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신장교씨 등 올 7월 개척… 5피치 초․중급 코스 첫 공개 알피니스트는 죽어서 무엇을 남기는가
하필이면 팔공산으로 향하는 날 수은주는 바닥을 쳤다. 아침 최저기온 영하 5도, 바람까지 제법 불고 있었으니 체감온도는 이보다 훨씬 더 낮았으리라. 산정에 서면 어지간히도 춥겠군. 나는 생각했다. 그를 처음 만났던 때도 이만한 늦가을에서 초겨울 사이였다. 검은 날들 속에 찍힌 하나의 빨간 날은 산으로 갈 기대로 늘 부풀어 있던 시절이었다. 단언컨대 돌아올 빨간 날을 위해 검은 날들을 견디어내는 무리들 속에 그도 끼어있었던 것 같다. 주말이면 대구에서 열차를 타고 올라와 서울 근교의 바위를 헤집고 다니다 산 냄새 가득한 배낭을 둘러메고 막차에 올랐던 그. 그를 다시 기억하게 된 건 몇 달 전 신문기사 한 줄을 차지한 부고를 보고나서였다. 한국 산악인 알프스에서 실종. 낯설지 않은 이름…. 가뭇한 과거를 끄집어내 그 이름 석 자에서 그의 모습을 떠올려보려 했지만 문득 검은 등산복 속에 묻힌 털털한 구릿빛 웃음 말곤 떠오르는 게 하나도 없었다.
2009년 7월 신장교씨 등 개척한 5피치 루트 “신장교 형이 팔공산에 낸 루트가 있는데, 처음엔 그냥 아는 사람들만 다니자고 해서 길 이름도 없다가 돌아가고 나서 ‘장교의 꿈’이라고 했심더.” 지난 달 익사이트 마운틴 취재에 동행했던 대구 출신 클라이머 장기수씨(한국산악회)의 말이 이번 팔공산행을 결정짓는 계기가 됐다. 아직 국내에 생소했던 거벽등반 기술을 배우기 위해 등산학교를 찾아 매주말 서울에 들르곤 했던 신장교씨가 훗날 대구로 돌아가 자체적으로 강습회를 열고 새로운 기술들을 지역에 보급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것도 어언 10년이 넘은 일이었다. 그의 서울행에서 적어도 10여 번은 같이 먹고 자고 바위에서 줄을 묶었을 우리였지만 도무지 기억은 나지 않았고, 당시 주고받았던 바랜 메모에 적힌 삐삐 번호가 우리의 관계를 잇고 있는 유일한 단서였다. 지난여름 후배들과 함께 알프스 그랑드조라스 북벽 등반에 나섰던 신장교씨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사고로 베르그슈룬트까지 300여m를 추락했고, 때마침 그 위에 내린 폭설로 영원히 기약할 수 없는 길을 떠났다. ‘장교의 꿈’은 그가 알프스로 떠나기 며칠 전 올랐던 길로, 박태준 한승엽 김승호 황기용씨 등 평소 가깝게 지내던 지역 산악인들이 루트 작업을 함께했다. 팔공산 동화사 입구 식당에서 기다리는 사이 한국산악회 대구지부 회원인 황기용씨와 배재영씨가 코끝이 빨개진 모습으로 문을 열고 들어섰다. 유학재씨와는 1997년 파키스탄 가셔브룸4봉 서벽을 등반하기도 했던 황기용씨는 알프스의 여러 난벽들과 매킨리 캐신리지, K2 등을 오르며 줄곧 알파인 등반을 추구해 온 산악인이다. 신장교씨 역시 눈과 바위와 얼음을 오르는 일을 늘 가슴에 두고 있었기에 생전 황기용씨와 많은 산행을 해왔다고 했다. 황기용씨는 “‘장교의 꿈’은 처음엔 볼트를 하나도 설치하지 않고 오르며 겨울이 오면 피켈과 크램폰을 가지고 올라보자고 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길이 알려지게 되면 리지 산행을 즐기는 많은 이들이 찾게 될 것이며 그들의 안전을 위해 확보점과 몇 군데 중간확보물로 볼트를 설치하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 들었고, 6~7월 사이에 볼팅과 루트 표시를 하는 작업을 했다는 것이다. 무인산장인 팔공산장에서의 하룻밤은 아늑했다. 밤새 바람소리 새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는 적막이 온 산을 휘감았지만 작게 밝힌 등에서 뿜어 나오는 한 줄기 빛은 어둠을 어둠으로만 남겨두지 않고 있었다. 이른 아침 황기용씨의 안내에 따라 병풍암으로 발길을 옮겼다. 역시 제법 쌀쌀한 기운은 구름처럼 능선에 걸려있었다. 40여분 여러 갈래의 갈림길들을 이리저리 헤치고 가니 비로소 앙상하게 마른 숲 사이로 거대한 바위가 모습을 드러냈다. 말 그대로 병풍처럼 펼쳐져 산 이쪽과 저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그건 사뭇 알프스의 저 깊은 빙하 속에 자리 잡고 우뚝 선 그랑드조라스의 고독한 북벽과도 같아보였다.
