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檄 黃 巢 書
廣明二年七月八日 諸道都統檢校太尉某官 告黃巢 夫守正修常曰道臨危制變曰權
智者成之於順時 愚者敗之於逆理 然則雖百年繫命
生死難期 而萬事主心 是非可辨 今我以王師則有征無戰 軍政則先惠後誅
將期剋復上京 固且敷陳大信 敬承嘉諭 用戢奸謀 且汝素是遐甿
驟爲勍敵 偶因乘勢 輒敢亂常 遂乃包藏禍心 竊弄神器 侵凌城闕
穢黷宮闈 旣當罪極滔天 必見敗深遁地 噫 唐虞已降 苗扈弗賓
無良無賴之徒 不義不忠之輩 爾曹所作 何代而無 遠則有劉曜王敦覬覦晉室
近則有祿山朱 吠噪皇家 彼皆或手握强兵 或身居重任叱叱則雷奔電走
喧呼則霧塞烟橫 然猶暫逞奸圖 終殲醜類 日輪闊輾
豈縱妖氛 天綱高懸 必除凶族 況汝出自閭閻之末 起於隴畝之間以焚劫爲良謀
以殺傷爲急務 有大 可以擢髮 無小善可以贖身 不唯天下之人皆思顯戮
仰亦地中之鬼已議陰誅 縱饒假氣遊魂 早合亡神奪魄
凡爲人事 莫若自知 吾不妄言 汝須審聽 比者我國家德深含垢
恩重棄瑕 授爾節旄 寄爾方鎭 爾猶自懷鴆毒 不斂梟聲 動則齧人
行唯吠主 乃至身負玄化 兵纏紫微 公侯犇竄危途 警蹕則巡遊遠地
不能早歸德義 但養頑凶 斯則聖上於汝有赦罪之恩 汝則於國有辜恩之罪
必當死亡無日 何不畏懼于天 況周鼎非發問之端 漢宮豈偸安之所
不知爾意終欲奚爲 汝不聽乎 道德經云 飄風不終朝 驟雨不終日
天地尙不能久 而況於人乎 又不聽乎 春秋傳曰 天之假助不善
非祚之也 厚其凶惡而降之罰 公汝藏奸匿暴 惡積禍盈 危以自安迷以不復
所謂燕巢幕上 漫恣騫飛 魚戲鼎中 卽看燋爛 我緝熙雄略糺合諸軍
猛將雲飛 勇士雨集 高旌大旆 圍將楚塞之風 戰艦樓船
塞斷吳江之浪 陶太尉銳於破敵 楊司空嚴可稱神 旁眺八維 橫行萬里
旣謂廣張烈火 爇彼鴻毛 何殊高擧泰山 壓其鳥卵 卽日金神御節水伯迎師
商風助肅殺之威 晨露滌昏煩之氣 波濤旣息 道路卽通 當解纜於石頭
孫權後殿 佇落帆於峴首 杜預前驅 收復京都 剋期旬朔但以好生惡殺
上帝深仁 屈法申恩 大朝令典 討官賊者不懷私忿 諭迷途者固在直言
飛吾折簡之詞 解爾倒懸之急 汝其無成膠柱 早學見機
善自爲謀 過而能改 若願分茅列土 開國承家 免身首之橫分
得功名之卓立 無取信於面友 可傳榮於耳孫 此非兒女子所知 實乃大丈夫之事
早須相報 無用見疑 我命戴皇天 信資白水 必須言發響應
不可恩多怨深 或若狂走所牽 酣眠未寤 猶將拒轍 固欲守株 則乃批熊拉豹之師
一麾撲滅 烏合鴟張之衆 四散分飛 身爲齊斧之膏
骨作戎車之粉 妻兒被戮 宗族見誅 想當燃腹之時 必恐噬臍不及 爾須酌量進退
分別否臧 與其叛而滅亡 曷若順而榮貴 但所望者 必能致之
勉尋壯士之規 立期豹變 無執愚夫之慮 坐守狐疑 某告
무릇 바른 것을 지키고 떳떳함을 행하는 것을 도(道)라 하고, 위험한 때를 당하여 변통하는 것을 권(權)이라 한다. 지혜 있는 이는 시기에 순응하는 데서 성공하고, 어리석은 자는 이치를 거스르는 데서 패하는 법이다. 비록 백년의 수명에 죽고 사는 것은 기약하기 어려우나, 모든 일은 마음으로써 그 옳고 그른 것을 이루 분별할 수 있는 것이다.
