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산 사건으로 최고훈장 받은 찬란한 친일 경력
거물급 친일경찰 최연(창씨명 高山淸只)은 일제하 총독부 경찰제도에서 조선인에게 허락된 최고의 직급인 경시(警視)의 직위에서 8·15 해방을 맞았다. 그는 1918년 서른의 나이에 함흥경찰서 순사라는 말단직책으로 경찰에 첫발을 내디뎠다. 늦은 출발이긴 했지만 4년 만에 경부보 시험에 합격한 최연은 신포(新浦) 등 함경도 내 각 지방경찰서를 두루 거치면서, 일제의 식민지 지배 도구인 경찰로서의 자질과 충성심을 인정받아 승진을 거듭했다. 그는 1942년에 경시 계급을 단 후, 황해도 보안과장과 경기도 형사과장 등 경찰조직의 요직에 차례로 올랐다. 일제하에서 20여 년을 넘게 경찰에 있었던 최연이 주로 담당했던 업무는, 대부분의 조선인 경찰들과 마찬가지로 일제의 식민지 침략에 반대하는 조선인의 저항 곧, 일체의 독립 운동과 독립 운동자들을 철저히 탄압하고 감시하는 일이었다. 그 중에서도 보천보(保天堡) 사건, 일명 '혜산 사건'은 개인적으로 친일경찰 최연이 남긴 최대의 업적이자 1930년대 민족해방 운동 사상 최대의 검거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해방 후 반민족 행위자 특별 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 재판에서 최연이 저지른 반민족적 행위로 밝혀진 세칭 혜산 사건[일제 관헌의 기록상 공식 명칭은 '중국 공산당의 조선 내 항일인민전선 결성 및 일지(日支)사변(중일전쟁) 후방교란 사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본은 중일전쟁을 계기로 대륙침략을 노골화하면서 소위 '사상 정화 공작'이라는 이름의 정책을 내걸고 국경 지대에 근거지를 둔 조선인의 항일 운동에 대해 대대적인 탄압을 실시했다. 1937년 10월경 부터 혜산, 장백 일대에서 항일 투사와 이들이 조직한 독립 운동 조직에 가담한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두 차례에 걸친 대규모의 검거는 이듬해까지 계속되었다. 1938년 가을, 당시 혜산경찰서의 사법주임이자 고등주임이던 최연은 함남 갑산군 운흥면 속신리를 중심으로 일어난 조선 독립을 목표로 한 보천보 사건의 수사를 지휘하는 과정에서 박달(朴達) 이하 약 3백여 명의 독립 운동자들을 체포, 투옥시켰다. 그 결과 사형 4명과 무기징역 등을 포함, 166명의 애국지사들이 희생되었고 그 공로로 최연은 일제 경찰의 최고훈장인 경찰 공로기장(功勞記章)을 받았다. 40여 년의 일제 통치 기간 동안 불과 20여 명의 경찰에게 수여되었을 뿐인 더없는 영예가 주어졌던 것이다. 이로써 과거의 친일행각이 움직일 수 없는 사실로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반민특위 공판정에 선 최연은 여전히 자신을 변명하기에 급급하였다. 이에 언론으로부터 '악질 왜경의 궤변'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다음의 인용은 1949년 4월 13일 오전 10시 50분부터 열린 반민특위 공판에서 서순영(徐淳永) 특위재판장의 심문에 대해 최연이 답변한 내용을 실은 것이다. 재판장 : 왜정시 경찰 공로기장을 받은 것은 경찰관으로서 최고의 영예가 아니었던가? 피고 : 네 그렇습니다. 재판장 : 피고는 혜산 사건 관계자 박달 외 수백 명을 체포하지 않았는가? 피고 : 직접 체포는 함남 특고(特高) 과장 시원(柴原)의 지휘로 하였고, 피고는 그후 검증(檢證)에만 참가하였습니다. 재판장 : 그런데 동 사건으로 공로기장을 받은 이유는? 피고 : 저는 그 공로기장을 받기가 참으로 싫었으며, 그것은 그 사건의 직접 공로자로서가 아니라 치안확보 등의 관계로 혜산경찰서에 수여된 것입니다. 명실공히 일제하 한인 경찰의 최고 고참의 한 사람이 민족 정기를 바로잡는 역사적 심판의 무대에서 행한 신상 발언치고는 너무나 옹색한 변명이었다.