2․3피치가 크럭스로 5.9~5.10a급 루트는 병풍암의 가장 오른쪽 면을 따라 이어지고 있었다. 시작 지점에서 안전벨트를 차며 내려다보니 발 아래 숲 한가운데 양진암(養眞庵)이 자리 잡고 있었다. 동화사의 암자로 비구니들의 수행도량이라는 양진암에는 신장교씨의 위패가 안치돼 있다고 했다. “평소에도 나 죽으면 저기 양진암에다 뉘어달라고 했어요. 말이 씨가 됐는지 시신도 못 찾았지만…. 막걸리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차를 타고 한 시간 반을 달려 술도가를 찾아가 받아오곤 했어요.” 사람들은 그를 두고 나이 오십이 다 돼가도록 가정도 이루지 않고 스스로 궁벽한 삶을 살았던 외골수 산꾼으로 기억했지만, 사고 이후 수습하는 과정에서 그가 형편 어려운 조카들 뒷바라지를 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 후배들을 모아 인도 창가방 북벽 원정을 준비했던 그는 사정이 여의치 않아지자 알프스 등반을 떠나게 된 것이었지만, 어쨌든 그의 생각은 보통 산에 다니는 이들이나 세속의 그것과는 조금 다른 면이 있었다고 황기용씨는 기억했다. 첫 피치는 여러 갈래로 갈라진, 잡을 것들이 많은 크랙이었다. 높이는 20여m 가량. 황기용씨는 익숙한 동작으로 크랙을 따라 올라 팔뚝만한 나무 둥치에 슬링을 하나 걸고 중간확보를 한 후 쌍볼트가 박힌 확보지점까지 올라섰다. 지금까지 이 길을 지난 사람이 몇이나 될는지, 크랙은 돌기가 매우 거칠게 살아있었고 그 안에 박힌 돌들은 들썩이며 흔들리기도 했다. 테라스에 서자 대구 시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줄곧 남향이라 차가운 바람을 조금이나마 밀어낼 햇볕을 기대했지만 태양은 줄곧 구름에 가려 있었다. 2피치는 보기보다 훨씬 어려웠다. 곱은 손으로 홀드를 잡는 것은 고통스런 일이기도 했고 근육은 경직돼 자유롭게 움직이질 않았다. 선등으로 올라간 황기용씨가 첫 번째 볼트에 매달려 한동안 고민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넓은 우향크랙을 레이백으로 올라 레지를 맨틀링으로 넘어서고 왼쪽 작은 홀드에 의지해 몸을 일으키는 것이 관건이었다. 투박한 리지화에 장갑을 끼고 붙었던 유학재씨도 어렵긴 마찬가지였는지 결국 앞줄을 잡고 말았다. 