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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노무현에게서 정조의 향기가 납니다. 조선왕보다 지금 대통령 권력이 더 세요"
[작가를 만나다 ④] 만화 <朝鮮王朝實錄> 박시백 화백
11.03.31 15:25 ㅣ최종 업데이트 11.03.31 17:36 이한기(hanki)/ 권우성(kws21)/ 김동환(heaneye)
▲ 大河歷史漫畵 <朝鮮王朝實錄>의 저자 박시백 화백. ⓒ 권우성 박시백
'태정태세문단세 예성연중인명선 광인효현숙경영 정순헌철고순'.
누구나 한 번쯤 학창 시절에 흥얼거리며 외우던 朝鮮王朝의 계보다. 역사의 구구단이었던 '27자의 系譜圖'에는 朝鮮時代 519年, 27名의 임금이 등장하는 만만찮은 역사의 무게가 압축돼 있다. 朝鮮王朝의 계보는 <龍飛御天歌>로 建國神話의 主人公이 된 太祖 李成桂로 시작해, 조선의 마지막 왕으로 기록된 비운의 주인공 純宗으로 마무리된다.
국보 제151호인 <朝鮮王朝實錄>은 1대 <太祖實錄>부터 25대 <哲宗實錄>까지 朝鮮王朝 472년의 記錄을 담고 있다. (※ <高宗實錄>과 <純宗實錄>은 日帝 强占期에 만들어진데다 편찬 규례에 맞지 않아 <朝鮮王朝實錄>에 포함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 <朝鮮王朝實錄>은 총 1,893권 888책으로 이뤄져 있다. 이를 한글로 번역할 경우 320쪽짜리 책 413권에 해당한다. 한글 CD 작업은 4년 동안 연인원 10만 명이 동원됐을 정도로 막대한 일이었다. 그런 탓에 歷史學者들조차 <朝鮮王朝實錄>을 完讀한 사람이 손에 꼽을 정도다.
박시백 화백이 <한겨레> 그만 둔 이유
그런데 <朝鮮王朝實錄>을 읽는데 그치지 않고, 스토리를 再構成해 만화로 다시 創作해내는 일에 몰두하는 이가 있다. 박시백(47) 화백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는 2001년 돌연 <한겨레신문> 만평 일을 그만 뒀다. <實錄>에 기초한, 정사(正史)를 바탕으로 한, 朝鮮 政治史를 漫畵로 그리겠다는 決心을 하고 나서다. 出版社와의 접촉은 둘째 치고, <實錄>을 읽지도 않은 상태에서 스스로 밥줄부터 끊고 背水陣을 친 셈이다.
박시백의 '無謀한 挑戰'은 그렇게 시작됐다. 白手 초기에는 工夫와 資料調査, 콘티 구성, 그림 작업에 매달렸다. 그 시절 그는 "宮闕을 찾아 사진을 찍고", "헌 책방도 기웃거리고", "공부한 뒤 콘티를 짜고", "동네를 산책하면서도 머릿속으로 朝鮮時代 人物들과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지냈다. 우여곡절 끝에 만든 見本 作品은, 백무현 화백이 중간다리를 놓은 출판사 휴머니스트와 因緣을 맺었다.
하루 12時間, 반은 歷史冊을 읽고, 나머지 반은 시안 작업을 하며 보낸 지 2년만인 2003년7월 大河歷史漫畵 <朝鮮王朝實錄> 1권이 나왔다. 책 뒤쪽 참고도서 목록만 17권. 게다가 <朝鮮王朝實錄 CD>와 <원전 고려사 CD>까지…. 곰 같은 忍耐 없이는 誕生하기 어려운 作品이었다.
애초 그는 모두 20권 분량으로 3개월에 한 권씩 5年에 걸쳐 完刊할 계획이었다. 분량은 변함없지만, 作業時間은 두 배 가까이 늘었다. 지난해 11월에 16권 <正祖實錄>이 나왔고, 올해 5월께 17권 <純祖實錄>이 출간될 예정이다. 내년 完刊이 目標다. 1권이 출간된 시점을 기준으로 해도 꼬박 10年 동안 한 우물을 판 것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 歷史學者 가운데 10년 동안 <朝鮮王朝實錄>에만 매달린 사람이 과연 몇 명, 아니 있을까?' 하는. "朝鮮時代 史官의 心情으로, 글로 된 歷史를 만화로 풀어쓰는 作畵에 邁進하고 있다"는, 책 안쪽 표지에 있는 저자 紹介가 결코 過하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金大中 前 大統領 "재미있고 參考가 된다." 逝去하기 전 愛讀
<박시백의 朝鮮王朝實錄>이 주는 가장 큰 美德은, 正史에 기초하면서도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끌고 간다는 데 있다. 啓蒙的이거나 圖式的이지 않다. 때로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던 歷史的 事實의 歪曲을 바로 잡아주기도 한다. 적절하게 著者가 介入해 解說도 곁들인다. 오죽하면 讀書狂인 金大中 前 大統領이 "재미있고 참고가 된다."며 逝去하기 前 愛讀했던 책 가운데 하나로 꼽았겠는가?
