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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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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53년 8월 6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직할시 |
직업 | 평론가,소설가,작가 |
국적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장르 | 문학평론,시 |
배우자 | 지하련 |
임화(林和, 문화어:림화, 1908년 10월 13일 ~ 1953년 8월 6일)
한국의 시인이며 문학 평론가, 정치인이다. 본명은 임인식(林仁植)이며, 김철우, 쌍수대인, 성아, 청로 등 여러 필명을 사용했다.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의 멤버로 활동하였으며, 해방 이후에는 정계에 진출하여 조선공산당 재건운동과 건국준비위원회 활동, 남조선로동당 창당 활동 등에 참여했다.
1947년 미군정의 탄압을 피해 월북, 남북 협상에 참여한 뒤 북조선 건국에 참여하였으나 1953년 8월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당한다. 한성부 출신.
한성부의 소시민 가정에서 태어나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중퇴했다. 이상, 이강국과는 보성고보 동기생이었다. 1920년대 후반부터 시 창작과 비평으로 문단 활동을 시작했으며, 이 무렵 친구인 윤기정과 함께 영화 배우로도 활동했다.
임화라는 필명은 1927년 경부터 계급문학에 관심을 보이며 쓰기 시작했다. 1929년에 시 〈우리 옵바와 화로〉, 〈네거리의 순이〉 등을 발표하여 대표적인 경향파 시인으로 자리를 잡고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을 대표하는 작가로 부상했다.
약 1년 동안 일본 유학을 다녀와 1931년 귀국한 이후로도 참여적인 성향을 대표하는 카프에서 좌파 문학 이론을 생산하고 김기진, 김화산 등을 공격하는 각종 논쟁에 적극 참여하면서 활발히 활동했다. 카프 활동으로 제1차 카프 검거 사건 때 체포되어 수감되기도 했다.
제2차 카프 검거 사건 이후 1935년 자신이 서기장까지 지낸 카프가 강제적으로 해산된 이후 순수 문학으로 전향하는 듯하였으나, 태평양 전쟁 종전 후 조선문학건설본부, 조선문학가동맹 등 좌익 문학 단체에 적극 참여하면서 박헌영에게 매료된 그는 이후 남로당 노선을 걸었다.
일제는 그에게 회유를 하며 전향을 권고했지만 거부하였다. 그는 대화숙에 강제로 입소되었지만 창씨 개명은 끝까지 거부하였고, 총독부는 그를 요시찰 인물로 지정하여 감시하였다. 특히 박헌영과의 관계를 의심, 내통 여부를 중점적으로 감시하였다.
박헌영의 열렬한 추종자였던 그는 8월 15일 여운형, 안재홍이 이끄는 건국준비위원회에 가담하였으나, 1945년 8월 20일 박헌영이 경성에 나타나자 그와 함께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동참했다.
1947년 두 번째 부인이며 소설가인 지하련과 함께 월북하였고, 1948년 4월의 제1차 전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에 참석했다. 그해 8월 해주에서 개최된 제2차 전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에 참석한 뒤, 9월의 북조선 정부 수립에 동참하였다. 1953년 박헌영, 이강국, 리승엽 등 남로당 수뇌부와 함께 스파이 혐의로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해 총살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상세한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다.
임화는 흰 피부에 수려한 외모로 '조선의 발렌티노'로 불렸다고 하며, 김유영이 연출한 영화 《혼가》(1929)에 주연으로 출연한 적도 있을만큼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1] 초창기에는 '임다다'라는 필명을 쓰면서 다다이즘 성향을 보였고, 카프 시절에는 마르크스주의에 기반한 ‘이식문학론’을 내세우는 등 외국의 최신 문화 이론을 수입하여 자생적으로 소화하는데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임화의 첫 부인은 일본 유학 시절에 함께한 동지 이북만의 동생 이귀례였다. 두 사람 사이에는 딸이 있었는데, 임화는 그 딸을 생각하며 한국 전쟁 중 〈너 어느 곳에 있느냐〉(1951)라는 시를 썼다. 이 시를 두고 북조선 당국은 “영웅적 투쟁에 궐기한 우리 후방 인민들을 모욕하고 그들에게 패배주의적 감정과 투항주의사상을 설교하였다”고 하여 숙청의 빌미로 삼았다.[2] 월북 작곡가인 김순남이 작곡하여 한국 전쟁 시기에 인민군과 빨치산들이 즐겨 부른 노래 〈인민항쟁가〉의 작사가이기도 하다.
한국 전쟁 발발후 만주에 피난차 머물고 있던 그의 부인 지하련은 1953년 박헌영 계열이 몰락하면서 임화가 간첩 혐의로 처형 당했으며 시신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실성한 상태가 되어 불행히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다.[3]
<출처: 위키백과>
네거리의 순이(順伊)
임 화
네가 지금 간다면, 어디를 간단 말이냐?
그러면, 내 사랑하는 젊은 동무,
너, 내 사랑하는 오직 하나뿐인 누이동생 순이,
너의 사랑하는 그 귀중한 사내,
근로하는 모든 여자의 연인…….
그 청년인 용감한 사내가 어디서 온단 말이냐?
눈바람 찬 불쌍한 도시 종로 복판에 순이야!
너와 나는 지나간 꽃피는 봄에 사랑하는 한 어머니를
눈물 나는 가난 속에서 여의였지!
그리하여 이 믿지 못할 얼굴 하얀 오빠를 염려하고,
오빠는 가냘픈 너를 근심하는,
서글프고 가난한 그 날 속에서도,
순이야, 너는 마음을 맡길 믿음성 있는 이곳 청년을 가졌었고,
내 사랑하는 동무는…….
청년의 연인 근로하는 여자, 너를 가졌었다.
겨울날 찬 눈보라가 유리창에 우는 아픈 그 시절,
기계 소리에 말려 흩어지는 우리들의 참새 너희들의 콧노래와
언 눈길을 걷는 발자욱 소리와 더불어 가슴 속으로 스며드는
청년과 너의 따뜻한 귓속 다정한 웃음으로
우리들의 청춘은 참말로 꽃다왔고,
언 밤이 주림보다도 쓰리게
가난한 청춘을 울리는 날,
어머니가 되어 우리를 따뜻한 품속에서 안아주던 것은
오직 하나 거리에서 만나, 거리에서 헤어지며,
골목 뒤에서 중얼대고 일터에서 충성되던
꺼질 줄 모르는 청춘의 정열 그것이었다.
비할 데 없는 괴로움 가운데서도
얼마나 큰 즐거움이 우리의 머리 위에 빛났더냐?