앞서 간 사람들이 이은 그 선은 자연이 빚어낸 가장 자연스런 모습이었으나, 추위 앞에선 당할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뒤따라 올라온 일행들도 자유등반을 하거나 등강기를 이용해 난관을 각자 해결했다. “처음에 신장교씨는 ‘알피니스트의 꿈’이라고 하자고 했고, 다른 이들은 ‘알파인 드림’으로 하자는 등 여러 의견이 나왔었어요. 선만 이어놓고 겨울에도 등반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전 구간을 드라이 툴링으로 올라보려고 했지만 3피치에서 막히더라고요.” 황기용씨는 이후 볼트를 설치하기 전 결국 아이 머리통만한 캐멀롯 6호를 장만해 와 3피치 와이드 크랙을 넘어섰다고 말했다. 시작부분이 가파른 슬랩으로 된 3피치에는 신장교씨의 사고 이후 주변 산꾼들이 석판을 만들어 걸어놓았다. ‘장교의 꿈 - 산악인 신장교(1962~2009) 당신의 흔적을 영원히 기억하리라.’ 고인이 좋아하던 막걸리를 깜빡 잊고 가져오지 않은 것을 못내 아쉬워하던 황기용씨는 조심스레 슬랩에 발을 올려놓고 체중을 옮겼다. “대구 사람들한테 슬랩은 5.10이건 5.5건 다 어려워요.” 주로 수직의 크랙이나 페이스 위주의 암벽이 발달한 남부지방의 클라이머들은 인수봉과 같은 슬랩 위주의 바위에 오면 아무리 경사가 누워있어도 난감하다고 했다. 반면 조금만 경험 있는 사람이라면 손톱 끝이 걸리는 홀드를 잡고도 쉽게 몸을 일으키곤 한다. 맵고 짜고 화끈한 경상도 말투처럼, 바위를 오르는 것도 그렇게 닮아있는 것 같다. 볼트 2개를 지나 슬랩 구간을 넘어선 그가 작은 테라스에 올라서 배낭을 벗어 볼트에 걸어놓는다. 폭 70cm 가량 되는 좁은 침니를 벗어나기 위해서다. 몸을 바깥으로 향했다가 침니를 넘어 크랙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다시 벽을 보고 돌려야 하는 게 쉬워 보이지만은 않았다. 줄곧 크랙이기 때문에 캠 등을 적당히 사용해 중간확보하면 됐지만 침니 초입부는 손을 깊이 넣어도 가장 큰 사이즈 캠이나 빅브로와 같은 장비가 없으면 맞는 확보물이 없다. 몇 번 힘쓰는 소리가 들리더니 크랙 위쪽 시야에서 사라진 그는 곧 “안착!”이라며 등반을 마쳤음을 알려왔다. “‘안착’이라고도 하고, ‘호~호~’도 많이 쓰고, 대구는 아직 그래요. 호호호.” 지켜보던 배재영씨가 설명을 덧붙인다. 대구 클라이머들에게 ‘안착’은 안전하게 도착했다는 뜻일 테고, ‘호~’는 로프를 느슨하게 해달라는 뜻이다. 등산교본에서는 완료, 줄 늦춰 등의 용어로 말하고 있지만, 안착이거나 호라도 따지고 싶지는 않다. 그들의 ‘안착’과 ‘호’ 사이에는 ‘완료’나 ‘줄 늦춰’에서 찾을 수 없는 끈끈함이 있는 것 같다.
