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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월 22일 평화목교회 주일예배 설교
홍지훈 목사
마가 1:16-20
변화와 선택
오늘 성경말씀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불러 모으는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서 모두 다 나옵니다. 그런데 요한은 나머지 복음서와 내용이 좀 다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처음 선택을 받은 제자이름이 틀리지요. 그래서 요한을 제외한, 마태, 마가, 누가를 <공관복음서>라고 부릅니다. 영어로 synopsis라는 말인데, 어원은 그리스어입니다. 1776년 독일 신학자인 J.J. Griesbach라는 분이 마태, 마가, 누가 복음의 비슷한 내용을 대조시킨 책을 내면서 이것을 Synopse “함께 보다”(syn + opsis)라고 이름 붙인데서 시작했습니다. 영어 단어에 이런 것들이 많습니다. 그리스어원과 라틴어 어원을 알고, 단어나누기를 할 줄 알면, 어휘가 부쩍 늘어납니다. 그래서 우리말로 공관(共觀)복음서(synoptic gospel)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함께 보는 복음서”라는 의미입니다. 교우 여러분들도 이 설명은 처음 들으셨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서 따르던 열 두 제자의 이름을 다 외우고 계시지요?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빌립, 바돌로매, 도마, 마태, 야고보, 다대오 시몬, 가롯유다입니다. 어렸을 적에 주일학교에서 노래로 만들어서 외우게 시킵니다. 야고보가 두 번 나오는 것도 모르고 무조건 외웁니다. 그런 방식으로 구약성경 목록, 신악성경 목록도 다 노래로 만들어서 외웠습니다. 그때는 성경이 표시가 없어서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순서를 외워야 목사님이 불러주는 성경을 찾을 수 있었고, 그걸 잘 잘 찾으면 교회에 열심인 사람이라는 증거였습니다. 그래서 누가 빨리 성경을 찾는지 겨루는 시합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인터넷에서 원하는 구절도 쉽게 찾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서로 비슷한 성경을 함께 놓고 보는 관점의 변화, 그리고 외워야하던 것을 이제는 검색할 수 있게 바뀌는 변화, 이것이 바로 한 세대를 살면서도 우리가 체험하는 환경의 급속한 변화입니다. 스마트 폰이 등장하고부터는 손에서 컴퓨터가 떨어질 날이 없습니다. 제가 대학생 때 등장한 퍼스널 컴퓨터가 동네에 게임방으로 진화하더니, 닌텐도 게임기를 TV에 연결해서 즐기던 시대로 발전했고, 들고 다니는 포터블 게임기 시대가 가면서, 이제는 스마트폰으로 온갖 게임을 즐깁니다. 어른도 아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한 가지 세상이 빠르게 변화하였다는 증거가 있는데, 바로 이동속도의 변화입니다. 도보, 자전거, 버스, 승용차, 고속철 등등 비행기를 제외하고도 제 나이의 어른들이 경험한 탈 것의 변화가 이렇게 극심합니다. 자기부상열차가 상용화되면 서울광주를 아마 20분 안에 주파하는 시대가 올 것입니다.
컴퓨터가 발달하면서 정보의 처리 속도만 빨라진 것이 아니라, 정보의 양, 즉 지식이 엄청나게 증가하는 변화가 이루어졌습니다. “알파고”라는 단어 한 마디로 우리는 이것을 체감할 수 있지요. 인간의 두뇌와 컴푸터의 정보력 처리속도가 만나 바둑을 매개로 한 대결에서 인간이 한 번만 이기고 모두 패했습니다. 어떤 자료에 의하면 1970년 이후에는 매 5년 마다 지식이 두 배로 증가했는데, 2020년부터는 매 73일 마다 지식이 두 배로 증가한답니다. 73일이 지나면 우리 중에 뭐 좀 안다는 사람도 반밖에 모르는 사람이 된다는 뜻이지요. 그래서 안다는 것도 지식을 가졌다는 뜻이 아니라, 지식을 잘 찾아내다는 뜻으로 바꾸어야 할지 모릅니다. 검색하면 다 나오니까요.