그러나 이 가장 귀중한 너 나의 사이에서
한 청년은 대체 어디로 갔느냐?
어찌 된 일이냐?
순이야, 이것은…….
너도 잘 알고 나도 잘 아는 멀쩡한 사실이 아니냐?
보아라! 어느 누가 참말로 도적놈이냐?
이 눈물 나는 가난한 젊은 날이 가진
불쌍한 즐거움을 노리는 마음하고,
그 조그만, 참말로 풍선보다 엷은 숨을 안 깨치려는 간지런 마음하고,
말하여 보아라, 이곳에 가득 찬 고마운 젊은이들아!
순이야, 누이야!
근로하는 청년, 용감한 사내의 연인아!
생각해보아라, 오늘은 네 귀중한 청년인 용감한 사내가
젊은 날을 부지런한 일에 보내던 그 여윈 손가락으로
지금은 굳은 벽돌담에다 달력을 그리겠구나!
또 이거 봐라, 어서.
이 사내도 네 커다란 오빠를…….
남은 것이라고는 때묻은 넥타이 하나뿐이 아니냐!
오오, 눈보라는 "튜럭"처럼 길거리를 휘몰아간다.
자 좋다, 바로 종로 네거리가 예 아니냐!
어서 너와 나는 번개처럼 두 손을 잡고,
내일을 위하여 저 골목으로 들어가자.
네 사내를 위하여,
또 근로하는 모든 여자의 연인을 위하여…….
이것이 너와 나의 행복된 청춘이 아니냐?
『조선지광』 82호, 19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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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화(1908-1953, 본명 임인식)
조선의 "루돌프 발렌티노"라 불리웠던 시인.
임화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은 그저 인상에 가까운 것들인지 모른다.
그것은 오랫동안 풍문. 바람에 실려 왔다가 어둠 속으로 묻혀버린
과거의 전설같은 것이다. 카프(KAPF)의 서기장을 역임했고,
80여편에 가까운 시와 200편이 넘는 평론을 남긴
우리 현대문학 속에서 시와 비평사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
임화, 그는 1946년 월북했으나 1953년 미제 스파이라는 혐의로 사형 당하고 만다.
이제 누가 있어 그의 죽음에 얽힌 비밀과 억울함을 풀어줄까?
<출처: 아름다운 소리터>
우리 오빠와 화로
임 화
사랑하는 우리 오빠 어저께 그만 그렇게 위하시던 오빠의 거북무늬 질화로가 깨어졌어요.
언제나 오빠가 우리들의 '피오닐' 조그만 기수라 부르는 영남(永男)이가
지구에 해가 비친 하루의 모-든 시간을 담배의 독기 속에다
어린 몸을 잠그고 사 온 그 거북무늬 화로가 깨어졌어요.
그리하야 지금은 화젓가락만이 불쌍한 우리 영남이하구 저하구처럼
똑 우리 사랑하는 오빠를 잃은 남매와 같이 외롭게 벽에가 나란히 걸렸어요.
오빠 ……
저는요 저는요 잘 알았어요.
왜 - 그날 오빠가 우리 두 동생을 떠나 그리로 들어가실 그날 밤에
연거푸 말은 궐련[卷煙]을 세 개씩이나 피우시고 계셨는지
저는요 잘 알었어요 오빠
언제나 철없는 제가 오빠가 공장에서 돌아와서 고단한 저녁을 잡수실 때 오빠 몸에서 신문지 냄새가 난다고 하면
오빠는 파란 얼굴에 피곤한 웃음을 웃으시며
…… 네 몸에선 누에 똥내가 나지 않니 - 하시던 세상에 위대하고 용감한 우리 오빠가 왜 그 날만
말 한 마디 없이 담배 연기로 방 속을 메워 버리시는 우리 우리 용감한 오빠의 마음을 저는 잘 알았어요
천정을 향하야 기어올라가든 외줄기 담배 연기 속에서 - 오빠의 강철 가슴 속에 백힌 위대한 결정과 성스러운 각오를 저는 분명히 보았어요
그리하야 제가 영남이의 버선 하나도 채 못 기었을 동안에
문지방을 때리는 쇳소리 바루르 밟는 거치른 구두 소리와 함께 - 가 버리지 않으셨어요.
그러면서도 사랑하는 우리 위대한 오빠는 불쌍한 저의 남매의 근심을 담배 연기에 싸 두고 가지 않으셨어요.
오빠 - 그래서 저도 영남이도 오빠와 또 가장 위대한 용감한 오빠 친구들의 이야기가 세상을 뒤집을 때
저는 제사기(製絲機)를 떠나서 백 장의 일전짜리 봉통(封筒)에 손톱을 부러뜨리고
영남이도 담배 냄새 구렁을 내쫓겨 봉통 꽁무니를 뭅니다.
지금 - 만국지도 같은 누더기 밑에서 코를 고을고 있습니다.
오빠 - 그러나 염려는 마세요.
저는 용감한 이 나라 청년인 우리 오빠와 핏줄을 같이 한 계집애이고
영남이도 오빠도 늘 칭찬하던 쇠 같은 거북 무늬 화로를 사 온 오빠의 동생이 아니예요?
그리고 참, 오빠, 아까 그 젊은 나머지 오빠의 친구들이 왔다 갔습니다.
눈물나는 우리 오빠 동무의 소식을 전해 주고 갔어요.
사랑스런 용감한 청년들이었습니다.
세상에 가장 위대한 청년들이었습니다.
화로는 깨어져도 화젓갈은 깃대처럼 남지 않았어요.
우리 오빠는 가셨어도 귀여운 ‘피오닐’ 영남이가 있고
그리고 모든 어린 ‘피오닐’의 따뜻한 누이 품 제 가슴이 아직 더웁습니다.
그리고 오빠……
저뿐이 사랑하는 오빠를 잃고 영남이뿐이 굳세인 형님을 보낸 것이겠습니까?
섧지도 않고 외롭지도 않습니다.
세상에 고마운 청년 오빠의 무수한 위대한 친구가 있고 오빠와 형님을 잃을 수 없는 계집아이와 동생
저희들의 귀한 동무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 다음 일은 지금 섭섭한 분한 사건을 안고 있는 우리 동무 손에서 싸워질 것입니다.
오빠 오늘 밤을 새워 이만 장을 붙이면 사흘 뒤엔 새 솜옷이 오빠의 떨리는 몸에 입혀질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의 누이동생과 아우는 건강히 오늘 날마다를 싸움에서 보냅니다.
