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어라, 그러면 들릴 것이다
곽노순 목사의 특별한 채널링 이야기
정리│유영일 (2000 년 7 월호)
출처: 정신세계원
인구 증가와 환경 오염, 자연 재해로 태양계의 세 번째 푸른 별은 어둠의 혼돈장이 날로 짙어져 가건만
한편에서는 황금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낯선 손님들의 목소리’도 차츰 제 자리를 찾아가고 있다. ‘우주인이나 다른 차원의
존재들과의 대화’라 할 수 있는 채널링 현상이 갈수록 보편화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왜 하필 지금 이 시대에 나타났으며 인류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개구리 울음 소리를 배경으로, 들판 한가운데에 위치한 한적한 곳에서 곽노순 목사를 정점으로 하는 정신세계 소모임이 열렸다. 이날 모임은, ‘채널링’과 그 메시지의 내용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채널링, 차원을 넘어서는 대화
왜 요즈음 들어 지구촌 주민들은 ‘채널링’이란 말에 귀를 곤두세우게 되었을까요? 무엇이 닫혀 있었고, 무엇이 열린 것일까요? 접속된 채널의 건너편에서 보내온 소식들이 속속 책으로 엮어져 나오고 있으니,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 원저자가 되는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던 일이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채널링이란 말하지 않고도 서로 통한다는 점에서는 텔레파시와 흡사하고, 보이지 않는 존재와 대화를 나눈다는 점에서는 무당을 연상시킵니다. 텔레비전이 나오기 전까지는 ‘채널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지요. 보이지 않는 초자연적인 존재와의 만남을 ‘현몽’이나 ‘계시’라고 했지, ‘채널링’이라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3차원의 거리를 뛰어넘어 서로 통하는 것을 ‘원거리 통신’(텔레커뮤니케이션)이라고 한다면, 공간뿐만 아니라 시간과 차원까지도 초월하여 서로 통하는 것을 ‘채널링’이라 할 것입니다. 과거에 통하면 윤회 전생에 밝아질 것이고, 미래에 통하면 ‘예언’이 될 것입니다.
팩스의 입출력 과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종이가 가는 것도 아니고 잉크가 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이쪽에서 보내는 서류 내용을 저쪽에서 한 줄도 틀리지 않게 받아볼 수 있으니 신기하지 않습니까? 별별 기능을 가진 기계가 하도 많아서 현대인은 놀랄 수 있는 기능을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만, 생전 처음 본 듯한 낯설음을 간직하는 것은 삶을 늘 풍요롭게 해주지요.
팩스뿐만이 아닙니다. 오늘날의 문명은 채널링이라는 게 무엇인가를 설명하기에 적합한 갖가지 전자제품이 홍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텔레비전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듯이, 외계인이나 다른 차원의 존재들에게 주파수를 맞추는 일이라고 할까요. 하지만 채널링에 들어간 당사자의 의식이 사라지고 없으니, 채널링은 외계인들이나 다른 차원의 존재들에게 뇌를 송두리째 빌려주는 일입니다. 메시지를 보내는 쪽의 입장에서 보면, ‘네 뇌로 들어가서 네 사전 좀 빌려 쓰자’고 하는 셈이지요.
그들은 지금 이 시대의 우리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 찾아온 것일까요? 왜 하필이면 지금 이 시대이며, 그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의 큰 줄거리는 무엇일까요?
사실 그들의 이야기 내용이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석가에게서, 노자에게서, 공자에게서, 예수에게서 다 배울 수 있는 것들이고, 그들이 지금 이 시대에 살아 있다면 했을 법한 진리의 말들입니다. 가깝게는 라즈니쉬나 크리슈나무리티가 했던 이야기들에 비교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채널러의 목소리가 달라지는 등 방법상의 새로움이 있고, 표현상의 신선함이 있습니다. 우리가 생을 거듭하며 지냈던 과거에 대한 정보나 다가올 ‘빛의 시대’에 대한 정보를, 갖가지 전자제품에 익숙한 오늘 이 시대에 걸맞게, 캡슐 형태의 알약처럼 일목요연하게 전해 준다는 만만치 않은 장점이 있습니다. 라즈니쉬가 세상을 뜬 21세기의 우리에게는 정말 해볼 만한 지적인 도전으로서, 우리 인류에게 주어진 신선한 화두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요?