- 서두(제도도통검교태위는 황소에게 고함)
이제 내가 왕사로서 말하면 정벌함은 있으나 싸우지는 않고, 군정(軍政)은 머너 은혜를 베풀고 베어 죽이는 것은 뒤로 한다. 장차 상경(上京)을 수복하고 진실로 큰 믿음을 펴려고 함에 공경스럽게 가유를 받들어 간사한 꾀를 쳐부수려고 한다. 또 너는 본래 먼 시골 구석의 백성으로 갑자기 억센 도적이 되어, 우연히 시세를 타고 문득 감히 떳떳한 기강을 어지럽게 하며 드디어 불측한 마음을 가지고 신기(神器)를 노리며 성궐을 침범하고 궁궐을 더럽혔으니 이미 죄는 하늘에 닿을 만큼 지극하였으니 반드시 여지 없이 패하여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은 분명하다.
애달프다. 당우 시대로부터 내려오면서 묘와 호 따위가 복종하지 아니하였은즉, 양심 없는 무리와 충의(忠義) 없는 것들이란 바로 너희들의 하는 짓이다. 어느 시대인들 없겠느냐. 멀리는 유요와 왕돈이 진 나라를 엿보았고, 가까이는 녹산과 주자가 황가를 시끄럽게 하였다. 그들은 모두 손에 막강한 병권(兵權)을 쥐었고 또한 몸이 중요한 지위에 있어서, 호령만 떨어지면 우레와 번개가 치닫듯 요란하였고, 시끄럽게 떠들면 안개와 연기가 자욱하듯 하였지만, 잠깐 동안 못된 짓을 하다가 필경(畢竟)에는 그 씨조차 섬멸(殲滅)을 당하였다.
햇빛이 널리 비침에 어찌 요망한 기운을 마음대로 펴리요, 하늘 그물이 높게 달려 반드시 흉적을 베일진대 하물며, 너는 여염집에서 내치고, 농묘 사이에서 일어나 분겁으로 좋은 꾀 삼고, 살상으로 급무 삼으니 큰 죄는 탁발할 수 있을 것이요, 소선(小善)으로 은신(隱身)할 수 없느니라. 천하 모든 사람이 다 너를 죽이려고 생각할 뿐 아니라, 문득 또한 땅 속의 귀신도 벌써 남몰래 베기로 의논하였다. 비록 기세를 빌어 혼을 놀게 하나, 일찍이 선을 망치고 넋을 빼앗으리라. 무릇 인사를 이름에 스스로 하는 것만 같지 못하니 내 망언(妄言)하지 않는다.
너는 자세히 듣거라. 요즈음 우리 나라에서는 더러운 것을 용납하는, 덕이 깊고 결점을 따지지 않는 은혜가 지중하여 너에게 병권을 주고 또 지방을 맡겼거늘, 오히려 짐새와 같은 독심을 품고 올빼미와 같은 흉악한 소리를 거두지 아니하여 움직이면 사람을 물어뜯고 하는 짓이 개가 주인을 짖는 격으로, 필경에는 천자의 덕화를 배반하고 궁궐을 침략하여 공후들은 험한 길로 달아나게 되고 어가는 먼 지방으로 행차하시게 되었다. 그런데도 너는 일찌감치 덕의에 돌아올 줄 모르고 다만 흉악한 짓만 늘어가니, 이야말로 천자께서는 너에게 죄를 용서해 준 은혜가 있고, 너는 국가에 은혜를 저버리니 죄가 있을 뿐이니, 반드시 머지않아 죽고 말 것인데, 어찌 하늘을 무서워하지 않느냐.
하물며 누자라 솥은 물어 볼 것이 아니요, 한나라 궁궐은 어찌 네가 머무를 곳이랴. 너의 생각은 끝내 어찌하려는 것이냐. 너는 듣지 못하였느냐. <도덕경>에 "회오리바람은 하루 아침을 가지 못하고 소낙비는 온종일을 갈 수 없다." 고 하였으니, 하늘의 조화도 오히려 오래 가지 못하거든 하물며 사람의 하는 일이랴. 또 듣지 못하였느냐. <춘추전>에 "하늘이 아직 나쁜 자를 놓아 두는 것은 복되게 하려는 것이 아니고 그 죄악이 짙기를 기다려 벌을 내리려는 것이다."고 하였는데, 지금 너는 간사함을 감추고 흉악함을 숨겨서 죄악이 쌓이고 앙화가 가득하였음에도, 위험한 것을 편안히 여기고 미혹되어 돌이킬 줄 모르니, 이른바 제비가 막 위에다 집을 짓고 막이 불타오르는데도 제멋대로 날아드는 것과 같고, 물고기가 솥 속에서 너울거리지만 바로 삶아지는 꼴을 당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는 뛰어난 군략을 모으고 여러 군사를 규합하여, 용맹스런 장수는 구름처럼 날아들고 날랜 군사들은 비 쏟아지듯 모여들어, 높이 휘날리는 깃발은 초새의 바람을 에워싸고 총총히 들어찬 함선은 오강의 물결을 막아 끊었다.
