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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큰믿음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겸손
하편 목 차
6. 신비주의적 사역
7. 교회론
<다른 교회나 목회자들에게 지나치게 비판적이라는 주장에 대해>
<수평이동에 대해>
8. 변승우 목사의 신학적인 배경
신비주의적인 사역
합신 : 금니 사역 등은 시작에 불과한 것이다. 새로운 유형의 기적들이 나타날 것이다.(변승우, 대부흥이 오고 있다. p.272-275)
오순절의 성령의 부으심은 2000년이 지난 지금은 새 술이 아니라 묵은 포도주이다. 마치 신 차가 나오듯이 업그레이드 된 기름부음과 성령의 은혜를 주신다.(변승우, 대부흥이 오고 있다. p.271)
통합 : 신비주의적인 사역의 문제점
변승우는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는 등의 저서와 설교들 통하여 천국을 갔다 온 입신의 경험, 개인의 미래에 대한 예언, 방언, 쓰러지는 현상 등 신비주의 형태의 목회를 활발히 펼치고 있다. 그의 저서에는 천국을 갔다 온 사람들의 간증이 많이 실려 있다. (가령, 『정통의 탈을 쓴 짝퉁 기독교』pp.223-289를 보라.). 그는 집회 시간에 방언을 훈련시키고 있으며, <큰믿음교회> 내에는 예언 사역 팀, 방언 통변 팀, 신유 축사 팀 등 신비주의를 조장하는 목회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변 씨의 신비주의적인 사역은 우리 주님께서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마 12:39, 16:4)고 하신 말씀과 배치된다. 또한 본 교단에서 엄히 경계하는 극단적인 신비주의 사역이라는 점에서 마땅히 배척되어야 한다.
기성 : 목회론에 있어 너무 신비한 계시체험에 집중하여 성령사역의 목회를 하고 있다. 이른바 신사도개혁운동이라는 맥락에서 은사들을 훈련하는 과정을 두어 성도들을 신비체험으로 이끌고 있다는 사실이 목회의 본질에서 벗어난 일이요, 한편으로 극적인 체험을 열망하는 세속적이고 감성주의적인 신자들에게 영합하는 일로서 영적 타락을 심히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미혹』 p.49-54
『보이지 않는 적 귀신』 p.161-163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p.238-241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p.242-245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p.250-269
신간 『길』에 나오는 내용
1. 『미혹』 p.49-52
요즘 우리 교회에서는 치유부흥이 강력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스님까지 와서 치유 받고 구원받고 있습니다. 암이 녹아 없어지고 소아마비가 걷고 짧은 다리가 길어지고 각종 성형이 되는 등 그야말로 온갖 기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각종 치아 기적들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없는 이가 창조적으로 생기기도 하고, 아말감으로 해 넣은 이가 생니로 변하고, 충치로 패인 곳이 상아질이나 금이나 은으로 때워지고, 불필요한 사랑니가 감쪽같이 사라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말 많은 금니 기적도 일어납니다. 그런데 금니 기적에 대해 “금니 기적이 성경 어디에 나오냐?” 이런 맹한 질문을 하는 목사나 신자들이 많습니다. 그런 질문을 받으면 저는 이렇게 되묻습니다.
“기적이 왜 성경적이어야 합니까?”
기적이 성경적이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까? 그런 생각 자체가 비성경적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왜 그런지 그 이유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요 21:25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이처럼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이 성경에 다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행하신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기적 때문에 예수님이 이단이 되어야 합니까? 예수님뿐 아니라 엘리야나 다른 선지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들이 행한 기적이 성경에 다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설교는 성경적이어야 하지만 기적은 성경적일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수많은 기적들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요 14:12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예수님이 하신 일 중 일부가 사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믿는 자는 예수님보다 더 큰일을 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많은 이들이 그 부르심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이제 곧 그런 자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아무튼 믿는 자는 모두 예수님보다 큰일을 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보다 큰일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기적이 성경적이어야 합니까? 기적은 성경적일 필요가 없습니다. 영적인 현상들도 성경적일 필요가 없습니다. 성령이 임하실 때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을 모두 성경에 기록해놓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러다가 잘못된 것을 허용하면 어떻게 합니까? 걱정 붙들어 매십시오. 주님이“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20)라고 하셨으니 열매로 분별하면 됩니다. 제가 성경에 근거하여 장담합니다만, 귀신이 역사하면 기적은 일어나도 열매가 좋지 않을 것입니다. 귀신이 역사할 때에는 현상이 일어나도 열매가 좋지 않을 것입니다. 똑같은 기적, 똑같은 현상이 일어나도 열매는 좋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악령이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열매가 좋으면 기적이나 현상이 일어나지 않아도 성령이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명하신 대로 열매로 분별하면 됩니다. 영분별은 굉장히 어려운 것입니다. 목사나 교수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이대위위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대제사장과 제사장들도 번번이 영분별에 실패해서 선지자들을 돌로 쳐 죽이지 않았습니까? 세례요한과 예수님과 바울까지도 이단으로 몰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어쭙잖게 전문가 행세하지 마십시오. 모르겠으면 그냥 잘 모르겠다고 하십시오. 그리고 일반인처럼 겸손히 열매를 보고 분별하십시오. 과수에 전문가가 아니라도 열매를 보면 그 나무가 무슨 나무인지 누구나 다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겸손히 열매로 분별하십시오. 주님이 경고하신 대로 성령훼방 죄는 사함을 받지 못합니다. 영원한 지옥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해야 합니다. 이것을 달리 이렇게 설명해보겠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났고, 구약시대에는 기름이 늘어나고 밀가루가 늘어났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휘발유가 늘어난 것은 안 나옵니다. 식용유는 늘어났는데 휘발유는 안 늘어났습니다. 그런데 저는 수년 전 휘발유가 늘어난 간증을 들은 일이 있습니다. 어느 선교사님이 길을 잃고 헤매다 기름이 떨어져서 차가 섰는데 기도했더니 기름이 생겨나서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때 우리가 “휘발유가 늘어나는 것이 성경에 어디에 있어? 이단이야!” 이렇게 반응해야 합니까? 그래야 정상입니까? 아닙니다. 할렐루야! 하면서 주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금니기적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 당시엔 치과가 없었습니다. 썩으면 빼고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썩으면 썩은 이로 씹어 먹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치과가 있습니다. 치과에서 금니를 해 넣습니다. 예수님시대 때 치과에서 금니를 안 하는데 금니기적을 행해보십시오. 그러면 그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 도깨비입니다. 금니기적을 받고 씩 웃으면 사람들이 모두 비명을 지르며 도망갈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금니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안심하고 금니기적을 행합니다. 뭐 이상합니까? 이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금니기적은 지극히 정상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리석게 기적을 터부시하지 말고 겸손히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2. 『보이지 않는 적 귀신』 p.161-163
오래 전 신유와 축사가 활발하게 일어나는 어느 집회에 참석한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강사가 신유와 축사를 위한 기도를 하자 그 자리에 있는 거의 80-90%의 사람들이 기침과 구역질을 해대기 시작했습니다. 좁은 장소에 아주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는데 얼마나 비위가 상하고 더러웠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해긴 목사님은 이런 강사들처럼 10-15년 사역한 분이 아닙니다. 적어도 60년 가까이 축사 사역을 매우 성공적으로 해온 분입니다. 그런데도 사역 기간 동안 귀신이 나갈 때 기침이나 토하는 육체적인 표징이 나타난 것은 오직 세 번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왜 어떤 집회에서는 기침이나 구역질을 하고 심할 경우 토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을까요? 그것은 잘못된 가르침을 받고 사람들이 그런 체험을 만들어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예수님은 해긴 목사님에게 “너는 다른 사람에게 육체적인 증상의 나타남으로 귀신으로부터 자유함을 받는 것이라고 말하지는 말아라. 만일 네가 어떤 육체적인 나타남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들은 육체적인 나타남을 보이려고 애쓸 것이고 그러면 귀신을 없애는 것보다 오히려 귀신을 얻게 될 것이다.”라고 경고하셨는데, 이것은 비단 축사 시에 나타나는 기침이나 구토뿐 아니라 여러 가지에 적용됩니다. 구토나 기침을 통해 귀신이 나가는 일이 가끔 있는 것처럼 기도 받을 때 쓰러지거나 거룩한 웃음을 터트리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설교자들이 지나치게 이런 현상을 강조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그런 육체적인 나타남을 보이려고 애를 쓰게 되었고 그래서 순수하게 성령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인간이 정신적으로 만들어 내는 현상들이 영성 운동하는 곳에 넘치게 되었습니다. 이는 현상이 요란하게 나타나는 것을 능력으로 착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요란하고 별스러운 현상들이 강하게 나타나지만 정작 남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병이 치유되지도, 사람이 변화되지도 않고 공허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런 요란한 현상을 나타내는 사람들 중의 적지 않은 수가 귀신에게 사로잡혀있는 것을 분별해 낼 수 있습니다.
3.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p.238-241
쓰러지는 현상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일찍이 침례교의 유명한 설교자 찰스 스펄전은 쓰러지는 현상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지역에서 부흥을 일으키실 때에, 사람들이 넘어지고 크게 소리 지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지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모였어도 아무 흥분할 만한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소리가 없고 조용할 수도 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뜻하시는 대로 축복하실 수 있으며 또 그분이 뜻하시는 대로 축복하실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지시하지 말자. 크리스천들이 많은 축복을 그것이 축복이라고 믿지 않았기 때문에 놓쳤다. 왜냐하면 그 축복이 그들이 적당하고 옳다고 생각한 그런 형태로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러 해 전 저는 최자실 기념 오산리국제금식기도원에서 열린 마이클 브라운 박사의 집회에 참석했습니다. 당시 마이클 브라운 박사는 조용기 목사님이 예언한 펜사콜라 브론스빌 교회에서 일어난 대부흥의 주요인물 중 하나로 펜사콜라 부흥신학원의 학장으로 재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강의 도중 다음과 같은 일화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펜사콜라에서 부흥의 불길이 한창 타오를 때 마이클 브라운 박사는 스캇 볼크라는 사람에게 펜사콜라에 와서 한 주간 동안 은혜를 받고 가라고 권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사모하는 마음으로 96년 처음으로 브론스빌교회에 왔습니다. 찬양, 스티브 힐의 설교, 회개 초청 시간 다 좋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안수기도를 받고 사람들이 넘어지고, 울고, 웃고, 떨고, 뒹구는 것을 보고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안수 받을 차례가 되었을 때 그는 ‘나는 절대로 안 넘어질 거야.’라고 마음먹었는데, 실제로 소원대로 되었습니다. 오는 길에 차 안에서 마이클 브라운 목사님이 “스캇. 오늘 예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하고 물었습니다. 그가 대답했습니다.
“찬양과 경배, 설교, 초청의 시간 다 좋았습니다. 그러나 안수 받을 때 나타난 현상에 대해서는 저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 말을 듣고 마이클 브라운이 정색을 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캇, 자네 회개해야겠네. 자네는 우리 조상들이 범했던 실수를 범하지 말게(두 사람 다 유대인). 우리 조상들이 어떻게 했나? 그들은 수천 년 동안 메시아를 기다려왔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시자 거절했네. 왜 그랬는가? 왜냐하면 예수님이 자기들이 기대하고 생각한 모양과 방식대로 오지 않았기 때문이네. 자네는 지금 성령님께 대하여 똑같은 실수를 범하고 있네. 자네는 육신의 눈을 가지고 잘못 판단하고 성령을 거절하고 있네.”
여러분, 이 말을 꼭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현상에 대한 반감을 갖고 그것을 거절할 때 단지 현상을 거절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 현상을 일으키면서 오신 성령님, 그리고 그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거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조심 또 조심해야 합니다. 펜사콜라 부흥의 또 다른 주역인 스티브 힐에게 큰 영향을 끼친 레오나르 레이븐힐은 우리가 귀담아들어야 할 다음과 같은 중요한 말을 했습니다.
“요즘 우리는 영적으로 너무 부족하기 때문에 정상적인 것도 비정상적인 것으로 보기 쉽다.”
이 말은 오늘날에도 적중하는 말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육적으로 부유하고 혼적으로는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가난합니다. 정직하게 말하면, 많은 교회들이 성경지식 외에는 가진 것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면서 건전하다는 착각에 빠져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임하시고 자유롭게 역사하시는 교회들을 이상한 교회 취급하고 핍박합니다. 심지어는 이단이라는 말까지도 무책임하게 함부로 합니다.
이것은 자칫 잘못하면 성령훼방 죄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영원히 사함을 받지 못하고 멸망당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저는 어떤 분의 간증에서 지옥에 갔을 때 수많은 목사들을 보았는데 그들 중 상당수가 성령훼방 죄 때문에 사함을 받지 못하고 지옥에 와 있는 것을 보았다고 간증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조건 ‘이것은 아니다’라고 성급하게 판단하지 말고 과연 쓰러지는 현상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가 아닌가? 공정하고 열린 마음으로 진지하게 연구해야 합니다.
4.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p.242-245
오늘날 교회 안에 보면 기도를 받고 쓰러지는 현상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특별히 이런 현상이 귀신은 불신자의 사후의 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집회에서 주로 일어났었기 때문에 편견을 갖기가 더 쉽습니다. 물론 쓰러진다고 다 성령님의 역사는 아닙니다. 분명히 어떤 사역자들은 사람들을 밀어서 쓰러뜨립니다. 저는 심지어 마치 씨름을 하듯 다리를 걸어서 쓰러뜨리는 사역자도 보았습니다. 또 불행히도 쓰러지는 현상은 최면술에 의해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 귀신의 능력에 의해서 사람들이 쓰러질 수도 있습니다(막 9:17-18). 종종 귀신들은 사역을 받지 못하도록 기도 받는 사람이 안수하는 사람 앞에 오기 전에 성령의 역사를 가장해서 쓰러뜨리곤 합니다.
막 9:20 “이에 데리고 오니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저가 땅에 엎드러져 굴며 거품을 흘리더라.”
이것이 바로 성경적인 한 예입니다. 분명히 이 아이를 쓰러뜨린 것은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귀신들이 승산이 없는 것을 알고 주님과의 대결을 피하기 위해 아이를 넘어뜨린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읽어보면 이와는 달리 성령의 능력 때문에 사람들이 쓰러진 기록들도 많습니다. 쓰러지는 현상이 비성경적이거나 이상한 현상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것을 여러분께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삼상 19:23-24 “사울이 라마 나욧으로 가니라. 하나님의 신이 그에게도 임하시니 그가 라마 나욧에 이르기까지 행하며 예언을 하였으며 그가 또 그 옷을 벗고 사무엘 앞에서 예언을 하며 종일 종야에 벌거벗은 몸으로 누웠었더라. 그러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 하니라.”
대하 5:13-14 “나팔 부는 자와 노래하는 자가 일제히 소리를 발하여 여호와를 찬송하며 감사하는데 나팔 불고 제금 치고 모든 악기를 울리며 소리를 높여 여호와를 찬송하여 가로되 선하시도다 그 자비하심이 영원히 있도다 하매 그때에 여호와의 전에 구름이 가득한지라.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인하여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하나님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
단 10:9 “내가 그 말소리를 들었는데 그 말소리를 들을 때에 내가 얼굴을 땅에 대고 깊이 잠들었었느니라.”
요 18:6 “예수께서 저희에게 내로라 하실 때에 저희가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행 9:3-4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계 1:17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이처럼 성경에는 하나님이나 천사의 현현,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 성령의 기름부음 혹은 말씀의 능력에 의해 사람들이 쓰러진 것이 많이 나옵니다. 이것은 모두 최면술이나 악령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성령의 역사로 일어난 일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넘어지는 현상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을 버려야 합니다.
5.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p.250-269
2. 쓰러지는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니다.
랜디 클락은 “방언하는 것을 빼놓고 복음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성령 안에서 죽임을 당함’(쓰러짐)보다 더 논란을 일으키는 또 다른 체험은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사람들이 쓰러짐에 대해 반감을 갖는 것은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과거에는 쓰러지는 현상이 주로 귀신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집회에서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귀신론에 대한 반감이 쓰러지는 현상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외국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우리나라는 그렇습니다. 그런데 쓰러지는 현상은 귀신론을 주장하는 교회나 사람들이 원조가 아닙니다.
