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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604년, “나모아미따불” 6자는 윤회를 벗어나는 지름길 - 서산대사
선조 37년(1604)
있는 곳 : 江原道 淮陽郡 長楊面 長淵里 表訓寺 白華庵
세운 때 : 조선 인조 8년 경오(1630)에 세웠다가 1632년에 다시 세웠다
『조선금석총람』, 「조선사찰사료」, 『유점사본말사지』
회양 표훈사 백화암 청허당 휴정대사 비문
(淮陽表訓寺白華庵淸虛堂休靜大師碑文)
유명 조선국 사국일도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 서산 청허당 휴정대사 비문 및 머리말(有明朝鮮國賜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西山 淸虛堂休靜大師碑文幷序)
나는 불교 가르침을 모르므로 평소에 붇다 이야기를 즐겨 말하지 않지만, 일부러 불교를 반대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문장으로 거짓 이름을 얻어 문병文柄을 잡은 지 30년이 넘은지라 나의 명성을 좇아 시를 받으러 오는 승려들이 날마다 문 앞에 이르렀다. 그래서 식견이 높거나 시를 잘 짓는 승려를 만나면 기꺼이 만나보았으나, 이것도 짐짓 불교가 좋아서 그러는 것이 아니었다.
내 나이가 아직 어릴 때 이미 휴정休靜 스님의 명성을 들었고 그의 시가 세상에 많이 퍼져 읽히고 있었기에 늘 한번 만나고 싶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송운松雲 유정惟政은 바로 스님의 법을 전해 받은 사문이다. 그가 일본으로 건너갈 때 경성에 있는 나를 자주 방문했었고, 내가 연산燕山에 갈 때는 그가 청천강 가에서 나에게 정을 드러내 보이는 시를 주면서 스님에 관한 얘기를 흥미진진하게 밤낮이 다하도록 하였었다. 이때 스님은 이미 세상을 떠난 지 여러 해가 지난 터라 아득히 그 맑은 향을 생각하는 마음만 때로 가슴 속에 오갔다.
하루는 공무를 마치고 물러 나와 집에 홀로 앉아 있노라니, 세 승려가 밖에서 공경히 서서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불러오게 하여 보니 바로 스님의 제자인 보진葆眞, 언기彦機, 확흘矱仡이었다. 이들이 상자 속에서 책을 꺼내어 보이며 말하기를 “이는 청허당淸虛堂의 유고입니다.” 하고는 이어 두 손을 모아 예를 갖추고 말하기를, “우리 스승님의 도업은 후세에 길이 전할 만합니다. 그러나 구름산이 깊이 고요하니, 세월이 오래가면 더욱 자취가 아주 없어질까 두렵습니다. 그래서 감히 문도가 쓴 기록으로 행장을 만든 다음 경건한 마음으로 밤새워 재를 올리고 단단히 봉해 천리 길을 가지고 와서 바칩니다. 바라건대 상공相公의 글을 받아 비석에 새겨 우리 스승의 자취가 영원히 없어지지 않게 하고자 합니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그대 스승의 도는 무無로써 유有를 삼고 허虛로써 실實을 삼으니, 보존하길 기다려 보존되는 것이 아니요, 없애려 한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니 누가 썩어 없어지게 할 수 있으며, 누가 영원히 없어지지 않게 할 수 있겠소. 우리 유가(夫子)에서는 ‘도가 서로 같지 않으면 함께 일을 도모하지 않는다’ 하였으니, 스님의 도에 대해 내가 무슨 말을 하겠소” 하니, 세 승려가 일어나 대답하기를, “도는 본래 서로 같지 않은 것이니, 감히 구차히 같게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트면서 다른 것도 있고 다르면서 같은 것도 있으니, 가섭이 전한 법으로 홀로 종풍宗風을 드러내 밝히는 것은 실로 같으면서 다른 것이지만 집안에서는 효도하고 세상에 나와서는 충성하는 것은 어찌 다르면서 같은 것이 아니겠스니까. 오직 상공은 다른 것은 다르다 하고 같은 것은 같다고 하는 분입니다. 우리 스님이 살아 있을 때 늘 상공의 풍모를 흠모하셨으니, 은연중에 광과 뜻이 들어맞아 그윽한 가운데 감응하신 것이 있는 듯합니다. 부디 상공께서는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하고 거듭거듭 무릎을 꿇고 절하며 그 해가 지나도록 떠나지 않았다. 내가 그 정성을 가상히 여기고 탄식하며 “불교에서 스승에게 온 마음으로 공경하는 것이 이와 같구나” 하였다.
