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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구나 예외 없이 상실을 겪는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고통을 경험한다. 살아 있다는 것은 곧 상실로 고통을 당한다는 의미다. 상실은 어느 때는 선천적이며 예견 가능할 뿐 아니라 심지어 되돌릴 수도 있다. 그런 경우 상실은 예정된 때에 계절이 순환하듯 일정한 간격을 두고 일어난다. 우리는 상실을 경험하지만, 불편한 몇 날 또는 몇 달이 흐른 뒤에 예전의 삶을 되찾는다. 그리고 삶은 다시 우리가 바라고 기대하던 모양이 된다. 겨울이 사라지면 봄의 회복으로 이어진다. 이런 식의 상실은 전형적인 인간의 삶을 규정한다. 살아간다는 것은 변화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변화란 우리가 다른 무언가를 얻으려면 어느 하나를 잃어버려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젊음을 잃지만 대신 성숙함을 얻는다. 우리는 가정이라는 안전장치를 잃지만 대신 우리 힘으로 살아가는 독립을 얻는다. 우리는 독신 때의 자유를 잃고 대신 결혼 관계의 친밀함을 얻는다. 우리는 딸을 잃고 대신 사위를 얻는다. 삶은 그야말로 상실과 획득의 연속이다. 이 과정은 연속성이 있으며 쉽게 깨지지도 않는다. 우리는 지나간 상실들을 기억한다. 그리고 앞으로 얻게 될 것들을 기대한다. 우리는 친숙한 과거와 기대되는 미래 사이에서 양편에 다리를 걸치고 살아간다. 오늘 우리가 즐기는 삶의 형국은 조금씩 무대 뒤편으로 물러나다가 마침내 시야에서 사라진다. 그러나 앞에서 흐릿하게 보이는 것들이 조금씩 가까워지고 분명해지다가 우리의 시선을 사로 잡으며 현재라는 형국이 된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나는 비록 죽음을 경험했지만, 또한 전에는 가능하리라고 상상하지 못했던 여러 방식을 통해서 삶을 경험했다. 어둠이 지나고 난 다음이 아니라 어둠 속에 있을 때 말이다. 나는 고통을 너끈히 견뎌내고 반대편 끝까지 간 게 아니다. 아니, 고통 속에 있으면서 그 고통 속에서 은혜를 발견했다. 그 은혜가 나를 살게 했고 결국에는 자라게 했다. 사랑하는 이들을 잃어버린 상실을 이겨낸 게 아니었다. 오히려 나는 그 상실을 고스란히 내 삶 속으로 받아들였고, 그 상실은 나의 일부가 되었다. 땅이 부패한 생물체를 고스란히 빨아들이는 것을 생각하면 될 것이다. 슬픔이 나의 영혼 속에 들어와 영구적으로 자리를 잡았고 그 영역을 넓혀나갔다. 고통 속으로 깊이 빠져들수록 우리는 전혀 새로운 삶, 전혀 다른 삶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게 된다는 길 조금씩 배워갔다. 그 삶은 이전보다 더 나쁘지는 않았으며, 어느 때는 오히려 좀 더 나았다. 기꺼운 마음으로 상실을 마주하는 것, 그리고 어둠 속으로 발을 들여놓는 것, 그것은 우리가 디뎌야 하는 첫 번째 걸음이다. 처음 걸음이란 대개 가장 힘들기 마련이며 내딛는 데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린다.
*프랭클은 그것에 대해 자신 있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보았던 그들은 나치 수용소라는 거대한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내면에서 일어난 어떤 결심에 따라 자신들의 삶을 이끌어간 이들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르러 이렇게 강조했다. "나치 수용소 생활을 겪으면서 나는 인간에게 선택이라는 행위가 있을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것에 대한 증거는 충분하다. 종종 볼 수 있는 인간의 영웅적인 본성도 그 예가 될 수 있다. 이 세상에서 무관심은 충분히 극복될 수 있고, 민감함이 편만해질 수 있음을 그것들은 증거한다. 인간은 정신적 육체적 압박이 극심한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도 영적으로 자유롭고, 정신적으로 독립적일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할 수 있다. 프랭클은 수용소 수감자들이 현실의 고통 속에서 의미를 발견했기 때문에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초월할 수 있었다고 결론지었다. "어떤 식으로든 삶에 의미가 존재한다면, 고통 속에서도 의미가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고통은 우리 삶에서 떼어낼 수 없는 일부분이다. 운명이나 죽음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고통과 죽음 없이 인간의 삶은 결코 완전해질 수 없다.“
*(나치의)수용소에서 수감자들을 살아가게 한 동력은 이러한 선택의 힘이었음을 프랭클은 똑똑히 지켜보았다. 그들은 자신의 에너지를 안으로 발산했고 그들의 영혼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관심을 쏟았다. 비극을 겪음으로써 자신의 영혼은 빛뿐 아니라 어둠까지 감싸안게 되며, 그래서 즐거움뿐 아니라 아픔도, 소망뿐 아니라 낙심까지도 너끈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는 것을 그들은 배웠다. 그 영혼은 하나님을 알고 또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얻으며, 고결해지고 진리를 깨닫고, 도덕적 확신을 따라 살아갈 능력을 얻는다. 영혼은 마치 풍선처럼 슬픔을 당해도 금방 이겨낼 수 있는 탄력성을 갖추게 된다. 영혼은 고통을 통해 부쩍 자랄 수 있다. 우리가 상실을 겪을 때마다. 그 상실은 우리로 하여금 뒤이어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온갖 감정들 곧 분노 침체, 절망, 번민 등을 견뎌낼 수 있도록 해준다. 우리 영혼이 상실을 겪음으로써 한 단계 올라섰을 때, 우리 영혼은 다시금 커다란 기쁨과 힘과 평화와 사랑을 경험할 수 있다. 둘 사이의 접점은 있을 수 없을 거라고 여겼던 상극의 존재들. 다시 말해 동쪽과 서쪽, 밤과 낮, 슬픔과 기쁨, 약함과 강함, 분노와 사랑, 절망과 희망, 죽음과 삶 등은 한겨울의 태양 빛처럼 서로 배타적이지 않은 대상이 된다. 영혼은 상극인 것들을 동시에 경험하는 능력을 소유하게 되다.
*예일 대학의 철학 교수 니콜라스 월터스토프는 수년 전 등반 사고로 장성한 아들을 잃었다. 그는 당시에 경험한 슬픔의 감정을 고스란히 일기에 적어두었는데, 나중에 그것을 모아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습니다’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판했다. 월터스토프 프랭클과 비슷한 결론에 도달했다. 그는 고통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진술하고 있다. 그리고 때로는 흐느낌이 깊어지다 보면 다른 데서는 보이지 않던 빛이 나타난다. 그것은 용기의 빛, 사랑의 빛, 깨달음의 빛, 무욕의 빛, 믿음의 빛이다. 그 빛 속에서 우리는 인생의 참된 의미를 발견한다. 고통의 깊은 계곡을 지날 때, 절망과 쓰라림이 생긴다. 그러나 거기서 우리의 성품도 다져진다. 고통의 계곡은 곧 영혼을 빚는 계곡이기도 하다.