앞에서 증명했듯이 그것은 성경에 분명하게 나타나있는 성경적인 현상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역사적으로 귀하게 들어 사용하신 교회사에 빛나는 신앙 위인들의 체험과 사역에 분명하게 나타났었던 현상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대부분의 목사들과 성도들이 그 위인들은 부정하지 않으면서 그분들에게 나타났던 동일한 현상에 대해선 아주 부정적인 자세를 취합니다. 이것은 분명히 모순이고 그리고 옳은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지혜나 분별력과는 거리가 멀며 무지와 편견을 보여 줄 뿐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교회사에 빛나는 기독교 위인들의 삶과 사역에 쓰러지는 현상이 자주 일어났다는 사실 자체를 모릅니다. 그래서 이런 현상에 대해 오해하고 함부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분들을 위해서 교회사에 나타난 쓰러지는 현상에 대해 구체적으로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조나단 에드워즈
로이드 존즈는 「부흥」이라는 책에서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만일 냉철하고 합리적이고 지성적인 사람이 있었다면 그 사람은 저 위대한 조나단 에드워즈였을 것입니다. 그는 이러한 현상을 이백 년 전에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그 현상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고 그는 믿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그러한 현상들을 옹호했습니다. 그는 주로 그러한 현상들이 하나님의 성령에 속한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쓰러지는 현상이 성령님에 의한 것이라고 믿게 된 데에는 부인의 영향이 큽니다.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의 사모님은 성령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분은 때로는 몇 시간 때로는 며칠씩 성령 아래 넘어져서 일어나지 못하고 임재 가운데 거했습니다. 정부홍 목사님이 쓴 「조나단 에드워즈의 생애」라는 책에 보면 사모님의 경험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월 28일 목요일 밤은 내 생애에 있어서 지금까지 있었던 것 중에 가장 멋진 좋은 밤이었다. 밤새 그리스도의 놀라우신 그 큰 사랑과 그분을 향한 나의 친밀함을 끊임없이 뚜렷하고 생생하게 느꼈다. 그 매 순간마다 느낀 바는 지금까지 내 생애 동안 누렸던 모든 외면적인 위로와 기쁨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었다. 나의 연약한 몸은 곧 회복될 것 같았으며, 저 하늘나라에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고 그분의 사랑을 나누는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기쁨으로 충만하였다. 나의 머리는 전능하신 주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며, 하늘과 땅이 함께 내게로 오는 것 같은 생각으로 가득 차있었다.
나는 하나님의 엄청난 위대하심을 마음속 깊이 느꼈다. 우리가 그분 앞에서 취해야 할 겸허와 경외심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바로 그 순간, 누군가 들어와서 마을에서 다시 살아나고 있는 신앙에 대해서 밝은 미소를 띠고서 이야기해 주었다. 그런 신앙은 거의 볼 수 없었다. 위대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이 마음에 임재하였을 때, 가장 진지하고 겸허하게 행동하고 그분 앞에서 두려워 떪으로 즐거워해야 한다고 생각되었다. 그날 밤 회개하며 부르짖고 있는 동안에, ‘보혜사가 임하신다!’는 음성이 내가 분명히 의식할 수 있을 정도로 들리고, 내 영혼은 큰 기쁨으로 충만하였다. 그 순간 내 몸에서 힘이 빠져버렸다. 그리하여 난 마루에 쓰러지게 되었다. 내 가까이 있었던 사람들 중의 몇이 나를 붙들어 주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 같은 사모님의 체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만일 이러한 것들이 열광이요 병든 두뇌의 열매라면 나의 두뇌로 하여금 항상 그 행복한 병으로 사로잡히게 하자! 만일 이것이 무질서라면 인간 세상이 모두 이와 같이 자비롭고 온유하고 친절하고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무질서에 사로잡히기를 나는 기도한다. 이렇게 묘사된 것을 참된 신앙이 아니라고 배척하니 그들이 신앙에 대해서 도대체 무슨 관념을 가지고 있는가? 성경에 있는 다음과 같은 표현들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대답할 것인가?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 보이지 않는 구주를 믿고 사랑하는 가운데 말로 다할 수 없는 기쁨과 충만한 영광으로 즐거워함, 믿음 안에서의 모든 기쁨과 평강,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께서 비추심,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과 같이 주님의 영광을 보며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영광에서 영광으로 저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함,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짐. 내가 말하건대, 앞에서 언급한 사실들이 이와 같은 표현들에 대하여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면 무슨 다른 해답을 찾을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은 것들이 참된 성령의 열매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무슨 영을 기다려 기도하고 있으며 그의 영이 오실 때 무슨 종류의 열매를 맺기를 기대하고 있는지 잘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처럼 조나단 에드워즈는 쓰러지는 현상을 긍정적인 것으로 보았고 성경에서도 그러한 일들이 있었다고 증거 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의 집회에서도 사람들이 쓰러지는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2) 조지 휫필드
조지 휫필드는 영어권에서 가장 위대한 설교자 중 하나입니다. 그는 젊은 시절, 웨슬리와 함께 영국에서 사역하면서 사람들이 쓰러지는 현상을 보고 웨슬리에게 편지를 써서 다음과 같이 반박했습니다.
“목사님이 인도하시는 집회 때 사람들을 자극하여 발작을 일으키게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휫필드가 웨슬리를 직접 대면하게 되었을 때 질책을 받아야할 사람은 휫필드 자신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휫필드가 설교할 때 그의 가까이 서 있던 4명의 사람들이 동시에 쓰러졌기 때문입니다. 그 중 한 사람은 아무 감각도 없이 움직이지 않았고, 다음 사람은 심하게 떨었고, 세 번째 사람은 온몸의 충격이 너무 심해 소리도 내지 못하고 신음하기만 했고, 그리고 네 번째 사람은 같은 충격을 받아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을 부르며 울부짖었습니다. 그 후부터 쓰러지는 현상이 휫필드에게도 나타나게 되었는데 그는 일기장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내가 믿기로는 거기에 거의 1,200명이 있었다. 내가 그렇게 오래 말하지 않아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누그러졌다. 내가 계속 말할수록 영향력은 더 커져서 결국에는 (아침, 저녁 집회 모두) 수천 명이 울음을 터뜨려서 내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게 되었다. 나는 이전에 그렇게 영광스러운 장면을 본 적이 없었다. 오,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흘려지고 쏟아진 눈물들! 몇 명은 실신했다. 그들이 아주 적은 힘이나마 회복했을 때 그들은 듣고 또다시 실신했다.
5월 15일, 목요일... 회중들은 노팅함(Nottingham)에서처럼 아주 많았다. 비록 사람들의 마음속에 커다란 동요가 없을지라도, 그들의 마음은 벅찼다. 대부분이 눈물에 흠뻑 젖었다. 말씀은 양날 선 검보다도 더 예리했다. 고통의 울부짖음과 신음은 강퍅한 마음을 꿰뚫기에도 충분했다. 몇 명은 몹시 창백했었다. 다른 사람들은 자기 손을 꽉 쥐었다. 또 다른 사람들은 바닥에 누워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친구의 팔 안으로 쓰러지기도 했고, 대다수는 그들의 눈을 천국을 향해 올리고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며 울부짖었다...
11월 2일, 일요일... 주님의 성령이 내게 자유를 주시고, 마침내 급하고 강한 바람처럼 내게로 오셨다. 즉시로 모든 회중이 놀라게 되었다. 부르짖음, 울음, 통곡이 여기저기서 들렸다. 많은 사람들이 친구들의 팔 안으로 쓰러지는 모습도 보였다.”
훗날 휫필드가 조나단 에드워즈의 고향 마을인 노댐프턴을 방문했을 때에도 쓰러지는 현상이 강하게 나타났습니다. 이에 대해 조나단 에드워즈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교회 전체가 울음바다였고 쓰러지는 등의 역사로 가득했다. 그 도시 여러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역사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집회에 참석하여, 직접 듣고 봄으로써 크게 영향을 받았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령의 권능에 압도당하는 체험을 하게 되고 몇 시간이나 계속된 기도, 찬송, 상담, 협의 등으로 큰 감동을 받았다. 이러한 현상은 개개인의 사람들에게는 벅찬 기쁨을 가져다주었고 마을 전체의 신앙에도 큰 발전을 가져다준 놀라운 사건이었다.”특이한 것은 휫필드의 방문 후 같은 현상과 효과가 에드워즈 자신의 목회에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3) 존 웨슬리
존 웨슬리가 설교 도중 사람들이 넘어지는 것을 본 것은 그가 목회를 시작한 지 14년째 되는 해였습니다. 웨슬리의 일기에서 몇 가지를 인용해 보겠습니다.
“1739년 1월 1일 월요일 새벽 3시경 홀, 킨친, 인햄, 휫필드, 래인과 60여명의 형제들이 계속 기도하고 있을 때였다. 하나님의 권능이 우리에게강하게 역사해서 주체할 수 없는 기쁨으로 울음을 터뜨리고 많은 사람들은 마룻바닥에 쓰러지기까지 했다.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경외와 놀라움에서 깨어나자마자 우리는 한 목소리로 외쳤다. ‘하나님, 당신을 찬양합니다. 우리는 당신이 전능자이심을 압니다.’”
1762년 리메릭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거듭나는 체험을 했다. 모두가 눈물의 바다를 이루고 큰 소리로 울부짖고, 기도하고, 소리 지르며 또한 그들 전부가 땅에 누워 있었다.”
1784년 콜포드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내가 기도를 했을 때 성령의 불이 붙었다. 많은 사람들이 크게 울부짖었고, 많은 사람들이 땅에 쓰러졌으며, 많은 사람들이 심하게 떨었다.”존 웨슬리는 부흥회 중에 나타나는 이러한 현상들을 초자연적인권능에 의한 표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현상들이 나타나지않을 때는 근심하였습니다. 그래서 종종 집회에서 이런 현상들이 일어나지 않을 때는 하나님의 표적과 기사를 보여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웨슬리가 그렇게 기도를 할 때마다 몇 사람이 쓰러져서 울부짖었습니다.
특이한 점은 그때는 오늘날 쓰러지는 것 같은 평화로운 현상보다는 경련을 동반한 기절과 같은 현상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웨슬리는그렇게 고통스러운 증상을 보이게 되는 원인을 다음 두 가지로 생각했습니다.
① 그의 설교가 회심에 중점을 둔 것이기 때문에 자연히 사람들이 울부짖고 통곡하게 되었다.
② 어떤 사람들은 귀신의 세력으로부터 시달림을 받았기 때문에 귀신에게서 풀려날 필요가 있었다.
(4) 찰스 피니
19세기의 가장 유명한 설교자는 찰스 피니였습니다. 피니는 변호사가 되기 위해 공부를 한 칼빈주의자였는데, 그의 설교는 마치 배심원 앞에서 논증을 하는 변호사처럼 논리 정연한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그는 당시의 형식적인 설교 방식과는 달리 일대일로 개인에게 대면하여 말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설교하였습니다. 이런 방식의 설교로그는 1년에 최고 10만 명 이상을 회심시켰습니다. 찰스 피니의 설교에서 쓰러지는 역사가 일어나게 된 것은 어느 날 오후 뉴욕 주의 유티카에서 설교할 때부터였습니다. 설교가 15분 정도 진행되었을 때 400명 정도의 사람들이 교회 의자에서 떨어져 마룻바닥에 쓰러지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에 대해 피니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어느 시대의 교회에서나 하나님의 진리의 역사가 분명히 나타남으로써 사람들이 육체적인 힘을 완전히 상실당하여 땅에 엎드러지게 되는 경우가 있었다. 이러한 일은 다니엘에게도 나타났는데 그는 서 있지 못하고 쓰러졌다. 다메섹 도상의 바울도 하나님의 영광의 빛에 압도되어 땅에 엎드려져 꼼짝할 수 없었다. 나도 또한 말씀의 확고한 진리와 무한한위대함을 깨달았을 때, 육체적인 힘을 완전히 상실하고 쓰러져버린 경우가 여러 번 있었다. 이런 일들에 관해서 말하자면 내가 지난번 편지에서 언급했던 마땅치 못한 감정의 흥분과 같은 경우는 아니다. 성령의 권능에 압도당하는 경우에는 지각이 마비되고 혼란스러워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령의 빛으로 밝혀진다. 이런 일들은 분명 눈물을 자아내는 민감한 감수성의 표출이나, 활발한 상상력의 결과 나타나는 흥분이나, 깊은 감동으로 빚어진 느낌 같은 것이 아니다. 생각을 산만하게 하는 감정의 발산 같은 것도 아니다.
그 반면에 마음으로 밝게 드러난 진리를 보는 것이다. 그리고 마음으로 하나님의 가리우지 않은 영광을 바라보는 동안 모든 육체적인 힘은 완전히 제거되어 버리는 것이다. 영(the spirit)이 육체로부터 분리될 때 마음을 싸고 있던 베일은 걷혀버리고,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이며, 이 과정에서 육체가 압도당하여 힘을 잃는 것이 분명하다. 종종 이러한 경우를 체험한 사람들을 당황하게 하는 경우도 있으나, 그들의 체험 이후의 역사를 살펴본 결과 이러한 일들은 전반적으로 사람들에게 회심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좋은 사례가 되어 왔다.”
참고로 헬렌 웨셀의 「찰스 피니의 자서전」에 보면 피니의 사역에서 일어났던 쓰러지는 현상에 관한 많은 글들을 접할 수가 있습니다. 그 중 두 가지를 인용하겠습니다.
“나는 하나님 일의 부흥을 위해서 어떤 다른 방법도 쓰지 않았다. 그러나 기도의 영이 즉시 회심한 젊은이들에게 놀랍게 부어졌다. 한 주가 다가기 전에 그들의 기도가 한창일 때 살펴보니 그들 중 몇 명은 온몸에 힘이 빠졌고, 작은 방안에서 발을 딛고 일어설 수도 없고, 무릎으로 설 수조차 없었으며, 마룻바닥에 엎드려 누워 성령이 강하게 임하심으로 인해말로 할 수 없이 끙끙거리며 기도했음을 나는 알게 되었다.”
“두려운 엄숙함이 그들에게 한꺼번에 내려앉을 때 나는 단도직입적인적용의 말투로 15분 이상 그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청중들은 그들의 의자에서 사방으로 넘어지기 시작했고 긍휼을 구하며 울었다. 만일 내 양손에 검이 있었다 해도 그들이 넘어지는 만큼 빠르게 그들의 의자를 자를 수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거의 대부분의 청중들에게 첫 번째 충격이 임함으로 인해 2분 이내에 모두 엎어지거나 무릎을 꿇었다.”
..... 중략 .....
(7) 캐더린 쿨만
기적과 신유의 여종 캐더린 쿨만의 사역에서는 쓰러지는 현상이 거의 일상적으로 나타났습니다. 베니 힌 목사님의 「안녕하세요 성령님」이라는 책에 보면 다음과 같이 놀라운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캐더린 쿨만 여사가 뉴욕 순복음 실업인 대회를 마쳤을 때 그녀는 군중을 피하기 위해 부엌을 지나 엘리베이터로 안내되었습니다. 요리사들은 대회가 어찌 되었는지, 쿨만 여사가 어떤 사람인지 전혀 알지 못했으며, 그녀가 부엌을 통해 지나갔는지도 몰랐었지만 그들은 하얀 주방 모자와 앞치마를 두른 채 마룻바닥에 나둥그러졌습니다. 쿨만 여사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고 단지 그 옆을 지나갔을 뿐이었습니다.”그러니 집회 중에는 얼마나 더 대단했겠습니까? 실제로 쿨만 여사의 집회에서는 쓰러지는 현상이 아주 강력하게 일어났습니다.
