보면 참으로 씁쓸하기 짝이 없다.
한때 마을 사람들 사이에선 일재의 잔해를 지금이라도 없애야 한다는 의견과 이 또한 역사의 흔적으로 보존하자는 의견이 맞물린 적이 있다. 그러나 무조건 없애는 것만이 대수가 아니라 다시는 번복하지 말아야 할 아픈 상처를 되짚는 장소로 남겨 두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아무쪼록 지방문화재로라도 지정되어 지역민들 뿐 아니라 외지의 관광객들도 당시의 상황을 두고두고 느낄 수 있는 곳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 희망의 포구
긴 방파제 끝 등대에 서면 따개비처럼 붙은 집들이 정겹다. 겨울 한복판을 견디는 등대처럼 바다를 지키는 사람들이 거기에 산다. 오래전 고기비늘이 흰 눈처럼 쌓여 발목까지 폭폭 빠졌다던, 포항으로 가는 비포장도로는 황금길이라 불렸다던 구룡포. 사람들은 물고기도 떠나고 부대업종도 쇄락해 가는 항구라 쉬이 말하지만, 돌아보면 온통 꿈틀거리는 희망의 포구다. 머구리와 해녀, 그리고 고랫배 선주와 배목수의 발길이 그대로 남아있고, 그들의 이야기가 어디서든 들린다. 과거가 함부로 폐기되지 않고 현재와 함께 묵묵히 공존하는 구룡포에서 미래는 분명 희망이다.
용두산 너머로 해가 진다. 하루의 후렴이 발그스레 울려 퍼지는 구룡포, 그러나, 다시 수천 촉 집어등을 밝히고 내일이라는 또 하나의 새벽을 열기위해 배들이 출항한다, 피데기처럼 얼고 마르고를 반복한 뒤라야 비로소 얻어지는 참 맛을 아는 사람들, 잠들지 않는 구룡포엔 그들의 싱싱한 삶이 푸른 바다 곁에 깨어있다.
『열린포항, 2006/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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