했지. 그래서 자주 다니지는 못했지만 화물칸 15∼20량과 객실칸 7∼8량이 한 데 붙어서
다녔으니까 상당히 길었지.”
1937년 안변-양양간 동해북부선이 개통되면서 양양역사 화물계에서 근무를 시작했다는김원호옹은 아직도 그 때의 기억들이 생생하다고 한다.
“아마도 그 때가 양양이 최고로 붐볐던 때 같아. 주문진이나 강릉에서도 서울을 가려면
양양역에 와서 기차를 타고 갔으니까.”
김옹은 이때 양양역사 옆에 직원들을 위해 마련돼 있던 관사에서 생활하면서 자신의첫아들을 얻기도 했다. 그래서 더욱 그때를 잊을 수 없다고 한다.
해방이 된 후에는 북한 정권아래에서 계속 양양역 근무를 했던 김옹은 이후 물치간이역에나가서 근무를 하던 도중 6·25전쟁을 맞이하게 됐다.
“전쟁중에도 기차는 계속 다녔어. 그해 가을 국군이 올라오기 전까지는 폭격으로 다리가
부서져도 가교를 놓아 계속 다녔지.”
그해 가을 10월 경에 있었던 국군의 대규모 폭격으로 인해 양양역사와 철로가 파괴된 후고향인 양양읍 월리에 돌아와 지금까지 농사일을 하고 있는 김옹은 “금강산역이 만일남쪽에 있었다면 역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은 사람들에 밀려 일도 못했을 거야. 그때도 국민학교 소풍은 다들 그리로 갔으니까.”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당시 양양역을 비롯해 간이역들이 지나는 마을마다 무척이나 활기가 넘쳤고 사람들 사이의 정이 있었다는 김옹은 “이제는 금강산의 모습을 한번 더 구경하는 것보다 그때의그 살맛나는 분위기를 한번 더 느껴보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