(8) 마리아 우드워스 에터
마리아 우드워스 에터는 13살 때 예수님을 임금과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녀에게 “큰 거리와 울타리가 있는 거리로 나가라. 그리고 그에서 나의 잃어버린 양들을 모으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여자라는 사실 때문에 오랫동안 망설였습니다. 그때는 19세기 중엽으로 여자에게는 투표권도 주어지지 않았던 시대였습니다. 또한 여자가 설교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시대였습니다. 훗날 그녀는 다섯 자녀를 비극적으로 잃고 성경을 읽으며 혼자 성경을 공부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녀는 계속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여자들도 남자들과 다름없이 사용하신 것을 깨달았습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 모두에게 성령을 부어주신다는 성경 말씀에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녀는 계속 성경을 읽었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셨다는 사실과 현실 사이에서 씨름하며 성경에서 그 해답을 찾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던 중 마리아 우드워스 에터는 환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환상에서 천사들이 그녀의 방으로 들어와 그녀의 손을 잡고는 초장을 지나고 호수와 숲을 지난 후 강을 건너 황금물결 넘실대는 서쪽의 논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논에서 그녀가 설교를 하기 시작하자 벼들이 쓰러졌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네가 설교하면 벼들이 쓰러지고
사람들이 쓰러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환상을 보고 난후 그녀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복하지 않는 한 자신은 결코 행복한 삶을 살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이 환상을 본 후 그녀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예, 이제는 순종 하겠습니다.”라고 응답하였습니다. 마리아 우드워스 에터는 먼저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에서 설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녀가 설교를 하기 위해 사람들 앞에 섰을 때 그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가서 서기만 하면 내가 너의 입술에 나의 말을 넣어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셨습니다. 처음에 그녀의 설교를 듣기 위해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 친척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설교를 하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환상에서 본 그대로사람들이 울면서 마루에 쓰러지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쓰러졌던 사람들은 일어난 후 눈물을 흘리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때로부터 그 지방에서 마리아 우드워스 에터를 초청하는 교회가 늘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여러 교회의 목회자들이 마리아 우드워스 에터를 찾아와서 자신의 교회를 소생시켜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곧 그녀의 사역은 서쪽으로 확장되기 시작하여 아홉 번의 부흥 집회를 연속적으로 하였고 이백 번이나 설교를 하였으며 백 명이 넘게 나오는 교회 두 개를 개척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사역을 비판하였습니다. 또한 그녀의 사역의 타당성을 의심하는 목회자들이 교인들에게 그녀가 인도하는 집회에는 절대로 참석하지 말 것을 촉구하고 만일 그런 집회에 참석하다가는 광신에 빠질 것이라며 겁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집회에 대한 선전이 되었습니다. 그녀의 집회에서는 몰려든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았습니다. 또한 수천 명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성령님의 능력 아래서 쓰러져서 죽은 것과 같이 되었습니다. 심지어는 집회 참석 후에 집으로 돌아가던 사람이 성령에 의해 쓰러진 경우도 여러 번 보고되었습니다. 또한 집회에 참석하였던 사람들이 집회 장소에서 수 마일이나 떨어진 집에 있을 때에도 동일한 현상들이 일어났습니다.
이상 여러분께 교회사를 빛낸 하나님의 사람들의 삶과 사역 속에 일어났던 쓰러지는 현상에 대한 기록을 일부 소개해 드렸습니다. 물론 이외에도 많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이 현상이 절대로 이상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기에 충분하다고 판단되기 때문에 이것들만 소개했습니다. 이상의 사실들을 기억할 때 로이드 존즈의 다음과 같은 말은 틀린 말이 아닙니다.
“현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때때로 사람들이 기절하거나 바닥에 넘어지는 것 같은 성령의 권능을 느끼는 것이 부흥의 규칙처럼 되어가고 있다. 때때로 웃음의 발작, 신체적 경련이 있기도 한다. 때때로 사람들은 입신과 같은 무의식의 상태가 되어 몇 시간이고 그 상태로 있기도 한다. 이런 현상들이 부흥에 꼭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부흥이 있는 곳에 이런 현상들이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그렇습니다. 과거에 단순히 성장이 아니라 부흥이 일어나는 곳에는 대부분 쓰러지는 현상을 위시해서 여러 가지 신체적인 현상들이 동반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라인하르트 본케, 베니 힌, 까를로스 아나콘디아, 스티브 힐, 클라우디오 프레이전, 마헤쉬 차브다, 프란시스 맥너트, 질 오스틴, 랜디 클락, 존 아놋트... 등등 오늘날도 부흥이 일어나는 곳에서는 여전히 이런 현상들이 강력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현상들을 터부시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환영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 자체가 부흥은 아니지만 이것은 부흥이 일어날 때 동반되는 현상으로 하나님께서 일으키고 계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6. 신간 『길』에 나오는 내용
2. 영성운동이 길이 아니다!
전통적인 교회는 ‘나름’ 성경에 나오는 진리를 추구했습니다. 이것이 전통적인 교회의 장점입니다. 반면에 영성운동 하는 교회들은 ‘나름’ 성경에 나오는 성령님을 추구했습니다. 그들은 진리뿐 아니라 성경의 인물들을 통해 역사한 성령님을 원했습니다. 이것은 바람직한 것이며 전통적인 교회가 배워야 할 점입니다.
하지만, 영성운동은 한계에 부딪힌 전통적인 교회가 필요로 하는 돌파구가 아닙니다. 즉 영성운동은 길이 아닙니다. 개척한지 여러 해가 되도 부흥하지 않는 작은 교회 목사님들이 마지막 희망으로 영성운동집회에 몰려들던 때가 있었습니다. 저도 과거에는 그분들처럼 영성운동이 길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영성운동을 시작한지 10여년이 지난 지금 저는 영성운동이 길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제 말의 의미는 영성운동으로는 침체에 빠진 한국 교회가 다시 부흥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영성운동이 교회가 나아가야 할 길 즉 한국 교회의 희망이 아니라고 단정하는 이유는 다음 세 가지입니다.
(1) 영성운동은 상업화되었습니다.
중략
(2) 영성운동은 현상에 치우쳤습니다.
성령이 역사할 때 일어나는 현상 중에 사람이 쓰러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쓰러지는 현상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아마도 이 현상이 귀신론을 추종하는 사람들의 집회에서 많이 일어났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하나님의 역사로 사람이 쓰러진 기록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래서 오래 전 저는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는 책에서 꿈, 방언, 예언과 함께 쓰러지는 현상을 다뤘습니다. 쓰러지는 현상이 조나단 에드워즈, 조지 휫필드, 존 웨슬리, 찰스 피니, 제임스 맥그레디, 바톤 스톤, 캐더린 쿨만, 마리아 우드워스 에터 등 검증된 하나님의 사람들의 사역에서도 일어났던 현상이라는 것을 지적하며 변호한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쓰러지는 현상의 다른 면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저의 사역에서 쓰러지는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울산에서 교회를 개척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당시 전도동력세미나로 유명한 통합 교단의 민경설 목사님이 찰스 프란시스 헌터부부를 초청해서 양수리수양관에서 치유집회를 열었습니다. 찰스 프란시스 헌터는 조용기 목사님이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조장과 구역장 전체에게 한 권씩 선물한 “신유의 방법”이라는 책의 저자입니다. 저는 그 책을 읽고 큰 감동을 받았기 때문에 기대감을 가지고 참석했습니다. 집회 도중 찰스 프란시스 헌터로부터 안수기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홀로 예배당에 남아 기도하는데 성령 충만과 성령의 능력이 저에게 임하는 것이 느껴졌고 믿어졌습니다.
그 후 교회로 돌아와 새벽예배를 인도했는데, 새벽예배에 나온 사람이 어머니와 사모 두 사람뿐이었습니다. 겨울이라 25평정도 되는 예배당에 난로를 피워놓았는데, 아무 생각 없이 집사람을 난로 앞에 세워두고 안수하며 기도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갑자기 집사람이 뒤로 쓰러진 것입니다. 신기해서 저희 어머니를 위해 기도했는데 어머니 역시 뒤로 쓰러지셨습니다.
저는 쓰러질 것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랬다면 난로 앞에 사람을 세워두고 기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은 오징어가 아니니까요. 이것이 시작이었습니다! 그 후로 성도님들에게 안수할 때 쓰러지는 현상이 계속 일어났습니다. 어떤 이들은 쓰러져서 누워 있는 상태에서 치유를 받았고, 어떤 이들은 성령의 은사를 받았고,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만나거나 천국과 지옥을 보고 왔습니다. 그래서 그 뒤로 계속 성도들을 세워놓고 안수하며 기도해주었습니다.
그러면 시간을 빨리 앞으로 돌려서 지금은 어떨까요? 거두절미하고, 저는 사람들을 세워놓고 기도해준지 이미 여러 해가 지났습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쓰러지지 않아서가 아니라 ‘쓰러지는 현상’에 관심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제가 쓰러지는 현상에 관심을 끈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 쓰러지는 현상은 꼭 성령이 강하게 임해서 일어나는 현상이 아닙니다.
많은 사역자들이 사역하는 것을 지켜보고 또 제가 직접 사역을 하면서 알게 된 것은, 목회자나 성도가 쓰러지는 현상에 관심을 가지면 가질수록 그 현상이 증가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란한 현상만큼 성령의 기름부음이 증가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가 안수하고 기도해주었을 때 사람들이 쓰러졌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역을 자주 하자 나중에는 쳐다보기만 해도 사람들이 쓰러졌습니다. 성령의 불이 임하도록 기도해주면 기도 받는 사람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뜨거워서 비명을 지르고 도망을 갔습니다. 그리고 열을 식히느라 찬 물로 황급히 세수를 하곤 했습니다. 저는 은근히 그것을 즐겼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회의감이 들었습니다. ‘이 정도로 성령이 강하게 임하시는데 왜 병이 치유되지 않을까?’ 물론 치유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기대 이하였습니다. 저뿐 아니라 다른 사역자들을 보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사역에 거품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는 사람들이 쓰러지는 것이 아니라 중환자가 치유되는 것을 보기 원합니다.”
그 후로 저는 사람들을 세워놓고 기도해주는 일을 그만 두었습니다. 그 대신 치유의 기적이 강한 강사들을 주로 초청하고, 동역자들에게 치유사역을 하도록 독려했습니다. 그러던 중 약 3년 전부터 김옥경 목사님과 여러 동역자들을 통해 치유가 일어나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계속 치유가 강력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2) 쓰러지는 현상이 다분히 습관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약 10여 년 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몇몇 목회자들과 함께 초락도기도원에 가보았습니다. 기도원 원장님은 아주 좋은 분이셨습니다. 집회 때 그분이 손가락으로 성도들을 가리키기만 해도 쓰러지고 굴러다녔습니다. 능력이 대단해보였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춤을 추고 경배하느라 몸의 방향을 돌려서 목사님이 자신을 가리키는 것을 보지 못할 때는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일부러 짜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무언의 동의가 이루어지고 사람들이 의지적으로 쓰러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실제로 성령이 강하게 임하여 쓰러지는 사람들도 있지만 기도해주면 쓰러지는 것이 예의나 습관처럼 되어 버린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기도원에서는 목사님이 안수한 물이 색깔은 변하지 않고 맛만 포도주로 변하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마시면 취했습니다. 저는 처음부터 이 현상에 대해 부정적이었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의 기적은 흥미나 과시용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일어납니다. 사람의 필요에 반응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결과입니다. 만나가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로 다시는 내리지 않았고, 가나 혼인집에서 포도주가 떨어져 곤란한 때에 물이 포도주로 변한 것이 그 예입니다. 전에 우리 교회에도 잠시 온 적이 있는 멜 태리 목사님이 쓴 “급하고 강한 바람처럼”이라는 책 아시지요? 그 책에 보면 물이 포도주로 변한 간증이 나와 있습니다. 한두 번도 아니고 무려 60번 이상 그런 기적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멜 태리 목사님이 미국에 초청을 받아 갔는데, 미국에서는 아무리 기도해도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물었더니 주님이 이런 내적 음성을 들려주셨습니다.
“슈퍼마켓에 가서 포도주를 사거라!”
정글이나 오지에서는 기적 말고는 다른 대책이 없으니까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성찬식을 해야 되는데 포도주가 없어서 그런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하지만 포도주가 흔한 미국에서는 그런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 기적이 필요 없었기 때문입니다.이처럼 기적은 필요에 의해 일어납니다. 그런데 기도원 집회 때 괜히 왜 물이 포도주로 변합니까? 집회 중 필요한 것은 어정쩡하게 맛만 포도주처럼 변한 물이 아니라 새 술이신 성령님 자신입니다. 즉 성령의 충만과 성령의 기름 부으심과 성령의 역사가 필요할 뿐입니다.
3) 쓰러지는 것과 현상들이 아무리 강하게 일어나도 말씀이 없으면 집회가 공허합니다.
쓰러지는 것과 거룩한 웃음 등 영적 현상 분야에서 선두주자라고 할 수 있는 세계적인 강사님이 있었습니다. 이미 고인이시고 천국에서는 명예에 관심이 없을 것이므로 그냥 실명을 사용하겠습니다. 그분은 예수전도단 출신의 질 오스틴 목사님입니다.
질 오스틴 목사님은 굉장히 좋은 분입니다. 그분이 오륜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하실 때 대단했습니다. 현상으로 열렬하게 반응하는 목회자와 신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그런지 집회장 안이 온통 영적인 현상으로 가득했고 성령님이 강타하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어렵게 섭외를 해서 우리 교회에 모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는 현상에 초점을 맞추는 교회가 아니었기 때문에 기대한 것과 달리 집회가 너무나 공허했습니다. 현상이 어느 정도 일어나기는 했지만 저희가 원하는 주님의 깊은 임재와 성령님의 강력한 기름부음을 거의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저는 현상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뒤 신디 제이콥스 성회 때, 체안이 강사실에서 우리나라의 영성운동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해준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기도를 받은 목사님들이 비틀거리고, 쓰러지고, 웃고, 취하고, 신음소리를 내고, 진동하고 한 마디로 난리였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보면서 저는 별로 감동 받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들 중 순수하고 진실한 분들은 소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정도로 성령이 강하게 임하실 리가 없고, 또 성령이 그렇게 강하게 임하시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들의 사역이 그렇게 작고 초라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들과 달리 저는 기도를 받아도 쓰러지지도 않고 어떤 현상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분위기를 해치지 않기 위해 기도를 받지 않고 슬며시 그 자리를 빠져나온 일이 있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경험들을 통해서 저는 현상에 대해 재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현상에 집중하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성령님이 강하게 역사하실 때 쓰러지는 현상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저는 그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현상은 꼭 필요한 것도,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도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랜디 클락의 글을 좋아합니다. 그는 쓰러지는 현상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이 현상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을 보면 명확한 모델이 없다. 이 체험에 관하여 가르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중요하다. 이것은 하나님의 중심적인 역사가 아님을 나타내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 있어서 우선순위가 아니다.
이 체험을 장려하거나 권고하는 성경구절은 없다. 반면에 이 체험을 말리거나 금하는 성경구절도 없다. 성경은 체험을 분류하지만 설명하거나 신학적으로 다루도록 하지 않는다. 성경은 체험의 정확한 의미와 가치를 설명하는 것에 관하여 대부분 침묵하고 있다.이 체험에 관한 모델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필수적인 역사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려야 한다. 그래서 그것은 구원을 받거나 성령 충만과 같은 하나님의 중심적인 역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주변적인 역사이다. 단지 성령님이 역사할 때 생기는 현상이다. 이 체험은 많은 사람들의 생활에서 일어나는 성령 역사의 부수 효과이다.”
같은 맥락에서 릭 조이너 역시 “성령의 사역의 대체물로 감정주의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경고했습니다.
“감정주의의 이용은 회개의 증거로서 흐느낌(weeping)과 울부짖음(wailing)을 요구하거나 하나님으로부터 만져주심을 받았다는 증거로서 권능아래 쓰러짐 같은 것들을 요구하는 것이 포함될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모두, 진정한 성령 사역의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영으로 옮겨가기 시작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이러한 현상들을 요구할 때입니다.제1차 대각성운동이 일어났을 때, 조나단 에드워드가 인도하는 집회에서 가장 거칠고 가장 반역적이던 몇 사람이 바닥에 쓰러져서 24시간 동안, 거기 그대로 있었던 일이 자주 있었습니다. 그들은 변화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이상한 성령의 현상들이 대각성운동의 원료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에드워드는 ‘부흥을 방해하는 원수들보다 이런 현상들을 날조하여 꾸며낸 사람들에 의해서 대각성운동이 끝나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아시겠습니까? 쓰러지는 것과 영적인 현상들은 수용해야 할 것이지 추구해야 할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수많은 영성운동사역자들이 쓰러지는 것을 비롯해서 영적인 현상에 집착합니다. 그래서 안수를 할 때 사람들을 의도적으로 쓰러뜨리려고 힘을 주기도 하고, 갑자기 기합을 주듯 큰 소리로 기도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발을 걸기까지 합니다. 사역자들이 이렇게 기도하는 것은 깨어지지 않은 자만심과 허영심 때문입니다. 프란시스 맥너트는 “성령이 권능으로 오실 때”라는 책에서 사역자들에게 이런 주의를 주었습니다.
