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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8월 3일 열렸던 청년부채 국회토론회 <한국사회 대표, "을" 청년들의 부채문제> 왼쪽에서 다섯 번째가 한신경 씨. 그 옆이 김정주 씨. (사진: 청춘희년운동본부 페이스북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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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희년운동본부(이하 청춘희년)가 작년 10월부터 진행한 2차 부채탕감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무중력지대 대방동’에서 열리는 2회차 자조모임 ‘더바짝모임’(더 바르게 소비하는 짝꿍들의 모임)을 직접 찾았다. 청춘희년의 김덕영·장운영 활동가, 청년지갑트레이닝센터(이하 청지트)의 설성호(39) 이사, 무중력지대 조금득(38) 센터장과 더불어 부채탕감 대상자로 고금리 부채 일부를 지원받은 한신경(32) 씨가 한 자리에 있었다. 1차 부채탕감 사업에서 솔루션 제공 재무상담 및 금융교육을 받고 더바짝모임에 모두 참여한 한신경 씨는, 2차 부채탕감 사업의 조력자로 참여하며 청춘희년과 지속적 연대를 이어가고 있다.
부채, ‘내면화의 주술’에 빠지게 만드는 독
제일 먼저 입을 뗀 조금득 센터장이 한 후배의 사례를 꺼냈다.
“대학 때 학생회 일을 하면서 연극 활동까지 병행할 정도로 적극적이고 활동적이었던 청년이었는데, 아침부터 밤까지 쉴 틈 없는 알바 생활을 지속하면서 점점 사람 만나기를 꺼렸다.”
학자금 빚이 쌓이면서 후배는 어려운 형편임에도 대학에 진학한 자신을 자책했다. 대학 졸업 후엔 당장 학자금 빚을 갚기 위해 일명 ‘묻지마 취업’을 했다. 빵집 알바였다. 연애하기도 팍팍했다. 막 시작한 연애 초기, 통신비가 증가하자 마음이 부담스러워졌고 남자친구와 2개월 만에 헤어졌다. 후배는 조금득 씨 다음으로 청년유니온 2기 위원장이었던 한지혜 씨다.
조 센터장은 “부채 문제를 매일의 생활에서 맞닥뜨리다 보면 자연스레 자기 개인의 문제로 내면화할 수밖에 없게 된다”고 설명했다. “스스로 재무관리를 잘 못한 것 같고, 삶이 뭔가 제대로 설계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생긴 일이라는 의식에서 벗어나기 힘들어진다.” 청년 법외노조를 꾸려갈 정도의 적극적인 젊은이조차도, 빚의 늪에 빠지면 ‘내면화의 주술’에 취약해지는 법이다. 인간 기본권이라는 말이 실존하듯, 생활이 막다른 길로 내몰리면 어느 누가 그 주술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조 센터장이 어렵사리 지혜 씨를 만났을 때 그의 입에서 “아무래도 사회로 나가긴 틀린 것 같다”는 말이 나온 이유다. 당시 그는 겨우 스물여섯 살이었다.
그러다 지혜 씨는 어렵사리 공기업에 계약직 사원으로 취직했다. 시간이 지나자 무기계약직 제안을 받았다. 미래가 나아지리라는 기대가 없는 자리. 삶이 너무 갑갑하다는 생각에 ‘이건 아니다 싶어’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차라리 학생회 활동을 하던 때처럼 청년문제 해결 쪽으로 진로를 틀었다. 자신감이 회복됐고, 지금은 직업상담사의 길을 걷고 있다. 청년부채 당사자인 그는 지난해 11월말 무중력지대 대방동에서 열렸던 ‘개미와빚쟁이대잔치’에 참여하여 “연애 자금을 달라”는 ‘웃픈’ 메모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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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부터 장운영, 조금득, 한신경 씨. ⓒ복음과상황 오지은 |
조금득 센터장 역시 ‘개미 빚쟁이’ 경험자다. 그는 1차 부채탕감 사업 기획 단계에서부터 참여했고, 자조모임 기획자이기도 하다. 청춘희년 부채탕감 사업의 핵심 멤버(3차 부채탕감은 특히 무중력지대 사업과 함께함)인 조 센터장은 이날 종일 일해도 생활이 전혀 나아지지 않았던 자신의 경험을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털어놨다.
그는 대학생 시절 학생운동을 했고 졸업 후엔 오랫동안 수입이 일정치 않은 저임금 활동가로 일했다. 당연히 생활고에 시달렸다. IMF 이후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마구잡이로 권유·발급해주는 신용카드를 만들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현금에 각종 선물까지 안기며 달려든) 카드사와 고삐 없는 금융 정책 간의 암묵적 담합 구조의 피해자가 됐다. 세 장의 카드 중 한 장만 ‘비상용’으로 남겼고, 곧 카드빚으로 생활비를 메꾸기 시작했다. 없는 형편에 더 없는 동료를 먹여살리다시피 하다가 어느새 빚이 더 늘었다. 그는 빚의 노예로 전락했다.