지구는 특수 학교
태양계가 처음 만들어지고, 지구에 인류가 창조되었을 당시에는, 모든 것이 너무 잘 돌아가서 무료하고 권태로울 지경이었습니다. 모두가 신선으로서 천 살이 넘는 장수를 누렸고, 수명이 끝나도 생명이 영원하다는 것을 알았으니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모두가 근심 걱정 없이 편안하게 너무도 잘 지냈습니다. 당시에 신문이 나왔다면, 온통 백지뿐이었을 겁니다. 창조주의 입장에서 보면 기막힐 노릇이 아닐 수 없었지요. 백지나 생산하려고 창조를 하는 것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이를 보고 우주의 여러 신들이 태양계를 만든 신에게 힌트를 주었습니다. “수명을 제한해라!” “고통을 경험하게 하라!”는 등의 조건이 붙은 것은 그 때문이었고, 이 작전은 뜻밖에도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무료하기 짝이 없는 우주에서 희한한 서커스가 공연될 예정이라고 하니, 여기저기에서 지원자가 쏟아졌습니다. 나는 조명을 담당하겠다, 나는 스턴트맨을 하겠다, 나는 조연출을 맡겠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몸을 써서 위험한 연기를 해보이겠다고 스턴트맨을 자원한 것이 우리 지구인인 셈입니다.
사람을 지구에 내려보낼 때에는 모두 망각 주사를 맞게 하고 계약서에 도장을 찍게 해서, 본래의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까맣게 잊어먹게 만들었습니다. 수명이 제한되니 아득바득 살려고 애쓰게 되었고, 고통이 있으니 근원을 향해 질문을 퍼붓게 되었지요. 인간을 3차원의 현실에 묶어두는 이런 제한들은 삶에 엄청난 탄력성을 불어넣었고, 창조의 본질인 진화 과정에서 점프하는 현상도 생겨났습니다. 그 모두가 인간을 수명에, 고통에 묶어둔 덕분이었고, 이런 현상은 우주에서 처음 있는 진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지구라는 ‘학교’가 대성공을 거둔 것입니다.
그러니 의심과 두려움의 노예가 되어, 육체를 질질 끌고 가며 중력을 힘겨워하는 사람이야말로, ‘지구 학교’의 설립 취지에 걸맞은 인간형이라 할 것입니다. 원래 그렇게 의심과 두려움을 갈고 닦아 보석으로 만들기로 계약서에 사인하고 이 지상으로 내려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학교가 대성황을 이룬 것은 좋은데, 너무 대성공을 거두는 바람에 지구 자체가 ‘내가 죽겠다’고 비명을 지르는 상황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그로써 마야의 달력이 가리켜 보이고, 우주적 존재들이 입을 모아 말하듯이, 2012년이 되면 지구는 학교로서의 구실에 종지부를 찍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의 상황입니다. 이는 창조 자체의 대주기인 26,000년의 끝 부분이자 새로운 주기의 첫부분이며, 2,160년마다 하늘의 창문이 한 번씩 열리는 바로 그 시기이기도 합니다. 외계의 형들이 지구인 동생들을 찾아와 충고를 하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입니다.
지구 자체가 3차원 학교에서 벗어나 4차원을 거쳐 5차원으로 진입하게 됨에 따라, 인간 또한 차원 상승을 앞두고 있다는 것이고, 거기에 걸맞은 옷으로 갈아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중학교 입학을 앞둔 초등학교 졸업생에게는 진학 지도가 집중적으로 필요한 것과 흡사합니다.
“자기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데도
누군가가 가르치려 든다면 그땐 의연히 거절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누군가의 말을 거울삼아
나를 비추어 보고, 나 자신이 투명해질 때까지
일보일보 나아갈 수 있다면,
훌륭한 촉매제가 될 수 있습니다.”
촉매제로서의 채널링 메시지
60년대에 제인 로버츠라는 주부에게서 그 시초를 찾아볼 수 있는 채널링은, 오늘에 와서는 홍수 사태를 맞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세스 스피크스(Seth Speaks)’라는 시리즈로 일대 선풍을 일으킨 제인 로버츠는, 그 뒤를 잇는 숱한 채널러들에게 영적인 밑반찬을 제공한 공을 세웠습니다. 차원 사이의 벽을 뚫고 대화의 통로를 처음으로 연 셈이니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세스의 메시지 중에는 ‘너희는 아직 모르겠지만’이라는 대사가 지겨울 정도로 등장합니다. 3차원의 현실에 갇힌 우리에게는 그렇게도 뛰어넘어야 할 벽이 두터운 것일까요?