“목회자들이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때 그들이 쓰러지는 것을 보면서 느끼는 자만심과 허영심은 목회자들이 다스려야만 하는 유혹이 된다. 캐더린 쿨만이 기도했을 때 사람들이 쓰러지는 것을 내가 처음 보았을 때 나의 반응은 ‘와!’라는 감탄사였음을 기억한다. 우리 대부분은 사람들이 우리의 목회에 대해 이런 감탄사를 발하기를 바라고 있다. 정직하게 말한다면, 대부분의 우리 목회자들 안에는 어떤 방식으로든 군중들 속에서 두드러져 보이고 싶어 하는 무언가가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깊은 신앙심을 가졌다는 찬사를 받기 위해 큰 거리의 어귀에서 기도하기를 원치 않으셨다. '성령의 권능으로 사람들을 죽게 하는 일'(쓰러지는 현상을 지칭함)은 확실히 목회자들로 하여금 자랑하려는 오만의 시험에 들게 한다.왜냐하면, 그 현상은 목회에서 내세울 수 있는 가장 빛을 발하는 장관들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런 현상은 극적이고 가시적이며, 바로 나 '자신'과 직접 연결되어있기 때문이다.
나도 내 자신의 영 안에서 과시하고 싶은 욕구와 싸우기 위한 노력을 해야 했다. 집회를 갖는 동안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지 아닌지에 대해 초연한 태도를 갖도록 노력해야 했고, 그런 현상이 일어나게 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도록 분명히 참아내야 했다...
성령 안에서 안식하는 현상이 일어나도록 하기 위해 어떤 방법도 시도하지 말라. 또 한편으로 자신이 쓰러지기 시작한다면 쓰러지지 않으려고 저항하지 말라. 목회자들은 이런 일들이 일어나거나 일어나지 않거나 우리 자신의 욕구로부터 초연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실제로 많은 사역자들이 사람들이 쓰러지면, 그것을 특별한 능력이 자신에게 있는 표식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리고 거룩한 웃음이나 금가루가 생겨나는 현상들이 일어나면 성령님이 그 시간 강하게 역사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쭐합니다. 그러나 꼭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미 말했듯이 현상에 초점을 맞추면 현상이 빈번하고 요란해집니다. 그러나 현상만큼 실제로 성령님이 강하게 역사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점점 공허해집니다. 그러므로 절대 현상에 초점을 맞추면 안 됩니다. 우리는 현상을 성령 역사의 일부로 수용하되,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회개와 기도, 말씀과 찬양, 그리고 예수님과의 실제적인 교제와 변화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그래야 공허해지지 않고 영적으로 실제로 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영성운동은 쓰러지는 것을 비롯해서 거룩한 웃음, 금가루가 나타나는 것 등 현상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현상 쪽으로 치우쳤습니다. 그래서 현상은 요란하게 일어나지만 내용이 부실합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성도들도 하나 둘씩 이것을 눈치 채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과거에 영성집회로 몰려들던 성도들의 다수가 흩어지고 소수의 매니아들의 잔치로 전락해버렸습니다. 이것이 제가 영성운동은 길이 아니라고 말씀드리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3) 영성운동은 거품이 너무 심합니다.
여러 해 전 “대 부흥이 오고 있다”라는 책에서 저는 토론토 축복을 옹호하는 글을 썼습니다. 조용기 목사님이 예언한 펜사콜라 부흥이 일어난 후, 펜사콜라와 토론토와의 밀접한 관계 때문에 토론토 축복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으로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그 글을 쓸 당시에는 토론토를 이단시하는 풍조가 아주 강했습니다. 저는 당시 토론토와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정의감 때문에 위험을 무릎 쓰고 토론토가 이단이 아니라고 옹호하는 글을 썼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토론토 축복의 다른 측면에 대해서 말해야겠습니다. 저는 토론토 축복이 이단은 아니지만 동시에 이상적인 부흥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토론토 축복의 가장 큰 특징은 영적인 현상입니다. 즉 거룩한 웃음이라 불리는 현상입니다. 물론 조나단 에드워즈, 조지 휫필드, 존 웨슬리, 찰스 피니, 캐더린 쿨만의 사역에서도 쓰러지는 것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 현상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분들은 존경스러운 분들이지만, 그러나 완전한 모델은 아닙니다. 완전한 모델은 예수님 한 분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사역에서는 이런 현상들이 별로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을 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14: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예수님은 내가 하는 일을 너희도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하신 일은 무엇일까요? 즉 주님이 우리가 하길 기대하는 일은 무엇일까요? 그것을 밝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본문입니다.
마태복음 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마태복음 9:35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예수님이 한 일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회당에서 가르치시며”). 둘째로, 예수님은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셋째로, 예수님은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습니다(“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이것이 예수님이 하신 일입니다. 또 이것이 열두 제자와 바울을 포함한 토대적인 사도들이 한 일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저와 여러분이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토론토 축복은 이 세 가지 모두를 도외시했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외국 목사님이 존 아놋트 목사님에게 직언한 것처럼 토론토공항교회는 말씀이 약합니다. 그 교회는 진리를 옳게 분별하여 성경을 바르게 가르치는 일에 실패했습니다. 그들의 신학은 신앙주의에 가깝고 인자와 엄위 중 인자 쪽으로 너무 치우쳐 있습니다(롬 11:22).
또 토론토공항교회는 천국 복음을 전하고 있지 않습니다. 사영리처럼 메시지에 회개가 빠져있고 예수님의 주되심과 행함이 있는 산 믿음을 성경대로 충분히 강조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찾아오는 사람들의 다수를 알곡으로 만드는 일에 분명한 한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토론토공항교회는 거룩한 웃음과 쓰러지는 현상, 금니와 금가루 등 영적인 현상은 강하게 일어나지만, 예수님이 집중하셨고 우리가 하길 원하시는 치유와 축사는 상대적으로 약합니다. 심하게 말하면 없어도 될 것은 풍성하고 꼭 있어야 할 것은 부족한 곳이 토론토입니다.
불행한 사실은, 이것이 토론토 축복뿐 아니라 영성운동의 전반적인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토론토 축복처럼 영성운동을 하는 교회들의 다수가 진리를 분별하고 성경의 의미 그대로 가르치는 일에 약합니다. 얼마나 말씀이 약한지 세계적인 영성집회 강사라도 집회를 2번 이상 하는 것이 어려울 정도입니다.
또 영성운동을 하는 다수의 교회들이 전통적인 교회와 다름없이 신앙주의에 빠져있고 천국 복음을 제대로 전하지 않고 있습니다. 회개와 행함이 있는 산 믿음, 그리고 아버지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을 성경대로 충분히 강조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성운동을 하는 교회들은 안 그럴 것 같은데, 의외로 치유가 약합니다. 예를 들어, 영성운동 강사들 중 예언을 잘하는 강사들은 많습니다. 슈프레자 싯홀, 라이언 와이어트, 패트리샤 킹 목사님이 특히 기억에 남습니다. 그러나 치유가 강한 강사들은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그동안 우리가 초청한 영성운동 강사들 중에 치유가 강한 분들은 극히 소수였습니다. 그분들마저 한두 번뿐 3차 집회에서는 치유가 강력하게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흥미를 잃고 모이지 않아 재초청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상 설명해 드린 바와 같이, 영성운동은 예수님이 하신 일, 즉 교회가 진짜로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현상에 치우치는 엉뚱한 일에 열심이고, 정작 예수님이 하신 세 가지 일은 외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란하기만 하고 실속이 없습니다. 최근 우리 교회에서 열린 마지막 영성집회 때의 일입니다. 집회 시작시간이 되었는데도 본당도 차지 않을 정도로 참석자가 적은 것을 보고 강사님(이분은 아주 좋은 분이고 여전히 좋은 친구입니다.)이 제게 “성도들의 사모하는 마음이 다시 전처럼 증가해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제가 예의를 갖추어 정중하게, 그러나 솔직하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모함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주일낮예배 때는 사모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모입니다. 그리고 눈을 빛내며 설교를 듣습니다. 성도들이 문제가 아니라 영성집회 강사님들이 문제입니다. 영성집회는 설교가 너무 약하고 내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기대한 만큼 채워지지 않고 실망하는 일이 반복되다 보니 성도님들이 등을 돌리게 된 것입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성도님들이 충분히 사모했습니다. 사모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모였습니다. 그런데 간증만 대단했지 현장에서의 역사는 너무나 미미했습니다. 그리고 현상만 요란하고 비슷한 설교나 전에 한 설교를 다시 하는 등 말씀이 너무 무성의하고 부실했습니다. 게다가 영성운동의 트레이드마크라 할 수 있는 예언마저도 덕을 세우고 권면하고 위로하는 예언은 정확하나 미래에 대한 예언은 부정확할 때가 많았습니다. 예언이 마치 덕담처럼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이에 식상한 성도들이 외면한 것입니다. 이것이 현재 우리나라의 영성운동 집회에서 전반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슬프게도 저는 영성운동을 생각하면 다음 성경구절이 떠오릅니다.
마태복음 21:18-19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시장하신지라.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찾지 못하시고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시장기를 느낀 예수님이 열매를 기대하고 무화과나무로 다가가셨습니다. 그러나 잎사귀 밖에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많은 목회자와 성도님들이 영적으로 허기진 배를 움켜지고 영성집회에 참석해서 보니 간증과 현상 등 잎사귀만 가득하고 먹을 것 즉 하나님의 임재와 말씀과 치유의 떡은 없거나 너무 적었습니다. 그래서 영성운동 하는 교회들이 전통적인 교회만큼도 성장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영성운동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내친 김에 한 마디만 더 하겠습니다. 저는 영성운동으로는 대 부흥이나 대 추수가 일어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부흥회도 제대로 인도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부흥을 일으키겠습니까? 집회를 한두 번만 해도 말씀을 들을 것이 없어서 참석자들이 급감하는데 그들을 통해 부흥이 일어나겠습니까? 영성운동을 하는 강사들 중 누구를 강사로 초청하면 부흥이 일어나겠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영성운동이 길이 아니라고 솔직하게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론
백석 : 변승우씨는 기성교회를 비판하고 목회자들을 매도한다.
통합 : 변승우씨는 기성교회를 비판하고 그 반사적 이득을 통해 자신의 교회를 성장시킨다. 이처럼 변승우씨가 기성교회를 비판하는 것은 자신을 정당화시키려는 의도, 기성교회 교인들을 자신의 교회로 오게 하려는 의도, 그리고 다른 이단들과 같이 본인이 목회하는 교회만이 참 교회라고 주장하려는 의도이다.
기성 : 교회론에 있어서 기성교회들에 대한 성숙하지 못한 비난의 태도가 문제이다.
<다른 교회나 목회자들에게 지나치게 비판적이라는 주장에 대해>
『큰믿음교회에 대한 말말말들과 진실』 p.77-84
신간 『길』에 나오는 내용.
『큰믿음교회에 대한 말말말들과 진실』 p.143-176
<수평이동에 대해>
『내가 꿈꾸어온 교회』 p.89-94
『여호와의 산 그 거룩한 곳』 p.77-79
신간 『길』에 나오는 내용.
<다른 교회나 목회자들에게 지나치게 비판적이라는 주장에 대해>
1. 『큰믿음교회에 대한 말말말들과 진실』 p.77-80
기성교단의 질문 : 변 목사님이 쓰신 글이나 설교 동영상 등에서 보듯이 전체 한국 교회를 바벨론의 영적 창기가 되었다거나, 일방적으로 목회자들을 종교의 영에 사로잡힌 바리새주의로 몰아세우며, 이단사역자들에 대해 사탄의 졸개 등으로 폄하하고 격렬하게 비난하였습니다. 물론, 어느 정도의 건설적인 비판은 공감을 얻지만, 반면에 파괴적인 비판은 자신의 정당성을 상실하고, 자칫 사탄의 전술에 이용당할 수 있는 일입니다. 오히려 한국 교회에 치명적인 독버섯 역할을 하는 신천지나 통일교, 그리고 안증회 등에 대해 날 선 비판을 하는 것이 한국 교회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는 일이 아닙니까? 일방적으로 교회와 목회자들을 비난하는 것은 주님의 말씀처럼(마 7:1-3) 남을 비판하면 자신도 비판을 받는 것이 성경의 교훈이 아닙니까?
답변 : 제가 인격적으로 많이 부족합니다. 저의 성격이 직선적이고 좀 과격한 편이라서 말이 지나치거나 거친 것이 사실입니다. 그것은 제가 고쳐야 할 부분입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 전체가 잘못되었다는 의미로 말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그리고 한국 교회에 비판적이니 이단이다 혹은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선지자들 그리고 세례요한과 예수님 역시 당시의 교계와 종교지도자들에 대해 비판적이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마태복음 23장에 나오는 유대교 지도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비판은 결코 건설적으로 보이지 않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존 후스와 종교개혁자들 역시 아주 격렬하고 강도 높은 비판을 했습니다.
더구나 이단사냥꾼들에 대한 비판은 참으로 정당한 것입니다. 한국 교회와 교단들은 속히 그들의 실체에 대해 눈을 떠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획책으로 형제를 이단으로 참소하고 매도하는 범죄행위를 멈추어야 합니다. 극단적인 예로 우리 교회를 상대로 거짓 기사를 수차례 쓴 “교회와 이단”의 홈페이지에 가보십시오. 대부분의 기독교 방송과 신문, 교단, 큰 교회 목사님들 등 거의 모든 분들이 이단이거나 이단 옹호자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한기총을 비롯하여 한국 교회는 이들을 무책임하게 방치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자들의 글까지 멀쩡한 교회를 이단으로 정죄하는 자료로 사용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것입니다. 이단사냥꾼들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으나 첨부자료를 제시하는 선에서 멈추겠습니다.
한편, 비판이라고 다 같은 것이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은 현재의 이단사냥꾼들처럼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들과 세례요한과 예수님은 사람들을 회개시키고 살리기 위해 비판하고 책망했습니다. 저 역시 비록 인격이 부덕하여 말에 실수가 많고 표현이 지나칠 때가 있음을 인정하지만 그 동기만큼은 단순히 비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한국 교회를 회복시키고 다시 부흥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 중심을 헤아려주셨으면 합니다.
이 자리를 빌어 정직하게 제가 믿는 바를 말씀드립니다만, 저는 한국 교회 전체가 바벨론 같은 영적 창기가 되었거나 모든 목회자들이 종교의 영에 사로잡힌 바리새주의자라고 결코 믿지 않습니다. 단 한 순간도 그렇게 믿은 적이 없습니다. 단지 그런 사람들도 많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강하게 성토하는 말을 했을 뿐입니다.
여러분은 저를 죄수처럼 심문할지 몰라도 저는 피해자입니다. 그리고 그런 자들에 의해 쌓인 상처 때문에 감정적으로 격해져서 때로는 지나친 표현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어느 교단 안에든 진실한 목사님들과 신자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아마 어떤 목사라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목사는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평소 제가 강대상에서 자주 고백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흠을 잡기 위해 저의 한쪽 말만 인용하여 문제 삼고 있는 것입니다.
2. 신간『길』에 나오는 내용
(3) 전통적인 교회는 너무 정치적입니다.
전통적인 교회의 문제점 중의 하나는 교회 안에 부패한 정치인들을 닮은 ‘정치목사’들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교계에 흙탕물을 일으키는 미꾸라지들인 정치목사들은 어느 교단 안에나 존재합니다.
이들은 목회에는 영 소질이 없어 보입니다. 성도는 아예 없거나 몇 십 명밖에 되지 않는데 노회나 시 군 기독교연합회에서 한자리씩 하고, 성도가 수백 명 밖에 되지 않는데 총회나 한기총이나 한교연에서 한 자리씩 하려고 혈안인 자들입니다. 그리고 각종 모임과 행사에 참석하기를 좋아하고, 거기서 받는 거마비로 비루하게 연명하는 자들입니다.
물론 이들과 달리 거물 정치 목사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역으로 정치인들처럼 표를 얻기 위해 돈을 뿌립니다. 이런 현상이 거의 모든 교단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한 때 한기총회장의 금권선거가 드러나 교계가 시끄러웠던 적이 있습니다. 최근에는 강문호 목사님의 양심선언으로 감리교의 금권선거가 백일하에 드러났습니다. 정치목사들은 물론 정치장로들까지 돈을 요구하며 그 대열에 합류했습니다. 이것은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정말 탄식하지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저도 교계에서 비슷한 요구를 수도 없이 받았습니다. 오래도록 이단 시비를 겪으면서 백석과 기성과 한기총을 비롯하여 수많은 교계와 언론의 지도자들을 만났습니다. 그들 중 80-90%가 저에게 돈을 요구했습니다. 적게는 천만 원에서 많게는 10억이 넘는 돈들을 요구했습니다. 저에게 돈을 요구하지 않은 단체는 최근에 이단이 아니라는 판정을 내린 예성 교단이 처음일 정도입니다.