행장을 살펴보건대, 스님의 법명은 휴정休靜이고 자는 현응玄應이며 자호自號는 청허자淸虛子인데 묘향산에 오래 있었기 때문에 서산西山이란 호도 쓴다. 속성은 완산 최씨이며 이름은 여신汝信이다. 외조부인 현감縣監 김우金禹가 연산조燕山朝에 죄를 얻어 안릉安陵으로 귀양 가서 살았기에 그 후대는 안주安州 사람이 되었다. 아버지 세창世昌은 향시에 합격하여 기자전 참봉箕子殿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시와 술을 즐기며 살았다. 어머니 김씨는 늙도록 자식이 없었는데 하루는 꿈에 한 노파가 와서 “대장부를 배었으므로 마님을 위해 축하하러 왔습니다” 하였는데 그 이듬해 경진년(1520, 중종 15) 3월에 과연 스님이 태어났다.
3살 때 아버지가 4월 8일 저녁 술 취하여 누워 있는데 한 노인이 와서 “어린 사문을 뵈러 왔습니다”하고 두 손으로 아이를 들고 몇 마디 주문을 외운 뒤 아이의 정수를 어루만지며 “이 아이 이름을 운학雲鶴으로 지으십시오” 하였다. 그 노인은 말을 마치자 문을 나가더니 어디로 갔는지 훌쩍 사라졌다. 이 대문에 스님의 아명兒名을 운학이라 불렀다.
스님은 어릴 때 아이들과 놀 때 돌을 세워 불상을 모시고 모래를 모아 탑을 만들곤 하였다. 조금 더 크자 풍채가 빼어나고 학문에 힘써 게으르지 않았으며 지극한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겼기에 고을 원님이 귀여워하였다.
9세 때 모친이 세상을 떠났고, 10세 때에는 부친마저 세상을 떠나니, 스님은 외로운 몸으로 기댈 데가 없었다. 원님이 스님을 데리고 경성으로 가서 성균관에 넣어 주었다. 그러나 성균관이 답답하여 뜻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함께 공부하는 몇 사람과 남쪽으로 가서 두류산을 유림하며 명승지를 구경하고 경서經書를 열심히 읽었다. 그러나 늘 일찍 부모를 잃은 슬픔에 잠겼고 더욱 삶과 죽음에 대한 이치를 깊이 느끼게 되었다. 그러다 홀연 선가의 돈오법을 알고 드디어 영관 대사靈觀大師에게 설법을 듣고 숭인 장로崇仁長老 아래서 머리를 깎았다. 그리고 7, 8년 동안 명산을 두루 다니며 수행하고 30세에 선과禪科에 합격하였다. 대선大選을 거쳐 선교양종 판사禪敎兩宗判事 지위에 이르렀다.
하루는 스님이 탄식하며 “내가 출가한 본의가 어찌 여기에 있으리오.” 하고는 즉시 인끈(印綬)을 풀어 도로 받치고는 지팡이 하나를 짚고 금강산으로 돌아와 「세 가지 꿈 이야기(三夢詞)」를 지었는데,
主人夢說客 (주인몽설객) 주인 손님에게 제 꿈 얘기하고
客夢說主人 (객몽설주인) 손님 주인에게 제 꿈 얘기하네
今說二夢客 (금설이몽객) 이제 두 꿈 얘기를 하는 나그네도
亦是夢中人 (역시몽중인) 이 역시 꿈속의 사람이어라.