16권까지 발간된 <박시백의 朝鮮王朝實錄>은 지금까지 45만부 가량 나갔다. 한 권당 3만부 가까이 팔린 셈이다. '大河歷史漫畵'라는 꾸밈말에 걸맞게 20권이 완간되면 주요 登場人物만도 1,000名에 이른다. 그런데도 박 화백은 "중간에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고", "500년 역사의 무게에 주눅 들지도 않으며", "10년 동안 직장생활 한다는 느낌으로" 벽돌 쌓듯이 작품 활동을 해왔다. 그는 決勝線이 한 발 더 가까이 온 탓인지 여유롭게 後半部 작업에 몰입하고 있다. 박시백 화백을 지난 17일 오후 서울 마포구 연남동 휴머니스트 出版社 事務室에서 만났다.
▲ 大河歷史漫畵 <朝鮮王朝實錄>의 저자 박시백 화백. ⓒ 권우성 박시백
- 16권 <正祖實錄>까지 나왔습니다. 내년에 完刊 豫定인데 어떤 왕들이 남았습니까?
"17권은 순조, 18권이 헌종과 철종, 19권과 20권은 고종 편입니다. 고종은 현대사와 이어지는 부분이라서 두 권 분량으로 다룹니다. 19권은 흥선대원군이 주요하게 등장하고, 20권은 고종이 중심이 될 것 같습니다. 순조 책은 오는 5월에 발간할 예정입니다."
- <朝鮮王朝實錄>을 여러 차례 보셨나요?
"여러 차례는 아니고. 다 보지는 못하죠. 그러나 한 장도 건너뛰지 않았고 적어도 제목만이라도 다 봤다는 거죠. <實錄>의 모든 장을 확인했다는 걸 자부하고 있습니다. <實錄>의 양이 방대해서 朝鮮史를 연구하는 분들 가운데도 제대로 본 사람이 별로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 평소 歷史에 대한 關心이 많았나요?
"現代史에는 관심이 많았는데 朝鮮史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던 것 같아요."
"漫畵家로 勝負를 걸 만한 素材 찾다가 實錄에 注目"
- <朝鮮王朝實錄>을 소재로 歷史漫畵 작업을 하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한겨레) 新聞社에서 時事漫畵를 할 때는 힘들었어요. 5년쯤 하니까 소재도 고갈되고 에너지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런류의 만화를 5년 이상 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니 자신이 없는 거예요. 어쨌든 漫畵家로서 평생을 살아야겠는데 '내가 漫畵家로서 승부를 걸 만한 게 없을까' 하는 생각을 했죠. <한겨레> 도서실에서 이런저런 책을 읽다가, 어느 책이었는지 기억이 안 나는데 그 당시에 보던 사극하고 책 내용이 어우러지면서 '어우, 재밌네' 하는 경험을 했어요. 그래서 제대로 실록을 봐서 작업을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겁니다."
- 워낙 방대한 작업이다 보니, 독자가 보기에도 '無謀한 挑戰'이라는 느낌이 드는데요.
"무모했죠. <實錄>이 얼마나 방대한지도 모르고, 한 번 보지도 않은 상태에서…. 그냥 덤벼든 거죠. 그런 의미에서 참 무모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은 마치 직장 생활 하듯이. 10년 직장 생활한다는 느낌인데, 한 절반 정도 넘어가니까 이제는 끝까지 가겠구나 하는 확신이 들어요."
- 朝鮮王朝의 역사적 무게감도 만만치 않았을 텐데요. 500년 역사를 한 호흡으로 정리하면서 그 무게감에 눌린다는 느낌을 받아본 적은 없나요?
"그런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시리즈마다 나름 재미있고, 기존에 알던 것과 비교하면서, 은근히 공부하는 재미가 있어요. 제가 비전문가라서 느끼는 부담은 없었어요."
- 중간에 그만두고 싶었던 적은 없었나요?
"그런 건 없었어요. 애초 작업 일정이 5년에서 7년 정도 걸릴 거라고 예상했어요. 그런데 많이 빗나가잖아요.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리니까) 초기 2~3년은 막막하다는 생각이 들었죠. 8권 넘어가면서부터는 그런 생각이 없어졌고, 그냥 여유 있게 직장 생활하듯이 한 것 같아요."