상실을 겪고 나면 우리가 이전보다 불행해진다는 얘기는 사실이 아니다. 상실을 겪었을 때 우리가 불행해지는가 하는 문제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사항이기 때문이다. 상황에 철저하게 예속당하는 껍데기뿐인 자아만 남을 때까지 상실에 짓눌리는 경우도 순전히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문제다. 상실은 우리를 이전보다 성장한 다른 모습으로 만들어줄 수 있다. 어둠 속을 지날 때에도 우리는 여전히 빛을 발견할 수 있다. 죽음을 경험했을 때에도 우리는 삶을 찾아낼 수 있다. 오직 우리의 선택에 달렸다.
*어둠 속으로 뛰어들어갈 때,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어둠 그 자체다. 우리는 아파하며 번민과 슬픔, 절망을 느낀다. 삶이 너무 지저분하다든가 아무 의미 없다든가 덧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는 희망과 더불어 절망을 겪는다. 열정과 함께 포기를 경험한다. 믿음뿐 아니라 회의도 경험한다. 우리는 희망적이다가도 종종 냉담해지기도 한다. 기뻐하는 만큼 슬픔에 잠기기도 한다. 우리는 깊이 애곡하는 동시에 제대로 된 삶을 살기로 한다. 삶의 두 가지 면, 곧 어둠과 빛을 동시에 경험한다.
어둠 속으로 들어가기로 선택했다고 해서 그 다음부터 길이 쉬워지는 건 아니다. 어둠은 금방 사라지지 않는다. 칠흑같이 어두운 지하실에 들어간 아이가 전등 스위치를 더듬다가 불이 켜지면 그와 동시에 무서워하던 얼굴 표정이 확 바뀌는 것처럼, 그런 기대를 품어서는 안 된다. 어둠은 사라지지 않고 지겹도록 오래간다. 어쩌면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날 동안에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고통을 정말 극복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다른 이들의 고통에 훨씬 민감해지며 이 세상에 넘쳐나는 어둠을 이전보다 더 잘 인식하게 된다. 어둠 속으로 뛰어 들기로 결정했다고 해서 그 다음에는 어둠 저 끝 반대편으로 빠져나갈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나는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다거나 꼭 해야 한다는 확신을 갖고 있지도 않다.
*상실을 겪는 사람들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느낀다. 항상 확신하지는 못했지만, 나는 고통이 선물이라고 나 자신에게 종종 말하곤 했다. 고통은 우리가 살아 있다는 확실한 징표다. 죽은 사람은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오랫동안 사랑과 선함과 슬픔을 거부하다가 더 이상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숨이 붙어 있을지는 몰라도 죽은 사람이라고 보는 게 맞다. 고통이 선물이 되는 이유는, 그것이 신체적인 고통이든 아니면 마음의 고통이든, 우리가 무언가를 느낄 수 있다는 걸 알려주기 때문이다. 신체의 고통은 세상 속에서 삶이 가지는 부정적인 면을 경험할 수 있는 감각을 우리가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우리 몸의 신경 조직은 우리에게 세상에 관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세상에서 맛볼 수 있는 즐거움에 대한 정보뿐 아니라 세상의 위험성을 경고해준다. 그러므로 고통은 쾌락의 뒷면이라고 할 수 있다. 신경 조직은 우리에게 이쪽 면을 알려주면서 동시에 저쪽 면에 대해서 말해준다. 눈은 시리도록 밝은 빛 아래서 깜빡거리다가도 산봉우리나 들판의 야생화를 경이롭게 바라본다. 코는 또 어떤가. 코는 집 안 어딘가에 숨어 있는 작은 동물의 냄새를 맡고, 부엌에서 끓고 있는 맛있는 요리의 냄새를 맡는다. 입은 상한 음식물을 내뱉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맛본다. 귀는 요란한 사이렌 소리를 듣기도 하고 베토벤 교향곡의 즐거운 소리를 듣는다.
*몸에서 일어나는 일은 우리 영혼에서도 똑같이 일어난다. 삶이 주는 기쁨이 지극했다면 상실에 따르는 고통도 그와 맞먹는다. 잃어버린 대상이 그만큼 가치 있음을 알려주는 신호다. 어머니와 아내와 딸아이를 잃고 나서 내가 느낀 고통은 그들을 알아갈 때 내가 느꼈던 순전한 기쁨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기쁨이나 고통 중 어느 하나만을 느끼는 경우는 없다. 고통과 기쁨은 영혼이 무언가를 느낄 수 있다는 걸, 그것도 어느때는 동시에 보여주기 때문이다.
*부인이나 타협 또는 몰입처럼, 분노도 단순히 고통을 피해보려는 또 하나의 방식일 뿐이다. 우리는 고통이 지옥과 다를바 없다고 생각해서 고통이 우리 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으려고 한다. 고통을 겪으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상실에 따른 고통은 사그라들지 않는다.
고통은 우리를 삼켜버릴 때까지 줄곧 우리를 괴롭히며 쫓아 다닌다. 대초원에 부는 바람처럼 끊이지 않는다. 극지방의 추위처럼 항구적이다. 봄날의 홍수처럼 예고 없이 잠식해 들어온다. 고통은 부인한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며 고통으로부터 도망칠 방도도 없다. 부인과 타협과 몰입과 분노는, 결국 우리를 덮쳐올 것을 억지로 막아보려는 헛된 시도에 불과하다. 고통은 언젠가는 현실로 나타난다. 상실이라는 자체가 부인할 수 없는 아주 끔찍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상실을 겪고 나서 우리가 처음에 드러내는 이런 식의 반응은 자연스럽고 힘있으며 심지어 정당하기까지 한 반응이다.
그런 반응을 내보임으로써 우리는 삶에서 무언가 아주 잘못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신호를 보낸다. 그런 반응은 몸에 병이 났을 때 그것을 알리는 신호로 발열 증상이 나타나는 것과 비슷하다. 열은 그 자체가 문제이기보다는 그 이상의 심각한 문제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이런 반응은 우리로 하여금 보다 깊이 내재한 문제를 즉시 바라보게 만들고, 우리로 하여금 삶을 불길하고 끔찍한 것으로 보게 만드는 요인이 무엇인지 찾게 한다. 하지만 그런 반응은 상실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게 막는 역할도 할 수 있다. 아무리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해도 그런 반응은 우리를 속일 수 있으며, 문제 속으로 곧바로 들어가기 보다는 문제를 피하게 만드는 부작용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식의 반응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그것이 우리를 곤경에서 벗어나게 하는 자연스런 조치라는 잘못된 생각을 품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런 깊은 슬픔은 영혼이 건강하다는 걸 알려주는 징표다. 분명히 말하는데 영혼이 병들었다는 징표가 아니다. 슬픔은 병적인 것이나 숙명적인 것이 될 필요는 없다. 슬픔은 피해가야 하는 무엇이 아니라 껴안아야 하는 무엇이다. 예수님도 말씀하셨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 슬픔은 상실을 경험한 이들이 자신이 진정 비참함이 가득한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또 슬픔은 자신 때문에 또는 다른 이들 때문에 고통을 겪는 이들이 감정적인 고뇌를 알리는 수단이다. 슬픔은 숭고하며 은혜롭다. 우리는 슬픔을 통해 애통할 줄 알고 기뻐할 줄도 아는 자들로 성장한다. 우리는 슬픔을 통해 세상의 고통을 체휼하며 그와 동시에 세상의 치유를 기대하는 자들로 성장한다.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슬픔은 우리 영혼에 유익하다.
