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시마 원폭 투하 1945년
1946년 일본이 패망하고, 중국에서 철수한 후 중국 내륙의 정치 세력들 간에 내전이 일어났다.
1949년 공산당 인민해방군이 국민당 군대에 승리하고, 모택동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국민당 군은 대만으로 옮겨 가 정부를 세웠다.
1952년 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을 점령하던 연합군이 본토에서 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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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30초. 태평양 비행기지를 출발한 미국의 B29 에놀라 게이가 히로시마 상공에서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지름 71센티미터, 길이 3.05미터, 무게 약 4톤의 ‘리틀보이(Little Boy)’가 떨어진 순간,
오렌지색 섬광이 번뜩이고 거대한 버섯구름이 피어올랐다. 도시의 60퍼센트가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무너져 내렸고,
반경 500미터 이내에 있던 모든 생명체가 즉사했다.
에놀라 게이에서 이를 지켜보던 조종사 중 한 사람은 “오, 하느님, 우리가 지금 무슨 일을 저질렀습니까?”라고 중얼거렸다.
이날 사망한 히로시마 시민은 7만 8,000명. 부상당한 사람과 행방불명된 사람은 5만여 명에 이르렀다.
이후 방사능 후유증 등으로 앓다가 죽은 이들까지 합치면 모두 24만 명이 원폭의 피해를 입었다.
당시 히로시마 인구는 34만 명이었다. 사흘 후인 8월 9일 오전 1시, 두 번째 원자폭탄 ‘팻 맨(Fat Man)’이 나가사키 교외
우라카미 상공에서 폭발했다. 미쓰비시 철강 공장을 포함해 시의 산업시설 중 30퍼센트가 잿더미가 되었다.
7만 4,000명이 죽었고, 7만 5,000명이 부상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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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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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투하된 두 개의 원자폭탄은 1939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낸 한 통의 편지에서 비롯되었다. “우라늄의 원자핵 분열을 이용하면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폭탄을 만들 수 있습니다.
독일은 이미 원자핵 분열 실험에 성공했습니다. 미국도 빨리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독일 베를린에서 물리학자 오토 한과 프리츠 슈트라스만이 원자핵 분열에 성공했다는 소문은 사실이었다.
위기감을 느낀 미국 정부는 1942년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유럽의 물리학자들을 중심으로
원자폭탄 개발에 나섰다. ‘맨해튼 프로젝트’가 공식적으로 착수된 것이다.
12만 5,000명의 과학자와 20억 달러가 투입된 초대형 프로젝트였다.
대다수의 연구자들은 자신이 만들고 있는 최종 결과물이 무엇인지, 옆 실험실에서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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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리코 페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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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12월 엔리코 페르미가 이끄는 물리학자들이 시카고 대학의 한 실험실에서 최초로 제어된
연쇄 핵반응을 일으키는 데 성공했다. 3년 후인 1945년 7월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이끄는 연구 팀이
뉴멕시코 주 앨라모고도 모래사막에서 인류 최초의 플루토늄 폭발 실험에 성공했다.
높이 15킬로미터, 폭 1.5킬로미터에 달하는 버섯구름이 형성된 실험 결과는 모든 면에서 예상을 뛰어넘었다.
폭발 당시 생성된 에너지는 TNT 2만 톤에 맞먹었다. 인류가 만든 최악의 살상 무기가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원자폭탄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오펜하이머조차 버섯구름의 위력을 직접 본 후
“나는 죽음의 신이 되었다.”라며 자조했다. 그를 비롯해 원자폭탄 개발에 참가한 과학자들은
완성된 폭탄을 실전에 사용하지 말 것을 요청하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아인슈타인도 원자폭탄 개발을 제안한 것을 후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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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오펜하이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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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트루먼과 군인들은 엄청난 예산을 쏟아부어 만든 획기적인 신무기를 한 번 써 보지도 못하고 버릴 마음이 없었다.
관건은 표적을 어디로 하느냐는 것이었다.
원래의 목표 대상이던 독일은 이미 원폭 개발을 포기했을 뿐 아니라 항복을 선언한 상태였다.
따라서 마지막 남은 교전국 일본이 표적이었다.
패색이 짙어졌음에도 일본은 전원 옥쇄(玉碎)라도 할 기세로 결사항전을 외치고 있었다.
1944년 여름 사이판을 점령한 미국은 일본 본토 공습을 시작했다.
1945년 2월 23일 미 해병대가 도쿄에서 불과 1,045킬로미터 떨어진 화산섬 이오지마에 성조기를 꽂았다.