그럼에도 ‘세스’는 선구자로서의 신선함이 더 큰 것이 사실이지만, 요즘 들어서는 워낙 많은 채널러들이 등장하고 있어 독자의 분별력이 요구될 정도입니다. 양치기였던 아모스가 시장에 나가서 하늘의 목소리를 외쳤던 것처럼, 전혀 다른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에게 어느 날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가 들리기 시작했다고 하면 차라리 진정성을 의심받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신학교 근처에도 간 적이 없는 아모스는 하늘에서 받은 소식을 목청 높여 외치다가 할 소리 다하고는 다시 양치기로 돌아갔습니다. 하늘은 그런 사람을 써서 세상에 충격을 주었던 것입니다.
물론 우주에 이런 상황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상황만이 진정성을 뒷받침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접촉한 것인 양하지만, 알고 보니 이 분야의 책들을 마르고 닳도록 읽었던 전력이 드러난다면, 그것은 통역관 하다가 강사 노릇 하는 것이요, 전자석이 영구자석 흉내내는 식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활주로를 자꾸 지나다니다 보니 나도 모르게 뜨더라고 아예 드러내놓고 말한다면 괜찮지만, 어느 날 갑자기 펜이 움직여서 저절로 글씨가 씌어졌다거나 목소리가 들려왔다고 시침을 떼면서, 늘상 읽고 들어온 것을 되풀이한다면 거기에는 새롭고 신선한 자극이 있을 리 없고, 독자를 속이는 ‘채널 비즈니스’에 지나지 않습니다.
과연 우리 인류의 성장을 위한 메시지인가도 한 번쯤은 의심해 보고 살펴보아야 지구인다운 태도입니다. 초등학교 2학년생에게 5학년 형이 와서는 구구법이나 소수를 가르치면서 스스로 숙제를 할 수 있도록 힌트를 준다면 동생으로서는 그런 형이 고맙고 감사할 것입니다. 하지만 방정식이나 미적분을 가르치려 든다면 어린 동생은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형은 저리 가라!”고 외치겠지요.
이와 마찬가지로 숙제가 있는데도 하려고 하지 않을 때, 이를 대신해 주는 것이 아니라 일깨워 주기만 하고 촉매가 되어줌으로써 “아하!”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오도록 해야, 형의 구실을 훌륭하게 해낸 것입니다. 숙제를 대신 해준다면 형 자신의 지적 만족을 충족시키는 데에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우주 법칙에는 어긋나는 것입니다. 손을 맞비벼 불을 일으키는 원시인에게 원자력이 어쩌구 하면서 떠든다면 어찌 될까요? 원시인에게는 성냥이라는 게 있다, 라이터라는 것도 있다는 식으로 한 걸음쯤만 앞서 이야기해 준다면 자극이 되고 격려가 될 것입니다.
혼자 가라! 열어둔 채로…
진리를 깨친 석가는 며칠 동안이나 입을 다문 채 크나큰 희열에 잠겨 있었습니다. 입만 뻥긋 해도 진리에서 천 리나 멀어진다는 것을 번연히 알고 있는 그가, 무엇 때문에 번거롭게 입을 여는 수고를 감당하려 했겠습니까? 이를 하늘에서 지켜보던 신들이 다가와서, “당신 같은 이가 중생을 구제하지 않으면 우주의 낭비”라고 하자, 그는 대꾸했습니다.
“알 만한 놈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오.”
그도 그럴 법하지 않습니까? 말이 막혀 버린 신들은 자기들끼리 회의를 하고는 이렇게 권유했습니다.
“그렇다면 좋소. 하지만 조금만 자극하면 크게 깨우칠 이들도 있지 않겠소? 제발 그들만은 모르는 척하지 말아 주구려.”