"픽션은 배제했지만 <實錄>자체에 解釋의 要素는 있어요."
▲ 大河歷史漫畵 <朝鮮王朝實錄>의 저자 박시백 화백. ⓒ 권우성 박시백
- 1권이 단행본으로 나왔을 때 느낌이 어땠나요?
"정말 뿌듯했죠.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무모하게 시작했고…. 그래서 (구상 단계에서부터) 1권이 나올 때까지 2~3년이 소요됐는데. 그 전까지는 이게 내 머릿속에 있는 구상인 거지 실제로 나온 게 아니잖아요. 사람들 만나서 '나 이거 한다'라고 말하고 다녔지만, 실제 그렇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그래도 일말의 불안감이 있었는데 1권이 나오니까 '이제 가는구나' 싶어서 뿌듯했죠."
- 책 뒤편에 참고문헌 리스트가 쭉 나오는데, 준비 과정에서 읽어야 할 책이나 자료도 상당히 많은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朝鮮史 전체를 아우르는 책들을 많이 봐야 해서 그랬는데, 지금도 <實錄> 외 자료를 보지만 크게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아요. 어떤 책이든 어차피 <實錄>이 기본이고, <實錄> 분량이 다른 책들에 비해 몇 배가 되니까…. 어차피 참고도서일 뿐이죠. 물론 여러 가지 시각이 있으니까 '아 이런 시각, 저런 시각이 있구나!'. <實錄>은 자세히 보고, 다른 자료들은 그냥 훑어보죠."
- '正史'에 충실하겠다, <實錄>을 기초로 하겠다고 했는데, 픽션의 요소는 전혀 없습니까?
"픽션은 배제했지만 <實錄> 자체에 解釋의 要素가 있어요. <實錄>을 쭉 보다보면 이건 事實(Fact)이고, 이건 解釋에 가까운 거라는 게 구분이 돼요. 쭉 읽다보면 어느 순간부터 그런 느낌이 와요. 팩트는 주로 현장 중계하듯이 묘사된 것이 많아요. 왕이 이렇게 말하면 신하는 이렇게 말한다는 식으로. 이후에 해설이 첨가된 게 있는데, '누구 누구는 말한다' 식으로 된 건 각 당파의 이해를 반영한 겁니다. (조심해야 할 부분은) 왕자의 난이나 계유정란, 중종반정, 인조반정 때에는 사관이 현장에 없었다는 겁니다. 이 경우에는 사건을 주도한 자들의 진술이 주가 되기 때문에 주관이 개입될 여지가 크죠."
- 王朝實錄이라는 게 權力層, 支配者의 視覺에서 본 歷史라는 점에서 분명히 限界도 있지 않나요?
"애시당초 <實錄> 자체가 왕을 중심으로 한 기록이기 때문에 그런 점은 전제하고 들어가는 거죠. 가령 암행어사의 보고라든가 감사들의 보고 등을 통해 어디에 기근이 들었다는 것들은 자세하게 기록돼 있어요. 홍경래의 난 같은 경우에는 홍경래의 출생에 대한 부분은 <實錄>에 없고, 난이 발생하고 그것을 진압하기까지의 과정이 서술돼 있기 때문에 시각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매몰되기 쉬워요."
"朝鮮時代 士大夫들은 記錄에 執着하는 사람들"
- <朝鮮王朝實錄>이 후대에 작성되는데, 그 과정에서 記錄이 削除되거나 고쳐지는 歪曲은 없었나요?
"연산군 때 보면 기록을 일부 수정했다가 그게 사건이 된 경우가 있어요. 그런 식으로 史草를 수정한다는 것 자체가 큰 문제가 돼요. <朝鮮王朝實錄>이 기록으로서 정말 우월한 건 그런 식의 (왜곡된) 접근이 불가하다는 것에 대한 왕과 신하들의 합의가 있었다는 겁니다. <선조실록>이 마음에 안 들어서 <선조수정실록>을 내지만, 원래의 <선조실록>을 폐기하지 않고 같이 남겨둬요. 그게 훌륭한 점입니다. 기록이 당파의 영향을 받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있었던 사실에 대한 서술은 그대로 기록할 수밖에 없거든요. 현장을 서술하듯이 얘기해준다는 것이죠.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렇게 오랜 기간 동안 왕조의 기록이 온전히 보관돼 있는 건 <朝鮮王朝實錄>밖에 없지 않나 싶습니다. 朝鮮時代 사대부들은 기록에 집착하는 사람들이에요. 모든 걸 다 기록하는 사람들이에요. 지금은 청와대도 기록물을 분실하잖아요. 그런데 朝鮮時代에는 왕조 실록만 있는 게 아니라 승정원에는 <승정원일기>, 비변사에는 비변사 고유의 기록이 있거든요. 각 파트별로 기록을 하는 거예요. 어마어마한 양이죠."