진한 슬픔은 종종 삶에서 허영과 겉치레와 허섭스레기들이 떨어져나가도록 만든다. 진한 슬픔은 우리로 하여금 인생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게 만든다. 고통은 우리를 보다 단순한 삶으로 이끌어갈 수 있다. 비본질적인 것들로 인해 혼란스럽지 않은 그런 삶으로 말이다. 슬픔은 우리의 모든 것을 놀랍도록 분명하게 만든다. 그런 까닭에 급작스럽고도 심한 상실을 겪은 많은 사람들은 종종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되곤 한다.
*상실과 함께 찾아오는 진한 슬픔은 또 다른 이유에서 영혼에게 유익하다. 진한 슬픔을 겪는 과정에서 우리는 현재의 순간을 보다 생명력 있게 살아갈 수 있도록 자극받는다. 이런 개념은 내가 앞에서 말한 내용과 다소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상실을 겪은 현재라는 것이 우리가 때때로 생각하는 것처럼 허무한 것이라고만 말할 수 없다. 현재는 우리가 갈망하는 삶의 갱신에 필요한 비밀을 담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허무의 광막한 바다 밑을 살피다가 생명력이 넘치는 또 다른 세상을 발견하게 된 것과 같다.
신비주의자들은 이런 개념을 가리켜 현재를 경험하는 새로운 방식이라고 표현했다. 18세기 영적 지도자 장피에르 드 코사드는 그것을 '현 순간의 성사(聖事)'라고 불렀다. 토머스 켈리는 그것을 '영원한 지금'이라고 정의했다. 현재를 바라보는 이런 시각은 우리에게 삶 자체가 지닌 경이성을 새롭게 인식하도록 만든다. 또한 그런 시각은 우리를 둘러싼 세상을 보다 날카롭게 인식하도록 만들며, 더불어 우리에게 허락된 매 순간을 진심으로 누리며 살 수 있도록 이끈다. 심지어 상실과 슬픔 속에서도 우리는 모든 순간이 가지는 기적을 껴안을 수 있으며 우리에게 다가오는 은혜의 선물을 언제라도 받아 누릴 수 있다. 현재의 순간. 이 영원한 지금은 신성하다. 왜냐하면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현재라는 순간은 우리가 살아가야 하고, 또 하나님을 알아가야 하는 유일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과거는 가고 없다. 미래는 아직 여기에 없다. 그러나 현재는 우리에게 살아있다.
*"나는 누구인가" 하는 정체성은 대개 우리가 수행하는 역할과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들에 의해서 결정된다. 우리가 행하는 것들과 우리가 아는 사람들은 우리가 자신을 이해하는 방식에 결정적으로 기여한다. 재앙처럼 찾아오는 끔찍한 상실은 우리가 가지고 있던 정체감의 상당 부분을 훼손시킨다. 그것은 갈비뼈 하나가 없어지는 것과는 다르다. 오히려 자아의 일부가 잘려나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직장을 잃으면, 직업인으로서 자아가 잘려나간다. 이혼이나 죽음 때문에 아내를 잃으면 남편으로서 자아가 잘려나간다. 건강을 잃으면, 활력 있고 생산적인 사람으로서 자아가 잘려나간다. 덕망을 잃으면, 지역사회의 존경받는 인물로서 자아를 잃는다. 성폭행이나 학대를 겪은 사람은 순수하고 순결한 자아를 잃는다. 전에는 소유했거나 되기 원했던 자아를 잃어버림으로써 그런 자아를 두 번 다시 회복할 수 없게 된다.
나는 아직도 린다의 남편으로서 나, 다이아나 제인의 아버지로서 나, 그리고 어머니 그레이스의 아들로서 나를 생각한다. 하지만 나라는 사람을 그런 이름으로 불리게 만든 이들, 즉 아내요. 딸이요. 어머니로서 나와 반대되는 역할을 수행했던 사람들은 이제 그 자리에 있지 않다. 이전에 내가 소유했던 자아. 내게 익숙하던 자아는 그 사람들을 부르며 흐느끼고 있다. 그건 마치 손이나 발이 절단되었는데도 여전히 존재하는 것 같은 감각을 느끼게 하는 몸의 신경 조직과 같다.
*결국 상실은 정체성에 혼란을 일으킨다. 늘상 우리가 수행하던 역할과 우리가 맺고 있던 관계들에 의해 우리 자신을 이해하다가 상실을 겪으면서 그 모든 것을 잃어버리거나 최소한 변화가 찾아왔을 때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 어지럼증을 느끼게 된다. 어느 때는 자신이 낯설게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럴때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전날 밤 늘 살아온 익숙한 환경 속에 놓인 침대에서 잠을 청했는데, 아침에 깨어나 보니 전혀 다른 집이었고, 그래서 집안 가구에 이리저리 차이고 벽에 부딪치는 일이 생기는 것과 같다. 나는 새로운 세상에 있지만, 아직도 옛날의 세상에 살고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남편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나 자신을 독신남으로 생각하지도 않는다. 다이아나 세인을 자주 생각하지만, 나는 그녀에게 더 이상 아버지가 아니다. 아무리 원해도 나는 더 이상 부모라는 일원의 반쪽이 아니다. 나는 홀아비이자 홀아버지며 어머니 없는 자식이다. 그것은 내게 아주 기묘하고도 혼란을 주는 정체감이다.
자아의 일부가 잘려나간 것에 대한 인식은 무의식적인 반사작용처럼 찾아온다. 홀아비 생활 3년째에 접어들었는데도 나는 여전히 세상에 있지 않은 사람들을 무의식적으로 찾는다. 밤에 침대로 들어가면서 린다가 내 곁으로 살갑게 다가오기를 기다린다. …
*상실은 주변 환경이 우리의 행복을 결정하는 데 얼마나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어쩔 수 없이 알게 만든다. 상실은 우리의 안녕을 이루고 있던 여러 요소들을 우리에게서 벗겨낸다. 잘 서 있던 우리를 쳐서 넘어뜨린다. 상실을 겪음으로써 우리는 자신의 모습을 잃어버린다. 그러나 자신의 모습을 잃어버림으로써 우리는 또한 하나님과 소중한 관계를 시작할 수 있다. 실패는 우리를 은혜로, 그리고 깊은 영적 각성으로 인도할 수 있다. 상실을 경험한 이들에게 이러한 과정은 심심찮게 일어난다. 이러한 일은 우리가 자신의 약함을 직면하면서, 그리고 우리가 그동안 누려왔던 호사스러운 환경을 얼마나 당연하게 여겨왔는지를 깨달으면서 종종 시작된다. 상실을 겪는 동시에 그런 좋은 환경이 사라질 때 우리는 분노와 우울증과 불만을 갖게 되며, 그런 부정적인 감정이나 태도는 우리 영혼의 적나라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줄 뿐 아니라 우리라는 존재가 얼마나 보잘것없는지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이제껏 우리가 지녀왔던 정체감이란 것도 안정적인 내면에 바탕하지 않고 순전히 겉만 번지르르한 외양에 불과했다는 점도 알려준다.
마침내 우리는 주변 상황이 아니라 우리 영혼의 깊이에 따라 좌우되는 새로운 삶을 찾기 시작하는 지점으로 나아간다. 그러고 나면 새로운 생각과 시각에 눈뜨게 되고, 영적인 것들에도 보다 진지한 관심을 보이게 된다. 우리는 자신을 초월하는 무언가의 필요성을 감지하고, 이 시점에서 현실이 우리가 예전에 생각했던 것과 많이 다르다는 점을 어렴풋이 인정하게 된다. 우리는 신적 존재의 가능성을 인식하기 시작하고 더불어 갈망도 커져간다. 우리는 우주에는 신이라는 존재가 정말 있으며, 그가 죄로 더러워지고 상처 입은 우리를 격정적으로 사랑한다는 사실을 배운다. 이 사실로 인해 우리는 충격을 받으며 혼란을 겪기도 한다. 우리는 이제까지의 자신을 벗어버리고 참되며 가장 심원한 자신을 새롭게 보기 시작한다. 우리를 사랑해서 우리라는 존재를 빚은 그분을 발견한다.