영남이는 여태 잡니다. 밤이 늦었어요.
- 누이 동생
<출처: 전지혁샘의 언어대장간>
한 잔 포도주를
임 화
찬란한 새 시대의 향연(饗宴) 가운데서
우리는 향그런 방향(芳香) 우에
화염같이 붉은 한 잔 포도주를 요구한다
새벽 공격의 긴 의논이 끝난 뒤 야영은
뼛속까지 취해야 하지 않느냐
명령일하(命令一下)
승리란 싸움이 부르는 영원한 진리다
그러나 나는 또한 패배를 후회하지 않는다
승패란 자고로 싸움의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이 아니냐
중요한 것은 우리가
피로하지 않는 것이다
적에 대한 미움을 늦추지 않는 것이다
멸망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지혜 때문에 용기를 잃지 않는 것이다
최후의 결별에 임하여 무엇 때문에
한 그릇 냉수로 흥분을 식힐 필요가 있느냐
벗들아! 결코 위로의 노래에
귀를 기울여서는 아니된다
동백꽃은 희고 해당화는 붉고 애인은 그보다도 아름답고
우리는 고향의 단란과 고요한 안식을 얼마나 그리워하느냐
아 이러한 모든 속에서 떠나가는 슬픔을
나는 형언할 수가 없다
그러나 한 잔 냉수로 머리를 식힌 채
화려했던 희망과 꿈이 묻히는
무덤을 찾느니보단
아! 내일 아침 깨어지는 꿈을 위해설지라도
꽃과 애인과 승리와 패배와 원수까지를
한 정열로 찬미할 수 있는 우리 청춘을 위하여
벗들아! 축복의 붉은 술잔을 들자
<출처: LOVE SWEETIE>
바다의 찬가讚歌
임 화
장하게
날뛰는 것을 위하여,
찬가讚歌를 부르자.
바다여
너의 조용한 달밤을랑,
무덤의 길에 선
노인老人들의 추억追億 속으로,
고시란히 선사하고,
푸른 비석 위에
어루만지듯,
미풍微風을 즐기게 하자.
파도여!
유쾌하지 않는가!
하늘은 금시로,
돌멩이를 굴린
살어름판처럼
뻐개질듯하고,
장때 같은 빗줄기가
야......
두 발을 구르며,
동동걸음을 치고,
나는
번개 불에
놀라 날치는
고기 뱃바닥의
비늘을 세고,
바다야!
너의 기픈 가슴속엔
사상思想이 들었느냐!
억센 반항反抗은 무슨 의미意味이냐!
나는 한울을 향向한 너의 의미意味보다도
날뛰는 육체肉體를 사랑한다
시인詩人의 입에
마이크 대신
재갈이 물려질 때,
노래하는 열정이
침묵沈默 가운데
최후를 의탁할 때,
바다야!
너는 몸부림치는
육체肉體의 곡조를
반주伴奏해라.
<시집: 해금시인99선 너 어디 있느냐/나남/1988>
<출처: 시사랑>
너 어디 있느냐
임 화
아직도 이마를 가려
귀밑머리를 땋기수줍어 얼굴 붉히던 너는
지금 이 바람찬 눈보라 속에무엇을 생각하여 어느 곳에 있느냐
머리가 절반 흰아버지를 생각하여
바람 부는 산정에 있느냐
가슴이 종이처럼 얇아항상 마음 아프던엄마를 생각하여
해 저무는 들길에 섰느냐
그렇지 않으면 아침마다 손길 잡고 문을 나서던
너의 어린 동생과 모란꽃 향그럽던 우리 고향집과이야기
소리 귀에 쟁쟁한그리운 동무들을 생각하여
어느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느냐
사랑하는 나의 아이야....
<출처: 원명화의 작은문학사랑>
임화와 그의 작품연구
{1}.작가소개
1908-1953. 시인. 평론가. 본명은 인식(仁植).문필활동을 시작하였었던 1926년 에는 성아(星兒)라는 필명을 가졌고, 1928년 부터는 임화·김철우 쌍수대인(雙樹臺人),청로 등의 필명을 썼다. 1908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1953년 8월 북한정권의 최고재판소에서 '미제간첩'혐의로 사형을 선고 받고 처형당하였다. 1921년에 보성중학교에 입학 하였다가 1925년에 중퇴 하였고, 1926년 부터 시와 평론을 발표하기 시작 하였으며 영화와 연극에도 뛰어들었다. 시 『지구와 빡테리아』,『담(曇)-1927)등이 잘 일러 주고 있는 겄처럼 이 무렵 그는 다다이즘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으며,바로 이러한 전위사조에 대한 모방욕이 무산계급문학운동에의 열정과 의지를 낳은 것이라 할 수 있다. 1928년에 박영희와 만났으며 윤기정과 가까이 하면서 카프(KAPF)에 가담하게 되었고,1929년에는 『우리 옵바와 火爐』,『네거리 順伊』등의 시를 써냄으로써 일약 대표적인 프로 시인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1930년에 일본에 건너가서 이북만(李北滿) 중심의 '무산자'그룹에서 활동하였고,1931년에 귀국하여 1932년에는 카프 서기장이 되었다. 카프 전주 사건이 터진 그 이듬해인 1935년에 카프해산계를 낸 이후 해방이 될 때 까지의 임화의 삶은 폐결핵,시집《현해탄》,『조선 신문사 서술』, 출판사 '학예사'운영, 일제 신체제 문화 운동에의 협조 등으로 점철 되었다. 해방 이틀 후에 '문학건설본부'의 간판을 내걸어 좌익문인들을 규합하였고,1946년 2월에는 '조선문학가동맹'의 결성을 주도 하기도 하였다. 1947년 11월에 월북하기 전까지는 박헌영(朴憲永)·이강국(李康國) 노선의 민전의 기획차장으로 활동 하였으며, 월북후에는 6·25까지 조·소문화협회 중앙의 부위원장으로 일하였다. 6·25때는 다시 서울에 왔다가 그뒤 낙동강 전선에서 종군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휴전 직후 1953년 8월에 남로당 중시인물들과 함께 북한 정권의 최고재판소 군사 재판부의 법정에 서게 되었다. 그의옆에는 이원조·설정식 등의문인들도 있었다.19세부터 시·평론을 발표하였던 임화가 남긴 시집으로는 《현해탄》(1938년)·《찬가》(1947)《회상시집》·(1947년)·《너 어느 곳에 있느냐》(1951년) 등이있고, 평론집으로는 《문학의 논리》(1940)년이 있으며, 편저로는 《현대조선시인선집》(1939년)이 있다.생전에 80편에 가까운 시와 200편이넘는 평론을 쓴 것으로 집계되고 있으며,한국 현대시사와 비평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1923~1930년대의 프로문학과 해방 직후의 좌익문학을 논할 때 필수적으로 살펴보아야 할 존재이다. 뿐만 아니라그는 진보적 문학 운동사 또는 문학 단체 등으로서의 한국현대문학사에 있어서는 핵심적인 인물이 되는 것이라 하겠다.
