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天地)는 불인(不仁)하다"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여러 해석의 여지가 있으나 가장 일반적으로 이해되는 것은 "자연의 이치는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 무정하고 자비가 없다"는 것입니다.
거대한 재해를 포함한 자연현상들은 인간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연의 이치대로 이뤄지고, 어린아이가 굶어죽든 불의한 악인들이 떵떵거리고 살든 풍년과 흉년은 딱히 사람의 인과를 가리지 않고 나타나는 것을 볼 때 자연의 이치는 인간의 사정을 헤아리지 않고 그들과 무관하게 흘러가는 것을 일컫는 말일 것입니다. 또 실제로도 대부분 그러합니다. 자연은 정해진 이치대로, 혹은 순리대로 흘러가고 움직일뿐 인간들의 사정이나 상황은 전혀 신경쓰지 않습니다.
이것은 고대의 원시적 종교들이 시대가 흘러가며 사라진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전에는 자연현상들이 신의 섭리나 뜻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해서 그들을 달래거나 감동시키면 각종 재해나 재난으로부터 자신들이 보호받거나 더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 믿었는데 자연현상과 이치에 대한 연구와 이해가 쌓일수록 그것들은 '신'과는 별 상관 없는 것들임을 많은 이들이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거대한 재해가 일어났을 때 누군가 기적적으로 구출되면 그걸 신의 기적(구원)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특히 종교들이). 그럼 반대로 너무나 딱한 사연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끝내 구출되지 못하고 죽게 되면 그것을 신의 저주(심판)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살아난 사람이 신의 축복을 받은 것이 아니듯, 그로인해 삶을 마감한 사람 역시 신의 저주를 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은 단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만물들 모두에게 다가올 수 있는 일들입니다.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기 좋아하는 것이 인간의 특성이긴 하지만 그것 자체로 함부로 선악을 말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연현상 뿐만아니라 세상에 속해 있는 인간사회에서 나타나는 많은 사고와 사건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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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노자의 말은 여기가 끝이 아닙니다. 이어지는 도덕경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천지불인(天地不仁) 이만물위추구(以萬物爲芻狗)
성인불인(聖人不仁) 이백성위추구(以百姓爲芻狗)
자연은 어질지 않아서 만물을 짚으로 만든 개처럼 여기고
성인도 어질지 않아서 백성을 짚으로 만든 개처럼 여긴다
이는 노자의 시대(군주들이 사분오열하여 권력을 다투고 그 속에서 백성들이 전란과 흉년 앞에 속절없이 죽어나가는 춘추 전국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할 때, 자연이 인간사에 개입을 하지 않고 그들에게 관심이 없듯이 성인(문맥상 이상적 지도자/권력자) 역시 백성들을 자신의 뜻대로가 아닌 자신과 떨어진 객채(타자)로 보고 그들의 삶을 내버려 둘 것을 종용하는, 그러니까 일종의 정치적 견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대로 백성을 돌보지 못하고 도리어 그들을 구렁텅이로 몰고 가는 당시의 권력자들과 그들이 만든 '질서'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도 상황이 해결되지 못하니 그저 있는 그대로 내버려달라는 '무위자연'의 사상은 실은 현세의 문제와 상황에 대한 치열한 고민 끝에 나온 사상가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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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현대 교회(특히 한국교회)의 식견을 보면 노자의 수준은 고사하고 원시적 고대 민간 신앙의 수준에서 채 못 벗어난 경우가 많습니다. 단면적이고 일방적으로 신의 축복 혹은 저주에 현실의 상황과 문제를 대입해 버리고 결론을 내려버리는 일차원적 사고 수준으로는 세상의 모든 압제와 불의한 권력으로부터의 해방과 자유를 말하는 위대한 성경의 진리를 증명하고 실현하기는커녕, 이 세상의 불의한 권력들로부터 발생하는 문제에 침묵하고 외면하게 만들거나 심지어는 그것들(돈과 권력)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호도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건 참 종교가 아니라 우민화의 결과입니다.
초기교회사의 몇 페이지만 펼쳐봐도 교회의 첫 시작의 시기의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로마'제국'을 뛰어넘는 대안(alternative)으로써의 '하나님 나라'(신분과 인종, 문화와 계급을 뛰어넘는 자유와 평화, 평등과 조화의 나라)를 당시의 세상 속에서 보여주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의 교회도 그만큼은 하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세상의 사상가들의 치열함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원시적이고 저급한 수준은 좀 뛰어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탄과 탄식이 깊어지는 때입니다.
권영진 목사(정언향 교회)
첫댓글 이 포스팅의 직접적 동기는 튀르키예 상황에 대한 '일부' 기독교인들의 저급한 해석과 적용에 대한 반론이지만 좀 넓게 보면 세상의 문제에 대한 한국교회 전반에 폭넓게 나타나는 해석과 적용에 관한 유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어디서부터 이렇게 잘못된 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