미군이 일곱 번 패퇴하고 여덟 번째에서야 섬을 차지할 정도의 격전으로 5,000여 명이 희생되었다.
미군이 일본의 턱밑까지 도달했지만 일본은 끈질기게 버텨 냈다.
일본은 폭탄을 실은 전투기로 적함에 돌진하는 자살 특공대인 ‘가미카제(神風)’나 인간어뢰 등
충격적인 방식으로 미군에 저항했다.
일본 열도에 미군이 상륙한다 해도 적지 않은 인명과 물자 손실을 각오해야 했다.
미 군 일각에서는 일본 본토 공격에 최소 100만 명 이상의 미군이 희생될 것이라는 예측을 내놓으며
원자폭탄 사용의 불가피성을 주장했다. 때마침 독일과의 전쟁을 끝마친 소련이 일본과의 전쟁에
개입하기 위해 남하를 서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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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미카제
일본군의 자살특공대인 가미카제의 일환으로 기요시 오가와가 파일럿과 함께 1945년 3월 USS 벙커 힐을 폭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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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했던 트루먼은 소련에 전공을 빼앗기지 않고
하루라도 빨리 전쟁을 마무리하고 싶어 했다.
이처럼 복잡한 전쟁 판도와 새로 손에 넣은 무기를 실전에 써 보고 싶은 욕심이 맞물리면서
역사상 최악의 결단이 내려졌다. 히로시마 원폭 투하 결정을 비난하는 측에서는 원폭 투하 이전에
일본의 항복이 예정되어 있었다고도 한다.
결국 두 개의 원자폭탄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상공에 사흘 간격으로 투하되었고, 일본은 무릎을 꿇었다.
일본은 처음에는 천황 제도를 존속시키는 조건으로 항복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했지만,
미국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할 수밖에 없었다.
1945년 8월 15일 정오, 천황은 라디오 방송을 통해 떨리는 목소리로 일본 전역에 패전과 항복 사실을 알렸다.
그리고 9월 2일 요코하마에 정박 중인 미 군함 미주리 호 선상에서 맥아더 사령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시게미쓰 마모루 외무장관이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이로써 3년 8개월에 걸친 태평양 전쟁이 막을 내렸다.
5,000만 명이 희생된 인류 역사상 최악의 비극인 제2차 세계대전도 함께 끝을 맺었다.
극동국제군사재판소는 A급 전범으로 기소된 도조 히데키 전 총리 등 일곱 명을 사형에 처했다.
그러나 군국주의 일본 체제의 상징이자 구심점이었던 히로히토 천황은 법정에 서지 않았고,
일왕(日王)의 자리도 잃지 않았다. 대신 맥아더 사령관은 히로히토 천황으로 하여금 1946년 1월 1일 아침,
라디오 신년 담화를 통해 자신이 신(神)이 아닌 인간임을 선언하도록 했다.
신격화된 권위를 통해 ‘천황의 뜻’이라면 불가능할 게 없는 일본의 기형적 의식 구조를 뜯어고치기 위한 퍼포먼스였지만,
천황에게 면죄부를 주었다는 국제 사회의 비난도 적지 않았다.
한편 핵무기에 의한 대량학살을 경험한 인류의 충격은 엄청났다.
원폭 투하 결정의 부도덕함에 대해 국제적인 비난 여론이 들끓었다. 전쟁이 끝난 후 트루먼을 만난 오펜하이머는
“제 손에서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라며 양심의 가책을 호소했다.
인간의 손에 가공할 만큼 위력적인 무기가 들려 있다는 것은 모두에게 등골이 오싹해지는 불안감을 안겨 주었다.
그 무기를 통제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닥쳐올 공멸의 순간 때문이다.
여기에다 소련이 1949년 8월 카자흐스탄의 사막에서 핵실험에 성공하면서 전 세계에 무분별한 군비 경쟁이 시작되었다.
영국, 프랑스, 중국, 인도, 파키스탄 등 인류를 파멸시킬 ‘버튼’의 수는 갈수록 늘어났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희생자 중에는 한국인도 수만 명 포함되어 있었다.
징용이나 정신대 등으로 일본에 끌려갔거나, 가난을 못 견뎌 일본으로 건너가 생계를 이어 가던 이들이었다.
생존자들도 심각한 방사능 후유증을 겪었고, 이는 2세, 3세까지 이어지면서 끝나지 않은 전쟁의 참상을 상기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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