- 정사를 바탕으로 해서 딱딱한 이야기 아닐까 생각했는데, 재미있고 흡입력이 상당합니다.
"<實錄> 자체가 내용이 풍부해요. 소설보다 더 흥미진진한 것도 있고. 기록 자체가 드라마틱합니다. 문제는 이걸 어떻게 뽑아서 적절하게 배열하느냐는 것인데, 그건 제 몫이고. 제 책에서 <實錄>의 흥미진진함을 잘 정리해서 전달했다면 저로서는 만족스러운 거죠."
- 책 서문에 보면 이 만화를 그리면서 세 가지 原則을 정했다고 했는데, 그 가운데 "필자 스스로 적극적으로 解釋에 개입한다."는 대목이 눈에 띕니다.
"그건 새로운 판형으로 내면서 5권을 냈을 때 추가된 서문입니다. 처음에는 이 훌륭한 기록물을 근거로 해서 朝鮮史를 가급적 사실에 입각해, 현대 사관들의 빼어난 해석을 적용해서 전해주자는 게 목표였어요. 그런데 (작업을 하다보니까 저자의 해설이) 안 들어갈 수가 없더라고요. 저는 사건과 사건을 연결하는 것도 해석이라고 봐요. 그러니 해석이 안 들어갈 수가 없는 거죠. 게다가 조선 전기에 대한 연구가 부족합니다. 그래서 자신감을 갖고 적극적으로 개입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황희, 잘못 알려진 代表的인 人物"
▲ 박시백 화백의 大河歷史漫畵 <朝鮮王朝實錄>. ⓒ 권우성 朝鮮王朝實錄
- 10권 <선조실록>을 낸 뒤 한 기자회견에서 "스포츠 중계처럼 '역사를 중계하자'는 기분으로 작업을 하고 있다"고 소감을 밝혔는데요. 朝鮮王朝의 역사가 주는 교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朝鮮史는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와 거의 정반대의 세상인 것 같아요. 지금 세상은 너무 力動的이잖아요. 조선은 변화가 가장 느린 사회였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초기에 구축했던 政治體系는 사대부에 의한 것이라는 한계는 있지만, 굉장히 민주적이었어요.
누구나 사안에 대해 발언할 수 있었죠. 지금의 민주정치를 뛰어넘는 부분들이 많았습니다. 다만 사대부의 세상이다보니, 권리는 무한에 가까운데 의무 사항은 너무 협소한 한계도 있어요. 지금 우리 사회도 그런 면들이 있잖아요. (권력층이) 무한히 누리면서 책임지지 않으려고 하는."
- 책에 등장하는 人物들이 대략 몇 名 정도 되나요?
"주요 인물들은 한 권에 스물 댓 명 되는 것 같은데, 실제 登場人物은 그 두 배 정도 되지 않을까 싶어요. 그러면 한 권에 50명 정도니까, 전체 20권이라고 하면 1,000명 정도 등장하지 않을까요."
- 대개 '李舜臣은 충신, 원균은 간신'이라는 생각이 고정돼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일면만 있는 건 아닐 텐데, 공부를 하면서 實際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과 다른 모습들도 發見하지 않나요. 잘못 알려진 代表的인 人物들을 꼽는다면?
"대표적인 인물이 황희 정승입니다. 몇몇 일화를 모으고 짜깁기해서 지금 우리가 떠올리는 황희의 모습이 된 건데, 대부분은 虛構예요. 물론 재상으로는 매우 뛰어난 자질을 갖고 있죠. 그러나 '너도 옳고, 너도 옳다'는 식의 두루뭉술한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에요. 俗物이고 權力指向的이고 主觀이 뚜렷합니다. 이런 게 실록에 기록돼 있는데, 누구도 언급하지 않으니까 신화화된 모습의 황희만 남아 있는데, 참 疑訝합니다.
최만리도 그렇습니다. 集賢殿을 세우고 나서 訓民正音 문제로 아웃되기 전까지 集賢殿을 책임졌던 사람입니다. 世宗大王의 신임도 두터웠고. 그런데 세종이 訓民正音을 만드니까, 최만리가 당시 신진 儒學者들의 대표로 나가서 반대 상소를 올린 거죠. 이건 集賢殿뿐만이 아니라 당시 儒學者들의 공통된 의견을 대표로 전달했던 겁니다. 그런데 세종과 반대되는 保守勢力의 대변인인 양 묘사되는 건 잘못된 해석입니다."