*후회는 우리 입에서 ‘-라면’이라는 말이 자꾸 나오게 만든다. “결혼 생활에 좀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더라면… 그 사람을 용서했더라면…" "공부를 열심히 했더라면…… 차를 좀 더 천천히 몰았더라면…” "담배를 일찍 끊었더라면… 그날 밤 남편에게 일찍 들어오라는 말 한마디만 했더라면... 증상이 나타났을 때 병원에 좀 더 일찍 가보았더라면……” “그렇게까지 심하게 화를 내지 않았더라면..."
상실에 따른 상처가 있을 때 후회를 품고 있으면 치료가 늦어진다. 우리를 끊임없는 죄책감 속으로 몰아넣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을 기회를 놓쳤기 때문에 더 이상 용서나 구원을 기대한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내 경우에도 이제는 아무도 내 아내와 딸과 어머니를 되살릴 수 없다. 그날 우리 식구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음주 운전자도 그날을 되돌리거나 다른 식으로 하루를 살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한다. 나 역시 좀 더 좋은 남편이자 아버지이자 아들로 살아갈 기회를 얻지 못한다. 그들이 죽은 시점부터 나는 그들과 나누었던 관계를 보여주는 정지된 스냅 사진만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이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불완전과 실패와 상실이 존재하는 한 이 세상에서 후회 없이 살아갈 방도는 없다. 그러나 구원을 얻을 수는 있지 않을까? 상실 그 자체는 돌이킬 수 없다고 해도, 상실로 말미암아 잘못된 삶은 바로잡을 수 있지 않을까? 후회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유로워지고 변화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구원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충족된 상태라야 한다. 즉 그 후회감을 낳게 만든 상실을 되돌릴 수 없다는 전제를 인정해야 한다. 사람들은 그들이 경험한 되돌릴 수 없는 상실에 의해 변화될 수 있다. 따라서 구원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그들은 상실을 놓아줌으로써 상실이 그들 삶에 가져다주는 좋은 영향들을 껴안아야 한다. 어떤 면에서 그들은 뒤에 놓인 것들은 초월하고 앞에 놓인 것들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지금 가능하게 할 수 있는 변화에 모든 힘을 집중해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그들은 개인적인 변화를 꾀해야 하는데, 그것은 오직 은혜를 통해서만 온다.
*영혼의 파괴는 내가 '두 번째 죽음'이라고 부르는 비극을 대표한다. 그리고 그것은 첫 번째 죽음보다 더 나쁜 비극이 될 수 있다. 배우자나 자녀나 부모의 죽음, 건강, 직업, 결혼, 유년시절 또는 다른 종류의 상실을 통해 찾아온 죽음은 굳이 구분을 하자면 최악은 아니다. 그보다 나쁜 경우가 있다. 영혼의 죽음이다. 영혼의 죽음은 죄책감, 후회, 비통함, 증오, 부도덕, 절망을 통해서 온다. 첫 번째 죽음은 우리에게 일어난다. 반면 두 번째 죽음은 우리 안에서 일어난다. 첫 번째 죽음을 겪고나서 찾아오는 변화를 거부한다면 그 선택은 우리에게 두 번째 죽음을 불러오는 신호탄이 된다.
상실로 고통을 겪은 이들은 이 두 가지 죽음을 혼동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첫 번째 죽음이 있었으므로 두 번째 죽음이 있는 게 당연하다는 식으로 자기를 합리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두 가지의 죽음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아 보여도 그렇지 않다. 보다 분명한 형태의 첫 번째 죽음은 두 번째의 죽음으로 갈 수도 있지만 필연적으로 두 번째 죽음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그것은 농부와 나쁜 날씨 사이의 관계로 비유할 수 있다. 작황이 좋지 않을 때, 어떤 농부는 자신이 파종을 너무 늦게 했다거나 제대로 밭을 갈지 않아서가 아니라 단지 날씨가 나빠서 그렇게 되었다는 식으로 자신을 속이는 빌미를 만든다. 같은 방식으로 우리는 불치병에 걸린 배우자를 보고 그가 다시는 예전처럼 명랑한 사람이 될 수 없을 거라는 절망을 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절망 자체는 질병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질병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서 생긴 결과다. 이혼을 하고 나서 우리는 상대 배우자를 증오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증오는 이혼의 결과가 아니라 이혼에 대해 우리가 반응한 방식의 결과다. 우리는 자녀의 죽음을 겪고 나서 자기 연민에 빠질 수있지만, 자기 연민은 자녀의 죽음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 그 죽음과 관련해서 우리가 내린 선택의 결과일 뿐이다. 실직을 하고 나서 우리는 혼란을 겪을 수 있다. 그러나 그 혼란은 실직이 가져다준 직접적인 결과가 아니라 실직에 우리가 건강하게 반응하지 못한 결과일 뿐이다.
*끔찍한 재앙을 겪은 이들이 증오심, 비탄, 절망, 냉소 같은 파괴적인 감정을 느끼는 일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아픈 비극을 경험한 후에 후회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 이런 감정에 사로잡힌 경우가 종종 있다. 우리는 이런 감정에 맞서 오랜 시간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 그 일은 녹록치 않을 것이다. 상실을 겪은 이들 중 복수하고 싶은 유혹을 받지 않거나,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거나 삶에 대해 냉소하지 않는 이들은 거의 없다. 그러나 그런 감정과의 싸움을 한동안 했을 경우, 때로는 그 시기에 카타르시스와 해방감을 맛보았다고 해도, 우리는 그 일로 인해 이런 감정의 노예가 되고 평생 그 힘에 사로잡혀 살아가게 될 수도 있다. 그때 우리는 이 파괴적인 감정이 우리를 정복하도록 놔둘 건지 말 건지를 결정해야 한다. 우리가 나쁜선택을 내릴 경우, 그것은 곧바로 영혼의 죽음으로 이어진다. 이것은 사랑하는 이의 죽음, 실직, 건강의 상실 같은 것보다 더 나쁜 죽음이다.
이런 갈등을 보면, 분노나 자기 연민 같은 감정들이 비록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기는 해도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걸 알 수 있다. 감정 자체는 실제지만, 그 감정들이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 우리는 이 감정들을 무시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빠져서도 안 된다. 그것들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그것들이 궁극적인 진리인 양 거기에 휘둘려서도 안 된다. 감정 자체는 현실의 중심이 되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현실의 중심이 되신다. 우리의 감정과 아무리 배치되는 것이라 해도, 하나님께 굴복할 때 우리는 자아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우리보다 더 크고 광대한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다.
*하나님의 용서는 그분이 우리의 상실을 취하여 축복이라는 형태로 돌려주실 것임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 은혜의 사역은 상실 그 자체를 없애거나 상실에 따른 결과를 바꾸지는 않는다. 은혜는 도덕적 질서를 바꿀 수 없다. 나쁜 건 어떻게 해도 나쁜 것이다. 그러나 은혜는 나쁜 상황에서도 선한 결과를 끌어낼 수 있다. 은혜는 악을 취해서 그것을 선한 결과가 나오는 무언가로 바꿀 수 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성취하신 일이다. 그분은 불의한 살인자에게서 나온 악을 바꿔 구원이라는 선으로 바꾸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도 그와 똑같은 일을 행하실 수 있다. 우리는 고통을 면할 수 없겠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그 고통을 통해 변화를 이룰 수 있다. 사도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라.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 8:39). 정말 아무것도 없다. 어떤 위험, 문젯거리, 갈등, 실패, 죄책감, 후회도, 심지어 우리가 당한 상실도 우리를 그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그것이 진정한 변화에 대한 약속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만이 가진 권세다.