2017년 정유년이 되었습니다. 새해입니다. 변화가 또 시작된 것입니다. 나이가 점점 들어갈수록 변화에 민감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변화를 따라갈 자신도 없어집니다. 그래서 속으로 생각하지요. 좀 안 변했으면 좋겠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젊은이들은 다릅니다. 그들은 변화를 기대하고, 변화에 앞장서고, 변화를 즐깁니다. 어떻게 보면 늙은이와 젊은이의 기준은 나이가 아니라, 변화를 대하는 자세인지 모릅니다.
저는 2000 년 전 예수의 시대 역시 엄청난 변화의 시대였다고 봅니다. 갈릴리의 한 젊은이가 나서서 제자를 모으고 하나님 나라 운동을 시작했다는 것은 변화의 시작이었고, 그가 3년 후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면서 이 운동은 급속도로 확산되었습니다. 그 운동과 변화의 시작이 바로 예수가 제자를 불러 모으는 사건이었습니다.
제자를 부르기 직전에 나오는 말씀이 “요한이 잡힌 뒤에...”라는 말입니다. 예수의 주 활동무대인 갈릴리는 “이방인의 갈릴리”라고 부를 정도로 유대인들에게는 멸시의 땅이었고, 정치적으로도 로마 제국의 하수인 격인 분봉 왕 헤롯 안티파스가 통치하던 지역입니다. 헤롯 안티파스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세례 요한을 옥에 가두고 처형한 인물입니다. 오늘 본문이 요한의 투옥으로 요한 시대를 마감하고, 예수께서 새로운 인물들로 제자를 삼는 내용인데 주후 30년경의 새로운 변화를 예고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과연 예수가 보여준 변화는 어떤 것이었을까요?
일전에 며칠 동안을 쉬면서 매일 아침 마다 뒷산에 올라가 두 시간 동안 등산을 하고 내려와 온종일 집에서 책보며 지낸 적이 있었습니다. 사흘 째 되니까 산에 가면 어제 본 사람이 또 보이기 시작하는데, 그러다 보니 점점 모든 사람이 어제 본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매일 매일이 똑같다는 생각이 드니 지겨워서 견딜 수 가 없었습니다. 하긴 매일 같은 음식만 먹는다면 얼마나 지겨울까요. 학교에서도 필수과목이 있어서 매년 똑같은 수업을 합니다. 내용을 바꾸기도 하지만 거기서 거기입니다. 문득 생각이 났는데, 독일 대학에는 필수과목이란 것이 없습니다. 필수학점만 있지요. 모두가 선택입니다. 큰 범주 안에만 있으면 무엇을 선택하든지 개인의 자유입니다. 교수도 매번 다른 과목을 개설합니다. 그래야 자신도 발전하니까요.
사실 우리의 일상은 매일 매일이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학생으로 학교에 다닐 때는 정말 똑같은 일상에 사로잡혀 살지요. 취업을 준비해도 집과 도서실을 오가는 생활을 반복합니다. 직장에 다닐 때도 몇몇 자유로운 직업을 빼고는 다 마찬가지이고, 이제 은퇴하면 정말 하루 하루가 똑같아집니다.
하지만 같은 일상 속에서 다른 것,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것은 우리의 선택이고 자유입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지루하다고 여기며 그 속에 안주하는 사람은 내일의 희망을 가질 수 없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노래 가운데 <살다보면>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살다보면, 괜시리 외로운 날이 너무도 많아, 나도 한 번 꿈같은 사랑 해봤으면 좋겠네. 살다보면 하루하루 힘든 일이 너무도 많아, 가끔 어디 혼자서 훌쩍 떠났으면 좋겠네. 수많은 근심걱정 멀리 던져 버리고, 언제나 자유롭게 아름답게 그렇게. 내일은 오늘보다 나으리란 꿈으로 살지만, 오늘도 맘껏 행복했으면 그랬으면 좋겠네.”(유기환 작사 권진원 작곡)
갈릴리 해변에서 어부인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를 예수께서 부르신 사건은 바로 변화를 요구하는 사건이었습니다. 힘든 일이지만, 그래도 안정적인 직업이었는데, 변화를 요청하시는 예수를 보고 따라나섰지요. 그 때에 주님이 하신 말씀이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즉, <물고기>에서 <사람>으로 방향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목수가 어부에게 지금 이런 요청을 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엄청난 변화를 담지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 변화요청에 응답한 사람들이 베르로와 안드레,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지혜로운 현인들은 세상을 떠도는 여행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가 나고 자란 지역을 감히 떠나지 못하고 살다 죽을 때에, 연설가들이나 철학자들은 세상을 주유하면서 경험을 쌓고, 수많은 대화 상대들을 만나기 원했습니다. 그러다 보면 주변에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이 생기기도 하였답니다. 