진나라 도태위처럼 적을 쳐부수는 데 날래고, 수 나라 양소처럼 엄숙함이 신이라 불릴 만하여, 널리 팔방을 돌아보고 거침없이 만 리를 횡행할 수 있으니 마치 치열한 불꽃을 놓아 기러기 털을 태우고, 태산을 높이 들어 새알을 짓누르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금신이 계절을 맡았고 수백(水伯)이 우리 군사를 환영하는 이 때, 가을 바람은 숙살하는 위엄을 도와주고 새벽 이슬은 혼잡한 기운을 씻어 주니, 파도는 이미 쉬고 도로는 바로 통하였다. 석두성에 뱃줄을 놓으니 손권이 후군이 되었고, 현산에 돛을 내리니 두예가 앞잡이가 되었다. 앞으로 서울을 수복하기는 늦어도 한 달이면 되겠지만, 살리기를 좋아하고 죽이기를 싫어하는 것은 하늘의 깊으신 덕화요, 법을 늦추고 은혜를 펴려는 것은 국가의 좋은 제도이다.
국가의 도적을 토벌하는 데는 사적인 원한을 생각지 아니 해야 하고 어두운 길에 헤매는 이를 깨우쳐 주는 데서 바른 말이라야 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나의 한 장 글을 날려서 너의 급한 사정을 풀어 주려는 바이니, 미련한 고집을 부리지 말고 일찍이 기회를 보아 자신의 선후책을 세우고 과거의 잘못을 고치도록 하라. 만일 땅을 떼어 받아 나라를 맡고 가업을 계승하여서 몸과 머리가 두 동강이 되는 화를 면하고 뛰어난 공명을 얻기 원한다면 몹쓸 도당들의 말을 믿지 말고 오직 후손에게 영화를 유전해 줄 것만을 유의하라. 이는 아녀자의 알은 체할 바가 아니요 실로 대장부의 할 일이니만큼, 그 가부를 속히 회보할 것이요, 쓸데없는 의심을 두지 말라.
나는 명령은 하늘을 우러러 받았고 믿음은 맑은 물을 두어 맹세하였기에, 한 번 말이 떨어지면 반드시 메아리처럼 응할 것이매 은혜가 더 많을 것이요 원망이 짙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만일 미쳐서 날뛰는 도당들에 견제되어 취한 잠을 깨지 못하고 마치 당랑이 수레바퀴를 항거하듯이 어리석은 고집만 부리다가는, 곰을 치고 표범을 잡는 우리 군사가 한 번 휘둘러 쳐부숨으로써 까마귀 떼처럼 질서 없고 솔개같이 날뛰던 무리가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칠 것이며, 너의 몸뚱이는 도끼 날에 기름이 되고 뼈다귀는 수레 밑에 가루가 될 것이며 처자는 잡혀 죽고 권속들은 베임을 당할 것이다.
-본문 (왕사로서 정벌하고자 함)
옛날 동탁처럼 배를 불태울 그 때가 되어서는, 사슴처럼 배꼽을 물어뜯는 후회가 있을지라도 시기는 이미 늦을 것이니, 너는 모름지기 진퇴(進退)를 참작하고 옳고 그른 것을 분별(分別)하라. 배반하다가 멸망하기보다 어찌 귀순(歸順)하여 영화롭게 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다만, 너의 소망(所望)은 반드시 이루게 될 것이니, 장부(丈夫)의 할 일을 택하여 표범처럼 변하기를 기할 것이요, 못난이의 소견(所見)을 고집하여 여우처럼 의심만 품지 말라.