나는 바울의 고백을 오래전부터 암송해왔다. 그리고 이 고백은 사고 직후에 다시 떠올랐다. 여러 달 동안 나는 인간적으로 몹시 흔들렸다. 하나님을 위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그분께 복종하고 싶은 열망도 생기지 않았다. 거실 의자에 앉아 여러 날 밤을 지샜고, 기도도 할 수 없었으며, 아무 말도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 에너지와 갈망이 모두 고갈되고 말았다. 할 수 있었던 것이라곤 하나님께서 그저 '나를 사랑하시도록 내버려둔 것'이 전부였다. 사실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사실조차 당시에는 믿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하나님께서 정말 나를 사랑하신다는 걸 믿을 수 없었고 그렇게 믿고 싶은 마음이나 있는지 확신이 서지도 않았다. 그 사실에 대해 나는 아무 의지도 소원도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내가 이렇게 연약한 믿음을 가지고 있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것 때문에 나를 힘들어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믿음은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비참한 나를 사랑하셨다. 내가 비참한 상황에 있었기에 나를 사랑하셨다. 그런 경험을 통해 나는 이 세상 아무것도 우리를 그분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없다는 걸 배웠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을 때에라도 그분께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배웠다. 그때 비로소 나는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을 처음 깨달았다.
*욥의 이야기를 비로소 이해하고 적용할 수 있게 된 건, 그의 경험 속에 서보려고 시도하면서부터다. 그런 일은 극심한 상실을 경험한 이들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나는 그런 고난을 겪으면서도 고난과 상관없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던 욥의 힘을 느끼며 전율한다. 그가 고난과 상관없이 실천할 수 있었던 자유는, 전능한 하나님을 위시한 천군천사들이 욥의 삶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보기 위해 쭉 지켜보고 있었던 하늘에서마저 강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욥이 내리는 선택들은 하나님과 하늘의 무리에게 중요한 문제였다. 욥은 자신이 내린 선택의 힘이 얼마나 멀리 미치는지 알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어떤 선택을 내리느냐가 결코 중요하지 않다고 보는 이는 그를 포함해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또한 욥이 더 이상 질문을 던지지 못하게 된 이유가 하나님이 약한 자를 못살게 구는 난폭한 분이어서가 아니라, 자신이 몸소 경험한 사실을 통해서 그분이 헤아릴 수 없이 위대한 분이심을 알았기 때문이었음을 나는 깨달았다. 그가 이전에는 “하나님에 관한 것”들을 말해왔다면, 이제는 비로소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이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뵈었을 때 욥은 더 이상의 질문은 쓸모없다는 걸 깨달았다. 욥은 하나님이야말로 자신이 품고 있던 모든 의문들, 심지어 자신이 물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모든 의문들에 대한 정답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삶에서 벌어지는 모든 임의적인 사건들 뒤에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욥을 초월하시지만 욥이 내리는 선택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배웠다. 최종적으로 욥은 입에 올리기에도 황송한 하나님의 임재가 갖는 의미를 깨달았다. 욥 자신도 그의 머리로는 그 의미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으며, 오직 자기 한계 내에서만 경험 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요셉은 제한적이기는 해도, 자신의 삶에 대해 나름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실을 형제들에게 전한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50:20). 요셉은 거대한 악이 자신을 덮쳤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악을 하나님의 은혜가 이미 짓밟아놓았다는 것에 대한 믿음도 드러낸다. 삶이 한 걸음씩 나아갈 때마다 요셉은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며, 비록 그 사실을 자신은 알 수 없다고 해도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의 선하심이 자신의 삶 속에서 드러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요셉의 이야기를 보면 우리는 우리가 겪는 비극 역시 아주 행복한 결말로 끝나는 책에서 가장 힘든 장면이 나오는 대목에 해당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임의성이 주는 공포는 하나님의 신비에 가득한 목적 속에 덮이고 만다. 결국 우리 삶은 좋은 결말을 맞이할 것이며, 거기까지 가려면 우리는 반드시 어려움을 만나야 하고 때로는 길을 돌아서 가야 하는 일도 생길 것이다.
*손턴와일더는 그의 소설 「제8요일』(The Fighth Day)에서 '우리의 삶은 경험이라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영역보다 더 먼 지경으로 확대될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무리 끔찍한 경험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여러 사건들을 연쇄적으로 일어나도록 하는 방아쇠 역할을 해서 미래 세대가 복을 누리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상실은 임의로 일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렇게 보인다고 해서 정말 그렇다고 생각하지는 말라. 그것이 우리의 생각이나 상상을 넘어서는 어떤 거대한 계획의 일부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지난 3년간 배운 것이 있다면,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필요로 하고 또 갈망한다는 점이다. 은혜는 내가 기대하지 않은 방식으로 내게 찾아왔다. 내가 갈등하며 쓰러져 있을 때에도 친구들은 계속 신의를 지켜주었고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몹시 분주했던 적도 있었지만, 내 영혼 한가운데 점차 평안함과 만족과 단순함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나는 밤이 되면 그날의 사고에 감사함을 느끼며 잠자리에 들고 잠이 들 때까지 계속해서 그 일을 돌아본다. 그리고 아침이 되면 새 날을 시작하려는 열심으로 눈을 뜬다. 내 삶은 지난 여름 아이오와의 농장처럼 풍성하고 많은 열매가 맺혀 있다.
독신 부모로서 해야 할 일이 버겁긴 해도. 나의 아이들은 여전히 내게 기쁨의 근원이 되어준다. 나는 거의 날마다 아이들이 악기 연주하는 걸 옆에서 들어주고, 같이 게임을 하고 농구시합을 하고, 그날 있었던 일들을 얘기하고, 소리 내어 책을 읽어준다. 잠잘 시간이 되면, 아이들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눕혀준다. 그리고 내가 잠잘 시간이 되면, 빼먹지 않고 아이들 방에 살그머니 들어가 린다가 했던 대로 아이들을 위해 하나님께 복을 비는 기도를 드린다. 지난 4년 동안 데이비드의 축구 팀 코치로 있었고, 가끔씩 캐더린을 저녁 만찬이나 콘서트에 데려간다. 막내 존은 항상 나를 따라다닌다. 친구들은 녀석을 나의 쌍둥이 내지는 그림자라고 부르다.
사고가 나기 훨씬 전부터 나는 크리스천으로 살아왔지만, 그날 사고 이후로 하나님께서는 정말로 살아 계신 실제로 나에게 다가오셨다. 하나님에 대한 확신은 이전보다 잘 드러나지는 않아도 훨씬 강해졌다. 나는 하나님을 감동시켜야 한다거나 하나님께 나 자신을 증명해보여야 한다는 부담에서 거의 벗어났다. 그러면서도 전심전력으로 그분을 섬기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상실로 인한 고통을 여전히 느끼고 있지만,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이 너그럽다. 은혜가 나를 변화시켰다.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다. 나는 내 마음을 열어 내 삶 중심에 하나님을 모셔들였고, 그분이 다스리시는 영역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공평한 삶을 허락하신다. 은혜가 머무는 세상에서 사는 일은 절대적 공정함만 있는 세상에서 사는 것보다 훨씬 낫다. 공정함만 있는 세상은 어떻게 보면 꽤 멋져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멋지게 살아갈 때에만 멋질 뿐이다. 우리는 응당 받아야 할 것들을 받지만, 그게 얼마나 될지 의문이고 또 우리가 정말 만족하며 살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은혜가 있는 세상은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 이상을 우리에게 허락한다. 우리에게 생명을 허락할 것이며, 우리가 고통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그 사실은 변함이 없다.