{2}.임화의 작품세계
(프로 문학에 있어서의 詩의 한계- 우리 옵바와 火爐를 중심으로)
가. 기존 논의 검토
㈀김기진(金基鎭):『단편 서사시의 길로』'우리시의 양식 문제에 대하야'(조선문예 제 1호. 1929.5)
"『우리 옵바와 火爐』는 그 골격으로 서 있는 사건이 現實的이요 실제적이요 오빠를 부르는 누이동생의 감정이 조금도 공상적, 과장적이지 아니하며 전체로 現實,분위기,感情의 파악이 객관적 구체적으로 되어있고 그리고 그것은 한개의 統一된 정서를 전파하는 동시에 감격으로 가득찬 한개의 생생한 소설적 사건을 眼前에 전개하고 있다."
김기진은 『우리 옵바와 火爐』를 극찬 하면서 이 작품 한 편 만으로 독립된 詩論을 작성했을 정도의 찬사를 아끼지 않았는데 이는 이 시의 서사적 요소(편지글의 對話體 형식)가 자신이 주장한 "예술 大衆化論"에 가장 부합되는 형식으로 짜여진 글 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임화(林和):『詩人이여! 一步 前進하라!』'詩에 대한 自己批判'(조선지광 1930. 6월호)
임화는 자기의 詩를 "소시민적 흥분만으로 노래됨으로써 진실한 생활이 없는 곳에서 동지만을 부르는 그 자신의 허약함을 노출 했으며 결국 감상주의로 전락했을뿐 진실한 大衆化는 아니었다."는 혹독한 批判을 가하면서 시의 사상성을 다시 한번 강조 한다.
㈂김윤식:『韓國 近代 文藝批評史 硏究』'林和 硏究'(한얼문고1973.)
『우리 옵바와 火爐』뿐만 아니라 1939년 『현해탄』이전의 거의 모든 시가가 서구적, 일본적 사상과 사고에 무방비 상태로 감염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사적 내부공간을 획득하고 있는것은 1)詩的 對象이 여인이다.2)話者가 여인이다.3)『우리』라는 집단적 입장을 취했기 때문이라 보았다.
㈃마쯔모토세이쪼.김병걸(역):『北의 詩人 林和』(미래사 .1987.)
『우리 옵바와 火爐』는 긴 호흡의 詩歌이며, 이 전통이 이후 문학사 과정에서 발전이 저지 당했다는 점,그리고 노동자 계급의 生活相,감정, 투쟁의지등이 뛰어나게 形象化 된 詩
㈄김성윤:『1920 - 1930년대 경향시의 흐름』'카프선집1.'(평론사.1988.)
『우리 옵바와 火爐』는 노동자 가족의 生活相 즉 식민지 狀況의 경제적 궁핍과 계급간의 착취, 그리고 勞動運動에 뛰어든 오빠의 불행한 처지가 對話體의 文章으로 구현되어 있고, 개념적,추상적 구호를 통한 의식 고양이 아니라 구체적 사물을 통하여 감동과 그에 뒤따르는 힘을 획득하고 있다.라고 주장 한다. 그러나 구체적 事物이라 볼 수 있는 『깨어진 火爐』,『벽에걸린 두개의 火저가락』은 그 상징성을 획득하는데 실패한 것으로 보여지며, 임화 자신의 意圖와도 상관 없는 우연성으로 보여진다.
㈅김용직: 『林和 文藝 硏究』(세계사.1991.)
이 작품의 火爐는 등장인물 가운데 하나인 막내동생 永南이가 사온 것으로 이것이 깨어졌다고 함으로써 임화는 한가족이 처한 비참한 상황을 心象으로 제시하려고 꾀한것 같다. 그러나 여기서는 작품 속의 요구 되는 기법이 그것을 밑받침 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깨어진 火爐』는 공연한 군더더기라는 느낌을 줄뿐이다. 또한 이 시가 발표되기 이전에는 素月이 등장한 바 있고 萬海와 李相和등이 뛰어난 작품들을 발표하고 있다는 것을 고려해볼때 이 작품이 명편 佳作이라고 평가 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특정 이데올로기의 시각에서만 가능하다.
나. 작품의 연구 방법
『우리 옵바와 火爐』는 카프 문학의 선두주자로 인식,평가되는 것이 일반론이고,당시 임화의 정치적 입지 또한 카프를 이끌어 가는 위치에 있으므로 작품의 시대적 고찰이 불가피 하다고 본다. 그러나 作品 자체의 형식과 의지 표출 방법이 끊임없는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도 사실 이므로 부족한 정보와 지식의 전무한 상태를 무릅쓰고,作品이해에 도움이 되는 여러 방법을 함께 택했다. 아울러 이시를 통해서 카프문학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 한계성에 대한 미흡한 생각을 정리하고자 하였다.
다. 작품분석
㈀ 서사적 성격과 시의 서정성의 절충
이시의 형식은 정제되지 못한 투박한 시어의 구사와 행과 연의 혼잡한 불규칙성, 사건의 평이한 이야기식 진술로, 만약 행과 연의 구별이 없다면 하나의 조그만 산문(편지)같은 느낌을 지울수 없다.그러나 한편으로는 『-졌어요, -저는요, 저는요-, -보았어요, -걸렸어요』등에서 나타나는 여성적 목소리, 한가족의 비밀스런 대화를 엿듯는것 같은 고백적 서간체 형식이, 독자의 관심을 집중시키고있으며 가족의 따뜻한 사랑등이 표출된 서정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아진다. 따라서 이러한 시의 이중적 성격이 카프문학의 노선과는 사뭇 차이가 난다고 생각되며 나아가서는 카프의 사상제일주의(문학의 도구화)와 문학 자체가 지니는 가치적 괴리가 아닌가 생각된다.