“빚이 쌓이고 상황이 안 좋아지니 스스로 날카로워졌다.” 자연히 사귀던 남자친구와도 관계가 나빠졌다. 만들라 성화할 땐 언제고, 카드사는 결제대금을 연체한 고객에겐 태도를 180도 바꿨다. 조 센터장은 “(카드사는) 나를 쳐죽일 죄인 취급했다”고 표현했다. 생활 빚과, 그 빚의 빚을 갚는 생활이 계속 됐다. 안 해본 알바가 없어 ‘수원의 알바천국’이라는 별명까지 얻었건만, 종일 개미처럼 노동해봐야 카드 이자만 ‘충실하게’ 갚을 수 있었다.
병원의 임상실험 알바를 주기적으로 하다가 실험자의 실수로 등에 화상을 입었다. 병원비 명목으로는 치료비를 줄 수 없다는 말에 기가 막혔고, 결국 때려치웠다. 비참했다. 공원 벤치에 늘어져 누워 ‘난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싶은 좌절감에 짓눌리는 날엔 재정수준을 벗어나는 충동적 소비가 이어졌다. 그래봐야 ‘고기 안주 하나 사먹는’ 수준이었지만. 그렇게 피를 철철 흘리는 악순환을 살고 있었다.
“그렇게 20대를 보내고 30대가 되니까 불안감은 100만 배로 커졌다.” 그 불안감은 보험회사들의 공포 마케팅 전화에 노출됐고, 조 센터장은 노후보장 보험 상품에 혹했다. “한 번 털리고 나니까” 곧 보험사의 집중포화를 당하는 ‘호갱’이 됐다. 70만 원 급여 중에 30만 원을 보험비로 지출하고, 심지어 빚내서 보험료 낼 지경까지 갔다. “학자금 대출, 그로 인해 연결되는 생활 빚 문제에 매몰되면 다른 삶의 가능성, 먼 미래나 새로운 꿈에 대한 선택지를 찾을 수가 없다.”
갈수록 재정 상태가 늪으로 빠지는 지옥같은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건, 청년연대은행 토닥 설립 준비를 위해 100시간 상당의 재무교육을 이수하면서부터다. ‘탈출하고 싶다’ ‘자유를 찾고 싶다’는 강한 의지가 생겼다. 곧 신용카드는 물론 모든 보험을 해약했다. 족히 몇 백만 원은 될 손실액은 기회비용이라 여겨졌고, 깊고 넓은 해갈이 찾아왔다. 왜곡된 소비 욕구가 사라지면서 소비생활이 건강해졌고, 재무구조가 싹 바뀌었다. 핸드폰은 ‘당연히’ 약정 없이 사용한다. 조금득 센터장은 교육으로 알게 된, 누구나 알고 있다 생각하지만 실은 모르는 불편한 사실을 짚고 넘어가려 했다. 바로 금융회사가 설계한 ‘신용등급’의 함정이다.
“빚이 많아서 재무 상태가 엉망이고 생활도 망가졌던 당시, 은행에서 신용등급을 조회해보니 1등급이었다. 카드도 많이 쓰고, (내 인생 자체는 점점 악화될지언정) 이자도 성실하게 갚으니까. 그 혜택은 저금리로 다시 빚을 내주는 거다. 빚을 낼수록 혜택이 생기는 구조에서 (인생의) 끝장을 다 본 거다.”
그는 청춘희년의 부채탕감 사업을 “내게도 절실한 활동”이라고 표현했다. 그 절실함으로 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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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른쪽 부터 김덕영, 설성호, 한신경 씨. ⓒ복음과상황 오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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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조모임을 통해 덜어진 마음의 짐. “ ‘빚밍아웃’이 시작”
2차 부채탕감 사업부터 함께해 온 청지트 소속 설성호 이사는 “빚밍아웃(신뢰할 만한 지인들에게 부채상황을 공개하는 커밍아웃)이 시작”이라고 했다. 그는 1차 부채탕감 사업 때보다 회수가 1회 늘어난 더바짝모임을 맡아서 한다. 학생선교단체 간사를 했던 설 이사는, 교육전도사 시절을 보내면서 카드대금이 연체되기 부지기수였다. 역시나 독촉당하는 일상을 경험했고, 웬만한 일은 다 당해봤다. “독촉이 추심위원회에 넘어간다는 협박으로 바뀌면 겁이 덜컥 났었다.” 그는 자조모임에 대해 “참여하는 인원이 스스로 자신의 경험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서로 위로와 용기가 된다”고 한다. 더바짝모임은 꿈꾸던 자기 모습과 현실의 괴리에서 혼자서만 괴로워하던 누군가가 다시 사회 속으로 들어가는 과정인 셈이다. 이를 통해 “혼자가 아니라 같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을 수 있다”는 그는, 이 점을 “청춘희년운동의 핵심”으로 꼽는다. 그래서 자신의 부채 경험과, 청지트를 만나 부채 문제를 정리하고 해결했던 과정도 참가자들과 공유한다. 부채를 해결한 경험이 비슷한 처지의 채무자에게 도움이 된다. 더바짝모임은 모두가 참여자다. 부채탕감 대상자와 청춘희년에 모인 활동가들의 경계가 더욱 희미해지는 지점이다.