*용서하지 않는 마음은 분노, 슬픔 또는 정의에 대한 갈망과는 다르다. 그것은 역병만큼이나 파괴적이다. 세상에서 벌어진 모든 행악에 비해서 그것을 용서하지 않는 마음은 그 행악 자체보다 훨씬 파괴적이다. 북아일랜드나 중동 지역에서 보듯, 이러한 파괴는 아주 큰 규모로 일어난다. 용서하지 않는 마음에서 비롯된 파괴는 때로는 보다 작은 규모로 일어나기도 하는데, 가령 갱들 간의 전쟁, 가족들 간의 반목, 친구들 사이에 일어나는 다툼이 있다. 용서하지 않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 때문에 아주 끔찍한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
용서하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이 희생자라는 사실을 가장 큰 변명거리로 사용한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가해진 잘못된 일에 사로잡혀서 이런 식으로 말한다. 내 고통이 얼마나 참기 힘든지 당신은 몰라. 그 사람이 나를 얼마나 아프게 했는지 모른다고 말한다. 그들 말이 맞다. 누구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일을 옳게 바로잡는다는 이유로 무엇이든 해도 괜찮은지는 의심스럽다. 누군가가 행한 잘못된 일로 내가 비참하게 지내는 게 옳은 일일까?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에만 붙들려 살아가는 게 정말 타당한 일일까? 파멸의 악순환에 빠져 사는 게 당연한 일이 될수 있을까?
*우습게도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은 오히려 그 마음을 품고 있는 자신을 누구보다 가장 비참한 사람으로 만든다. 그는 용서하지 못하는 자신의 마음이 빚어낸 유독한 결과물을 고스란히 안고서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자기 걱정을 정당화하려고 한다. 그들이 그러는 것도 이해는 간다. 등의 고통을 아무도 이해할 수 없으며, 또 그 고통에서 아무도 구원해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들 역시 자신들의 결정 때문에 다른 이들이 당하는 교통을 이해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희생자들이 자신들에게 가해진 잘못을 정의나 복수나 다른 무엇으로도 뒤집을 수 없다는 점을 깨달을 때 비로소 용서의 과정은 시작된다. 용서는 희생자들을 상실에 따른 결과에서 구원해주지 않는다. 그들이 전에 소유했던 삶을 되돌려놓지도 못한다. 희생자들은 과거를 변화시킬 힘이 없다. 아무도 죽은 이들을 되살릴 수 없으며 강간의 공포를 없애줄 수도, 날아간 투자금을 회수해줄 수도 없다. 재앙처럼 찾아온 상실인 경우 이미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다. 돌아갈 방도는 없다.
그러나 앞으로 나아갈 수는 있다. 희생자들은 죽음 대신 삶을 선택할 수 있다. 그들은 파괴의 악순환을 끊기로 선택할 수 있으며, 잘못된 일을 계속 행하는 대신 옳은 일을 행하기로 선택할 수 있다. 용서는 단순히 옳은 일을 하기로 선택하는 것이다. 용서는 상처를 주는 대신에 치유를 가져온다. 깨진 관계를 회복시킨다. 증오가 있던 곳에 사랑을 심는다. 어떻게 보면 용서는 공정함이나 의로움과 상치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용서를 베푸는 사람들은 남을 위해서도 그렇고 무엇보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자신들이 공정함만 있는 세상에 살기보다 자기가 있는 세상에서 살겠다고 결심하는 것과 같다. 삶은 그 자체로도 충분히 버겁다. 그들은 더 버거운 삶을 살지 않겠다고 선택하는 것이다.
*그러나 용서하려면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한다. 용서하는 사람들은 앙갚음할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해야 한다. 그건 정말이지 버리기 힘든 권리다. 인간적인 모든 감각은 하나같이 응징을 외치는 동안에도 그들은 긍휼을 베풀어야 한다. 정의를 바라는 심정이 나쁜 것이어서가 아니다. 우리는 용서와 정의를 위한 노력을 함께할 수 있다. 용서받았다고 해도 잘못된 행위는 여전히 잘못된 행위이며 반드시 처벌받아야 한다. 긍휼이 정의를 말살하지 않는다. 긍휼은 오히려 정의를 초월한다.
아무리 어려워도, 용서는 결국 그것을 베푼 이에게 자유를 가져다준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용서를 통해 우주를 운행하신다. 우리가 용서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뜻에 따라 잘못을 범한 이들을 징계하시며, 또한 우리가 용서할 때 그분의 뜻에 따라 긍휼을 베푸실 것이다. 앞에서 관찰한 대로, 그것이 바로 욥과 요셉이 행한 일이기도 하다. 예수님께서도 바로 그런 일을 하셨다.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자기를 핍박하고 못 박은 자들을 위해 용서를 구하시는 장면에서 그런 모습이 잘 드러나고 있다.
사법 체계는 불완전했지만, 나는 하나님이 공평하시다고 믿기 때문에 복수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재판에서 가해자는 무죄판결을 받았다). 마지막 때에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지혜로 치우침 없이 모든 사람을 심판하실 것이다. 또한 나는 하나님이 자비로우심을 믿는다. 그분의 자비로우심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차원을 넘어선다. 하나님은 그분의 공의와 자비를 적절하게 조절하면서 잘못을 범한 이들을 다루실 수 있는 분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파멸시키지 않으면서 벌하실 수 있고, 또 잘못된 버릇을 심어주지 않으면서 용서를 베푸실 수 있는 분이다.
따라서 용서하는 사람은 삶 속에서 자기 역할이 무엇인지 신중하게 규정한다. 그들은 하나님이 하나님 되시게 함으로써 자기는 그저 용서할 줄 아는 보통의 행복한 인간이 되고자 한다. 직접 원수를 갚고, 정의를 실현하고 모든 잘못을 응징하기보다. 단순히 책임감 있고 겸손한 모습으로 살아가겠다고 선택한다. 그들은 필요한 이들에게 약간의 은혜를 나누려고 애쓴다. 상대방 역시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상처 입은 이들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상에 널린 그 많은 악에도 불구하고 옳은 일을 하려고 노력한다.
*용서하는 사람들은 곤란한 처지를 헤쳐 나가기 위해 하나님의 긍휼을 필요로 한다. 그들은 고통당하는 세상을 치유하기 원하며, 우리 영혼을 파괴하려고 으르렁거릴 뿐 아니라 이 세상을 철저하게 파괴하려고 위협하는 악으로부터도 세상을 구원하기 원한다. 치유하는 데 용서가 있어야 한다면 그들은 기꺼이 용서를 베푼다. 그들은 용서하지 않는 마음이 영혼을 더 병들게 만들 뿐임을 잘 알고 있다. 영혼이 병에 걸리면 치료하는 데 더 많은 비용이 든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용서하지 않을 때 그 사람은 고통스러웠던 장면을 날마다 되씹으면서 점점 병들어 간다. 결코 멈추지 않는 동영상처럼 그때의 장면이 되풀이될 때마다 매번 고통이 되살아나고 분노가 치솟고 쓰라림을 맛보게 된다. 이런 일이 계속되면 영혼이 오염된다. 용서는 동영상을 더이상 재생시키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고통스런 상실을 기억하고 있다. 누구의 책임인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걸 계속해서 재생시키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치유를 가져오는 동영상을 새로 튼다. 결국 용서는 가해자를 죄책감에서 벗어나도록 해주고, 우리의 병든 영혼을 치유해준다.