이렇게 하여 석가가 입을 열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기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데도 누군가가 가르치려 든다면 그땐 의연하게 거절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누군가의 말을 거울 삼아 나를 비추어 보고, 나 자신이 투명해질 때까지 일보일보 나아갈 수 있다면, 훌륭한 촉매제가 될 수 있습니다.
여섯 살짜리 소녀가 고사리 손을 모으고 뭐라고 중얼중얼하고 있자 엄마가 물었습니다.
“얘, 너 뭐하니?”
“응, 하나님한테 기도하고 있어. 인형을 좀 고쳐 달라고. 팔이 부러졌거든.”
한참 후, 소녀는 다시 고장난 인형을 만지작대며 놀고 있었습니다. 엄마가 다시 물었지요.
“하나님이 뭐라든?”
“응, 안 고쳐 준대.”
이런 순박함이 진짜가 아닐까요? 모든 것을 일일이 창조주의 손을 빌어 해결할 수 있다면, 무엇 때문에 굳이 창조라는 걸 했겠습니까?
이런 소녀와 같이 순박하고 어리숙한 말이면서도, 두 눈 크게 뜨고 보면 몇 개씩 반짝이는 다이아몬드가 섞여 있는 말들, 나에게 다가와 존재의 화학 변화를 일으켜서 하룻밤 자고 나면 더 환해졌다는 느낌이 드는 메시지들이 우리에겐 소중합니다.
국내에도 번역 소개된 에사사니 별의 바샤르라는 존재는 95년 이후엔 지구를 떠났습니다. 지구인에게 할 말을 다했으니, 더 이상 나타날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채널러인 다릴 앙카 또한, 애독자도 많아지고 유명해졌지만, 더 이상 바샤르를 불러내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이렇듯 인간이나 우주인이나 사라질 때는 사라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귀신과 우주를 논하는 세상
그러면 우리에게는 채널링의 전통이 전혀 없었던 것일까요? 메시지를 보내는 화자(話者)를 외계인이나 다른 차원의 존재들이라고 했지만, 우리 식으로 굳이 표현하자면 그들 모두를 한마디로 ‘귀신’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체중계에 올라가도 바늘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귀신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예전에는 귀신을 자기 삶의 주변에서 쫓아내야 할 대상으로 삼았지만, 이젠 귀신과 더불어 생명과 우주에 대해 논하는 세상이 된 것입니다.
예전에 어느 개척 교회 목사님이 밤마다 귀신이 교회에서 피아노를 친다고 하소연을 한 적이 있습니다. 컴컴한 벽에서 다리가 나와서 사람의 혼을 빼갈 정도로 놀라곤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에게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귀신에게 부탁을 하시오. 밤중에 피아노를 칠 것이 아니라 일요일 아침 예배 시간에 반주를 해달라고 말입니다.”
귀신을 무서워한다면 그것이 바로 귀신의 바라는 바일 테니, 두려워하면 할수록 귀신은 더욱 더 재미가 붙어서 떠나지 않을 것이 뻔한 이치입니다. 그러나 단백질 속에 있는 혼이나 그렇지 않은 혼이나 다 같은 혼이 아니냐, 그러니 귀신도 목회의 대상으로 삼으라는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귀신을 쫓아낸다는 말에는 어폐가 있지만, 귀신을 상대하는 방법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유물론적인 자세로서, 귀신의 존재를 아예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한사코 “넌 없다!”는 자세를 보이면, 말싸움을 하다 지친 귀신은 결국 자기 존재를 인정받을 수 있는 곳으로 가지 않을까요? 둘째는 사랑과 연민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고, 셋째는 요즘의 채널링처럼 같이 웃고 대화하는 것입니다.
어느 마을에 새로 이사를 간 투시 능력 보유자가 해질녘에 뒷산에 오르다가 층층다리에 예쁜 소녀가 앉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쁜 소녀 귀신이었지요. 이 사람은 소녀와 한참이나 이야기를 나누며 놀다가 소녀에게 당부했습니다.
“너 여기서 아주 오래 살았구나. 나와 노는 건 괜찮아. 하지만 다른 사람이 있을 때는 그 사람이 놀랄 테니, 그땐 자리를 좀 피해 줄래?”
참 아름다운 자세가 아닙니까? 새들이나 동물과도 대화를 나누었던 아시스의 프란체스코처럼, 광물이나 식물, 동물, 사람, 귀신을 모두 친구로 대하는 자세야말로 성숙된 인간의 양태라 할 것입니다.