하고, 또한 향로봉에 올라 시를 지었는데, 시에 말하길
萬國都城如垤蟻 (만국도성여질의)
만국 서울은 개미집 같고
千家豪傑若醯鷄 (천가호걸약혜계)
천가의 호걸은 초파리 같아라.
一窓明月淸虛枕 (일창명월청허침)
창에 가득 밝은 달빛 베고 누우니
無限松風韻不齊 (무한송풍운부제)
가없는 솔바람 소리 곡조 갖추었네.
하였다.
이로부터 더욱 명성과 재능을 감추고 산문을 나가지 않으니, 도를 물으러 오는 이들이 날로 많아졌다.
기축년(1589, 선조 22) 옥사獄事 때 요승 무업無業이 거짓 고발하여 스님이 체포되었다. 그러나 스님이 진술하는 말이 뚜렷하고 들어맞으니, 선조가 스님의 억울한 정상을 알고 바로 놓아 주면서 스님이 쓴 시를 가져오게 하여 보고는 감탄하였으며, 몸속 먹으로 대나무를 그려 내리고 시를 읊어 바치게 하였다. 스님이 바로 절구絶句를 바치니 선조도 어제御製 절구 한 수를 내리고 상을 매우 두터이 주고 위로하여 산으로 돌려보냈다.
임진년(1592)에 임금 수레가 왜란을 피해 서쪽으로 가서 의주(龍彎)에 머무르니, 스님은 바로 긴 칼을 비껴들고 나아가 뵈었다. 이에 선조가 “세상의 난리가 이와 같은데 그대가 구제할 수 있겠는가” 하니, 스님이 눈물을 흘리며 명을 받아 말하기를, “국내의 승려 가운데 늙고 병들어 군대에 들어갈 수 없는 자들은 신이 명령하여 자기 절에서 향을 사르고 축원하여 신명의 도움을 빌게 하고 그 나머지 승려들은 신이 모두 거느리고 군진에 달려가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하니, 선조가 의롭게 여겨 스님을 팔도십륙종 도총섭八道十六宗都摠攝에 임명하는 한편 지방관들을 타일러 스님을 예우하게 하였다.
이에 송운宋雲은 7백 명이 넘는 승려를 거느리고 관동에서 일어났으며, (제자) 처영 處英은 1천 명이 넘는 승려를 거느리고 호남에서 일어났으며, 스님은 문도와 스스로 모인 승려 1천 5백 명을 거느렸다. 그리하여 모두 5천 명이 넘는 승군이 순안順安 법흥사에 모여 천자(명나라) 군대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명성과 위세를 세웠으며 모란봉 전투에서 죽이고 사로잡은 적이 많았다. 이에 명나라 군사가 드디어 평양을 빼앗고 송도를 되찾자 경성의 적들이 밤중에 달아났다. 스님은 용사 100명을 보내 임금 수레를 맞이하여 서울로 돌아오게 했다. 명나라 제독 이여송이 서찰을 보내 칭찬하였는데 그 가운데 “나라를 위해 적을 쳐 없애는데 충성이 해를 꿰뚫으니, 공경하여 우러러본다”라는 말이 있었고, 또 다음과 같은 시를 보내주었는데, 그 시에
無意圖功利 (무의도공리) 공리를 도모할 뜻 없이
專心學道仙 (전심학도선) 오로지 오롯이 도만 닦더니
今聞王事急 (금문왕사급) 이제 왕의 일 급하단 말 듣고
摠攝下山嶺 (총섭하산령) 총섭이 산을 내려오셨구려.
하였다.
그리고 여러 (명나라) 장수들도 다투어 서찰과 선물을 보내왔다. 적이 물러나자 스님이 아뢰기를, “신의 나이 여든에 가까워 근력이 다했으니, 군대 일을 제자 유정惟政과 처영處英에게 맡기고자 합니다. 그리고 신은 도총섭 인끈을 반납하고 묘향산 머물던 곳으로 돌아갈까 합니다” 하니, 선조가 그 뜻을 가상히 여기고 그 늙음을 안타깝게 여겨 국일도대선사國一都大禪師 선교도총섭禪敎都摠攝 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 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란 호를 내렸다.
