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년 새아침이 밝았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구름사이로 모습을 쏘옥 드러낸 경인년 경주 문무대왕수증릉 새해 일출
경주 문무대왕 수중릉 신년해돋이와 경주 문화유적 투어
2009년 12.31.목 ~ 2010년 1.1.금 (무박2일)
가족넷..C기차여행사를 통해서
1편:경주 문무대왕 수중릉 신년해돋이
살을 에는 듯한 한파, 정말 가혹한 추위다.
그러나 연례행사로 또 경인년 새해맞이 여행이다.
이번 일출여행엔
서로의 시간이 맞아 가족넷이 한마음으로 출발이다.
몸은 추워도 마음만큼은 참 따뜻한 여행길이다.
서울역 22시35분 무궁화호가 밤새 달리다
5시간후인 새벽3시30분 경주역에 도착하게 된다.
서울역 대합실 전광판 시계가 21시26 분을 가리킨다.
한시간 기다리면 개찰이다.
한기가 조금 드는 썰렁한 대합실이지만
몰려든 해돋이 여행객들의 즐거운 모습을 보노라니
더불어 기쁨에 한기도 잊으며 들뜬 마음으로 이리저리 서성댄다.
어느사이 한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우리가 탈 무궁화호가 요란스런 굉음을 내며 플랫폼으로 빠르게 들어왔다.
같은 기차에 오를 다정한 사람들의 모습도 담아보며 즐거움을 낚는다.
기차내에서 자다깨다를 반복하다 보니 어느사이 경주역에 도착되었다.
날이 새지 않은 깜깜한 밤이다. 한기가 매섭게 온 몸을 파고 든다.
경주역 추위도 서울추위 못지 않았다.
매서운 추위다.
최대한 보온을 위해 온몸을 담뇨와 목도리로 둘둘 감았다.
해돋이 장소인 문무대왕 수중릉으로 데려다 줄 연계버스 여러대가
전조등 환히 비추며 옆에 나란히 줄지어 대기중이었다.
한대 두대 세대.....많기도 하다.
교통 혼잡없이 쭉쭉 내달려 40분만에 예상보다 일찍 도착했다.
한기가 밴 몸을 녹이기 위해 우린 일단 버스에서 내려
온돌방 식당을 찾아가 우거지국으로 속을 데운다.
남쪽인 이곳도 추운데 서울엔 얼마나 추울까?
두고 온 서울추위가 떠 오른다.
그래도 즐거웠다.
금년엔 작은새들과 함께 신년일출을 볼 수 있어 큰 기쁨이다.
도로엔 가족을 태운 승용차들이 줄지어 제 속도를 못 내고 거북이 걸음이다.
신년일출을 보기위해
혹독한 추위를 가르며 멀리까지 한걸음에 내 달려온 사람들...
그중에 우리도 끼어 있다. 축복이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일출을 보기위해 문무대왕 수중릉이 있는 바닷가로 나간다.
이곳은 작년 처음 개발한 곳으로 아직 많이 알려지지않아
다른 해맞이지역 보다는 사람들이 많이 몰리지 않아 설 자린 넉넉했다.
좀 이른시간에 나갔더니 사람이 한산하여 왠지 쓸쓸한 감마저 들었다.
여명이 좀 밝아지면서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인산인해를 이룬다.
저기 앞에 보이는
바다 가운데 저 돌섬이 바로 문무대왕 수중릉이다.
수중릉 오른쪽 수평선에서 해가 떠오를 참이다.
오전7시33분에 일출이라고 가이드가 알려준다.
하늘가에 구름이 군데군데 떠 있다.
그 구름들이 방해를 놓지 말아얄텐데 은근히 걱정되기도 했다.
여러번 구름의 장난으로 일출의 벅찬 환희를 놓친 경우도 있었기에...
일출을 기다리는 동안
문무대왕릉(文武大王陵)에 대해서 알아 볼까요?
경북 경주시 양북면(陽北面) 봉길리(奉吉里) 앞바다에 있는
신라 문무왕의 수중릉(水中陵)은
사적 제158호로 대왕암(大王岩)이라고도 한다
세계에 유례가 없는 수중릉(水中陵)으로 동해변에서 200m 떨어진
바닷속에 있다. 봉길리(奉吉里) 앞 바다 물속에 솟은 바위가 있어
이 바위를 대왕 바위(大王岩)라고 불러왔다.