악마는 우리 자신의 그림자
귀신의 입장이 되어 한 번쯤은 생각해 볼 필요도 있습니다. 그건 마치 아래층에서만 살다가 위층에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심경과 비슷하지 않을까요? 위에서 보니까 사람들의 모습이 무슨 개미 새끼들이 걸어 다니는 것 같단 말입니다. 모두가 3차원의 공간에 갇혀 있는데, 그 모든 공간이 뻥 뚫려 보인다면 또 어떻겠습니까? 벽이나 문것이 전혀 장애물이 되지 못한다면 또 어떻겠습니까? 벽도 투과하고 사람 속도 통과한다면 재미나지 않을까요? 그래서 ‘사랑과 영혼’이나 ‘외야의 천사들’이나 ‘조 블랙의 사랑’처럼 쉽사리 이 지상을 떠나려 하지 않는 것일 테지요.
귀신이 아무에게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접속이 되어야 합니다. 접속이 되려면 진동주파수가 같거나 비슷해야 합니다. 누군가를 증오하는 사람을 향해 그 사람을 죽여 버리는 기막힌 방법이 있다고 꼬드긴다면, “뭐? 그런 방법이 있다구?” 하면서 당장 귀신한테 동조해 올 것이 뻔하지 않겠습니까? 백 평짜리 땅을 욕심내는 사람을 향해 천 평을 말아먹을 방법이 있다고 그 욕심을 증폭해서 보여준다면, 당장 딸려올 것이 뻔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들도 다 보셨을 것입니다. 하는 일마다 점을 치고 복을 빌면서 나날이 성장해 갔던 어느 재벌은 하루 아침에 망하고 말았습니다. 육체를 떠난 지 얼마 안 된 귀신은 지상에서의 사랑과 증오에 휘말려 있어 당장 어떻게 하려고만 하지, 멀리 내다보질 못합니다. 하지만 몇백 년 씩 묵은 귀신들은 지혜가 있어서 당장엔 복을 주는 척하지만, 어느 재벌의 경우처럼, 결국엔 멸망으로 이끌고 갑니다. 하지만 귀신한테 책임을 물어야 할까요? 귀신에게는 책임이 없습니다. 귀신은, 욕심과 두려움을 열어놓고 있는 사람에게 들어간 것뿐입니다.
최근에 나온 채널링 서적 중에는 놀랍게도 루시퍼가 등장합니다. 플레이아데스인과 교신을 하는 중에 일어난 일인데, 그럼 직접 루시퍼의 이야기를 들어 보라며 루시퍼에게 마이크를 넘겨줍니다. 루시퍼는, 자신은 단지 어두운 측면일 뿐이지만, 밝은 측면 역시 자신이 없이는 나타날 수 없다고 말문을 엽니다.
“과연 지구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인류는 과연 살아남아서 우주인들이 말하는
4차원의 좋은 세상을 맞을 수 있을 것인가?”
4차원의 존재들, 아눈나키
어느 날 지구상에서 갖가지 흥미로운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창조주처럼 창조를 하기 위해서는 동물이나 광물, 나무 등등 갖가지 사물이 창조되고 있는 지구로 내려가서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를 알아봐야 하겠다고 결심하고는 이 지구로 오게 되었다, 하지만 3차원의 이곳에 내려온 이후로는 내가 내려온 차원을 볼 수 있는 능력을 읽어버렸다, 내가 지구에서 그처럼 악명을 떨치게 된 것은 아눈나키가 여러분을 속여 여러분을 꼭두각시로 만들고 있는 존재가 바로 나라고 생각하도록 조작해 왔기 때문이다, 이제는 정말이지 그물에 갇혀 펄떡이는 물고기 신세에서 벗어나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서 아눈나키에게 마이크를 넘겨줍니다.