이때부터 스님의 의의와 도는 더욱 높아지고 명성은 더욱 무거워져 두류산, 풍악산, 묘향산 같은 곳을 오가매 제자가 1천 명 넘었으니 이 가운데 이름이 널리 알려진 제자가 70명이 넘었었다.
갑진년(1604, 선조 37) 정월 23일, 묘향산 원적암圓寂庵에 제자들을 모아 놓고 향을 사르고 가르침을 설한 뒤 자신의 영정 뒤에,
八十年前渠是我 (팔십년전거시아)
80년 전 사람이 나이더니
八十年後我是渠 (팔십년후아시거)
80년 뒤 내가 저 사람이네.
라고 쓰고, 송운과 처영에게 부치는 편지를 쓴 뒤 바로 가부좌를 한 채 돌아가시니, 나이는 85세이고 법랍은 67세였다. 기이한 향기가 방안에 가득하여 3 · 7일이 지난 뒤에야 사라지기 시작하였다(異香滿室, 三七日後始歇).
제자 원준圓峻 · 인영印英 등이 다비하여 영골靈骨 1조각과 사리 3알을 얻어 보현사와 안심사에 부도를 만들어 모셨으며, 또 제자 유정惟政 · 자휴自休 등이 영골 1조각을 금강산으로 모시고 가서 사리(神珠) 몇 알을 얻어 유점사 북쪽에 돌 종을 세워 모셨다.
우리 동방은 태고 화상太古和尙이 중국 하무산霞霧山에 들어가 석옥石屋의 법을 이어받아 환암幻庵에게 전하고, 환암은 구곡龜谷에게 전하고, 지엄은 영관靈觀에게 전하고, 영관은 서산西山에게 전하였다. 이것이 실로 임제臨濟의 정파正派인데 서산이 홀로 그 종지를 얻었다 한다.
스님의 저술로는 『선가귀감禪家龜鑑』, 『선교석禪敎釋』, 『운수단雲水壇』 각 1권과 『청허당집淸虛堂集』 8권이 세상에 나와 있다.
아, 스님의 도의 깊고 얕음은 내가 자세히 모르지만, 스님이 남긴 글은 내가 이미 다 읽어보았다. 시를 보매 스님이 스스로 깨달아 얻은 뜻을 알고 있고, 글을 보매 스님의 높은 경지를 알 수 있었다. 비록 말을 글자로 만든 것이 바르고 익숙하지 않은 곳도 있으나 글자마다 살아 있고 구절마다 날아 움직여 마치 옛 칼이 칼집에서 나오매 서늘한 바람이 이는 듯하다. 왕왕 개원開元 · 대력大曆의 시와 매우 비슷한 것도 있으니, 불가佛家의 혜휴惠休 · 도림道林 정도는 말할 것도 없다.
더구나 환난을 만나서도 그 지조를 잃지 않아 감옥에 갇힌 상태에서 임금의 인정을 받고 대우를 받았다. 임금이 시 쓴 것을 스스로 청해서 보고 시를 지어 바치게 한 영광과 어필로 시를 쓰고 그림을 그려서 내려 준 것은 참으로 지난 옛날에 없던 각별한 돌봄과 사랑이었다. 그리고 국난을 당하자 의병을 모아 천자 군대를 도와 서울을 되찾고 임금 수레를 맞이하여 서울로 돌아와서는 곧 인끈을 도로 바치고 옷깃을 떨치며 산으로 돌아갔으니, 그 나고 드는 절개는 옛사람에 비겨도 못한 점이 없다.
대컨 선비가 세상에 태어나 누군들 당시 임금에게 돌봄과 사랑을 받고 공명을 세워 스스로 높이 드러내고 싶지 않겠는가. 그러나 재능을 가지고 펼치지 못하고 죽을 때까지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그런데 스님은 일개 검은 옷을 입은 신분으로 이름이 대궐에 알려지고 명성이 후세에 전해졌으니, 선문 禪門에서 이러한 공로를 이룰 수 있을 줄 누가 생각했으랴. 이와 같은 분에 관한 비문 글(銘)을 쓰니, 나의 붓에 부끄럽지 않다.