또 정치목사들은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고, 거만하게 하대를 하며, 교권을 휘두르고 압제하기를 좋아합니다. 이것은 결코 주님의 모습도, 주님이 원하시는 모습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목회자가 교권을 휘두르며 거들먹거리는 것을 엄금하셨습니다....
교단의 원로든, 증경 총회장이든, 총회장과 총회 임원이든 누구든 다른 목사님들 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형일 수는 있지만 주 안에서 동등한 형제들을 섬기라고 부름 받은 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현재 상당수 정치목사들이 보여주고 있는 보스 같은 모습은 매우 비정상적인 것입니다. 그들의 거만하고 위압적이고 고자세적인 모습은 바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섬기러 오신 주님이 아닌 교만한 마귀를 닮은 것으로 매우 역겨운 것입니다. 따라서 더 이상 자신을 흉물로 만들지 말고 늦기 전에 회개하고 겸손히 섬기는 자로 변화되시기를 중심으로 바랍니다.
그리고 정치목사들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정의감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초등학생에게도 있는, 옳은 것은 옳다 하고 아닌 것을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이 단순한 능력이 없습니다. 어린아이처럼 단순하게 옳은 것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정치적이고 복잡합니다. 그래서 손익을 계산한 후 옳은 것도 아니다 하고 아닌 것도 옳다고 합니다.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진리’나 ‘양심’이 아니라 ‘이익’ 혹은 ‘명예’입니다. 그래서 교계에 돈 봉투들이 판을 치고 중세암흑시대처럼 거짓으로 이단으로 매도하는 것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역사나 드라마에 보면, 정치인들이 거짓으로 누명을 씌워서 정적을 제거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목사들이 같은 일을 합니다. 이단 정죄가 거짓으로 얼룩져 있고 대부분의 이단시비가 수평이동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수평이동은 어느 교회나 있습니다. 그런데 수평이동이 왜 문제가 됩니까? 자기 교회로 오는 신자는 문제가 안 되고 다른 교회로 가는 것만 문제입니까? 이런 이기적이고 불공평한 잣대가 어디에 있습니까?
과거 저의 글이 ‘신앙계’(플러스 인생)에 여러 달 실린 적이 있습니다. 편집장의 말에 의하면 내용이 좋아서 반응도 매우 좋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중단되었습니다. 왜 중단되었는지 아십니까? 서울에서 목회하는 순복음교회 목사 중 한 사람이 자기 교회 성도가 큰믿음교회로 옮겼다고 더 이상 제 글을 싣지 말라고 강력하게 요구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당시 교회를 서초구에서 강남구로 옮기는 중이었는데, 강남구로 옮기면 여의도 순복음교회 지성전과 가까우니 글을 더 이상 올리지 말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편집장이 속이 상해서 목사들이 왜 이렇게 이기적이고 편협하냐며 울면서 제게 전화를 해온 일이 있습니다.
저는 지난 주 예성 교단에서 존경받는 한 어른을 만났습니다. 그때 들은 얘기입니다. 최근 예성 이대위에서 이단이 아니라는 결정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제가 그 교단에 들어가는 것을 강하게 반대하고 있는 목사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세 부류인데, 먼저 한교연에서 활동하면서 이단사냥꾼의 괴수 최삼경과 한패거리인 자들입니다. 그 중 한 증경총회장이 제일 극성스럽게 반대합니다. 그는 과거에 저에 대해 거짓에 근거하여 잘못된 결정을 내린 자입니다. 그러므로 양심이 있다면 반대가 아니라 무릎 꿇고 제게 용서를 구해야 할 자입니다.
또 증경총회장들 중 성도가 저도 모르는 사이 우리 교회로 옮긴 분입니다. 여러분 교단의 어른들이 속 좁게 이런 이유로 반대한다는 것 자체가 우습지 않습니까? 목사가 왜 이렇게 자기중심적입니까? 그릇이 겨우 이것 밖에 안 됩니까?
마지막으로 총회나 성결대학교에서 한 자리씩 하길 원하는 목사와 교수들이 저를 두려워한다고 합니다. 우리 교회의 규모나 재력으로 볼 때 제가 들어오면 3년 내에 교단이나 성결대학교를 장악할 것이고 자신들은 밀려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 중 특히 한교연에서 활동하는 최삼경 측의 증경총회장은 내가 이대위에 3천만 원을 주었다는 근거 없는 거짓말을 퍼트리더니, 교회가 경매에 붙여질 위험에 처한 예성의 한 교회에 1억 원을 지원한 것을 총회장이나 총무 혹은 이대위 위원장에게 준 것처럼 왜곡시켜서 거짓 소문을 퍼트리고 있습니다. 참고로 제가 지원한 목사님은 총회장도, 총회 임원도 아니고, 이대위 위원도 아닙니다. 그냥 평범하고 신실한 목사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왜곡시키다니, 과연 거짓말과 음해의 달인 이단자 최삼경의 똘마니답습니다. 얼마나 사악한 자입니까?.....
마태복음 7: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이것을 기준으로 현재 국내외에서 활동하고 있는 영성운동 지도자들을 점검해보십시오. 그러면 거짓 선지자가 소수가 아니라 다수임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 영성운동 하는 교회에서 여는 집회들을 보면 상당수가 등록비를 받습니다. 그리고도 지나친 헌금강조는 다반사고, 걸핏하면 예언이나 안수기도를 빌미로 거액의 작정헌금을 유도합니다. 심지어 헌금을 유도하기 위해 헌금봉투를 보고 예언하는 목사들까지 있습니다. 제가 겪어보아서 잘 아는데, 영성집회를 주최하는 지도자 중 적지 않은 수가 돈이 목적이며, 목사의 탈을 쓴 장사꾼들일 뿐입니다.
제가 울산에서 작은 교회를 목회할 때의 일입니다.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빌 해몬 박사 집회에 참석했는데, 집회를 주최한 목사님이 다음 날 예언기도를 받게 해준다고 하여 강사실 앞에서 무려 10시간을 기다린 적이 있습니다. 그동안 수많은 신자들이 돈을 두둑이 넣은 헌금봉투를 들고 빌 해몬에게 예언기도를 받으러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저에게 약속한 그 목사는 그날이 다 지나가도록 저를 못 본체 했고 끝내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역시 울산에서 목회할 때의 일인데, 출판사를 경영하고 있는 한 영성운동 하는 목사가 샨 볼츠를 우리 교회에 강사로 보내주었습니다. 그러면서 강사비는 자신이 주겠다며 비행기 값과 강사비보다 최소한 배 이상 되는 돈을 요구했고, 나중에는 추가로 돈을 더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주 샨 볼츠의 서울 집회 마지막 날 마지막 집회에 참석했는데, 얼마나 탐욕스러운지 바로 전 주에 집회한 교회의 담임목사임에도 불구하고 집회 전 기간의 참가비를 요구해서 다 낸 일이 있습니다.
역시 울산에서 목회할 때의 일로, 기름부음이 강하기로 유명한 롸드니 하워드 브라운 목사님이 윤석전 목사님과 흰돌산기도원에 강사로 섰습니다. 그런데 강사와 동행한 목사가 나와서 헌금 강조만 한 시간 이상했습니다. 그 후 그 부인이 나오더니 다시 적어도 30분 이상 헌금강조를 했습니다. 그렇게 헌금을 거둔 후 강사가 나와서 거룩한 웃음이라는 것을 한동안 웃게 한 후 들어갔습니다. 그것을 보고 실망한 윤석전 목사님이 영성운동에 마음을 닫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역시 울산에서 목회할 때의 일로, 전에 빌 해몬 박사의 집회를 주최한 목사가 최복규 목사님이 세운 한국중앙교회를 빌려서 베니 힌을 초청했습니다. 등록비는 5만원이었고, 베니 힌은 토요일 밤 한 시간만 서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베니 힌의 인기가 하늘을 찌를 듯 했습니다. 그래서 전국에서 그 한 시간을 참석하기 위해 3,000이상의 목회자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리고 토요일 밤 마지막 시간에 모두가 기대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강대상에 올라온 사람은 베니 힌이 아니라 베니 힌의 형 헨리 힌이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집회 주최 측이 베니 힌이 오지 못한다는 것을 몇 주 전에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신문광고를 내고 욕심 사납게 마지막 시간까지 돈을 받고 등록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끝내 등록비도 되돌려주지 않았습니다. 이 정도면 이들은 거짓 선지자가 아니라 사기꾼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서울 편입니다. 오래 전 부산에서 모아실 페레이라가 집회할 때 극적인 간증을 하므로 분위기가 고조되고 성도들의 믿음이 끓어올랐습니다. 기도만 하면 무슨 기적이든 일어날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즉각 치유사역을 하지 않고 그 분위기를 이용해 헌금을 거두는 것을 보고 실망한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서울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기독교100주년기념관에서 아프리카에서 사역하는 치유가 강력한 코보소 목사님을 초청하여 집회가 열려 호기심에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극적인 치유간증을 하여 모든 환자들의 마음을 들뜨게 하고 기대감을 심어준 후 치유사역을 해야 할 시간에 갑자기 “많이 심은 자는 많이 거두고 적게 심은 자는 적게 거둔다고 했으니 한 사람씩 나와서 돈을 헌금봉투에 넣지 말고 손에 들고서 씨를 뿌리듯이 강단 위에 뿌려라”라고 말했습니다. 모두가 다 보고 있는데 도대체 만 원짜리를 몇 장을 뿌려야 합니까? 10장 아니면 20장... 완전히 계획적으로 헌금을 뽑아낼 작정을 한 것입니다. 그 후에 환자를 위해 기도해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간증들이 너무나도 환상적이고 굉장했기 때문에 참석자들이 그 후에 있을 치유사역을 기대하며 돈을 뿌렸습니다. 금방 강단 위에 돈이 수북하게 쌓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날강도 같이 헌금을 거둔 후 강사는 환자를 위해 기도해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휙 들어가 버렸습니다. 얼마나 어이가 없고 거기 모인 중환자들이 얼마나 불쌍하던지요!
또, 타드 벤트리가 교계에서 문제가 되기 전, 미국 뉴저지에서 만나서 집회에 초청한 일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타드 벤트리를 저와 엮어서 저를 매도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데, 문신을 했으면 그가 했지 내가 했습니까? 그리고 문신이 좋아서 그를 초청하려고 했겠습니까? 치유의 기적을 통해 불신자들을 전도하려고 초청하려 한 것이지요. 그런데 초청에 응하면서 그는 사례비를 받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 대신 사랑의 헌금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랑의 헌금이 뭐냐고 물어보았더니 집회 때 나온 헌금을 집회 경비를 제외하고 전부 가져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크고 놀라운 사랑입니다? 이뿐 아니라 그는 너무 교만하고, 무례하고, 탐욕스럽게 행동했습니다. 그리고 제 멋대로 약속을 어겼습니다. 그래서 집회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그가 우리 교회에서 집회를 하고 싶다고 연락해왔을 때 저는 거절했습니다. 그에게 이미 질렸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타드 벤트리와 저와의 관계의 전부입니다. 그런데 이단사냥꾼들의 하수인들은 소설을 쓰듯이 말을 지어내고 부풀려서 타드 벤트리를 소재로 저를 공격합니다. 그들은 참으로 악하고 양심에 화인 맞은 자들입니다.
또 우리 교회에 대해 마귀적으로 열심히 거짓말을 만들어내어 자기가 발간하는 신문에 도배를 해서 여러 해 조직적으로 뿌리고 있는 순복음 목사가 함께 주최한 베니 힌 집회 때 일어난 일입니다. 미국에 사는 한 성도가 메일로 제게 탄식하며 알려준 내용입니다. 한국에 있는 언니가 말기 암이라서 베니 힌 성회 때 앞자리에 앉아 집회에 참석하고 기도를 받게 해줄 수 없느냐고 물었더니 집회 주최 측에서 1,000만원을 요구하더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어이없고 기가 막힌 일 아닙니까?
저는 심지어 샬롬선교교회에서 열린 한 영성집회 때 한국영성총연합회의 회장이 나와서 “예수님도 돈을 좋아하신다. 예수님도 돈에 약하다.”는 망발을 하며 헌금을 강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말을 들으면서 참으로 경악했고 제 귀를 의심했습니다. 이게 목사가 입에 담을 수 있는 말입니까? 베드로 사도는 거짓 선지자와 거짓 선생들의 특징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베드로후서 2:15-17 “그들이 바른 길을 떠나 미혹되어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르는 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자기의 불법으로 말미암아 책망을 받되 말하지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행동을 저지하였느니라. 이 사람들은 물 없는 샘이요 광풍에 밀려가는 안개니 그들을 위하여 캄캄한 어둠이 예비 되어 있나니”
예수님의 동생 유다 역시 거짓 선지자들을 발람에 빗대며 그들의 특징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유다서 11-13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따라 멸망을 받았도다. 그들은 기탄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니 너희의 애찬에 암초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요 자기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이요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으로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이라.”
그런데 오늘날 영성운동을 하는 목사들 중에 발람의 길을 걷고 있는 자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들의 특징은 탐심입니다. 이 성구들이 보여주듯이 회개치 않으면 그들 중 많은 사람이 지옥에 갈 것입니다.
(제가 비판한 사람은 이런 부류의 목회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비판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들을 칭찬해야겠습니까?)
3. 『큰믿음교회에 대한 말말말들과 진실』 p.143-176
위 책의 부록에 나오는 내용!
“큰믿음교회에 이단성은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나 목회자들에 대해 너무 비판적입니다.”라고 말씀하는 이대위 위원들에게 드리는 글!
이단사냥꾼들은 저희 교회를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 ‘율법주의’ 혹은 ‘신율법주의’라고 거짓으로 매도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저의 책들과 기성에 보낸 답변서를 통해 사실이 아님이 명백하게 입증되었습니다.
기성 이대위에서도 구원론에 대해서는 문제가 없다고 시인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한 이대위 위원이 “직통계시에 있어서는 위험성이 있는 것 아니냐?”라고 했다고 해서, 저는 즉각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한 전통적인 계시관”이라는 75페이지에 달하는 글을 써서 보냈습니다. 이것은 곧 책으로도 출판될 것이므로 궁금하신 분은 그때 구입해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말한“저희가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할 것이요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 그런 범주에 해당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제는 저희 교회의 예언이나 은사에 대해서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저를 아껴주시는 교계의 한 큰 어른이 직접 기성 교단에 전화를 걸어 “변승우 목사의 문제가 뭐냐?”고 물으셨을 때 “이단성은 없습니다. 다만 한국 교회나 목회자들에 대해서 너무 비판적입니다.”라고 답변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단성이 아닙니다. 물론 많은 분들이 “이단들은 한국 교회에 대해 비판적인데 큰믿음교회가 비판적인 것을 보니 이단이다.”라는 소리를 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이단만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선지자들도 그런 말들을 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악의적인 비난과 선지자적인 외침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선지자들이 단지 비난하려고 그런 말을 했습니까? 아닙니다. 사랑 때문에 외쳤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목회자 역시 교회를 아끼고 사랑하고 그리고 교회의 미래를 염려하는 타들어가는 마음으로 당연히 그런 종류의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단들처럼 한국 교회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며 한국 교회를 사랑합니다. 그 증거로 그래서 개척 초기부터 초교파적으로 교파를 가리지 않고 많은 교회와 목회자들을 도와 온 것입니다(매월 선교 구제비 약 1억 5천만 원).
성경을 정직하게 읽어보면, 참된 선지자들이 자주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과 성전 혹은 지도자들을 쳐서 예언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예언하는 것을 싫어했고 금하려고 했습니다.
사 30:9-10 “대저 이는 패역한 백성이요 거짓말 하는 자식이요 여호와의 법을 듣기 싫어하는 자식이라. 그들이 선견자에게 이르기를 선견하지 말라. 선지자에게 이르기를 우리에게 정직한 것을 보이지 말라. 부드러운 말을 하라. 거짓된 것을 보이라.”
렘 11:21-23 “여호와께서 아나돗 사람들에 대하여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들이 네 생명을 취하려고 찾아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말라. 두렵건대 우리 손에 죽을까 하노라 하도다.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그들을 벌하리니 청년들은 칼에 죽으며 자녀들은 기근에 죽고 남는 자가 없으리라. 내가 아나돗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곧 그들을 벌할 해에니라.”
