五 胡 十 六 國 時 代
後 涼 王 朝 世 家
後涼(후량 AD. 386∽AD. 403 氐族(저족) 위치 甘肅(감숙) 성:呂(여)
代數 | 在位期間 | 位 | 姓名 | 關係 | 首都 | 現地名 |
| AD. 386∽AD. 389 | 酒泉公(주천공) | 呂光(여광) |
| 姑臧(고장) | 甘肅省 武威市 |
| AD. 389∽AD. 396 | 三河王(삼하왕) | 呂光(여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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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숙성 무위시 |
제 1대 | AD. 396∽AD. 399 | 懿武皇帝(의무황제) | 呂光(여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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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대 | AD. 399∽AD. 399 | 隱王(은왕) | 呂紹(여소) | 여광의 장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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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대 | AD. 399∽AD. 401 | 明皇帝(명황제) | 呂纂(여찬) | 여광의 서장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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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대 | AD. 401∽AD. 403 |
| 呂隆(여륭) | 여찬의 사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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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량의 건국자 여광은 저족 출신으로 前秦(전진)의 장군이었다. 383년 여광은 부견의 명을 받아 서역원정 을 떠나 河西(하서)회랑을 진군, 384년 귀현을 정벌하고 서역 대부분을 영양권 아래 두었다. 이때 여광은 西域(서역)에 널리 이름이 알려진 승려 구마라습의 신병을 확보하였다. 이 당시 전진의 부견은 비수대전 에서 패배하고 몰락하여 전진은 혼란에 빠졌는데 교통이 두절되어 여광은 이 소식을 알지 못하였다. 이 에 정벌을 멈추고 귀환하기 시작하였다. 양주에 도착한 여광은 前秦(전진)의 양주자사 梁熙(양희)를 격파 하고 涼州(양주)를 장악하였으며 사실상의 자립정권을 세웠다.
제 1대 의무황제(AD. 338∽AD. 399)
양주를 장악한 여광은 전량 최후의 군주 장천석의 세자인 張大豫(장대예)가 전량을 부흥하고자 고장으로 진격해 왔지만 387년 12월에 장대예를 제압하였다. 386년에 여광은 부견의 죽음을 알고 부견에게 문소 황제의 시호를 준 뒤에 10월에 태안이라는 연호를 정하고 주천공이라 일컬었다. 이후 396년에는 국호를 大涼(대량)으로 하고 天王(천왕)에 즉위하였다. 397년 여광은 서진을 공격하여 金城(금성)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독발부의 禿髮烏孤(독발오고)가 거병하여 금성을 점령하였고, 뒤이어 段業(단업). 沮渠夢遜(저거몽 손) 등이 반란을 일으켜 하서회량 서쪽을 장악하였으며, 수도 고장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다.
이 반란으로 독발오고는 南涼(남량)을 건국하였고, 단업은 北涼(북량)을 건국하여 양주는 분열되었다.
399년 여광은 병으로 태자 여소에게 禪位(선위)한 후에 곧 사망하였다.
제 2대 은왕(AD. ?∽399)
여광의 장자로 여광이 죽자 황제에 즉위했으나 병권이 여찬이 쥐고 있었다. 얼마 후 이복형인 여찬이 반 란을 일으키고 궁을 점령하자 여소는 자살했다.
제 3대 명항제(AD. ?∽AD. 401)
여광의 서장자이며, 천왕이 되었다. 그는 남량과 북량사이에서 세력확대를 위해 400년에는 남량을 공격 하였지만 패퇴하였다. 또 6월에는 북량을 공격했지만 남량에게 고장을 공격당하는 등 세력확대는 실패하 였고 국력은 더욱 한층 약화되었다. 여찬은 동족의 권력쟁탈 속에서 401년 여광의 동생 呂寶(여보)의 아 들인 呂超(여초)와 呂隆(여륭)에게 살해되고 여륭이 천왕에 즉위하였다.
제 4대 여륭(AD. ?∽AD. 416)
여광의 동생 呂寶(여보)의 아들로 여찬과는 사촌이며. 여찬을 살해하고 천왕에 즉위하였다. 여륭의 치세 에도 후량은 계속 쇠퇴하여 남량과 북량의 침입을 받았으며 또한 후진의 침입으로 후진에 복속하여 건강 공에 책봉되었다. 후진의 군대가 물러가자 다시 남량과 북량의 침입으로 여광은 403년 후진에 항복하자 후진은 여광을 장안으로 데려오면서 후진은 멸망한다. 그 후 여륭은 416년 모반에 연루되어 처형당했다.
사료 출처
司馬光(사마광)의 資治通鑑(자치통감)과 三崎良章(삼기양장)의 五胡十六國(오호십육국) 그리고 인터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