대왕암 위에 올라보면 가운데에 비교적 넓은 공간이 있고,
그 동서남북 사방으로 수로(水路)를 내어 맑은 바닷물이 파도를 따라
동쪽으로 나 있는 수로로 들어오고 서쪽수로로 나감으로써 큰 파도가
쳐도 안쪽 공간은 바다 수면이 항상 잔잔하게 유지되게 되어 있다.
대왕암 가운데 넓은 공간에는 넓적하고도 큰 돌이 남북으로 길게 놓여
있는데, 길이 3.6m·너비 2.85m·두께 0.9m의 거북모양의 화강암석으로
수면은 이 돌을 약간 덮을 정도로 유지되고 있다.
이 돌 밑에 어떤 특별한 장치를 해서 문무대왕(文武大王)의 유골을 안치한 것이
아닐까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 돌 밑의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어떠한 시설이 마련되어 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대왕암에서 중앙의 장골처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수로를 설치한 것은
부처의 사리를 안치한 사리탑의 형식과 비교되기도 한다.
즉 사방에 문이 마련되어 있는 인도탑의 경우나 백제의 미륵사탑 하부에
4방으로 통로를 마련한 것과 같은 불탑의 형식이 이 대왕암에 적용되어
사방에 수로를 마련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681년 7월에 왕이 돌아가니 시호(諡號)를
문무(文武)라 하고, 왕의 유언에 따라 고문 밖에서 불교식으로 화장하여
동해구(東海口) 대석상(大石上)에 장사하였다고 전한다.
이는 왕이 죽어서도 동해의 용이 되어 왜구를 막겠다는 유언를 받든 것으로
신라 사람들은 왕이 용이 되었다고 생각하였으며
그 대석을 대왕석(大王石)이라 하였다고 한다.
문무왕의 아들 신문왕(神文王)은 동해변에 감은사(感恩寺)를 창건하고
금당(金堂) 밑에 동해를 향하여 구멍을 뚫어 동해의 조수(潮水)가 금당 밑까지
들어오게 하였는데, 이는 동해의 용이 된 부왕이 조수를 따라 금당까지
들어온다고 생각한 것이다.
또한 대왕암이 바라다보이는 인근 해변에 이견대지(利見臺址)가 있는데
신문왕이 이곳에서 대왕암을 망배(望拜)한 곳이다. *옮긴글
경인년 새해 일출을 기다리는 사람, 사람들
찬란한 태양님이시여!
올해에도 지난해처럼 울 가족의 건강과 화평을 지켜 주소서!
소원성취로 년중 내내 웃음꽃 만발한 고운 가정을 이루게 하여 주소서!
간곡한 기원으로 햇님을 기다리는 가족모습이 자못 진지하다.
각처에서 한해 소원성취를 빌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
신년에 떠오르는 태양님으로부터 부디 찬란한 기운을 받아
소원성취 꼭 이루소서!
시선은 모두 한방향의 한점이다.
진지한 자세로 햇님을 기다리는 모습들이 장관이다.
스산한 새벽 바닷가다.
심한 해풍으로 제법 높다랗게 온 파도가 또한 장관으로 볼만 했다.
간간히 시선을 모으며 시간을 관리라도 해 주 듯 했다.
하늘가 밑에 가린 구름때문으로 예상보다 일출시간이 늦어졌다.
대신 갈매기떼들의 고공 비행 축제가 벌어진다.
또한 장관이다.
해 뜨기 직전 고공비행으로 한껏 분위기를 띄우는 날새들!
찾아온 손님들을 배려한 특별 축하 공중쇼인가?
아마도 문무대왕의 지시를 받은 듯 ...!
날새들의 색다른 공중쇼를 보며 벅찬 가슴이 계속 이어진다.
대 자연의 장엄한 광경들이 꼭 영화를 보 듯
가슴이 찌릿 전율이 일면서 감동으로 다가온다.
다른 일출지역에서 볼 수 없었던 특별한 광경이
지금도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고 내내 기쁨을 건네준다.
드디어 구름위로 가느다란 황금빛 곡선이
구불구불 구름선을 타며 가로로 길게 드러 누웠다.