암 2:11-12 “또 너희 아들 중에서 선지자를, 너희 청년 중에서 나시르 사람을 일으켰나니 이스라엘 자손들아 과연 그렇지 아니하냐?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너희가 나시르 사람으로 포도주를 마시게 하며 또 선지자에게 명하여 예언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암 7:12-17 “아마샤가 또 아모스에게 이르되 선견자야 너는 유다 땅으로 도망하여 가서 거기서나 떡을 먹으며 거기서나 예언하고 다시는 벧엘에서 예언하지 말라. 이는 왕의 성소요 왕의 궁임이니라. 아모스가 아마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요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배양하는 자로서 양 떼를 따를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데려다가 내게 이르시기를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 하셨나니 이제 너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니라. 네가 이르기를 이스라엘에 대하여 예언하지 말며 이삭의 집을 향하여 경계하지 말라 하므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아내는 성읍 중에서 창기가 될 것이요 네 자녀들은 칼에 엎드러지며 네 땅은 줄 띄워 나누일 것이며 너는 더러운 땅에서 죽을 것이요 이스라엘은 정녕 사로잡혀 그 본토에서 떠나리라 하셨느니라.”
심지어 세례요한이나 우리 주 예수님도 당대의 종교지도자들을 엄히 책망하셨습니다. 제가 성경으로 그것들을 입증해 드리겠습니다.
먼저, 선지자 이사야가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을 쳐서 예언하였습니다.
사 3:14-15 “여호와께서 그 백성의 장로들과 방백들을 국문하시되 포도원을 삼킨 자는 너희며 가난한 자에게서 탈취한 물건은 너희 집에 있도다. 어찌하여 너희가 내 백성을 짓밟으며 가난한 자의 얼굴에 맷돌질하느뇨. 주 만군의 여호와 내가 말하였느니라 하시리로다.”
사 9:14-16 “이러므로 여호와께서 하루 사이에 이스라엘 중에서 머리와 꼬리며 종려가지와 갈대를 끊으시리니 머리는 곧 장로와 존귀한 자요 꼬리는 곧 거짓말을 가르치는 선지자라. 백성을 인도하는 자가 그들로 미혹케 하니 인도를 받는 자가 멸망을 당하는도다.”
사 28:7-10 “이 유다 사람들도 포도주로 인하여 옆걸음치며 독주로 인하여 비틀거리며 제사장과 선지자도 독주로 인하여 옆걸음치며 포도주에 빠지며 독주로 인하여 비틀거리며 이상을 그릇 풀며 재판할 때에 실수하나니 모든 상에는 토한 것, 더러운 것이 가득하고 깨끗한 곳이 없도다. 그들이 이르기를 그가 뉘게 지식을 가르치며 뉘게 도를 전하여 깨닫게 하려는가? 젖 떨어져 품을 떠난 자들에게 하려는가? 대저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되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는구나 하는도다.”
사 56:10-12 “그 파수꾼들은 소경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라. 능히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요 누운 자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니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요. 그들은 몰각한 목자들이라. 다 자기 길로 돌이키며 어디 있는 자이든지 자기 이만 도모하며 피차 이르기를 오라 내가 포도주를 가져오리라. 우리가 독주를 잔뜩 먹자. 내일도 오늘같이 또 크게 넘치리라 하느니라.”
또,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가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을 쳐서 예언했습니다.
렘 1:15-19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북방 모든 나라의 족속을 부를 것인즉 그들이 와서 예루살렘 성문 어귀에 각기 자리를 정하고 그 사면 성벽과 유다 모든 성읍을 치리라. 무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에 절하였은즉 내가 나의 심판을 베풀어 그들의 모든 죄악을 징계하리라. 그러므로 너는 네 허리를 동이고 일어나 내가 네게 명한 바를 다 그들에게 고하라.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두렵건대 내가 너로 그들 앞에서 두려움을 당하게 할까 하노라. 보라 내가 오늘날 너로 그 온 땅과 유다 왕들과 그 족장들과 그 제사장들과 그 땅 백성 앞에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성벽이 되게 하였은즉 그들이 너를 치나 이기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렘 2:5-9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 열조가 내게서 무슨 불의함을 보았관대 나를 멀리하고 허탄한 것을 따라 헛되이 행하였느냐? 그들이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 곧 사막과 구덩이 땅, 간조하고 사망의 음침한 땅, 사람이 다니지 아니하고 거주하지 아니하는 땅을 통과케 하시던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말하지 아니하였도다.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기름진 땅에 들여 그 과실과 그 아름다운 것을 먹게 하였거늘 너희가 이리로 들어와서는 내 땅을 더럽히고 내 기업을 가증히 만들었으며 제사장들은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하지 아니하며 법 잡은 자들은 나를 알지 못하며 관리들도 나를 항거하며 선지자들은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무익한 것을 좇았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여전히 너희와 다투고 너희 후손과도 다투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렘 5:30-31 “이 땅에 기괴하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그 결국에는 너희가 어찌 하려느냐?”
렘 6:12-14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가 그 땅 거민에게 내 손을 펼 것인즉 그들의 집과 전지와 아내가 타인의 소유로 이전되리니 이는 그들이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남하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렘 8:8-11 “너희가 어찌 우리는 지혜가 있고 우리에게는 여호와의 율법이 있다 말하겠느뇨? 참으로 서기관의 거짓 붓이 거짓되게 하였나니 지혜롭다 하는 자들은 수욕을 받으며 경황 중에 잡히리라. 보라 그들이 나 여호와의 말을 버렸으니 그들에게 무슨 지혜가 있으랴! 그러므로 내가 그들의 아내를 타인에게 주겠고 그들의 전지를 그 차지할 자들에게 주리니 그들은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남하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 그들이 딸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렘 10:21 “목자들은 우준하여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므로 형통치 못하며 그 모든 양 떼는 흩어졌도다.”
렘 13:13-14 “너는 다시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보라 내가 이 땅의 모든 거민과 다윗의 위에 앉은 왕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예루살렘 모든 거민으로 잔뜩 취하게 하고 또 그들로 피차 충돌하여 상하게 하되 부자간에도 그러하게 할 것이라. 내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관용치 아니하며 아끼지 아니하고 멸하리라 하셨다 하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렘 23:1-4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목장의 양 무리를 멸하며 흩는 목자에게 화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스라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내 백성을 기르는 목자에게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내 양무리를 흩으며 그것을 몰아내고 돌아보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내가 너희의 악행을 인하여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내 양 무리의 남은 자를 그 몰려갔던 모든 지방에서 모아내어 다시 그 우리로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의 생육이 번성할 것이며 내가 그들을 기르는 목자들을 그들 위에 세우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려워하거나 놀라거나 축이 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렘 23:11-12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선지자와 제사장이 다 사특한지라. 내가 내 집에서도 그들의 악을 발견하였노라. 그러므로 그들의 길이 그들에게 흑암 중에 미끄러운 곳과 같이 되고 그들이 밀침을 받아 그 길에 엎드러질 것이라. 그들을 벌하는 해에 내가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렘 25:34-37 “너희 목자들아 외쳐 애곡하라. 너희 양 떼의 인도자들아 재에 굴라. 이는 너희 도륙을 당할 날과 흩음을 당할 기한이 찼음인즉 너희가 귀한 그릇의 떨어짐같이 될 것이라. 목자들은 도망할 수 없겠고 양 떼의 인도자들은 도피할 수 없으리로다. 목자들의 부르짖음과 양 떼의 인도자들의 애곡하는 소리여! 나 여호와가 그들의 초장으로 황폐케 함이로다. 평안한 목장들이 적막하니 이는 여호와의 진노의 연고로다.”
렘 32:31-32 “이 성이 건설된 날부터 오늘까지 나의 노와 분을 격발하므로 내가 내 앞에서 그것을 옮기려 하노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과 유다 자손이 모든 악을 행하여 내 노를 격동하였음이라. 그들과 그들의 왕들과 그 방백들과 그 제사장들과 그 선지자들과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거민들이 다 그러하였느니라.”
렘 50:6 “내 백성은 잃어버린 양 떼로다. 그 목자들이 그들을 곁길로 가게 하여 산으로 돌이키게 하였으므로 그들이 산에서 작은 산으로 돌아다니며 쉴 곳을 잊었도다.”
애 2:5-7 “주께서 원수같이 되어 이스라엘을 삼키셨음이여. 모든 궁을 삼키셨고 견고한 성들을 훼파하사 처녀 유다에 근심과 애통을 더하셨도다. 성막을 동산의 초막같이 헐어 버리시며 공회 처소를 훼파하셨도다. 여호와께서 시온 가운데서 절기와 안식일을 잊어버리게 하시며 진노하사 왕과 제사장을 멸시하셨도다. 여호와께서 또 자기 제단을 버리시며 자기 성소를 미워하시며 궁장을 원수의 손에 붙이셨으매 저희가 여호와의 전에서 훤화하기를 절기날과 같이 하였도다.”
애 4:11-13 “여호와께서 분을 발하시며 맹렬한 노를 쏟으심이여. 시온에 불을 피우사 그 지대를 사르셨도다. 대적과 원수가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갈 줄은 세상 열왕과 천하 모든 백성이 믿지 못하였었도다. 그 선지자들의 죄와 제사장들의 죄악을 인함이니 저희가 성읍 중에서 의인의 피를 흘렸도다.”
또, 선지자 에스겔이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을 쳐서 예언했습니다.
겔 22:26 “그 제사장들은 내 율법을 범하였으며 나의 성물을 더럽혔으며 거룩함과 속된 것을 분변치 아니하였으며 부정함과 정한 것을 사람으로 분변하게 하지 아니하였으며 그 눈을 가리워 나의 안식일을 보지 아니하였으므로 내가 그 가운데서 더럽힘을 받았느니라.”
겔 34:1-12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목자들을 쳐서 예언하라. 그들 곧 목자들에게 예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자기만 먹이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찐저! 목자들이 양의 무리를 먹이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냐? 너희가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의 무리는 먹이지 아니하는도다. 너희가 그 연약한 자를 강하게 아니하며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어 주지 아니하며 쫓긴 자를 돌아오게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고 다만 강포로 그것들을 다스렸도다. 목자가 없으므로 그것들이 흩어지며 흩어져서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되었도다. 내 양의 무리가 모든 산과 높은 멧부리에마다 유리되었고 내 양의 무리가 온 지면에 흩어졌으되 찾고 찾는 자가 없었도다. 그러므로 목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내 양의 무리가 노략거리가 되고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된 것은 목자가 없음이라. 내 목자들이 양을 찾지 아니하고 자기만 먹이고 내 양의 무리를 먹이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므로 너희 목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목자들을 대적하여 내 양의 무리를 그들의 손에서 찾으리니 목자들이 양을 먹이지 못할 뿐 아니라 그들이 다시는 자기를 먹이지 못할지라. 내가 내 양을 그들의 입에서 건져내어서 다시는 그 식물이 되지 않게 하리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 곧 내가 내 양을 찾고 찾되 목자가 양 가운데 있는 날에 양이 흩어졌으면 그 떼를 찾는 것같이 내가 내 양을 찾아서 흐리고 캄캄한 날에 그 흩어진 모든 곳에서 그것들을 건져낼지라.”
겔 44:10-13 “이스라엘 족속이 그릇하여 나를 떠날 때에 레위 사람도 그릇하여 그 우상을 좇아 나를 멀리 떠났으니 그 죄악을 담당하리라. 그러나 그들이 내 성소에서 수종들어 전문을 맡을 것이며 전에서 수종들어 백성의 번제의 희생과 및 다른 희생을 잡아 백성 앞에 서서 수종들게 되리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들이 전에 백성을 위하여 그 우상 앞에서 수종들어서 이스라엘 족속으로 죄악에 거치게 하였으므로 내가 내 손을 들어 쳐서 그들로 그 죄악을 담당하여 내게 가까이 나아와 제사장의 직분을 행치 못하게 하며 또 내 성물 곧 지성물에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리니 그들이 자기의 수욕과 그 행한바 가증한 일을 담당하리라.”
또, 사랑의 선지자 호세아도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을 쳐서 예언했습니다.
호 4:9 “장차는 백성이나 제사장이나 일반이라. 내가 그 소행대로 벌하며 그 소위대로 갚으리라.”
호 5:1 “제사장들아 이를 들으라. 이스라엘 족속들아 깨달으라. 왕족들아 귀를 기울이라. 너희에게 심판이 있나니 너희가 미스바에서 올무가 되며 다볼 위에서 친 그물이 됨이라.”
호 6:9 “강도 떼가 사람을 기다림 같이 제사장의 무리가 세겜 길에서 살인하니 저희가 사악을 행하였느니라.”
호 10:5-6 “사마리아 거민이 벧아웬의 송아지를 인하여 두려워할 것이라. 그 백성이 슬퍼하며 그것을 기뻐하던 제사장들도 슬퍼하리니 이는 그 영광이 떠나감이며 그 송아지는 앗수르로 옮겨다가 예물로 야렙 왕에게 드리리니 에브라임은 수치를 받을 것이요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계의를 부끄러워할 것이며”
또, 미가 선지자 역시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을 쳐서 예언했습니다.
미 3:1-4 “내가 또 이르노니 야곱의 두령들과 이스라엘 족속의 치리자들아. 청컨대 들으라. 공의는 너희의 알 것이 아니냐? 너희가 선을 미워하고 악을 좋아하여 내 백성의 가죽을 벗기고 그 뼈에서 살을 뜯어 그들의 살을 먹으며 그 가죽을 벗기며 그 뼈를 꺾어 다지기를 남비와 솥 가운데 담을 고기처럼 하는도다. 그때에 그들이 여호와께 부르짖을지라도 응답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행위의 악하던 대로 그들 앞에 얼굴을 가리우시리라.”
미 3:8-12 “오직 나는 여호와의 신으로 말미암아 권능과 공의와 재능으로 채움을 얻고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의 죄를 그들에게 보이리라. 야곱 족속의 두령과 이스라엘 족속의 치리자 곧 공의를 미워하고 정직한 것을 굽게 하는 자들아 청컨대 이 말을 들을지어다. 시온을 피로, 예루살렘을 죄악으로 건축하는도다. 그 두령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 치면서 오히려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 이러므로 너희로 인하여 시온은 밭 같이 갊을 당하고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고 성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과 같게 되리라.”
또, 선지자 스바냐도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을 쳐서 예언했습니다.
습 3:1-4 “패역하고 더러운 곳, 포학한 그 성읍이 화 있을찐저! 그가 명령을 듣지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의뢰하지 아니하며 자기 하나님에게 가까이 나아가지 아니하였도다. 그 가운데 방백들은 부르짖는 사자요 그 재판장들은 이튿날까지 남겨 두는 것이 없는 저녁 이리요. 그 선지자들은 위인이 경솔하고 간사한 자요 그 제사장들은 성소를 더럽히고 율법을 범하였도다.”
또, 선지자 스가랴도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을 쳐서 예언했습니다.
슥 7:4-7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온 땅의 백성과 제사장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칠십 년 동안 오월과 칠월에 금식하고 애통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너희의 먹으며 마심이 전혀 자기를 위하여 먹으며 자기를 위하여 마심이 아니냐? 여호와가 이전 선지자로 외친 말을 너희가 청종할 것이 아니냐?”
슥 10:1-3 “봄비 때에 여호와 곧 번개를 내는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 무리에게 소낙비를 내려서 밭의 채소를 각 사람에게 주리라. 대저 드라빔들은 허탄한 것을 말하며 복술자는 진실치 않은 것을 보고 거짓꿈을 말한즉 그 위로함이 헛되므로 백성이 양같이 유리하며 목자가 없으므로 곤고를 당하나니 내가 목자들에게 노를 발하며 내가 수염소들을 벌하리라.”
슥 11:4-5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는 잡힐 양 떼를 먹이라. 산 자들은 그들을 잡아도 죄가 없다 하고 판 자들은 말하기를 내가 부요케 되었은즉 여호와께 찬송하리라 하고 그 목자들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는도다.”
슥 11:15-17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또 우매한 목자의 기구들을 취할지니라. 보라 내가 한 목자를 이 땅에 일으키리니 그가 없어진 자를 마음에 두지 아니하며 흩어진 자를 찾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강건한 자를 먹이지 아니하고 오히려 살진 자의 고기를 먹으며 또 그 굽을 찢으리라. 화 있을찐저 양 떼를 버린 못된 목자여! 칼이 그 팔에, 우편 눈에 임하리니 그 팔이 아주 마르고 그 우편 눈이 아주 어두우리라.”
슥 13:7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
또, 선지자 말라기 역시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을 쳐서 예언했습니다.