- 결말(귀순을 권유)
요점 정리
연대 : 당나라 881년
작자 : 최치원
형식 : 격문, 변려문체
성격 : 경고와 힐책과 회유
주제 : 적장의 죄과를 꾸짖고 투항할 것을 권고하는 글
의의 : 신라인으로서 당나라 사람들까지 놀라게 한 명문으로 최치원의 명성을 천하에 떨치게 한 글
내용 연구
격서 : 격문 또는 격. 특별한 경우에 군병을 모집하거나, 세상 사람들의 흥분을 일으키거나 또는 적군을 타이르거나 힐책하기 위하여 발표하는 글
광명 : 당나라 희종의 연호(880-881) 재위는 873-888
대저 : 대체로 보아서
변통 : 일의 경우를 따라서 이리 저리 막힘없이 잘 처리함.
권 : 위태로움에 임해서 슬기롭게 이겨 나갈 수 있는 것
군정 : 전쟁이나 사변 때 군사령관이 임시로 행하는 행정
순응 : 환경을 좇아서 그것에 잘 적응함
분별 : 세상 물정을 알아서 가림
왕사 : 정부의 군대
상경 : 당나라 서울 장안
수복 : 잃었던 땅을 도로 찾음
가유 : 황제의 유시
신기 : 황제의 자리
성궐 : 대궐의 문
이해와 감상
신라 헌강왕 때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격서. 최치원이 당나라에서 귀국한 이듬해 자신이 편찬하여 헌강왕에게 올린 다섯 편의 저서 중의 하나인 ≪계원필경집 桂苑筆耕集≫ 20권 중 제11권의 첫머리에 수록되어 있다.
당나라 때에 있었던 유명한 민란인 황소(黃巢)의 난 때 그 괴수 황소에게 항복을 권유하기 위하여 보내는 격문을 대필한 것이다. 내용은 도(道)와 권(權)을 내세워 천하대세의 운행이치를 밝히고, 당나라 조정의 바르고 강성함과 황소 무리의 비뚤어지고 무모함을 대비시켜 사태를 올바로 파악하여 항복하도록 권유한 것이다.
특히, 이 글 중의 “천하 사람들이 모두 백일하에 능지처참할 것을 생각할 뿐 아니라 땅속의 귀신들도 이미 암암리에 처치할 것을 의론하였다.”라는 구절에서 황소는 저도 모르게 상 아래로 내려와 꿇어엎드렸다는 일화와 함께 문학사 및 시화(詩話) 등에서 빈번히 인용되어오고 있다.
이 글의 문체는 대표적인 사륙변려문(四六騈儷文)으로, 변려체의 형식미 및 대장법(對仗法)의 묘는 독보적인 것이었고, 또 후세의 한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것은 중국 일류의 사륙(변려)문체가들의 그것보다 뒤떨어지지 않는다.
다만, 형식에 너무 치우쳐 작자의 독특한 사상과 정서의 결여가 하나의 결함이 되고 있으나, 문학사상 신라 전 기간을 통하여 가장 뛰어난 문장으로 평가되고 있다.
≪참고문헌≫ 桂苑筆耕集, 三國史記, 東國文宗崔孤雲文學(徐首生, 語文學 1·2).(출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해와 감상1
당나라 희종 광명 2년에 유적인 황소가 모반하여 복주를 점령하고 소란을 일으키자, 조정에서는 고변을 제도행영도통을 삼아 적을 치게 하였다. 이 때 최치원은 그의 막하에서 고변을 대신하여 7월 8일에 '격황소서'를 지었다. 이 격문은 적장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명문으로서 문필의 대공을 세웠다. 이 격문의 뜻이 호장 장엄하여 추상열일과 같은 위압의 힘이 있었고, 용천설악의 쾌도로써 요마의 머리를 한 칼에 베는 것같은 위엄이 있었다. 격문에서 적장의 죄를 꾸짖고 힐책하는 가운데, '다만 천하의 모든 사람이 너를 죽이려고 생각할 뿐 아니라, 또한 땅속의 귀신까지도 이미 남몰래 너를 베려고 의결하였다'라고 한 구절에서는 아무리 완강무지한 도둑일지언정 한 번 읽고는 모골이 쭈뼛하고 혼비백산하여 저도 모르게 상(床)에서 굴러 떨어졌다고 한다. 이로써 최치원의 문명(文名)이 천하에 떨쳐져 천 년 후인 오늘날에도 그 이름이 높게 된 것이다. 그리고 조종(祖宗)이라는 의의를 제쳐놓고라도 갖가지 설화와 일화, 기담으로 말미암아 초인적 존재로서 추앙을 받는 소지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심화 자료
변려문
변려체·변문 ·사륙문(四六文) ·사륙변려문이라고도 한다. 문장이 4자와 6자를 기본으로 한 대구(對句)로 이루어져 수사적(修辭的)으로 미감(美感)을 주는 문체로, 변은 한 쌍의 말이 마차를 끈다는 뜻이고, 여(儷)는 부부라는 뜻으로 후한(後漢) 중말기(中末期)에 시작되어 위(魏) ·진(晋) ·남북조(南北朝)를 거쳐 당(唐)나라 중기까지 유행한 문체로, 변려문이라는 명칭은 당송(唐宋) 8대가의 한 사람인 유종원(柳宗元)의 '걸교문(乞巧文)' 중 “변사려륙금심수구”라는 구절에서 유래한다.