- 역사적인 인물을 흑백으로 구분해 받아들이면 편하긴 한데, 함정도 많은 것 같아요.
"그게 요즘 예능 프로그램처럼 역사적 인물들을 캐릭터화 시키는 거예요. 원균 같은 경우도 그런데 원균이 무능하지만, 그건 당시 대부분 장수들의 일반적인 모습이었어요. 처음 일본군이 들어올 때 원균이 자기 관할의 배들을 전부 침몰시키고 도망갔는데, 그건 당시 조선의 공식 지침이었어요. 우리나라 해군은 일본한테 해봐야 질 테니까, (배를 그냥 놔두면) 일본군들에게 이용당한다고 생각한 거죠. 배를 없애고 육지에서 싸우라고 했고, 당시 장수들이 다 그런 식이었어요. 원균이 무능한 장수였지만, 그렇다고 간신의 대명사까지는 아니라는 겁니다."
"정광필은 低評價, 유성룡은 高評價"
- 歷史的으로 過小評價 받거나 過大評價 받은 人物들은 누가 있습니까?
"언뜻 생각나는 인물이 중종때 정광필 재상인데, 과소평가라기보다는 주목을 못 받은 사람이죠. 이원익과 함께 재상의 자질에 가장 잘 맞는 인물이었다고 생각해요. 재상은 조정 중신들의 여러 의견을 통합해서 중심을 잡고, 왕이 전혀 아닌 길로 갈 때 마지막으로 제어할 수 있어야 하거든요. 정광필은 조광조를 높게 평가하면서도 구체적인 개혁 방안에 대해서는 방향이 잘못됐다고 판단하면 강하게 반대했어요.
대표적인 게 조광조가 주장했던 현량과예요. 과거제도를 반대하고 추천제도로만 인재를 선발하게 되면 더 큰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고 판단했던 거죠. 그런데 중종이 나중에 조광조를 제거하려 할 때는 강력하게 반대합니다. 균형 잡힌 시각을 갖고 있었던 거죠. 조광조 이후 득세한 김안로에게 누구도 대적할 수 없었는데, 그때도 問題提起를 합니다. 일관되게 재상 역할을 잘 한 사람이었는데, 문제는 중종이 이 사람을 한 번도 중요하게 쓰지 않았어요. 아까운 인물이죠.
과소평가됐다기보다는 잘못 평가된 인물은 정순대비예요. 너무 악녀로 평가되고 있는데 제 생각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굉장히 정치력이 뛰어나고 大義名分을 중시합니다. 아니다 싶을 때는 멈출 줄 하는 뛰어난 정치가라는 느낌을 받았어요. 시대의 요구를 잘 알고, 한 시대를 관장하고 조절하는 능력도 상당했습니다. 안티 정조로만 볼 수 없는 부분들도 많습니다.
▲ 大河歷史漫畵 <朝鮮王朝實錄>의 저자 박시백 화백. ⓒ 권우성 박시백
유성룡같은 사람은 고평가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역사를 보면 항상 기록을 잘 남긴 자가 승리하는 것 같아요. 유성룡은 <징비록>이라는 책을 남긴 사람이죠. <朝鮮王朝實錄> 중에 <선조실록>이 부실하거든요. 그래서 <징비록>이 많이 활용되는 자료예요. 유성룡이 <징비록>을 통해 상당히 자기 면피를 한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實錄>에 보면 임진왜란이 나기 전에 동인과 서인 두 사람을 일본에 파견하잖아요. 한 사람은 전쟁이 날 거라고, 다른 한 사람은 아니라고 주장을 하는데, 아니라고 주장한 사람이 김성일이에요. 유성룡계의 양대 세력이었죠. 당시 유성룡 계열이 집권을 하고 있었거든요.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임진왜란에 대비하지 못했던) 1차적인 책임은 유성룡에게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난이 발발하자마자 선조가 '다 유성룡 때문이다'라는 식의 발언도 몇 번 해요. 그런데 <징비록>에는 이런 기록은 없어요.