말 1:6-14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일찐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찐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주의 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함을 인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기를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 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 그러나 너희는 말하기를 여호와의 상은 더러웠고 그 위에 있는 실과 곧 식물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하여 내 이름을 더럽히는도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폐스러운고 하며 코웃음하고 토색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여호와의 말이니라. 떼 가운데 수컷이 있거늘 그 서원하는 일에 흠 있는 것으로 사기하여 내게 드리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니 나는 큰 임금이요 내 이름은 열방 중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말 2:1-9 “너희 제사장들아 이제 너희에게 이같이 명령하노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만일 듣지 아니하며 마음에 두지 아니하여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려 너희의 복을 저주하리라. 내가 이미 저주하였나니 이는 너희가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라. 보라 내가 너희의 종자를 견책할 것이요 똥 곧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 너희가 그것과 함께 제하여 버림을 당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이 명령을 너희에게 내린 것은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이 항상 있게 하려 함인줄을 너희가 알리라.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은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라. 내가 이것으로 그에게 준 것은 그로 경외하게 하려 함이라. 그가 나를 경외하고 내 이름을 두려워하였으며 그 입에는 진리의 법이 있었고 그 입술에는 불의함이 없었으며 그가 화평과 정직한 중에서 나와 동행하며 많은 사람을 돌이켜 죄악에서 떠나게 하였느니라. 대저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하겠고 사람들이 그 입에서 율법을 구하게 되어야 할 것이니 제사장은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가 됨이어늘 너희는 정도에서 떠나 많은 사람으로 율법에 거치게 하도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니 너희가 레위의 언약을 파하였느니라. 너희가 내 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율법을 행할 때에 사람에게 편벽되이 하였으므로 나도 너희로 모든 백성 앞에 멸시와 천대를 당하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또, 세례요한 역시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을 쳐서 예언했습니다.
마 3:7-10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
또한, 예수님의 친동생이며 사도인 유다도 당시의 거짓 목자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유 1:11-13 “화 있을찐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 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좇아 멸망을 받았도다. 저희는 기탄 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니 너의 애찬의 암초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요 자기의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이요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에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이라.”
그리고, 예수님은 성령의 역사를 귀신의 역사로 매도하는 바리새인들에게 무서운 경고를 하시며 그들을 독사의 자식이라고 부르셨습니다.
마 12:22-35 “그때에 귀신들려 눈 멀고 벙어리 된 자를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그 벙어리가 말하며 보게 된지라. 무리가 다 놀라 가로되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니 바리새인들은 듣고 가로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사단이 만일 사단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저희가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나무도 좋고 실과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실과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실과로 나무를 아느니라.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마태복음 23장 한 장 전체를 다 할애하여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매섭게 질타하는 설교를 하셨습니다.
마 23:1-39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화 있을찐저 소경된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우맹이요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금이냐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예물이냐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그러므로 제단으로 맹세하는 자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으로 맹세함이요. 또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이로 맹세함이요. 또 하늘로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로 맹세함이니라.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가로되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예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 됨을 스스로 증거함이로다. 너희가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구박하리라.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게 돌아가리라.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한국 교회의 바르지 못한 점을 지적하거나, 설교자들이 말씀에 물을 타서 가르치거나 탐심과 명예심에 사로잡힌 정치적인 목사들의 잘못을 지적하며 회개를 촉구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경적인 것입니다. 더구나, 지금 한국 교회는 “개독교”라는 소리를 들으며 맛 잃은 소금처럼 불신자들에게마저 짓밟히고 있습니다. 교회는 마이너스 성장으로 돌아섰고, 목회자들은 더 이상 존경받지 못합니다. 그리고 초등학생부터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젊은이들이 교회에 등을 돌리고 있고, 안티 기독교 세력은 국민들에게 큰 호응을 얻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때야말로 한국 교회와 목회자들에 대한 건설적인 비판과 회개가 절실히 필요한 때입니다.
이단 판정은 교회와 목회자에게 사형선고와 같은 것이며 이단의 죄는 살인죄와 같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을 지옥으로 끌고 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살인죄의 경우 사람을 죽였느냐? 아니냐? 이것만을 다루어야 합니다. 화냈냐? 욕했냐? 한 대 때렸냐? 이런 것을 묻고 다루는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이단시비도 이단사설을 가르치느냐? 아니냐? 에 초점을 맞추고 그것을 다뤄야 합니다. 그래야 제대로 된 이단시비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이단시비는 이단성이 없는 것이 밝혀져도 별의별 지엽적인 이유를 다 들어 흠집을 내고 깨끗하게 손을 들어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이미 억울하게 매도당하고 인격살해를 경험한 목회자와 교회를 다시 한 번 죽이는 일입니다. 따라서 조사 결과 이단성을 발견하지 못했으면 깨끗하게 이단이 아니라고 손을 들어주어야 옳은 일입니다.
물론 저는 제가 다 잘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몇몇 교단들에 의해 조직적으로 거짓으로 매도를 당하고, 몇몇 거짓된 목사들은 저희 교회에 대해서 상습적으로 거짓말을 지어내어 조직적으로 유포하고, 또 많은 목회자들이 거짓말을 근거로 모 교단이 “집회참여주의”라는 조치를 내리자 주보에 부풀려서 이단으로 판정되었다고 대대적으로 광고를 올리고, 또 교계의 부패한 인사들로부터 이런저런 방법으로 금품이나 불의한 요구를 받는 일들을 여러 차례 겪으면서 마음이 상할 대로 상했으므로 저의 발언이 때로는 강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리고 긍정적인 면은 적게 언급하고 부정적인 면을 많이 언급하므로 균형을 잡지 못한 점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 자신의 부족을 깊이 통감하고 있으며 고치려고 결단하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단성이 없다는 것이 밝혀졌으면 이단성이 아닌 문제로 흠집 내지 말고 깨끗하게 손을 들어주는 용기를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수평이동에 대해>
1. 『내가 꿈꾸어온 교회』 p.89-94
여기서 수평이동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교회는 수평이동 때문에 공격을 많이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공격받아야 할 일입니까? 목사가 양심을 버리고 다른 교회에 다니는 사람을 자기 교회로 오라고 강요하면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는데 성도들이 자발적으로 옮기는 것은 전국 어느 교회에서나 있는 일이고 왈가왈부할 것이 못 됩니다.
그런데도 많은 목사들이 자기 교회에도 수평이동이 있으면서 비양심적으로 수평이동을 공격합니다. 그러면서 자기 의에 사로잡혀서 의로운 척합니다. 물론 소수지만 그렇지 않은 분도 있습니다. 높은뜻숭의교회 김동호 목사님은 모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당당하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천안에 ‘높은뜻씨앗이되어 교회’를 개척했다. 이유가 뭔가?
─ 높은뜻숭의교회가 가졌던 8천 평 정도의 땅이 있었다. 여기에 기독교 학교를 세우려 했는데, 그 전에 교회가 있으면 그 일이 좀 수월할 것 같았다. 그래서 개척한 거다. 다른 이유는 없다. 개척 소식이 있자 수평이동을 염려하는 이들이 있다. 사실 높은뜻숭의교회도 수평이동으로 성장했다는 비판이 있었다.
─ 내가 이것에 할 말이 많다. 한 가지 묻자. 수평이동 없이 성장한 교회 하나만 대보라. 한 교회도 없다. 많은 사람들이 큰 교회로만 수평이동이 생긴다고 하는데 작은 교회로는 과연 없을까? 있다. 지금은 농경사회처럼 정착의 시대가 아니다. 이동의 시대다. 따라서 모든 교회에 다 수평이동이 있기 마련이다. 수평이동을 비판하는 목회자의 교회에도 수평이동이 있다. 그 사람들은 다른 교회 교인이 자기 교회로 오는 것엔 아무 말 안 한다.
이동원 목사님께서 지구촌교회로 수평이동 되는 걸 막은 적이 있다. 다른 교회 교인이 오면 등록을 안 받았다. 나는 그 일에 찬성하지 않았다. 물론 대형 교회가 교인들을 빨아들인다는 단점이 있지만 그건 수평이동의 한 면일 뿐이다. 다른 면이 있다. 사람들은 이걸 못 본다. 나도 동안 교회를 목회하면서 다른 교회 교인들을 못 오게 한 적이 있다. 그런데 후에 하나님께 굉장히 죄송했다. 한 교인이 우리 교회 왔는데 안 받아주니까 ‘그럼 나는 어떻게 하느냐’며 통곡을 하더라. 그때 깨달았다. 교인들에게도 그들만의 형편이 있다는 걸. 그들이 바보가 아니다. 대형 교회라고 무조건 가는 게 아니라는 얘기다. 다 사정이 있고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수평이동을 막는 건 그런 교인들을 무시하는 처사다. 그리고 헌법에도 위반이다. 교회를 선택할 권리는 교인들에게 있지 교회에 있지 않다. 헌법소원을 내면 아마 교회가 질 거다.”
여러 해 전 수많은 목회자들이 따르는 대전의 어느 목사님의 교회에 부흥회를 인도하러 간 적이 있는데, 그분이 제게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 유대인들은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좇았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오시자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그것은 수평이동입니다. 또 예수님 오기 전에 제자들이 세례 요한을 좇았습니다. 그 후 예수님 오시니까 베드로부터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그것도 수평이동입니다. 그러므로 수평이동은 성경적인 것입니다.”
혼의 눈으로 보면 수평이동이 부도덕해 보여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성도들도 수평이동 때문에 지나치게 고민하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간단합니다. 참된 목자면 열심히 섬기고 같이 일하고 참된 목자가 아니면 떠나면 되는 것입니다. 수평이동은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대학교가 같지 않은 것처럼 교회도 다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편지를 보낸 교회들과 예수님이 편지를 보낸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보면 결코 같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짜 교회 또는 은혜 충만한 교회를 찾아가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당연한 것입니다. 여러분, 솔직히 말해서 교회들이 다 건강합니까? 목사들이 다 진실합니까? 분명 그렇지 않습니다. 문제가 있는 교회들도 많고 엉터리 목사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다음과 같은 말씀들이 나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마 7:15 “거짓선지자들을 삼가라.”
마 15:14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딤후 3: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그런데 교회를 옮기지 않고 어떻게 이 말씀에 순종할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때로 수평이동은 불가피한 것입니다. 어떤 목사들은 교회를 옮기면 저주를 받는다고 협박합니다. 가족 중에 누가 죽는다는 극단적인 말을 하는 목사도 보았습니다. 이런 자들은 목사의 자격이 없는 자들입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왜 교회를 옮길 자유가 없습니까? 집도 이사할 수 있고, 학교도 편입할 수 있고, 직장도 이직할 수 있는데 교회는 바꾸면 안 됩니까? 왜 안 됩니까? 그것은 다 목사들이 자기중심적이어서 만들어낸 엉터리 룰일 뿐입니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저는 목사는 소경인데 성도들의 눈은 열린 경우를 많이 봅니다. 그럴 경우에도 계속 충성해야 됩니까?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친히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진다.”고 경고하셨기 때문입니다. 제 말이 심하게 들릴지 몰라도 예수님이 목사들 밥벌이하라고 십자가를 진 것이 아닙니다. 교회 사업 잘하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진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목적은 영혼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목사를 세운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가 미혹되어서 복음을 제대로 안 전하고, 성령을 터부시하고, 예수님께로 인도하지 않는 그런 교회가 의외로 많습니다. 그 경우 그런 교회를 떠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쓸데없이 수평이동 탓이나 하고 있지 말고 바른 목사가 되고 실력을 닦아서 경쟁력이 있는 교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2. 『여호와의 산 그 거룩한 곳』 p.77-79
여러분도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 교회는 그동안 수평이동 때문에 공격을 많이 받았습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시기심에 사로잡혀 사실과 다르게 ‘양 도둑’이라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평가입니다. 목회자들의 인식이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교회들 중 다른 교회에서 한 사람도 안 온 교회는 없습니다. 수평이동 없는 교회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렇다고 목사들이 다 도둑입니까?
우리 교회 성도들 중에 제가 신천지처럼 다른 교회에 들어가서 도둑질해 온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어디서 온 것입니까? 스스로 가출한 것입니다. ‘이런 설교 듣고는 더 이상 못 살겠다. 이런 종교적인 답답한 예배로는 더 이상 만족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가출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그 교회에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자꾸 빠져 나가는 그 교회 목사에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가출한 양들이, 있을 데가 없어서 헤맬 때 신천지나 구원파 등 진짜 이단들이 이 양들을 노립니다. 그런데 가출한 양들이 이렇게 헤매다가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처럼 편안히 쉴 수 있는 큰믿음교회를 발견한 것입니다. 그리고 찾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양 도둑입니까? 어떻게 자신들도 다른 교회에서 성도들이 오면 받으면서 이것을 문제 삼습니까? 자기 교회에 오면 문제가 없고 다른 교회에 가면 양 도둑이고, 그 교회 문제가 있고… 이것은 그 말을 하는 목사들이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라는 것을 드러낼 뿐입니다. 그러므로 양심이 있다면 다시는 그런 억지를 부리지 말아야 합니다.
기왕 말이 나온 김에, 이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오늘날 교회마다 심방전도사가 많습니다. 심방전도사가 많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어찌 보면 우리 교회만 다니고 다른 교회에는 가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엔 심방전도사가 없습니다. 우리 교회는 대문이 활짝 열려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오면 다 받아줍니다. 우리 교회에서 다른 교회로 가면 그 교회에서는 안 받아주겠습니까? 당연히 그곳에서도 받습니다. 심지어 이단이라고 거짓말로 매도하면서까지 우리 교회 성도들을 빼앗아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스스로 오는 성도들을 받지 말아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교회도 다른 교회들처럼 교회에 자발적으로 오는 성도들을 받습니다. 그런데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가는 사람을 붙잡지 않습니다. 대개 다른 교회들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오는 사람은 받고 가는 사람은 심방을 통해서 가지 못하도록 붙잡습니다. 하지만 저는 갈 사람은 가야 된다는 주의입니다. 그래야 교회가 평안합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가 평안한 이유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불평 있는 사람은 그가 가고 싶은 교회로 가도록 그냥 놔둡니다.
3. 신간 『길』 에 나오는 내용.
오래 전부터 큰믿음교회의 문제점으로 지적된 것 중의 하나가 수평이동이었습니다. 사실 이것은 문제 삼을 일이 아닙니다. 수평이동은 어느 교회나 있는 일이고 우리는 양심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마저도 옛 말입니다. 왜냐하면 치유부흥과 함께 회심성장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교회에 등록하는 신자들의 다수가 처음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가장 구원받기 힘든 종류의 사람들이 치유부흥을 통해 지속적으로 구원 받고 있습니다. 더구나 치유부흥을 통해 구원받은 사람들 중 상당수가 타 교회에 등록하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변승우 목사의 신학적인 배경
통합 :변승우씨의 신학적 배경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저는 보수적인 신학교인 성결대학교 신학과 82학번이며 예성 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고 지금까지 64권의 책을 저술하였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저의 설교들은 회원수 4만 8천명이 넘는 큰믿음교회 카페에 공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개척 8년 만인 현재 큰믿음교회는 재적성도 1만 5천 7백 명 이상이 되었습니다.
상식에 속하는 말이거니와 이단시비는 이단사설 때문에 일어나야 합니다. 요즘처럼 교단 간에 혹은 학자 간에 차이가 나는 이설이나, 성령의 은사와 역사, 혹은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자발적인 판단과 결정에 의해서 일어나는 수평이동을 근거로 이단시비를 벌이는 것은 불의한 것이고 그 자체가 심판받아야 할 악입니다.
저희 큰믿음교회는 이단사설을 가르치는 것이 전혀 없다는 것 외에도 다음 몇 가지를 생각해보면 금방 이단이 아님이 드러납니다.
1. 국내외의 저명한 목사님들이 저의 책의 추천서를 써주셨습니다.
2.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만드는 신앙계에 저의 글이 여러 차례 실렸습니다.
3. 예수교대한성결교회 “목회자추계대학”에 강사로 초청받아 총회장님과 전국의 목사님들이 모인 자리에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4. 장로교 합동정통 교단 목회자사모세미나에 초청받아 전국에서 오신 사모님들 앞에서 말씀을 전하여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5. 미래한국신문, 경향신문, 스포츠서울 등 세상 신문들까지 북한동포구출과 가난한 성도들에게 주기적으로 전세금을 지원하는 선한 일에 감동 받아 교회를 취재하고 모범적인 교회로 평가했습니다.