한신경 씨 역시 빚밍아웃을 청춘희년 안에서 얻은 가장 큰 선물로 생각한다. 그는 학자금 빚과 신용카드 빚에 대부업을 연쇄적으로 이용한 사례자로, 탕감 지원을 받은 지금도 여전히 빚은 있다.
신경 씨는 탕감 대상자로 지원했을 당시 학자금 빚에 더해 연이율 34.9%의 고금리 대부업체 두 곳에 빚이 있었다. 카드사의 전화 권유에 신용카드를 만든 게 화근이었다. 학자금 빚 위에 저소득으로 생활이 어렵자 신용카드를 자주 쓰게 되었고, 급기야 현금서비스까지 받았으며, 현금서비스 빚을 갚기 위해 또 다시 대부업체에서 고금리 빚을 졌다. 빚이 점점 불었다. 추심 공포 때문에, 빚을 더 내면서 이자만 갚고 있던 상황이었다.
금융지식 부족도 문제였지만, 인간관계 대부분을 차지하는 교회에서조차 탁 터놓고 사정을 알리기가 쉽지 않은 고립된 상황이 더 큰 어려움을 초래했다. 신경 씨는 “교회에서는 돈 문제로 고민하면 마치 신실하지 못하고 믿음 없는 사람처럼 보는 분위기였다”고 털어놓았다. 게다가 “부채 문제는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로 인식이 고착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 신경 씨는 점점 ‘고독한 수치심’이 강화됐다. 누군가 자신의 채무 상황을 알게 될까 두려웠고, 독립해 사는 마당에 가족에게도 알리기 쉽지 않았다. 자존감은 바닥에 떨어졌고, “커피 한 잔이라도 사 먹으면 과소비를 했다는 자책에 공개적인 자리에 나가는 것도 힘들었다.” 식습관도 나빠졌다. 한때 후원금 20만 원으로 한 달을 산 적도 있었던 그가, 30대 후반이면 평생 선교할 지역을 찾아 가고 싶다는 꿈에서도 점점 멀어져갔다.
신경 씨가 빚밍아웃을 하게 된 건 청춘희년의 부채탕감 대상자로 선정되어 금융교육과 재무 상담을 받으면서부터다. 채무 사실이 혹시 누군가에게 알려질까 두려움이 컸지만, 빚 문제를 사회적인 관점으로 보는 눈이 열리면서 점점 마음도 열렸다. 새정치민주연합 을지로위원회가 주관하는 청년부채국회토론회에서 당사자 발언까지 할 정도로 결단이 섰다. 1차 대상자 10명 중 자조모임에 끝까지 같이 참여한 김정주 씨(<복음과상황> 2015년 7월호 ‘사람과 상황’ 인터뷰 주인공)와 함께였다.
빚이 실제로 감해진 것도 감사하지만, 신경 씨는 자조모임에 특히 애정을 보였다. “자조모임을 통해 마음의 빚이 많이 덜어졌다”고 말했다. 부채 문제가 혼자만의 사건이 아니며, 오롯이 내 잘못으로 인한 문제도 아닌 구조적인 현실을 인식했다. 인생의 대전환이었다. 일종의 해방감을 맛보았고 소비 습관도 바뀌었다. “기계 값의 노예가 되기 싫어서 약정 없고 저렴한 핸드폰으로 바꿨다.” 빚을 해결할 수 있는 길도 열렸다. “이제 끝이 보이는 상황”이 온 것이다. 옮긴 교회 공동체에서도 어떤 계기로 자신의 빚 문제를 공개했더니 봇물 터지듯 주변 사람들도 비슷한 문제를 털어놓았다. 신경 씨에겐 여전히 해결해야 할 빚이 있지만, 그럼에도 “새 삶을 얻은 것 같다.” 그리고 이젠 비슷한 어려움을 겪는 주변인들이 보인다. 그들에게도 결국 “공동체가 필요할 것 같다”는 신경 씨.