그 글월은 다음과 같다.
金天之西 (금천지서) 금천 서쪽
薩水之濱 (살수지빈) 살수 물가에
淑氣亭毒 (숙기정독) 맑은 기운 모여
乃降眞人 (내강진인) 참사람 태어났네.
屳婆抱送 (선파포송) 신선 노파 안아 보내고
釋老提携 (석노제휴) 불가 노인 잡아 이끌고
天開寶光 (천개보광) 하늘 보배 빛 열어주고
帝借金鎞 (제차금비) 하느님 금비녀 주었구나
靈符妙契 (령부묘계) 신비한 꿈 징조와 꼭 맞아
秀骨超凡 (수골초범) 빼어난 골상 예사롭지 않으니
蚌珠出海 (방주출해) 진주가 바다에서 나온 듯
龍鏡發涵 (룡경발함) 용궁 거울이 함에서 나온 듯.
失怙無依 (실호무의) 어버이 여의고 기댈 데 없어
千里負笈 (천리부급) 천 리 길 공부하러 가
淹貫諸家 (엄관제가) 여러 대가 두루 많이 읽어
卓然自立 (탁연자립) 의젓하게 스스로 우뚝 섰어라.
乃超覺路 (내초각로) 이에 깨달음 길로 들어서
遂登法席 (수등법석) 마침내 스승 법석에 오르고
祖月重輝 (조월중휘) 조사의 달 다시금 빛남에
群婚一廓 (군혼일확) 중생 어리석음 한바탕 걷혔네.
餘事詩聖 (여사시성) 틈내 지은 시 명성이
上徹楓宸 (상철풍신) 위로 대궐로 들려
殊恩異渥 (수은이악) 남달리 도타운 성은이야말로
榮耀千春 (영요천춘) 영광이 천추에 길이 빛나도다.
身雖巖穴 (신수암혈) 몸은 바위굴에 있어도
忠不忘君 (충불망군) 충성은 임금을 잊지 못하네
遇難一呼 (우난일호) 난리를 만나 한 번 부르자
義旅如雲 (의려여운) 의병 무리 구름처럼 모였네.
協助天戈 (협조천과) 명나라 군사를 도우며
憑仗靈祐 (빙장령우) 붇다 도움에 기댔으니
驅除腥穢 (구제성예) 더러운 오랑캐를 몰아내고
福我寰宇 (복아환우) 우리 땅과 집이 복을 얻었노라.
出而濟世 (출이제세) 나가서 세상을 건지고
名動華夷 (명동화이) 이름이 화이를 흔들었으며
入而修定 (입이수정) 들어와 선정을 닦음에
法闡宗師 (법천종사) 종사의 가르침을 드러냈네.
在掌靈珠 (재장영주) 손바닥 안 신령한 구슬에서
虛明自玩 (허명자완) 거짓된 빛을 스스로 즐기고
倘來榮辱 (당래영욕) 밖에서 얻은 영광과 모욕
如夢一幻 (여몽일환) 한바탕 꿈과 허수아비로 여겼지.
瞻彼妙香 (첨피묘향) 저 묘향산 굽어보고
與夫金剛 (여부금강) 금강산과 함께 하니
寔唯淨界 (식유정계) 이야말로 맑은 세계라
宜我法王 (의아법왕) 이것이 우리 가르침 왕이리라.
來往諸天 (래왕제천) 여러 하늘을 오가니
百靈護持 (백령호지) 온갖 신령 지켜 주고
承化返眞 (승화반진) 몸 바꾸어 참으로 돌아가니
去又何之 (거우하지) 간 곳은 또 어디인가.
功紀人間 (공기인간) 공은 인간 세에 새겨지고
道在山中 (도재산중) 도는 산속에 남아 있으니
一片貞珉 (일편정민) 이 한 조각 아름다운 돌이
萬古英風 (만고영풍) 만고에 빼어난 모습이로다.