아눈나키는 20만 년 전에 아프리카에서 자신이 직접 인간을 창조했다면서, 지금 이 모양 이 꼴이 된 것도 다 자기 책임이라고 말합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그대들은 3차원에 존재하는 우리의 연료 보급 기지야. 너희들이 소젖을 짜먹는 것처럼, 우리도 그대들의 감정 에너지를 먹고 산다고 생각하면 돼. 그대들이 존재하지 않게 되면 우리로서는 연료 보급 기지가 없어지는 셈이지. 우리가 그대들에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불어넣은 것은 바로 그 때문이야. 어떻게든지 살려고 발버둥칠수록 우리에겐 먹을 것이 더 풍부해지니까. 하지만 우리는 그대들이 이렇게까지 자멸의 경향이 있는 줄은 몰랐어. 그대들을 겁에 질리게만 만들면 우리 마음대로 좌지우지하게 할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을 아주 오래 전에 알아채긴 했었지. 그게 얼마나 쉬운 일인지를 알고는 우리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30년 전에, 우리는 그대들에게 심장 발작을 예방하려면 버터 대신 마가린을 먹으라고 했어. 그대들은 열심히들 마가린을 먹더군. 하지만 심장 발작은 급속도로 증가했어. 최근에 우리는 다시 버터가 마가린보다 낫다고 말해 주었어. 또 10년 전에는 지방을 많이 섭취하면 체중이 불어난다고 말해 주었지. 그랬더니 온갖 식품에 지방이 얼마나 들어 있는지, 그 함량을 참으로 착실하게들 표기하더군. 하지만 결과가 어땠지? 지난 10년간 미국인들의 평균 체중은 5 kg이 불어났어. 그대들이 신경을 쓴 것은 음식 속에 들어 있는 지방의 함량뿐이었어. 하지만 진실을 말해 줄까? 암세포들은 지방 세포들 속에서 변환되는데, 지방질 결핍으로 인해 그대들의 자연적인 연소 메커니즘이 파괴되어 버린 거야. 그래서 암 환자가 그토록 늘어나게 된 거야. 그대들은 죽음이 너무나도 두려운 나머지 목숨을 한 달만이라도 연장할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 다 하려고 들지. 진실을 말하자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멈추지 않는 한, 그대들에게는 가망이 없어. 그리고 그대들에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불어넣어 준 것은 바로 우리야. 하지만 우린 너무나도 큰 성공을 거두었어. 너무 큰 성공을 거두는 바람에, 은하 사회에서 야단맞게 생겼어. 우린 너희 행성이 날아가길 원하지 않아. 그대들의 행성이 죽으면 우리 아눈나키 역시 죽어야 하니까 말이야.”
아눈나키든 사탄이든, 자기들 스스로는 나쁜 짓을 한 적이 없다는 이 소식은, 우리 자신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만듭니다. 죽이고 싶도록 미운 사람에게 다가가 토막 살인을 하는 광경을 보여주는 식으로 메뉴판만 제공했다는 것이 그들의 변명이고 보면, 그들의 역할이라는 것이 가능성의 증폭 작용이나 촉매 작용일 뿐, 그 모두가 우리 내면의 반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들의 기능이 악동 역할일 뿐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자신들은 계속 속이고 싶고, 유혹하고 싶고, 떠보고 싶다, 그것이 자신들의 속성이다, 하지만 이젠 그 짓도 지쳤다, 제발 60억이 모두 득도를 해서 고향 좀 가게 해 달라……. 그들의 아우성은, 21세기의 지금이 아니면 좀처럼 듣기 어려운 것이고, 도전해 볼 만한 지적인 체스 게임이 아닌가 싶습니다.
잠자고 있는 내 안의 정보를 일깨워야
그러면 과연 지구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인류는 과연 살아남아서 우주인들이 말하는 4차원의 좋은 세상을 맞을 수 있을 것인가? 이런 데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기차 안에서 기차가 움직이는 걸 증명할 길은 없습니다. 그것이 정직한 대답이고, 외계 존재들의 발언에 귀 기울일 필요성이 있다면 바로 그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기차 안에서도 증명할 길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의 60억 인구가 2010년이 되면 80억이 우글댈 텐데, 상상만 해도 계시 비슷한 것이 올 수 있습니다.