㈁ 사상,이념의 전달 (선전,선동)의 타당성 확보
이 작품의 전반에 흐르는 1929년 당시의 비참한 생활상은 당시의 보편적이 시대상황이었고 따라서 '오빠의 구속⇒와롭게 남게된 남매⇒투쟁의 의식표출'의 도식적 사고는 타당성을 인정 받기에 충분한 구조적 설정으로 보아진다. 따라서 이 시는 리얼리즘 확보에 성공을 거둔 것이다. 또한 최악으로 암담해진 상황묘사『....하루의 모든 시간을 담배의 독기 속에다....』,『-만국지도 같은 누더기-』,『-오늘 밤을 세어 이만(二萬)장을 붙이면....』의 뒤를 따르는 여성의 결연하고 단호한 목소리(3연 이후,7연,8연,9연,11연)는 독자에게 연민과 함께 사회적 모순 상황에서 발생하는 계급투쟁의 타당성을 전달하기에 충분 하다고 보여진다.
㈂ 투쟁대중의 확대
오빠의 구속으로 작품속의 여성화자는 새로운 자각과 각오를 가지며 그 각오를 『-저희을의 귀한 동무....8연,-우리 동무 손에서....9연』와 같이 확대 시키고 있으며 이러한 투쟁대중의 확대는 나이어린 피오닐 영남에게 이어진다. 이는 카프 선전 선동 문학의 전형적인 성격의 표출이다.
『카프 문학의 한계1-극단적인 투쟁성,목적성 때문에 문학적 형상화가 미진하여 문학의 영역을 축소 시킴
㈃ 시의 樣式적 자각
이 시는 현재, 과거일들을 편지글 형식을 사용하여 이야기 하는 방식으로 구성 되어 있다. 시의 서정적 자아는 청자를 설정하여 청자와의 대화 속에서 시간성은 늘 현재를 지향한다. 화자의 현재성은 『1연 어저깨(화로가 깨어진 시간),2연 지금(편지를 쓰며 외로움을 느끼는 시간),3연 그날(감옥에 간날),5연 지금』등에서 찾아 볼 수 있고, 이러한 시간의 흐름속에서 사건은 차례로 전개되며 듣는 이에게 주제를 전해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극적인 성격은 카프문학의 한계성을 극복하기 위한 방향성 모색이며 대중을 향해 부르는 처절한 손짓이다.
『카프문학의 한계2-프로레타리아 독자대중의 막연한 파악과 의미 전달의 한계성』
㈄ 무의식적인 감상주의의 표출
'화로'는 겨울밤 추운 현실 (역사적 현장)에서 기댈 수 있는 편안과 안락을 의미 한다고 볼때, 사회주의 노동투사의 혁명적 열정의 삶과는 유리된 감상주의적 경향을 무의식 중에 표출하고 있다고 보아진다. 『연거퍼 말은...(3연)』-감옥에 가기전 담배를 피우며 갈등하는 오빠를 『...말 한마디 없이...보았어요.(4연)』-현실로 내모는 누이는 오빠를 억압하는 또다른 현실로 작용하고, 자신(임화)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발생할 가족에 대한 염려의 낭만적 모습과 결국에는 누이의 입으로 영웅화되는 "쇠약한 의지"의 오빠를 형상화 하였다. 이러한 임화 자신의 고백적 상황을 김윤식 교수는 '몸 가벼운 중산층 출신의 언어 감각을 자신도 모르게 살려 내어진 것'이라 보았다.
『카프문학의 한계3-임화 자신의 무의식적 감정 표출에서 알 수 있듯이 카프문학의 주도 계급 자체가 인테리계층으로, 그들 자체의 기질 표출이 불가피』
라. 결어
이상에서와 같이 1929년 당시의 카프의 대표시인 임화의 『우리 옵바와 火爐』를 논하면서 카프문학 자체가 지니는 한계성을 미연적으로 짚어 보고자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1920-1940년대 우리의 시대적 특수성에서 볼때 카프의 문학적 공헌도는 크다고 보아지며 그들의 리얼리즘적 정신은 현대문학에도 계승되어 문학의 방법론적 발전에도 기여했고 1980년대의 또 다른 시대적 특수성에 편성 민중문학의 모태역할을 담당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출처: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韓國文學史
임화林和읽기 - 생애를 중심으로
홍 인 기 (소설가, 민족문학작가회원)
“아아, 내가 공산주의에 도달한 것을 감정적인 일로 본 당신들은 얼마나 옳았는가. 그러나 그런 내가
옳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또 얼마나 잘못된 일이었는가.” -앙드레 지드-
1.인간의 삶, 시인의 길.
나는 얼마 전 월북작가, 혹은 동반자작가(본격 카프일원으로 인정되지 못하였으나 비슷한 작품 경향으로 인해서)로 알려진 엄흥섭(1906~?)의 소설들을 만난 적이 있다. 그는 해방 이전에 이미 45편 이상의 단편과 7편에 달하는 장편소설을 발표하였고, 해방기에도 15편의 단편을 발표한 다작가 작가이지만, 월북한 작가라는 문학 외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그동안 연구가 차단되어 왔었다. 그러나 1988년 공식적인 해금 이후에도 그에 관한 연구는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식민지 시대와 해방기의 시대를 배경으로 소설을 통해 민족현실에 대하여 부단하게 문학적 발언을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연구가 이처럼 부진한 이유가 문학적 성취도의 문제와 그가 남긴 소설적 성과가 민족문학의 성과에 값할 만한 뛰어난 문학적 수준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점, 그리고 상대적으로 카프 계열의 여러 작가들에 비하여 그에 대한 관심이 적지 않았나 하는 점을 연구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문학연구가들의 이런 평가와는 달리 1930년에 발표된「흘러간 마을」에서부터 「출범전후」, 「숭어」(33. 11) 「유모」(34. 3-4) 「안개속의 춘삼이」(34. 12) 「새벽바다」(35. 12) 「과세」(36. 4) 「힘」(36. 5) 「그들이 간 곳」(36. 6), 그리고 동물을 의인화한 「번견탈출기」(35. 7) , 그리고 「절연」(34. 1) 「방울속의 참소식」(34. 6) 「윤락녀」(35. 3) 「가책」(36. 1) 장편 ꡔ정열기ꡕ(36. 11 - 37. 2)까지 그의 소설을 통해 작가로서 한 시대를 어떻게 살아내고 그려(作品化)내는가에 관한 꽤나 섬뜩한 체험을 했다. 식민지 민중의 몰락과정과 그들의 삶을 천착한 그의 소설에서 나는 그가 탐색한 세계가 어떠한가를 짐작할 수 있었고, 처절한 작가정신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여기서 엄흥섭을 포함한 식민시대와 해방기, 그리고 분단의 불행한 공간을 살다 간 ‘북으로 간’ 작가들의 삶과 작품을 통해 시대를 살아가는 지혜와 창작의지의 무장을 북돋고자 한다.