6. 한국에서 통합교단이 악질적으로 저를 이단으로 모함한 이후인 2010년에도, 대만 순복음 교단에서 저를 정기총회 주강사로 초청하였습니다. 그때 전한 말씀이 “교회가 변해야 세상이 변한다.”라는 책으로 출판되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주간지 <시사저널>이 창간 23주년 기념 특집으로 “한국을 이끌 차세대 리더 300명”을 선정하여 발표하였습니다. 그 중 ‘개신교’ 분야 5명 중 1명으로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제가 선정되셨습니다. 이번 조사는 시사저널에서 미디어 리서치 전문가 1,500명에게 의뢰하여 정치, 경제, 문화, 과학기술, 의료... 개신교 등 한국사회 전반에 걸쳐 ‘한국을 이끌어 갈 차세대 리더들’을 선정한 것입니다. 그 결과 ‘개신교’ 분야에서 부산 호산나교회 홍민기 목사님, 안산 꿈의 교회 김학중 목사님, 새로운교회 한홍 목사님, 세계로금란교회 주성민 목사님과 함께 제가 선정된 것입니다.
한기총과 합동에서 이단으로 정죄한 진짜 이단 최삼경의 악의적인 거짓말과 천인공노할 증거조작에 의해(한국과학기술연구원의 강순방 박사님이 쓴 『읽는 자는 깨달을찐저』를 통해 이미 증명되었음.) 큰믿음교회는 억울하게 이단으로 매도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진짜이단이 정통교회를 이단으로 매도한 것입니다. 이 상황에서, 이번 기사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놀라운 것입니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시사저널의 창간 목적 때문입니다. 브리태니커 사전에 소개된 대로 시사저널의 창간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고 허위를 배격하는 참 언론매체로서, 어떤 이익집단에도 구애받지 않고 사안(事案)에 따라 지지 또는 비판하는 것”입니다.
한편, 우리는 이런 조사가 행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고, 기사가 나간 후 5일이 지난 후에, 그것도 한 성도님이 우연히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발견했습니다. 그럴 정도로 철저하게 객관적이고 공정한 조사를 한 것입니다. 이번 기사는 양심에 화인 맞은 직업적인 이단사냥꾼들과 돈과 명예와 이익만 좇는 교계의 일부 정치목사들이 한 통속이 되어 큰믿음교회를 일방적으로 매도하고 있는 가운데 일어난 일입니다. 결국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세상의 언론을 통해서 큰믿음교회가 이단이 아닌 정통적인 교회요, 한국 교회를 이끌어나갈 차세대 리더 중의 하나라는 사실을 확연히 드러내신 것입니다.
최근 발간된「차세대 코드 23」에서 박제이 선교사님은 저와 일면식도 없는 목사이지만 다음과 같은 글을 썼습니다.
“큰믿음교회와 변승우 목사
변승우 목사는 겸손하게 웃을 줄 아는 보통 사역자이다. 그러나 말씀을 성령의 조명으로 해석하여 삶으로 적용하는 분야에서 탁월한 영적인 심도를 설파하는 은사가 있다. 그래서 그의 명설교는 깊은 분별력으로 성령의 뜻을 그대로 해석하여 낸다.
변승우 목사야 말로 성령운동을 조리 있게 사역하며 말씀에 뿌리를 두는 이상적인 사역을 추구하고 있다. 그는 영 분별의 은사도 있기 때문에 이단을 분석하는 분야에 제일 적임자로 볼 수 있다. 만나본 적은 없으나 아주 호감이 가는 설교자이며, 한국교회를 이끌어갈 리더로서 손색이 없다고 본다.
창간 23주년 <시사저널>은 지난 10월 개신교회 차세대 리더로서, 전통교단이 아닌, 새로운 개혁의 선구자들을 지명하였다... 변승우 강남 큰믿음교회 목사 등도 개신교 분야에서 주목받는 차세대 리더로 꼽혔다.(시사저널 11월 22일)”("차세대 코드 23” 141-142p)
저자 소개: 박제이
* 동아시아 선교사(1997-현재까지)
* 연세대학교 졸업
* 미국 Capital Bible Seminary 수학
* Catholic University of U.S.A graduate school 수학
* 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 졸업
* HK ICS(International Christian School) 이사 역임
* East-Asia HK, 비즈니스 매니저, 회계관 역임
그리고 불과 한 주도 안 되어 역시 일면식도 없는 한경직 목사 기념교회 초대목사이신 조병철 목사님의 "이단논쟁 믿을 수 있나?" 책이 출판되었습니다. 그 책의 “핍박받는 리더들에 대한 성서적 신학적 변론”이고, 이 책의 표지에 제 이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책 안에 이런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변승우 목사 – 이단인가, 성경적 지도자인가?(45p~47p)
변승우 목사에 대해서(성명서는 큰믿음교회 변승우 목사를 변승우씨라고 칭했다). 그가 한국교회뿐만 아니라 해외 한인교회에서 지속적으로 신사도운동과 관련해서 다양한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가? 성명서는 변승우 목사가 일으켰다는 다양한 문제를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다. 나아가서 그가 한국 주요 교단에서 이단으로 규정된 목회자라고 재차 확인했다. 과연 그가 이단인가? 아니면 성경적 지도자인가?
우선 필자는 변목사를 만나본 적도, 그의 설교를 들어본 적도 없다. 소문은 한 3~4년 전에 들었다. 필자가 아는 강남에 사는 여집사 몇 분이 큰믿음교회가 지하층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을 때 소문을 듣고 그곳에 가서 주일예배를 드렸다. 필자가 서울에 방문차 나갔을 때 그분들로부터 예배에 참석한 소감을 물었다. 그들은 긍정적으로 좋았다고 대답했다. 1년여 전 이곳 로스앤젤레스 한인 타운에 소재한 큰믿음교회 지교회에 어느 외국인 강사가 와서 저녁집회를 인도 한다는 신문광고를 보고 필자가 집회에 참석한 적이 있다. 미국인 강사는 간결하며 조리 있게 그리고 조용하면서도 확신 있게 말씀을 전했다. 모인 인원은 성인 약 70명 정도였다. 오늘날 장로교 전통교회 배경을 가지고 컨템포러리 교회의 영성과 신학을 연구하는 필자가 들어봐도 아무런 잘못된 것을 발견할 수 없었다. 오히려 강사의 훌륭한 메시지에 은혜가 되었다. 필자는 본인이 익숙하지 않은 교회나 잘 모르는 설교자가 인도하는 예배에 참석하게 되면 늘 기도드리는 것이 있다. “하나님, 오늘 집회에 가서 말씀을 들을 때 강사의 말씀을 통하여 제게 말씀해주시고 은혜 받게 하소서.”하며 마음의 준비를 하고 주님을 경배 드리는 마음을 갖고 참석한다. 그날 저녁도 그랬다. 예배를 마치고 사람들은 기도 받으러 앞으로 나가거나 예배당을 빠져나가거나 했다. 한참 앉아 있다가 일어나서 예배당 벽에 세워진 책꽂이를 보았다. 평신도들을 위한 여러 종류의 책들을 꼽아 놓고 교인들에게 신앙서적을 공급하는 것 같았다. 서가에 있는 책들을 유심히 보니 서울의 큰믿음교회에서 출판한 책들도 있었다. 책 한, 두 권을 보니 케네드 헤이긴Kenneth Hagin 목사님의 책을 번역한 것이었다. 헤이긴 목사님은 어떤 분인가?
케네드 헤이긴 목사님은 오클라호마 주 털사에서 70년 가까이 크게 목회하다가 수년 전에 작고하신 분이다. 그는 17세 때 중병에 걸려 침상에 누워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미국의 대공황 때였다. 병원에서조차 그의 병을 치료할 수 없어 퇴원시킨 환자였다. 가난해서 먹을 것조차 궁핍했다. 그러나 그는 어렸음에도 마가복음 11:23-24의 말씀을 붙들고 믿음으로 기도했다. 그의 간절한 기도는 응답받았다. 병상에서 일어난 그는 건강을 회복하도, 그때부터 살아계시고, 응답하시고, 치유하시는 하나님을 전했다. 성경학교에 들어가 신학도 공부했다. 성경말씀을 읽고 또 읽어 150번 가량 읽었다. 후에 그는 천막집회를 하며 전 미국을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그의 집회에는 시작 시간은 있지만 마치는 시간은 정해놓지 않았다. 성령님의 계속 역사하시면, 집회가 2~5시간 넘어가는 것은 예사였다. 하루에 세 번씩 모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전 미국에 퍼지는 방송설교를 50년 가까이 했다. 80여 나라에 방송 전도를 실시했다. 매주 지역에서 교도소전도와 치유전도를 실시했다. 털사에 큰 교회도 지었다. 2년제 신학교를 운영해서 한 해에 1,000명씩의 신학생을 졸업시켰다. 그는 다산의 저작자였다. 대소책사를 150권 썼다. 설교집 같은 것이나, 강해설교 같은 내용이 아닌 책들로, 성도들의 신앙증진에 필요한 책들이다. 그가 쓴 “믿는 자의 권세”The Believer’s Authorith, “성령과 은사”The Holy Spirit and His Gifts, “성령받는 성서적 방법”The Bible Way to Receive the Holy Spirit, “기름부음”A Fresh Anointing 같은 책들은 오순절 신학에서 클래식이 되고 있다. 그가 발행하는 월간지 “믿음의 말씀”The Word of Fiath은 수10년 동안 미국 최대 발행부수를 기록하였다. 큰믿음교회 변승우 목사가 그의 책에 공감하는 부분이 있어 번역해서 교인들에게 읽게 하였다면, 변목사는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통하여 교인들이 신앙성장을 하도록 돕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그는 성령의 임재 역사에 열려있으며, 말씀을 가지고 구원의 복음을 능력있게 전하는 성경적인 지도자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그를 한국 주요교단에서 이단이라고 한다면 오히려 한국 주요교단 이단대책위원회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필자가 듣기에 변승우 목사는 전 미국에서 예언사역을 하는 미국의 예언 사역자 밥 존스 Bob Jones를 청빙해서 집회를 했다고 들었다. 아마도 큰믿음교회에서 예언사역을 수용하고, 예언은사를 활용하니까 한국교회에서 이단을 규정한 것 같다. 그렇다면 예언사역이 잘못된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이단으로 규정하는 한국 주요교회의 결정이 잘못된 것인가를 성경적으로 규명해봐야 한다...
예언의 은사에 대하여
과연 요즘에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예언’은 잘못된 것이고 ‘직통계시’는 잘못된 것인가? 아니면 바람직한 것이며, 성령님의 직접적 계시가 온당한 것인가? 이 모든 것에 대한 판단의 기준이 되는 성경말씀은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필자는 고전 12:10에 나오는 ‘예언의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주시는 은사라고 믿는다. 그리고 그 은사뿐만 아니라 다른 신령한 은사들도 우리의 신앙생활과 하나님 나라 복음전도에 유익하며(고전 12:7), 필요한 은사들이라고 굳게 믿는다. 또한 직통계시는 하나님께서 필요하시면 어떤 상황에서 어떤 사람에게 얼마든지 주실 수 있는 은사라고 믿는다. 필자는 지금도 살아 계셔서 역사하시고 활동하시는 히브리인의 신관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오늘도 성령을 통하여 우리와 대화하시고 인도하시기를 원하신다.
(중략)
우리는 위의 성경말씀에서 예언의 은사와 하나님으로부터 신자에게 주시는 계시의 일면을 고찰했다. 그렇다면 예언과 계시(반대자들은 이를 ‘직통계시’라고 말하며 공격의 어휘로 사용한다) 등이 잘못된 것인가? 절대 잘못된 것이 아니고 온전히 성경적이다.
2) 변승우 목사에 대하여 (215p)
성명서는 변승우 목사가 한국 주요교단에서 이단으로 규정된 것을 재차 확인하였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그가 미국에서 예언사역자를 초정하고 예언을 인정했다고 해서 이단으로 규정되었다면, 그것은 변목사가 이단이 아니라 그를 이단으로 규정한 주요교단의 이단대책 위원들에게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 주요교회가 예언사역을 부인하고 수용하지 못하는 것은 아직도 칼빈주의자나 근본주의, 세대주의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주요교단의 숫자가 전혀 문제가 아니다. 역사는 여럿이 합동하여 소수의 참된 자를 핍박한 실례가 얼마든지 있다. 예수님과 사도들이 받은 핍박이 가장 좋은 예다.…
필자는 이렇게 ‘합동하여’ 악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보면 잘못된 지식으로 대중의 선동에 따라 광우병 촛불데모에 나서는 군중들을 보는 것 같다. 아니면 대원군의 쇄국정책처럼 ‘영적 쇄국정책’을 보는 것 같다. 만일 예언의 은사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신령한 은사가 21세기 교회에 복원되어 활발히 기능을 발휘하는 것이 성령의 뜻이라면, 위의 정죄는 심각하게 성령을 훼방하는 일이 된다. 성경은 말한다: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성에 모였나이다.’(행 4:27-28)
‘합동’측 이란 이름이 우연히 지어진 것이 아니다.
4) 누가 혼란과 무질서를 야기 시켰는가?
정상적이고 건전한 교회와 성도들에게 혼란과 무질서를 야기 시켰다는 비난에 대하여 – 필자는 묻고 싶다. 어느 교회가 정상적이고 건전한 교회인가? 성명서 저자들의 교회인가? 정상적이고 건전한 교회의 성경적 근거는 무엇인가? 성령의 은사의 현재 활동성을 주장하는 교회가 정상적인가? 아니면 은사종료를 주장하는 교회가 정상적인가? 만일 성명서 저자들의 교회가 정상적이고 건전한 교회라면, 이는 착각이다. 저자들이 속한 교단이 근본주의와 세대주의에 빠진 교회인 것을 아는가? 오늘날 역사적 주류교단 교회에서는 근본주의와 세대주의의 신학을 신뢰하지 않는다. 거의 무시하는 수준이다. 1930년대부터 조롱의 대상이 되었던 것을 기억하는가? 이미 공동묘지로 간 교리로 알고 있는데 아직도 죽은 망령이 살아 움직이며 교회를 혼란시키고 있는 것을 아는가? 성령의 은사종교이론을 믿은 교인들의 숫자는 17억 크리스천 중에서 아주 소수에 불과하다. 그들의 수가 적은 것은 고사하고, 그들은 자기들의 교회가 신학적으로 정통이요 보수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 역시 다른 교인들이 공인하지 않는 그들만의 구호요,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통한 구원사역을 부정하는 성경적 이단성에 스스로 빠져있는 것을 아는가?
성명서는 ‘상투적인 수법으로’라는 경멸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비성경적으로 비난하는 근본주의자들이 즐겨 쓰는 말이다. 오히려 필자는 이들이 여기서 상투적인 수법으로 성령의 은사를 활용하며 전도하는 건전한 전도자들을 비난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이는 편협한 근본주의자들이 자기의 멘탈리티를 노출하고 있는 것이다. 그 좋은 형제 사랑의 말은 다 버리고 이런 말을 골라서 공격한다. 성명서는 변승우 목사에게 당연히 불러야 할 ‘목사’라는 칭호를 빼고 ‘씨’라고 썼다. 이 역시 편협한 근본주의자들의 왜곡된 인격을 노출시키고 있는 것이다. 만일 양식 있는 사람들이 성명서 저자들에게 ‘이 사람들, 목사이기 이전에 기본이 안 돼 있는 사람들이네’라고 하면,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그래서 많은 크리스천들이 전문적으로 남을 비난하는 이들을 멀리하는 실정이다.”
저자 소개 : 조병철 목사님
『한양공대 화공과』, 『장로회 신학대학Christian Theological Seminary 미국 인다아나 Graduate School of Union Theological Seminary(PCUSA, 미국 버지니아, 구약 전공)』, 『서울 영락교회 전도사』, 『한경직 목사 기념교회 초대목사』, 『새문안교회 부목사』, 『서울 장로교 신학교 강사』, 『워싱턴 영락교회 담임목사』, 『로스앤젤레스 빌리그라함 전도대회 한인교회 대표/통역』, 『컨템포러리 목회원 원장(현)』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한기총에 이어 정통 보수 교단인 예성 이대위에서 저의 책들을 읽고 저를 직접 불러서 조사한 후에 이단이 아니며 통합을 위시해서 다른 교단들이 내린 결정이 거짓에 의해 이루어진 것을 확인했다고 발표한 점입니다. 어느 교단이 통일교, 천부교, 여호와의 증인, 몰몬교, 하나님의 교회, 신천지 등 진짜 이단을 조사하여 이단이 아니라고 할 교단이 있겠습니까? 그런 교단은 단 하나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성에서 우리 교회를 조사한 후 이단이 아니라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것은 우리 교회가 이단이라면 결코 내려질 수 없는 결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