李舜臣 백의종군 과정에서도 선조가 李舜臣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선조가 자기는 계속 바보짓만 했는데 李舜臣이 전쟁의 판을 바꿔버린 사람이니까 질투를 느꼈는지 뭔지 일관되게 李舜臣을 싫어하는 기색을 나타냅니다. 그것도 왜장들에 의해 만들어진 잘못된 정보였는데, 아무튼 선조가 李舜臣을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니까, 유성룡이 거기에 난데없이 동조해요. '장수가 지위가 너무 높아지면 기고만장해져서 안된다'면서. 유성룡이 높게 평가받는 것 가운데 하나가 李舜臣을 추천했다는 거잖아요. 추천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그런 행태를 보인 거죠. 이런 점을 종합해봤을 때 행정 수완이 아무리 빼어나고, 정치적 수완이 있었다 할지라도 유성룡은 고평가된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王權이 强했다는 太宗도 지금 大統領보다는 權力 弱해"
- 노론과 소론 등 당파싸움이 심각했을 때는 저자가 개입해 '임금 노릇하기도 피곤하겠다.'고 코멘트하는 대목도 눈에 띄던데, 朝鮮時代에도 왕이 전권을 휘두르지 못하고 군신 간에 견제가 잘 이뤄진 측면도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구조가 굉장히 잘 돼있죠. 제도적으로 사헌부·홍문관·사간원 등 이른바 언론 삼사가 그런 견제 기능을 담당했어요. 하다못해 왕이 말하는 게 이상하다 싶으면 승정원 관리들이 거부하기도 하고, 마지막으로는 정승들이 반대를 하죠. 물론 왕이 신하들의 생사여탈권을 갖고 있어서, 정말 마음에 안 들면 투옥시켜도 되고 죽여버려도 되는데, 그렇게 하려면 (왕도) 자기 정치를 끝내겠다고 생각하고 덤벼들어야 하는 거죠.
연산군처럼 막가게 되면 어쨌든 힘은 왕한테 모이게 돼있어요. 신하들의 견제 장치를 무시해버리면 왕권은 강화되거든요. 신하들이 왕의 눈치를 보게 되니까. 그런데 또 신하들의 견제를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성종같이 조그만 것 하나도 자기 마음대로 못해요. 그러나 朝鮮時代 왕들도 지금 우리나라 대통령보다는 권력이 약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 대통령이 뭐라고 하면 주변에서 노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잖아요. 뭐라고 하면 퇴임시켜버리면 그만이고."
- 朝鮮時代 인물 가운데 지금 우리나라 政治人들과 비슷하게 연결되는 사람들을 꼽는다면?
"金大中·盧武鉉 前 大統領 같은 경우, 一脈相通하는 부분이 공부를 많이 하고 自己鍊磨를 꾸준히 하는 타입이잖아요. 이상도 높고. 실제 改革的인 일들도 많이 했는데 큰 틀에서 보면 아쉬운 점도 많은. 두 사람에게서 正祖의 香氣가 난다고 할까요. 정조도 너무 빼어나죠. 전체 사대부 가운데서 제일 똑똑한 사람이 어쩌다가 왕의 아들로 태어난 거죠. 그런 느낌이었어요.
政治家가 위대한 사람으로 남으려면 자기 시대에 대해 통찰하고 시대의 핵심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정조는 그 부분에 대해서 높은 점수를 주기 어려웠어요. 유교 정치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여러 가지 노력을 했지만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거든요. 마찬가지로 金大中·盧武鉉 前 大統領 같은 경우에도 新自由主義 열풍에 휩 쌓이면서 큰 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점이 아쉬워요. 정말 역사의 큰 인물이라면 그걸 넘어서는 뭔가가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지나치게 환상적인 생각일 수도 있겠지만요."
"仁祖 그릴 때가 가장 짜증났다...指導者로서는 빵점"
▲ 大河歷史漫畵 <朝鮮王朝實錄>의 저자 박시백 화백. ⓒ 권우성 박시백
- 그렇다면 朝鮮時代 왕들 가운데 李明博 大統領의 리더십과 비슷한 인물이 있다면 누군가요?
"12권 이후에 촛불 얘기를 하면서 現實과 맞게 줄 그어보라고 해놔서, 사람들이 (李明博 大統領과 닮은 사람을) 仁祖로 보겠구나 싶은데 그런 건 아니고요."
- 朝鮮時代 왕 가운데 仁祖 때가 가장 그리기 짜증났다고 하셨는데?
"(웃으며) 宣祖라고 하면 하필 (壬辰倭亂이 발발한) 그때 왕이 된 게 화근이잖아요. 그 사람은 억울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작품을) 시작할 때 (당시 왕의) 새로운 면을 봐야지 하고 접근해요. 그런데 난이 발생하고 나서 일관되게 자기 안위와 갖은 꽁수로 대처하고, 그것 말고는 안 보이는 사람들이더라고요. 仁祖도 딱 그런 사람이에요. 指導者로서는 빵점인 사람이죠."