*믿음은 잘못한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변화시킨다. 믿음을 통해 우리는 그들의 잘못을 우리 자신의 잘못에 비추어 바라보게 된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을 얻게 한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음을 배운다. 하지만 우리가 또한 죄인임을 알고 있다. 죄를 저지른 사람들은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하다. 예수님께서도 언젠가 많은 죄를 용서받은 사람들이 더 많이 사랑하게 된다고 말씀하셨다. 용서라는 경험은 우리를 용서하도록 만든다. 우리가 스스로를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한 자로 보기 시작하면, 다른 이들에게도 보다 쉽게 긍휼을 베풀 수 있게 될 것이다.
이제 와서 돌아보면, 나는 내가 상실을 겪은 후로는 어디로 향하든 매번 하나님께로 달려갔다는 걸 알게 된다. 내가 겪은 고통의 임의성을 생각하면 몸이 떨린다. 나는 이렇게 묻는다. "왜 나인가?" 나는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을 안고 씨름했다. 내가 던진 물음, 내가 부딪친 유혹, 내가 시도한 복수, 내가 느낀 황망함, 그리고 내가 경험한 슬픔. 이런 것들이 모두 나를 가차 없이 하나님께로 밀어냈다. 하나님이 정말 하나님이시라면, 비극이 일어났을 때 어디에 계셨는가? 그분은 왜 아무 일도 하지 않으셨는가?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그토록 끔찍한 일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실 수 있었는가? 짧게 말해서, 내게 찾아온 고통은 하나님의 주권과 관련해서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게 만들었다.
*내가 아는 하나님은 고통을 겪으셨고, 그래서 나의 고통을 잘 아신다.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몸을 떠시던 예수님 안에서, 그리고 고통을 통해 자신의 대속적 권세를 증거해야 하셨던 예수님 안에서 나는 하나님의 눈물을 보았다. 우리를 너무 사랑한다는 이유 때문에, 결코 그러실 필요가 없었는데도,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되기를 자청하셨고 상실의 고통을 맛보셨다. 여기에 성육신의 참된 의미가 담겨 있다. 나의 슬픔은 오랫동안 강렬하게 이어졌고 견디기 힘들었다. 그러나 만물을 다스리는 주권자 하나님이, 내가 살고 있는 일상의 고통을 겪어보신 그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 나는 위로를 얻을 수 있었다. 내가 허우적대는 구덩이가 아무리 깊다고 해도 나는 거기서 하나님을 찾을 것이다. 그분은 나의 고통을 멀찌감치 떨어져서 지켜보시는 분이 아니다. 그분은 내가 고통당할 때 가까이 다가오시는 분이다. 그분은 연약해서 상처받기 쉬우며, 눈물이 흔하고, 슬픔을 잘 아신다. 하나님은 세상의 슬픔을 맛볼 줄 아는 고통받는 주권자시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이해하기 위한 세 번째 견해는 하나님을 알고 싶은 이들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어야 하는 믿음의 역할에 초점을 맞춘다. 나는 오랫동안 믿음이 왜 그토록 중요한지 궁금했다. 하나님께서는 왜 당신의 본성을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내지 않으셨을까? 왜 우리가 당신을 좀 더 쉽게 믿을 수 있도록 하지 않으셨을까? 나는 우리가 강요당하지 않으면서 믿음을 갖는 데 충분한 정도의 지식이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를 알리는 증거가 세상에 충분히 드러나 있고, 역사 속에서 일어난 몇몇 사건들이 바로 세상에서 그분이 일하시는 증거라고 지적한다. 또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을 결정적으로 드러낸 증거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사건을 지적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연 세계를 보면서 하나님을 제쳐두기도 하고, 신의 섭리를 배제한 채 역사를 해석하기도 하며, 예수님을 위대한 도덕 선생, 급진 개혁가, 빗나간 광신자 정도로 폄하하기도 한다. 우리는 이 땅에서 도덕적이고 생산적인 삶을 살면서도 정작 하나님을 놓칠 수 있다. 무신론자가 되어 하나님 없이 살아갈 수 있다.
요점은 이렇다.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무엇보다 우리의 사랑을 얻고자 하신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강요해서 억지로 생기는 법이 없다. 우리에게는 자유가 있다. 그 자유가 사랑을 만든다.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관계 속으로 억지로 떠밀지 않으신다.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자유 의지로 선택할 수 있다. 하나님을 믿는 일도 가능하지만, 반대로 그분을 믿지 않겠다고 하는 것도 가능하다.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 자체는 신이 주시는 선물이라고 쳐도 우리가 그분을 믿는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가 믿기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상실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이라는 존재에 의문을 갖게 된다. 고통은 우리가 보지 못하게 하나님을 꽁꽁 감추고, 고통 한가운데에도 하나님이 계신다는 걸 믿기 어렵게 만든다. 우리는 고통 중에 하나님을 부인하고 싶은 유혹을 받는데, 그럼에도 몇 가지 이유로 그런 유혹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머뭇거린다. 그리고 우리는 사색하고 기도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나아갔다가 다시 밀어진다. 우리 심령은 하나님을 믿을 것인지를 놓고 씨름한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을 선택한다. 그 선택의 과정 속에서 우리는 그분이 이미 우리를 선택하셨고, 우리를 당신께로 이끄셨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리는 의심과 믿음을 모두 품을 수 있는 머리와, 슬픔과 기쁨을 함께 느낄 수 있는 가슴과 하나님을 맞아들일 수도 거절할 수도 있는 의지를 안고서 그분께 자유로이 나아간다. 우리는 하나님 과 관계를 맺기로 결정한다. 그러고 나서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보다 앞서 우리와 관계 맺기로 작정하셨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렇다고 해도 나는 내가 하나님의 주권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되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의 한계를 벗 어나는 일이다. 나는 아직 일부분만 풀었다. 나는 그분의 주권과 화해를 이루었고 그 안에서 위로를 발견했다. 그분의 주권은 이제 더 이상 내게 밉살스러운 대상이 아니다. 화해는 내게 백일몽의 형태로 찾아왔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그날 사고에 대한 기억은 매번 내 가슴을 부식시키며 흠집을 내고 있었다. 오랫동안 그 기억은 나를 괴롭히는 근원이었다.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편안한 심정으로 기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다. 우리가 아끼는 모든 것들에 대한 모욕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삶이 어떤 식으로 변화할지를 통제하고 싶어하며, 복된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성공적인 직장 생활, 행복한 결혼, 나무랄 데 없는 아이들, 가깝게 지내는 친구들, 아름다운 가정, 평화로운 공동체 등이 당연히 내 것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상실을 겪음으로써 우리가 승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배운다. 죽음이 승자다. 배우자, 친구, 결혼, 직장, 건강의 죽음을 보라. 결국 모든 것은 죽음에게 백기를 들지 않는가.