기회주의자 암중 모색
최연이 조선의 해방이 임박했음을 알게 된 것은 1945년 8월 8일 오전, 경기도 경찰부 회의실에서 열린 일제 경찰의 마지막 정례 과·서장 회의에서였다. 조선인 경찰로는 형사과장 최연 외에, 보안과장 전봉덕(田鳳德, 해방 후 육군 헌병사령관 역임, 그후 변호사)과 성동서장 손석도(孫錫度, 해방 후 중부서장, 그후 변호사)등 최고 간부만이 참석할 수 있는 자리였다. 이 자리에서 초연은 심각한 표정을 한 일본인 경찰부장 오카(岡九雄)로부터 일본 외무성과 연합국 사이에 종전에 관한 협상이 진행중이며 따라서 '일본의 항복은 시간 문제'라는 내심 놀라운 정보를 듣게 된다. 이날의 회의 내용은 극비에 부쳐졌다. 그러나 기정 사실로 예고된 일본의 패망은, 30여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오직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위해 봉사하고, 그 대가로 입신과 개인적 영달을 누려온 최연에게는 남다른 불안을 안겨다 준 충격적 사실이 아닐 수 없었다. 예상대로 8월 15일 일본은 항복을 선언했고,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 군인과 민간인의 생명과 안전을 보장한다는 조건으로 여운형(呂運亨)이 총독부로부터 권력을 인수했다. 이에 따라 조선의 치안 문제도 당연히 조선인의 관할로 넘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총독부의 경찰권 이양 약속은 뜻밖에도 즉각 이행되지 않았다. 이에 여운형은 16일 오후, 독자적으로 경찰권을 접수하기로 하고,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의 이름으로 해방 전 종로서 보안주임이던 윤명운(尹明運) 경부 등 5,6명의 전직 조선인 경찰관들로 하여금 '한국경위대(이하 경위대)'를 조직하게 했다. 이는 과도적 조치였으나 조선인이 주체가 되는 해방 조선의 경찰이 최초로 출현한 것이어다. 그러나 건준 게열의 '경위대'는 해방으로 인해 민중들로부터 지탄과 위협을 받게 된 대부분의 친일경찰들이 자취를 감추어 버린 채 숨어서 사태의 추이를 주시하고 있었던 탓에, 기존의 경찰 조직을 온전히 인수하지 못했다. 그래서 건준 세력에 동조한 일부의 전직 경찰과 치안 단체를 통해 서울 시내의 일부 경찰서를 전격적으로 접수한 것 이외에 달리 조직적 활동을 전개하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다수의 친일 조선인 경찰들은 일본 경찰이 다시금 경찰력을 정비하고 자체 경비에 나서 건준의 치안 활동을 무력화시키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해방을 맞아 친일경찰로서의 전력을 과감히 청산하기는커녕 자신들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기회주의자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건준 주도의 민족 세력의 민족 세력이 친일 잔재를 청산, 민족 정신에 기반한 독립 국가를 세우기 위해서 극복해야 할 최대의 잠재 세력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건준 주도의 경위대 설립 소식을 접한 경기도 경찰부의 최고 간부 최연은 전봉덕 등 수십 명의 조선인 경찰 간부를 소집, 회의를 통해 전직 일제 경찰의 방향과 진로를 결정하고자 했다. 이 자리에서의 논의는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정리되었다. 먼저 노장급 경찰들은 주로 건준 진영에 가담하여 스스로를 건준의 통제를 받는 경찰조직으로 재편할 것을 제의했다. 이는 민중의 지지를 확보한 건준과 제휴함으로써 친일경찰에 가해지는 민족반역자라는 비난을 모면하고 일제하의 행적을 건국 활동으로 희석시킬 수 있다는 점이 고려된 것이었다. 