예수의 여정은 갈릴리에서 사마리아를 거쳐 예루살렘을 드나드는 그다지 멀지 않은 길이지만, 그가 그 길을 지나면서 뛰어넘은 신분의 벽은 상상 그 이상 이었습니다. 즉, 예수는 새로운 차원의 삶을 제시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 앞에서는 로마의 백부장도 고개를 숙였고, 시리아 페니키아 지역의 이방여인도 감사하는 마음을 얻었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이 회개했고, 불치의 병을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사는 이들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고기를 낚는 어부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바꾸어 준다는 말에는 많은 변화의 가능성이 숨어있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새해가 밝았습니다. 지난해에 져버린 태양이나 새해에 떠오른 태양이나 같은 태양이고 다를 것 없는 하루이지만, 우리 마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특히 우리 젊은이들에게는 그렇습니다. 평화목교회 처음 시작하던 때에 20대 청년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올 해 자녀들이 졸업하고 또 청년들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대학생과 청년들이 조금 더 늘어났습니다. 이를 예견하듯이 <예산위원회>에서도 청년을 위한 예산도 편성해주셨습니다.
우리 교회 청년들과 자녀들에게 특히 제자를 부르시는 예수의 모습은 중요하다고 봅니다. 변화의 시대에 선택을 하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입니다. 제가 올 해는 청년들을 <사랑모둠>에 모았습니다. 일단 숫자로는 13명입니다. 다 모일 수는 없겠지만, 평화목교회의 먼 미래를 내어다 본다면, 지금의 청년 모임이 매우 중요하다고 봅니다. 평화목교회의 정신이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 교회가 지향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다음 세대가 이해하지 못하면 그 교회는 그 세대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새해 들어서 저는 교회학교 학생들도 같이 예배에 참여하게 했고, 앞부분 설교를 교회학교 학생들에게 맞추어 보았습니다. 본래 계획은 교육전도사를 모셔서 성경공부시간에 설교 내용을 성경과 연결시켜 토의하도록 해볼 생각이었습니다. 그것도 선택이기 때문에 교회학교 자녀들이 스스로 결정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몇 명 안 되지만, 그들이 자라면 또 우리 평화목교회의 미래가 되기 때문입니다.
청년들도 예배 후에 함께 식사하면서 크리스천 젊은이들이 어떤 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할지 함께 생각해보는 시간을 구체화 시켜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우들 가운데는 인생의 선배로서 그리고 전문인으로서 후배 청년들에게 좋은 말을 해줄 분들이 많습니다. 신앙이란 단지 성경이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크리스천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기준이기 때문에, 서로 나눌 이야기가 많을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청년들은 성장하는 것입니다. 어른들이 끌어주기만을 기대하지 말고, 스스로 일을 만들어 보십시오. 우리는 옆에서 돕도록 하겠습니다. 요청하면 가서 듣고 싶은 이야기를 해드리겠습니다.
어부는 먹고 살려고 고기를 낚고 있지만, 변화된 어부는 사람의 마음을 주님께로 돌립니다. 자기 마음도 돌리고 친구의 마음도 돌립니다. 그래야 이 세상이 아름다워집니다. 힘든 일이 많은 세상 에서도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저는 사람을 낚는다는 말의 묘미가 느껴집니다. 낚시나 그물로 사람을 낚는 다는 말 속에는, 물 밖으로 끌어낸다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물은 고기에게는 살 곳이지만, 사람에게는 억압이요 감옥입니다. 벗어나지 못할 똑같은 일상의 감옥입니다. 예수의 제자가 되면 변화를 추구하게 되며, 선택해야 할 것을 선택하게 되며, 어떤 상황에서도 행복을 추구하는 정신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초등학생부터 환갑을 넘기신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모두 모여 예배드리지만, 마음만은 모두 청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평화목교회가 설립된 정신을 기억하시고, 그 길을 추구하는 젊은 마음들이 시대의 변화를 읽어내고, 변화에 합당한 선택을 해나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새로 시작하는 2017년을 맞이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