어떤 종류의 것이든 우리는 상실을 겪을 때마다 어쩔 수 없이 죽음이라는 실체를 오랫동안 힘들게 바라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죽음은 실제로 승자인가? 많은 사람들이 이 무자비한 진리가 정말 승자라고 믿고 있다. 어떤 이들은 죽음과 맞닥뜨렸을 때, 자신들의 운명과는 상관없이 용기를 잃지 않고 살아간다. 다른 이들은 가능한 모든 쾌락에 자신을 내맡기거나 안전감을 얻으려고 되도록 많은 권력을 끌어모아 오직 그 순간만을 즐기며 살아간다. 또 다른 이들은 삶이 허무하다고 보고 자살이라는 방법을 써서 삶을 순식간에 끝내버린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사역하실 때 이적과 기사를 행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이 땅에 임재하신다는 증거를 보여주셨다. 귀머거리가 듣고, 소경이 앞을 보고 앉은뱅이가 걷고,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났다. 그러나 예수님에 의해서 앞을 보게 된 이도 얼마 있지 않아 다시 소경이 되었다. 죽음이라는 형식을 통해서 말이다. 청력을 되찾은 이도 앉은뱅이였다가 걷게 된 이도, 심지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이도 결국은 모두 죽고 말았다. 고통과 죽음이 결국 이긴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이 보여주신 이적은 그분이 이 땅에 오신 궁극적인 목적은 아니었다. 예수님께서 이적을 보여주겠다는 희망을 최종 목적으로 삼고 이 땅에 오셨다면, 장애에서 회복된 이들이 죽음이라는 절차를 통해 다시 영구적인 장애를 입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최종 승리는 그분이 행하신 이적이 아니라 부활이었다. 무덤은 그분을 붙잡아둘 수 없었다. 그분의 삶은 완전했고, 따라서 그분의 죽음은 전적인 희생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정복하셨고, 하나님께서는 다시는 죽지 않을 생명으로 그분을 일으키셨다. 부활절 이야기는 인간의 최후가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생명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예수님의 부활이 그 사실을 보장한다. 모든 눈물과 고통과 슬픔은 영원한 삶 속에 그리고 순전하고 억누를 수 없는 기쁨에 묻혀버리게 될 것이다.
*물론 이것은 미래에 있을 얘기다. 그리고 우리는 종종 슬픔과 고통이 가득 차오르는 현재에 살고 있다. 우리가 경험하는 괴로움은 부활을 믿고 있는 우리 안에서 일종의 양면성을 발생시킨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 속에서 고통을 느낀다. 그 고통은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을 기억나게 한다. 하지만 우리는 미래에 있을 해방과 승리를 소망한다. 우리는 의심하면서도 믿으려고 애쓴다. 우리는 괴로움을 겪으면서도 진정한 치유를 갈망한다. 우리는 죽음을 향해 조금씩 머뭇거리며 나아가면서, 그 죽음이 부활로 가는 출입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영혼 속에 있는 이러한 양면성은 삶이 가지고 있는 이중적 본질을 드러낸다. 우리는 티끌로 만들어진 피조물이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보다 큰 무언가를 위해 이 땅에 태어났다는 것을 안다. 우리 마음속에는 영원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러한 양면성을 감지하면서 산다는 건 힘든 일이지만 반드시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양면성은 우리 심령의 눈을 크게 뜨게 한다. 우리의 유한성을 인정하라고 도전하면서도 최종 승리를 향한 소망을 계속해서 품으라고도 도전한다. 여기서 말하는 승리란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를 위해 마련해 놓으신 승리이며, 무덤 저편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승리다.
*그러나 그 말을 한 사람도 역시 우리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얼마나 괴로웠는지 모른다. 모든 사람이 겪는 상실은 오직 그 사람만의 것이다. 다만 그 경험이 많은 사람들에게 비슷한 모양으로 나타날 뿐이다. 괴로움 자체는 보편적이다. 괴로움을 주는 모든 경험은 하나하나마다 유일하다. 그것을 겪는 사람들이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상실을 겪기 전에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상실을 겪으며 무엇을 느끼는지, 그리고 그 상실에 어떻게 반응하는지가 각 사람의 경험을 다른 이들의 것과 다르도록 만드는 요소다. 그래서 상실이라는 괴로움이 고독한 경험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모든 사람이 궁극적으로는 혼자서 그것을 마주쳐야 하는 이유가 된다. 아무도 우리를 구해줄 수 없다. 우리를 대신할 수 없다. 또 우리 안에 있는 고통을 줄여줄 수 없다.
그러나 상실은 우리를 고립시키거나 외롭다는 느낌을 갖게 만들지 않는다. 상실이 비록 고독한 경험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래서 우리가 혼자서 마주쳐야 하지만, 상실은 공통의 경험이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연대감을 갖게 만든다. 말하자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룰 수 있다는 말이다. 상처 입은 공동체라고나 할까. 우리는 상실이라는 어둠 속으로 혼자서 들어가야 한다. 하지만 거기에 들어가면 삶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다른 이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 마지막 단어인 하나님 속에는 이 땅에서의 삶뿐 아니라 천국에서의 삶도 들어 있다. 그것은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바라본 최종 목적지이기도 했다. 나도 언제부터인가 천국을 자주 생각하게 된다. 이 땅에서의 삶은 실제이고 좋다. 지금은 이 땅에 없는 내가 사랑했던 이들과 함께 삶의 즐거움을 누려보았고, 그들이 없는 지금도 여전히 삶을 즐기고 있다. 그러나 이 땅에서의 삶이 전부가 아니다. 때로 전부인 것 같아도 그 이상의 것이 엄연히 존재한다. 이 땅에서는 감추어져 있는 또 다른 삶은 지금의 것보다 훨씬 거대한 실체다. 철학자 피터 크리프트의 말처럼, 이 땅은 천국의 바깥쪽이 아니라 천국의 작업장이다. 천국의 자궁이다. 내가 사랑했던 이들은 그 천국으로 들어갔고 그들보다 앞선 간 이들과 함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 고통받고, 죽었다가 다시 사신 예수님을 믿어서 지금 천국에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살고 있으며, 나도 그토록 갈망하지만 오직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만 들어갈 수 있는 현실 속에 있다.
요한계시록은 고난받고 죽임 당한 모든 이들을 예수님께서 친히 끌어안고 회복시키시는 미래의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씻기시고 상처를 싸매주신다. 그런 다음 지극한 기쁨과 눈부신 광채와 평화가 있는 그분의 영원한 나라로 맞아들이신다(계 21장). 이러한 장면을 상상할 때마다. 나는 이 땅에서의 삶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곳은 바로 그 천국임을 새삼 고백하게 된다. 천국은 우리가 평생 갈망하는 참된 본향이다.
*재앙처럼 끔찍한 상실을 당한 모든 이들이 느끼는 최고의 도전은 한편으로는 상실의 어둠을 마주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워진 생명력과 감사를 안고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상실을 피하는 것은 건강하지 못한 자세다. 상실이 우리를 얼마나 황폐하게 만드는지 안다면, 그걸 피한다는 생각은 현실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상실을 통해 성장하는 편이 더 수월하다. 상실 앞에서 우리는 위축될 수 있다. 또한 성장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하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가 내리는 선택과 우리가 받는 은혜에 달려 있다. 상실은 우리를 철저하게 변화시키는 기폭제 역할을 할 수 있다. 상실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끌 수 있다. 그분이야말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실 수 있는 권세를 가졌으며 또 그렇게 하기를 간절히 원하시는 유일한 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