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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정신세계는 중학생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할 수 있어요. 그 세계에선 영화로 표현하고 싶은 게 많지요. 어느 정도 성장이 멈춘 것이 창작에 도움이 된다고 봅니다. 하하."
거장(巨匠)이 히죽 웃었다. 70세를 앞둔 다른 이가 그렇게 말하면 이상했겠지만, 이 사람은 일본 애니메이션의 대부 린 다로(林太郞·68) 감독이다. TV 만화영화 '우주소년 아톰'과 '하록 선장'의 감독이자 '은하철도 999' 극장판을 연출한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
12일까지 서울 코엑스에서 열리는 제2회 대한민국 콘텐츠 페어에 기조연설자로 참석한 그를 개막식이 열린 8일 오전 만났다. "그러니까 제 머릿속이 13~15세라는 뜻인데 제가 중학생 때 아버지가 프랑스·이탈리아 영화를 무척 좋아해서 굉장히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사춘기 아들에게 왜 프랑스 영화 '불량소녀 모니카'나 '정부(情婦) 마농'을 보여주셨는지는 좀 이상하지만." 그가 장난스레 킥킥 웃었다. "아버지는 오래된 유럽영화를 보면 한마디씩 하셨죠. '영화는 빛과 그림자가 중요한 거야' 같은 말이었는데 그땐 무슨 뜻인지 전혀 알 수 없었어요."
린 감독은 최근 한국 포도필름이 기획해 연출을 제안한 3D 애니메이션 '폴, 엄마가 간다(가제)'의 감독을 맡기로 했고 이날 인터뷰에서 그 사실을 공개했다. 이 애니메이션은 미국과 유럽 시장을 겨냥한 판타지 어드벤처물로, 린 감독이 한국과 공동제작 하기는 처음이다.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할 작품을 만들겠다는 결심이 워낙 굳기 때문에 틀림없이 좋은 작품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최근 처음으로 컴퓨터그래픽(CG)으로만 만든 3D 애니메이션 '요나요나 펭귄'을 완성했다. 한국에서는 내년 1월 개봉될 예정이다. "풀(full) CG 애니메이션은 미국 픽사 스튜디오가 세계 톱이죠. '요나요나'는 일본만의 독특한 3D 애니메이션이 될 것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귀여운 영화를 만들고 싶었어요. 너무 귀여워서 화면에서 막 튀어나올 것 같은."
이른바 '재패니메이션(Japanimation)'의 역사를 쓴 이 인물은 세계 애니메이션을 평정하다시피 한 픽사와 드림웍스에 대해 "위기의식을 느낀 적은 한 번도 없다"고 말했다. "일본 2D의 특징은 정(靜)과 동(動)이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픽사의 3D에는 동만 있어요. 일본 3D의 갈 길은 2D의 테이스트(taste·맛)를 살리는 데 있습니다."
그의 애초 꿈은 실사영화 감독이었다. 그러나 그림에 재주가 있었던 그는 어려서부터 '아톰' 원작자인 데츠카 오사무의 만화를 모방했다. 어느 날 일본 영화사 도에이(東映)가 일본 첫 애니메이션 회사(도에이동화·東映動畵)를 설립했고, 그는 "도에이동화에서 일하면 도에이영화사로 갈 수 있겠지" 하며 입사지원 했다. 그의 나이 17세였다. "그때 원고지 10장짜리 편지를 써서 도에이동화에 보냈죠. '나는 이 회사에 입사하려고 태어났다. 입사가 안 되면 살아갈 이유가 없다'고요." 그 억지가 통한 길이 그의 50년 경력을 이끌었다.
애니메이션 세계를 동경하는 젊은이들에게 조언해달라고 하자 그는 "어렵네요"라고 운을 뗐다. "한마디로 애니메이션을 좋아하고, 영화도 똑같이 좋아해야 합니다. 그리고 정열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굉장히 공부를 많이 해야 해요. 회화, 사진, 문학…. 천재에겐 다른 길이 있을지 모르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자신의 꿈을 믿고 열심히 공부하는 길밖에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