卍 보정의 꼬리말
서산 대사(1520~1604)는 법안종과 임제종을 이어받은 선사지만 선(徑截門), 교학(圓頓門), 염불(念佛門) 같은 3가지 법문으로 수행법을 체계화하였다. 이는 앞에서 본 보조 · 나옹 같은 선사들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서산 대사는 “선은 붇다의 마음이고, 교는 붇다의 말씀이다”라는 선교관禪敎觀을 가지고 근기가 높은 사람은 선을 통해 단박에 깨달음(頓悟)이 가능하지만, 근기가 낮은 사람은 붇다의 가르침을 배우며 차츰 깨달음의 단계로 가야 한다(漸悟)는 근기론을 내세웠다.
서산 대사의 3문 가운데 염불관은 『선가귀감禪家龜鑑』에 잘 나타나 있다.
“염불이란 입으로 부르고(頌) 마음으로 염念하되 염念을 잃고 부르기만 하면 도를 얻는데 이득이 없다(念佛者 在口日誦 在心日念 徒誦失念 於道無益)”는 구절에서 이런 주를 단다.
‘(나모)아미따불’ 6자 법문法門은 반드시 윤회를 벗어나는 지름길이다. 마음은 붇다의 경계와 묶여 있으므로 늘 기억하고 지녀서 잊지 않게 하고, 입은 붇다의 이름을 부르되 뚜렷하여 흐트러짐이 없으면 비로소 마음과 입이 서로 통하게 되는 것이니, 이름하여 염불이라고 한다.
서산 대사는 일반적으로 마음만을 중시하는 선사들의 염불에 대한 비판을 열거한다.
파헤쳐 논한다. 5조(홍인선사)가 이르기를 ‘본래의 참된 마음을 지키는 것이 시방의 여러 붇다를 염하는 것보다 뛰어나다’라고 했다. 육조(혜능선사)는 이르기를 ‘늘 아미따불을 염하더라도 나고 죽음을 면하지 못하지만, 나의 본심을 지키면 곧 피안에 이른다’ 했으며, 또 이르기를 ‘부처는 성품 속에서 지어야지, 몸 밖에서 구하지 말라’고 했으며, 또 이르기를 ‘정신이 홀린 사람은 염불하여 왕생하기를 구하지만, 깨달은 사람은 스스로 그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할 뿐이다’라고 했으며, 또 이르기를 ‘대개 중생이 마음을 깨달으면 스스로 제도 되는 것이고, 붇다 중생을 제도할 수 없는 것이다(등등)’라고 했다.
서산 대사는 이런 극 상근기 선사들의 말을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한 사람이 그대로 외어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이론적으로는 그렇지만 실제 아미따불과 서녘 극락은 분명히 존대한다고 솔직하게 바른말을 한다.
이치로 보면 그렇다고 할 수 있으나 실제 극락세계는 있고 아미따불 48가지 큰 다짐과 바람도 존재한다. 무릇 (아미따불 이름을) 10번만 부르면 이 원력을 통해 연꽃 태 속에서 태어나 쉽게 윤회를 벗어날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 삼세의 모든 붇다가 한결같이 말씀하셨고 시방의 모든 불 · 보살들도 다 같은 바람으로 극락에 가서 태어나셨다. 예나 지금이나 극락 가서 태어난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 전하고 있다. 모든 수행자는 이 뜻을 오해하지 말고 힘쓰고 힘쓸지어다.
특히 서산 대사의 유심정토론에 대한 비판은 서릿발 같다.
“내 마음이 정토이므로 정토에 왕생할 필요가 없다(自心淨土 淨土不可生).” , “내 자성이 아미따불이므로 아미타불을 친견할 필요 없다(自性彌陀 彌陀不可見).”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이 말은 얼핏 그럴듯하지만, 사실은 틀렸다.
❶ 저 붇다는 탐하지 않고 화내지 않지만, 나도 과연 탐내지 않고 화내지 않을 수 있는가?