①어머니의 죽음- 결핍과 상실
임화의 청소년기는 어머니의 이른 죽음과 가정 파산의 상흔으로 어두웠다. 그러한 정신적 상흔은 자신의 詩안에서 줄곧 여성화자 목소리의 탈을 쓰고 모성성에 굶주린 인간 내면의 균열된 말들로 드러난다. 그리고 절절한 부성의 목소리로도 나타난다.(「너 어느 곳에 있느냐」,「네거리의 순이」등)
임화는 보성고보를 2학년에 중퇴하면서 평생 망명가로, 정신의 유목민으로서 길을 가게 되는데, 당시 임화를 김남천 (주/김남천(金南天,1911-1953) 소설가. 문학평론가. 본명은 효식(孝植). 1930년 카프 도쿄지부에서 발행한 『무산자』동인. 월북 뒤 숙청. 장편『대하』(1939), 중편『맥』(1941),『경영』(1940)등이 있다.)은 보성고보 학모를 쓰고 반들반들하게 면도를 하고 휘파람을 불며 다니던 ‘연파적(軟派的) 불량성을 띤 보이’라고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불량성’이 ‘강성’이 아닌 ‘연성(軟性)’이라고 말하는 점으로 볼 때 임화는 감상적․낭만주의적 성향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했고, 이것이 그의 운명을 재촉한 이유가 되기도 한다.
고아나 다름없는 임화를 받아들인 것은, 그보다 7년 연상이며 아버지 같은 존재였던 박영희였고, 나중에는 박헌영이었다. 연파적 불량성을 벗어날 수 없었던 그는 박영희의 집에서 기식하면서도 방자함과 방탕함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박영희의 도움으로 일본에서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사숙하고 돌아온 그가 박영희, 김기진을 비롯한 구카프계를 처단하는 데 앞장서기도 한다.
②선택과 운명
사상은 선택의 대상일 수 있는가, 아니면 격랑 치는 역사의 중심에 서 있던 자들에게 던져지는 운명의 주사위인가. 북으로 간 많은 작가들, 우리는 지금 그들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다다이즘 시인으로 출발해 마르크스주의 문학운동을 표방한 카프(KAPF: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의 서기장까지 지냈고, 광복 후 월북했다가 결국 처형당한 임화. 낭만적 성향의 시인이었고, 영화 <혼가>의 주연배우였으며, 비평가이자 문학사가, 방향표지판 하나 없이 정치와 문학, 시인과 사상가라는 미로를 한국문학사 위에 세워놓은 그의 드라마틱한 궤도를 따라가 보자.
임화가 박헌영을 따라 북한으로 간 것은 1947년경이었다. 그 시절의 임화는 1956년에 월남한 이철주가 쓴『북의 예술인』에 처음 소개되었다. (주/)이철주,『북의 예술인』(계몽사, 1966)
그에 따르면 임화는 조소문화협회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하며, 조소출판사 사장도 겸하고 있었다. 이철주는 그의 인상을 사색적이면서도 예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임화가 다시 서울에 나타난 것은 한국전쟁이 터지고 10여일이 지난 뒤였다. 임화가 가사를 쓰고 김순남이 곡을 붙인 <인민항쟁가>가 광복 후부터 빨치산의 유행가가 되어 있었고, 파죽지세로 서울을 점령해버린 인민군들은 이 노랫가락으로 전의를 불태우던 때였다. 임화는 남한에 남아 있던 문인들을 불러 모아 작가동맹 가입을 권고하기도 했다. 인민군 ‘문화공작대’사업의 일환이었다.
③영화배우 임화
임화는 영화배우로서 카프 영화사에 기록된다. 필름은 남아있지 않지만 현재 기록으로 남아 있는 임화의 작품은 <유랑>(流浪)과 <혼가>이다. 김영팔이 각색하고 김유영이 감독한 이종명의 원작 소설 「유랑」은 당시『중외일보』에 연재되었던 ‘영화소설’이기도 했다. 임화는 그 영화의 주연 배우였다. 그러나 그 영화는 1928년 4월 1일 단성사에서 개봉되었으나 흥행에는 실패했다. 사회주의사상이 가미된 비극물이기에 대중의 공감을 얻는 데 실패한 것이다. 두 번 째 영화 <혼가>도 실패는 마찬가지였다. 주연의 역할로는 어울리지 않게 임화의 희고 창백한 얼굴빛 때문에 실패했다는 설도 있다.
④단편서사시의 개척
1925년 8월 카프가 결성된 이후 줄곧 경직된 지도 이념과 창작방법이 카프시단의 작가들을 억압하고, 그것이 시 창작을 가로막는 장벽 구실을 하여 작품성을 저하시킨다는 비난이 일었다. 서정성과 경향성의 조화가 절실하게 요구되던 시기였다. 그때 나타난 것이 ‘단편서사시’이다.
임화는「네거리의 순이」(1929),「우리 오빠의 화로」(1929)등의 단편서사시를 통해 카프시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으며, 문학성과 정치성, 작품성과 대중성을 겸비한 서정과 낭만, 그리고 경향성이 황금 비율로 섞여 있는 새로운 양식의 시를 만들어 낸 것이다.
임화가 이 분야에서 자신의 문학적 역량을 떨쳐 보일 수 있었던 것은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던 직관과 감수성, 감상주의와 낭만주의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조영복,『월북예술가 오래 잊혀진 그들』(돌베개, 2002)
2. 시인의 최후
1950년 전쟁 당시 인민군 문화공작대원으로 참전했다가 자강도 부근에서 쓴「너 어느 곳에 있느냐」를 비롯해「바람이여 전하라」,「흰 눈을 물들인 나의 피 위에」등, 격렬한 파토스로 전장의 서정을 노래한 시들이 어느덧 ‘염전사상(厭戰思想) 전쟁에 대한 혐오를 가진 사상으로 북한에서 남로당계 문인들을 숙청하는 구실로 이용되었다.
을 전파시키는 가증스러운 작품으로 바뀌어 있었다. 영웅적 투쟁을 강조하는 다른 시들에 비해 이 작품들은 감정의 기복이 매우 넓고 시인의 내면 목소리가 나약하게 들어 있어 그러한 비판을 받게 되고 끝내 그는 숙청의 회오리 속에서 사라지게 된다.