추위 속에서도 밝아왔던 알피니스트의 긍지 여전히 손은 시리다. 간간히 비치다 구름 속으로 숨곤 하던 햇볕은 결국 계절을 거스르지는 못한다. 고도를 높일수록 코끝이 찡해온다. 잊었던 겨울산의 냄새가 밀려온다. 키보다 조금 높은 디에드르를 넘어 사선크랙을 따라 횡단을 하고 나면 이제 정상이 지척이다. 이백리길과 만나는 마지막 피치는 볼트가 박힌 슬랩이건 쉬운 크랙이건 어느 쪽으로 올라도 자유다. 정상엔 더욱 차가운 바람이 불고 있었고 길게 늘어진 산그림자를 향해 내려치고 있었다. 바람이 차가워질수록 높은 산이 그리워진다. 설연이 휘날리는 숨 막히는 그곳. 목구멍에서 피가 터질 듯 건조한 기침은 잦아들지 않고 끝내 손가락을 입으로 물고 빨며 녹여야 했던 처절한 몸부림들은 어쩌면 세상을 살아나가는 일보다 훨씬 힘든 고통들이라고 생각했었다. 허나 사방, 날카로운 산정을 둘러싼 온 세계가 석양에 물들어 갈 때, 고통은 일순 녹아들었으며 총총한 별빛의 밤은 추위 속에서도 밝아왔다. 그러한 것들이 알피니스트의 고독한 긍지, 화려한 세속의 잣대로 잴 수 없는 그들만의 또 다른 세계다. 그들이 온 몸으로 살아낸 일련의 행위들은 가난하고, 보잘 것 없으며 누군가에겐 이름조차 기억되지 못했다. 하지만 알피니스트로서의 삶은 세상의 기준에 비추어 볼 때 여러 가지 한계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인생의 또 다른 편에 있었던 물질과 외형들이 만들어낸 껍데기들의 부당성을 희석시키지는 못했다. 진정한 알피니스트는 최고가 되기 위해 산으로 향하지 않았다. 그게 그들이 남긴 역사라는 걸, 겨울이 오기까지 누구도 오르지 않았던 이 길 위에서 마주한다.
유학재의 excite tip 어센더 안전장치① 신속한 등반을 하기 위해 우리는 어센더(등강기)를 사용한다. 과거 등강기가 귀할 때는 프루지크나 클램하이스트 매듭을 사용해 등반을 하기도 했다. 암벽장비가 발달되고 보급률이 높아지면서 어센더도 손쉽게 구할 수 있어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등반 중 휴대하곤 한다. 여러 어센더 중 ‘주마(Jumar)’라는 상품명으로 잘 알려진 구조의 장비를 가장 많이 사용하는데, 로프에 끼워 밀면 한쪽 방향으로만 움직이며 반대쪽으로 내려가지 않는 성질이 있다. 손쉽게 로프에서 탈부착이 가능하고 손으로 직접 로프를 잡고 올라가는 것보다 훨씬 안전하기 때문에 많이 쓰이는 장비다. 하지만 종종 어센더를 잘못 사용해 사고가 날 때도 있다. 어센더는 무엇보다 정확한 사용법을 알고 써야 힘도 덜 들고 안전을 보장할 수 있다. 어센더에는 위와 아래쪽에 카라비너 홀이 있는데 이를 잘 이용하는 것이 핵심이다. 대부분 어센더에 로프를 끼우고 안전벨트와 연결된 슬링에 매달려 등반을 한다. 이때 슬링은 쭉 뻗은 상태에서 내팔 길이보다 길게 해놓으면 힘이 빠졌을 때 어센더를 잡기가 힘들고 더 많은 체력을 요구하게 된다. 특히 체중을 다 실어야 하는 직벽이나 오버행에서는 위험해질 수도 있다. 어센더를 이용한 등반(저깅) 요령은 팔 힘으로만 로프를 잡아당기는 것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잡아당기며 연결된 슬링에 체중을 옮겨 안전벨트에 하중이 걸리도록 하는 것이다. 즉 확보줄에 매달리는 자세를 유지하는 게 중요한데, 때문에 슬링의 길이를 팔 길이보다 짧게 해야 각 동작을 연결할 때 반복 동작을 쉽게 할 수 있다. 또 꼭 어센더 위쪽의 구멍에 카라비너를 끼워 넣어야한다. 이는 어센더에서 로프가 이탈하는 것을 막아주며, 로프가 꺾였을 때 로프캐치(톱니 모양의 캠)가 눌려 밀려날 수 있는 가능성을 막아준다. 아래쪽 구멍에도 카라비너와 로프를 같이 연결해두면 트래버스를 할 때 혹시 모를 로프 이탈을 막을 수 있다. 이는 또한 어떤 상황에서든 아래쪽 로프가 위로 꺾여 올라가 하중이 걸렸을 때 어센더에서 이탈할 수 있는 가능성을 줄여준다. 이런 일련의 조치가 등반에 불편할 수도 있지만, 습관이 들어 몸에 익으면 차츰 동작이 쉬워질 것이다. 무엇보다 정확한 습관이 안전을 보장한다. 어센더는 실전 등반 전에 손에 익도록 따로 연습을 하는 게 좋다. 등반의 각도에 따라 연습을 하면 실전에서의 심적 부담과 각도에 따른 요령들을 체득할 수 있다. 글 유학재
1. 팔보다 길게 잘못 세팅한 어센더
2. 일반적인 어센더 사용법
3. 위와 아래 구멍에 카라비너를 걸고 백업한 모습
4. 백업을 하면 횡단 중 로프 이탈을 막을 수 있다.