- 朝鮮王朝를 통틀어서 '이런 임금에 이런 宰相이면 드림팀이겠다'고 구성해본다면 어떤 그림이 나올까요?
"굳이 드림팀을 짤 필요 없이 世宗 때가 이미 드림팀이라고 생각해요. 세종이 그 시대에는 너무 革新的인 사람이어서…. 그 때는 중국의 한 속국으로서 自主的으로 뭔가 한다는 생각이 미약했던 때였죠. 그런데 세종은 자체적으로 모든 걸 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고, 그걸 위해서 뭘 해야 할지가 머릿속에 설계가 돼있는 사람이었어요. 당시로 보면 너무 앞서갔던 사람이죠. 신하들이 그걸 좀 잡아줘야 하는. 그래서 세종을 좀 잡아줬던 게 황희였다고 봅니다. 황희도 좀 앞서나가는 성질이 있는 사람이어서, 그 황희를 맹사성이 잡아줬어요.
野史에서는 황희와 맹사성을 뛰어난 재상으로 보지만 正史에서는 허조를 명재상으로 보고 있어요. 허조는 정말 原理原則主義者거든요. 그런 조합이 좋았던 시절입니다. 세종 시대에는 당쟁같은 것도 없었고. 왕이 워낙 걸출하고 늘 새로운 일을 벌이니까 (신하들이) 그걸 좇아가기에도 바빴어요. 젊고 파릇파릇한 친구들은 집현전이다 뭐다 하면서 왕이 원하는 걸 받아서 숙제로 해결해가는 모양새였죠. 젊은 층은 젊은 층대로 뛰어난 인물들이 많았고, 재상들은 재상들대로 그 시대에 걸맞은 인물들이 포진돼 있었죠."
- 오랫동안 <朝鮮王朝實錄>에 몰입하다보면, 꿈에도 나타나지 않았나요?
"그런 꿈을 몇 번 꿨지요. 꿈에 왕이 나오기도 하고…. 제 와이프한테도 태종이 등장해서 뭔가 선물을 줬다고.(웃음)"
"흠 잡고 싶었던 李舜臣은 神話 그 自體"
- 朝鮮 歷史를 살펴보다가 戰慄을 느낀 적은 없나요?
"李舜臣 같은 경우는 접근할 때 흠을 잡고 싶은 마음이 생기거든요. 너무나 악인으로 평가된 사람들은 '이게 정말 다일까?'라는 시각으로 접근하는 것처럼, 李舜臣같은 경우에는 너무 신화화됐으니까. '뭔가 흠이 있겠지'라는 시각으로 접근하게 되는데, 그야말로 우리가 알고 있는 신화 자체가 李舜臣이라는 걸 확인하게 됐어요. 자기를 돌보지 않고 나라를 위하는 마음도 그렇지만, 재능도 뛰어나죠. 당시 조정의 기본 방침이 해전을 포기하고 육지에서 싸우라는 거였는데, 李舜臣은 '일본 배는 우리 배보다 약하고, 대포도 없으니까 우리가 유리하다'고 판단하고 海戰을 벌였죠. 나중에는 조정에서 당연하게 얘기하는데, 李舜臣이라는 人物 이전에는 朝鮮에서 그 누구도 그런 생각을 못했어요. 鳴梁大捷 같은 전투를 보면 神話的이잖아요."
▲ 大河歷史漫畵 <朝鮮王朝實錄>의 저자 박시백 화백. ⓒ 권우성 박시백
- 소설가 조정래 선생은 한 달 동안 쓸 분량을 정해 매일 매일 일정한 분량을 소화해내는 글쓰기 방식인데, 박 화백은 어떤 작업 스타일이신가요?
"저도 처음 시작할 때는 그림 감옥에 빠져서 살아야지 했는데. 한 5권까지는 그렇게 한 것 같아요. 그때는 1년에 2.5권정도 작업을 했어요. 술자리에도 안 가고 몰입하다보니 너무 힘들더라고요.(웃음) 그래서 좀 쉬엄쉬엄하자고 생각했고, 지금은 1권당 6개월 정도가 적절한 것 같아요.
<實錄>을 공부하는데 양이 많을 때는 두 달 정도 걸리기도 하고, 적을 때는 한 달에서 두 달 사이예요. 그렇게 공부하고 정리한 걸 갖고 구성하고 콘티 짜는데 두 달 반에서 석 달 정도 걸려요. 그리고 밑그림에 컬러 작업. 그래서 한 권 작업하는데 한 5.5개월에서 6개월 정도 걸리는데, 한 권 끝나고 나서 약간 풀어지는 시간까지 포함하면 6개월이 좀 넘기도 하죠."