이에 반해 소장층 경찰 간부들은 일시적인 보신을 위해 건준 산하의 경찰에 편입되는 것을 결사 반대했다. 무엇보다도 직무상 대부분이 일제 식민지하에서 사상범 및 독립 운동자의 검거에 앞장선 경찰들이니만큼, 이념적으로나 행동적으로나 여운형이 주도하는 민족주의 세력과의 결합이 껄끄러웠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이 이들로 하여금 민족 진영의 편에 서기를 주저하게 만들었다. 끝내 이견을 좁히지 못한 최연은 '사태를 주시하고 당분간 치안 유지에 전념한다'는 잠정적 결론으로 모임을 해산한 뒤 건준 경위대에 가담하지 않은 대다수의 조선인 경찰들과 함께 방관적 자세를 취했다. 결국 이 회의에서 조선인 경찰들의 관심사는 어디까지나 해방 이후의 유동적인 상황에서 권력의 동향을 파악하여 자신들의 안정과 기득권을 보장할 수 있는 최상의 방책을 찾자는 데 있었을 뿐, 주체적 반성 위에서 민족 경찰로 거듭나려는 의지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미군정청에 친일 경찰을 추천
1945년 9월 14일, 아놀드 군정 장관은 "한국인과 일본인으로 구성된 경찰관들을 모두 한국인으로 조직하기 위해 유능한 한국인들을 채용하겠다"는 성명을 통해 군정 실시 후 첫 경찰 정책을 발표했다.이 조치로 경기도 경찰부장 오카를 비롯한 일인 경찰 간부들이 해임되었다. 그러나 간부급의 조선인 친일경찰들은 그대로 유임되었으므로 아놀드의 성명은 사실상 조선인 친일경찰의 존재를 합법화시킨 것에 다름없었다. 총독부로부터 경찰권을 인수한 군정은 서울 시내 10개 경찰서장을 임명하는 작업으로 군정 경찰의 업무를 개시했다. 이때 미군정의 현상유지 정책에 의해 일제하에 이어 미군정에서 경찰직을 그대로 유지하게 된 최연은 경기도 경찰부장에 취임한 미군정 장교 스털링 대위를 보좌하여 전 경기도 경찰부장 오카와 함께 군정 경찰의 첫 인사에 깊이 개입하게 된다. 인사 문제의 전권은 물론 미군정 담당자인 스털링에게 있었으나 개개 인사를 발탁하고 배치하는 등의 실무에 있어서는 현지 사정에 밝은 오카와 최연의 추천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 결과 예상대로 새로 임명된 10개 서의 경찰서장들 거의 모두가 일제 식민지하에서의 경찰관료 출신이었다. 종로서장 이성실(李聖實), 중부서장 손석도, 동대문서장 김정제(金正濟), 성동서장 이희상(李熙祥), 성북서장 김일석(金一錫), 서대문서장 최운하(崔雲霞), 마포서장 박주식(朴朱植), 용산서장 김정채(金貞彩), 영등포서장 윤명운, 창덕궁서장 변종현(邊宗鉉)이 그랬고, 이어 후속 인사로 서울시를 제외한 경기도 내 총 21개 경찰서에 취임한 서장들 또한 반 수 정도가 일제 경찰 출신이었다. 이와 함께 경기도 경찰부도 인사권을 갖는 경무과장직에 최연이 기용된 것을 비롯해 보안과장 전봉덕, 형사과장 홍병식(洪秉湜), 정보과장 한승린(韓承麟), 건축과장 정덕현(鄭德鉉), 경제과장 문형식(文亨植), 소방과장 김정배(金晶培) 등 일제 경찰의 간부급 인사들로 진용을 정비했다. 미군정하 경찰 조직의 정비 과정에서 보는 바와 같이 최연은 미군정의 실시를 맞아 그간의 관망적 태도에서 벗어나 군정 경찰의 창설에 적극적으로 협력, 군정 권력을 배경으로 경찰 조직 내에 친일 세력 재등장의 발판을 마련하고, 군정 경찰 내에 편입된 다수의 친일 경찰 인맥의 막강한 실력자가 되었다. 또한 친일경찰 최연과 친일 지주 출신으로 보수 우익 정치 세력을 대표한 장택상(張澤相)과의 만남은 친미적 보수 우익 세력을 육성, 지원한 미군정 정책을 배경으로 하여 자연스럽게 이루어 졌다. 한민당의 추천에 의해 1946년 1월 13일에 미군정하 경기도 경찰부장에 취임한 장택상이 당장의 치안 유지를 위해서라면 일제하에서의 경찰 경력 여부에 관계없이 유능한 경찰을 적극 활용한다는 인사 정책을 썼다. 서로의 필요에 의해 즉, 권력 장악의 필요성과 권력 비호의 필요성이라는 양자의 상호 이해를 바탕으로 한민당이라는 보수 세력과 친일경찰은 더욱 밀착되어 갔던 것이다.