변려문의 필수적인 조건은 다음과 같다.
① 개념 및 문법적인 기능이 서로 대응하는 2개의 구(句)로써 대구(對句)를 이루어 문장의 대부분을 구성한다.
② 문장의 전편(全篇)이 4자구(四字句)를 주로 하고, 6자구(六字句)를 이에 따르도록 구성한다. ‘사륙문’이라는 호칭은 여기서 나왔다.
③ 구말(句末) 및 구중(句中)에서 일정한 규칙에 따라 평측(平仄)을 안배(按排)하고 문장의 운율을 알맞게 다듬는다.
④ 고전(古典) 문장을 잘라서 쓰는, 이른바 단어를 교묘하게 활용하여 문장에 세련미를 갖게 한다.
변려문의 귀족적인 문체는 과도한 수사주의(修辭主義) 경향으로 말미암아 중당(中唐) 때 한유(韓愈) 등이 일으킨 산문개혁운동에 의하여 서서히 쇠퇴의 길을 걸었고, 한국에서는 신라 때에 이미 '문선(文選)'이 애독되면서 이 문체가 성행하였으며, 고려 때까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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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신라 말기의 학자 · 문장가 최치원(崔致遠, 857∼?)의 문집. 885년(헌강왕 11) 중국 회남(淮南)에서 귀국하여 그 이듬해인 886년(정강왕 1) 그의 나이 서른살이 되던 해 당나라에 있을 때의 작품을 간추려 정강왕에게 바친 문집이다. 자서(自序)에 의하면, 《계원필경》 20권과 아울러 《사시금체부 私試今體賦》 1권과 《오언칠언금체시 五言七言今體詩》 1권, 《잡시부 雜詩賦》 1권, 《중산복궤집 中山覆궤集》 5권을 함께 바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지금 전하는 것은 《계원필경》 20권뿐이다. 고변(高騈)의 휘하에서 4년간 창작한 작품이 1만여수나 되었으나, 대부분이 도태(淘汰)되고 그 중 10분의 1 내지 2 정도의 분량이 《계원필경》 20권으로 편집되었다. 또한, “모래를 헤쳐 금을 찾는 마음으로 《계원집 桂苑集》을 이루었고, 난리를 만나 융막(戎幕)에 기식하며 생계를 유지하였기 때문에 필경(筆耕)으로 제목을 삼았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일찍이 서거정(徐居正)이 《계원필경》을 “우리 동방의 시문집이 지금까지 전하는 것은 부득불 이 문집을 개산비조(開山鼻祖)로 삼으니 이는 동방 예원(藝苑)의 본시(本始)이다.”라 칭한 것처럼, 현전 최고 최초의 개인문집이다. 《계원필경》은 최치원이 고변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재직할 때의 작품인만큼 우리나라와는 별로 관계가 없는 시문이 대부분이다. 《신당서 新唐書》 예문지(藝文志)에는 “최치원은 고려인이며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하고 고변의 회남종사(淮南從事)가 되었고, 문집인 《계원필경》 20권과 《사륙 四六》 1권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계원필경》이 《신당서》에 실릴 만큼 국제적인 저술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문집이 1,000여년을 두고 인멸되지 않고 계속 간행된 까닭은 후대 과문(科文)의 한 전범(典範)으로 원용되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이 문집은 사륙변려문(四六騈儷文)의 유려한 문체가 수많은 전고(典故)를 담은 채 주종을 이루고 있다. 《계원필경》은 최치원 자신의 느낌과 감상을 적은 글은 거의 없고, 대부분 고변을 위하여 대작(代作)한 것으로, 우리나라와는 깊은 관계가 없는 생소한 중국의 사실들로 점철되어 있다. 