“누구보다 그 고통을 잘 알기에, 나보다 더 심각한 빚을 안고 있는 사람들을 돕고 싶다. 그들이 자기 고통을 이야기할 수 있도록 돕고, 얘기를 들어주고 싶다.”
운동의 주체로 나서게 된 과정을 묻는 활동가들에게 그가 건넨 대답이다. 2차 부채탕감 사업에 조력자로 참여하고 있는 분명한 이유다. 혹여 관성처럼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까 봐서라도 지속적으로 더바짝모임에 참여할 계획이다. 이날 모인 활동가들은 “신경 씨는 청춘희년을 지속하게 하는 핵심 인물”이라고 입을 모았다. 대상자로 연결되었던 한신경 씨는 이제 엄연히 청춘희년의 개인 연대자다.
청년부채, 우리 모두의 ‘사회적’ 문제
구정 연휴 전 부랴부랴 모인 평일 오전의 자조모임이라 이번 모임에 미처 참석하지 못한 2차 부채탕감 대상자 중 장문의 카톡 메시지 몇 건을 설성호 이사에게 보내온 이가 있었다. 작년 5월 결혼한 20대 중반의 새신랑, 김요셉 씨였다.
요셉 씨는 골프연습장 한켠에 살다가 쫓겨나와 더 낙후된 지역에서 살아야 했을 정도로 순탄치 못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좋은 목사님을 만나 교회 사랑방에서 기거할 수 있던 건 행운이었다. 고등학교까지는 장학금 혜택을 받아 걱정 없이 마쳤으나, 대학 진학 후부터가 문제였다. 모자라는 등록금과 생활비는 모두 알바로 충당했다. 특히 방학 중에 고강도 알바를 했다. 돈육 공장, 음료회사 하청업체, 막노동, 서빙, 물류창고, 의류매장 등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을 정도다. 하지만 신학생이던 그가 본격적으로 교육전도사 일을 시작하면서 이전처럼 아르바이트를 할 여유가 없어졌다. 게다가 월 소득 70만 원 중에 약 27만 원을 헌금했다. 그러다 보니 새로 진학한 대학원 학비를 감당할 수 없었고, 학자금 대출을 받게 되었다. 결혼을 앞둔 예비신랑인지라 부모님이 학자금 대출을 만류하셨고 부채를 대신 지셨다. 그러나 부모님 형편에 학자금 빚을 상환하기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지금 월 소득의 2.5배에 달하는 월 지출을 카드 할부로 해결하는 형편이다. 최근 아내가 임신했고, 병원비며 약값, 출산준비 비용이 계속 발생할 예정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임신 중에 고민하는 아내에게도 미안했고, 친구조차 만나기 어려워졌다.
요셉 씨는 청춘희년 2차 부채탕감 사업 대상자로 선정되면서 학자금과 생활비 대출 빚의 일부를 변제받았고, 재정설계를 받았다. 수입과 지출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계속 노력 중이다. 아직 갚아야 할 빚이 많지만, “이제 그림이 그려진다”고 했다. “불어나는 빚에도, 마치 없는 듯 살며 상황을 회피했던 모습과 정반대가 되었다.” 빚을 직면하게 되면서 스스로 자신을 관리할 수 있게 된 셈이다. 그는 무엇보다 “청년문제에 관심을 두는 ‘어른’들이 있다는 사실에 큰 위로를 받았다.” 어느새 쌓여진 학자금 대출, 그로 인해 또 다시 늘어나는 빚 속에서 ‘울분’을 삭여오던 요셉 씨는 “내 문제와 함께, 사회적인 문제가 청년부채를 점점 더 어렵게 만들고 있음을 인식했다.” 상황을 똑바로 알고서부터는 비로소 “빚을 이겨 나갈 자신감이 생겼다.”
청춘희년의 김덕영·장운영 활동가는 모집대상을 가능한 열어두는 방법을 고민 중이다. 매회 부채탕감 사업의 시행착오, 활동가들과 대상자들과의 연대를 통해 다음 아이디어를 얻는다. 어느덧 마무리단계에 있는 2차 부채탕감 사업의 모자란 점은 3차 부채탕감 사업의 밑거름이 된다. 그렇게 청춘희년의 부채탕감 사업은 매회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이 사업이 지속되게 하는 동력은 단지 수혜자로 머무르지 않는 청년부채 당사자다. 이번에 무중력지대와 함께 3차 사업을 계획하면서 두 사람은 특히 청년부채의 구조적 문제를 더 선명하게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 자조모임이 늘 확인시켜주듯, “청년부채는 우리 모두의 사회적인 문제”기에 그렇다. 지금 “더 많은 청년들이 더 많이 말할 수 있는, 그러나 더 재미있는 ‘빚쟁이 잔치’를 벌일 준비가 한창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