월남한 친일경찰들의 후견인
미군정 초기 한국 경찰의 형성을 주도한 최연이 수행한 또 하나의 역할은 북한에서 월남한 고등계 출신의 친일경찰을 대거 군정 경찰에 편입시키는 일이었다. 해방 직후 북한에서는 일제하의 조선인 경찰관들을 모두 관직에서 추방했고, 간부급 및 고등계 출신 형사들은 대부분이 구금되어 친일의 죄목으로 재판을 받았다. 그 가운데 남한으로 피신해 온 경찰관의 일부가 군정 경찰에 투신하였고, 이들은 친일 경력과 월남 경찰로서의 불리한 입지를 만회하고 자신들의 존립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서라도 좌익 타도의 선두에서 분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을 단죄한 공산당에 대한 개인적 원한도 이들이 미군정 경찰에 충성하게 된 한 원인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이들 월남한 친일경찰들은 최연과 최경진(崔慶進)을 통해 각각 조병옥(趙炳玉)과 장택상에게 추천되었다. 최경진은 일제시 평안남도 보안과장을 지낸 인연으로, 또 최연은 말단 순경 시절부터 함남 일대의 각 경찰서를 두루 거친 연고로 월남한 친일경찰들의 경찰 진출의 통로가 되어 주었다. 그 결과 경찰 내에는 월남 경찰들을 중심으로 하나의 인맥이 형성됐다. 노덕술(盧德述, 해방 직전 평남경찰부 보안과장, 월남 후 경기도 경찰부 수사과장), 이익흥(李益興, 평북 박천서장, 동대문서장), 이호우(李虎雨, 평남영원서장, 마포서장), 이하영(李夏榮, 신의주 경찰서 경부보, 경기도 경찰국장), 홍택희(洪宅喜, 평안도에서 경부보로 근무, 서울시경 사찰과 부과장, 총경), 윤우경(尹宇慶), 홍병희(洪炳熙), 김태일(金泰日, 수도청 부청장), 문석제(文錫濟, 평택서장), 김원일(金元一, 가평서장), 장영복(張永福, 경무부 공안부국장), 박사일(朴士一, 경기도 경찰국장) 등 간부급 경찰만 해도 수십 명에 이르렀다.