14년 동안 외국에 있다가 돌아와 보니, 서울이 얼마나 만원인지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지하철을 타 보니 숨이 막힐 것 같더군요. 하늘도 보이지 않는 철 상자에 갇혀 아무런 표정도 없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저절로 종말론적인 분위기가 떠올랐습니다. 이보다 몇 배나 더할 때를 상상해 보아야 합니다. 메뚜기도 너무 번식하면 강에 들어가서 집단 자살을 하고, 쥐들도 숫자가 너무 많아지면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함으로써 종족도 보존하고, 자연계의 평형을 유지합니다. 하지만 인류는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전쟁이라는 것이 해법이 될 수 있을 법도 하지만, 지금의 입장에서 보면 전쟁이란 코미디에 지나지 않습니다. 전쟁은 더 이상 해법이 될 수 없습니다. 인류의 의식이 그 정도는 성숙되었다고 봅니다. 그러니 모두 멸망하느냐, 모두 사느냐의 길이 있을 뿐입니다.
우주 나름대로의 해법이 왜 없겠습니까? 채널링 정보를 잘 살펴보면 어찌 될 것인가에 대한 밑그림도 대강은 그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지금 여기 나 자신의 삶 속으로 돌려놓지 않으면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월화수목금토 지지고 볶고 잘 사는 것이 우리의 숙제인 것이지, 여행사에 전화를 걸어 장차 갈 곳에 대한 정보만 잔뜩 가지고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갈 때가 되면 그저 가면 되는 것이고, 그것이 더 재미날 수 있는데도, 굳이 정보를 이것저것 알아내서 시간표를 짜는 데에 많은 시간을 들이고, 또 그렇게 시간표를 짜는 과정에서 부부 싸움이 일어나서 여행 자체를 포기하는 경우도 드물지만은 않습니다. 지도만 들여다보고 안 떠나는 사람도 많고, 정보 수집에만 열을 올리는 이도 적지 않습니다.
채널링 정보가 정말로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노자, 석가, 예수, 공자도 다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로서는 말해선 안 될 것들이기에 입을 다물었던 것뿐이고, 지금은 졸업이 가까워져서 외계의 존재들이 알려주고 있는 것뿐입니다.
진리는 정보가 아닙니다. 정보는 우리 안에 이미 다 있습니다. 잠자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우리 스스로 깨우는 것이 일차적으로 중요합니다. 채널링 정보가 유익하다면, 그것은 우리 스스로를 깨우는 촉매제로서뿐입니다.
따지고 보면 누구나 다 채널링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더 높은 자아나 수호령을 우리는 매일같이 꿈 속에서도 만나고, 눈 뜨고도 만나고 있습니다. 아인슈타인 혼자서 상대성 이론을 발견해 낸 것일까요? 순전히 아인슈타인의 에고 혼자서 해낸 것일까요? 벨의 에고가, 누구에게 아무런 힌트를 받음이 없이 전화기를 만들어 냈을까요? 아무런 이름도 없이, 인류를 위해 아이디어를 제공해 주었던 수많은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도 여러분은 보이지 않는 그 존재들과 협력하여 일하고 있습니다.
저 자신의 경우만 해도 그렇습니다. 초등학교 때 저는 늘 국어가 고민이었습니다. 국어라고 하면 이가 갈린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언젠가부터는 글쓰기가 생업이 되다시피했습니다. 무엇을 쓸까, 고민하다가도 소파에만 누우면 글쓸 거리들이 줄줄이 떠오릅니다. 저에게 아이디어를 준 존재는 이름도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곽노순’이가 썼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진실을 말하자면, 순전히 제가 쓴 글은 한 자도 없습니다. 거의 모두가 채널을 통해서 저에게 온 것입니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더 적극적으로 문을 열어놓는 일뿐입니다. 스스로 만들어 놓은 내 안의 장애물을 치우는 일뿐입니다.
황금시대의 가치관을 위하여
과학의 발달은 실로 눈이 부실 정도입니다. 구름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닌 까마득한 높이에서, 신선들이 사는 곳에서도 수백 수천 리 떨어진 높은 곳에서, 우주선을 수리한다며 탯줄 같은 것을 달고 우주 공간을 헤엄치는 광경을 보고도 현대인들은 놀라지 않습니다. 과학 문명은 여러분의 이미지보다도, 이슈보다도 앞서가고 있습니다. 이건 가속 정도가 아닙니다. 상상도 쫓아가지 못할 정도입니다.
미래의 과학 기술은 탐욕에 기초한 기술이 아닙니다. 영성에 기초한 것입니다. 오염이 없을 것이고, 배터리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고, 빈부가 없을 것입니다. 마음을 써서 생각으로써 창조하는 타오테크(道術)의 시대가 오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영성이 깨어나지 않으면 이 모든 것은 악마의 장난에 놀아나는 결과가 되어 버릴 것입니다.