감질난다. 써억 나오지 못하고 애간장 녹인다.
애인인들 요런 애간장이 녹을까? 자연의 위대함과 신비에 어찌 견줄까?
예상 시간보다 약 15분 늦게 모습을 살짝 내미는 문무왕 수중일출 광경이다.
날새들의 興이 무르익는다. 구경꾼들의 興도 무르익는다.
숨소리도 안들린다. 뜨거운 시선으로 응시한다.
날새들이 구경꾼들 기분이라도 맞춰 주 듯
구경꾼들 머리위에서 축하 비행이다.
자연과 사람이 하나로 묶인 참 아름다운 화합의 모습이다.
구름사이 좁은 틈에서 감질나게도 햇님의 모습이 살짝 보인다.
정말 애간장이 탄다.
구름사이 틈이 막혀 다시 몸을 감춘 햇님! 애고~ 가슴이 탄다.
이제서야 본격적으로 서서히 그 귀한 몸을 드러내며 떠 오르는 햇님!
문무왕 수중릉 곁에서
갖은 우여곡절로 탄생한 경인년 새해 뜨거운 붉은 저 태양을 보라!
우리 곁으로 다가온 저 눈부신 찬란한 태양을 보라!
지난해 울적한 마음들은 모두 저 태양속에 불태우고
새로운 희망을 저 찬란한 태양에 걸어두고
또 한해를 기운차게 살아 보자고 함께 다짐 할까요?
저 눈부신 찬란한 태양과 함께하는 경인년 새해!
모두모두 소원성취 이루시길 바래 봅니다.
새해 첫날 찬란한 태양을 만나게 되어 여간 흥분된지 않았다.
축복의 새해 첫날이었다.
다시 구름속으로 잠시 몸을 숨긴 햇님을 아쉬워하며 주변을 둘러본다.
구경꾼들이 서서히 이곳을 떠나기 시작했다.
더러는 아쉬움에 흥을 가다듬느라 더 뭉개적대며 멈칫댄다.
갈매기들이 이번엔 마을쪽에서 한가로이 비행이다.
경인년 새해 해돋이 축제를 공중열연으로 빛내 준 스타 새들!
에쁜 갈매기들아!
너희들도 건강한 새해가 되길 바란다.
해변가 모래사장에 내려 앉은 갈매기들의 여러 제스츄어를 담으며...
구경꾼도 갈매기도 모두가 흥분을 가라앉힌 평온한 시간을 보낸다.
새들의 아름다운 제스츄어를 뒤로 하고 다음 행선지를 향해 이동이다.
추위도 잊은 흥분의 도가니에서 다시 현실로 돌아오니
다시 한기가 뼈속을 파고 든다.
불을 쬐기 위해 불옆으로 가지만
다른 일행들 속에 서 있기가 쑥스러워 조금 기다렸다가
빈자리가 나서 실컷 몸을 녹였다.
도라무통에서 창작불이 활활 잘도 타오른다.
그 장작불을 보니
젊은 시절 해변가에서 낭만을 즐긴 캠프화이어가 생각나기도 했다.
또한 아궁이 앞에 앉아 장작을 때던 옛일들이 향수로 찾아 든다.
아름다운 옛 추억을 다시 회상해 보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잠시나마 젊음으로 되돌아가 본 새해 아침이었다.
다음코스는
경주 문화유적지를 둘러보는 일정이다.
버스에 오르기위해 주차장으로 이동중이다.
아침에 만난 햇님은 많은 사람들에게 시달려선지
탄력을 조금 잃은 듯 힘이 조금은 빠진 듯 했다.
다음 일정은 불국사다.
버스에 승차하기 위해 주차장으로 이동한다.
해돋이 구경을 마치고 불국사로 이동하는 도중에 차창밖 풍경을 담는다.
텅빈 논이 봄이 되면 다시 파릇파릇 우리들 주식인 벼를 키워 내겠지.
차창에 낀 서리를 손으로 쓰윽 문질러 놓고 경주 들녘 풍경을 "찰칵" 담는다.
일출을 보고 퇴장하는 혼잡한 자동차들로 대 혼잡을 이루어
불국사까지 많은 시간이 소요 되었다. 울렁거림으로 힘겨운 시간이었다.