- 하루 평균 작업 시간은 어느 정도인가요?
"초기에는 10시간 이상 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7시간 정도인 것 같아요. 대략 보면 주 5일제를 하는 것 같기도 하고.(웃음)"
- 블로거들이 질문하고, 지적하는 사항에 대해서도 성실하게 답변을 하고, 의견을 구하던데요. 관련 서적을 읽는 것 말고 별도로 고증 자문을 받기도 하나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주로 인터넷에서 자료를 찾아보고 그러죠. 특히 4권 <世宗實錄> 때 힘들었던 게 '박연이 편경을 만들면서 황종관에 기장 낱알이 몇 알…', 뭐 이런 얘기를 하는데 황종관이 뭔지, 무엇을 기준으로 잡았다는 건지 아무리 생각을 해도 감을 잡을 수가 없어서 일단 그림을 그렸어요. 황종관 기준이 기장 1,300개인데, 1,300개 밖에 안 들어갈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내가 그린 그림을 보면 이건 (기장 낱알이) 수 천 개 들어가겠는 거예요. 그래서 다시 자료를 찾아보고 그랬죠. 쉽게 접할 수 있는 자료가 아니어서 좀 힘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實錄> 끝나면 그냥 漫畵 그리고 싶어요"
- 작업을 하면서 힘들었던 점은 무엇인가요?
"이건 창피한 얘긴데…. 만화는 일단 글과 그림이고, 특히 제 만화는 글 자체가 있는 사실을 공부하고 가공해서 만드는 건데, 문제는 제가 공부를 싫어하는 인간이라는 거예요. <實錄>(CD)을 화면으로 보고 있으면 진짜 지겨워요. 일단 공부가 지겹고, 또 한 가지 문제는 그림 그리기가 귀찮아요.(웃음) 이렇게 장편을 하면서 그림 그리는 걸 귀찮아하면 안 되는데. 계속 그려야 하니가 이건 노가다예요. 한 권 끝내고 다시 공부를 시작할 때가 되면 '아, 또 공부를 시작해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하고, 그림을 그릴 때가 되면 '아, 또 그림을 그려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하죠. 그게 어렵다기보다는 싫은 거죠."
- 반복된 자세로 같은 일을 오래 하다보면 직업병도 생길 텐데요?
"어깨가 아파요. 컬러작업 들어가고 사흘 지나면 딱 아파요. 펜 마우스를 쓰는데 사나흘 때 아프다가 열흘쯤 지나면 좀 참을 만하게 몸이 적응하는 것 같아요. 이건 매 권 쓸 때마다 반복되는데, 어쨌든 지금은 좀 조절이 가능해졌죠. 그거 말고는 특별히…. 늙어가니까 노안이 오고, 눈이 침침해지는 그런 것들이죠 뭐."
- 經濟學科를 졸업했는데, 그림에 入門하게 된 契機가 있나요?
"원래 漫畵家가 되고 싶었어요. 초등학교 생활기록부를 보면 漫畵家가 꿈으로 기록돼 있을 거에요. 그런데 漫畵家가 되는 길이 딱히 있는 게 아니잖아요. 대학 4학년 때 벽에다가 광주 관련한 만화를 그려 대자보를 붙였더니 반응이 좋더라고요. 그게 계기가 돼서 만평을 그리다보니까 '漫畵家를 할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러고 나서도 한참 머릿속에 있다가, 노동 현장에 들어갔다가, 애도 태어나고, 취직할 때도 없고 그래서 漫畵家나 해보자 해서 서른 넘어서 시작하게 된 거죠."
- <朝鮮王朝實錄>이 끝나고 나면 새롭게 하고 싶은 作品이 있습니까?
"어릴 때부터 해보고 싶었던 게 그냥 만화 있죠? 극화라고 하는. 그림 솜씨가 될지 모르겠지만. 그냥 창작극화를 해보고 싶은 생각이 있어요. 흔히 우리가 얘기하는 스토리가 있는 만화 단행본이죠. 역사물을 다시 할 수도 있겠지만 일단은 좀 충분하게 놀고.(웃음) 시력도 안 좋아져서 (大河歷史漫畵 같은) 무리한 일은 못할 것 같아요."
▲ 大河歷史漫畵 <朝鮮王朝實錄>의 저자 박시백 화백. ⓒ 권우성
출처 : "DJ·盧武鉉에게서 정조의 향기가 납니다. 조선 왕보다 지금 대통령 권력이 더 세요"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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