5. 아래 카라비너를 걸지 않으면 로프가 이탈할 가능성이 높다.
information 팔공산 ‘장교의 꿈’ 리지 등반 길잡이 ‘장교의 꿈’ 리지는 2009년 7월 대구 산악인 신장교 박태준 한승엽 김승호 황기용씨 등이 개척했다. 팔공산 병풍암 맨 우측에서 정상까지 이어지는 5피치 루트로, 최고난이도 5.9급 정도 된다. 개척의 주역이었던 신장교씨는 이 루트를 만들고 난 뒤 곧 알프스 그랑드조라스 북벽 등반을 갔다가 추락해 사망했으며, 동료들은 그를 기려 루트 이름을 ‘장교의 꿈’이라고 붙였다.
접근로 병풍암은 팔공산 동화사를 기점으로 한다. 동화사 입구에서 내원암을 거쳐 주능선 상에 있는 병풍암까지는 1시간 30분 정도가 걸린다. 내원암과 양진암까지는 도로가 나 있지만 주간 차량 통행은 금지되고 있다. 팔공산장에서 숙박하고 출발할 경우 40여분이 걸린다. 동화사를 경유할 경우 문화재관람료 2500원을 내야한다.
등반정보 병풍암을 마주보고 오른쪽 끝까지 가다 보면 리지 시작점을 알리는 화살표가 페인트로 그려있다. 1피치는 여러 갈래로 난 크랙으로 난이도 5.7급 정도 되며 등반 길이는 약 15m 정도 된다. 홀드가 풍부하기 때문에 중간 크기 프렌드를 2개 정도 설치하고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다. 피치 종료지점에서 오른쪽으로 5m 가량 트래버스해 내려서면 나오는 공터가 2피치 출발점이다. 우향크랙을 따라 5m 가량 오르다 첫 번째 볼트에 클립하고 맨틀링으로 레지를 올라서야 한다. 이후 왼쪽 작은 홀드를 이용해 테라스에 오른 후 완경사 크랙을 5m 가량 올라 쌍볼트에서 확보한다. 난이도는 5.9급. 3피치는 시작 지점에 루트 개척자인 신장교씨의 추모 석판이 있다. 슬랩을 따라 10여m 오른 후 왼쪽 침니로 들어간다. 침니를 올라서면 다시 크랙이 15m 가량 이어진다. 중간 크기의 캠이 3~4개 정도 소요된다. 난이도는 5.9급 정도지만 보기보단 어렵다. 4피치는 디에드르 형태의 바위를 3m 정도 올라서서 사선크랙을 따라 이어진다. 크랙에 캠 2~3개를 설치하며 20여m를 오르면 테라스 확보지점이다. 이후 정상까지는 볼트가 있는 기존 이백리길을 따르거나 왼쪽 크랙으로 오르면 된다. 3인 1조로 등반시 소요되는 장비는 캠 2~6호, 로프 1동, 퀵드로 5개 정도면 된다. 아직 등반이 많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중간에 낙석이 생길 수 있는 곳도 있어 꼭 헬멧을 착용하도록 한다. 또 확보점의 쌍볼트에는 와이어나 체인 등을 설치하지 않았기 때문에 슬링으로 확보점을 직접 만들어야 한다. 등반 소요 시간은 3시간 정도 걸린다. 정상에서는 걸어 내려올 수 있다.
출처 : 유학재의 excite mountain 글 / 사진 이영준 기자 |
출처: 최쌤의 산 이야기 원문보기 글쓴이: 최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