《계원필경》 20권의 체재와 내용을 보면, 서문을 서두로 하여 권1 · 2에 표(表), 권3에 장(狀), 권4 · 5에 주장(奏狀), 권6에 당장(堂狀), 권7∼10에 별지(別紙), 권11에 격서(檄書)와 서(書), 권12 · 13에 위곡(委曲), 권14에 거첩(擧牒), 권15에 재사(齋詞), 권16에 제문 · 서(書) · 소(疏) · 기, 권17에 계(啓) · 장, 권18에 서(書) · 장 · 계, 권19에 장 · 계 · 별지 · 잡저,권20에 계 · 장 · 별지 · 제문 · 시 등으로 구성되었다. 권1∼5까지는 고변이 황제에게 올리는 표와 장을 최치원이 대필한 것이며, 권6∼권10까지는 고관대작들에게 주었던 공문별지(公文別紙)이며, 권11은 유명한 〈격황소서 檄黃巢書〉를 비롯한 격문과 서(書)로 짜여져 있다. 이들은 대체로 받는 이들을 설득시키는 힘이 강한 변려문으로 많은 고사를 인용한 화려한 문체이다. 풍부한 고사와 적절한 대구(對句)와 압운(押韻)은 후세인의 경탄을 자아내기에 족하다. 한편, 이러한 변려문을 이덕무(李德懋)와 홍석주(洪奭周)는 “중국에서 유행이 지나 한물간 문체를 모방한 아류(亞流)에 불과하다.”고 혹평을 하기도 하였지만, 그의 문재(文才)는 역시 후인의 추종을 불허한다. 특히, 권15의 〈재사〉 15수는 당대(唐代)의 도교(道敎)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알려져 있고, 권16의 〈보안남록이도기 補安南錄異圖記〉는 월남(越南)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필요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 권17에서 사도상공(司徒相公)인 고변에게 중국 역대의 영웅들을 나열하여 그에게 대비시키며 칭송한 〈기덕시 記德詩〉 30수는 주제가 너무 노골화되어 시로서의 품격을 잃고 있기도 하다. 그의 상사인 고변을 장량(張良)에 비유하여 천하를 평정한 국태민안의 주역으로 보고, 시를 통하여 그를 구가하고 있어 최치원은 고변을 과대평가하고 있다. 또, 〈안남 安南〉이라는 시에서는 남만(南蠻)인 안남을 마음껏 멸시하고 있다. 또한, 권20은 귀국 직전의 작품으로 인정되고 있는데, 여기에 실린 글들은 대부분 자신의 정감을 읊고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장이다. 특히, 〈사허귀근계 謝許歸覲啓〉에서는 자신의 짙은 정회를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조국과 어버이에 대한 그리움과, 당나라에서 얻은 영광이 얽힌 착잡한 심경이 잘 나타나 있다. 금의환국(錦衣還國)의 꿈에 부푼 최치원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당나라에서 얻은 모든 영광을 고국의 어버이에게 보인 뒤 다시 돌아오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다. 그의 마음은 이미 당나라를 떠나 고국에 가 있다. 이에 귀로의 뱃길의 무사함을 비는 간절한 마음이 〈제참산신문 祭참山神文〉에 절실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는 토속신에 대한 믿음도 있었던 것처럼 보이며, 중국의 민속신앙에도 긍정적이었다. 민속신앙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는, 신라 화랑도의 풍류(風流)를 유불선(儒佛仙)을 수렴하는 주체로 파악한 그의 의식과도 접맥된다. 이 문집에는 시가 60수 정도 되는데, 그 중 권17의 시 30수는 송덕시(頌德詩)인만큼 문학적 가치에는 한계가 있으나, 권20의 시 30수는 이와는 달리 작자의 진솔한 심경이 잘 나타나 있으며, 혁명을 노래한 것으로 여겨지는 〈야소 野燒〉에서는 난세에 옥과 돌이 구분도 없이 타버리는 현실을 박진감 있게 노래하고 있다. 한편, 〈산정위석 山頂危石〉에는 자존(自尊)의 긍지와 이기적인 세태에 대한 울분이 담겨 있다. 이 문집은 고변을 위한 대필과 공식문서가 대부분이고, 또한 중국의 사실들로 이루어져 있어 우리나라의 저술에 머무르지 않고 동양의 명저로 자리를 굳힌 책이다. |
첫댓글 귀한 자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