「우리 오빠의 화로」(1929)는 카프 시대 시적 성과물의 최고로 꼽히던 작품이었으나, 오빠가 감옥에 붙들려간 것을 깨진 화로에 비유하고, 집에 남아있는 오누이를 외롭게 벽에 걸린 부젓가락에 비유해 혁명가와 혁명가 가정을 모독했다고 비판, 임화를 ‘극악한 변절자이며 미제의 고용 간첩’이라는 죄명으로 숙청했다.
임화는 미제 스파이, 일제에 아첨하거나 결탁한 행위, 반소․반공 행위 등의 죄목에 대해 범죄 사실을 모두 인정한 것으로 자료는 전하고 있다. 그는 실성한 사람처럼 모든 죄를 스스로 고백했고, 질문하지 않은 죄목까지 덧붙였다고 그의 최후를 기록하고 있다. 이철주,『북의 예술인』(계몽사, 1966)
시인으로서 임화는 끝까지 박헌영의 노선을 지지한 것은 아니었다는 평가도 있다. 그는 마지막에 생존을 선택하기 위해서인지 박헌영을 부정하고 김일성을 찬양하는 시를 몇 편 쓰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고, 불행한 시대를 산 한 시인의 마감을 또 한번 우울하게 지켜보는 것이다.
임화의 죽음을 통곡한 유일한 사람은 그의 두 번째 아내이자 소설가였던 지하련이라고 한다. 그녀는 한국전쟁으로 만주에 피신해 있다가 임화의 사형 소식을 전해 듣고 평양으로 달려왔으나 시신은커녕 흔적조차 찾을 수 없어 실성한 듯 거리를 헤매었다고 한다. 그 뒤 그녀의 행적도 확인되지 않았으며, 대동강에 투신했다는 설과 자강도 희천 부근에 있는 산간 오지 교화소로 끌려가 격리 수용된 후 1960년대 초에 병사했다는 풍문이 나돌았다.
그런데 최근 임화에 대한 세인의 관심을 끄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가 미군 방첩대 대원이었다는 기록이 발견된 것이다. 재미사학자 방선주 교수와 국사편찬위원회 정병준 박사가 미 정부측에 비밀해제를 요구해 공개된 미육군정보국 문서파일과 미 국립문서보관소에 소장되어 있던「베어드 조사보고서」에는 ‘박헌영의 직계인 남로당 출신 북한 외무성 초대 부상(副相) 이강국이 미군방첩대 요원으로 활동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었다. 더불어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남로당 선전부장, 그리고 임화가 미군방첩대와 연계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강국은 임화의 보성고보 동창이었다.
그렇다면 임화는 결국 이데올로기 한가운데에 난폭하게 자리 잡고 있던 정치논리에 의해 희생된 것인가. 그리고 그의 문학은?
나는 지금까지 이념이라는 미망으로 사라져간 한 시인의 생애를 얕게나마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의 문학과 삶의 궤적을 통해 오늘 내가 바라보아야 하고 다가가야 하는 세계에 관하여 사색한다.
노름꾼과 강도를
잡던 손이
위대한 혁명가의
소매를 쥐려는
욕된 하늘에
무슨 깃발이
날리고 있느냐
동포여!
일제히
깃발을 내리자
「깃발을 내리자」의 부분 (『찬가』, 51~52면)
임화의 연보와 대표작품
1908년 10월 13일 서울 동숭동 낙산(駱山)출생. 본명은 임인식(林仁植). 호는 청로(靑爐)․철부(鐵夫)․김철우 (金 鐵友)․쌍수대인(雙樹臺人)․성아(星兒)․임유(林唯)․임다다․임화(林和). 47년 월북 후 한때 남로당의 유 격대 선동용 문건에 실린 상당수의 글은 양남수로 서명 발표되기도 함.
1921년 14세. 보성고보에 입학. 이강국․이상․이헌구․조중곤․윤기정 등과 선후배 사이.
1925년 18세. 보성고보 중퇴.
1926년 19세. ‘성아’(星兒)란 이름으로 「무엇 찾니」, 「서정 소시」,「향수」등의 시를 『매일신보』지상에 발표. 모친이 사망해 그 정신적 충격을 벗지 못하고 거리를 헤매임. 「근대문학상에 나타난 연애 」,「위기에 임 한 조선영화계」등의 평론을 집필하여 연극에의 관심을 보임. 12월 카프에 가입.
1927년 20세. 임화라는 필명을 쓰기 시작. 「혁토」,「화가의 시」등 다다이즘 경향의 시를 발표.
1928년 21세. 카프 이론 지도자 박영희의 문하에 들고 윤기정과 영화에 열중함. 「토월회 57회 공연을 보고」비롯 하여 연극, 영화평 집필. 김유영 감독의 영화 <유랑>의 주역으로 활동했으나 흥행에는 실패함.
1929년 22세. <혼가> 촬영. 카프 중앙위원으로 활동. 「우리 오빠의 화로」,「네거리의 순이」등으로 카프계 단편 서사시의 최고 수준의 시인으로 부상. 또 다른 카프 지도자인 김기진을 공격하는 논전「탁류를 향하여」를 쓰고 박영희 노선을지지. 박영희의 후원으로 도쿄로 떠남. 이북만이 주재하는 무산자사(無産者社)에서 활동 하면서 김두용․김남천․안막․한재덕 등과 사귐. 도쿄부(東京府) 하길상사(下吉祥寺) 254번지에 있던 무산 자사에는 이북만이 누이동생 이귀례를 데리고 신접살림을 차리고 있었는데, 임화는 이귀례와 결혼식 없이 동거 생활에 들어감.
1930년 23세. 「양말 속의 편지」,「제비」등의 시가를 집필. 「시인이여 일보전진하자」를 비롯하여「조선 프로예 술운동의 당면의 중심적 임무」를 집필. 카프의 볼셰비키화에 압장서면서 윤기정과 함께 신건설사 조직.
1931년 24세. 이귀례와 귀국함. 그 해 말에 딸 혜란 낳음. 김남천․안막․권환 등과 소장파로서 카프 주도권 장악. 카프 제1차 검거사건으로 일컬어지는 조선공산주의자협의회 사건으로 3개월간 옥살이를 함.
1932년 25세. 윤기정의 후임으로 카프 서기장으로 취임. 『집단』을 간행했으나 전량 압수당함. 카프 제2차 방향전 환을 주도함. 결핵으로 요양하면서 「조선문학운동의 신단계」,「전후자본주의 제3기의 제문제」등을 집필.