조금은 힘겹지만 이러한 힘겨움이
후일에 대단한 에너지로 변환됨을 알고 있기에 낙으로 보낸 시간들이다.
이것으로 1편은 여기서 마치고
2편은 경주 문화유적지를 소개합니다.
불국사, 선덕여왕릉,진평왕릉,분황사 모전석탑,첨성대,안압지..
기대하셔도 될꼽니다.
또 그때 뵙도록 하고요. 길게 내려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경인년 새해 일출에서 찬란한 기운은 받으셨는지요?
감사합니다.
참고로 경주의 역사를 소개합니다.
992년간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
경주의 역사는 곧 신라의 역사이다.
신라는 경주평야에 있던 여섯 부족의 촌장들이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하면서 건국된 나라이다.
그 후 밖으로 주변의 여러 나라들을 통합하였으며,
안으로 정치체계를 발전시켜 나갔다.
22대 지증왕대에는 국호를 신라(新羅)로 확정지었으며,
23대 법흥왕대에는 불교를 공인해 찬란한 불교문화의 막을 올렸다.
이처럼 국가의 면모를 일신한 신라는 그 기세를 몰아
고구려, 백제를 병합하고 676년에는 삼국통일의 성업을 달성한다.
통일국가 신라는 평화로움 속에서 눈부신 문화적 발전을 이룩해 갔다.
*경주시청 홈페이지에서
경주역사 유적지구
경주역사유적지구 신라천년(B.C 57 - A.D 935)의 고도(古都)인 경주의
역사와 문화를 고스란히 담고있는 불교유적, 왕경유적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이미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일본의 교토, 나라의 역사유적과
비교하여 유적의 밀집도, 다양성이 더 뛰어난 유적으로 평가된다.
2000년 12월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경주역사유적지구는 신라의 역사와
문화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을 만큼 다양한 유산이 산재해 있는
종합역사지구로서 유적의 성격에 따라 모두 5개 지구로 나누어져 있는데
불교미술의 보고인 남산지구, 천년왕조의 궁궐터인 월성지구, 신라 왕을
비롯한 고분군 분포지역인 대능원지구, 신라불교의 정수인 황룡사지구,
왕경 방어시설의 핵심인 산성지구로 구분되어 있으며
52개의 지정문화재가 세계유산지역에 포함되어 있다.
경주 남산은 야외박물관이라고 할 만큼 신라의 숨결이 살아 숨쉬는 곳으로
신라 건국설화에 나타나는 나정, 신라왕조의 종말을 맞게했던 포석정과
미륵곡 석불좌상, 배리 석불입상, 칠불암 마애석불 등
수많은 불교유적이 산재해 있다.
월성지구에는 신라왕궁이 자리하고 있던 월성, 신라 김씨왕조의 시조인
김알지가 태어난 계림, 신라통일기에 조영한 임해전지,
그리고 동양 최고의 천문시설인 첨성대 등이 있다.
대능원지구에는 신라 왕, 왕비, 귀족 등 높은 신분계층의 무덤들이 있고
구획에 따라 황남리 고분군, 노동리 고분군, 노서리 고분군 등으로 부르고 있다.
무덤의 발굴조사에서 신라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금관, 천마도, 유리잔,
각종 토기 등 당시의 생활상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황룡사지구에는 황룡사지와 분황사가 있으며, 황룡사는 몽고의 침입으로
소실되었으나 발굴을 통해 당시의 웅장했던 대사찰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으며
40,000여 점의 출토유물은 신라시대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산성지구에는 A.D 400년 이전에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 명활산성이 있는데
신라의 축성술은 일본에까지 전해져 영향을 끼쳤다.
문화유산적 가치
경주역사유적지구는 한반도를 천년이상 지배한 신라왕조의 수도로
남산을 포함한 경주 주변에 한국의 건축물과 불교 발달에 있어
중요한 많은 유적과 기념물들을 보유하고 있다.
새해 福 많이 받으십시오
사진편집및 제작찬란한 빛姬金
印英
感謝합니다
|
첫댓글 홍스님 안녕하세요. 새해 그 날 현장의 생생한 사진과 자료를 올려 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정말정말 수고많셨고요. 홍스님 덕분에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