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3일이 왜 국경일인지 물어보면 대부분 "단군이 나라를 세운 날"이라고 답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그 답 뒤에 붙어야 할 이야기들 -누가, 언제, 왜, 어떤 싸움을 거쳐서 그 날을 국경일로 만들었는지- 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개천절도, 홍익인간도, 단기 연호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것들을 그냥 '원래부터 있던 것'처럼 받아들여왔다. 하지만 원래부터 있던 것은 없다. 모든 제도에는 역사가 있고, 그 역사에는 반드시 싸움이 있다.
단기(檀紀 단기)는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한 기원전 2333년을 원년으로 삼는 연호다. 서기에 2333을 더하면 단기가 된다. 지금은 공문서에서 사라진 이 연호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에는 헌법 공포문에 버젓이 적혀 있었다.
제헌국회는 헌법 전문에 공포일을 '단기 4281년 7월 20일'로 표기했고, 이어 「연호에 관한 법률」을 제정해 단기를 대한민국의 공용연호로 확정했다.
이 결정은 즉흥적인 것이 아니었다.
단군의 건국으로부터 시간을 기산하는 방식은 이미 1905년경부터 민간에서 자생적으로 퍼지고 있었다. 『황성신문』은 1905년 4월 1일자부터 '단군개국' 연기를 기자원년·광무·서기·일본명치·중국광서와 함께 병기하기 시작했고, 『대한매일신보』를 비롯한 국내외 신문들이 이 방식을 따랐다.
단기 사용을 이론으로 뒷받침한 사람은 단재 신채호였다.
그는 '아건국성조단군(我建國聖祖檀君)'에서 기산하는 연호를 쓰면 역사를 대함에 있어 '동조동족(同祖同族)'의 관념이 생겨나 애국심을 환기하는 데 유익하다고 주장했다. 단기는 그에게 달력의 문제가 아니라 민족의식의 문제였다.
삼일운동 전후로 국내외에서 발표된 독립선언서들도 대부분 단기를 사용해 날짜를 적었다. 선언서들이 거사의 주체를 '반만년 역사를 가진 단군배달겨레'라 표현한 것과 직결된 일이었다. 단기를 쓴다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정치적 선언이었다.
해방 후 복간된 신문과 잡지들이 일제히 단기로 발행일을 표기한 것도, 미군정이 호적을 단기로 교체한 것도 이 흐름의 연장이었다. 제헌국회에서 단기 대 '대한민국' 연호를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을 때, 재석 133인 중 106인이 단기에 찬성표를 던졌다.
그러나 단기는 공용연호로 지정된 지 13년 만에 폐지됐다.
5·16 쿠데타를 주도한 군부는 1961년 국가재건최고회의 결정으로 단기를서기로 교체했다. 제안이유서에는 대외문서와 통일이 안 되어 낭비와 혼란을 일으키고, 대외적으로 국수주의적인 인상을 준다는 이유가 적혀 있었다. 그러나 실제 배경으로는 쿠데타 주도세력이 친미·친서방 노선으로 대외 지지기반을 확보하려 한 정치적 계산이 작동했을 것으로 학자들은 견해를 같이한다.
한 신문은 이 결정을 '경박하게 처리된 것'이라 비판했지만, 군부가 삼권을 장악한 상황에서 번복은 불가능했다.
단기는 그렇게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