1933년 26세. 평양 고무공장 사건으로 2년간 옥살이를 하고 나온 김남천의 체험적인 창작물 「물」을 두고 ‘물 논 쟁’을 벌임.
1934년 27세.「세월」,「암흑의 정신」등의 시 창작. 「신춘창작재평」,「집단과 개성의 문제」,「언어와 문학」등 평론 집필. 이때에 카프 전주사건(6월 경)으로 카프 맹원 대부분이 검거되었으나, 임화는 전주로 호송 도중 서울역에서 결핵으로 졸도하여 투옥을 면함. 세브란스병원에서 응급치료를 받고 평양의 실비 병원과 서울 탑골 승방 등에서 요양.
1935년 28세. 김기진․김남천 등과 함께 경기도 경찰부 동대문서 고등계에 카프 해산계 제출. 이귀례와 이혼하고 8월부터 마산으로 요양가서 일본 소화(昭和)여학교 출신 이현욱(필명 지하련池河蓮)과 재혼. 시「다시 네거 리에서」,「버러지」를 발표. 평론「조선신문학사론 서설」을 『조선중앙일보』에 발표.
1936년 29세. 「현해탄」,「해협의 로맨티시즘」을 발표. 「기교파와 조선시단」을 발표하여 김기림․박용철 등과 기교주의 논쟁을 이끔. 전주 사건에서 집행유예로 석방된 22명의 카프 조직원에 대한 정신적 보상으로 소설 비평에 실천적으로 참여.
1937년 30세. 「바다의 찬가」를 발표. 영화인 최남주의 도움으로 학예사에 관여.
1938년 31세. 『현해탄』을 동광당 서점에서 발행. 「작가 한설야론」을 씀. 서구 근대소설을 모델로 한 ‘본격소설 론’ 제창.
1939년 32세. 『문장』창간호에 「실제」,「자고 새면」을 발표. 이광수․박영희․이태준․김동환․최재서 등과 함 께 황군작가위문단의 실행위원 중 한 명으로 지명됨. 『조선일보』에 「개설신문학사」를 연재하며 한국근 대문학사를 ‘이식문학사’로 규정.
1940년 33세. 학예사에서 평론집 『문학의 논리』출간. ‘신문학사의 방법론’을 부제로 단 「조선문학연구의 일 과 제」(『문학의 논리』에서「신문학사의 방법」으로 개제)를 『동아일보』에 발표. 부인 이현욱이 백철 추천 으로 「결별」을 『문장』지에 실음.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시민문화의 종언」을 썼음. 고려영화 사 문예부 촉탁으로 재직.
1941년 34세. 「조선신문학사」를 『인물평론』에 발표.
1942년 35세. 「대원군 서평」과 「백조의 문학사적 의의」를 씀. 3월경 조선군사령부 보도부에서 제작한 영화 <너와 나>의 대본을 직접 교정함. 일제가 조선 청년들을 강제 징집 출동시키기 위해 만든 선전영화여서 후 일 친일 행적이 문제가 되기도 함.
1943년 36세. 「소설의 인상」과「신춘 시평」을 씀. 조선영화문화연구소 촉탁으로 있으면서, 「조선영화연감」 및 「조선영화발달사」를 편집.
1945년 38세. 8월15일 광복을 맞이하여 김남천․이태준 등과 조선문학건설본부를 조직하고 서기장이 됨. 이후 조 선문학건설본부와 조선프롤레타리아 문학동맹을 조선문학동맹으로 통합시키는 데 주력.「1945, 또 다시 네거 리에서」라는 부제가 붙은 시「9월 12일」을 씀.
1946년 39세. 2월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 전국문학자대회에서「조선민족문학건설의 기본 과제에 관한 일반 보고」와「조선 소설에 관한 보고」를 발표함. 이어 남로당의 최첨단 외각단체인 박헌영․이강국 노선의 민주주의민족전선의 중앙상임위원으로 기획부 차장을 맡음으로써, 남로당 문화담당 최고이론분자로 등장. 김순남이 곡을 부친 <인민항쟁가>를 짓고 10월 폭동의 선봉으로 섬.
1947년 40세. 시집『찬가』를 백양당에서 출간. 『회상시집』,『노력인민』출간. 김남천과 더불어 11월20일 월북하 여 해주 제1인쇄소에서 근무. 잡지를 편집하여 남로당에 지령. 한국전쟁 직전까지 조소문화협회 중앙위원 부 위원장으로 활동.
1948년 41세. 박헌영이 있는 평양으로 가서 박헌영․이승엽을 지지하는 문학노선 견지.
1950년 43세. 한국전쟁으로 그가 서울에 온 것이 1950년 6월 31일경으로 추측. 낙동강 전선에서 종군. 후퇴하는 북 한군을 따라 자강도까지 쫓겨가 딸 혜랑에게 부치는 시「너 어느 곳에 있느냐」를 씀. 「바람이여 전하라」, 「흰 눈을 붉게 물들인 나의 피 위에」를 씀. 이 작품이 전사들을 모욕하고 염전사상을 고취시켰다는 이유로 숙청의 도화선이 됨.
1951년 44세. 조소문화협회 부위원장 및 조소출판사 사장으로 있으면서 문화전선사에서 전선문고로 시집『너 어느 곳에 있느냐』출간.
1953년 46세. 8월 재판장 김익선, 판사 박룡숙․박경호의 심리로 열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재판소 군사재 판부는 북한 정권 전복음모와 간첩행위 등의 혐의로 임화를 기소하고 형법 제 78조, 제65조 1항에 의해 사 형, 제76조 2항에 의해 사형, 제50조 1항에 의해 제68조의 사형에 처험. 심문과정에서 안경을 깨어 자살을 기도했으나 실패함. 시체는 묻어주는 사람 하나 없이 방치되었다고 알려짐.
❍시집:『현해탄』(동광당 서점 1938),『찬가』(백양당 1947),『회상 시집』(건설출판사 1947),『너 어느 곳에 있느 냐』(문화전선사 1951)
❍저서․논문:『문학의 논리』(학예사 1940),「개설신문학사」(『조선일보』1939),「조선문학연구의 일 과제-신 문학사의 방법론」(『동아일보』1940),「조선신문학사」(『인문평론』1941)
참고자료
1) 최동호,『남북한 현대문학사』(나남출판, 1995)
2) 김윤식,『임화 연구』(문학사상사, 1989)
3) 조영복,『월북예술가 오래 잊혀진 그들』(돌베개, 2002)
4) 유종호,『다시 읽는 한국 시인』(문학동네, 2002)
<출처: 글밭문학기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