갈증이 나서 물을 생각하기만 해도, 수도를 부러 틀 필요도 없이, 저절로 목이 축축해지는 그런 시대가 온다고 합시다. 하지만 “모두가 다 그런 축복을 누릴 수 있다면 무슨 가치가 있어? 앞집 새끼는 안 되고 나만 된다면 몰라도, 모두 다 누릴 수 있는 것이 무슨 소용이람?”하고 불평한다면, 어찌 될까요? 그러나 이것이 작금의 지구적인 가치관입니다. 아무런 동력도 없이, 배터리도 없이 움직이는 자동차가 나온다고 해도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이 얼굴을 찌푸리게 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석유 회사 사장들이 극구 그런 신기술을 막으려 들 것입니다. 이런 지구형 가치관으로는 유토피아를 누릴 수 있는 자격이 없습니다. 우주적 가치관을 누릴 수 있는 질적 향상이 먼저 이루어져야 합니다.
지구는 분명 특수 학교였습니다. 별별 것들을 다 실험해 보는 장소였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작은아들처럼 지구에 와서 온갖 실험을 다 해보았습니다. 하지만 이젠 돌아가야 할 때가 왔습니다. 아버지도 다시 만나고, 무료하고 심심한 형님도 다시 만날 때가 왔습니다. 변화가 코앞에 닥쳐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속해 있었던 우주의 드라마입니다.
어린 시절, 골목으로 나가 누군가를 향해 함께 놀자고 목청높여 외쳤는데, 아무도 없었던 때가 생각납니다. 햇빛은 반 고흐의 그림처럼 내려쪼이고, 파란 하늘에 흰 구름이 둥실 떠가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문득 그 모두가 더없이 만족스러웠고, 보태고 뺄 것 없는 궁극의 행복이 밀려들어 왔습니다. 만물이 죽은 듯이 고요한 이런 순간이 감미롭지 않습니까? 영혼은 그런 순간을 넉넉히 즐길 수 있습니다. 그런 고요함에 익숙한 사람만이 영원히 살 수 있는 양태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두려움이 많은 우리 지구형 인간들을 위해 예수는 이 땅에 왔습니다. 예수는 세상에 빛이 되라고 해도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냐고 되묻는 이들이 절대 다수인 지구를 위해 태어난 성인입니다. 석가나 노자에 비하면 사랑과 연민의 폭이 그만큼 넓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라고, 생각으로써 창조하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노자에게 이런 교훈을 들이댄다면, 뭐라고 할까요? “두드리면 뭐하냐? 햇살이 저리 좋은데, 강에 가서 낚시나 하지.”라고 하지 않을까요? 석가는 또 뭐라고 할까요? “아무리 두드려 봐도 역시 꿈이야.”라고 하지 않을까요?
동일한 진리를 품고 있는 성인이라도 이렇듯 살아가는 양태는 달랐습니다. 여러분은 어떠한 자세를 취하겠습니까? 강 건너에 기막힌 동네가 있다는데, 여러분은 가 보지 않겠습니까? 노자라면, 아마도 움직이지 않을 것입니다. 여전히 햇살과 바람을 즐기며 낚시나 할 것입니다.
어찌되었든 이제 우리 앞에는 크나큰 선택을 해야 할 갈림길이 놓여 있습니다. 우주 사회에 걸맞도록 우리 자신을 다시 발견해야 할 때입니다. 우주 형제들의 방문이 잦은 것은 우리에게 오메가 포인트가 다가왔다는 신호입니다. 우리도 이젠 문을 열고, 지구 바깥으로 은하로 나아가야 한다는 신호가 여기저기에서 울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어떻게 준비하시겠습니까?
첫댓글 지구인들 대부분이 외계에 고향을 두고 있기때문에 외계인들이 지구에 관심을 가지는 건 당연한 것이고....2012년에 대한 정보들은 오랫동안 지켜보아온 외계존재들의 바램-지구인들이 영적으로 깨어나길 바라는-이 투영된 것이라고 봅니다.그러나 다만그런 일들은 일어날 수도 있다고요.그들의 기대?가 더크다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