❷ 저 붇다는 지옥을 바꾸고 손바닥 뒤집듯 연꽃으로 만들 수 있지만, 업력 때문에 늘 지옥 떨어질까 두려워하는 내가 감히 연꽃으로 바꿀 수 있는가?
❸ 저 붇다는 가 없는 세계를 마치 눈앞에서 보듯 하는데 나는 앞에 벽만 가려도 볼 수 없으니, 하물며 시방세계를 어찌 눈앞에 보겠는가?
그러므로 사람들 성품이 비록 붇다 인지 모르나 행동은 바로 중생이라, 그 모습과 쓰임 을 논한다면 하늘과 땅 차이다.
(당나라 화엄종 5대 조사) 규봉 선사가 “만약 실제로 단박 깨쳤다(頓悟) 할지라도 결국은 차츰 닦아가야(漸行) 한다.”라고 하였으니 참으로 옳은 말씀이다.
그러면 다시 ‘자기 성품이 아미따불(自性彌陀)’ 이라는 사람에게 물어보자.
❹ 어찌 날 때부터 된 석가여래와 저절로 생긴 아미따불이 있는가?
모름지기 스스로 헤아려 보면, 사람이라면 어찌 스스로 알아내지 못하겠는가!
❺ 목숨이 다해 삶과 죽음이란 괴로움과 맞닥트렸을 때 과연 거침새 없을 수 있는가?
만약 그렇지 못한다면 한때 만용을 부리다가 길이 악도惡道에 떨어지는 후회막급의
누를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아이들도 알 수 있는 서산 대사의 쉬운 질문 5개는 참으로 폐부를 찌르는 화살이다. 고승들의 법거량이나 외어 들먹이는 덜 익은 선사들에게는 이보다 더 딱 들어맞는 화두가 없을 것이다. 이 내용은 너무 중요해 엮은이가 잘못 옮기는 부분이 있을 수 있어 원문도 함께 싣는다.
서산 대사의 위대함은 많은 사람이 선사로 떠받들고 있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경계를 찬찬히 들여다보고 그것을 솔직하게 드러냈다는 데 있다.
마명이나 용수는 다 (대승의 종지를 세운) 조사이지만, 모두 ‘극락 가서 태어나라’ 라고 뚜렷하게 말씀하셨고 마음 깊이 권하셨는데, 내가 누구라고 감히 (극락) 가서 나길 바라지 않겠는가?
여기서 서산 대사의 믿음(信) 바람(願)이 뚜렷이 드러났고, 꿈에도 아미따 붇다를 염했다는 평소 염불수행(行)은 다음 시에서 드러난다.
合掌向西坐 (합장향서좌) 합장하고 서방을 향해 앉아
應心念彌陀 (응심념미타) 마음을 모아 아미따붇다 염하네.
平生夢想事 (평생몽상사) 평생 꿈속에서도 생각하는 것
常在白蓮花 (상재백련화) 늘 흰 연꽃 속에 머무는 것이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서산 대사는 극락에 갈 밑천인 아미따 붇다와 극락에 대한 믿음(信), 극락에 가겠다는 바람(願), 염불수행(行)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행장에 “기이한 향기가 방 안에 가득하여 3 · 7일이 지난 뒤에야 사라지기 시작하였다(異香滿室, 三七日後始歇).”라고 구절이 마지막으로 ‘믿음(信)+바람(願)+염불(行)=극락 가는 영험(證)’이라는 완벽한 공식을 다 채운다.
3 · 7일 이어진 향기는 대사의 향기이면서 바로 아미따불과 성인들이 오셨을 때 남긴 것이다. 그러므로 대사가 이미 확철대오를 얻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내려왔을 것이고, 아직도 생사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면 극락에서 못다 한 수행을 편안하게 이어 가고 있을 것이다. 서산 대사는 말년에 임진왜란에 참전하여 싸우면서 살생을 피할 수 없었으므로 상당 부분 업을 가지고 극락에 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말년에는 자신은 물론 전쟁으로 참화를 겪은 많은 중생을 위해 염불하고 천도하면서 본인도 극락 가기 위해 염불했을 것이고, 마지막에 아미따불의 영접을 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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