반민특위에 피검
해방 조선의 첫째 과제인 친일파 숙청 문제는 친일파를 암묵적으로 비호하는 미군정의 인사 정책과 이를 배경으로 한 친일 세력의 득세로 해방 후 3년이 지나도록 아무런 해결도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단독 정부 수립에 즈음해 소집된 제헌국회에서 노일환(盧鎰煥), 김명동(金明東) 등 양심적 소장의원들의 발안으로 1948년 9월 22일 '반민족 행위 특별법'이 공포되면서 친일파에 대한 본격적 검거가 시작되었다. 금력과 권력, 그리고 "반민법 주장은 다 공산당의 술책"이라는 모략 선전 등 온갖 수단을 동원한 친일 세력의 저항과 친일파에 대한 이승만(李承晩)의 옹호 태도에도 불구하고 반민법 제4조 6항 "군·경찰의 관리로서 악질적인 행위로 민족에게 해를 가한 자" 규정에 따라, 경찰 조직에 그대로 남아 있던 다수의 고등경찰과 헌병 출신들이 반민특위에 의해 체포, 구속됐다. 수도청 수사과장 노덕술의 체포를 신호로 전북 김제경찰서장 이성엽(李成燁), 전북 도경사찰과장 이언순(李?淳), 전 성동서장 유철(劉徹), 경주경찰서장 서영출(徐永出) 등 전·현직 간부와 김덕기(金悳基), 김극일(金極一), 하판락(河判洛), 노기주(魯磯柱), 양병일(楊秉一), 정성식(鄭成植), 김영호(金永浩), 김대형(金大亨), 김성범(金成範), 문용호(文龍鎬) 등 고등계 출신 형사들만도 무려 30여 명이 넘는 친일경찰이 속속 검거되고, 이들의 반민족적 행위가 연일 신문 지상에 보도되었다. 최연도 예외일 수 없었다. 일제 경찰에서 조선인 최고의 지위인 경시에 올랐을 뿐 아니라 경찰 최고의 훈장을 받았으며 미군정하에서는 군정 경찰의 산파역을 담당한 원로 중의 원로로 경찰계에서는 부인할 수 없는 친일 경력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다. 오랜 경찰 생활로 현실 정치에 기민한 감각을 지닌 최연은 반민법이 제정되려는 움직임이 있자 수도청 고문의 자리마저 내놓고 신당동 자택에서 은거하며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1949년 1월 26일, 반민특위 조사위원회의 김용희(金容熙) 조사관이 특경대원들과 함께 그의 집을 찾았을 때, 그는 머리를 숙인 채 한참을 있다가 "모든 죄과를 뉘우치며 잡으러 올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며 순순히 따라 나섰으며 특위 조사위원회의 심문을 받은 후 마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 64세였다. 당시 반민특위에 체포된 반민족 행위자들의 형무소 생활을 취재한 한 기록 《반민자 대공판기》에서는, 어느 특위 조사관의 말을 빌어 "반민자들도 최연만큼 모든 것을 고백한다면 동정이 간다"고 하여 최연이 그래도 다른 빈민자들에 비해서는 비교적 괜찮은 사람이라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감방 생활이 어떻소?" "네. 나는 세심소(洗心所)에 들어온 것으로 생각합니다. 나는 여기 들어온 날부터 오늘까지 매일 아침 5분간 선열들에 대하여 묵상하고 자기 반성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제 또 무엇을 변명하겠습니까?" "반민법을 어떻게 봅니까?" "가장 옳다고 봅니다. 국회가 법을 결정한 것이니 국민은 이를 절대로 준수하는 것이 똑바른 길이겠지요. 여기에 대하여 그 누가 무슨 이의가 있겠습니까?" 시대의 대세를 순순히 따르고자 했음인지 특유의 처세였든지 간에, 최연은 그래도 다소 자기 반성적인 태도를 보이는 데가 있었다. 한편 반민특위의 활동을 오래 전부터 못마땅하게 여기던 반민족 세력들은 반민특위가 서울시경 사찰과장 최운하와 종로서 사찰주임 조응선을 구속하자 드디어 특위 해체 공작에 나섰다. 1949년 6월 6일 이승만 정권을 등에 업은 친일경찰 세력의 기습적인 특위 조사본부 습격 사건이 있은 후 반민특위의 활동은 사실상 와해되었으며 수감된 친일파들도 하나둘 방면되기 시작했다. 일차 공판에서 10년 징역을 구형받았던 최연은 그해 7월 6일 열린 최후 공판에서 '공민권(公民權) 10년 정지'라는 가벼운 판결을 받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